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비(허비 - 첫 시동을 걸다)
- 감독
- 안젤라 로빈슨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린제이 로한, 저스틴 롱, 맷 딜런, 마이클 키튼
언제부턴가 재즈를 자주 듣는다. (나 알고 보면 재즈 듣는 남자!) 요즘 나의 ‘최애’ 재즈 뮤지션은 에디 히긴스(Eddie Higgin)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에디 히긴스의 재즈를 듣고 있으면 건반의 한 음 한 음이 탄산음료 방울 터지듯 내 심장에 와 톡톡거리는 것이 영혼의 마사지를 받는 느낌이다. 모든 앨범이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A Fine Romance>를 좋아한다. 첫 곡 ‘I Concentrate On You’를 비롯해, ‘Girl Talk’, ‘September In The Rain’, ‘I Fall In Love Too Easily’ 등 제목부터 사랑으로 충만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의 심정으로 사랑 안 하는, 아니 못하는 나 스스로가 불쌍해 잠시 숙연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가 재즈를 좋아하는 건 일종의 자기 반영 때문인 것 같다. < 블루노트 레코드 Blue Note Records: Beyond the Notes >(소피 허버, 2018) 시사 메일을 받고는 바로 신청했다. 재즈 레이블의 고유 명사 격인 ‘블루 노트 레코드’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니 참석하고 싶었다. 기대한 것만큼 좋았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두 청년이 어떻게 ‘블루노트 레코드’를 설립했는지,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허비 행콕, 노라 존스 등 레이블을 거쳐 간 스타의 면면을 두루 살피고, 블루노트의 현재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이 녹음하는 현장까지 포착하는 등 시대와 공간을 유영하며 즉흥 연주처럼 주고받는 편집이 인상적이었다. 그날 시사는 좀 특별한 풍경이었다. 영화 상영 전 이뤄진 수입사 대표의 인사말 때문이었다. 보통 기자 시사는 별도의 식 없이 치러지기 마련인데 <블루노트 레코드>는 달랐다. (주)마노엔터테인먼트의 대표는 바로 영화 상영으로 들어가는 건 정이 없어 보인다며 해당 영화에 관해 몇 분 동안 이야기를 풀었다. 벌써 한 달 전이라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한 문장 만은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소수가 즐기는 문화가 오래 살아남는다.” 블루노트 레코드의 시작은 80년 전이다. 재즈 애호가였던 알프레드 라이언과 프랜시스 울프는 1939년 뉴욕에서 작은 음반사 블루노트 레코드를 설립했다. 이들은 영입한 뮤지션의 창작의 자유를 일체 보장하며 완성도 높은 ‘블루노트 사운드’를 확립했고 사진작가 프랜시스 울프가 녹음 현장에서 찍은 뮤지션의 사진에 디자이너 리드 마일스가 단순하고 명료한 타이포그래피로 커버를 만들어 ‘블루노트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래서 블루노트 레코드는 재즈 레이블의 이름이면서 ‘블루노트스러움’으로 표현되는 수준 높은 재즈를 대변하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재즈도 황금기가 있었다. 블루노트 레코드 발매의 존 콜트레인의 <The Ultimate Blue Train>(1957), 아트 블레이키 앤 재즈 메신저스의 <Moanin’>, 캐논볼 애덜리의 <Somethin’ Else>(이상 1958)는 재즈의 명반으로 통한다.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와 셀로니오스 몽크 등이 주도한 비밥 역시 1940~1950년대를 재즈의 시대로 이끌었다. 힙합이 대세인 지금은 재즈 하면 마니아가 즐기는 소수의 문화로 인식되고 있지만, R&B, 힙합 등의 장르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음악으로 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살아남는 건 수치가 아니라 스타일이다. 개성이다. 이게 꼭 재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어서 <블루노트 레코드>의 수입사도, 두세 편의 블록버스터가 박스오피스를 나눠 먹기 하는 여름 시장의 각축장 속에서도 < 밤의 문이 열린다 >( 유은정 , 2018), < 이타미 준의 바다 >( 정다운 , 2019), < 우리집 >( 윤가은 , 2019) < 벌새 >( 김보라 , 2018), < 누구나 아는 비밀 >(아스가르 파르하디, 2018), < 돈 워리 >(구스 반 산트, 2018) < 지구 최후의 밤 >(간 비, 2018), < 나는 예수님이 싫다 >(오쿠야마 히로시, 2018) 등 ‘개성 있는 스타일’의 작은 영화를 제작하고 소개하는 회사들도 모두 ‘블루노트 레코드’다. 관객 수는 큰 영화와 비교가 안 될 정도이기는 해도 이들 작품이 남긴 감흥은 천만 수치 이상이라고 확신한다. 뮤지션 알리 샤히드 무하마드는 블루노트 레코드에 관해 이렇게 코멘트하였다. “블루노트는 ‘정보의 바다’였어요. 우리가 발견한 것은 재즈 음악 속에 숨겨진 여백, 모든 연주자를 위한 솔로 부분이었죠. 아티스트만의 모멘트가 있었고 그것이 재즈를 발견하는 아름다움이에요.” <블루노트 레코드> 영화를 보고 집에 와 에디 히긴스 음악을 들으니 ‘내 사랑 어디에 있나요?’ 자기 반영의 동질감이 또 다르게 다가온다. 내가 스타일 있는 작은 영화를 참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 그 영화들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는 바램. 재즈는 음악이면서 스타일이고, 철학이다.
