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정 3부 : 한국 시나리오계 풍경, 후진들에게 충고 말씀
- 제작년도
- 2005
배우 이해룡 은 1936년 서울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만주로 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다. 그는 손이 귀했던 외가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개구쟁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이 되었고, 성동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6.25전쟁기에는 피난과 귀경의 반복이었고, 이러한 불안정한 삶은 호기심 많던 그를 공부보다는 다른 길로 이끌었다. 휴전 후인 1954년 대동상고를 중퇴하고, 마도로스가 되어 새로운 세상과 만나기를 꿈꾸며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선장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을 마쳐야 했으니 다시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무렵 김명제 촬영감독을 만나 윤봉춘 감독을 소개받게 된다. 호기심 많고 놀기 좋아하는 구술자에게 많은 문학예술인들이 모이는 명동은 매력적인 공간이었고, 늘 새로운 상황을 만나야 하는 영화 일은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1955년 < 처녀별 >( 윤봉춘 , 1956)과 < 피아골 >( 이강천 , 1955)의 단역 겸 제작부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김승호 , 양일민 , 조항 , 성소민 등의 선배들과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 논개 >(윤봉춘, 1956)에서 장군의 비서인 사동 역할을 맡게 되는데, 장군의 부인이 운명했다는 비보를 알리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때 윤봉춘 감독은 이해룡 에게 눈물을 흘리며 들어오라는 연기를 주문했고, 배우로서 재능이 있었는지 눈물 연기를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이후 < 유관순 >(윤봉춘, 1959)에서의 유관순 오빠 관옥 역할 등을 하면서 본격적인 연기자의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만희 감독과의 인연과 ‘17클럽’으로 만난 영화 동반자들 이해룡 을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한 사람이 윤봉춘 감독이라면 배우와 스태프들과의 관계, 동료애를 통해 영화 현장의 참맛을 알게 한 사람은 이만희 감독이다. 5.16 직후인 1961년 말 구술자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해병연예대에 소속되어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 많이제작되었는데 연예대 소속이었던 구술자는 군 생활 내내 수많은 전쟁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 살아있는 그날까지 >(이만희, 1962)에 출연한 구술자를 눈여겨본 이만희 감독은 이후 대부분의 영화에 그를 캐스팅했다. 이때 이만희 감독을 중심으로 장동휘 , 최무룡 , 허장강 , 박노식 , 문정숙 , 태현실 , 이대엽 , 독고성 , 장혁 , 김운하 , 최성 , 구봉서 등의 배우들과 서정민 촬영감독, 전정근 음악감독, 시나리오작가 백결 과 한우정 , 그리고 구술자 등으로 조직한 ‘17클럽’은 ‘이만희 사단’이라 불리며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공유하며 영화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 영화에 대한 꿈을 함께 꾸었다. 이 시간을 통해 동료애를 돈독히 하고,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면서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만날 수 없는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해룡 의 구술은 이 작업을 통해 얻은 또 하나의 재산이 되었다. 영화계 안팎으로 보여준 끊임없는 영화 열정 1960년대 홍콩과의 합작영화 붐이 일던 시기 신필름의 전속배우가 되어 1969년 홍콩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 13인의 무사 >(장철, 1970), < 철낭자 >( 고버슈 , 197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했고, 다시 대만으로 가 < 5천리 대도망 >( 강대선 , 유가창, 1974), < 금강혈인 >( 김진태 , 198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이 시기의 구술을 통해 홍콩 쇼브라더스의 촬영 환경과 합작영화, 위장 합작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당시 합작영화가 만들어지는 풍경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한국영화의 불황기라 하는 1970~80년대 이해룡 은 한국과 홍콩, 대만을 오가며 촬영을 했다. 점점 어려워지는 한국영화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고, 임권택 , 이두용 , 김호선 감독 등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인정받는 감독들과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1년 배창호 감독의 < 흑수선 >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지는 않고 있지만 대신 현재는 1957년부터 몸담았던 영화배우협회 내 복지회 활동을 통해 원로 배우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천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스태프, 배우로 영화에 참여했다. 그중에서 몇몇 사람은 이름을 날리기도 하고, 후대에까지 기억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레딧에만 존재한 채 잊혀갔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구술 사업을 통해 한국영화 전면에서 목소리를 낸 영화인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어갔던 스태프들, 조연들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까지 주도적인 몇 명의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한국영화사의 빈틈을 메우고, 새로운 시각을 형성해 다양한 차원에서 한국영화를 바라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이해룡 은 낯설지만 친숙한 배우로서, 한국영화를 만들어간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따뜻한 시선으로 배우의 삶 전체를 바라보고 스스로 살아가는 영화인으로서, 후대 연구자들에게 한국영화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영화의 중요한 지점들을 미시사적으로 포착해낼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해주었다.
