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판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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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79개
정확도 순 필터
영화정보
드래곤볼 Z
- 감독
- 니시오 다이스케
- 제작년도
- 1989
- 출연
- 노자와 마사코, 치바 시게루, 와카모토 노리오, 호리 히데유키, 나카오 류세이, 이이즈카 쇼조, 오오토모 류자부로, 나카하라 시게루, 쿠사오 다케시, 이토 미키, 시오야 코조, 강수진, 손정아, 정미숙, 김관철, 최석필, 강구한, 이재명, 이장원, 김영선, 김환진, 최문자, 이진화, 임성표
장기한판 섹스한판 -폭유여기사
- 감독
- 코지마 유키오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미키오 야마다, 유라 치토세
수집자료
아빠와 한판승
- 매체규격
- VHS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쿠쿠네 동영상] 대갈이와 대걸레의 한판승부
- 매체규격
- 디지털파일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INSITETV][걸기어]5회) 걸기어 폭스바겐 골프편, MINI 나랑 한판 붙어보자!!!
- 매체규격
- 디지털파일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아빠와 한판승(Getting Even With Dad)-Orginal Soundtrack Album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57:29
Getting Even With Dad
- 매체유형
- CD
- 연주시간
- —
외국영화심의확인서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영화심의 결과통보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외국영화수입심의신청서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콘텐츠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1. 1970년대 변두리 극장을 선회하던 액션영화에 홍콩식 권격영화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협객물이라고 불렸던 이 영화들은 전지구적 유통망 속을 흘러가던 권격영화들의 한편에서 자국 관객들에 대한 강력한 어필로 70년대 한국의 액션영화 시장을 양분하였다. 이 ‘내수용’ 영화들이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영화들이 그 어떤 장르영화보다도 명료하게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를 구성하는 적대의 선을 말 그대로 물리적인 방식으로 반복 재현해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실재하는 하나의 이름을 끌어옴으로써 가능해졌는데, 일찍이 독립전쟁을 수행한 ‘장군의 아들’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내걸었던 이 고유명은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인들의 상업거주 지역인 종로통의 ‘주먹’으로 부상한 이래 해방 정국의 백색 테러리스트로서 ‘빨갱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1960년대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을 응징하는 정치 ‘협객’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미 당신도 짐작하다시피, 이 이름은 김두한이다. 이 이름이 그토록 오랫동안 (적어도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남성 대중문화의 강력한 원천으로 작동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일과 반공으로 성립된 대한민국의 고유한 두 적을 탁월한 폭력으로 능히 제압해내는 그는 그럼으로써 이 국가가 소망하는 강력한 남성성을 온몸으로 체현해내고 있는 자라고 할만하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는 통한의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이곳의 아들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식민지 남성들이 겪어야 했던 저 강렬한 고아의식과 전후의 비루한 아버지의 형상들을 떠올린다면 거리의 고아 소년이 독립운동가 ‘장군’의 위대한 혈통을 잇는 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얼마나 매혹적인 것인가. 1) 2. 