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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E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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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영상]〈해운대〉제작진 내놓은 야심작 퀵, 조범구감독 말한 영화 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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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영상](해운대)제작진 내놓은 야심작 퀵, 조범구감독 말한 영화 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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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내 영화가 현실이 되다니…이유 모를 자책감에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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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의 박중훈 "일본, 영화보다 훨씬 참혹 … 재난 잘 극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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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제작진의 액션블록버스터 ′퀵′, 7월 21일 개봉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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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한국을 찾아서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한국 영화평론가가 '한국'영화를 대하는 법) 이 원고를 청탁받은 날, 나는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열리는 대담에 참여했다. “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 기획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1990s 시네필 대담 part 2”라는 제목의 대담이었다. 하길종 의 < 화분 >(1972)의 상영 뒤, 1990년대 사설 시네마테크를 운영했던 시네필과 1990년대생 영화평론가 사이의 대화를 만들고자 했다. 준비해 간 질문 중 하나를 옮겨보자. “이번 기획전 상영작을 보고 있자면 90년대 비디오테크에서 상영된 영화들이 지금은 영화사의 ‘정전’으로 다뤄지는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타르코스프키, 고다르, 파스빈더, 앙겔로풀로스 뿐 아니라 데이비드 린치나 그리너웨이, 오시마 나기사처럼 당시엔 일정 부분 ‘컬트’로서 소화되던 감독과 영화들도 지금의 관점에서는 영화역사의 만신전에 오른 이름들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오늘 대담과 붙여서 상영된 하길종의 <화분>은 하나의 예외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중략) 이번 기획전에 <화분>이 포함된 것은 90년대 시네필들이 단순히 영화 교과서에 수록된 정전들을 직접 감상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영화를 (재)발굴 혹은 (재)발견하려 시도했음을 드러내는 것만 같습니다.” 기획전의 라인업을 보며 느꼈던 의문 중 하나를 옮긴 질문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타르코프스키, 고다르, 파스빈더 등의 이름과 함께 하길종을 배열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상영작이 꼭 <화분>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저 자리에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을 놓았더라도, 이만희 의 < 휴일 >(1968)이나 김기영 의 < 하녀 >(1960)을 놓았더라도 어딘가 어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어로 글을 쓰며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영화를 상대하는 한국의 영화평론가로서, 한국영화는 어딘가 이상한 존재처럼 다가온다. 한국영화라는 이름 뒤에 무엇이 따라붙든 간에 그것을 어색하지 않게 납득하는 것은 아마 이뤄지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국영화란 무엇일까?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한국인이 만든 영화? 한국 자본이 투입된 영화? <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2023)에서 노라(그레타 리)는 남편에게 해성( 유태오 )을 설명하며 “Korean”이라는 단어를 아홉 번 사용한다. 그의 대사 속 한국인은 “평범한 직업과 평범한 삶을 사는 어른이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한국계(Korea) 친구와는 다른 한국인(Korean) 친구인 한국인-한국인(Korean-Korean)이다. 