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고래
- 감독
- 한진희
- 제작년도
- 2006
2004년 | 튜브픽쳐스 감독, 각본: 김수현 | 각색: 김소정 김봉훈 | 제작: 황우현 황재우 | 촬영: 김철주 | 미술: 박혜성 | 음악: 이병훈 CAST 순이: 예지원 | 963: 김석훈 | 뭐시기: 정재영 | 개코: 박선우 | 장수로: 장선우 | 막내: 박희순 사연은 이렇습니다. 박수무당인 장수로(장선우)는 자신을 찾아온 여인네들에게 씨를 퍼트렸고, 그래서 배다른 형제들이 탄생합니다. 퀵서비스맨 963(김석훈), 레카차 드라이버 개코(박선우), 그리고 조폭인 뭐시기(정재영). 여기에 순이(예지원)이 가세하며 가족을 이룹니다. 순이는 길에서 뻥튀기를 팔다가 우연히 개코를 만나 가족이 되었고, 장수로는 젊은 순이에게 연정을 품죠. 이처럼 < 귀여워 >는 어느 콩가루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현장 공개는 실외와 실내 모두 이뤄졌습니다. 실외는 2002년 11월, 실내는 2003년 1월이었는데요, 영화 개봉이 2004년 11월이었던 걸 감안하면 꽤 간격이 큽니다. 원래는 2003년 5월 개봉이었는데 계속 미뤄졌기 때문이죠. 공개된 장면은 뭐시기가 아버지 장수로를 찾아온 신입니다. 동네 평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데요, 딱 봐도 건달기가 줄줄 흐릅니다. 역할을 위해 실제 건달과 합숙하면서 연기를 준비했는데 단 며칠 만에 완벽하게 ‘조폭화’되었다고 하더군요. 뭐시기를 바라보는 장수로 역의 장선우입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파와 콩나물 봉지를 들고 있죠. 사실 <귀여워>의 가장 놀라운 캐스팅은 장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은 장선우 감독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1994) < 꽃잎 >(1996) < 나쁜 영화 >(1997) 연출부 출신인데요, 자신의 데뷔작에서 스승을 배우로 모셔온 셈이죠. 원래는 한진희 씨가 맡을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지연되면서 무산되었고, 이때 튜브픽쳐스의 황우현 대표가 ‘장선우 캐스팅’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의외로 주변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역할 제안을 하게 되었으며, 처음엔 난처해하던 장선우 감독은 농담처럼 “한번 망해보자”며 승락했다고 합니다. 뭐시기가 앉아 있는 평상 근처의 풍경입니다. 황학동 철거촌 주변 아파트죠.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철거는 서울의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죠. 황학동 아파트는 60년대 후반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부의 상징이었는데 10년도 못 가 철거가 거론됐어요. 서울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성격인데요, 끊임없이 변화가 이뤄지지만 실상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어요. 세우고 부수기만 반복할 뿐이죠.” <귀여워>는 지금은 사라진 폐허의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 영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2000년대 초반 서울에 대한 기록의 측면에서도 가치를 지닙니다. <나쁜 영화> 연출부를 끝내고 일란성 세쌍둥이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던 김수현 감독은, 장수로와 순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면서 이야기가 쉽게 풀렸고 그 결과물은 <귀여워>가 됐습니다. 963의 퀵서비스나 개코의 레카차 운전사는 모두 감독이 직접 경험했던 직업이라고 하는데요, 생계를 위해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야생적 느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시기 예지원은 < 생활의 발견 >( 홍상수 , 2002) 이후 독보적인 아우라를 지니게 된 배우였죠. 그녀에게 ‘순이’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안성맞춤 캐릭터였습니다. 좁은 아파트 복도에서 촬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안 실내 장면은 양수리 세트에서 촬영되었습니다. 2003년 1월에 개봉된 세트 촬영 현장입니다. 밖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둘째 개코가 발톱을 깎으면서 맞이합니다. 이 역할을 맡은 배우가 왠지 낯익다고 느껴지신다면… 맞습니다. ‘하얀 겨울’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남성 듀오 ‘미스터 투’의 멤버 박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의 동국대학교 영화과 후배인데요, 파격 캐스팅을 통해 이 영화로 데뷔해 신인답지 않는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박선우는 영화음악을 맡기는 줄 알고 연락을 받자마자 김수현 감독에게 달려왔다고 하는데요, 기다리는 건 ‘개코’라는 캐릭터였습니다. 