대정관은 1912년 11월 7일 앵정정(櫻井町)에 설립되어 1935년 12월 16일까지 존속한 대표적인 일본인 전용 영화관이었다. 대정관의 설립자는, 고급 여관 천진루(天眞樓)의 주인 닛다 마타베(新田又兵衛)의 셋째 아들인 닛다 고이치(新田耕市)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에 있던 천진루를 남산에 옮겨 지었을 정도로 이토와 막역한 관계였던 닛다 마타베는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으로 이주하여 활동했다. 장남 닛다 신기치(新田新吉)는 천진루를 이어받았고, 차남 닛다 슈키치(新田秀吉)는 닛다 고이치와 함께 대정관을 운영했으며, 막내 닛다 마타헤이(新田又平)는 인천에서 표관(瓢館)이라는 영화관을 운영했다. [자료] 닛다 고이치의 가족 사진(《조선공론(朝鮮公論)》, 제4권 3호, 1916년 3월) 1882년 태어난 닛다 고이치는 1899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미쓰이(三井)물산에 입사하여 사업 수완을 배운 후,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던 1910년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건너 왔다. 조선에 와서는 가족과 지인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개발 예정지였던 앵정정 일대 5천평 정도의 땅을 매집했다. 자금은 동경건물회사(東京建物會社)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아 변통했는데, 그 땅을 관통하여 지금의 을지로가 뚫리게 되면서 짧은 기간에 큰 시세 차익을 얻었다.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고도 2만원의 현금을 손에 쥔 닛다는 1만 2천원의 예산으로 활동사진관 건립을 추진한다. 영화관 건축이 완성될 무렵, 메이지(明治)시대가 끝나고 다이쇼(大正)시대가 시작되자 닛다는 애초 생각해둔 유락관(遊樂館)이라는 이름 대신 대정관이라는 이름으로 1912년 11월 7일 극장 문을 연다. 대정관은 경성의 영화 흥행을 주도하던 경성고등연예관과 차별화한다는 의미에서 극장 광고에 “아사쿠사식(淺草式)”이란 용어를 적극 활용했다. 태국에서 온 일본인들이 세운 경성고등연예관의 흥행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여, 월 2회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던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자주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또한 입장료를 특등 50전, 1등 30전, 2등 20전, 3등 10으로 책정하여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관객들을 유치했다. 나아가 위생 설비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의 설치, 난로와 선풍기의 구비, 양장(洋裝)의 여성 안내원 배치 등을 통해 편리함과 청결함을 강조함으로써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대정관과 경성고등연예관은 관객 구성 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경성고등연예관은 대정관이 개관하기 전인 1912년까지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를 함께 두어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들을 함께 받았다. 반면 대정관은 일본인 변사만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일본인 관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 되었다.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관을 운영하다 보니 대정관의 프로그램은 일본의 구파, 신파 영화가 중심이었다. 