한국 전쟁영화의 시초는 김기덕 감독의 < 오인의 해병 >(1961)이다. B무비 혹은 장르영화의 전통이 빈약했던 당대에 이 영화가 얼마나 큰 대중적 쾌감을 줬냐면, 심지어 이 영화제목을 딴 날치기단까지 등장했다. 당시 모 신문 사회면에 따르면, 날치기와 들치기 소탕작전에 나선 치안당국이 한 달 동안 전국에서 215개 조직과 8,800여 명을 검거했는데 ‘오인의 해병’이라는 솜씨 좋은 날치기단도 있었던 것. 당시 <오인의 해병>이 김기덕 감독에게 대종상 신인상을 안겨줬을 뿐만 아니라, 흥행적으로도 얼마나 큰 인기를 얻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군인 신분이었던 한우정 시나리오 작가는 <오인의 해병>의 군사행정 자문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작가로 데뷔한 뒤, 이만희 감독의 B급 걸작 < 검은 머리 >(1964)를 비롯해 < 7인의 여포로 >(1965), < 군번 없는 용사 >(1966) 등을 쓰며 그와 오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더불어 신영균 , 엄앵란 주연, 이규웅 감독의 < 오인의 독수리 >(1963), 고은아, 신성일 주연, 이성구 감독의 < 오인의 건달 >(1966), 장동휘 , 남궁원 , 윤정희 주연, 강민호 감독의 < 오인의 사형수 >(1969) 외 김봉환 감독의 < 오인의 왼손잡이 >(1970), 고영남 감독의 < 오인의 건달들 >(1971) 같은 영화도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식으로, 일본에 < 7인의 사무라이 >(1954)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조금 ‘쪽수’가 모자라긴 하지만 ‘오인’ 시리즈가 만원사례를 이뤘다. 당시 범람하던 ‘5인’들 첫 번째 해병, 어려서부터 형( 최봉 )에 비해 차별을 받아왔다고 생각하는 오덕수 소위( 신영균 )는 아버지 오석만 중령( 김승호 )이 대대장으로 있는 부대에 소대장으로 부임한다. 강한 개성을 지닌 우정국( 최무룡 ), 장영선( 박노식 ), 김홍구( 황해 ), 마주한( 곽규석 ) 등 나머지 해병대원들은 간혹 충돌하기도 하지만 오 소위를 중심으로 전우애를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하용규 해병( 남양일 )이 정찰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분노해 홀로 북한군 진영에 숨어 들어갔다 탈출한 분대장( 독고성 )은 북한군이 총공격을 위해 방대한 탄약고를 증설 중임을 알리고 사망한다. 언제나 사사건건 그들을 괴롭히던 분대장이었지만, 그 진심을 알게 된 오 소위를 비롯한 5인의 해병들은 드디어 적진에 잠입하기로 한다. < 오인의 해병 >의 5인들 당시 < 오인의 해병 >의 인기는 박노식 과 곽규석 이 책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은 영화 초반 ‘서울놈’(곽규석)과 ‘촌놈’(박노식)의 대결 구도를 만들며 화려한 코믹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전남 순천이 고향인 박노식은 자신의 구수한 사투리를 유감없이 구사했다. 말하자면 당시 배우로서 액션스타를 꿈꿨지만 멜로드라마 등 이런저런 캐릭터로 방황하던 박노식의 ‘포텐’이 터진 작품이 바로 <오인의 해병>이다. 그가 쓴 자서전 「뻥까오리 백작: 박노식 은막 43년의 고백」을 보면 “배우가 직접 목소리 연기까지 하지 않으면 절름발이 배우”라는 고집으로, 권영순 감독의 < 나는 너를 싫어한다 >(1957) 작업 당시 전라도 사투리로 더빙을 했는데 녹음기사에게 심하게 야단을 맞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때만 해도 ‘영화에 사투리가 나오면 안 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꼭 전라도 사투리를 쓰겠다”고 다짐한 그는 <오인의 해병>에서 스태프들도 모르는 전라도 사투리를 ‘남발’했고, 그것이 바로 흥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됐다. 한국영화에 찰진 사투리가 등장한 B급 반란의 순간이었다. 이후 한국영화에서 사투리로 캐릭터의 맛을 살리는 일은 흔해졌다. < 경상도 사나이 >(1960)와 < 풋내기 애인 >(1964)의 이대엽 은 박노식의 반대편에서 경상도 사투리로 인기를 끌었고, < 울며 헤어진 부산항 >(1963)에서 김지미 의 경상도 사투리도 인상적이었다. < 무정 >(1962)에서는 최은희 가 평안도 사투리로 애교를 펼쳤으며, 언제나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로 인기를 끌었던 도금봉 은 세월이 흘러 박찬욱 감독의 < 3인조 >(1997)에도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전당포 노파로 등장했다. 