이런 류의 영화들의 기억할만한 첫 시작은 1969년 1월에 개봉한 < 팔도 사나이 >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당시 김두한은 막 정치판에서 자취를 감춘 직후였으나,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똥물을 퍼부었던 정치 협객 김두한의 인기는 절정에 달해 있었고 이제 곧 그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매력적인 자원이 될 터이다. 2) 비록 김두한이라는 실명은 피하고 있지만 <팔도 사나이>는 ‘김두한 스토리’의 첫 번째 버전이라고 할만하다. 고아인 어린 소년 호(虎)는 자신을 길러준 노인으로부터 실은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독립투사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른이 된 호는 주먹으로 종로를 평정하고, 그런 그에게 평양 박달이부터 광주 용팔이까지 팔도의 사나이들이 차례로 도전장을 내민다. 호는 이 싸움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고, 도전자들은 그를 ‘형님’으로 모신다. 이제 조선 주먹을 대표하게 된 호는 종로를 넘보는 일본 야쿠자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이 놀랍도록 전형적인 이야기는 한편으로 ‘김두한 스토리’의 원형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팔도’가 환기시키는 1960년대 후반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토’의 현현이라는 감각을 과시한다. ‘종로’의 주인 호가 도전을 받아들이고 굴복시키고 형제의 따뜻한 연을 맺는 일련의 과정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위계화를 완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내부를 계서적 형제관계로 마름질한 그는 외부의 적 과 맞서 싸워 통쾌한 승리를 거둬낸다. 3. <팔도 사나이>는 10만 7천명의 관객동원을 기록하였다. 1967년 기록적인 관람률을 보여주었던 국책영화 < 팔도강산 >의 성공 여파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온 수많은 ‘팔도’ 영화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영화 이후 감독 김효천과 시나리오 작가 편거영은 각자의 방식대로 이 성공을 이어가고자 했다. 같은 해 < 속 팔도 사나이 >, < 돌아온 팔도 사나이 >의 각본/연출을 맡기 시작한 편거영은 < 한국 제일의 사나이 >(1970), < 원한의 팔도 사나이 >(1970), < 예비군 팔도 사나이 >(1971), < 바보같은 사나이 >(1971)를 만들었고, 김효천은 < 명동출신 >(1969), < 명동노신사 >(1970), < 명동백작 >(1970), < 명동에 흐르는 세월 >(1971), < 명동을 떠나면서 >(1973) 등의 ‘명동’ 시리즈를 만들었다. 이 영화들은 적을 규정함으로써 어떻게 정치공동체가 형성되는가를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전시하고 있는 한국영화일 것이다. 이를테면 해방 직후를 배경으로 한 <명동노신사>는 남한 사회가 누구를 동지로 삼고 있으며, 누구를 적으로 하여 형성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룡(장동휘)과 덕팔은 해방 전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형제 같은’ 사이이다. 남조선노동당의 앞잡이가 된 덕팔은 강룡을 포섭하려고 하나 그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강룡의 노모와 누이를 살해하고 빨치산이 되어 산에 들어간다. 한편 강룡이 과거 덕팔과 함께 모셨던 형님 덕진은 국방경비대 창설의 주역이다. 강룡은 덕진 형님을 찾아가 자신의 부하들로 특별부대를 편성, ‘공산비적’을 소탕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밝힌다. 팔도에서 온 부하들을 이끈 강룡의 공비소탕전이 펼쳐진다. 부하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장렬히 전사해간다. 홀로 살아남은 강룡이 이들을 추모한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결절점이 있다. 첫 번째, 형제애의 수사로 강조되는 하나의 민족. 함께 일본에 대항했던 덕팔과 강룡은 ‘형제 같은’ 사이였다. 두 번째, 그러나 이 ‘형제’는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서로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홀로 살아남은 전투의 증언자가 우리를 또 하나의 애도의 공동체로 초대한다. 요컨대, 이 영화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국가, 대한민국을 형성하기 위해서 누구의 피가 흘려졌는가? 3) 4. 김두한의 실명 사용은 그의 죽음 이후 가능해졌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인 1974년 < 실록 김두한 >을 시작으로 < 협객 김두한 >(1974), < 김두한 속 3부 >(1975), < 김두한 속 4부 >(1975)까지 이어진 ‘김두한’ 시리즈는 신필름의 마지막 흥행작이기도 하였다. 