이 대사에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반발감 혹은 어색함이 한국영화를 대하는 나, 동료 평론가들, 그리고 온라인상의 무수한 글로써 존재하는 시네필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갖는 어떤 공통감일지도 모른다. <패스트 라이브즈> 중 대담으로부터 일주일 뒤 한국영상자료원의 ‘ 한국영화 100선 ’ 발표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 171명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 69명이 참여한 이 리스트를 통해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순위가 공개된 10편의 영화 중 절반이 21세기 영화이며, 봉준호 , 박찬욱 , 이창동 이라는 세 명의 이름뿐인 이 리스트를 두고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리스트에 오른 100편의 영화를 전부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또한 10편의 영화 를 적어서 보냈지만, 그 영화들이 한국영화에서의 ‘한국’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영화들은 한국의 파편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며, 한국영화라는 전체는 그 파편들의 집합을 통해 구성될 수밖에 없다. 케이팝을 필두로 무분별하게 난발되고 있는 접두사 “K-”가 결국 그 모든 파편의 집합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평론가의 일상과 비평에 관한 생각을 터놓는 지면에서 갑자기 왜 한국영화 이야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국의 시네필들이 한국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나의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단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후순위로 미뤄두고, 극장에 걸리는 한국영화들을 해외 영화들만큼 열심히 챙겨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영화에서 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고 재현되는지, 그것은 항상 이야기 바깥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의 “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중에서도 한국영화 ” 발표 녹취록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그 위에 2024년 버전의 ‘한국영화 100선’을 겹쳐 놓는다면, 한국영화는 마치 과거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뒤 봉준호와 박찬욱에 의해 부활한 것만 같다. 그리고 무수한 ‘비천한’ 영화들이 누락되어 사라진다. 나는 이 ‘비천한’ 영화들, 함연선의 발표에서 등장한 <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곽재용, 2004)와 < 달마야 놀자 >(박철관, 2001)를 포함한 일련의 조폭 코미디를 포함해, < 마파도 >(추창민, 2005), < 중천 >(조동오, 2006), < 고사: 피의 중간고사 >(창, 2008)처럼 지금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을 영화들이 나의 ‘비천한’ 한국영화의 리스트를 채우고 있다. 이 영화들이 얼마나 비천하고 구리며 지루하건 간에, 이 영화들은 한국을 담아내는 것으로서 보였다. 한국영화라는 하나의 장르 속에서, 한국은 영화적 장소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불쾌함을 자아내는 것일지라도. 지금의 한국영화들은 그것의 반대로 향하고 있다. 작년과 올해 개봉한 영화들을 떠올려 보자. < 밀수 >(류승완, 2023)는 극 중 등장하는 지도상 군산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이 명백함에도 ‘군천’이라는 가상의 지명을 사용한다. 소재만 바뀐 같은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 모가디슈 >(류승완, 2021), < 교섭 >(임순례, 2020), < 비공식작전 >(김성훈, 2022)은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을 찾아내려는 기묘한 시도를 선보인다. 이들 영화에서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이라는 각기 다른 중동 국가는 한국에서 폐기된 것처럼 느껴지는 ‘야만성’을 간직한 곳으로서, 한국과 대비되는 야만의 땅으로서 묘사될 뿐이다. 아예 지구 바깥으로 향하는 < 더 문 >(김용화, 2023)이나 국가 자체의 구분이 무의미한 미래를 그리는 < 정이 >(연상호, 2022)와 같은 영화들은 한국이라는 장소에 영화가 묶여있고 싶지 않다는 의지 표명에 가까워보인다. <중천>, <모가디슈> 중 <경마장 가는 길>, <괴물> 중 ‘한국영화 100선’의 리스트를 작성하며, 나는 두 편의 영화에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덧붙였다. “한국영화가 한국을 찍는 방법,” "충무로가 한국을 영화적 장소로 대했던 마지막 순간." 전자는 장선우 의 < 경마장 가는 길 >(1991)이고, 후자는 봉준호의 < 괴물 >(2006)이다. <경마장 가는 길>을 보며 우리는 90년대 서울의 풍경을, 붉은 십자가로 가득한 야경과 무너지기 이전의 삼풍백화점과 사람으로 가득해 “산책이 노동이 된” 길거리를 목격할 수 있다. <괴물>을 보며 여의도 한강공원의 풍경을, 합동분향소와 한강의 매점을, 일상의 풍경이 순식간에 장르적 장소로 변화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한국영화의 장소가 해외 로케이션으로, 그린스크린으로 옮겨감에 따라 사라진 풍경들, 길을 걷고 뛰는 사람들. 물론 지금의 영화들에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 여름날 >(오정석, 2019)의 거제도, < 아워 미드나잇 >(임정은, 2021)의 서울, < 아워 바디 >(한가람, 2018)의 한강공원, < 썬더버드 >(이재원, 2021)의 정선과 같은, 여전히 사람들이 걷고 대화하며 싸우고 도망치고 뒤따를 수 있는 영화적 풍경으로서의 한국은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충무로가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인상을 반복해서 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국에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이기에 한국영화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의무가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셔널 시네마의 기획을 재차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살아가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을 담아내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이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는 다른 예시일지도 모르지만, 엄태화 의 <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서울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한다. 