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과 담배
- 감독
- 이병림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김경록, 배제기
< 윤희에게 >는 서간체 형식의 영화다. 오타루에 사는 수의사 쥰(나카무라 요코)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는 조카가 부치지 못하고 책상에 놓아둔 편지를 몰래 우체통에 넣어준다. 아마도 그 편지는 오래 그 책상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고모는 ‘Yun Hee’라는 수신자의 이름을 쥰을 대신해 불러준다. 그리고 그 편지는 윤희(김희애)의 딸 새봄(김소혜)이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된다. 쥰과 윤희의 호명과 응답은 각자의 자리에서 반복해 불리고 쓰였지만 오랫동안 상대방에게 가닿을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 마사코와 새봄은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오타루의 겨울에 20년 넘게 만나지 못하던 쥰과 윤희가 재회할 수 있는 세계의 조건을 만들어 간다. <윤희에게>의 눈 내리는 하얀 오타루, 가닿지 못한 안부 묻기, 부치지 못하거나 잘못 도착한 편지, 필름사진, 상실의 감각, 오래 간직한 사랑은 어쩔 수 없이 < 러브 레터 >(이와이 슌지, 1999)의 노스텔지어를 떠올리게 한다. 상실한 것으로 회귀하려는 운동은 과거에의 고착과 언뜻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윤희에게>는 분명 오래 전에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 그러나 <윤희에게>는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서로의 편지에 응답하면서 쥰과 윤희 모두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성장의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보내고 받는 것에 시차가 발생하거나 어긋날 확률이 높은 편지, 촬영 속도가 늦고 인화의 과정이 필요한 오래된 필름 카메라, 오해가 발생하거나 이해가 늦을 수 있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번역과정은 단순히 아날로그적인 노스텔지어의 감성을 부추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쥰과 윤희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가족에 의해 강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폭력은 사랑의 실패를 넘어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부인당하는 삶을 살게 했다. 윤희는 가족에게 ‘쥰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이후 정신병원에 갇히고 이른 나이에 오빠 친구와 반강제로 결혼한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대학도 가지 못한 윤희에게 엄마는 카메라를 선물한다. 새봄은 그러한 엄마의 서사를 모른 채 엄마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풍경과 사물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뒤늦게 새봄에게서 제 정체성을 찾는다. 이렇게 뒤늦은 시차의 발생이야말로 한국의 퀴어한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윤희는 자신의 욕망을 부인당한 후 자신을 고립시키면서 주변 사람들도 외롭게 만든다. 그는 소통의 가능성을 닫는다. 쥰은 윤희에게 쓴 편지를 매번 부치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의 시작을 동일한 내용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윤희는 자신의 세계 내에 누구도 들이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을 온 몸으로 외치고, 쥰은 성적 정체성과 한국·일본 혼혈이라는 국적 정체성을 가능한 숨기며 안으로 파고든다. 둘의 시간은 제자리에서 맴돈다. 부인당한 욕망과 정체성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윤희의 아버지와 오빠는 윤희의 삶에 폭력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려 들고 쥰의 아버지는 냉담함으로 일관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옛 말처럼 ‘두 사람이 만나려면 공동체의 지지와 포용적 환경이 필요하다.’ 로맨스는 개인적이거나 이자적인 것이 아니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 남성들 때문에 헤어졌지만, 새봄과 마사코라는 또 다른 가족이 꾸며준 조건 속에서 재회한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나서야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폭력적 상황은 어긋나고 도달하지 못한 소통과 시차를 만든다. 하지만 마사코와 새봄이 만든 삐끗한 송수신과 시차가 또한 둘을 재회하게 만든다. 마사코는 쥰의 편지를 대신해 부치고 새봄은 그 편지를 받고 오타루로 엄마를 데리고 여행을 온다. 영화사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제작 및 개봉 기록이 남아있는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 알려진 < 질투 >(한형모, 1960)의 한참 늦은 응답 혹은 후일담처럼 여겨진다. 현재 <질투>는 필름 프린트는 소실되었고 시나리오만 확인 가능하다. <질투>에서 동성애자인 재순(문정숙)은 의붓 여동생 금이(전계현)를 좋아하고 둘은 실제로 연애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금이가 남자를 만난 후 재순의 욕망은 금이를 포함해 모두에게 부정 당한다. 재순의 욕망은 한국 전쟁 중 당한 성폭행으로 인한 남성혐오로 인한 부작용으로 취급되고 결국 정신병원에 갇혀 교정치료를 받는다.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제 할 말 다하던 재순은 결말 장면에서 병원에서 나오며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꿈에서 깬 것 같다”고 말한다. 기이할 정도로 급작스럽고 밝게 묘사되는 이 장면에서 텅 빈 인형처럼 묘사되는 재순은 거의 공포영화의 주인공 같다. <윤희에게>에서 윤희는 재순처럼 정신병원에 가지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도움으로 쥰을 재회한다. 