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 감독
- 킹 비더
- 제작년도
- 1929
- 출연
- 다니엘 L. 헤인즈, 니나 매 맥킨리, 윌리암 파운테인, 해리 그레이, 파니 벨 디나이트
1950년대 후반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과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로 포문을 연 한국의 코미디영화는 본격적인 장르로 형성되면서 196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청춘쌍곡선>을 시작으로,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한 <오부자>(권영순, 1958), <사람팔자 알 수 없다>(김화랑,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등의 코미디언코미디 1) 가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의 주류를 형성했다면,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과 <흥부와 놀부>(김화랑, 1959), <탈선 춘향전>(이경춘, 1960) 등 시대극을 표방한 코미디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등의 산뜻한 로맨틱 코미디도 관객들을 찾아갔다. 1960년대 초에는 가족드라마가 주요 장르로 등장하여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등의 가족희극드라마가 다수 제작되었는가 하면, 1960년대 중반 유행했던 청춘드라마의 영향으로 <총각김치>(장일호, 1964),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등의 청춘코미디가 한동안 코미디 시장을 휩쓸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는 서영춘, 구봉서를 투 톱으로 하는 코미디언 코미디가 다시 주류를 형성하면서, 구봉서 주연의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 <남자기생>(심우섭, 1969) 등의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 <팔푼며느리>(심우섭, 1968),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 등의 팔푼이 시리즈, 서영춘의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운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 등이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코미디영화는 197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코미디영화의 제작 비율은 연평균 12%에 이르렀다. 2) 코미디영화는 한국영화 시장에서 멜로드라마에 이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주요 장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코미디영화, 그 중에서도 특히 코미디언코미디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올랐던 ‘홀쭉이와 뚱뚱이’ 양석천(1921~1990)과 양훈(1923~1998)에서 김희갑(1923~1993), 구봉서(1926~2016), 서영춘(1928~1986), 배삼룡(1926~2010)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남성 코미디언들만으로 명단이 완성된다. 같은 시기, 이들에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는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거나 이야기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불출의 유일한 여성 제자이자 인정받는 만담가로서 신불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김윤심(1914~1997)을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 코미디언들의 활약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윤심은 한국 최초의 여성 코미디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쇼 무대의 인기 출연자였다. 김윤심의 활약이 만담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박옥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에서 활동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박옥초(1920-1984)는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의 입지를 다진 인물로 볼 수 있다. 소녀가극단 낭낭좌에서 데뷔한 이래 남성 역을 도맡아 여성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박옥초는 코미디로 연기 영역을 넓힌 뒤 1950-60년대에는 악극단과 쇼 무대, 영화와 라디오, TV까지 각종 매체를 넘나들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이 시기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활약했던 유일한 여성 코미디언으로 약 7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박옥초의 첫 영화출연은 안종화 감독의 영화 <수우>(1948)였다. <수우>는 알려진 바대로 ‘경찰정책영화’였는데, 김소영, 전택이, 신카나리아, 서월영 등이 주요 출연자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두 번째 영화는 6.25전쟁 이후, 한국영화가 새롭게 발돋움하던 시기에 제작된 1956년 영화 <애정파도>(문화성)였다. (그림1) <애정파도>(문화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위 전옥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고, 왼쪽 아래는 이예성과 안나영, 오른쪽 맨 아래 수영복 차림의 박옥초와 구봉서가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예성과 안나영, 전옥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애정파도>는 구봉서의 데뷔작이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구봉서와 콤비로 재미있는 장면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의 오른쪽 아래에 등장한 수영복 차림의 두 사람이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급증하던 이 시기에, 박옥초의 영화 출연도 한층 활발해졌다. 박옥초는 이 시기에만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이 시기에 유행했던 코미디영화였다. <봉이 김선달>(한홍열, 1957), <공처가>(김수용,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 등에서 박옥초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림2)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의 한장면. 박옥초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정혜선)의 집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아낙으로 등장했다. 박옥초는 빠른 템포로 수다를 늘어놓으며, 특유의 표정 연기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솜씨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3)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죽음 이후 다른 사람으로 빙의된 주인(구봉서)이 유령인 것 같다고 하며 호들갑을 떠는 식모로 등장하여 짧은 순간에 웃음을 자아내는 신 스틸러였다. 이처럼 조연이나 단역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코믹한 순간의 웃음을 담당했던 박옥초의 경력은 196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미 악극단과 쇼 무대의 유명한 배우였던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출연자였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가진 코미디언이었다. 1960년대에는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사극, 멜로드라마, 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 안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그림4)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장면 기생점고에 나타난 나이든 기생 박옥초를 변사또 이예춘이 타박하는 장면이다. 박옥초의 표정연기가 돋보인다. 이 장면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중 변학도(이예춘)가 남원에 부임하여 기생들을 불러 모아 점고를 하는 씬이다. 맨 끝에 서 있던 기생 박옥초를 발견한 변학도가 몇 살이냐고 묻자 천연덕스럽게 “열여섯이옵니다”이라고 대답하며 교태를 부리다가, 타박을 받고 돌아서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가 하면, <민며느리>(최은희, 1965)에서는 무당으로 등장하여 강한 존재감을 발휘했고,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서는 곽규석과 함께 미국 유학을 다녀와 허세를 부리는 박사 부부로 출연하여 이 진지한 영화에서 단 한 번 웃음을 유발하는 씬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림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의 한 장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박사 부부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 오른쪽부터 신성일, 백일섭. 박옥초와 곽규석이 출연했다. 드물게 허위의식에 가득 찬 상류층으로 등장했던 <장군의 수염>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박옥초가 영화 속에서 맡은 역할들은 주로 식모, 동네 아낙, 무당 등 하층계급의 여성들이었다. 