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엔드
- 감독
- 얀 사스카
- 제작년도
- 2015
1. “헤시피 거리를 좋아한다. 헤시피 거리를 좋아한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주문처럼, 다짐처럼 같은 문장을 두 번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대사를 넣을까 말까 편집하면서 망설였다. 같은 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강조해야 한다.” 친근하고도 나른한 목소리의 보이스 오버에 담긴 이 간명한 말, 좋아하는 건 강조해야 한다는 이 마음을 알 것 같다. < 아쿠아리우스 >(2016)와 < 바쿠라우 >(2019)의 감독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 유령들의 초상 >은 오로지 좋아하는 걸 강조하려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관을 좋아하고, 그리고 브라질 북동부에 위치한 고향 헤시피를 좋아한다. 그 좋아하는 것을 한 편의 영화에 온전히 다 끌어 담기 위해, 계획이나 의도는 일단 접어두고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30년 전부터 이 영화를 준비했다. 지금 찍고 있는 게 무엇이 될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헤시피의 거리와 영화관을 카메라에 담았던 1990년대 초,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던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이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브라질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문득 지난 시절 틈틈이 기록해둔 개인적인 아카이브들을 들여다본 게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바쿠라우>를 찍기 전인 2017년의 일이니 7년이 소요된 프로젝트다. 영화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헤시피를 담은 신문기사와 사진, 영상 등 온갖 아카이브 자료 위에 여러 단편영화부터 <아쿠아리우스>까지의 영화 클립을 이음매 없이 끼어 넣고 그 자신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얹어 사적인 에세이 영화로 완성되었다. 여기에 35mm부터 슈퍼 8mm, 16mm, VHS, 베타캠 SP, 미니 DV, HD, 아이폰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에 걸친 카메라의 변천사가 담기고, 다양한 질감과 제 각각의 톤을 지닌 이미지 위에 두 세기에 걸친 도시와 극장의 변천사가 쓸쓸하게 또 애틋하게 담긴다. 이쯤에서 예비 관객들은 <유령들의 초상>이 대략 어떤 영화인지 알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엔 이르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연구방법론을 다루려는 게 아니다. 이건 사랑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역사학자인 어머니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 관한 코멘트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후반부에 “영화는 멜로드라마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했다. 멜로드라마로 기우는 게 영화 매체 본연의 속성이라는 듯, <유령들의 초상>에는 이제 더 이상 여기 없는 것들이 안기는 아득한 그리움이 멜로의 기운으로 배어있다. 또 이런 장면도 있다. 1970년, 더 없이 화려했던 어느 극장의 개관식 장면 다음에 텅 비어버린 극장의 공중전화가 신경 곤두서는 쇳소리를 내며 오래도록 울려댄다.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이 극장에서 보낸 탓에 감정적이고 혼란스러운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감독의 보이스 오버가 들리고,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불가능한 시공간을 연결한 탓에 멈칫하게 되지만, 이 기묘한 매치 컷의 의미는 단순명료하다. 이제 영화관은 그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영화 포스터로 가득했던 거리, 극장 앞의 긴 줄, 매표소 티켓 기계에서 나던 딸깍대던 소리, 꽉 찬 객석이 뿜어내던 흥분과 열기, 극장 문을 나서는 즐거운 얼굴들. 여기서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이제 더 이상 여기 없는 것들이 안기는 애상과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하는 환상 사이를 오가며 한 도시의 시공에 담긴 감정의 지도를 그려나간다.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며, 물리적이면서도 영적인 탐험이 이제 시작된다. <유령들의 초상>은 자신을 길러준 이 도시와 극장에 바치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지극한 헌사이자 무엇보다 사랑 이야기다. 2. “행복한 결말은 없어”라고 노래하는 톰 제의 곡 ‘해피 엔드’가 영화에 흥겨운 바이브를 연신 뿜어대며 ‘1부’가 시작된다. <유령들의 초상>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세투바우 아파트’라는 제목이 달린 1부는 70년대에 헤시피의 해안가 마을로 이사를 와서 40년을 살았던 필루 감독의 집을 주 무대로 한다. 