한편, 2000년대 < 연애소설 >(이한, 2002), < 주홍글씨 >(변혁, 2004). < 끝과 시작 >(민규동, 2009) 같은 영화들에서 여성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앞선, 10대의 원초적이고 순수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고착화 된다. 그러나 결국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포획되고 봉합되며 과거의 것으로 영원히 남는다. <윤희에게>는 과거에서 맴도는 시간에서 벗어나 그 다음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다르다. 이 영화 전체의 형식이기도 한 편지는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한다. ‘윤희에게’ ‘쥰에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중요하다. 임대형 감독은 한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분명히 ‘퀴어영화’라고 호명하기도 했다. 하나의 단일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가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고 뭉개는 것 또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법이 될수 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조건으로 자꾸 ‘성소수자’라는 이름을 빼려는 시도들처럼 말이다. 늦었지만 이름을 부르고 그에 응답해야 한다. 새로운 퀴어 시간성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영화사에서 퀴어영화라 불릴 수 있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물론 ‘퀴어영화’라는 범주는 여전히 많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퀴어영화가 나오려면,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 공동체가 노력하고 바뀌어야 했던 것처럼 수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법도 그러한 조건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현실과 영화는 거리가 있지만 또한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당장 가시적으로 현실에 보이는 것 이상을 표현할 수 있다. 영화는 잠재된 현실, 보이지 않고 가려진 현실, 환상성, 꿈을 그려낼 수 있다. 쥰과 윤희가 각자의 꿈에서 잊지 않고 만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 둥글고 둥글게 >(2020)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중심에 두면서 1980년대를 조망하는 오디오-비주얼 프로젝트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역사적 영상물들을 편집한 파운드 푸티지 필름으로 단순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 이미지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환기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장민승은 <보이드>(2016), <보이스리스>(2019), < 오버 데어 >(2019) 등에서처럼 음악감독 정재일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이 작품에서도 ‘빛과 소리’의 특별한 시공간 체험을 선사한다. 여기서 ‘빛’은 ‘빛고을(光州)’이라는 이름을 가진 광주와 그 역사적 존재들이 남긴 흔적인 만큼, 차원들을 넘어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와 그 역량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소리’는 기도와 종교음악이 그래왔던 것처럼 역사적 존재들과 현재의 관객이 만나 신에게 고통을 하소연하고 죽은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제의적 공간을 형성한다. <둥글고 둥글게>는, < 박하사탕 >이 가장 순수했던 ‘나’를 찾기 위해 5.18 광주 직전으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했던 것처럼, 시청각적 이미지와 역사의 잠재성을 재차 질문하고 그 역사-영화로부터 고통 받고 소외당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작품은 5.18 광주를 한국 근대사의 기원이나 갑작스러운 독립된 사건으로 부각하지 않는다. <둥글고 둥글게>는 88올림픽부터 시작해 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까지 시민과 기자들이 찍은 사진, 전두환 정권이 정권홍보를 위해 만든 뉴스영화, 텔레비전 뉴스보도영상 등을 현재에 촬영한 이미지 컷들과 교차편집하며 차근차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초점을 맞추는 것은 88올림픽의 아이콘이었던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뿐만 아니라 지금은 텅 비어있는 올림픽 스타디움이며, 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끈 시위대뿐 아니라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의 일상의 감정과 노동환경, 작은 정치적 움직임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5.18 광주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고 5.18 광주는 1980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역사들에 다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기억하려 한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는 ‘Memorare(기억하라)’라는 합창이 반복해 울려 퍼진다. ‘Memorare’는 기존에 이미 기억된 것을 넘어서 기억하려는 의지이자 염원이다. 마지막 시퀀스에 등장한 88개의 피아노 건반이 모두 자기 소리와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역사관을 전달하기 위해 <둥글고 둥글게>가 지속적으로 각인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 혹은 물질의 기본 요소이다. 오프닝 장면부터 작디작은 빛의 입자, 사라져가는 연기, (피아노 건반과 공장의 기계음을 비롯한 여러) 소리의 파동을 가능한 개별적으로 또렷하게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을 최대화하기 위해 장민승 작가는 전통적 영화 방식을 버린다. 