주인공이 아닌 여성, 그 중에서도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중년의 여성이 당시 한국영화 속에서 맡을 수 있었던 캐릭터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박옥초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이런 역할들로 채워갔다. 그럼에도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모으고 웃음을 유발하는 개성 있는 배우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 코미디언이었다. (그림6)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의 한장면. 박옥초는 코미디영화 제작이 드물었던 197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톱스타 코미디언 이주일의 출세기를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박옥초가 출연했던 마지막 코미디영화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김수형 감독의 1981년작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70여 편의 영화를 남겼다. 박옥초는 심우섭, 이형표, 김화랑 등 주요 코미디 감독들의 코미디 영화 및 신상옥, 최은희, 이성구 감독 등의 다양한 장르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하는 씬 스틸러로 출연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로 기억될 만하다. 박옥초가 주로 조연배우로, 다작을 한 경우였다면 백금녀는 여성 코미디언으로 드물게 주연작을 가진 배우였다. 백금녀(1931-1995)는 김정분이라는 본명으로 부산 지역 악극단에서 데뷔한 뒤, 서울중앙방송 성우 제1기로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청춘극장과 황금좌 등의 악극단에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 후반 서영춘과 콤비를 이루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갈비씨와 뚱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서영춘과 백금녀는 쇼 무대와 라디오에서 큰 활약을 했다. 백금녀는 여기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도 진출, <공처가>(김수용, 1958)로 데뷔했다. 또, 1964년에는 박노식과 함께 악극 재건을 목표로 ‘11인 백합회’를 결성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중반에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유일하게 고소득 연예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데뷔작 <공처가>에서 백금녀는 장소팔과 부부로 등장하여 곰탕집을 운영하는 여걸 역할을 맡았다. 장소팔은 당시 악극단과 라디오 만담을 통해 전국적인 스타 만담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장소팔의 ‘대화만담’ 파트너였던 고춘자나 고백화가 아니라, 백금녀가 상대역으로 등장한 것은 이채로운 일이라 할 만하다. 아마도 백금녀가 ‘공처가’의 부인이라는 컨셉에 더 적합한 유형의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연기력을 인정받은 신인 배우 백금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캐스팅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림7)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장소팔의 등에 업힌 백금녀가 포스터 전면에 위치하여, 이 영화의 코믹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백금녀라는 예명은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김수용이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정분에게 ‘하얗고 돈 많은 여자’가 되라고 지어준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백금녀가 다시 주연 배우로 등장한 영화는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코미디언들을 주연으로 하는 영화들의 제작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초까지도 지속되었는데 여성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남자는 싫어> 단 한 편이었다. (그림8)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백금녀가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면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960년대 여성 코미디언을 단독 주연으로 삼아 제작된 유일한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백금녀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여성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에서 소비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포스터, 시나리오, 개작 전의 원작 시놉시스, 백금녀-서영춘 만담 레코드 등이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어 대략적인 내용은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림9) <서영춘과 백금녀, 폭소가요 코메듸- 갈비씨와 뚱순이의 애정행진곡> 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서영춘-백금녀 만담 레코드의 표지. 이들 콤비 코미디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삽화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초반에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스타 코미디언이자 중견 악극 배우였다. 이 같은 백금녀의 스타성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던 <남자는 싫어>는 기획부터 개작까지, 백금녀를 통한 웃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였다. 애초에는 서영춘과 백금녀 콤비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거꾸로 부부’를 차용한 ‘역할전도 부부 코미디’를 보여주고자 하였으나 검열에 의해 전면 개작을 하게 되면서 이 영화가 택한 두 번째 길은 백금녀를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를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언코미디가 다시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서 여성 코미디언 중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백금녀를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기획은 일견 참신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개작된 <남자는 싫어>에서 백금녀가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금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식이다. 즉, 백금녀를 희생양으로 삼아 (남성) 공동체에서 배제하면서 배타적인 웃음을 만드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백금녀가 자신의 스타 페르소나와 레퍼토리를 활용하여 적극적인 웃음의 유발자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이미 잘 알려진 자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스타 코미디언으로서의 장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코미디언코미디의 특징이기도 하다. 첫 번째 방식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것은 백금녀의 몸을 희화화하고 객체화하는 여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이들에 의해 가학적이고 공격적인 웃음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웃음은 사회적 전형화typification의 하나로, 남성들만의 세계all-male-world에서 여성들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다. 4) 따라서 그의 신체가 웃음거리가 되는 동안 백금녀 자신은 코믹 행위의 주체이거나 능동적인 주어가 아니다. 즉, 영화 속에서 백금녀는 유머의 주체로 기능하거나 유머를 적극적으로 주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함’으로 인하여,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비정상적인 신체’로 규정됨으로 인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객체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의 코미디성이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두 번째 범주에서이다. 즉, 기존의 퍼포먼스와 스타 페르소나를 활용한 코미디를 선보일 때, 백금녀는 능동적 주어로 활약한다. 성량이 풍부한 가수인 백금녀의 화려한 노래와 코믹한 춤 솜씨를 볼거리로 제시하는 장면, 서영춘과 함께 ‘거꾸로 부부’와 같은 남녀 역할 전도의 코미디를 선보이는 장면, 여성 레슬러로 활약하는 장면 등은 백금녀 코미디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특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림10)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이 영화는 서영춘의 출세기를 다룬 것으로, 주연 서영춘(왼쪽)과 함께 스타 배우였던 김희갑(오른쪽)이 포스터에 비중있게 등장한다.