이혼한 어머니가 대출을 받아 산 아파트는 두 번의 공사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는데 그 집의 구석구석은 20여 년간 그곳을 스튜디오 삼아 만든 10여 편의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초기 단편부터 < 네이버링 사운드 >(2013)와 <아쿠아리우스>에 이르는 영화 클립을 가족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숏들 사이에 과격하게 툭툭 끼어 넣었다. 그러자 가족들이 식사하고 아이들이 뛰어 놀던 거실은 발밑으로 피가 쏟아지고 권총에 한 남자의 뒤통수가 날아가는 공포영화의 무대가 된다. 한 공간에 담긴 수십 년의 시간을 더듬는 방식치고는 유별나게 특이하다. 이 편집은 연대기적이지도 선형적이지도 않다. 전적으로 사적이며 별나다. 그 탓에 관객을 따돌리려는 건가, 혼자 추억에 잠겨 자기도취적인 에세이를 쓰는 중인가 하는 의심이 피어오를락 하는 순간 여기 매 숏들이 미스터리한 얼룩들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채고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여기엔 영(靈)적인 기운이 담겨 있다. 우선 감독이 오래전 거실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자. 무언가 형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유령의 형상이 포착된 이 사진은 영화 제목 <유령들의 초상>을 직관적인 이미지로 구현하고 있다. 해명되지 않는, 해명할 수 없는 이 이미지보다 우리의 뇌리에 더 깊은 인상을 남기는 유령은 이웃집 개 니쿠일 것이다. 니쿠는 깨어있는 한 내내 짖어대는 통에 필루 감독의 전작들에 불가피하게 배경 사운드로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한밤, 필루 감독은 니쿠의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어? 니쿠는 벌써 몇 년 전에 죽었는데. 알고 보니 TV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그의 영화를 온 동네가 보고 있는 중이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영화에서 니쿠는 여진히 활기차게 짖어대고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니쿠는 유령이 되었’고, 그 유령은 영화를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2부 헤시피 시내의 영화관’에서 클레버 멘도사 필루는 마침내 집을 나서서 헤시피 거리를 쏘다니다 영화관을 찾아간다. 우울한 잿빛의 도시 헤시피, 과일 향과 오줌 냄새가 뒤섞인 거리를 그는 여전히 사랑한다. 인파로 북적대던 거리는 이제 텅 비었고, 13살부터 25살까지 그가 살다시피 한 영화관은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극장의 마지막을 기록했던 청년 클레버의 영상 속에서 우리는 영사기사 알렉산드르를 만나 2차 대전 당시 헤시피의 극장이 나치 프로파간다의 전초기지가 될 뻔한 이야기, 4개월간 상영된 < 대부 >에서 니노 로타의 음악이 지긋지긋해져서 상영 마지막 날 도망친 이야기, 정권의 검열 이야기를 듣는다. 이 영화의 유일한 인터뷰 씬으로 그를 향한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는 순간이다. 영사기사 알렉산드르씨도 유령이 되었다. 그는 그렇게 여기에 있다. ‘3부 신전과 성령들’은 오래전 교회의 자리에 지어올린 상 루이스 극장이 다시 복음주의 교회로 바뀌는 과정을 담은 장이다. 교회에서 극장으로, 극장이 다시 교회로 바뀌는 동안, 의미심장하게도(어쩌면 우연이겠지만) 영화와 종교는 무언가를 공유하게 되었다. 스크린과 의자가 그대로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스크린에 매혹된 관객의 표정과 기도하는 신도들의 얼굴에는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믿음, 열광 그리고 사랑. 하지만 헤시피에서 극장과 교회는 공존하지 못한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진단으로는, “극장이 죽고 교회가 부활했다.” 이제는 사라진, 흥분과 즐거움으로 들썩이던 극장 객석을 보며 “이토록 하나가 되는 공간이 헤시피에 또 있을까”라며 경탄 혹은 탄식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긴 감정적 파장을 남긴다. 3. 다시 말하지만 <유령들의 초상>은 음울하고 무거운 영화가 아니다. 때때로 향수에 젖고 가슴 한편이 저릿해오는 순간도 있지만 영화는 대체로 경쾌하고 친근하고 별나면서 유머러스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화 전체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시퀀스가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으로 꼽을 만한, 그리고 우리에게 좀 더 생각해보라고 요청해오는 듯한 그런 장면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필루 감독은 지금 우버 택시를 타고 있다. 차에는 허브 앨퍼트의 트럼펫 연주곡 <라이즈 Rise>가 흐르고, 택시 기사와 필루 감독은 트럼펫을 연주하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에 관해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운전석과 뒷좌석을 나눠 찍은 방식으로 보나 그들의 대화로 보나 분명 이 시퀀스는 배우를 기용하여 연출한 픽션 장면이다. 그 사실을 확증해주듯 택시 기사는 문득 자신의 초능력에 대해 털어놓는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능력’, 즉 사라지는 능력을 가졌다는 그의 고백은 곧장 증명되고, 필루 감독은 운전석은 비었지만 여전히 잘 굴러가는 택시 뒷좌석에서 옅은 미소를 짓는다. “거기 있는 거죠?” “네, 여기 있어요.” 클레버 멘도사 필루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어떤 존재/비존재들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하더라도 투명인간 시퀀스는 왜 여기 있는가. 