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스터 이야기
- 감독
- 윤세희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김희주
자르고 붙이기(cut and paste)는 예술 분야에서 전통적인 제작 방식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사회, 문화, 경제 전 분야에서 나타나는 우리 삶의 주요 양식이기도 하다. 영화의 몽타주, 예술의 콜라주, 대중문화의 리믹스는 모두 자르고 붙이기의 전략을 따라 하나의 대상을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뜨리고 그것을 새로운 자리에 위치시켜 의미의 전복을 꾀한다. 한편, 자르고 붙이기는 동시대의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가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공간은 잘게 쪼개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의 신체 또한 하나의 사물처럼 조각난다. 예를 들어, 노동 현장은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파트타임 노동자로 채워지고, 주거 공간은 대부분 성냥갑처럼 만들어진 구조물을 켜켜이 쌓아 올려 완성된다. 만약 우리 삶이 자르고 붙이기를 하나의 양식으로 채택하여 따르고 있다면, 그런 삶은 분명 누더기처럼 기운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런 불완전한 것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김효준 감독의 < 자르고 붙이기 >는 경제적으로 파산의 상태에 이른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의 소재는 1990년대 후반의 IMF 시기와 2000년대 후반의 금융위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빚의 굴레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할 때 자주 쓰이던 신용불량자, 카드빚, 고시원과 같은 것들이다. 정호는 수산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는 고시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정호와 그의 어머니는 카드빚을 두고 심한 갈등을 빚는다. 어머니는 아들 몰래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그것으로 빚을 갚으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호는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지만 모든 소리는 새어 나가는 고시원 방에서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다. 정호와 어머니의 갈등은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정호는 어머니가 숨기고 있던 카드를 빼앗아 그것을 가위로 자르려고 하고, 어머니는 그런 정호를 말리다가 손가락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신용카드를 놓고 분열된 모자의 관계는 두 동강이 난 신용카드와 상처 입은 어머니의 손가락을 통해서 형상화된다. 대다수의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스스로 비극을 초래하는 것처럼, 주인공 정호의 우발적인 행동이 그의 비극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자르기’에 해당하는 부분과 ‘붙이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구분된다. 신용카드를 자르다가 어머니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정호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런 정호의 행동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정호의 어머니가 손가락을 다쳐 응급실에서 간단한 봉합 수술을 받는 이야기와 어머니의 치료비를 내기 위해 자신이 가위로 잘랐던 신용카드를 접착용 셀로판테이프로 붙이는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대구를 이룬다. 잘린 사물이 다시 붙고, 잘린 신체가 다시 붙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전반부의 위기는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흥미로운 것은 ‘붙이기’에 해당하는 이 영화 후반부의 내용이 갈등과 위기의 완벽한 해소가 아닌 비극의 심화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수술을 끝낸 것이지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니며, 셀로판테이프로 붙인 신용카드는 정호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카드라는 소재를 중심에 놓고 보자면, 정호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채무자의 신세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부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감행했던 행동이 그를 다시 부채의 늪으로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르고 붙이기>는 빚이 또 다른 빚을 낳고,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낳는 아이러니를 통해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호의 행동, 즉 그가 무언가를 자르고 붙이기를 행할 때 그의 손은 두려움에 떨고 있음에 주목하자. 그의 손은 가위를 들고 신용카드를 자를 때 또는 셀로판테이프로 잘린 카드를 다시 붙일 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물론 각각의 상황과 의미는 사뭇 다르다. 신용카드를 자를 때 정호는 분노, 짜증, 흥분 속에서 반대로 신용카드를 붙일 때 정호는 불안, 초조, 긴장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정호의 신체적 떨림은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겪는 고통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고통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정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빚을 남기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정호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빚과 그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인 동시에 어머니, 아내, 딸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정호가 겪고 있는 이 이중의 고통은 고시원 고유의 독특한 건축적 공간 구성에 따라서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쓰인 고시원을 하나의 소우주로 본다면, 그것은 전체를 작은 부분들로 자르고 이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건축적 공간에서 정호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로 대물림되는 가족의 해체를 겪으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받는 것이다. 