이것은 마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2020)나 “호라이즌 제로 던”(2017)과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에서 시애틀이나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진 이전의 서울을 아주 짧게만 보여준다. KBS의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 제작진이 참여한,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짧게 보여주는 푸티지 영상은 아파트로 뒤덮인 서울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이윽고 저 멀리서부터 마치 밭이 갈리듯 땅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도큐먼트’로서의 아파트 이미지와 CGI로 그려진 아파트 숲의 연결은, 비록 그것이 완전한 폐허를 그려낼 뿐인 그린스크린 촬영의 결과물일지라도 연속성을 지닌다. 아주 짧게만 등장하는, 민성( 박서준 )이 대지진을 목격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곳은 지하철 3호선 금호역과 약수역 사이의 도로로, 실제 도로의 건물들을 스캐닝하여 제작되었으며, 저 멀리서 장충체육관의 건물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중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려내는 세상은 모두 세트와 그린스크린 촬영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로케이션 촬영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두고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영화는 <경마장 가는 길>이 그러한 것처럼 1990년대 초 종로의 길거리와 서초동의 모습을 담아내지도, <괴물>이 그러한 것처럼 2000년대 중반의 한강공원을 담아내지도 않는다. 다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실제의 지리적 공간을 끌어와 장르적 장소로 재가공한다. 물이 말라버린 한강 바닥에 넘어져 있는 동호대교, 금호동의 황궁아파트에서 한강을 건너 마주한 압구정의 백화점, 아파트에서 도망친 민성과 명화( 박보영 )의 뒤로 보이는 구 서울역과 그들이 도착한 명동성당. 물론 이 이미지들은 (서울역 정도를 제외하면) 명시적인 이미지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 공간들을 익히 알고 있으며 서울의 지리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공간들이 드러날 뿐이다. 당장 비슷한 (그리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고 처음엔 알려졌었던) < 황야 >(허명행, 2023)를 떠올려보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작동하는 지리학이 보다 구체적임을 감지할 수 있다. 나아가 지난 몇 년 간 재개발 이슈가 존재해온 금호동의 맥락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황궁아파트의 생김새 자체가 익숙한 이미지로서 다가오기도 한다. 지난 60년 동안 아파트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장소였다. *주1 아파트는 성공의 트로피이자 욕망의 대상이었으며, 중산층 거주 형태의 기본형이자 일상의 장소였고, 종종 비밀스럽고 두려운 사건들이 발생하는 장르적 장소였다. 영화 속 아파트의 모습, 아파트가 그려지는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한 편의 영화가 그려내는 시대상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포스트-아파트-아포칼립스라 부를 수 있을법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오래된 아파트와 신축 아파트가 바로 옆에 붙어 공존하는 서울의 특수성을, 실제의 지리학 위에 펼쳐냄으로써 ‘한국’이라는 맥락을 획득한다. 나는 이 영화가 대단한 걸작이거나 수작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아파트로 상징되는 한국의 부동산 자본주의를 너무 단순하게만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다만 < 해운대 >(윤제균, 2009)나 < 곤지암 >(정범식, 2018)에서 실제의 지역을 분리해 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 또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가상의 지명을 내세우고선 실제의 지도 위를 가리킨다거나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성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영화들과 달리, 어쨌거나 한국을 영화적 토양으로 삼아보려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흥미로울 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비춘 아파트 그러니까 이 글은, 결국 한국영화가 뭔지 여전히 모르겠는데도 ‘한국의 영화평론가’라는 이름표로 활동하고 있는 누군가가 스스로에게 재차 질문하는 글이다. “K-”라는 접두사가 붙은 일련의 영화들 속에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아래 한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이 비천한 영화들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한국을 발견할 수 있을까? *** 주1. 