이날 963은 오토바이에 순이를 태우고 질주하다가 함께 집에 들어오는데요, 순이를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하는 장수로는, 아들에게 순이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며 아들의 뒷통수를 갈깁니다. 약간은 비뚤어지고 냉소적이면서 내성적인 963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연기하기 가장 까다로운 역할일 텐데요, 김석훈은 기존의 이미지를 벗고 역할을 해냈습니다. 집안 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구조가 매우 특이합니다. 철거촌에 있는 집인데. 집 안도 철거되어 있는 셈이죠. 좁은 세트 안에서 앵글을 만들어내기 위해 구조를 조금씩 바꿔가며 촬영을 했습니다. 당시 예지원의 매니저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하용수 였습니다. <귀여워> 시나리오를 읽고 “혹시 예지원이라는 배우를 잘 알고 쓴 시나리오냐?”고 물을 정도로 적역이었다고 하네요. 배우 역시 순이와 자신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준비 과정부터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고 현장에서 감독에게 가장 힘이 되어 준 배우였다고 합니다. 당시 정재영은 < 킬러들의 수다 >( 장진 , 2001) < 피도 눈물도 없이 >( 류승완 , 2002)로 조금씩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하며 거친 마초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말끝마다 “뭐시기”라는 말을 붙이는 뭐시기는 철거반을 이끄는 건달인데요, 정재영은 거의 완벽하게 역할을 해냅니다. 장수로의 부스스한 헤어스타일도 섬세한 작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장선우의 연기에 대해 현장 스태프들은 “연기와 연기 아닌 것의 경계에 서 있는 묘한 느낌의 연기”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김수현 감독은 매우 꼼꼼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감독은 <귀여워>가 결국은 “네 남자가 순이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영화”라며, 남자들의 그 귀여운 모습이 <귀여워>라는 제목의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감독은 < 창피해 >(2011) < 우리 손자 베스트 >(2017) 등을 내놓았습니다.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남자들은 무엇인가 계속 이뤄내려고 하죠. 세상이든 자신이든 끊임없이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정작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반면에 순이는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가벼운 사람인 것 같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요. 그녀는 변화를 주도하지 않고, 상대에 반응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내죠. 남자들이 뭔가 이루려고 아등바등해서 세상이 더 힘들어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자연에 동조하며,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대안을 보여주는 모델이 순이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2004년 | 컬쳐캡미디어 감독: 김호준 | 각본: 유순일 | 각색: 조중훈 김요석 | 제작: 최순식 | 촬영: 서정민 | 미술: 윤도환 | 음악: 히드라 CAST 박상민: 김래원 | 서보은: 문근영 | 보은 조부: 김인문 | 상민 부: 한진희 | 상민 모: 김혜옥 | 보은 부: 송기윤 | 보은 모: 선우은숙 | 혜원: 신세경 | 동구: 류덕환 2004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무엇이었을까요? < 실미도 >( 강우석 , 2003)에 이은 두 번째 ‘천만 영화’ < 태극기 휘날리며 >( 강제규 , 2004)였습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1위였죠. 당시 충무로가 만들 수 있는, 아니 당시 충무로의 수준을 뛰어넘는 대단한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2위는 어떤 영화였을까요? 놀랍게도 < 어린 신부 >였습니다. 비수기인 4월 초에 개봉한 이 영화는 전국 관객 315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권상우 를 스타덤에 올린 < 말죽거리 잔혹사 >( 유하 , 2004), 정우성 손예진 의 < 내 머리 속의 지우개 >( 이재한 , 2004),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 범죄의 재구성 >(2004), 류승완 감독의 액션 판타지 < 아라한 장풍 대작전 >(2004), 원빈 신하균 의 < 우리 형 >( 안권태 , 2004), 강동원 조한선 의 < 늑대의 유혹 >( 김태균 , 2004)... 