일본영화 필름을 공급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대정관은 닛카쓰(日活)와 대리점 계약을 맺는데, 일본의 4대 메이저 영화회사인 요시자와상점(吉澤商店), 요코다상회(橫田商會), M파테, 후쿠호도(福寶堂)가 통합하여 1912년 설립된 닛카쓰는 당시 일본 영화 산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사진] 대정관 개관 사진(오카 료스케(岡良助),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 도쿄: 하쿠분샤(博文社), 1915년.) 닛다 고이치는 극장 운영과 흥행업을 체계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닛다연예부(新田演藝部)를 세워 운영했다. 1914년 1월 닛다연예부의 영업주임은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 지방부장은 스즈키 도라타로(鈴木虎太郞)였다. 닛다연예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대정관을 중심으로 전국의 영화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필름 유통망을 조직하는 것이었는데, 닛다연예부는 우선 계약을 통해 지방 영화관과 관계를 맺었다. 1913년에는 경쟁 영화관이던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입하여 제2대정관으로 삼았으며, 닛카쓰와의 계약 이래 ‘닛카쓰 만선지방부(滿鮮地方部)’로 운영되던 1916년에는 인천의 표관을 직영했다. 나아가 경성의 우미관(優美館), 평양의 앵좌(櫻座), 원산의 수관(壽館), 부산의 보래관(寶來館), 대구의 금좌(錦座)를 특약관으로 두고 영화배급망을 구축했다. ‘닛카쓰 조선총대리점’으로 운영되던 1917년 1월 당시 닛다연예부가 관리하던 극장으로는 경성의 대정관(감독원: 노무라 신(野村新)), 인천 표관(감독원: 스즈키 도라타로), 부산 상생관(相生館, 감독원: 미요시 마타로(三好又郞)), 용산 용광관(龍光館, 감독원: 다카하시 류타로(高橋立太郞)), 대구 칠성관(七星館, 감독원: 기리야 도쿠노스케(桐谷德之助)), 평양 가무기좌(歌舞伎座, 감독원: 요시즈미 신고(吉住新吾)), 원산 가무기좌(감독원: 히가시우라 도쿠마루(東浦得圓))이 있었다. 1920년 1월에는 경성의 대정관, 인천의 표관, 부산의 상생관, 대구의 칠성관, 원산의 수관, 평양의 가부키좌를 회원관으로 두고 있었다. 1918년 닛다 고이치는 주식중매회사인 오사카의 다케하라 유자부로(竹原友三郞)상점과 조선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뒤 본격적으로 주식중매업에 뛰어든다. 이후 1920년 5월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설립되자 영화흥행업 관련 사항들은 형제들에게 넘기고 주로 주식중매인으로 활동했다. 닛카쓰 영화를 배급하며 조선의 흥행업을 주도하던 닛다연예부는 조선 내 다른 일본 영화회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큰 타격을 입는다. 특히 1921년 닛카쓰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橫田永之助)가 희락관(喜樂館)의 대주주가 되면서 대정관의 닛카쓰 독점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에 대정관은 1921년 12월 15일부터 쇼치쿠(松竹)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하는데, 쇼치쿠 역시 경성의 황금관(黃金館)을 직영하면서 독점이 어려워지자 또 다른 영화회사인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하기로 한다. 그러나 중소영화회사인 곳카쓰 영화보다는 쇼치쿠 영화가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다 1925년 1월 닛다 형제들은 결국 대정관을 매각한다. 대정관의 운영은 앵정정에서 오복점을 경영하던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가 넘겨받았다.