『아카이브 프리즘』 vol. 13, 한 국영상자료원, 60~82쪽. 박동수(영화평론가) l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 2021년 독립영화비평상 당선.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회원.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어제는 제 20대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나는 오후 1시 즈음 코인세탁소에 이불 빨래를 돌리고 성원초등학교에 들러 투표를 했다.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향방을 알 수 없는 선거라지만 투표에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약 20년 정도 되는 투표의 나날동안 일관되게 한 당과 그 당의 후보에 표를 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선거 때마다 같은 말을 듣는다. 사표를 만들지 말아달라, 이번에는 어떤 후보가 되는 걸 막아야돼, 니 고집만 지켜서 될 일이 아니야 등등. NL 출신 금정연씨(42세)의 사정은 어떨까. 그와 나는 정치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정치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왜 할 말이 없냐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하기 시작하면 생각이 시작되고 생각이 시작되면 행동을 꿈꾸게 되는데 그 일이 우리를 막다른 곳으로 몰고가기 때문에. 그러나 이번은 다르고 이제는 다르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은 변하지 않지만 어느새 세상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징징대는 건 이제 그만. 그래서일까. 금정연은 정치 트윗을 리트윗하고 세태/세대에 대한 담론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이것이 한국 영화에서 길 잃은 한국 사람들이 길을 찾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거일을 기념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정치 에세이 <기운내, 심바: 안티 후보의 트레일에서 보낸 일주일>을 읽었다. “롤링스톤즈”의 특파원 신분으로 2000년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 존 매케인의 캠프를 밀착 취재한 기사인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글을 삐딱한 자세로 읽기 시작했다. 공화당 후보를 옹호하는 기사를 쓰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 DFW는 근본주의자야(여기서 근본주의자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실천은 급진적이지만 신념은 보수적인 일군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나만의 용어로 구체적인 설명은 글의 방향과 어긋나니 나중으로 미루겠다. 그럼에도 부연하는 까닭은 1. 근본주의자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를 피하고 2. 근본주의자들이 특정 장에 끼치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사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고귀한 보수의 상징인 존 매케인(버락 오바마와 대선에서 맞붙었을 당시 네거티브를 요구하는 언론과 지지자들에게 매케인은 오바마는 훌륭한 시민이며 우리는 의견이 다를 뿐이다, 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는 대선에서 패했다)의 인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특정 현상에 대해서, 그리고 그 현상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DFW는 “이 글은 어떤 인상적인 인물의 선거운동을 다룬다기보다는 밀레니얼 세대의 정치와 그 모든 포장과 홍보와 전략과 미디어와 여론 조작과 만연한 부패가 우리 미국인 유권자로 하여금 실제로 어떻게 느끼게 하는지에 대해” 다룬다고 쓴다. 여기서 인물과 선거운동 따위를 작품이나 영화 등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러니까 한영한사가 진짜 다루고 싶은 건 어떤 작품이 왜, 어떻게 좋으냐가 아니라, 작품과 그 작품을 둘러싼 환경을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고 재생산하는가 라고 말이다. 한편, 정연씨는 꿈을 꿨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밤이었고 매일 같이 악몽으로 시달리던 한 주였기 때문에 꿈을 꿨다는 사실 자체는 특별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꿈은 달랐다. 정연씨는 한국의 영화제 시상식에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인지 대종상인지 청룡영화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게 그건가 싶기도 하고, 셋 모두 보지 않는 정연씨로서는 구분할 방도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 시상식임은 분명했다. 사회자는 왜인지 박솔뫼였고(또는 박솔뫼 역할을 하는 김혜수) 시상자로는 소설가 김연수가 나왔다. 다만 정연씨의 꿈에서 김연수는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었고(“아마 홍상수 영화에서 맡은 배역 탓이겠죠.” 정연씨가 말했다) 얼굴은 허진호와 닮아있었다. 그러면 정연씨는 어떻게 김연수가 김연수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외모도 직업도 다른데 김연수가 맞긴 한 걸까. 김연수를 규정하는 영혼의 징표라도 존재하는 걸까. 내가 정연씨에게 말하자 정연씨는 그게 꿈의 신기한 점이라고 했다. “꿈에서는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나 과거와 같은 전기적 사실보다 생각이 현실을 규정하니까요.” 