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은 서영춘과 사랑하는 사이로 등장하는 강문, 그 아래 서영춘을 제압한 백금녀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출세해서 남주나>와 같이 서영춘과 함께 출연하는 코미디영화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가 만들어졌다. 첫 번째 범주에서 금순의 신체가 ‘비정상적’이므로 배제되어야 하는 것, 그로테스크하고 혐오스러운 ‘비체abject’로 여겨져 왔다면, 레슬링 장면 등을 통해서 금순의 신체는 ‘단련된 스포츠’의 신체이면서 동시에 ‘요절복통할 폭소’를 유발하는 슬랩스틱의 신체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특히 레슬링 복장을 하고 신체를 당당히 드러내는 장면은 남성들이 부과한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깨뜨리는 것이며, 이는 훨씬 더 풍성하고 더 문제적인 신체의 가능성’들’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 5) 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백금녀의 ‘신체’는 배제와 폭력을 통해 규정되는 ‘대상’ 혹은 ‘비체’의 경계를 넘어, 주체됨을 통해 웃음을 만드는 ‘여성 코미디’의 신체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백금녀가 주연으로 등장한 마지막 영화는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이다. 이 영화는 화재로 전소한 고아원의 원장으로 등장한 백금녀는 김희갑과 함께 감동적인 고아원 재건 스토리를 그렸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와 <팔도강산>(배석인, 1967)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백금녀와 김희갑은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고아원 재건 비용을 마련한다. 백금녀는 한편으로는 김희갑의 코미디를 보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힘으로 사기꾼을 제압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11)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의 한장면 고아원 원장 역의 백금녀와 고아원 운영을 돕는 김주사 역의 김희갑. 이들은 고아원을 재건하기 위해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재건 자금을 마련하고자 한다. 전국을 여행하며 자녀들을 만나는 김희갑 부부가 출연하는 영화 <팔도강산>와 같은 계열의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밖에 영화에서 백금녀의 활발한 활약상은 다음과 같은 영화들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림12)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백금녀는 코미디영화가 아닌 여타 드라마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였다. (그림1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에서 백금녀는 ‘파이 던지기’라는 고전적 코미디의 한 장면을 차용한 레스토랑 신에 등장했다. (그림 14) <팔도노랭이>(심우섭, 1970) 포스터 <팔도노랭이>는 팔도의 구두쇠들을 사위로 삼은 김희갑의 이야기. 가운데 김희갑이 보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딸로 등장한 백금녀는 오른쪽 맨 아래. (그림15)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의 한 장면. 왼쪽 붉은 원피스 차림으로 춤추는 백금녀. 왼쪽 끝이 김희자, 백금녀의 오른쪽 옆이 양석천, 갓 쓴 할아버지 역의 김정훈, 그 오른쪽으로 검은 양복 차림의 허장강과 흰 재킷에 권색 바지 차림의 배삼룡이 보인다. 1) 코미디언코미디는 이미 잘 알려진 스타 코미디언의 개성과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워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들을 일컫는 장르 명칭으로, 미국의 코미디 영화 연구자 스티브 사이드만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Steve Seidman, Comedian Comedy-A Tradition in Hollywood Film, UMI Research Press, 1981 참고.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는 기존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의 스타성과 레퍼토리, 퍼포먼스 등을 전시하면서, 195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기에 영향력 있는 장르로 형성되었다.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 형성과 전개에 대해서는 박선영, 「한국 코미디영화 형성과정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1 참고. 2)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초창기~1976』, 영화진흥공사, 1977, 46~48쪽의 “국산극영화 내용별 제작실황”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이 수치는 멜로드라마가 거의 60-70%를 차지했던 상황에서 결코 작지 않은 비율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연예인고액납세”, 『중앙일보』 1966.8.5.3쪽; “늘어가는 스타의 자가용차”, 『서울신문』, 1966.9.17.5쪽; “납세액으로 본 인기 바로미터”, 『조선일보』 1967.3.26.5쪽. 백금녀는 1965년 연예인 고액납세자 중 가수 분야 3위로, 이미자, 박재란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자가용 승용차를 가진 코메디언 4인(구봉서, 김희갑, 후라이보이, 백금녀) 중 한 사람이었다. 또, 1966년에도 가수 중 8위로 링크되어 고액납세자의 명단에 올랐다. 4) Helga Kotthoff,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2006, p.12. 5) Andrew Stott, Comedy, Routledge, 2005, p.104.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198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던 장르를 꼽는다면 ‘종교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멸종된 건 아니다. 최근 < 일사각오 >(권혁만, 2016) 같은 영화가 소박한 흥행을 거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바보야 >(2011)),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의 의자 >(2011)), 옥한흠 목사(< 제자, 옥한흠 >(2014) 등 종교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울지마, 톤즈 >(2010)나 < 소명 >(2009)처럼 오지의 성자들에 대한 작품도 있다. 다른 건 소속된 리그다. 최근 종교 관련 작품들이 다양성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면, 1980년대의 종교 영화는 메인 스트림 안에 있었다. 이 영화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당시로선 큰 흥행인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으며, 사극일 경우 거대 예산이 들어간 대작이었다. 특정 종교의 역사, 인물, 교리 등을 테마로 삼는 종교 영화는 1980년대 상업영화의 한 축이었으며, 비록 그 종교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강한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 가톨릭, 불교는 물론이고 증산도를 다룬 < 화평의 길 >( 강대진 , 1984), 무속을 소재로 한 < 피막 >( 이두용 , 1981) < 무녀의 밤 >( 변장호 , 1982) < 불의 딸 >( 임권택 , 1983) < 태 >( 하명중 , 1986) < 업 >(이두용, 1988) 등이 이어졌고, 수련을 통한 초능력을 다룬 < 단 >( 김행수 , 1986)이나 사이비 종교에 대한 < 백백교 >( 최영철 , 1993) 등도 있었다. 1980년대 이전에도 기독교와 가톨릭을 다룬 종교 영화들은 있었다. 그 영화들은 사극, 전쟁 영화, 반공 영화 등에 걸쳐 실존적 철학과 이념적 갈등과 역사적 사실 등을 다루었다. 유현목 감독의 < 순교자 >(1965) 최하원 감독의 < 새남터의 북소리 >(1972) 이성구 감독의 < 악마의 제자들 >(1974)과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1973) 당대 종교 영화 트렌드의 중심은 기독교였다. 조짐은 1970년대 말부터 있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주요작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기독교 영화의 붐이 일기 시작했던 걸까? 이것은 당시 기독교의 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5일 동안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대회엔 전국 각지의 크리스천이 300만 명 이상 모였다. 이후 1974년엔 김준곤 목사의 엑스플로 대회가 있었고, 1977년엔 민족 복음화 성회, 1980년엔 세계 복음화 성회, 1984년엔 선교 100주년 대성회 그리고 88 세계 복음화 대성회 등이 이어졌다. 이 시기 뉴스에서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접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1980년대 중반에 오면 ‘1,000만 기독교인’이라는 자체 집계가 발표된다. 이른바 ‘대부흥의 시대’였다. 자고 나면 교회가 생겨나던 시절, 기독교 영화에 대한 잠재적 수요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이때 < 사랑의 원자탄 >(강대진, 1977)이 포문을 열었고 뒤를 이은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임원식 , 1981)는 서울 관객 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흥행작이었다. 다음 해 < 죽으면 살리라 >(강대진, 1982) < 하늘 가는 밝은 길 >( 김성호 , 1982)이 나왔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신앙을 실천했던 손양원 주기철 안이숙 등이 주인공이었던 이 영화들은 한참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 기독교인들에겐 일종의 교재였다. 