픽션으로 다큐멘터리를 매듭 짓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선택은 2부에서 “픽션 영화는 최고의 다큐멘터리야”라고 주인공 청년(아마도 감독의 페르소나)의 귀에 비밀처럼 속삭인 에이젠쉬테인의 대사와 정확히 접속된다. 단편 <에이젠쉬테인>에서 가져온 이 장면에 대해, 그리고 이 대사에 대해 필루 감독은 아무런 논평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픽션과 논픽션의 접속에 관해서라면 극영화는 물론 현대 다큐멘터리 제작에서도 유연하게 수용되는 편이니 덧붙일 말이 필요했을까 싶다.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존속하는’ 존재 혹은 비존재들과 관련한 대목일 것이다. <유령들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바대로, 이 영화에는 유령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유령의 모티프는 가시적인 유령의 이미지를 담은 심령사진으로 시작해서 이웃집 개 니쿠,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밤거리를 활보하는 남자(드라큘라), 영사기의 빛과 함께 사라진 영사기사 알렉산드르로 차츰 확장된다. 이들 ‘유령들의 초상’과 더불어 <유령들의 초상>은 보이지 않는 유령들도 담고 있다. 2부 끝자락에서 우리는 텅 빈 극장에서 승강기와 극장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걸 보았고, 인적 없이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는 유령들에 둘러싸인 공간에 살고 있다. 고향 헤시피의 거리와 극장에서 클레버 멘도사 필루가 하려던 것이 과거에 있었지만 현재에 사라진 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이라면, 본질적인 속성 상 영화는 언제나 그래왔던 게 아닐까. 모든 영화는 과거의 흔적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스크린으로 보는 모든 것은 그때 거기에 있었지만 지금 여기에 없는 것들이다. 과거에 존재했었지만 현재 여기 없는 것. 혹은 소멸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것. 유령 혹은 시네마. 영화의 역사가 사자(死者)들의 발자취이듯, 개별 영화는 유령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유령들의 초상>은 그 사실을 문득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방법이다.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과거에 가장 의존적이었던 장르는 하이틴 무비와 청춘 영화일 것이다. 모든 건 1970년대에 결정되었고, 1980년대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틴에이저와 청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의 답습 혹은 각색이었다. 여기서 ‘1975년’은 기억할 만하다. 이 해에 얄개 영화가 시작되었고,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이 나왔다. 이후 1980년대는 물론 21세기까지도, ‘스물 즈음’을 다룬 한국영화는 1975년이라는 시간에 정박되어 있었다. 먼저 하이틴 무비를 보자. 조흔파의 소설을 각색하고 안성기 가 주연을 맡은 1965년의 < 얄개전 >( 정승문 )이 있었지만, 얄개(얄미운 개구쟁이)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는 10년 후인 1975년의 < 여고 졸업반 >( 김응천 )이었다. 19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시리즈가 이어졌고, 1977년 석래명 감독의 < 고교 얄개 >(1977)가 나오면서 ‘얄개의 전성시대’가 열렸으며, 1978년에 김응천-문여송-석래명 3인방은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에서 만난다. 1, 2. < 고교 얄개 >와 < 대학 얄개 >( 김응천 , 1982). 얄개 영화의 전통은 1980년대도 지배했다. 3, 4. < 바보들의 행진 >과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 ‘병태’의 청춘 스토리는 지속된다. ‘얄개 영화’는 유신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최고 권력자를 정점으로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시기를, 입시의 중압감과 칙칙한 교복과 ‘교련’으로 상징되는 군대식 학교를, 게다가 남녀 공학마저 없었던 시대를, 한참 꿈 많고 호기심 충만한 틴에이저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얄개 영화는 작은 해방구이자, 참고 견디며 현실에 순응하자는 국책성 메시지였다. 각자의 개성과 고민이 있지만 결국엔 흐뭇한 웃음으로 무마되고, “그렇게 우린 성장한다”는 식의 찡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던 영화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 바보들의 행진 >은 아직까지도 ‘한국 최고의 청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실제 대학생들을 캐스팅 한 이 영화는 당시 캠퍼스 청춘 문화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청춘의 고뇌를 담아내고, 동시에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해 절규한다. 그리고 한 친구는 죽음을, 한 친구는 군 입대를 선택한다. 