정연씨는 칼 융의 공시성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우리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 정신의 작용이라면. “정신이 물질과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이 정신과 물질을 가르는 경계가 모호하다는 증거예요.” “그게 한영한사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정연씨에게 물었다. 참고로 우리는 에세이 필름 제작을 위해 서교동의 카페에서 미팅을 진행 중이었다. 미팅 전에 나는 DFW 에세이를 읽고 든 생각을 말했다. 21세기 한국 영화를 말할 때 보통은 비평적으로 훌륭한 영화를 나열하고 그 의의를 평가한다.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등. 특정인의 감식안에 선정된 영화들이 곧 한국 영화인 것이다. 그게 아니면 산업적인 측면을 주목한다. 천만 영화의 등장, 제작, 유통의 변화, 새로운 기술의 도입 또는 한국 영화의 해외에서의 위상 등. 그러나 그게 정말 우리가 경험한 한국 영화일까. 이런 과정들은 중요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그렇게 고민을 하는 와중에 정연씨가 뜬금없이 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정연씨는 엠마뉘엘 카레르가 쓴 필립 K. 딕의 전기 <나는 살아있고 너희는 죽었다>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PKD를 따라 주역과 칼 융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들이 미국영화와 한국영화, 현재의 정치 상황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이다. “20세기 말 이후의 모든 미국 영화는 PKD의 자장 아래 있습니다. < 매트릭스 >, < 트루먼 쇼 >, < 다크 시티 >, < 플레전트빌 >에서 시작됐죠.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미국 영화는 PKD의 편집증적 우주다. 그리고 21세기 한국 영화는 미국 영화죠. < 기생충 >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고 이정재가 미국배우조합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사실을 생각해봐요. 이곳은 누구의 편집증적 우주일까요? 윤석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라는 우주가 그것을 보고 원하는 사람들의 정신과 원격작용을 한다는 뜻이에요.” 정연씨가 말했다. 나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였지만(<플레전트빌>이나 <다크 시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나요?) 정연씨의 편집증-꿈-영화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정연씨의 꿈에서 작품상을 받은 영화는 < 돈 룩 업 >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아담 맥케이, 티모시 살라메가 나란히 도열해서 박솔뫼와 김연수가 주는 상을 받은 것이다. “작품상은 보통 제작자가 받지 않나요?” “그건 핵심이 아니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정연씨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기생충>, < 오징어게임 > 같은 한국의 영화/드라마가 로컬이자 글로벌인 미국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은 이상하지만 납득할 수 있는 현상이다(정연씨는 아이비리그 인류학과 박사과정생들의 면면을 살펴보라고 했다. 각국의 학생들이 자국의 가장 중요한 문화인류학적 사안을 미국에서 연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헐리웃 영화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 영화제에서 헐리웃 영화에 상을 주면 어떨까? “지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가 누구죠?” 정연씨가 말했다. “윌 스미스?” “그렇죠. 윌 스미스가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는 거예요.” “오… 그런데 윌 스미스가 상을 받으러 올까요?” “지돈씨,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필립 k. 딕의 전기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네 엄지발가락에서 해방되어라. 그리하면 벗이 다가오리니 그를 믿어도 될 것이니라’.” “그게 무슨?” “영화를 엄지발가락이라고 생각해보세요.” “?” “이렇게 말해보죠. 지돈씨 < 명량 > 봤어요?” “아니요.” “< 해운대 >는?” “아니요.” “< 국제시장 >은?” “아니요.” “하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천만 영화죠.” “그렇죠.”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사람들이 정말 이 영화를 봤을까요?” “사람들이 안 봤는데 본 척 한다는 말이에요? 천만영화는 음모다?” “아니요. 이게 무슨 나꼼수도 아니고. 핵심은 영화라는 ‘형식’이 단지 내적인 요소로 짜여진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정연씨는 나윤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는 길에 곰곰히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해 얘기하려면 정말로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이다. 그러던 중에 버스에서 PKD의 전기를 읽었고 잠이 들었고 꿈을 꿨고 영화가 어쩌면 개인들의 편집증적 우주라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편집증적 우주의 공시성 속에서 살고 있는 거고. “오.” 정연씨에 따르면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떤 작품의 내용이나 내적인 형식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사회정치적 형식들이 영화라는 형식과 마주치고 얽히면서 의식이나 행위를 조직하고 나아가 삶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저는 그걸 영화 경험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정연씨가 말했다. 