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없던 후쿠자키는 요코야마 도미오(橫山富美雄)와 나카미즈 도모노스케(中水友之助) 등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많은 인물들을 중용하여 경영의 안정을 기하는 한편,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郎)나 하야지 조지로(林長二郞) 등 유명 스타가 출연하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며 관객들의 인기를 끌어 올린다. 하지만 시설이 열악했던 대정관은 토키영화 시대가 도래하자 다시금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33년 쇼치쿠의 최고 화제작이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토키영화 <충신장(忠臣藏)>이 상영되는 도중, 소리가 중간 중간 끊어져 관객의 원성을 들었던 것이다. 이전부터 대정관의 열악한 시설에 불만을 가졌던 쇼치쿠는, 1934년 대정관과 경성 봉절관으로서의 관계를 끊고 황금관의 후신인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경성의 새로운 봉절관을 삼기로 결정한다. 이에 쇼치쿠 영화의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1934년 11월 15일 후발 영화사인 PCL과 계약을 체결하고 PCL 봉절관이 된다. 하지만 PCL 봉절관 시절도 오래가지 못한 채 1935년 12월 16일을 기해 폐관하기에 이른다. 대정관의 흥행권은 약초정 큰 길가에 신축 중이던 약초영화극장으로 넘어갔고,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참고문헌 한상언, 「대정관의 설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영화연구』 제70호(2016년), 163~188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25~140쪽. * [사진](상단). 대정관 개관 기념 광고(≪매일신보≫, 1912.11.08) [자료] 제2대정관 전단지 來 八月 十七日 부터 第二大正館 新消息 特 히 撰拔 ᄒᆞᆫ 三大寫眞 을 ------------------------------------ ◎ 泰西奇談 三百年 全三卷 六千呎 三百年 以前 의 秘密 寶箱 은 如何 히 發見 지 一見 戰慄 만 大寫眞 ------------------------------------ 時節柄 見逃 치 못 逸品 ◎ 軍事大活劇 千軍萬馬 全二卷 四千尺 他館 의 寫眞 과 同視 치 勿 ------------------------------------- 特 히 當館 에 移入 封切 大寫眞 ◎ 破天荒 冒險劇 秘密使命 全三卷 八千尺 王妃 의 秘密 ! 飛行家 의 使者 ! 戰慄 大臣 의 奸謀 ! 疑問 의 首飾 ! 空中 飛行機 의 燃燒 ! 惡漢 의 追跡 ! 飛行機 , 自動車 , 滊車 의 競爭 何 가 勝利 ? --------------------------------------------- 順序 滑稽 담우 君 決鬪 喜劇 好一對 奇談 三百年 大活劇 千軍萬馬 冒險劇 秘密使命 ---------------------- 登場辯士 辯士長 金德經 說明主任 李丙祚 次席 崔炳龍 辯士 韓圭成 女辯士 康鏡玉 辯士 姜信五 少年 李丙浩 ------------------------------------ 注意 !! 寫眞 長尺 인 故 로 午後 七時 三十分 開演 黃金町 第二大正館 電話 一四三四 [자료] 《매일신보》, 1915.04.24. 朝鮮人 觀客 을 獨占 優美館 과 衆口 / 셰상 맛난 우미관 / 샤진에 물론 죵로 경셩에 잇 활동샤진관 ( 活動寫眞館 ) 으로 죠션 사 을 쥬장되 손님 삼아 흥 곳은 황금뎡 이뎡목에 데이대졍관과 죵로통 이뎡목에 우미관 ( 優美館 ) 의 두 곳이 잇셔 뎨이대졍관은 그 큰집 되 뎨일대졍관에셔 샤진을 공통 야 쓰 것이 만앗고 우미관에셔 대졍관의 뎍되 황금관 ( 黃金館 ) 과 샤진을 공통 야 두 곳식 두 곳식 엄연히 한 뎍국의 도로 셔로 야 경 을 고로 그 경 의 결과 연 셔로 됴흔 샤진도 빗최여 셔로 손님을 만이 랴 를 쓰더니 기간 ▲ 우미관의 흥 쥬 와 대졍관의 흥 쥬와 계약이 되야 죠션인을 주장되 손님으로 영업 던 뎨이대졍관은 디인 젼문으로 곳칠 죠건으로 뎨이대졍관에 가 손님을 밧을 우미관 흥 쥬 그 보슈로 대졍관 흥 쥬의게 삭 이 원식 주고 뎨이대졍관에셔 빗쵸이 활동샤진을 우미관과 공통 야 쓰고 우미관에셔 그 셰금으로 삭 오 원식 이기로 작뎡되야 뎨이대졍관은 지난 십오일브터 셰계관 ( 世界館 ) 이라 일흠을 곳치고 디인 손님 젼문으로 영업 졔도 곳쳐 