꼭 봐야 할 한국영화, 정형돈 x 한예리 편 : 삼포가는 길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한예리, 정형돈
* 본 영화글은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영화+글’ 시리즈 3: 영화 비평 쓰기> 과제 선정작입니다. 1. ‘아빠는 빅가든 하나 만들 거야’ 제이콥(스티븐 연)이 무성히 자란 풀 가운데 서서 그의 딸과 아들에게 선언하듯 외친다. 특히 ‘빅가든’이라는 단어를 뱉는 순간, 그의 유창한 발음 덕분에 이 장면은 오랫동안 관객의 기억에 남는다. 이 장면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 미나리 >에는 그가 유창한 영어 실력을 숨기려다 이내 관객들에게 들키고 마는 장면들이 몇몇 있다. 원어민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한국어는 자연스러운 편이다. 다만 한국어보다 완벽한 영어 발음으로 인해 그의 언어적 정체성이 탄로나는 것이다. 이처럼 <미나리>는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발생시킨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연히 발생한 이러한 이질감은 <미나리>가 전하는 주제와도 분명히 닿아있다. <미나리>는 한국인 이민자 1세대의 미국 정착기이다. 이들의 서사는 동양인 이민자들이 겪은 설움으로, 또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했던 모든 이민자들의 고통으로 연이어 확장되며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민자들은 낯선 문화를 견디며 끊임없이 섞이는 과정을 겪어왔을 것이다. 언어는 그 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벽이었을 테니, 어쩌면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잠시 마주하는 이질감은 이민자들이 항상 경험했던 당황스러운 순간의 단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것을 극복해나간다. 화투나 한약처럼 ‘한국적인 것’이 등장하고, 처음에는 제이슨(앨런 김)이 이를 거부한다. 이내 순자(윤여정)의 설득이 이어지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식이다. 정이삭 감독은 이렇게 ‘낯선 땅’과 ‘한국적인 것’을 섞어나간다.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은 이 섞임의 과정 안에 있다. 하지만 이내 물음이 생긴다. 이 섞임의 과정 뒤에 ‘무엇이 소멸되고 무엇이 남는가’라는 질문이다. 연일 이어지는 해외 영화제 수상 소식은 이 영화가 전하는 희망에 특별한 울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은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은폐되는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모니카(한예리)가 달리는 차 안에서 운전 중인 남편에게 푸념하듯 말한다. ‘일요일엔 그냥 일하는 게 낫겠어’. 두 사람의 얼굴은 스크린에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제이콥의 운전하는 오른 손과 백미러에 비친 그의 두 눈, 그리고 보조석에 앉은 모니카의 뒷모습이 전부이다. 연이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제이슨과 순자의 모습이 보인다. 함께 동행한 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장면은 제이슨의 시선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짧은 장면의 시선과 영화 전체의 시선은 일치한다. <미나리>는 제이슨이 바라 본 그의 가족사(史)인 것이다. 차 안의 시선은 차창 밖으로 향한다. 미나리 가족의 조력자 폴(윌 패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간다. 제이콥이 차를 세우고 폴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폴은 ‘십자가’가 자신의 교회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오랜만에 교회에 다녀오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차 안에서 푸념을 하고 있는 모니카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여기서 또다시 물음이 생긴다. 미나리 가족에게 폴은 어떤 존재일까. 특히(어쩌면 감독의 눈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폴은 어떤 존재로 비춰질까. 돌아온 주일에 제이콥과 모니카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 앤과 제이슨이 덩그러니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 목사의 설교가 이어진다. 그의 뒤에는 십자가가 걸려있다. 앤마저 나가고 제이슨은 지루한 표정으로 혼자 남는다. 이어지는 장면은 폴이 자신의 교회인 십자가를 지고 마을을 지나는 장면이다. 파란색 하늘과 초록색 언덕이 정확히 1:1로 화면을 가르는 이 전경 샷은 유난히 수평적인 구도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버스 차창 너머로 폴을 발견한 제이슨이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제이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버스 안의 아이들이 폴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폴에게 부여한 정체성은 한마디로 기독교인(Christian)이다. 그는 첫 등장부터 매번 ‘예수의 이름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폴(Paul)의 이름이 성경 속 인물인 바오로(Paul)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주일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고행을 재현하는 그의 모습은 유럽의 끝까지 건너가며 선교에 헌신한 바오로 사도의 삶과 닮았다. 미국은 기독교(Protestant) 정신 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또한 미국은 다민족이 공생하는 다양성 국가이기도 하다. 아칸소 교회는 마을 주류의 공간이며, 동시에 이주민들을 수용하는 공존의 장이다. 모니카는 한인교회에서 상처받은 기억이 있는 듯하다. 