전라도 사투리 남발하시는 박노식 '그래서 말이여~' ‘후라이보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곽규석 의 인기도 그 못지않았다. 당시 「동아일보」가 ‘곽규석론’이라는 기획기사로 다룬 내용을 보면, 그를 세련된 매너로 ‘프랑스 신사’라 불린 프랑스의 유명 가수 겸 배우 모리스 슈발리에와 비교하며 굉장히 지적인 코미디언으로 추켜세웠다. 실제로 공군예술원에 있었던 그는(‘플라이보이’가 바로 공군조종사를 가리키는 애칭이다) 제대 뒤 1957년 CBS 라디오에서 쇼프로 <후라이보이아워>를 맡으며 본격적인 코미디언 활동을 시작했는데, 영화배우로서도 정창화 감독의 < 후라이보이 박사소동 >(1959)으로 데뷔했을 만큼 ‘후라이보이’라는 이름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국내 최초의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동양방송의 <쇼쇼쇼>를 10년 넘게 진행하며 ‘사회자’의 원조가 됐으며, ‘막동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구봉서와 함께 당대 TV코미디 시대를 주름잡았다. 몇 년 뒤 제작된 이만희 감독의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4)에 구봉서 가 출연해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도 그 영향이라 할 것이다. 입담 자랑하시는 후라이보이 곽규석 그럼에도 역시 < 오인의 해병 >이 주는 주된 재미는 장르적 상식에서 벗어나는 극적 전개 때문이다. 정통 전쟁영화라고 하기에는 색다른 모험적 시도를 엿볼 수 있는 것. 먼저 5인의 해병에 대한 각각의 플래시백을 길게 마련했다.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을 위한 장치라고는 하나 그들이 고향에 놔두고 온 여자친구( 최무룡 에피소드), 입대 전까지 일삼던 ‘양아치’ 행적(황해 에피소드) 등을 굳이 일일이 보여주며 그들의 현재적 희생정신을 부각시킨다. 두 번째는 줄스 다신의 <리피피>(1955)나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1972)를 연상시키는, 이른바 ‘B급 프렌치 누아르스러운’ 기나긴 무언의 작전수행 장면이다. 러닝타임이 1시간 30분여 정도 진행된 상황에서 5인의 특수 작전팀이 북한군의 탄약고를 폭파하기 위해 임무수행에 나설 때에야 비로소 침묵의 클라이맥스가 시작된다. 적을 관찰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던 그들이, 야심한 시각에 보트를 타고 헤엄을 치며 몰래 적진에 침투하는 과정을 무척 세밀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한다. (좌)순이와 작별하는 정국 / (우)'전 틀렸어요, 애비 없는 후레자식인걸요.'(홍구) 바로 날아오는 어미의 따귀손 하지만 그때도 흥행과 비평의 괴리는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조선일보」는 “마지막에 차이코프스키의 제5교향곡 제2악장을 되풀이 사용한 것은 감상과잉”이라 지적하고 있고, 「경향신문」은 “(힘들게 침투하지 말고) 제트기를 출격시켰더라면 귀중한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인데, 상황설명이 없어 의아스럽긴 하다”며 무술영화를 두고 ‘총으로 쏘면 되는데, 왜 손으로 싸우냐’고 지적하는 식의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그처럼 < 오인의 해병 >은 전쟁영화의 ‘원조’라고 하기에는 무척 다채로운 시도로 가득 차 있는데, ( 김기덕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올드팬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전쟁 ‘미드’이자, < 밴드 오브 브라더스 >의 아버지뻘쯤 된다고 할 수 있는 <컴뱃>(Combat)의 영향이기도 하다. 원조 전쟁영화의 매력이 궁금하다면 <오인의 해병>을 비롯해 < 맨발의 청춘 >(1964), < 남과 북 >(1965), < 말띠 신부 >(1966) 등 김기덕 감독의 주요 작품 4편을 수록한 ‘김기덕 컬렉션’(지난 10월11일 출시)에 관심을... 영상자료원에서 출시한 ‘ 김기덕 컬렉션’ DVD 세트 신영균 최무룡 황해 곽규석 박노식 감독: 김기덕 각색: 유한철 촬영: 이성춘 개봉극장 국제극장 관람인원 50,000(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