영화는 정호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거나 반대로 그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정호가 어머니의 손을 다치게 만든 그날은 하필 그의 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딸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그 기묘한 상황은 앞으로 정호가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를 되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정호의 미래에 대해서 그 어떤 판단도 그리고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정호의 삶이 누군가의 무차별한 가위질로 난도질당하여 찢김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이제 정호에게 과거를 박차고 일어서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하나의 신호를 준다.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호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면서 연신 헛구역질을 한다. 만약 정호의 헛구역질이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구토의 전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를 떨쳐 낼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의 제스처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적 파산이 초래한 찢김의 고통을 다룬 이 작품은 어딘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극약처방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햇볕을 볼 시간>을 연출한 이다영 감독은 제작일지를 통해 이 작품이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라고 적었다. 이보다 더 간결하고 명징한 작품 소개가 있을까. 감독은 작품의 이야기를 포장할 수 있는 미사여구를 쓰는 대신 작업 과정을 사실적으로 압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 제작일지에는 제작 동기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다. “한 달 동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우리끼리 즐기면서 영화 찍으면 재밌겠다.” 제작일지에 적힌 이 두 문장은 영화 만들기가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닌 영화 만들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햇볕을 볼 시간>은 영화 만들기에 빠져든 영화인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이 만든 세계에 빠져들 관객을 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불완전한 상태를 가진 사물 또는 사람이다. 여주인공 재경은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이다. 그녀는 출연이 예정된 작품의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연습에 몰두한다. 영화 속 주요 소품 중 하나인 외바퀴 자전거는 재경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그녀의 자질과 가능성을 두루 비추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외바퀴 자전거는 바퀴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를 불안하게 만든다. 재경은 미숙하게나마 외바퀴 자전거를 탈 수 있지만, 그녀가 연기해야 할 캐릭터는 그녀보다 더 능숙하게 외바퀴 자전거를 탈 수 있어야 한다. 배우와 캐릭터의 불일치 그리고 배우의 현재와 배우가 꿈꾸는 미래의 불일치. 이러한 이유로 재경에 대한 문자적 묘사는 ‘아직’이라는 부사와 어떤 사실을 부정하는 ‘아니다’ 혹은 어떤 상태를 부정하는 ‘없다’라는 형용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그녀는 아직 그녀가 꿈꾸는 배역이 갖추어야 할 어떤 자질이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재경과 동거하고 있는 현수 또한 불안한 현재를 사는 것으로 묘사된다. 현수는 일상 곳곳에서 소리를 수집하여 음악을 만드는 일을 즐겨 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생계유지를 위해 하는 일은 사운드 엔지니어이다. 만약 현수가 음악가로서의 꿈을 꾸고 있다면 그가 소망하는 미래는 현재 그의 직업적인 일로 인해서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재경은 현수의 음악과 그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에게 유튜브를 해보라고 권하지만, 그런 재경의 제안에 현수는 “모르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현수는 자신의 현재가 불안정하다고 해서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내기를 걸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한편, 현수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현수가 사는 집의 계약 기간이 만료될 시점이 가까워지자 집주인이 월세를 올리겠다고 통보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불안이다. 이 일로 현수와 재경의 삶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어난다. 두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정든 공간을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과거와 미래는 현재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 또한 재경과 현수의 일상에서 불현듯이 감지되는 과거의 어느 순간 또는 미래의 어느 순간과 마주할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영화는 어떻게 현재를 묘사할 수 있을까? 영화는 어떻게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나 미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햇볕을 볼 시간>은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의 기묘함을 드러내기 위해 신체에 습관의 형태로 각인된 감각을 시각화하는 방식과 함께 특정 대상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을 두루 활용하고 있다. 