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영화 행복한하루되세요(2007)
- 제작년도
- 2010
숲은 빛이 춤추는 사원이자 대성당이다. -제인구달 어느 날, 아이를 재우며 제인 구달의 책 <내가 사랑한 침팬지>를 읽게 되었다. 아이는 일찌감치 잠이 들고, 책장을 덮으려는 순간 한 구절이 다가왔다. ‘숲은 빛이 춤추는 사원이자 대성당이다’ 성미산 마을 연작다큐멘터리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춤추는 숲 >은 우리 가족이 성미산 마을에 터를 잡은 지 5년째 되던 해, 강석필 감독(마을별명 맥가이버)이 마을 다큐를 기획하면서 시작되었다. 도시에서 아이를 키울 수 밖에 없다면, 아이에게는 믿을만한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했고, 우리에게는 동네 친구 몇 명쯤은 사귈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서울을 조금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수도권 일대의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홍피디가 살던 지금의 성미산 마을에 깃들게 되었다. 이후 아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할 무렵, 맥가이버(줄여서 맥)와 호호는 비로소 ‘마을’이라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맥가이버!” 도시의 어떤 곳에서 이런 인사가 가능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처럼 흐르는 따뜻함.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좋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가 생활에서 확장된 것이 마을이다. 바로 그 마을에서 성미산 사람들은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성미산 마을에는 한가지 특별한 매력이 더해진다. ‘모두에게 꼭 필요한, 더 나은 길은 없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결과가 실패든 성공이든 용감하게 길을 찾아간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을 춤추게 하는 마을의 힘은 무엇일까?’ < 춤추는 숲 >은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다큐멘터리다. 물론 이 질문에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과 더불어, 마을의 일원인 내부자의 시선이 동반되는 독특한 입장이 담겨있다. 지금이야 한국사회 전역에서 ‘마을’이 화두지만, 6년 전 맥이 <춤추는 숲>을 기획할 때만 해도,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20여 년 전 한 줌의 부모들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세우고 성미산 마을의 씨앗을 뿌릴 때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마을’은 죽은 말이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한국형 마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성미산 마을이 시작된 것이다. 낙지가 달려오고, 굼벵이가 실려가다. 마을의 일상을 다루고 싶었던 마을연작 중 1부는, 2010년 성미산 개발이라는 돌발상황을 맞으며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 춤추는 숲 >에서 성미산 개발을 둘러싼 상황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개발 그 자체가 작품의 화두는 아니다. 마을로서는 특별한 위기의 순간을 맞았으나, 제작진의 관심사는 그것을 풀어가는 마을과 사람들에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사회에서 개발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곧바로 환경다큐멘터리로 규정하거나 머리띠와 구호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춤추는 숲>은 다른 맥락에 기대어 있다. 영화에는 낡은 가치를 뒤집는 성미산 사람들만의 유쾌한 해법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즐겁되, 함께 행복한 방법’을 찾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쾌한 반전은 파란만장한 싸움의 과정에서도 늘 숨어있었다. 어느 날 새벽, 용역들이 대거 투입돼서 성미산 지킴이 텐트를 부수는 상황이 끝나고 기자회견이 있었다. 상황을 보고하는 기자회견에서 진행자 멘트가 압권이었다. “굼벵이가 쓰러지자, 낙지가 달려오고, 토끼가 몸싸움을 했습니다!” 푸하하! 눈물겨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잠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맥가이버와 호호처럼 마을에서는 별명을 쓴다. 그런데 그날 산에 있었던 사람들이 ‘굼벵이와 낙지, 토끼’였던 것이다. 이런 기막힌 순간은 촬영되었지만, 영화의 흐름상 아쉽게도 쓰이지는 않았다. 쟁이와 꽃다지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다. 6년 동안 공들인 < 춤추는 숲 >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되면서, 영화의 주연배우들인 주민들이 동행하게 되었다. 영화제에 배우로 참석하는 특별한 경험을 나누고 싶기도 했고, 제3자인 관객들로부터 자신들이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자리라 설레고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3분 동안 끊이지 않고 박수가 이어졌다. 객석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커플이 첫 번째 포문이 열었다. “가슴 아픈 상황이라 보는 내내 대성통곡했습니다. 동시에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울다가 웃다가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날 저녁 진하게 뒤풀이를 하고 서울로 가는 쟁이가 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다. “맥가이버와 호호! 