장발 단속과 통금과 휴교령의 시대에 “한 마리 예쁜 고래를 잡는 것”이 꿈이었던 젊음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이후 청춘 영화의 정전이 된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처럼 청춘들의 모습을 사회적 메시지와 결합시킨 작품도 있었지만, 여전히 ‘털보’ 김응천 감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가 이룬 자가발전은 곧 10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와 20대 초반을 다룬 청춘 영화를 아우르며, 이 장르들 자체의 역사가 된다.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교복 자유화가 이뤄진 1980년대에 얄개 영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이때 김응천 감독은 대학 문화를 얄개 영화 방식으로 접근한다. < 꽃밭에 나비 >(1979)부터 조짐이 보였고, < 모모는 철부지 >(1980) < 달려라 풍선 >(1980) < 내 이름은 마야 >(1981) < 갈채 >(1982) 등을 거쳐 그는 드디어 < 대학 얄개 >(1982)와 < 대학 들개 >(1983) < 대학 괴짜들 >(1984)에 도달한다. 이 영화들의 테마는 꽤 익숙했다.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진실한 우정에 대한 깨달음, 부모의 강요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학교생활의 낭만과 로맨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 김응천 감독의 ‘대학 청춘 영화’들은 여전히 얄개 영화의 세계관 안에 있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캠퍼스로, 교복은 사복으로, 치열한 입시는 머리 싸매는 고시로, 제과점은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 김응천 감독은 1970년대 틴에이저 무비를 개척해 1980년대 청춘 영화로 변형시켰다. 그는 1980년대에 20편의 하이틴 청춘 영화를 만들었다. 2. 이규형 감독은 1980년대 청춘 영화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3. 이장호 감독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1980년대의 포문을 연 이 영화는 < 바보들의 행진 >과는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현실을 다룬다. 4. 전상국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 우상의 눈물 >(1982). 얄개 출신인 진유영 은 이 영화에서 사뭇 다른 톤의 십대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들도 여전했다. 단짝이었던 김정훈 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승현 은 여전히 ‘사고뭉치’ 캐릭터로 이 장르를 이끌었다. 그는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고등학생으로 시작해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과 ‘앙토완 드와넬’ 시리즈의 장 피에르 레오처럼) 한 감독의 영화 안에서 배우가 성장하는 ‘감독-페르소나’ 관계였던 셈이다. “흥, 절교야!”라며 홱 토라질 때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깍쟁이 강주희 , 완력을 앞세우던 ‘마초 고교생’ 진유영 , 어눌하면서도 인간적이며 낙관적인 의리파 손창호 ,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김보연 ,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활동파 전영록 , 동안의 감성파였던 전호진 과 박재호 (이후 < 내일로 흐르는 강 >(1996)으로 감독 데뷔), 얄밉게 고자질하던 강남길 …. 그들은 여전히 얄개 시절의 캐릭터를 지닌 채 대학생이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덕화 는 < 대학 얄개 >에 ‘얄개 1기 선배님’으로 불리며 등장하기도 했다(단 20대에 접어든 임예진 은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이 대열에서 이탈한다). 인력 충원도 있었다. 송승환 김주승 강문영 이미영 조용원 등이 ‘포스트 얄개’ 시대의 청춘스타가 되었고, 이미숙 이나 원미경 도 이 장르에 적잖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할 사랑은 가수들의 진출이었다. 전영록 의 사례가 있긴 했지만, 1980년대엔 가요계와 영화계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두드러졌고, 청춘 영화 장르는 그 격전지였다. 일단 당대 최고 인기 밴드였던 송골매가 있다. 처음엔 카메오처럼 등장하더니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와 < 대학 괴짜들 >에 이르면 배철수 와 구창모 는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숨은 강자는 김형용 이었다. ‘김형용과 톱니바퀴’의 리더로 ‘해변가요제’ 출신인 그는 당대는 희귀한 미소년 스타일로 어필했다.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의 김수철 , < 졸업 여행 >( 오성환 , 1985)의 김범용 도 가세했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의 전환점(사실 하강점)이 되는 영화는 이상아 와 하희라 주연의 < 말괄량이 대행진 >(1986)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고교 시절로 돌아가며, 다음 해 < 얄숙이들의 개성 시대 >(1987)를 이어간다. 이런 회춘이 가능했던 건, 새로운 스타덤의 등장 덕분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하희라 이상아 김혜수 김희애 이응경 최수지 이미연 , 그리고 강석현 이재학 민규 최재성 최민수 허준호 박중훈 김민종 김보성 김세준 등은 좀 더 화려한 아이돌 스타덤을 이루었다(1980년대에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은 기존의 청춘스타를 조연으로 기용하고, 신진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나름의 ‘절충’을 이룬다. 1. 