먼저 전자의 경우로는 신체와 몸짓을 통해 시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재경이 출근, 퇴근, 외출 등을 할 때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모습, 현수가 녹음실에서 자판을 보지도 않고 키보드를 다루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재경과 현수가 의례적인 몸짓으로 가벼운 신체 접촉과 함께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재경과 현수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분리수거를 하는 모습 등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이 장면들 모두 재경과 현수가 직업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반복된 행동 양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장면에서 배우들의 몸짓은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과거, 즉 영화가 애써 다 보여주지 않은 캐릭터의 과거의 누적된 경험을 관객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음으로 후자의 경우로는 특정 대상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이 장면들은 대체로 가까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상태를 의식적으로 개선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재경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의 배역을 따내기 위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예로는 재경이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로 구연동화를 하는 장면들을 거론할 수 있다. 재경은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즐거워하기를 바라면서 구연동화의 시연 방식을 조금씩 바꾼다. 재경은 자신의 구연동화를 듣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미래, 즉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여러 시도를 한 것이다. 또한, 이사를 앞두고 재경과 현수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사소한 언쟁을 벌이는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반복과 습관을 통해 과거가 현재로 지속되고, 기대와 예측을 통해 현재가 미래로 연장되는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두 개의 시간, 즉 과거가 새어 들어오는 현재와 미래가 새어 들어오는 현재는 질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실상 두 경우 모두 시간의 속성이 인간이 의식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에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썼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는 그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분명 뒤엉킨 시간의 질서는 우리를 조급하고 불안하게 만들겠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시간의 기묘한 성격으로부터 도리어 위안을 찾으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의식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우리는 무기력해질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나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좌절, 무기력, 패배,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경험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고 난 뒤에 따사한 햇살과 말간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삶은 우리에게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뜻하지 않은 행복과 위로를 전해주기도 한다. <햇볕을 볼 시간>에서 그런 우연은 재경이 산 중고 캠코더 안에서 발견된 누군가가 찍어 놓은 동네 풍경 또는 재경과 현수가 함께 하는 여러 소소한 일상들 안에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일상을 구성하는 여러 다른 시간적 경험이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하나의 리듬을 구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삶의 흐름이 만들어낸 하나의 교항곡과 같다. 음악의 리듬을 듣고 느끼는 것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듯이 누군가의 삶의 리듬을 보고 느끼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김정민 감독의 < 감자 >는 한편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화이기 이전에 여러 기괴한 볼거리를 과시적으로 전시하는 쇼에 가깝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강원도 어느 감자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둘러싼 경찰, 농부, 천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원씬 원컷으로 촬영한 이 단편영화의 매력은 원시성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원시성이란 영화가 역사적으로 말하기(telling)를 획득하기 이전부터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보여주기(showing)의 역량과 관련이 있다. <감자>는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 고구마밭을 감자밭이라고 우기는 농부, 감자밭에서 경찰을 내쫓으려는 천치 사이에서 우발적, 기습적, 충격적으로 발생하는 대사, 몸짓, 사건을 활용해 끊임없이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특징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스릴러 장르의 관습이 그러한 것처럼 <감자>에도 미스터리한 사건과 인물이 있고, 사건을 둘러싸고 쫓고 쫓기는 긴장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궁에 빠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하기보다는 핵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황과 관련된 다양한 볼거리를 전시한다. 을씨년스러운 강원도 어느 바닷가 근방에 있는 감자밭의 풍경, 배우들의 다소 별난 몸짓, 관객의 예측을 벗어나는 우발적 상황 등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이다. 이와 더불어 바닷가가 보이는 어느 밭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보여주는 오프닝이나 줌인, 패닝, 틸팅 등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따라가면서 프레임의 경계를 확장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또한 이 영화의 볼거리이다.