사람들은 단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영화 이상을 보거나 영화 이하를 본다. “캐롤라인 레빈은 이렇게 말했죠. 의미보다는 패턴을, 해석적 깊이보다는 관계의 복잡성을 찾는것이 비평이라고. 가장 전략적인 정치적 행위는 사회적 경험을 지배하는 서로 다른, 연결성 없는 배열들을 면밀하고 세심하게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좋은 말인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되는 건데요?” “저는 사람들이 영화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할 것을 제안합니다. 더 나아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요.” “그게 무슨…?” “예를 들면, 유튜브 영화 채널은 영화 리뷰를 보는 용도일까요, 영화를 보는 용도일까요? 다시 말해, 이 재생산의 플랫폼이 영화와 무관하게 존속할 수 있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그 말은 영화가 없어도 영화 리뷰 채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건 장 보드리야르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 보다 영화에 대한 것이 더 영화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정연씨의 말을 들으며 왜인지 최근 읽은 워커 퍼시의 소설 <영화광>을 떠올렸다. 주인공 빙크스 볼링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나는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하다.” 다시 말해, 빙크스 볼링에게 좋은 영화 나쁜 영화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의 내용 역시 문제가 아니다. 그가 동경하는 헐리웃 스타 윌리엄 홀든은 어떤 영화에 나오든 윌리엄 홀든이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현실의 윌리엄 홀든인 것도 아니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 사이 어딘가에 윌리엄 홀든이 있고 빙크스 볼링은 일상 속에서 그 형상을 반복적으로 창조하고 구성하는 것이다. <영화광>은 씨네필에 대한 소설도 아니고 빙크스 볼링도 씨네필이 아니다. 그러나 볼링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영화광이고 영화 경험의 창조자다. 그에겐 모든 현실이 영화 경험을 경유해 “인증” 된다. 예를 들면 볼링은 요즘 세상에서는 어디에 살든 그곳에서 진짜 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고, 공허감만 팽창할 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공허감을 불식시킬 유일한 방법은 자기 동네가 영화에 나오는 것이다. 영화에 자신이 사는 곳이 나오는 순간 그곳은 “아무 데가 아니라 특정한 데”가 된다. 이것을 영화 경험이 만들어낸 편집증적 우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21세기 첫 20년 후의 대한민국이라는 편집증적 세계 속에서 영화를 경유해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반대가 될까.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칼럼]코로나 시대의 영화제
처음엔 독감 수준의 전염병인 줄 알았지만, '코로나19'는 단순한 질병을 넘어 인류사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 정도의 전지구적 위기가 되었다. 이제 삶의 모든 것은 코로나로 수렴되고 있으며, 예전엔 평범한 일상이라 여겼던 것들이 이젠 아득한 추억처럼 여겨진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주말이면 북적이는 극장에 가서 신작을 즐겼던 시간들은 다신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다. 극장가는 확진자 수에 따라 출렁이고, 개봉을 연기하는 영화들도 속출했다. 극장뿐만 아니라 영화 현장도 제대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산업 전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영화제도 예외는 아니다. 2월부터 팬데믹 상황이 발생하자 많은 영화제들이 연기하거나 축소하거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겸하며 진행되었다. 울주세계산악영화제(4월→10월), 전주국제영화제(4월→5월), 무주산골영화제(6월) 등이 그런 경우다. 인디다큐페스티벌(4월)과 서울국제사랑영화제(6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7월) 등은 좌석 수를 대폭 축소해야 했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평창국제평화영화제(6월)는 다행히 원래 기간(6월18일~23일)에 오프라인으로 진행될 수 있었지만, 적잖은 부분 프로그램을 수정해야 했다.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도 무사히 영화제를 치렀다”는 식의 무용담을 늘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다. 대신 올해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느꼈던 몇 가지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바로 '코로나 시대의 영화제'다. 대한민국은 100여 개의 영화제가 열리는 나라다. 1년 내내 전국의 수많은 지자체에서 크고 작은 영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이젠 영화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일단 예산을 책임지는 지자체들이 영화제(를 포함한 지역 축제와 문화 행사)에 대해 재고할 것이며, 대중들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기에 영화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우린, 지난 20여 년 동안 관성처럼 반복했던 한국의 영화제 문화를 원점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렇다면 코로나 시대의 영화제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 첫 번째, 집중보다 확산을 선택해야 한다. 