실화 영화로서 이 작품들이 지닌 이분법적이고 감정적이며 극적인 감수성은 절절한 간증이 되어 신도들의 가슴을 쳤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최하원 감독은 < 초대 받은 사람들 >(1981)과 < 초대 받은 성웅들 >(1984)를 내놓는다. ‘천주교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초대 받은 사람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약 15만 5,000명의 서울 관객을 모은 흥행작. <초대 받은 성웅들>은 ‘천주교 조선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며 서울 대교구의 지원으로 제작되었다. 최인현 감독의 < 소명 >(1984)도 200주년 기념작. 이 작품들은 이승훈 김대건 이벽 등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올 시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그린다. 특히 1984년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며 가톨릭의 열기가 뜨거웠던 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주요 종교 영화들의 중심 테마는 순교와 박해였다. 이 영화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하드고어에 가까운 표현을 하기도 했다. <사랑의 원자탄>은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해방 후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그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들였다. (상단 오른쪽)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로 결국 옥사한 그의 이야기는 <하늘 가는 밝은 길>과 <일사각오>로도 영화화되었다. (하단) 최하원 감독의 <초대 받은 사람들>과 <초대 받은 성웅들>.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오던 시기 겪었던 박해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처럼 1980년대 초 기독교와 가톨릭이 이끈 종교 영화의 열풍은 종교적 이벤트와 신도의 양적 성장을 토대로, 억압 받았던 수난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의 만남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 영화들을 통해 기독교와 가톨릭은, 신분제 사회와 식민지 체제에서 평등 사상과 민족 정신을 주장하고 지켰던 종교로서 일종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흥미로운 건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사례다. 원래는 1977년에 제작되어 개봉 예정이었지만, 유신 정권은 이 영화에서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는 주기철 목사(신영균)의 모습을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으로 여겼던 모양. 그래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던 영화는 198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고, 큰 흥행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종교 영화들이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전진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시기 충무로는 산업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떠오르던 종교 이슈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큰 흥행은 자극제 역할을 했고(이 영화는 속편이 기획되기도 했다), 무산되긴 했지만 <정의가 나를 부를 때> <빛을 마셔라> <이천석 목사> 등도 제작될 예정이었다. 기독 영화인들의 모임도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모이기 시작한 그들은 1976년 ‘새롭게 하소서’라는 공연으로 연예인 선교의 단초를 마련했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는 개런티 없이 참여하기도 했다. 신영균 고은아 를 비롯 최민수 의 어머니인 강효실 , < 예수 천당 >( 홍의봉 , 1991)의 이영후 , 그리고 임동진 문오장 구봉서 곽규석 윤복희 (가수) 송도영 (성우) 등이 대표적 인물. 한편 종교적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감독들도 등장했는데 복음주의적 입장의 강대진 감독은 <사랑의 원자탄>과 <죽으면 살리라>를(그런데 1984년에는 증산도에 대한 <화평의 길>을 연출하기도 했다), 실존주의적 입장의 유현목 감독은 < 사람의 아들 >(1981)과 < 상한 갈대 >(1984)를, 선교적 입장의 홍의봉 감독은 < 휴거 >(1990) < 천국의 비밀 >(1990) < 예수 천당 >을 내놓았다. 여기서 1980년대 종교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장호 감독과 이동철(본명 이철용) 작가다. 그들은 한국 종교 영화에 본격적으로 ‘민중’의 개념을 가져왔다. 기독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찬송가였다. 이 영화들의 OST는 대부분 찬송가 멜로디의 변주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다 해방을 맞이해 극적으로 살아난 안이숙의 이야기인 <죽으면 살리라>. 가수인 윤복희가 주인공을 맡아,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들려준다. 이 시기 기독교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는 ‘회개’였다. <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에서 최자실 목사는 빈민촌에서 교회를 세우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킨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무당( 김을동 )이 회개하는 대목이다. 이동철 원작의 < 꼬방동네 사람들 >은 빈민촌의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그 중엔 고물 장수 목사가 있다. 그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 과부춤 >은 천민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를 이야기한다. 부흥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교회의 모습이 풍자된다. 그 시작은 <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2)였다. 안요한 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청준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신의 부름을 받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종교적 체험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한국 종교 영화가 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도시 빈민의 모습이다. 안요한(이영호)은 시력을 잃은 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판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모습은 이동철 작가 원작인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인)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도 등장한다. 영화에는 리어카를 끌며 고물 장사를 하는 목사( 송재호 ) 캐릭터가 있는데, 그는 ‘꼬방동네’(빈민촌) 사람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대형화와 함께 중산층화를 겪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소외 당한 자들에 대한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민중 교회가 등장했는데, 이런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 매체가 바로 영화였다. 이런 시각은 창녀촌을 배경으로 한 < 밤을 기다리는 해바라기 >( 엄종선 , 1982) 같은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의도하지 않게 드러나기도 했고, 김진홍 목사의 빈민 선교 이야기인 < 새벽을 깨우리로다 >( 이기원 , 1990)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김수형 , 1982)은 한국 대형 교회의 상징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최자실 목사(송도영)의 일대기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장호 감독, 이동철 원작의 <과부춤>(1984)은 본격적인 종교 영화는 아니지만, 당대 한국 기독교를 적나라하게 풍자한 수작이다. 광적인 부흥회, 돈에 눈먼 목사, 교회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신도 등 <과부춤>은 ‘천만 기독교인’ 시대의 이면을 들춘다. 이 영화는 단순한 기독교 비판에 그치지 않고, 종교 없인 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멘털리티를 보여주며, 그 이면엔 ‘가난’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세상에 대한 당대 기독교 영화의 관심은 불교 영화와도 일맥 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 만다라 >를 시작으로 1980년대 불교 영화는 끊임없이 속세와 종교적 깨달음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중광 스님의 이야기인 < 허튼 소리 >(김수용, 1986)를 비롯해 <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1989)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그리고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배용균 , 1989)까지 이 시기 불교 영화엔 사바 세계에 대한 미련과 번민이 있다. 