병아리 감별소에서 만난 한국인 동료는 그녀에게 ‘여기까지 온 한인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아칸소 교회는 미나리 가족을 열렬히 환영하지만 모니카는 결국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반면 폴은 마을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아이들이 교회버스에서 폴을 조롱하는 장면은 단번에 그가 처한 마을 내 위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감독은 정작 미나리 가족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교회 아닌 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감독은 그를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은 주일에만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의 이웃에게 끊임없이 건너가는(Cross)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 ‘십자가 아저씨’ 폴은 감독이 내세우는 이상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3. 영화는 폴에 대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 가족은 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미나리 가족의 조력자로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함에도 그에 대한 소개를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다. 그는 우연히 영화 안으로 투입되고선, 할 일을 마치고 홀연히 퇴장한다. 아마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폴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영화 안에서 그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인 듯하다. 그는 감독의 말을 전달하는 일종의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미나리>에 대한 현지의 반응을 살펴보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영화’라는 평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진실을 들춰보면 이민자들의 정착 역사에 폴과 같은 이상적인 조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종차별로 얼룩진 이방인 혐오의 역사가 현실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 안에서 폴은 가장 이질감이 느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인위적인 말과 행동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 초반부의 이질감의 본질이 ‘낯선 땅’과 ‘한국적인 것’ 사이의 마찰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감독은 의도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소멸시킨다. 한국에서 건너 온 친정 엄마 ‘순자’는 ‘한국적인 것’의 원천이다. 하지만 이내 중풍과 같은 병에 걸려 정신이 쇠약해진다. 순자는 천장에서 이상한 것을 본다. 뇌졸중 환자에게 발견되는 흔한 섬망 증상이다. 모니카는 이를 보고 다름 아닌 폴에게 퇴마 의식(Exorcism)을 부탁한다. 이 괴이한 의식은 감독이 폴에게 부여한 최종 임무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감독은 <미나리>를 통해 줄곧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익숙함을 벗어나 낯선 것에 몸을 섞어라.’ 이를 위해 감독은 제이슨의 ‘미국인’ 친구 손에 화투장을 쥐어주고, ‘한인’들을 위해 재배한 제이콥의 채소들을 불태운다. 또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미나리 가족에게 친절하지만, 한인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설정의 정점에 있는 존재가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폴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민자들의 현실 속에 집집마다 헌신적으로 그들을 조력하는 폴과 같은 비주류 백인 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폴’의 존재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또한 이방인들이 낯선 땅에 섞이며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차별과 수모를 고작 ‘한인들 사이의 따돌림’ 정도로 축소시킨다. 감독은 무엇을 위해 이러한 허구적인 존재 ‘폴’을 창조하였을까. 그리고 감독이 설치한 이 영화적 장치는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을 배제시키는가. 어쩌면 뇌졸중에 걸린 순자가 천장에서 봤던 ‘헛것’은 감독이 창조한 허상 ‘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나리가 개봉한 지 6개월이 지났다. 결국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의 종착역은 ‘미국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이방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독의 꿈은 미국의 가장 권위있는 영화 시상식에서 현실이 되었다. 영화의 밖에서 영화의 이데아(Idea)가 실현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 미국 내 동양인 혐오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유난히도 미국 땅에서 열렬한 환대를 받은 영화 <미나리>. 이 영화가 전하는 희망은 진정 보편적인가, 아니라면 그것은 시기상 ‘그들’이 간절히 듣고 싶었던 환상은 아니었을까.