김응천 감독의 < 대학 들개 >(1983). 전영록 과 이승현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얄개로 활동했다. 2. < 스물한 살의 비망록 >( 김응천 , 1983)의 송승환 과 강문영 . 1980년대 초에 새롭게 등장한 청춘 배우. 3.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의 김형용 . 가수이자 배우로 1980년대 초 청춘 영화를 잠시 이끌었다. 4. < 대학 괴짜들 >의 배철수 . 그가 속했던 밴드 ‘송골매’는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청춘스타 중 하나였다. 스타 지형도만 변한 게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틴에이저 무비는 1970년대의 영향권을 벗어나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 김응천 의 세계관’을 벗어나기 시작한 십 대의 이야기는 훨씬 더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당시로선 충무로에서 정말 드물었던 ‘20대 여성 감독’ 이미례 의 데뷔작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1984)이었다. 호즈미 다카노부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10대들이 더 이상 얄개 영화의 해피 엔드에 갇혀 있을 순 없다고 말한다. 폭력적 사회와 무관심한 가정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지닌 16세 소녀 유리( 김진아 )는 갈 길을 잃고 저항한다. 1985년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 차현재 , 1986)은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나쁜 영화 >( 장선우 , 1997)의 선배격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비디오 다방, 술집, 대학로, 만화가게, 성인 오락실, 나이트클럽, 여관 등을 휘저으며 단속에 걸린 10대들을 경찰 보호실로 내몬다.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소외당한 아이들의 외침을 들려준다. 이런 시도들은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1989)를 통해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다. 1990년대 초 기획영화의 포문을 여는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이 영화의 기획을 맡았는데, 그는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취재를 바탕으로 김성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배치함으로써 얄개 영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는 당시 아이들이 실제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이후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김성홍 , 1990)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 이미례 , 1990)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조금환 , 1990) <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강우석, 1991) < 인생이 뭐 객관식 시험인가요 >( 강구연 , 1992) 등 ‘긴 제목 영화’들이 쏟아진다. 다소 나이브한 태도는 있지만, 이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던 영화들이었다. 리얼리즘에 좀 더 기운 영화들도 있었다.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 황규덕 , 1990)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와는 다른 방식으로 입시 지옥을 보여주는데, 담임 교사( 문성근 ) 캐릭터를 통해 ‘참교육’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변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움직임과 맞물리는 부분으로, 1989년에 ‘전교조’를 계기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그 문제의식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 닫힌 교문을 열며 >( 이재구 최호 김숙 김건 강경환 황길재 , 1990)는 바로 전교조 문제를 담아낸 첫 영화였다. 1. < 방황하는 별들 >의 이상아 . 이상아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새로운 아이돌 스타덤의 기수였다. 2. < 캠퍼스 연애특강 >( 조금환 , 1988)의 강석현 하희라 민규 . 3.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의 김진아 . 4.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은 다큐멘터리, 극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실험적 작품이었다. 틴에이저 무비 계열에서 ‘현실’이라는 화두가 떠오르며 얄개 영화와의 결별이 서서히 이뤄졌다면, 청춘 영화 계열에서도 작은 변화는 있었다. 이 시기 조금씩 시도되던 청춘 로드 무비가 그렇다. < 바보들의 행진 >의 병태( 윤문섭 )가 꿈을 찾아 떠나듯, < 고래사냥 > < 열아홉 살의 가을 >( 김응천 , 1984) < 가슴을 펴라 >( 최원영 , 1987) < 굿모닝! 