김두한이라는 실명이 사용되고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시리즈는 동시기 일본 야쿠자영화의 주요 경향, 소위 ‘실록 노선’을 창조적으로 벤치마킹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실록 노선’의 기념비적 시작을 알린 것은 1973년 정월에 개봉해서 일대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후카사쿠 긴지의 < 의리없는 전쟁 >(1973)이었다. 전후 일본을 야쿠자들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항쟁사로 그려내고 있는 이 시리즈가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였던 일본 68이 좌절된 1970년대 일본 사회의 절망과 조응하는 것이었다면, 김두한의 ‘실록’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의 유신과 긴급조치의 시대에 그야말로 적절하게 조응하는 것이었다. 이 시리즈를 기획했던 자의 말처럼, 이 반일(<실록 김두한> <협객 김두한>)과 반공(<<김두한 속 3부>, <김두한 속 4부>)의 물리적 행위자는 “인정사정없이 줘패는” 행위를 통해 “분풀이 할 데 없는” 대중들을 “대리만족 시켜”주었다. 국가적 요구를 반영하는 이 폭력의 전시야말로 아마도 유신시대에 향유가능했던 가장 안전한 쾌락이었을 것이다. *** 1) 물론 반공에 비해서 반일이란 대한민국의 성립과정이 보여주고 있는 바 어느 정도 애매모호한 것일 수밖에 없다. 김두한의 이력 속에서 보자면 그는 1943년 조직된 총독부 협력단체인 반도의용정신대의 주도자였다.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고등계 형사로 재직중이었던 장명원에 의해 ‘불량청년’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는 이 단체의 설립 및 활동에 근거하여 장명원을 기소하지만 이 기소는 반도의용정신대가 ‘표면상 왜 정책에 협력하는 것같이 보이’나 불량청년들을 ‘감화지도하여 선량한 청년을 육성’하였다는 이유로 유예된다. 당시 김두한은 대표적인 극우 테러리스트로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2) 1966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과 국회의 미온적 대처에 대한 항의로 벌어진 김두한의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내각이 총사퇴하고 김두한 자신은 제명론이 비등한 가운데 자진 사퇴, 국회의장 모욕죄와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1967년 총선에서 ‘서민층에 호소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신민당 공천(수원)으로 선거에 나온 그는 “북괴에는 농촌까지 전기가 들어와 있는데 우리 농촌은 헐벗고 있다”는 요지의 연설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된다. 김두한은 그해 11월 보석으로 출감된 이후 정치계에서 은퇴하였다. 3) 강룡과 덕팔의 이야기는 김두한의 실제 스토리로부터 비롯되었다. 1947년 김두한은 죽마고우 정진용을 그가 좌익 행동대장이라는 이유로 린치,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미군정에 의해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이승만에게 특별사면 받았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한국영화걸작선]꽃잎: 5월의 영화 Ⅱ
< 꽃잎 >( 장선우 , 1996)이 발표되었던 당시나 지금이나, 이 영화를 보는 영화적 체험은 무척이나 곤혹스럽다. 예컨대 이러한 것이다. 영화는 실제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푸티지(footage)를 비교적 긴 시간동안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실제의 역사적 기록영상은 열차를 타고 있는 ‘우리들’ 중 한명( 설경구 )의 얼굴로 이어지면서 허구의 세계로 봉합된다. 이어 5.18이전 김추자의 ‘꽃잎’을 부르고 있는 소녀의 얼굴 클로즈업이 등장한다. 그 다음 쇼트가, 이전 쇼트의 전체 의미, 즉 소녀는 남자들(오빠의 친구들) 앞에서 자기-전시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소녀의 얼굴은 우리들(오빠들)의 시선이자 기억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네 명이 타고 있는 기차 객실 내부를 보여주는 쇼트들이 이어지는데, 그 끝맺음을 하는 것은 맞은 편 의자에서 성적 유희에 빠져 있는 한 커플을 우리들 두 명이 관음증적으로 훔쳐보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 영화의 크레디트가 나온다. 광주와 관음증. 