제이콥( 스티븐 연 )과 모니카( 한예리 ) 부부는 미국 남부 아칸소의 외딴 공장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한다. 그들은 하루 종일 병아리의 항문을 확인한 뒤 성별을 구분해 색이 다른 통에 넣는 일을 한다. 성별이 수컷이거나 다친 병아리는 별다른 고려 없이 소각장으로 보내진다. 끊임없이 잿빛 연기를 뿜어내는 병아리 소각장 앞에서 제이콥은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도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거야.” 제이콥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건, 이들 부부의 일상에 비상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 미나리 >는 서서히 코너에 내몰려 결국 인적 없는 미국 남부 시골 마을까지 오게 된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를 다룬다.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 그리고 부부의 딸 앤과 아들 데이빗은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까 싶은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한 트레일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동안 우리가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한국계 미국인 디아스포라 영화들은 LA처럼 한인 커뮤니티가 잘 형성된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 고요하고 황량한 벌판, 이제까지 한국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거의 탐험해본 적이 없는, 오히려 개척을 테마로 하는 서부영화에 더 잘 어울릴 법한 풍경 속에서 디아스포라 가정의 서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가 <미나리>에 대한 첫 번째 궁금증이었다. 제이콥이 “미국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라고 말하는 아칸소의 초원은 미국행을 택한 뒤 10여 년간 실패만 거듭해온 한국계 미국인 가족이 마지막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보고자 하는 장소다. 촬영감독 라클란 밀네가 포착한 아칸소의 따스한 햇빛과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 위를 바쁘게 오가는 한국계 미국 배우 스티븐 연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나리>는 묘한 울림을 준다. 품었던 희망들이 하나씩 좌절되며 구석까지 내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의지(그것은 제이콥이 굳이 미국 채소가 아닌 한국 채소를 미국 땅에 재배하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와 애환이 아칸소의 정적이고 서정적인 풍경과 어우러져 강렬한 정서적 감흥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틀림없이 절제된 프로덕션 속에서 감정의 진폭을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로 완성된 영화의 스케일보다 훨씬 더 거대한 것을 다루는 영화처럼 느끼게 만드는 리 아이삭 정 감독의 연출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미나리>는 가족이라는 우주를 통해 그들이 속한 세계를 조망한다. 식탁에서, 일터에서, 가족이 발 딛고 서 있는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건들은 문화와 세대의 차이, 이민자 가정의 좌절과 희망, 사랑과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가족 구성원에 따라 같은 사안을 대하는 시각이 달라지고 어떤 구성원이 누구와 마주하느냐에 따라 대변하는 문화적, 사회적 층위가 달라지는데, <미나리>는 그런 점에서 영화의 시선이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는지 살피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일례로 제이콥의 아메리칸 드림은 모니카에겐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남편이 “아빠가 한번쯤 해내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프라 없는 시골 마을로의 이사를 결심할 때, 현관문이 없는 새 집의 상태를 근심하는 것, 심장이 좋지 않은 아들을 위한 병원이 한 시간 이상 운전해야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음을 우려하는 건 전부 아내 모니카의 몫으로 남겨진다. 같은 꿈을 꾸며 택한 미국행이었으나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여전히 작동 중인 한국식 가부장제가 어떻게 부부의 마음을 갈라놓는지, 영화는 관찰자의 위치에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배우 한예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이민자 여성의 초상을 사실적이고도 디테일한 필치로 연기한다. 마음 둘 곳 없는 딸을 위해 한국에서 이민 온 모니카의 어머니 순자( 윤여정 )와 손자 데이빗은 <미나리>를 본 이들이 가장 오랫동안 사랑할 만한 조합이다. 집에서건 밖에서건 한국말을 쓰며 외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모니카와 달리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데이빗은 외양은 한국인이나 이미 자신도 모르는 새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소년이다. 그런 그에게 (미국 할머니들처럼) 요리도 안 하고, 욕설을 입에 달고 살며 ‘한국 냄새’가 나는 외할머니는 납득할 수 없는 존재다. 영화는 순자와 데이빗의 에피소드를 통해 일상적으로 정체성의 충돌과 혼란을 겪고 있는 이민 2세대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외신으로부터 2021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한 여우 조연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배우 윤여정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를 한다. 그가 연기하는 순자는 동서양을 막론한 장년층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낌없이 베풀고 인자한 모습의 할머니와 거리가 멀다. 