이 모든 영화들을 <어린 신부>가 제쳤고, 당시 대한민국은 ‘국민 여동생’ 문근영 신드롬으로 들끓었습니다. <어린 신부>는 24살 대학생 상민과 16살 여고생 보은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보은의 할아버지는 꾀병을 부려, 죽기 전에 보은이 상민과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죠. 그렇게 ‘어린 신부’는 탄생합니다. 촬영 공개는 바로 그 결혼식 신이었습니다. 촬영이 공개된 날은 2003년 12월 17일이었습니다. 청담동에 있는 어느 결혼식장이었는데요, 날씨가 엄청 추웠습니다. 배우들은 촬영이 없을 땐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죠. \ 현장에서 짬이 날 때 전화 통화를 하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당시 문근영은 실제로 극중 나이와 같은 16세였고, <어린 신부>의 리얼리티는 배우와 캐릭터의 연령대 일치에서 생겨난 셈입니다. 김래원도 캐릭터와 같은 연령대였고요. 문근영이 주로 부각되었지만, <어린 신부>가 성공할 수 있었던 토대엔 분명 김래원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있습니다. 당시 TV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로 승승장구 하던 김래원은 <어린 신부>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남자 주인공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게 되죠. 신부 입장을 기다리는 문근영의 모습입니다. 영화 속에서 하객들이 “예쁘다, 정말 예쁘다”라며 감탄하던 그 장면이죠. 당시 문근영은 TV에서 영화로 옮겨 오면서 < 장화, 홍련 >( 김지운 , 2003)으로 영화배우로서 자리를 굳히던 시절이죠. 그리고 <어린 신부>가 이어집니다. 사실 <장화, 홍련>의 수연과 <어린 신부>의 보은은, 극과 극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죠. 1년 사이에 그 극단을 오가는 건 10대 중반의 배우에겐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문근영은……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은 바로 보은의 할아버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인문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정다운 연기가 이 영화에서도 관객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죠. 이 영화에서 양가 부모 캐릭터는, 주로 TV에서 활동하시는 중견 연기자들이 맡았습니다. 상민의 아버지는 한진희 씨, 어머니는 김혜옥 씨가 맡았습니다. 곧 있으면 신혼 여행을 떠날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충고를 하지만,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이네요. 보은의 엄마 역은 선우은숙 씨가 맡았습니다. 아직 어린 딸이 안쓰럽기만 한 표정입니다. 대신 상민의 엄마는 며느리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린 신부>는 김호준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일본에서 영화를 전공한 김 감독은 1990년대 초부터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 축제 >(1996), 이정국 감독의 < 편지 >(1997) 등을 거쳐 10여 년의 도제 시스템 끝에 자신의 첫 영화를 만들게 되었죠. 한편 카메라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서정민 촬영감독이 잡았습니다. 지난 번 < 몽정기 >( 정초신 , 20002) 포스팅 에서 자세히 설명 드렸던, 바로 그 분입니다. 촬영 당시 70세셨고, 2015년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영화 속에서 결혼식은 보은의 수학여행 날에 치러집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보은의 결혼 사실을 모르죠. 단, ‘베프’인 혜원은 예외였는데요, 당시 14세였던 신세경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문근영보다 어린 유일한 배우? 당시 두 사람은 같은 소속사(나무 액터스)였는데요, 지금도 그곳에 함께 있네요. 상민의 선배인 지수 역은 김보경 이 맡았습니다. < 친구 >( 곽경택 , 2001)의 진숙 역으로 떠오른 그녀는 이 영화에 특별 출연을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양가 부모가 딸과 아들을, 며느리와 사위를, 배웅합니다. 보은 아빠 역은 탤런트 송기윤 씨가 맡았습니다. 선우은숙 씨 옆에 보은의 동생 동구 역을 맡은 류덕환이 보이네요. 실제로는 문근영보다 한 살 많은 오빠지만 영화에선 동생으로 등장했습니다. 아담한 웨딩 카. 그리고 그 안의 신혼 부부입니다. 실제 촬영 때는 아니고 차 안에서 대기하는 모습입니다. 결혼식 신에 대해, 김래원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거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문근영은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편하게 촬영한 신”이라고 말합니다. 호기심 많은 성격인 보은이 ‘결혼 그 자체’만 생각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고 하네요.