이 오프닝 시퀀스의 기능이 가까운 과거로, 광주라는 지정학적 공간으로의 허구적 진입이라고 했을 때, 왜 관객은 굳이 관음증적 시선이라는 매개를 거쳐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관음증적 충동의 에너지는, 영화 전반부를 휘감은 것으로서, 크레디트 이후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영화적 디제시스를 지배한다. ‘장’과 ‘소녀’의 마주침은 그녀의 몸을 아래로부터 위로 훑는 장의 시선으로 묘사되고, 그것의 논리적 귀결인양 곧바로 장은 소녀를 강간한다.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소녀는 이후 장의 처소에서 반복적으로 강간과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당한다. 영화의 시작이 강력하게 소환한 역사적 사실성은, 연극 무대처럼 꾸며진 세트(장의 거처)의 밀폐된 학대 공간으로 치환된다. 영화의 서사는 세 개의 트랙으로 진행되는데, 소녀를 찾아 나선 ‘우리들’의 탐문적인 로드 무비적 갈래가 그 하나이고, 장과 소녀의 이야기가 다른 한 축이며, 마지막으로 소녀를 미치게 한, 즉 그녀의 트라우마를 구성하고 있는 ‘그 날’의 파편적 조각들이 그것이다.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탐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소녀의 광주 항쟁 이후의 삶과 현재 진행되는 장과의 동거는 끊임없는 강간과 폭력의 연속이다. 강간을 당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광주에서의 트라우마적 영상이 오버랩 된다. 국가 폭력에 성 폭력을 포개고 얹는 이 과정은 희생자를 재차 희생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남성들의 성욕은 자연적인 것처럼 전제되며 질문되지 않는다. 소녀의 미친 상태로 인하여, 그녀의 트라우마는 오로지 국가 폭력에 의한 것일 뿐인 것으로 재현된다. 강간의 피해는 그녀의 트라우마로 축적되거나 입력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피해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에, 끊임없는 성폭력은 재현의 영역에서 관음증적이고 가학적인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재현되지만, 그 폭력의 속성이나 윤리적 책임을 묻지 못한다. 소녀의 삶을 파괴한 원죄는 광주 그 곳에서 그 날 자행된 국가 폭력에 있을 뿐이다. 역사적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의 곤궁을 여성의 몸이라는 수사적 지지대를 통해 관통하려는 것, ‘미친 여성’을 통해 민족 비극을 알레고리화 하는 것, 희생된 소녀를 동원하여 역사적 죄책감을 말하려는 것, 이것은 모두 그동안 한국영화가 종종 그 유혹에 빠졌던 남성중심적인 수사학적 관행이다. 소녀가 오빠의 묘지(라고 믿는 산소)를 찾아가 마치 한판 굿을 하듯 원한을 풀어내는 영화의 절정부는 거의 20분간 진행된다. 그것은 소녀의 트라우마의 중핵이 광주에서 총 맞은 어머니의 피 묻은 손을 뿌리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 영화는 소녀가 모든 원한을 토해 낸 듯 그려내지만, 그녀의 몸에 가해진 무수한 물리적 폭력과 성폭력에는 끝내 입을 닫는다. 그렇다면 피해자를 재차 피해자로 만드는 것의 정치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그녀를 지키지 못하거나 함부로 다루고 뒤늦게 연민의 정의 몸짓을 표하다 자책하는, 우리들과 장, 그리고 그 위치로 안내되는 관객들의 죄책감의 연대에 대한 촉구일 것이다. 소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의 우리들의 침통한 표정과 묘지에서의 장의 망연자실한 표정, 그리고 그 위로 보이스오버 되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이 영화의 그러한 태도를 분명히 한다. 애시 당초 구체적 이름 없이 소녀와 우리들, 엄마, 오빠로 호명되는 것은 이 인물들이 각각 어떤 전형성을 띄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텍스트 내에 관객들의 동일성을 담보하고자 한 우리들과 장의 위치는, 동시대인으로서 민중 지향적 태도를 견지하며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던, 그러나 남성 성욕의 배설적 재현에는 지독히도 관대하거나 그 정치적 효과에는 무관심했던, 동시대 지식인의 분열된 자아 위치로 보인다. >> 꽃잎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커밍 홈 어게인