종종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에 갇히기도 하지만(유난히 비구니 캐릭터가 많았던 건 그런 이유일까?), 관념적 화두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이후 임 감독은 <비구니>를 만들려 했지만, 촬영 도중 중단되어 결국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법난 이후 불교계와 정권은 갈등을 빚었고, 그 와중에 조계종은 이 영화의 제작을 반대하여 결국 중단 사태까지 간 것. 이후 감독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비구니>의 한을 풀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을 넘어, 세계 불교 영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를 전후로 충무로에 잠깐 불교 영화의 붐이 일었다. 실존주의자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 시기 종교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는 초월적인 기적의 순간을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초대 받은 사람들>에서 정혜(원미경)의 가슴에 십자가 빛이 새겨진다. 1980년대 종교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군사 정권의 군홧발 아래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전두환에게 달려가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었고, 불교계는 10.27법난(1980년)을 겪으며 초토화되었다. 가톨릭은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 기복 신앙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고, ‘종교 과잉’과 ‘사이비’의 시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카오스 속에서 ‘영적 상품’으로 기획된 종교 영화들은 전반기엔 기독교 영화가, 하반기엔 불교 영화가 중심을 이루며 1980년대를 장식했다. 하지만 1990년대 기획 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영화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기업 자본에게 ‘종교’는 매력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부활한 건 2010년 전후 즈음. 몇 편의 다큐멘터리가 다시 신앙과 선교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후 주기철 목사에 대한 <일사각오>를 비롯 < 신이 보낸 사람 >( 김진무 , 2014) < 로마서 8:37 >( 신연식 , 2017) < 산상수훈 >(유영의, 2017) 등의 극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90년대 말 다시 찾아온 한국영화의 부흥기는 많은 걸 바꿨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나 제작 시스템적인 환경까지도.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운드트랙이다. < 접속 > OST의 눈부신 성공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음악 시장에도 상업적인 가치가 있음을 발견한 제작자와 홍보사 그리고 감독들은 저마다 음악에 대해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기존 작곡가들과는 다른 지향점과 자양분을 갖춘 영화음악가들이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 이동준 , 조성우 , 조영욱 , 한재권 , 원일 , 이재진 등 젊은 음악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와 새로운 유행과 경향을 창조해냈다. 그 속엔 장영규도 있었다. 각종 무대 음악들과 어어부 프로젝트로 인디 씬에 독특한 충격파를 선사한 그는 아름답고 멋진 선율 뒤에 숨겨진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사운드를 찾아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왔다.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대중들의 입맛에서 벗어나 생소하지만 생생한 파격과 전위적인 혁신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에 매료되었고, 장선우 , 박찬욱 , 이무영 , 김지운 감독 역시 장영규의 날선 색채를 좋아했다. 그는 그렇게 다양한 감독들과 작업을 이어가며 스펙트럼을 넓혔고, 어어부 프로젝트에서 영화음악가로 점점 진화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음반시장은 고사 상태가 되어 더 이상 영화 밖에서 한국영화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적어졌지만, < 타짜 >와 < 놈놈놈 >, 그리고 아직까지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 도둑들 >에 이어 2013년 여름 시즌을 뜨겁게 달군 화제작 < 은밀하게 위대하게 >와 < 감시자들 >까지 흥행작들의 음악을 담당하며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길이 넓어지기도 했다. 독립영화에서부터 단편, 상업영화까지 전천후로 활동하는 장영규는 현재 한국영화음악 지형도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있다. 어느새 중견으로 올라선 경력도 그러거니와 꾸준한 작업량과 다양한 장르적 도전 정신, 또 복숭아라는 창작집단 체제를 통해 공동작업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시도들이 무엇보다 그렇다. 그는 한국영화시장의 황금기와 부흥기에 태동한 작가주의형 영화음악가인 동시에 산업과 시스템이라는 도식적인 틀 안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아 자신의 색깔을 영화에 오롯이 투영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영화음악의 장인이다. 단명하기 쉬운 이 세계에서 그의 지속적인 생산력과 도전적인 예술성에 대해 진지한 고찰과 물음이 필요했다. 최근 <광부화가들>이란 연극의 음악감독을 맡으셨더라고요. 아, 그건 3년 전쯤 했던 작업인데, 다시 한 번 재공연하는 거 같아요. 8월 달엔 전통음악 그룹 ‘비빙’의 공연이 있었고, 전통가곡을 부르는 이기쁨 공연에도 편곡으로 참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와 연극, 공연과 밴드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시는데, 각 분야별 차이가 있을까요? 저도 차이를 생각해보는데 별 차이가 없는 거 같아요. 영화나 연극이나 뭐, 작업에 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거보다 작업을 어떤 사람하고 하느냐 그런 게 더 큰 차이인 거 같아요. 어떤 연출가와 하느냐, 어떤 영화감독과 하느냐 그런 게 중요하지 장르는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작품수가 굉장히 많으세요. 상업영화도 하시고, 단편영화나, 독립영화, 다큐도 하시고요. 한해에 적게는 2~3편, 많게는 7편까지도 하시는데, 이런 다작은 앞에서 말씀해주셨던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일까요?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는 베이스 연주자로 시작을 했다가, 연주 말고 다른 음악작업으로서 처음은 91년도에 안은미 씨를 알게 되면서 한 무용음악 작업이었어요. 그러면서 여러 장르의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초반에 들어오는 일을 가리지 않고 여러 가지를 하게 되었죠. 일이 많이 없고 한가할 때는 들어오는 데로 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여러 장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또 사람들이 가지를 치고 나가다 보니까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이지경이 됐죠. 감독님도 다양한 분들과 작업을 하셨잖아요. 박찬욱, 이무영, 최동훈, 김지운, 이재용, 민규동, 김기덕, 나홍진 등... 생각보다 또 그렇게 다양하진 않아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오래 길게 작업을 하는 거죠. 영화음악을 맡으실 때 선호하는 지점이나 방향성이 있으신가요? 시나리오를 읽거나... 읽어도 사실은 어떻게 만들어질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요. (웃음) 같은 내용이라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더라고요. 작업을 하실 때 감독님과 상의나 토의를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꼭 그렇진 않아요. 오히려 그냥 만들어보고 들려주고. 음악이란 게 말로만 해선 잘 안 되는 부분들도 많아서 빨리빨리 들려주는 걸 좋아하죠. 시나리오를 먼저 받으셨을 때 작업을 시작하시나요? 예전에는 그래 왔었어요. 시나리오를 받고 데모를 만들어서, 영화 시작하기 전에 어느 정도 음악적 콘셉트를 잡아놓고. 그러고 촬영을 시작하면... 감독도 그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을 하고요. 그런데 요즘에는 영화 만드는 환경이 많이 달라졌어요. 촬영이 시작된 후에 음악감독을 구하는 경우도 많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미리 해서 어떻게 할 거냐, 그랬는데, 요즘은 심지어 촬영 끝나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편집본 보고 작업하는 경우도 많아졌죠. 감독님은 예전 방식이 더 좋으신 건가요? 우리나라 영화 후반작업이 굉장히 짧아요. 짧은 시간 안에 부딪힐 문제들을 미리 해결하고 가니까 (예전 방식이) 시간적으로 많이 도움이 되죠. 촬영이 다 끝나고 편집을 하다가 음악작업을 하다가도 두세 번을 뒤집는 경우가 있어요. 그건 어찌됐든 영화적으로 굉장히 마이너스가 되는데, 그걸 찍기 전에 미리 하고 가는 건 나중에 집중할 수 있는 거니까 영화에 큰 도움이 되죠. 