한국의 전형적인 영화제 문화는 일상의 영화적 경험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즉 한정된 기간 안에 평소보다 몇 배의 강도로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시공간의 집중이며, 이것은 감염의 최적 조건이다. 이제 한국의 영화제는 이런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예산 문제 등으로 기간을 늘리기 힘들다면,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만큼은 멀티플렉스를 벗어나 최대한 넓은 공간으로 확산되어 인구밀도를 낮춰야 한다. 쇼핑몰이나 백화점과 결합되어 있기 마련인 멀티플렉스는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공간이다. 티켓팅 과정에서 관객의 신원을 파악한다 해도, 비관객에 의해 얼마든지 감염될 수 있다. 그러려면 영화제에 대한 평가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더 이상 관객이 운집한 풍경이나 객석이 꽉 찬 상영관으로 영화제의 성패를 가늠해선 안 된다. 지금까지 동원 관객, 상영편수, 경제 효과 같은 양적 가치로 영화제를 평가해 지자체에 어필했다면, 이젠 '질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 적당한 수의 관객들이 알찬 프로그램과 만나고, 그 콘텐츠는 온라인이나 순회 상영전 같은 방식으로 재생산되어야 한다. 영화제가 열리는 1주일 정도 되는 기간도 중요하지만, 그 기간을 통해 발굴되고 만들어진 콘텐츠가 1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환기되는 것도 중요하다. 즉 시공간의 확산이며, 이 과정에서 영화제의 적절한 규모와 예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영화제가 공간적으로 확산되면 관객들이 영화제를 즐기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한국의 영화제는 도시 중심이며, 따라서 멀티플렉스 중심이다. 즉 극장가 중심의 영화제인 셈이며, 이것은 영화제가 열리는 그 도시의 공간성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게 한다. 물론 우린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남포동과 해운대의 정취를 접했고,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통해 호반의 낭만을 경험했으며, 무주산골영화제에선 덕유산에서 심야에 야외상영으로 걸작들을 접하기도 했다. 앞으론 이런 특별한 경험들이 더욱 강조될 것이다. 멀티플렉스를 벗어나면, 영화제에 훨씬 더 다양한 공간적 가능성이 열리는 법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인상적 영화적 체험들을, 그리고 그 지역이 지닌 독특한 정서를 더욱 원하게 될 것이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하듯 영화제에 와서 하루에 서너 편씩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하루에 한두 편을 보더라도, 상영관과 상영관 사이를 걸으며 산책을 하고, 지역의 숨은 맛집을 찾아다니고, 상영관 인근의 핫 플레이스에 가보는 힐링의 시간이 영화 관람만큼 중요해질 것이다. 영화제는 프로그램에선 에디팅의 기능이 강화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 영화 제작이 타격을 입고 있다. 신작 수급이 예전 같진 않을 수 있으며, 해외 게스트를 초청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기존의 영화들을 잘 조합해 '구성의 묘'를 살린 섹션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며, 외국 감독과 직접 관객과의 대화를 하지 못하는 대신 그것을 보완할 만한 프로그램 이벤트가 필요하다. 이것은 좀 더 세심한 프로그래밍이 필요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셀럽이나 신작으로 화제를 끄는 방식은 이젠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온라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직까진 회의적이다.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는 게 만만치 않고, 영화제가 온라인으로 플랫폼을 옮기게 되면 넷플릭스 같은 강력한 상대와 경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영화제에 나눔의 의미가 결합되길 바란다. 코로나 시대가 준 가장 큰 교훈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휴머니즘적 유대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감염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코로나라는 재난의 시대에 상대적으로 더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들은 예술영화관 종사자일 수 있고,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일 수 있으며, 일감이 줄어든 현장 영화인일 수 있고, 영화제 단기 스태프들일 수 있다. 더 확장하면, 영화제가 열리는 지역의 빈곤 계층일 수 있고,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일 수 있다. 영화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비록 작은 도움밖엔 안 되더라도, 그들과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영화제뿐만 아니라, 코로나 시대에 열리는 문화 행사들이 갖춰야 할 미덕이 아닌가 싶다. 축제는 이제 더 이상 축제가 아니다. 축제는 달라져야 한다. 영화를 매개로 일상을 회복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시간. 소박하게 꿈꿔 보는 '코로나 시대의 영화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