한국영상자료원에서 3년째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와 그 중 한 작품에 관해 쓰는 ‘사사로운 영화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고민을 좀 했다. 지난 한 1년 간 웨인 왕 감독의 < 커밍 홈 어게인 Coming Home Again >이라는 영화에 어쩌다 익세큐티브 프로듀서로 참여하게 됐기 때문이다. 괜히 자기 영화 홍보하는 것 같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당연히 올해 나에게 이보다 더 사사로운 영화는 없다. 솔직히 ‘홍보라고 해 봤자’라는 생각도 든다. <커밍 홈 어게인>은 9월 토론토 국제 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서 월드 프리미어 한 후로 각처의 영화제 초청과 언론의 호평을 받고는 있지만, 각처의 수입사와 배급사에서는 지금까지 고사하는 상황이니 뭐…… 그래, 그냥 주제에 맞게 ‘사사롭게’ 쓰자. 지금 다른 영화 얘기할 머리 상태도 안 된다는 것도 인정하자. 거의 1년 간 내가 사는 서울과 감독님이 계시는 샌프란시스코의 시차 17시간을 두고 일하다 보니 심각한 수면 부족으로 (면역성은 물론이요) 뇌세포도 많이 상한 것 같다. 한창 후반작업 중일 때는 거의 잠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아마 관타나모 같은 데서 나 보고 테러리스트라고 고백을 하라고 부추겼더라면 당연히 아님에도 불구하고 “방해 없이 8시간만 쭉 자게 해주세요” 하면서 테러리스트를 자처했을 법한 정신적 누더기 상태가 됐다. (문제는 내 본업이 ‘스크린 인터내셔널’ 아시아 부국장이자 한국 통신원이라는 것 – 그러잖아도 낮에는 아시아 일을, 저녁에는 런던 본사와 소통을, 아주 늦은 밤에는 새벽 잠이 없는 감독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깨셔서 하루 일을 시작하는 식이었다. 급한 불 끄고 해놓을 수 있는 연락은 일단 다 취해놓고 서울 시간 새벽 5~6시쯤 지쳐서 ‘그만!’ 하고 외치고 서너 시간 자던가 말던가 하고 다시 일과를 시작하는 식이었다.) 아무튼 처음으로 돌아가서 얘기해볼까 한다. 웨인 왕 감독을 만난 건 작년 이맘때 ‘사사로운 영화’ 원고를 쓸 때 즈음, 도쿄 필름엑스 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을 같이 하면서였다. 아마 심사위원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정도로 허심탄회하게 영화와 커리어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들을 깊이 공유하고 논의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감독님이 연출하신 예술영화도 좋고 할리웃 대중영화들도 다 뭔가 결이 다른 데가 있어 좋아요”하는 정도의 말쯤은 했었겠지만, 영화제 카타로그에 내 약력이 나온 걸 보고 한때 LJ 필름이 CJ 엔터테인먼트와 합병했을 때 글로벌 프로젝트팀 프로듀서였다는 것에 대해 감독님이 추가 질문을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심사를 같이 하다가 밥도 같이 먹고 리셉션도 같이 가고 하면서 그냥 저냥 얘기하다 “왜 프로듀싱을 계속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때 기획개발에 일조는 해도 과연 이 영화들이 나를 꼭 필요로 하느냐, 필요로 한다 쳐도 내가 몇 년 동안 그 영화에 110%를 바쳐도 보람이 느껴질까 하는 두 가지 질문을 하다가 ‘스크린 인터내셔널’ 한국 통신원 자리가 열려서 원래 하고 싶기도 했던 기자 일을 택했다”고 했다. 그게 2005년이었는데, 그 사이 출판업계 상황이 한창 안 좋아진 것도 당연하지만, 나란 인간에게 뭔가 긍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분도 감지하셨을 것 같다. 요즘 영화인을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웨인 왕 감독의 < 스모크 Smoke >’(1995)는 제 인생의 영화예요!”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할리웃 최초로 아시아계 미국인 주인공을 두고 대중적 인기를 얻은 < 조이 럭 클럽 Joy Luck Club >(1993)이나 제니퍼 로페즈와 레이프 파인즈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 러브 인 맨하탄 Maid in Manhattan >(2002)으로 웨인 왕 감독을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그 영화들 다 좋아한다. (특히 <러브 인 맨하탄>은 비슷한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로맨틱 코미디로 따지자면 더 유명한 < 노팅 힐 Notting Hill >(1999) 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낫다 생각한다. 이 쟁점을 갖고 가볍게 한판 붙을 자신은 있다. 잠 좀 자고 뇌세포가 회복되고 나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왕 감독 영화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 <천년의 기도 A Thousand Years of Good Prayers>와 그 작품과 짝으로 만들어진 <네브라스카의 공주 Princess of Nebraska>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리이윈의 원작을 영화화 한 작품 두 편인데, 2007년 하와이 국제 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으로 나란히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걸 감독께 말씀 드렸었다. 