초기 작품들을 살펴보면 ‘어어부밴드’의 연장선상의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걸 (사람들이) 원했던 거죠. <반칙왕>같은 경우는 어어부에서의 그런 음악을 쓰고 싶어서 저를 데리고 온 거고요. 그때는 전 영화음악 하는 사람이라기보단 어어부가 더 먼저였으니까. 사람들이 절 찾는 이유는 어어부의 음악 색깔이었던 거죠. 시간이 지나면서 스타일이 좀 바뀌신 거 같아요. 저도 바뀌고. 제가 생각하는 것도 바뀌고. 바라보는 것도 바뀌고. 어어부도 활동을 잘 안하고. (웃음) 초반에는 그래서인지 노래나 송트랙이 많았었는데, 연주 음악 비중이 점점 높아졌던 거 같습니다. 영화도 그때랑 지금이랑 한국영화 스타일이 많이 바뀐 거 같아요. 음악 쓰는 방법도 많이 바뀌었고. 그러면서 저도 바뀐 거 같고. 영화와 함께 바뀐 거죠. 예전 작업하신 영화들이 키치적이고... 영화가 다 그런 영화들이었어요. < 철/파/테 >나 < 다세포 소녀 >, < 소년, 천국에 가다 >, < 미쓰 홍당무 >... 어떻게 보면 좀 범상치 않는 영화들인데. 사실 국내에서 이런 작품들의 음악적 대안은 장영규 감독님 말고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 스타일에 대한 고민도 있으셨나요? 그때 그 영화들이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작업을 했지, 제 음악에 영화를 맞춰나갈 수는 없죠. 초반 몇 작품은 그런 걸 서로 원했던 거 같은데, 그 뒤에는 영화가 그런 영화였기 때문에 그렇게 작업을 한 거고요. 요즘은.. 그런 영화들이 안 들어오고, 또 잘 안 만들어지고. <다세포 소녀>는 개인적으로 충격이었습니다. 중간에 ‘무쓸모 교가’를 들어보면 중간 중간에 반야심경이 나왔다 할렐루야가 나왔다 한국적인 음색도 들리고 종잡을 수 없는 사운드였는데요. 그런데... 원래 의도에 비하면 영화가 좀 얌전하게 나온 거 같아요. 영화보다 음악이 더 좋았던 거 같습니다. 영화는 정말 얌전한 느낌이 있었거든요. 음악도 더 막나가야 하는데 영화가 너무 얌전해서... (웃음) 저도 좀 더 얌전하게 갔어요. 사운드트랙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재용 감독의 다른 영화 < 여배우들 >도 독특한 시도였던 거 같아요. 다큐와 허구를 섞은. 그래서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고 사용했는지 궁금합니다. 흡사 이지 리스닝 계열이나 라운지 뮤직을 떠올리게 만드는 듣기 좋은/쉬운 음악들이었는데? 그렇죠. 영화 자체가 벌어지는 공간 자체가 사진 찍는 스튜디오였고, 그런 스튜디오에서 나올법한 음악들, 사진 찍는 사람들이 그런 음악들 많이 틀어놓고 작업하고. 그런 것들을 고려했던 거 같아요. 이야기보다는 그 공간과 배우들의 분위기를 맞춰주는 음악들이었죠. 이재용 감독님과의 작업은 어떠셨나요? 이재용 감독과는 워낙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 한 90년대 중반? 94년 다큐 <한 도시 이야기> 할 때부터, 그전부터 알던 사이여서 같이 일하면 편해요. <다세포 소녀> 의뢰 들어올 때 좀 놀라셨겠어요. 만화는 보셨죠? 네, 이걸 가야 하나 고민 좀 했었는데... (웃음) 그러고 보면 최신작인 < 은밀하게 위대하게 >도 웹툰 원작의 영화에요. 이 작품 음악은 <다세포 소녀>하고는 좀 다른 거 같은데, 좀 더 진지하고 공격적인 느낌이 났습니다. 이 영화의 경우, 원래 콘셉트는 앞의 부분이 코미디잖아요. 워낙 코미디이니까 아예 음악을 안 쓰고, 거기는 음악이 필요 없을 거 같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이 간첩임을 고백하는 순간부터 정색하고 음악을 쓰고 싶었는데, 웃겨야 한다는, 뒤는 흥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이 들어와서 음악도 그렇게 진행하게 됐죠. 처음 의도와는 좀 다르게 진행됐어요. 그렇다면 최근 작업하신 작업 중에서 감독님의 의도와 가깝게 된 음악은 어떤 걸까요? 영화사가 아직도 살아있는 영화의 작업들. 영화사 집의 <감시자들>, 또 최동훈 감독도 자기 영화사가 있으니까. 그런 영화사와 작업하면 투자사에서 끝까지 한 번도 안 와요. 그 음악이 어떻다 말을 안 해요. 그렇지 않고 감독이 약간 힘이 없거나, 영화사가 있어도 그냥 이름만 있는 영화사라거나, 할 경우에는 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믿고 따라라, 죠. <감시자들> 같은 경우는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이 영화는 감독들과의 작업이었어요. 그런 작업은 즐거우시겠어요. 그게 원래 작업인거죠. (웃음) <감시자들>같은 경우는 테크노나 일렉트로닉 사운드도 강하고요. 달파란 씨와의 공동 작업이었잖아요. 영향이 좀 있었는지요? 요즘 영화가 스타일이 바뀌는 거 같아요. <감시자들> 같은 경우는 할리우드 스타일로 많이 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음악도 할리우드 스타일 붙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런 방식의 음악을 하게 됐어요. 선율 같은 건 거의 없고, 음악이 공기처럼 영화 전반에 계속 있으면서 흐름을 만들어주는 역할이었죠. 음악이 정말 많이 쓰였던 거 같아요. 거의 한 시간 반 음악이 나올 거예요. 공동 작업을 하시는 데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지 궁금합니다. 테마나 선율을 공유하고, 전체적인 톤도 맞추는지. 아니면 각자 다른 큐들을 맡아 진행하는지. 그렇게 큐를 나누기도 하고요. 영화마다 좀 다르긴 해요. < 달콤한 인생 >이나 <놈놈놈>같은 경우는 전체 음악이 많지만 반복되는 지점도 없고 장면마다 음악이 다 달라서 거의 곡을 같이 만들었고, <감시자들>같은 경우는 어떤 테마가 있어서 그게 10분, 20분을 끌고 가고 해서 처음 콘셉트를 잡을 때는 둘이 같이 이야기하지만, 어떤 부분을 맡으면 각자 작업하게 될 수밖에 없는 때도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럴 경우) 만들어놓고 서로 이야기하고 조율,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거죠. 필모에서 흥행작이 늘어났어요. 흥행이 잘 되는 작품을 고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작품들을 맡았는데 흥행이 잘 된 건가요? (웃음) 아니에요. 정말 제 필모 초반 영화들은 흥행이 하나도 안됐던 영화들이었잖아요. 그랬는데... (잠시 생각) 최동훈 감독을 만나면서부터...? (웃음) 작품을 고르실 때, 어떤 관점으로 고르시나요? <은밀하게 위대하게> 같은 경우도 궁금합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같은 경우에는 감독이 정해지기 전에 먼저 제가 정해졌어요. 시작 자체가 배우와 만화 때문에 이루어진 희한한 프로젝트였죠... 일이 많이 들어와서 제가 놓고 고른다고 생각하시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고요. 같이 하는 사람들과 계속 다음 작업을 같이 하거나, 했던 영화사에서 다음 작업을 의뢰받거나, 그런 경우가 많지. 찾아와서 시나리오 주고 같이 하자, 이런 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쌓아놓고 고르는 그런 건 아니에요. (웃음) 의외의 선택도 있습니다. <나는 공무원이다> 라던가. 그 영화는 감독이 동네 친구예요. < 모피를 입은 비너스 >는? 그건... 주인공이 (어어부의) 백현진 씨였고... 조민호 감독님과는 단편부터 작업을 하셨어요. 가까운 데 살고 술 먹다 친구가 된 그런 감독이에요. 나이도 비슷하고. < 박수건달 >같은 경우는 전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조진규 감독이 워낙 조폭물을 많이 하셨는데. 장감독님 필모를 보면 조폭코미디가 없었잖아요. 물론 이 영화도 잘 됐고요. 그죠, 제가 (조폭) 코미디는 잘 안하죠. 정말 안 할라고 했는데. 이 작품이 들어오게 돼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생각보다 < 조폭 마누라 > 조진규 감독이 찍은 영화들이 다 잘 만들었다고 주변에서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전 이런 건 안할래, 그랬는데, 달파란 씨가 이런 것도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하는 권유가 있었어요. 이런 것도 한번 해봐야지. (웃음) 그래서 고민하다 한 번 해보게 됐는데, 확실히 잘 맞진 않는 거 같아요. 원래 영화가 무속이나 유령 같은 부분이 나와서 판타지로 풀면 좀 재밌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콘셉트가 바뀌면서 많이 달라졌죠. 이무영 감독과는 세 작품을 같이 하셨어요. < 휴머니스트 >, <철/파/태>, < 아버지와 마리와 나 >. 음악을 잘 아는 감독님이시잖아요. 팝컬럼리스트로도 유명했던 분인데 음악적인 요구 사항이 까다롭진 않은지. 관여를 하신다던가. 이무영 감독님이요? 안 그러세요. <철/파/태>에서 공효진 과 조은지 가 부른 ‘침대의 끝’이란 노래가 좋았습니다. 어어부의 보컬인 백현진 씨의 걸걸한 노래와 달리 이런 팬시한 느낌도 있구나 싶어 놀랐어요. 그와 같은 경우는 제가 어렸을 때 그런 음악들을 듣고 자라기도 했고요. 어어부 말고 다른 쪽에 있는 저의 감성이기도 해요. 그런 감성을 좀 더 보여주세요. 굉장히 좋아하는 데 사람들이 잘 몰라서 개인적으로는 섭섭하더라고요. 영화가 좀 더 잘 됐으면... 굉장히 대중적인 노래였는데. (웃음) 그렇죠. 목소리도 통통 튀었던 걸로 기억해요. < 엔티크 서양골동양과자점 >에서 김씨&알리가 부른 ‘케?파라파이스’라는 빅밴드/재즈 스타일의 뮤지컬 시퀀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민규동 감독님이 요구하신건가요? 뮤지컬을 하고 싶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뮤지컬 방식으로 작업을 했었어요. 그럼에도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인 감독을 뽑으라면 김지운 감독과 최동훈 감독입니다. 특히 <달콤한 인생>의 경우는 스페인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 최우수음악상 수상했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음악은 라틴 사운드였는데. 그래서 걔네들이 동양의 이상한 애들이 우리 전통음악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했구나, 그래서 기특해서 준 게 아닌가 싶어요. (웃음) 음악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달콤한 인생> 사운드트랙이 어찌 보면 최초의 느와르 액션영화음악이었는데. 작업할 때 어땠나요? 그렇긴 한데 액션이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웃음) 그 영화의 경우에는 절반을 영화 찍기 전에 음악을 완성한 상태였거든요. 어떤 식으로 갔으면 좋겠느냐 하면서 작업했던 것들이 50%정도 사용됐죠. 김지운 감독님 같은 경우 작업하실 때, 디렉팅이 많은 편이신지? 