대통령 >( 이규형 , 1989) 등의 그들도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 내일은 뭐 할 거니 >( 이봉원 , 1984) 같은 실험적 영화도 등장했다. 1960년 4.19 때 도주 중이던 대학생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B( 강석현 )은 대학생이 된 1980년대에 마치 사회 부적응자처럼 방황한다. 아마도 < 바보 선언 >( 이장호 , 1984)과 함께 가장 파격적인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1980년대 영화로 기억될 <내일은 뭐 할 거니>는 당시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메타포였다. 새로운 흐름을 만든 사람은 이규형 감독이었다.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1987)가 흥행작이지만, 먼저 그가 20대 때 만든 데뷔작 < 청 블루 스케치 >(1986)를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는 당시로선 드물게 ‘청춘 비가’ 스타일의 영화였으며, 이야기보다는 모던한 공간 감각과 비주얼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곽재용 , 1990)나 < 비트 >( 김성수 , 1997)의 장르적 근원을 더듬다 보면 <청 블루 스케치>를 만날 수 있는데, 로맨스와 범죄 세계의 폭력과 비극적 서사 장치를 결합한 청춘 영화는 1980년대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밋밋한 흥행(서울 관객 약 4만 명) 이후 이규형 감독은 ‘얄개의 세계’에 더 접근했고,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로 서울 관객 약 26만 명을 동원한다. 대학 초년생인 영문과 미미( 강수연 )와 신방과 철수( 박중훈 )의 연애담인 이 영화는, 미래지향적 분위기와 젊은 날의 고뇌를 동시에 담았고, 이규형 감독은 청춘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이 영화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또 한 명은 배우 박중훈이었다. 그는 < 이장호 의 외인구단 >(1986)으로 상한가를 치던 최재성과 투 톱을 이뤄 <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1988)와 < 내 사랑 동키호테 >(1989)를 이끈다. 메가폰의 주인은 얄개 영화의 장인이었던 석래명 감독. 그런데 두 영화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두 편 모두 젊음과 사랑과 도전과 우정을 다루지만, <내 사랑 동키호테>는 당시 입시 현실을 다루던 하이틴 영화와 접점을 지닌다. 두 주인공이 개발한 ‘쿨쿨 머신’은 수면 중에도 뇌파 조작을 위해 학습을 할 수 있는 기계. 이것은 당시 밤낮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입시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십 대의 현실에 대한 풍자였다. 이처럼 1980년대 말에 오면, 이 장르 안의 그 어떤 영화도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 1.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는 하이틴 영화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영화다. 2.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는 ‘참교육’을 이야기한다. 3. < 내일은 뭐 할 거니 >는 실험적 스타일 속에서 억압적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4.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는 1980년대에 가장 흥행한 청춘 영화이다. 1970년대 얄개 영화와 청춘 영화는 1980년대 시기 변형을 겪은 후 1990년대에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았다. < 숲속의 방 >( 오병철 , 1992)이나 < 세 친구 >( 임순례 , 1996) 등이 ‘현실’이라는 프리즘으로 방금 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의 삶을 바라본다면, < 정글 스토리 >( 김홍준 , 1996)처럼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가는 청춘의 이야기가 있었다. < 비트 > < 태양은 없다 >( 김성수 , 1999) < 질주 >( 이상인, 1999) 등은 ‘도시 청춘’을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결합시켰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말에 나타난 장르화 현상이었는데, 남녀의 성이 바뀌는 판타지 < 체인지 >( 이진석 , 1997), 아이돌 문화나 밴드 콘셉트와 결합했던 음악 영화들인 < 세븐틴 >( 정병각 , 1998)과 < 짱 >( 양윤호 , 1998) 그리고 호러 장르를 부활시킨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등이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1980년대 하이틴 청춘 영화는,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전통은 수정되었고, 관습은 변주되었으며, 배우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젊음의 테마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른 2000년 이후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다면 얄개 영화의 전통은? 거의 희석되었고, <학교> 시리즈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졌다.