영화를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쟁이와 꽃다지는 여전히 마음의 상처를 돌보는 중이다. 행복한 영화, 마을이 움직인다. ‘한 아이가 자라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오랜 속담이 있다. 아이가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돌봄 속에 자라듯, < 춤추는 숲 > 역시 비단 제작진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품을 거쳐 마을에서 나고 자란 특별한 영화다. 이 행복하고 감사한 영화가 만들어낼 의미 있는 기적을 예감하면서, <춤추는 숲>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유쾌한 바람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사진설명_ 1. 상단사진: .< 춤추는 숲 > 청소년 홍보팀과 홍형숙 PD 2. 중간사진 (좌) 강석필 감독과 홍형숙 PD (사진 김성곤) (우상) < 춤추는 숲 > 예고편 촬영한 김우영 촬영감독과 연출한 자경 감독 (사진 가림토) (우하) < 춤추는 숲 > 예고편에 출연한 마을 주민 배우 고창석 님의 가족 (사진 가림토)
작년 봄 <씨네21>의 제안 덕분에 영화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화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영화평론가 행세를 할 생각은 없으며 어디까지나 문학평론가로서 쓰고 있을 뿐이다. 매체에 대한 깊은 식견이 없는 사람이 그 분야의 평론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영상이라는 매체의 문법을 잘 알지 못하므로 다만 영화의 서사구조에 대해서만 겨우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끔 이런 것이 ‘영화적 마술’이 아닐까 싶은 것과 만날 때면 나는 그냥 무력한 감탄의 주체가 되고 만다. 예컨대 정지우 감독의 < 사랑니 >(2005)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내게는 없지만, 몇 번을 봐도 나는 이 영화에 감탄하고 또 무력해진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엉키는 시간의 신비 서른 살 조인영( 김정은 )이 열일곱 살 이석( 이태성 )에게 사랑을 느낀다. 첫사랑과 이름과 외모가 똑같은 아이에게서 신비로운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외려 이상할 것이다. 십분 정도가 지난 뒤 열일곱 살 조인영( 정유미 )이 등장하고 그녀가 (이태성이 1인 2역을 하는) 한 소년을 향해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표정을 지을 때 이것이 서른 살 조인영의 13년 전 모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비록 그 소녀가 소년을 ‘이석’이 아니라 ‘이수’라고 부르는 장면이 있지만 처음에 나는 흘려들었다.) 말하자면 같은 인물의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50분 정도가 지나면 열일곱 살 인영이 서른 살 인영 앞에 나타나는 장면이 나온다. 방심한 채로 영화를 보다가는 저 장면에서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두 인영은 서로 다른 인물이었던가. 이름이 같은 두 여자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쌍둥이 형제인 이수와 이석에게 각각 동시에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17세 인영이 사랑한 이수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그녀가 이수의 동생인 이석에게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17세 인영과 30세 인영이 이석을 사이에 두고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여기에, 30세 인영의 첫사랑인 또 다른 이석이 13년 만에 나타나면서, 30세 인영을 사이에 두고 두 이석 또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두 인영이 만났고 이제 두 이석까지도 만났다. 이쯤 되면, 이 영화는 어쩌려고 이러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사실 여기에 비논리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도 된다.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여기와 거기’의 이야기였으니 두 인영과 두 이석은 당연히 만날 수 있다. 하필 이름이 같은 두 여자와 두 남자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상황이 기묘하고 복잡해진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다 해결되는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이 영화는 벨소리, 지구본, 교과서, 세탁기 등의 소도구를 이용해 이 사랑의 관계들을 꼬아 엮어 다시 관객의 나른한 혼란을 조장한다. 그래서 결국은, 오직 한 사람의 인영과 한 사람의 이석이 있을 뿐이며,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불합리한 공존 혹은 신비로운 공명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리얼리즘인가 판타지인가. 작품이란 모름지기 저 둘 중 하나일 뿐이니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떤 완강한 관객에게 이 영화는 그런 양자택일의 물음이 쓸데없는 것임을 두 시간 동안 고요히 설득한다. 그 두 시간 중에서도 가장 친절한 설득은 4분의 3지점에 나온다. 17년 만에 첫사랑 이석을 만나서 실망하고는 문득 현실감각을 회복한 서른의 인영이, 열일곱 이석과의 약속을 잊고 있다가 새벽녘에 그에게 달려가서 키스를 하는 장면. 여기서 인영의 몸은 공중으로 떠오른다. 가장 리얼한 충만을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판타지의 옷을 입힌 경우다. 