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제목의 ‘장미’는 꽃 이름이기도 하겠지만, 실제 유지인 의 극 중 배역 이름이기도 하다. 전화벨이 울리자, 장미(유지인)는 졸린 눈으로 “어보세요?”라고 전화를 받는다. 금요일을 토요일로 착각하고 꿈나라에 빠져있던 장미는 부랴부랴 학교로 향한다. 모범생이라 그런 줄 알았더니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캠퍼스에서 여대생들이 대놓고 담배 피우기 애매하던 시절(지금도 그런가?), 화장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모여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들을 꼬나보는 학교 관계자가 바로 < 여곡성 >(1986)에서 귀신이 몸을 빌린 시어머니로 출연하여 혀를 길게 뽑으셨던 석인수 선생이다. 이름은 남성적이지만 당대 한국영화의 못된 시어머니, 무당, 여죄수 등을 도맡으며 황정순의 반대편에서 장르와 분량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영화에 이바지하셨던 훌륭한 분이시다. 그처럼 공부는 뒷전인 장미와 그 일행들을 기다리는 남자는 바로 규식( 송승환 )이다. 장미만을 사랑해온 규식은 카페에서 사랑의 징표라며 무언가를(알지만 도저히 쓸 수 없다)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역시 알지만 도저히 쓸 수 없는) 동정과 처녀성에 대한 규식의 일장연설과 플래시백이 이어진다. 단순한 세대차이로 치부하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그런 논리로 규식이 급기야 “우린 결혼해야 돼, 부모들 사이에서도 얘기가 끝났어”라고 말하자, 장미는 허탈한 듯 소리친다. “아이구 이 피곤한 친구.” 그래 궤변은 늘 피곤한 법이다. 장미 가시로 만든 핏방울 징표 “세 방울은 장미 거, 세 방울은 내 거” 규식을 따돌린 장미와 그 일행은 야심한 시각이 되자, 정체불명의 술집에서 만난 하키부 남자들과 옷 벗기 내기 술 마시기 게임을 시작한다. 이계인 이 대학생으로 나오는 것은 이해한다 해도, 같은 해 만들어진 하길종 의 < 병태와 영자 >(1979)에서 병태( 손정환 )에게 “군대에서 여자 친구 사진을 갖고 있는 것은 정신무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충고하는 소대장으로 나온 이해룡 이 전혀 정신무장이 안 된 하키부 예비역 대학생으로 나오는 것은 무척 황당하다. 심지어 유지인 보다 실제 20살이 많고, 영화 속 중년남으로 나오는 신성일 보다도 한 살 많은 한국영화계의 대표적 원로배우다.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989)에서는 은주( 이미연 )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무튼 여자가 한 명 모자라지만 대담하게도 두 사람을 상대하겠다는 장미로 인해 게임이 시작된다. 그런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철민(이계인)이 술자리를 뒤엎으며 장미에게 “자신을 내동댕이치는데 익숙한 여자”라고 소리친다. 그처럼 < 가시를 삼킨 장미 >의 초반부는 뭔가 ‘한국판 < 님포매니악 >’스러운 분위기로 후끈 달아오른다(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너무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마시길). 문제의 대학생들(가장 앞이 이해룡 , 세 번째가 이계인 )과 후끈한 게임 정진우 감독의 < 가시를 삼킨 장미 >는 이장호 감독의 < 별들의 고향 >(1974)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자장 안에 있다(<별들의 고향>을 각색한 이희우 작가가 <가시를 삼킨 장미>를 썼다). 그를 B무비 장르에 명쾌하게 포함시킬 수는 없겠으나, <가시를 삼킨 장미>는 A무비를 지향하는 대사들의 연속이 오히려 현재에 이르러 B무비처럼 느껴지는 경우다. 당시로써는 ‘여성 주체’에 대한 심오하고 페미닌한 텍스트로 해석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그를 현실적으로 살려내는 것은 유지인 의 탁월한 연기력이다. 그런 혼돈의 술자리를 끝내고 헛헛한 마음으로 귀가한 장미 앞에는 쓸쓸한 새장이 있다. 까마귀(< 하얀 까마귀 >), 뻐꾸기(<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앵무새(<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갈매기(<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 >) 등 유난히 새를 사랑해온 정진우 감독의 미장센이 빛나는 대목이다. 심지어 신일룡 , 이미숙 주연의 또 다른 연출작 <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1984) 또한 앞서 <두견새 왜 피를 토했나>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그보다 앞선 최초의 제목은 <짧았지만 만족했어요>라는 야릇한 제목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 영화를 촬영 중인 정진우 감독을 인터뷰한 취재기사에 “정진우 감독 조류학자 되려나”라는 제목까지 달았었다. 누가 봐도 현실의 장미를 비유하는 것이 빤한 새장 속의 새를 향해 그녀가 말한다. “넌 왜 그렇게 불쌍하게 있니. 날아, 노래를 해, 날아, 노래하라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꿎은 새를 향해 더 심도 깊은 논의를 펼쳐 보인다. “우리는 왜 수컷을 통해서 존재가치가 인정되니? 잘못된 거야! 