“상업영화도 제작하세요?” 지난 1월이었다. 청년필름이 제작한 < 조선명탐정 >의 시사회 때 기자들에게 잘 좀 보이려고 나갔더니 여러 기자들이 물었다. 여기 왜 나와 있느냐고. 내가 제작자라고 했더니 다들 고개를 갸우뚱, 눈을 껌뻑이며 다시 물었다. “이런 영화도 제작해요?” 내가 대표로 있는 청년필름은 영화제작사다. < 해피 엔드 >로 시작해서 < 와니와 준하 >, < 질투는 나의 힘 >, < 귀여워 >, < 분홍신 > 줄줄이 충무로자본이 투여되고 스타들이 출연했던 말 그대로 충무로영화, 상업영화였다. 그런데 첫 작품인 <해피 엔드> 외에는 흥행을 하지 못했다. 상업영화의 미덕이란, 잘 만든 영화도 아니고 재밌는 영화도 아니고 관객이 많이 들어 돈을 잘 버는 영화여야 한다. 영화 앞에 괜히 상업이란 글자를 붙여 놓았겠나! 그런데 돈을 벌기는커녕 한 작품 당 수억씩, 수십억을 까먹었으니 상업영화라는 수식이 부끄럽게 되었다. 게다가 <해피 엔드>를 보고 밀어주었던 투자사들도 하나 둘씩 멀어져 갔다. 그러다 제작한 영화가 < 후회하지 않아 >다. 독립영화 감독을 모셔다가 독립영화 방식으로 제작비를 끌어오고 독립영화 방식으로 제작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독립영화라 불리게 되었고 2006년에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독립영화’에 뽑히기도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충무로영화제작사가 상업영화 만들어서는 흥행도 못하고 쪽박을 차다가 독립영화를 만들어서는 대박을 터트렸다. 같은 해에 만든 상업영화가 한 편 더 있었다. < 올드미스 다이어리 >. 이 영화도 또 흥행에 실패했으니 말 다한 거다. 그 다음부터는 줄줄이 독립영화 뿐이었다.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 색화동 >, < 은하해방전선 >, < 귀 >, < 탈주 >까지. 상업영화를 기획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상업영화는 투자도 캐스팅도 잘 되지 않았다. 흥행을 못한 제작사가 처하게 되는 가혹한 현실이었다. 반면에 <후회하지 않아>의 성공 덕분에 독립영화제작은 활기를 띠어 갔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상업영화도 제작하느냐는. “독립영화도 제작하세요?” < 조선명탐정 >이 흥행에 성공하고 곧바로 하정우 , 박희순 , 장혁 주연의 < 의뢰인 >을 제작하면서 이제는 역으로 독립영화도 제작하느냐는 소리를 듣는다. 반년도 안 지났는데 세상 참 빠르게도 변한다. 다시 얘기하지만 청년필름은 영화제작사다. 매일 하는 일이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다들 그러하듯 우리도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 취향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 왔다. 그것이 때로는 큰 자본이 투여되고 스타들이 출연하는 상업영화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적은 자본에 신인배우가 출연하는 독립영화가 되기도 한다. 상업영화만 해야지 거나 독립영화만 해야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각각의 영화가 자기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요즘 난 감독으로서의 장편데뷔작인 <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이란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위장결혼을 하면서 겪게 되는 소동을 유쾌하게 그리는 퀴어영화다. 퀴어영화는 든든한 매니아 관객층은 있지만 아직은 대중적인 호감을 끌어내기는 힘든 한계가 있다. 그렇다보니 큰 자본을 끌어오기가 쉽지 않다. 시작부터 독립영화였다.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건 상업영화보다 열배 스무배는 힘들다. 제작비가 적으니 과정이 힘들고 스타배우가 없으니 알리기가 힘들고 배급력이 딸리니 극장에 걸기도 쉽지가 않다. 그런데도 왜 굳이 독립영화를 또 만드느냐고 묻는다. 이제 상업영화로 잘 나가는데 왜 그러느냐고.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취향에 맞는 영화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게 대로는 상업영화가 되고 대로는 독립영화가 될 뿐이다. 아니다, 이유가 하나 있다. 독립영화를 만들 때 더 즐겁다. 에너지도 솟는다. 큰 자본이 투여되면서 갖게 되는 상업영화의 여러 제약들에서 벗어난 활기가 있다. 그래서 더 행복하다. 힘든데도 즐거우니 변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