그래서 그러셨나? 한국계 미국인 이창래 작가의 자전적인 글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한 편 만들고 있다고 귀띔해주셨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이창래 작가의 <생존자 The Surrendered>나 <영원한 이방인 Native Speaker>, <가족 Aloft>, <척하는 삶 A Gesture Life> 등의 베스트셀러 소설은 아니고, 저명한 <더 뉴요커 The New Yorker> 잡지에 실렸던 단편 에세이 같은 것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그때 동경 오기 전에 며칠 만에 찍고 가편집본을 만들고 있는데 한 번 보겠냐고 하셔서 당연히 영광이라 했다. 영화제가 끝나고 얼마 후, “나에게 아주 개인적인 영화”라는 간단히 말씀 한 줄 적고 스크리너 링크가 든 이메일을 보내오셨다. 색보정이나 사운드 등등 후반작업은 하나도 안된 가편집본이었지만 너무 좋았다. 위암을 앓는 엄마를 간호하기 위해 월 스트리트의 좋은 직장을 그만 두고 샌프란시스코 고향집으로 돌아온 아들 ‘창래’의 이야기였다. 창래는 자라면서 엄마가 늘 - 특히 미대륙을 횡단해 있는 엑서터 기숙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 해주던 갈비며 전, 잡채 등의 한국 전통 요리를 죽어가는 엄마에게 배우면서 마지막 섣달 그믐날 가족 식사를 준비하기도 한다. 위암 말기의 엄마는 씹어서 삼켜도 바로 토해낼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아들은 자기가 차린 음식을 엄마가 먹어주길 바라는 것이 인상적이기도 했다. 창래 역에는 <트와이라잇 Twilight>에 개구장이 십대로 나왔던 저스틴 전 (Justin Chon)이 다 자라서 나왔고, 엄마 역에는 주로 연극계에서 활동 하고 <그레이 아나토미 Grey’s Anatomy> 등의 테레비젼 드라마 조연으로 출연했던 재키 정 (Jackie Chung)이 절제된 명품 연기를 했다. <커밍 홈 어게인>은 죽어가는 부모를 간호 하면서 희생하기도 하고, 음식을 배우면서 소통을 하기도 하는, 그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 동안 쌓여있었던 가족 간의 갈등도 회상으로 나오고,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아직은 젊은 엄마를 잃을 것을 당면한 자녀의 자기중심적인 잔인함도 깃들여 있다.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다.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거나 이타적으로 착하기만 한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심사위원을 함께 하면서 그토록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간단히 “잘 봤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 자세한 피드백을 솔직히 드려야 예의일 것 같았다. 그래서 고백했다. 위의 얘기를 하면서 친척 중에 항상 명절 때 손수 모든 요리를 하시고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던 한 분이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옆에서 봤던 가족들의 모습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당면한 본인이 어떨 지에 대한 생각보다 자기가 곧 직면할 상실감을 감당 못하고 행동하는 것 같은 모습들, 당시엔 납득할 수 없어 긴 세월 상처로 남아있었던 것이 치유되는 것 같았다는 걸 말씀드렸다. 그리고 영화 속 한국계 미국인들의 모습도 좋았다고 말씀드렸다. 한국인인데 한국에서 나서 살기만 한 한국인과는 좀 다른 행동과 반응을 하는 것을 영화에서 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어렸을 때 미국에서 한 8년 자라면서 봤었던 이들이 스크린에 살아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작은 예를 들어, 가정 방문한 교회 아줌마들의 성경찬송과 H-라인 스커트와 브로치 – 너무 전형적으로 익숙했다. 그런데 그들이 주는 익숙한 기독교적 위안에 전형적으로 착한 한국인 아들처럼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는 창래의 반응이 신선하고 좋았다. 캐스팅도 대사도 연기도 너무 훌륭해서 아빠로 나오는 존 리 (John Lie)가 처음 나와서 “창래야” 하는 순간부터 이 인물이 누군지 파악이 될 정도였다. 아마도 나름 미국 사회에서 많은 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권위가 있으나 집에서는 라면 하나 못 끓여먹는 한국 남자 어른. 