빛을 스크린에 투사하는 프로젝터가 아니라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유기물 고체를 이용해 자체 발광하는 디스플레이 OLED를 선택한 것이다. OLED는 빛의 전달 속도가 빨라 잔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선명한 화질을 제공한다. 이는 매우 작은 입자들까지도 그 존재를 도드라지게 할 뿐만 아니라, 빛은 빛으로, 어둠은 어둠으로 그 본질을 감각하게 하며 전기적 운동의 이미지로 표현되는 영화의 새로운 존재방식까지 고민하게 한다. 빛은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역사적 존재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차원들을 연결하는 역할도 해왔다. 87년 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고가도로에 올라가 아래쪽에 있는 전경들을 방해하기 위해 거울을 들어 빛을 반사시키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매우 SF 영화적인 순간을 만든다. 이때 시위대의 시선에서 관객은 프레임 아래쪽에 배치된 전경과 유사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에, 시위대가 반사시키는 거울 빛은 스크린을 넘어서 관객을 직접적으로 비추는 효과를 만든다. 2차원에서 3차원, 과거에서 현재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반사된 빛은 ‘기억하라’는 기호를 전송하는 조난신호처럼 보인다. 오프닝에서 5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의 초가 타오르고 꺼지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이명박 정권 당시 용산참사의 망루 이미지를 구김이 있는 반투명한 스크린에 투사해, 제사에서 죽은 자를 위로하기 사용되는 종이인 소지(燒紙)처럼 태워 버리는 장면 역시 거기와 여기를 연결하는 빛들을 전면화한다. 이러한 영화적 순간들은 극장상영이 아니라 무대가 있는 공연형식(2020.11.28.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연)으로 상영되었을 때 더 극적인 방식으로 연출된다. 87년 민주항쟁 당시 최루탄이 터지는 장면에서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무대에 연무가 뿌려지고, 5.18 광주 당시의 흑백 필름이 현재 광주의 공간과 교차편집 될 때 여러 개의 핀조명이 무대에 떨어지면서 2차원의 스크린과 관객이 있는 3차원의 공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이미지로 표현되는 역사적 존재와 현실의 관객은 ‘둥글고 둥글게’라는 제목처럼 사이-공간에 공통의 대기로 감싸 안아지게 된다. 5.18 광주의 파운드 푸티지 영상이 본격적으로 삽입되는 영화의 후반부는 죽은 자들의 말을 대신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씻김굿에 가깝다.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운명을 원망하는 구절로 가득한 시편을 후반부에 삽입하며, 당시의 광주시민들을 영웅적 투사로 세워 기념하기보다는 그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더불어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항쟁을 ‘소요와 난동’으로 규정하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영화로 시작하는 후반부는 영화라는 매체의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고 그렇지 않아왔는가? 광주를 비롯한 역사적 비극들에 영화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후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폭행·살해당하고 부모들이 죽은 자식의 관을 붙잡고 우는 모습이 담긴 네가 필름들이 그 사건이 일어났던 현재의 공간과 함께 교차편집 된다. 계엄군에 의한 온갖 폭행과 고문이 일어났던 옛 광주교도소와 국군광주병원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자연의 침입과 보호를 동시에 받고 있다. 카메라는 수평으로 뼈대만 남아있는 문과 문, 창문과 창문, 기둥과 기둥, 벽과 벽 사이를 이동한다. 이 움직임은 빛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플리커링(flickering) 효과를 만들며, 이 사적지들을 영화관 그 자체로 만든다.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현재 카메라의 움직임과 과거의 촬영된 흑백의 푸티지들이 교차편집 되며 관객들은 과거와 현재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체험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공간 이동은 현존과 부재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서게 한다. 장민승 작가는 ‘작가와의 대화’(진행 이은선)에서 ‘둥글고 둥글게’라는 제목에 대해 순환과 반복의 메타포이며, 광주시민들이 전라남도청 분수대를 에워싸고 있던 사진의 모양이고, 80이라는 숫자의 기호이고, 돌고 돌아 역사가 자꾸 제자리로 회귀하는 것에 대한 허망함이며, 한국 근대사의 경제성장에서 쇳물을 부어 제련하던 사람들의 노동을 가리킨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그것은 영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빛의 모양이기도 하다. <둥글고 둥글게>는 마지막 시퀀스에서까지 88개의 건반을 모두 보여주고 들려주며 그 존재들, 그리고 그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까지 모두 기억하려 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유물론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역사와 영화를 제련하여 그 존재를 다시 묻고, 잊지 않으려 하고, 그들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대기 중에 남아있는 빛의 입자와 미세한 숨결을 매개해 위로하려는 의지, 그것이 88분간 이 프로젝트가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빛의 입자와 미세한 숨결은 단순히 수동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그곳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증거이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의 사건과 존재들을 체험하게 하는 역사의 행위소(actant)가 된다.