난 싫어. 그런 모든 걸 다 감수하고 살 수만은 없어. 싫어, 싫어, 싫어~~~” 새장 이후 부산 집으로 내려가던 장미는 우연히 옆에 앉은 중년남자( 신성일 )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가정으로 인해 번뇌에 빠진 그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한정된 범위 안에서의 선택인가를 생각해봐요”라며 위로한다. 파산하고 부산에 내려온 남자는 아내도 자식도 답이 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장미를 만나고서야 삶을 돌아볼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앞으로 백 가지 슬픔이 있더라도 한 가지 행복을 위해 살겠어요”라는 장미의 비현실적이고 천사 같은 사랑도, 남편의 하숙집에서 여자 팬티를 발견하고 연락한 그의 아내( 선우용녀 )로 인해 ‘불륜’이 되어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럼에도 “죽음을 모르고 뛰어드는 하루살이에게 박수라도 칠까”라며 두려움 없는 사랑을 꿈꾸는, 그렇게 자신을 (깡에 살고 깡에 죽는) ‘깡생깡사’로 표현하는 장미의 모습은 꽤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런 불륜이 집에도 알려지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중년남자를 향한 마음이 ‘항상 충족되지 못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찾으려 했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관계는 끝나버린다. 예정된 사랑의 실패로 장미는 이전보다 더 방탕한 생활을 하고, 급기야 약물 과다복용으로 정신병원에도 간다. 당시 국내 유일의 정신병원이었던 ‘청량리뇌병원’에서는 장미를 두고 ‘마음의 병’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후 겨우 진정이 됐을 즈음에는 혼자 동시 상영관을 찾아 영화만 보는데, 그런 그녀 앞에 세호( 한진희 )라는 미남자가 나타난다. 또한 비슷한 시기 옛 친구 진영( 김보미 )이 결혼 예찬론을 펼쳐서 장미의 마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킨다. 그렇게 장미는 안정된 생활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품는 듯하다. 진영과 통화하며 “우리들의 방황도 어떤 식으로든 끝장이 나려나 봐”라는 장미의 얘기 뒤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버닝 러브’가 흐른다. 얼마 뒤 세호의 집요한 애정공세로 두 사람은 건너편으로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보이는 한강변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세호의 몸개그는 장미의 얼굴에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아준다. 영양가 없는 남자들 하지만 세호 또한 ‘똑같은 놈’이다. 결혼까지 생각한 장미가 임신을 하게 되지만, 세호는 어머니가 장미의 과거를 알아서 결혼을 승낙하지 않고 있다는 핑계까지 대며 한사코 결혼을 거부한다. “아직도 엄마 젖을 빨고 싶겠죠? 조금씩 엄마한테서 벗어나요”라고 충고하지만 세호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후 세호의 진짜 비밀이 드러나면서, 남자 잘못 만나 고생하는 장미의 비극은 종지부를 찍는다. 여느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별다를 바 없는 설정 안에서도 < 가시를 삼킨 장미 >의 유지인 은 <별들의 고향>의 경아( 안인숙 )와 비교해도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정진우 감독이 같은 해 만든 < 심봤다 >의 유지인이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지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이듬해 출연한 이장호 감독의 < 바람불어 좋은 날 >과는 또한 얼마나 비슷한 모습인지도). 더불어 < 별들의 고향 > 이후 유행처럼 만들어지던 아류작들 대부분은 그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관음증을 영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시를 삼킨 장미>는 ‘버림받은 여자의 방황’이라는 나름의 한계 안에서도,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이희우 작가 특유의 대사들과 정진우 감독의 집요한 연출력이 결합해 유지인의 장미를 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영화 속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리고 드디어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긴 규식과 장미가 나누는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난 아직도 너를 이해 못 하겠어”라는 규식의 회한 가득한 말에 장미는 이렇게 답한다. “나 자신도 나를 이해 못 해.” “나 자신도 나를 이해 못 해.” 이건 유지인 이 예뻐서 그냥... 유지인 신성일 한진희 송승환 감독: 정진우 각본: 이희우 개봉극장: 스카라 관람인원: 75,75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