이런 심각한 감정적인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한국 남자 어른. 한때 이문세 노래 하나로 불륜이 걸렸음에도 계속 학자적인 ‘썰’을 푸는 한국 남자 어른. (코미디가 아님에도 이 영화에서 제일 코믹한 인물이기도 하다.) 누나로 나오는 크리스티나 줄라이 김 (Christina July Kim)도 화면에 나오는 순간부터 완벽한 인물 재현을 한다. 한국에서 커리어를 꾸리다가 비행기 타고 날라와 엄마의 치료를 끊겠다는 결심을 반대하며 항상 자기 보다 총애를 받던 남동생에게 편들어 달라고 설득하는데 실패하는 딸. 곧 비행기 타고 가부장제의 나라에 돌아가서 또 진급을 투쟁하듯이 찾아나서야 하는 한국계 미국인 여자. 딱 아는 사람 같았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났더니 감독님과 <커밍 홈 어게인>의 국제 영화제와 시장에서의 난점과 가능성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됐다. 아마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와 또 공감하지 못할 사람도 많을 것이라는 점도 공유했다. 절제된 표면 밑에 깊은 감정들이 흐른다는 점이 강점이지만, 절제성 때문에 폭넓은 대중성을 갖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도 얘기 했다. 거의 모든 장면이 (실제 프로듀서 도날드 영의 돌아가신 할머니 댁이었던) 한 아파트 안에 이루어진다는 점도 이 작품을 ‘체임버 피스’라고 좋게 말할 수 있으나 ‘스펙타클’하지 않다고 흠 잡을 수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얘기 했다. 그리고 나중에 어떤 수입사에서 얘기 한 것처럼, ‘겉모습은 한국인인데 내용은 보통 사람들이 이런 데서 기대하는 한국적 멜로나 신파가 아니어서 마케팅하기 애매하다’는 평도 예상 했으나, 어쨌든 세계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가 있는데 스크린에 다양한 한국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좋았다는 것도 얘기했다. 결론적으로 작품에 대한 신뢰와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바램을 공유했다. 통화가 끝나갈 무렵, 감독님은 익세큐티브 프로듀서 크레딧을 받고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이미 본 촬영이 끝난 작품에 뒤늦게 합류하면서 그런 크레딧 받는 것도 부담스럽고, 아직 기자 일을 포기할 수 없으니 ‘어쏘시어트 프로듀서’나 ‘공동 프로듀서’ 또는 ‘컨설턴트’ 같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만한 크레딧을 차라리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렇게 합의하고 전화 끊은 후 이메일 몇 번 더 주고 받으면서 샌프란시스코 팀은 추가 씬 촬영과 후시녹음 등을 한 후 새로운 편집본을 보내왔다. 이번엔 간단히 "언짢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익세큐티브 프로듀서 크레딧에 네 이름을 넣었다”는 한 줄이 들어간 이메일에 스크리너 링크가 왔다. 솔직히 좀 곤란한 건 사실이었으나 웨인 왕 감독 같은 거장이 분명 다른 프로듀서들과 논의 끝에 결정해서 크레딧에 넣었을 것을 알면서 거기에다 대고 뭐라 말하겠는가? "영광입니다. 크레딧에 부합하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엮인 거다. 그 후로 후반 작업에 의견을 내는 일 외에 크게는 이문세 ‘옛사랑’ 노래 판권을 구하는 일, 국제 세일즈사를 구하는 일, 영화제 출품을 돕는 일 등을 맡게 됐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에다간 편집장에게 양해를 받았다. 리뷰를 쓰고 에디팅 하는 동료들은 기사가 완성 되고 나서야 내가 이 영화에 참여했다는 걸 알게 됐다. 솔직히 리뷰에 대한 걱정은 안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이 동료는 작품이 마음에 안 들면 가죽을 벗겨 회를 치는데’ 하는 노파심이 살짝 든 건 사실이다. 나중에 영화를 너무 잘 봐주고 좋은 평 써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네가 관여한 작품인지 몰랐다’며 진정 놀라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다.) <커밍 홈 어게인>은 9월 토론토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 할 때 여러 호평을 받았고 심지어 평론가 중의 한 명이 기자 시사 나오면서 트위터에 ‘눈물을 양동이로 들고 나오느라 동료 기자들에게 사과해야만 했다’는 식의 트윗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남자들이 엄청 울었다는 반응이 기억난다. 상영 전에 왕 감독이 “내가 할리웃 영화 만들 때 스튜디오 관계자들이 편집의 속도를 점점 급하게 가자고 다그쳤었다. 