인식( 임형국 )이 출근을 준비하는 사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송광자)와 딸 소진( 권잎새 )은 ‘사물 맞추기’ 놀이를 한다. 날마다 반복되는 이 게임에서 한 사람은 반복을 인식하지만, 다른 사람은 매번 잊어버린다. 그래서 이 행위는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 단순하지만 고통스러운, 그럼에도 견딜 만한 일상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 태진의 물건을 어머니가 끄집어낸다. 기억하는 자와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갈등이 서서히 고조된다. 어느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지만, 어떤 이는 피해자가 되고 또 다른 이는 처형자의 위치에 오른다. 기억이 침범한 내면의 경계는 인물 사이의 골을 파고든다. 누군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인물들 각자의 내면에 한숨으로 남을 뿐이다. 처음에는 몇몇 장면의 연출이 아쉬웠다. 정면 원쇼트의 대화 표현은 어색했고, 리듬감 없이 등장하는 인서트도 거슬렸다. 그런데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내게 있어 장병기 감독의 < 할머니의 외출 >(2019)은 마음에 남아 뭉글뭉글 떠오르는 영화였다. 그러던 중에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처음에는 컬러라고 생각하고 촬영한 작품이다. 그런데 편집을 마친 뒤 화면을 보는데 처음의 의도를 화면이 가리는 것 같았다.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10월의 가을 화면이 영화와 안 맞았다.” 계속될 수 없는 게임을 인지하게 된 남자 주인공의 체념을 영화는 흑백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의 선택에 동의하게 됐다. 영화 속 모든 모티브는 ‘과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아들의 ‘운동화 한 짝’이 그렇다. 이 물건의 등장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자는 없다. 이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절대 옅어질 수 없지만, 영화는 ‘슬픔’이나 ‘애정’ 같은 진부한 단어로 이 감정들을 꾸미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는 클리셰가 없다. 불같이 화를 내는 인물도 없고, 감정에 취하는 자도 없다. 진짜 아픈 감정이 그렇게 천천히 바깥으로 드러난다. 일상에 기대어서, 흘러가는 사건을 관망하며 영화는 아픈 기억을 어루만진다. 죽음에 이르는 예고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현재’라는 틀에 갇혀, 인물들의 마음이 도덕적인 딜레마에 휩싸인다. 잠재적이고 가상적인 감정이 시간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남자 주인공에게 이야기가 집중되는 구성은 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정이 모두 그로부터 시작된다. 말 그대로 이 인물은 ‘인식’하는 자이다. 뜨겁고도 무거운 가을의 온도가 그를 거쳐 형상화된다.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남자는 존재하고 있다. 만일 <할머니의 외출>이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수채화였다면, 영화가 품은 시간의 뼈대는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회하여 산만하지 않은 방식으로, 영화는 흑백의 그림자를 내민다. 폭발적 내면을 보여주지 않고서도, 달콤한 시간을 끄집어내지 않고서도, 관객들은 그저 선험적으로 무해하고 관조적인 감상에 이른다. 때문에 이 작품은 시간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무언가의 회귀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집중한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할머니의 상황에 대해 아버지는 딸에게 전화 너머로 설명하는 중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전달되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깨닫는다. 영화에 드리워진 암흑의 실루엣은 어느새 새벽을 향한 밤의 그림자가 되어 있다. 현실이란 악몽에 덧입혀진 어설픈 레이어는 이제 곧 벗겨질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구도 옳지 않은 자는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간혹 실수하고 공황에 빠지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영화의 결말은 그렇게 가느다란 희망과 만난다. 예민한 주인공이 약한 숨을 내쉬고, 단호한 ‘생략’이 모든 것을 암시한다. 아마도 우리 주변을 떠돌던 일상의 어두움은 극복될 것이다. 이 결말을 딱히 아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가 품은 모호한 형상은 사실 우리들 자신과 몹시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