호불호가 명확하고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며 무심한 듯 세심하게 삶의 연륜으로부터 비롯된 지혜를 가족들에게 건네는 ‘쿨’한 할머니의 존재는 전세계 매력적인 장년층 여성 캐릭터의 정전에 기꺼이 순자를 추가할 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다. 먹고사는 걱정으로 인해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력조차 없는 이민자 가정의 척박한 상황을 조명하는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과 관객이 숨을 돌릴 틈을 마련하는 것 또한 외할머니 순자, 그리고 그를 연기하는 배우 윤여정의 몫이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 감독 리 아이삭 정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다. 데뷔작 < 문유랑가보 >부터 <미나리>에 이르기까지 줄거리나 대사로 구현할 수 없는 정서적인 순간들을 특유의 시적 영상으로 구현해온 리 아이삭 정 감독에게 <미나리>는 유년 시절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되어 있어 더욱 특별한 영화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코리안 아메리칸 커뮤니티가 있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아칸소)에서 성장했다. 스스로를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기보다 코리안/아메리칸이라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이 그 자신을 관찰자의 자리에 위치하게 하는 듯하다. 내전의 불씨가 사라지지 않은 르완다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소년과 그와 동행하는 원수지간 부족의 친구를 조명한 <문유랑가보>에서부터 리 아이삭 정의 관심은 경계의 인물들, 소수자들, 다양한 층위가 충돌하는 누군가의 내면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경계에 위치한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아시아계 감독이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지난 2018년 주류 미국 영화산업에 선풍적인 박스오피스 기록을 남기며 주목받았던 <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 < 서치 > 등의 영화와는 또 다른 의미의 인상적인 족적으로 기억될 듯하다.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은 영화 <미나리>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긴밀한 결속과 유대로 이어진다. 결국 이 영화는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민자 가족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에, 기댈 곳은 서로의 어깨 뿐이기에 누구도 이탈하지 않도록 각자의 손을 더욱 단단하게 잡는 이야기다. 집안 곳곳에서 가족들이 맺는 다양한 관계와 유대의 순간들을 조명하며 감정의 폭을 촘촘히 쌓아가다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감정을 폭발시키는(윤여정의, 윤여정에 의한, 윤여정을 위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의 진폭을 확장시킨다. <미나리>에서 사사롭게 마음이 갔던 대목은 모든 것을 잃은 밤, 온 가족이 바닥에 누워 함께 잠을 청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고된 현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오늘 밤 아무도 잃지 않았음에 안심하며 또 다른 미래를 위해 힘을 비축하는 이들의 근성이야말로 그 어떤 설명이나 수식 없이 한 가족이 거쳐온 이민자로서의 삶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낯선 땅에 뿌리내리고 풍성하게 자란 미나리처럼, 이 가족의 아메리칸 드림 또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작은 희망을 <미나리>는 안겨주고 있다.
‘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어요? 물론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영화 < 최악의 하루 >( 김종관 , 2016) 속 은희( 한예리 )는 무명 배우이다. 늦여름의 오후, 연기 수업을 듣고 나온 은희는 일본에서 와 길을 헤매는 작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나 도와준다. 연인 현오( 권율 )의 재촉에 은희는 배우인 그의 촬영지 남산으로 향해 그를 만나지만 고운 말이 오가는 평범한 데이트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참 연애사를 헤집으며 서로를 탓하다가 달콤한 연인 행세를 좀 하려는가 싶은 찰나, 현오는 은희를 다른 여성의 이름으로 부르고 만다. 화가 난 은희는 현오를 뒤로하고 남산에서 내려가고, 거기에는 은희의 트윗을 보고 멋대로 찾아온 운철(이희준)이 은희를 기다리고 있다. 은희가 현오와 헤어졌을 때 만났던 운철은 은희에 대한 미련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도, 뻔뻔하게 전 부인과의 재결합을 알린다. 운철은 오랜만에 겨우 만난 은희를 보내주지 않으려 하지만 은희는 적당히 둘러대며 다시 현오를 만나러 남산에 오른다. 그러나 또다시 은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운철을 마주치고, 현오와 셋이서 마주치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은희는 가지 않으려는 운철을 사정하다시피 해서 돌려보낸다. 물론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고, 현오와 함께 있는 은희를 운철은 다시 한번 찾아온다. 결국 맞닥뜨리게 된 세 명, 서로가 은희의 연인이라 주장하는 현오와 운철 사이에서 은희는 그저 힘없이 길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그들이 떠난 뒤, 은희는 앞서 연기 수업에서 배운 대사를 체화해서 조용히 읊어본다. ‘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최악의 하루>라는 제목은 꽤 직관적이다. 한 앵글에 잡히는 은희, 현오, 운철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쉴 테다. 