김지운 감독님 같은 경우는 음악을 끼고 사는 스타일이라 많은 음악을 들려주죠. 요즘 이런 노래 듣는데, 이런 거 재밌다. 이것저것 들려주는 걸 좋아해요. 거기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도 있죠. <놈놈놈>에는 < 킬빌 >에 나왔던 음악 ‘Don’t let me be misunderstood’가 사용됐는데, 혹시 이 음악의 대안으로 작업됐던 음악도 있었나요?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의 경우는 감독님이 꽂혔던 음악이고요. 편집할 때부터 그 음악을 깔고 편집하셨던 영화에요. <킬빌>에 나왔던 음악이라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했었는데, 대안이 딱히 있지도 않았고요. 감독님의 확고한 의지도 있었고. 새로 연주하신 건가요? 네, 새로 연주한 거예요. 그 음악은 저작권만으로도 몇 천 만원이고요. 음악 자체를 모두 사버리면 비용이 두 배 정도 올라가니까, 저작권만 사고 연주를 하는 쪽이 비용을 아낄 수 있는 거죠. 이를테면 저작권료만 5천이면 판권까지 모두 사면 비용이 훨씬 올라가는 거고요. 많이 비싸요. 그런 거 보면 나도 전곡을 만들고 그만큼 못 받는데... (웃음) 음악감독님이시니까 음악에 대한 저작권도 다 해결해야 하는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제가 하진 않죠. 한곡으로도 모자를 걸요. 최동훈 감독과는 <타짜>부터 작업하셨는데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마림바와 퍼쿠션, 비브라폰과 섹소폰 등의 조합으로 변화를 준 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할리우드 겜블 영화에서도 재즈 사운드를 많이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정중동의 느낌을 살려 묘하게 동양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처음 시작할 때, 워낙 예전 일본영화들을 좋아해서, 스튜디오가 전성시대이었던 그때 음악들을 좋아해서 그런 스타일의 작업을 언젠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영화를 못 만났는데, <타짜>를 보자마자 이런 컨셉트에 대한 제안을 했는데 다행히 최동훈 감독도 동의를 했고, 저도 하면서 굉장히 재미있었던 작업이긴 해요. 사운드트랙을 보면 곡목이 좀 특이해요. (편집자주: <타짜>의 트랙명은 ‘marimba + tom-tom 1’, ‘tom-tom + saxphones 1’ 등과 같이 악기 구성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OST를 만들고 나서 제목을 붙이는 게 정말 고역이거든요. 보통은 제가 붙이곤 해요. 생각나는 데로 붙이곤 하는데. 어떻게 보면 정말 의미 없죠. 만들 때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걸 만든 후에 붙여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제목 붙이는 걸 좀 싫어해요. (웃음) 영화에 쓰인 한대수 선생의 ‘불나비’도 좋았습니다. 김상국 선생의 ‘불나비 사랑’을 리메이크한 건데, 이를 고른 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불나비’는 최동훈 감독이 골라온 곡이었어요. 노래방에서 배우가 부르고, 김상국 씨 목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서 써보고 싶었는데, 한대수 선생님 연락 전에 김상국 씨를 찾아 봤는데. 건강이 안 좋으셨고. 그 때가 한대수 아저씨와 친할 때여서 또 노래의 힘도 있으시니까, 그래서 작업을 하게 됐죠. 영화와도 잘 맞는 거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대수 선생과 백현진 씨의 창법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한대수 아저씨의 곡을 들으면서 영향을 많이 받은 거겠죠. <철/파/태>에선 두 분의 듀엣곡도 있어요. ‘구멍난 그림자’라고. 그렇죠. 한 사람이 부른 걸로 아는 사람들도 있고. (웃음) < 전우치 >의 한국적인 사운드도 인상적이었어요. ‘궁중악사’같은 트랙은 독특하고 인기도 있었습니다. 지금 작업하는 ‘비빙’과도 연관이 있을까요? 비빙은 그것보다는 많이 좀 진지해요. ‘궁중악사’는 좀 코믹한 느낌이었죠. 재미있는 상황이어서요. 궁중에서 (그런) 음악을 좋아했어요. 그렇게 만들어 본거고요. 세 단계로 변화시켰던 곡인데, 최동훈 감독도 거기서 완전히 신나는 걸 만들어보고 싶어 해서 약간 유치하지만 작업해 본 거죠. 생각보다 (음원) 다운을 많이 받아서 깜짝 놀랐어요. <전우치>의 사운드트랙 컨셉에 대해 궁금합니다. 약간 클래식 한 느낌도 나는데요. 한국적이기도 하고 혼합적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영화라 두 가지를 모두 해줘야 했고요. 그 전에는 클래식 악기 사용을 별로 안했는데, 오케스트레이션 하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요. 그런데 그 영화에서는 스타일상 해야 할 부분이 있었어요. 영화에서 현악기들이 가지는 힘이 있어요. 완전히 대규모는 아니고, 오케스트레이션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처음으로 현악기 사운드를 시도해본 거 같아요. 이 영화는 주제선을 딱 하나 가지고 시작했어요. 정확한 테마가 하나 있고,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가져갔죠. <전우치>도 어떻게 보면 히어로 영화인데요, 히어로물 음악을 생각하신 건지요. 히어로 음악까지는 안간 거 같아요. 그랬다면 좀 달라졌겠죠? 음악이? 현대와 과거를 왔다갔다 하는 판타지에 중점을 뒀었어요. <전우치> 사운드트랙은 CD로 발매되지 않았습니다. 음원으로만 나와 있는데요. 음반 시장이 오래 전부터 잠수를 타면서 만들 필요조차 없어지기 시작했죠. 만들었으니까 그냥 내자, 이런 게 되어버리고.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계속 고민하게 되는 거죠. 영화음악 작업을 할 때 짧으면 한 달 반 안에 완성을 하고, 길면 서너 달 사이거든요. 그 사이 영화에 쓰일 한 시간 가량의 음악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영화에 들어가서 쓰이는 건 상관없지만, 따로 떼어놓고 듣다 보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도 확실히 있어요. (영화의)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그걸 그냥 (완성)했으니까 낸다는 건 잘 모르겠더라고요. 어떤 때는 몇 곡만 모아서 내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또 디지털 음원으로 내던지. 영화음악 CD를 내는 건 누가 내는 건가요? 요새는 아무도 안내죠. 예전에는 제작사나 투자사에서 돈이 되니까 냈고. 돈이 안되더라도 홍보 수단으로 냈고요. 지금은 그조차도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요. 지금은 작곡가가 진행해서 내기도 하고, 감독이 원하면 감독과 함께 진행해서 내기도 하고요. 지금은 원하는 사람도 없고 사는 사람도 없고. 그런 거죠. 그럼 최근 감독님께서 직접 진행해서 내신 경우가 있나요? 일단 <미쓰 홍당무> 같은 경우는 이경미 감독님이 정말 내고 싶다고 해서 저와 같이 돈을 내서 만들었던 경우였어요. 몇 십 만원씩 내서 300~400장 찍었어요. 그래서 자켓 디자인이 조금 허접해요. (웃음. 자켓을 살펴보더니) 아... 그래도 이건 엠넷에서 찍은 거긴 하네요. 최소 수량으로 찍은 거예요. 오히려 예전에 냈던 것들은 영화사에서 마케팅을 하고 홍보수단으로 쓰기 위해서 디자인이나 그런 부분들에 돈을 들였던 건데, 갈수록 안하게 되는 거죠. <미쓰 홍당무>에 쓰인 멕시코 음악 같은 경우는 저작권료가 얼마나 될까요? 그건 민요에요. 그래서 저작권료는 따로 없죠. 직접 녹음을 했고요. 일부러 그런 걸 찾는 거죠. 완전 저예산 영화니까 음악 제작비도 정말 적었거든요. 그런데 영화 자체가 계속 월드음악을 틀어대고 있으니, 그 선생이... 그렇다고 (월드음악을) 살 수도 없고요. 그래서 미국 쪽 음악대학 연주자들 중 멕시코 출신들을 찾아서, 그 친구들이 아르바이트로 마리아치 밴드를 하거든요. 그런 친구들을 섭외했어요. 그래서 너네들이 할 수 있는 포크송 곡목 리스트를 달라. 그런 다음 그 리스트를 받아서 감독과 함께 보고 골라서, 그쪽에서 녹음해서 보내준 거죠. 완전 초저예산으로 녹음한 거죠. 초기에는 호러 영화도 제법 맡으셨어요. 원일과 함께 했던 < 링 >을 비롯해, < 알 포인트 >나 < 4인용 식탁 >, < 여고괴담 4 목소리 >까지. < 얼굴 없는 미녀 >도 스릴러/호러 느낌도 있고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사운드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호러 장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렇죠. 좋아해요 그런 소리들을. 관심도 있었고요.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몇 작품을 했었죠. <알 포인트>같은 경우는 직접 맡은 건 아니고... (편집자주: ‘복숭아’로 달파란, 방준석, 이병훈과 함께 참여했다.) <4인용 식탁>이 제가 하고 싶었던 대로 했던 그런 작품이었어요. 주목받지 못한 작품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어떤 작품이 있으신가요? 전 < 복수는 나의 것 > 할 때 재미있었던 거 같아요. 그 작품 할 때, 박찬욱 감독님은 영화음악이 하나도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주문을 했었어요. 엔딩곡만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요. 그래서 엔딩곡만 만들어달라고 시작한 영화였죠. 그런데 하다 보니 뭐... 여기저기. 음악이 많이 쓰이진 않았어요. 음악이지만 음향처럼 쓰였어요. 나홍진 감독의 < 황해 > 작업은 어떠셨나요? <황해>를 작업했을 때, 나홍진 감독과는 굉장히 편했어요. 아무도 안 나타났거든요. 나홍진 감독도 굉장히 잘 받아들이는 사람인 거 같아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음악이란 게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한하잖아요. 또 원하는 게 이거라 해도 그쪽으로 가는 길도 정말 무한하고요. 근데 보통 자기가 이해한 게 이런 거고 이건 자기가 여태까지 들었던 것과 달리 익숙한 것이 아니라면 거기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요. 애초의 의도에 대해 똑같은 효과가 있지만요. 익숙하지 않은 걸 못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어떤 걸 들어 왔는지에 대해 알고 맞춰나가야 하는 부분도 있어요. 