잠시라도 관객이 숨을 들이쉬거나 생각을 할 수 있는 겨를을 주지 못하게 강요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나도 숨쉬는데 어려움을 신체적으로 겪게 됐다. 의사한테 가보니 요가를 해보라고, 숨쉬는 법을 배우게 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들 때 관객이 숨을 쉴 수 있고, 각자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만들었다”고 했다. 등장 인물들뿐 아니라, 그들의 환경, 소품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며 호흡하고 생각할 겨를을 많이 주는 영화다. 아시아 프리미어는 10월 부산 국제 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서 하게 됐다. 그런데 마지막 후반작업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 부으시고 토론토에서 두 번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를 하시고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한 끝에 집에 돌아가신 왕 감독은 발병해 결국 부산에 못 오셨다. 솔직히 프로모션 측면에서 말하자면 재앙 같았다. 부산 영화제 24년 역사에 갈라 상영 때 감독이 안 나타난 일은 우리 영화가 처음이었다. 항상 젊게 사시는 왕 감독이 1949년생이라는 걸 이때 상기했다. 그래도 명품 연기를 한 재키 정이 임신중임에도 보석 같이 나타나서 부산 상영 때 ‘가족 영화인데 남편과 아들과 곧 태어날 아들과 함께 부모의 나라인 한국에 와서 상영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말을 하면서 관객들을 사로 잡기도 했다. 남편은 <커밍 홈 어게인>의 중요한 조연으로도 나온 루이 오자와 장치엔 (Louis Ozawa Changchien)이다. 곧 아마존 프라임에 나올 <헌터스 Hunters>’이라는 아카데미상 후보자였던 조던 필 (Jordan Peele)이 제작하고 알 파치노 (Al Pacino)가 나오기도 하는 나치 추적 시리즈에서 볼 수 있게 될 배우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그들에게는 당연히 그렇고 나름 프로덕션과 영화제 입장에서도 큰 일이었기에 뱃속 아기가 몇 주 빨리 나오면서 부산에 계획보다 오래 머물게 됐다는 점을 안 쓸 수 없다. ‘부산 국제 영화제 1호 베이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부산에서의 많은 일은 프로듀서 스쿨에서 배운 적이 없는, 간단히 줄여 말하자면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하겠다.) 그리고 유럽 프리미어는 11월 말, 에스토니아의 탈린 블랙 나이츠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했다. 여기 다녀오느라 이 원고가 좀 늦어진 점이 없지 않아 있다. 혼자 가서 영화를 소개하고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등등 일정을 마치고 (버스로 4시간 반, 비행기로 50분 가량 떨어진) 같은 발트해 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있는 친구 집에 가 있는데 “만세! 빨리 탈린으로 돌아와”라며 우리 영화 리챠드 웡 (Richard Wong) 촬영감독이 최고 촬영감독상을 타게 됐다는 소식을 이메일로 받았다. 빨리 미국에 있는 리챠드한테 비디오 인사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얼른 탈린으로 돌아와 대리 수상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영화 속 촬영은 현재 시점의 장면들은 다 “객관적”이고 안정적인 와이드 샷으로 찍었고, 회상 장면은 다 조금씩 흔들리는 핸드 헬드로 가까이 다가가 찍었다. 색깔도 회상 장면들은 조금 더 따뜻하게 했다. 거의 모든 장면이 첫 테이크였던 것도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일 것이다. 어쨌든 탈린 블랙 나이츠 영화제 경쟁부문은 <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3) 마이크 뉴웰 (Mike Newell)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심사평에 “우아한 미니멀리즘으로 스토리의 긴장과 드라마를 이미지로 표현하고, 물리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좁은 공간을 통해 프레이밍하여 인물들의 절망을 신중한 눈으로 옮기고, 영화 촬영 예술이 어때야 하는지 대담한 비전을 전달하는 능력”을 높이 사 시상한다고 했다. 스펙타클한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영화 촬영 예술이 어때야 하는지 대담한 비전을 전달한다”고들 한다. 시장성이 어떻던 간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수 있을 영화라 생각한다. 사사로운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