영화는 료헤이의 내레이션으로 막을 연다. ‘여행지에서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은희의 하루가 료헤이가 문득 생각해낸 허구의 이야기라면, 이는 그가 곤경에 빠진 여성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생각해낸 것처럼 보인다. 보통의 액자식 구성(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끼어들어 있는 구성)은 내부 이야기와 외부 이야기의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최악의 하루>는 외부 이야기의 화자처럼 보이는 료헤이의 내레이션과 그의 모습이 잠깐 등장한 후, 바로 은희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료헤이는 자연스럽게 은희의 하루에 녹아들어 오늘 하루 동안 은희가 만나게 된 세 명의 남자 중 그저 한 명으로 느껴지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분명 처음의 내레이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은희의 하루에 같이 발을 동동 구르게 될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은희의 시간을 하루로 제한하는데, 그뿐만 아니라 공간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은희가 처음 수업을 듣고, 료헤이를 만나는 배경은 서촌이다. 길을 잃어 한없이 걷는 둘의 뒤로 펼쳐지는 고즈넉한 풍경은, 늦여름의 서울을 관객이 하여금 대신 만끽하도록 한다. 은희와 료헤이가 작별을 고한 후, 배경은 남산으로 고정된다. 현오를 만나러, 운철을 피하려 은희는 푸릇푸릇한 남산을 걷고 또 걷는다. 최악으로 치닫는 하루와는 대비되는 아름답고 안정감마저 주는 배경은 은희의 하루를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덜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최악의 하루>는 거짓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이다. 현오는 실수로 부른 이름의 여성과 은희 몰래 교제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운철은 전 부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은희를 만난 이력이 있다. 그러나 은희는 이들 사이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순진한 얼굴을 하고 난처해하지만은 않는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에는 거짓으로 응수하기를 선택한다. 비록 그 치열한 고군분투의 결과로 그의 하루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지만 말이다. 은희와 료헤이가 처음 만나 서로의 직업을 물었을 때, 료헤이는 소설가인 그의 직업을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라고 소개한다. 은희는 배우인 자신도 같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이 둘은 서로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서툰 언어인 영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줄여서, 쉽게 말한다. 유창한 거짓이 덧붙을 여유는 없다. 소박한 대화 속에서 그들은 미소 짓는다. 료헤이의 팬이라는 한 잡지 기자는 인터뷰에서 ‘이야기가 자극적이고 주인공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잔인하다. 왜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주지 않느냐’고 묻는다. ‘글은 글일 뿐’이라고 답하는 료헤이에게 ‘저는 부끄러웠어요. 저 자신과 그 안의 인물이 점점 닮아가더니 벼랑으로 떨어지고 땅에 묻히더군요.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라고 말한 뒤 기자는 사라진다. 아니, 있었던 흔적이 아예 온데간데없다. 료헤이가 본인에게 묻는 말인 것이다. 그대로 은희에게 가 닿는 질문. 그는 혼자 앉아 골똘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본다. 이미 늦은 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은희의 앞에 료헤이가 다시 나타난다. 현오에게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냥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은희는 료헤이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악의 하루를 보냈음에도, 은희는 다시 만난 료헤이에게 묻는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상대의 안위는 안중에 없이, 각자의 욕망만을 이야기하던 현오와 운철과는 극명히 대비된다. 이제는 별다른 목적 없이, 한 번도 끝까지 가 본 적 없는 남산의 산책길을 료헤이와 은희는 함께 걸어본다. 기자의 입을 빌려 자신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료헤이는 드디어 내놓는다. 한 번도 소설의 주인공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 없는 그가, 언제나 위기에 빠뜨리고 방관자의 눈으로만 지켜봤던 그가, 처음으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에게, 료헤이는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한 이야기에 대해 말해준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료헤이가 은희에게 직접 해주는 이 말은, 누구나 항상 되뇔법한 ‘다 잘 될 거야.’와 꽤나 다른 의미를 갖는다. 액자식 구성을 명확히 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과 남이 해주는 말의 무게는 으레 다른 법이지만, 나와 다른 층위에 있는 존재의 이 말은 강력해서 최악의 하루 끝에서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준다. 당신의 하루를 감히 이해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려 하지 않고, 그저 내일의 안녕을 빌어주는 말. 이는 료헤이가 은희에게 하는 말이면서도, 감독이 힘든 하루를 보냈을지도 모르는 관객에게 전하는 심심한 위로의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