그런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나홍진 감독이 받아들이는 편이었어요. 자신이 원하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지만, 저의 설명을 듣고 동일한 효과를 낸다는 것을 납득하면 그렇게 가요. 어쩐지 자신이 생각하는 곳 쪽으로 고집할 거 같았는데, 열려있는 분이더라고요. 편집이 개봉판, 감독판, 해외개봉판으로 이루어지면서 음악도 세 버전으로 나왔어요. 김기덕 감독과 딱 한 편 하셨습니다. < 해안선 >을 하실 땐 어떠셨어요? 후반작업을 할 때 감독님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워낙 바쁘셔서. 그래서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찍기 시작할 때 회의를 한 번 하고. 음악을 만들 때 회의를 해야 하는데, 너무 바쁘셔서 만날 수가 없더라고요. 믹싱도 오래 안하시고 딱 하루 하시더라고요. 믹싱할 때 만났어요. 제가 다 들어봤는데, 잘 들었다고... 하나 두 번째 곡까지는 잘 넘어갔는데,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안 맞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김기덕 감독님은 후반작업하실 때 이미 다음 작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셨는지 어떤 음악은 여주인공이 나오면 계속 한 음악을 갖다놓으시고 그러셨는데, 전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요, 하고 부닥치다가 그래봐야 하루밖에 안 되니까 그냥 그러다 끝났어요. 음악 작업할 때는 재미있었는데 믹싱 하는 날에 반영이 안돼서 아쉬운 면이 있었어요. 워낙 빨리빨리 하셔야 하는 분이셔서, 감독님은 별로 디테일이 중요하신 것 같지 않더라고요. 이정도면 됐구 이정도면 됐구... (웃음) 이런 이야기를 예전 인터뷰에서 했었는데 감독님이 그걸 보시고 좀 아쉬워하신 적도 있었어요. “아 그 때 잘 했는데...” 그러시더라고요. (웃음) 보통 감독님께서 음악을 만드시고 믹싱하는 날 만들어진 음악을 끼어 넣는 그런 방식인 건가요? 아뇨, 그런 경우는 거의 없죠. 음악 작업을 하는 중 감독님이 계속 오시죠. 바꿔 붙여보고, 줄여 붙여보고 그런 작업들을 하게 돼요. 최동훈 감독 같은 경우는 <도둑들> 할 때 15일 정도를 저희 집에 와서 하루에 7~10시간씩 음악을 붙여보고 그런 작업을 했었어요. 아까 예전에는 공포영화도 해보고 싶었다 하셨는데, 지금은 이런 영화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런 게 있을까요? 요즘 흥행이 안 되는 영화는 아예 들어가질 않잖아요. 음... 폴 토마슨 앤더슨의 영화 같은 작품이 들어온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 영화계에서는 (제작이) 들어갈 수도 없을 거 같아서요. 너무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의 음악들을 해야 할 일이 점점 많이 생기는데 사실 그런 게 재미있지는 않거든요. 그렇지 않은 작업들도 좀 해보고 싶긴 해요. 그럼 단편영화나 독립영화 쪽에서 그런 감독님의 스타일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근데 단편영화는 또 호흡이 짧아요. 뭔가 큰 걸 끌고나가긴 힘들고, 딱 하나 정도예요. 한 가지 호흡으로 딱 끝나버려요. 독립영화 중의 장편들, 그런 쪽에서 자유롭게 시도해보실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감독님께 선뜻 의뢰 드리기가 힘들 수도 있겠네요. (웃음) 어려워하더라고요. (웃음) 처음 어어부 프로젝트의 느낌이 오래가실 것 같은데, 지금은 익숙한 장르적인 음악도 하시고. 약간 타협을 하시는 건가요? 타협인 건 아니죠. 영화가 그런 걸 요구하니까 그런 음악을 하게 되는 거 같아요. 초반에는 그런 부분들을 고민했었는데 영화음악이란 게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거기 때문에 내 스타일이 크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러다보니 그 영화에 맞는 음악을 하게 되는 거죠. 영화음악을 작업하면서 한계나 시스템에 부딪히셨던 부분이 있다면요?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제작사와의 관계가 있겠죠. 그리고 작년, 올해 극장의 음악사용료 부분도 환경 요인이죠. 그게 결론이 어떻게 났죠? 결과는... 음악감독들은 거기서 제외가 됐죠. 그 자체가 굉장히 애매하긴 해요. 그 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서 해결되기는 힘든 것 같고. 사실은 그것 때문에 저희가 손해 보는 것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다른 쪽에서는 음악감독들이 떼돈을 벌려고 그런다, 그렇게 보기도 하고요. 그런 일이 생기면서 계약서가 굉장히 안 좋아 졌어요. 현실은 변한 게 없는데요. 변한 건 안 좋아진 계약서인거죠. 지금으로썬 변한 게 없지만 앞으로 분명히 발생될 일이라 생각하고 그걸 음악감독에게 짐을 지우는 계약서가 나오게 된 거죠. 어떤 계약서가 나오게 되었나요? 우선 저작권을 넘기라는 계약서가 처음에 오기 시작했어요. 저작권을 넘길 수는 없다. 넘기려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주고 넘기라고 해야 할 텐데, 음악감독에게 주는 비용으로 저작권까지 달라, 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죠. 전 그래도 오래했으니까 그런 계약서를 함부로 못 내밀어요. 그렇지만 새로 시작하는 친구들은 일단 이 시장에 들어와서 일을 시작하는 게 먼저이기 때문에 그런 걸 다 포기하고라도 그런 (불리한) 계약서를 쓰게 되는 거죠. 그럼 그런 계약서를 쓰고 작업하는 분들도 계시다는 거네요? 있을 거예요. 작년부터 새로운 음악감독들이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 인디 쪽에서 활동하시던 분들도 많이 나오고요. 그런 이유가 불리한 계약서로도 작업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사람들을 찾는 거죠. 그리고 어떤 대기업에서는 자기네들이 음악감독들을 모아 계약해서 스튜디오처럼 작업하겠다, 이런 형태도 생기고 있고요. 저희가 만든 곡 말고 삽입곡들이 있는데 공연권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걸 음악감독이 책임을 진다, 이런 항목도 있고요. 아직 감독님은 그런 계약서를 서명하신 적은 없는 거죠? 하지만 저작권의 어느 부분은 계속 넘겨줘야 하는 거예요. 영화음악 공연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영화는 어쨌든 다 만들어진 다음에는 상품인 거잖아요. 극장에서 트는 거니까, 방송국에서 음악을 틀면 거기서 발생되는 비용을 내고 그런 건데, 즉, 거기서 내냐 안내냐를 결정지으면 되는 건데, 그게 아니라 이걸 누가 내느냐로 거꾸로 오게 된 거예요. 극장과 투자사가 같은 회사니까 극장은 투자사가 내게 하자, 이렇게 되고, 투자사는 제작사로 미루고. 그럼 차라리 안 받는 걸로 하면 문제가 안 되는데, 영화음악 감독이 만든 건 안 받고, 삽입곡은 받는다, 그렇게 돼버린 거예요. 이러면 되게 이상한 거잖아요. 제작자 협회나 피디 협회에서는 와서 한국영화 이렇게 힘든데, 왜 받으려고 하느냐, 그런 말도 하고요.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영화 산업 이야기를 하느냐, 극장은 돈 잘 벌고 있는데, 왜 그걸 이쪽으로 넘겨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렇게 하다 보니 끝이 않나요. 저작권료가 많이 들어오세요? 안 들어와요. 액수로 따지면 OST를 내서 거진 안 팔리지만, 좀 팔린 게 <달콤한 인생>, <도둑들>이에요. 그거 팔릴 때 인세가 들어오는 거 빼고는, 몇 십만 원도 안돼요. 노래방, 음원 다 합쳐서요. 저작권협회 자체가 가요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단체라 방송국과는 1년에 통으로 계약을 한 다음 거기서 사용된 음악을 정산해요. 그런데 실제로는 가요 프로그램만 정산에서 나눠주는 거예요. 방송에서 쇼프로나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곳의 배경음악으로 영화음악이 사용될 때도 있지만, 집계가 안돼요. 그래서 다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냐, 고 문의를 하면 집계를 안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집계를 해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화가 나서 한 달을 직접 집계해서 보내 봤어요. 그것도 나중에 알아봤더니 가요의 1/20을 주는 거예요. 집계도 안하고 비율도 1/20이고. 또 말하면 방송국에 큐시트를 내라고 했는데 안주네요, 이런 말을 하고 있고. 그런 저작권협회에서는 영화가 큰 시장이 된 거잖아요. 그래서 영화음악가들을 모아서 이야기했는데, 결국은 삽입곡들만 받아주게 된 거죠. 삽입곡에 대한 음악감독님들의 느낌이 다르겠어요. 감독님들은 또 본인이 좋아하는 특정 음악을 사용하고 싶어 하실 거잖아요. 근데 뭐... 영화마다 다른 거 같아요. 그 삽입곡이 그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냐에 따라 정말 필요한 삽입곡이 있는 거 같고, 감독이 그냥 좋아하는 노래, 옛날부터 쓰고 싶었던 노래를 그냥 쓰길 원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건 이제 못쓰게 말리죠. 영화제작비에서 그런 지출을 해야 하느냐, 그런 효과가 있느냐. 그런 걸 따지죠. 하지만 써야할 곡이 있다면 쓰긴 해야죠. 좋아하시는 외국 영화음악가가 있으시다면요? 영화음악 감독 중에는 구스타보 산타올라야를 좋아해요. <이터널 선샤인>을 작업했던 존 브라이언도 좋아하고. 어렸을 때는 고란 그레고비치도 좋아 했었고요. 60년대 일본영화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어요. 딱 음악가는 모르겠는데 그 당시 스튜디오에 소속된, 스즈키 세이준이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영화의 음악들을 되게 좋아해요. 쓰는 방식도 되게 독특했고, 자극적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당시 영화가 그랬던 거 같아요. 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작품은 어떤 게 있나요? 준비하고 있는 건 배두나 주연의 < 도희야 >라는 작품이 있고요. 아직 가제인데 이도윤 감독의 <좋은 친구들>이라고. 12월 중에 촬영이 들어가는 걸로 알아요. 또 박찬욱, 박찬경 감독이 서울시에서 하는 <우리의 영화, 서울>도 준비 중이에요. 예전에 리들리 스콧이 (유튜브에서) 했던 것처럼, 서울을 주제로 일반인들이 찍은 것들을 이용해서 영화로 구성하는 작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