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이 영화의 특징은 ‘어트랙션 영화(cinema of attraction)’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영화학자 톰 거닝은 아직 영화라는 매체에 서사가 도입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의 핵심적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어트랙션 영화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그는 초기 무성영화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관음증적인 시선을 유발하기 위해 시각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이론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어트랙션 몽타주를 개념적으로 참고했는데, 에이젠슈테인이 말하는 어트랙션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서커스, 보드빌, 놀이공원 등과 같은 근대적인 여가 문화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연극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무대, 의상, 연기와 관련이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어트랙션이 공격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감각, 심리,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어트랙션에 관한 이런 논의에 따르면, 영화에서 쓰이는 어트랙션은 관객이 다양한 볼거리를 바라보면서 작품 속 세계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에 가깝다. <감자>를 구성하는 여러 기괴한 이미지들은 이 작품을 하나의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깝게 만든다. 이 영화의 웃음 코드는 특정 상황에 대한 오인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배우들의 기괴한 몸짓에 기초한다. 통상적으로 코미디 영화에서 오인은 특정 상황에 대한 등장인물의 무지로부터 발생한다. 예를 들어, 길거리를 어느 인물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이 그러하다. <감자>의 오인은 이야기가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영화의 시작 부분은 대략 이러하다.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경찰이 밭에 도착하면, 농부가 경찰을 향해 걸어온다. 경찰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고구마밭의 주인을 찾는데, 농부는 그 밭이 감자밭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국내의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감자라는 단어는 고구마라는 단어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18세기에 중국으로부터 감자가 유입되기 전까지 국내에는 고구마라고 불리는 작물만 있었다. 하지만 감자가 국내에 들어온 이후 그것의 생김새가 고구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고구마 또한 감자라고 불렸다. 고구마는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제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감자>에서 한 농부가 고구마나 감자나 전부 감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마냥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주목할 부분은 이 작품에서 농부가 감자라고 지칭하는 대상은 정작 감자도 고구마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그 농부는 땅속에 묻힌 시체를 가리켜서 감자라고 우긴다. 영화는 감자밭에 파묻혀 있던 시신의 일부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농부에 의해서 유지된 오인의 상황에서 웃음기를 거둬들인다. 진실과 거짓의 위계가 무너져 내린 그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바라보는 농부는 더 이상 평범한 농부가 아니며 그가 바라보는 천치는 더 이상 인지능력이 부족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웃음 코드는 오인과 관련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상황, 사건, 몸짓과 관련이 있다. 과거 찰리 채플린과 같은 코미디 배우들이 자신들의 신체와 몸짓을 통해서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했던 것처럼, 이 작품 또한 배우들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무언가를 피해 달아나거나, 바닥을 기어가는 모습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 몸짓들은 롱테이크의 미학 속에서 사실적인 성격을 갖지만, 그 사실성을 위해 연출자와 배우들은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방법과 배우들 사이의 연기의 합을 수학적으로 미리 계산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사실성은 논픽션에서 기대되는 우연적이고 비-연출적인 요소보다는 픽션에서 기대되는 계산적이고 연출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기괴한 몸짓 중 일부는 관객의 오인, 즉 특정 장면에 대한 관객의 예측이 실패하는 상황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신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그러하다. 죽은 줄 알았던 신체가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 즉 산 주검(living dead)은 과거 어트랙션 영화가 즐겨 활용했던 소재 중 하나였다. <기이한 마차 사고(An Extraordinary Cab Accident)>(1903)의 경우 한 남성이 마차에 치여 숨지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죽은 줄 알았던 그 남성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어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짓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러한 작품들은 교통사고, 살인, 죽음 등에 대한 공포를 활용해서 충격과 웃음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감자>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기괴한 볼거리로 가득한 상황, 사건, 몸짓을 만들어내는 작품들과 가족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시각적인 볼거리를 통해서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고 지각에 혼란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보여주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영화적 경험,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한 오인과 무지에 기초한 영화적 경험이다. 김정민 감독의 <감자>는 예술이 관객에게 호기심, 쾌락, 관음증을 자극하는 시각적인 볼거리이며, 그러한 바라보기의 경험이 일어나는 동안 관객의 상상력에 의한 판단과 오인이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시험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보여주기의 충실성이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