사랑의 감정 속에서 실제와 환상은 때로 구별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 영화의 서사 전체가 그렇다. 서사론은 시간론이고 시간론은 인생론이다. 이 영화가 채택하고 있는 저 ‘불합리한 공존’과 ‘신비로운 공명’의 서사는 이 영화의 감독이 사랑이라는 사건을 일생이라는 시간의 축 위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돌려 말하는 장치일 것이다. 열일곱의 인영은 이수와 이석을 구별할 수 있게 된 뒤에도 죽은 이수에 대한 못 다한 사랑을 이석에게로 끌고 갔고, 서른 살의 인영은 열일곱의 이석이 자신의 첫사랑 이석과 똑같이 생겼다고 믿었으나 사실 그 둘은 전혀 닮지 않았다. 이런 ‘같음과 다름’의 혼돈과 착종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한다. 실제와 환상이 뒤섞이듯, 진짜와 가짜, 과거와 현재, 17살과 30살, 나와 네가 뒤섞인다. 사랑은 가까이 갈수록 흐릿해지는 원시(遠視)의 피사체다. 영화가 구현할 수 있는 이 시간의 엉킴이야말로 사랑이라는 피사체를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포하는 영화적 마술의 한 동력은 아닌지. 흐르는 시간의 의미 관객으로 하여금 사랑에 대한 이런 메시지를 순순히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이 영화를 떠받치는 경탄할만한 섬세함이다. 특히 학원, 일식집, 공항, 모텔, 양호실을 차례로 경유하는 영화 중반부의 20여분이 그렇다. 이 20분 동안에 열일곱 이석과 두 명의 인영은 모두 자신들의 결정적인 울음을 운다. 그 눈물과 함께 그들은,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의 진실을 이해하게 되고, 이전과는 달라진 자신을 받아들인다. 일식집에서 이석이 술에 취해 한탄할 때 문이 닫혀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게 되는 장면, 서른 살 인영이 이석과의 첫 섹스를 앞두고 고민하다 미리 브래지어를 벗는 장면, 울다 지쳐 잠든 열일곱 인영이 핸드폰을 꼭 쥐고 있는 장면 등에서 발휘된 섬세함이 저 각성의 눈물들을 어루만지고 연결한다. 여기에 한 장면을 덧붙이고 싶다. 저 문제의 20분이 끝나갈 무렵에, 이재진이 작곡한 아름다운 스코어(‘첫사랑’)가 이 영화 전체에서 딱 한 번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에 나오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열일곱 인영의 모습 이후에,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양호실 커튼이 흔들리고, 그녀를 다독이며 침대에 눕힌 양호교사가 새로 산 구두를 신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 장면. 물론 이 장면에서 양호교사는 그 자리에 없는 서른 살의 인영을 대신해 거기 있는 것이리라. 열일곱의 사랑이 눈물을 흘리며 잠든 공간에서, 서른 살의 욕망은 새 구두에 발을 집어넣는다. 양호교사는 제 학생을 달래주고 눕혔지만 그녀는 아팠던 자신의 열일곱을 이미 잊었을 것이다. 서른 살 인영이 그러한 것처럼. 요컨대 이 장면은, 그 직전에 나온 울고 있는 열일곱 인영과 그 직후에 나올 화장을 하는 서른 살 인영을 잇는, 일종의 접속사로 기능한다. 이렇게 의미를 해석해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으로 이 장면의 의미가 다 탕진되지는 않는 것 같다. 삭제된다 하더라도 서사가 무너지지는 않을 장면이다. 그런데 앞선 20분 동안 자신의 가장 중요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 세 사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다가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 한 여자의 욕망을 무심히 보여주는 이 장면은 이상하게 아름답다. 나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의미로 팽팽하게 충전돼 있지 않고 불가결하지도 않은 이런 장면은 왜 단지 거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아름다움을 산출하는 것인가. 어떤 말과 행동이 장착할 수 있는 의미의 최대치가 100이라면, 우리의 말과 행동 중에서 많아야 2~30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대체로 사려 깊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내 흩어져버린다. 어쩌면 그것들에 우리의 가장 중요한 진실이 담겨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을 때 영화는 지상에서 흐르는 어느 시간을 살아 있는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놀라운 기술이 된다. 문학에서 시간의 의미는 그 시간을 살고 난 이후 되돌아볼 때 얻어지는 어떤 깨달음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것은, 그 어떤 깨달음의 형태로 굳어지기 전에, 그저 흐르고 있는 그 상태로 자체로, 무(無)의미가 아니라 미(未)의미의 형태로 보존된다. 이것 또한 영화적 마술의 한 본질인 것은 아닌지. 요약하자. 이 영화에서 나는 시간을 다루는 영화적 마술의 어떤 사례를 본다. 영화 속에서 엉키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매듭은 때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삶의 한 신비를 시각적 어리둥절함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영화 속에서 흐르는 시간이 하나의 의미로 박제되지 않고 충분한 섬세함으로 생포될 때 그것은 이 세상을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 의미들을 제 안에 품고 있는지를 경이롭게 느끼게 한다. 내가 그럭저럭 해낼 수 있는 것은 이야기로서의 영화를 윤리학적 층위에서 음미하는 것이지만, 그저 무력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 영화적 마술 앞에서 나는 더 순수한 쾌감으로 행복해한다. 내게 < 사랑니 >는 행복한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