죠션인 변 젼부 이 폐지 얏고 우미관은 황금관과 관계를 코 세계관의 샤진을 공통 야 쓰 이외에 모양좃케 경셩에 죠션인 전문 활동사진관으로 ▲ 독졈 디위 엇엇 원릐 대졍관에서 뎨이대졍관을 일본인 젼문으로 곳치기 황금관의 샤진이 평판이 됴흔 고로 그와 경 기 위 야 진고 셔편의 손님은 셰계관에셔 밧고 동편의 손님은 황금관 가 목쟝이 되 대졍관에셔 밧아 아못조록 손을 만히 고져 이오 우미관은 경셩에 독졈으로 조선인 젼문의 영업을 야 죠션인 손님은 혼 맛흘 마암으로 계약 인 한 달에 샤진셰 오 원이라 은 일본 디에셔 활동샤진 회샤와 샤진관 흥 쥬 간의 달 셰음으로 소위 갑죵 ( 甲種 ) 이라 야 그즁 낫다 지만은 이 젹은 디방 활동샤진관에셔 이러케 회샤와 계약 고 샤진을 갓다가 쓰 것이오 ▲ 경셩 치 큰 도회 에셔 더구나 독졈으로 이십만에 갓가운 죠션인 젼부 손님으로 흥 큰 활동샤진관에셔 치 안이 일이라 륙칠만의 디인을 손님으로 흥 대졍관 , 황금관에셔도 한 달에 샤진셰 수쳔원식 허비 을 보면 우미관에셔 디인 활동샤진관과 입장료를 치 밧 것이 빗 다고 안이 수 업스며 우미관에셔 세계관과 대졍관의 샤진을 갓다가 쓴다 되 일본 람 젼문의 활동샤진관에셔 여러 시간 빗초이고 미잇 일본 연극의 활동샤진을 주장 삼 고로 우미관에셔 그 일본샤진은 죠션인 미에 맛지 못 닛가 이고 남아지 셔양 것만 갓다가 흥 하닛가 우미관에셔 쥬장 삼 샤진이라도 대졍관에셔나 셰계관에셔 주장 샤진이 안인즉 연 샤진이 갑 젹은 것 될 것은 분명 며 갑 젹으면 샤진도 그러케 ▲ 좃타고 슈 업슨적 자연 구경가 사 의 입에셔 여러 가지 비평이 나와 사진이 쟈미 업나니 몃 가지 안되 사진을 가지고 시간을 우노라 길게 느리나니 말마다 젼거로 활동샤진을 몃 차례식 가져오 데 시간이 걸리나니 이젼에 보던 것을 다시 빗초이 것이 잇나니 구경갓던 사 이 리약이가 ᄌᆞᄌᆞᄒᆞᆫ 오락긔관이 업ᄂᆞ 경셩에서 일본말를 모르ᄂᆞᆫ 샤ᄅᆞᆷ이 활동샤진 구경을 랴면 엇지 얏던지 긔밧게 업스닛가 구경을 가기 가겟지만은 경 뎍이 업다고 죠흔 샤진을 구경식이지 안이 진 아모리 독졈이라도 손님의 그림 가 로 령셩 모양이라고 엇던 활동변 말 더라 .
건축 3부작으로 묶이는 < 말하는 건축가 > < 말하는 건축 시티:홀 > < 아파트 생태계 >,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제는 하나의 챕터를 끝내고 새로운 챕터를 시작해야 하는 느낌이다. 아직 새로운 챕터의 주제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작할 때만 해도 다큐멘터리 영화를 이렇게 지속적으로 만들게 될 줄은 몰랐다. 여기까지 지극히 자연스럽게 온 것 같다. 훌륭한 시민들의 개인적인 지원과 공적 기금으로 내 관심사를 조금씩 넓혀 올 수 있었다. 내 관심사가 타인의 관심사이기도 할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과연 그런지 잘 모르겠다. 2009년 겨울, 다큐멘터리 메이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 말하는 건축가 >의 촬영을 시작했다. 정기용 선생과 수차례의 통화를 하고 동선을 확인했다. 극영화를 만들던 연출자 마인드로 촬영현장을 진행했다. 역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인물을 밀접하게 팔로우하는 다큐멘터리를 원했다. 그런데 정기용 선생의 하루는 나의 하루와는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기용 선생을 찾아왔고 하루에도 여러 번 외부에 미팅과 강연을 가셨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지방 출장을 다녀오셨다. 한낱 카메라 한 대로 기록되기에 그의 삶은 방대했다. 나는 한 건축가가 하나의 건축물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건축 작업은 극영화처럼 하나의 프로젝트가 꾸준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카메라를 대체 언제 켜고 언제 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촬영하다가 이제 별게 없겠지 라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끄면 어쩜 그렇게 중요한 일이 생기곤 하는지… 참으로 현실은 미스터리 했다. 시네마베리테 스타일의 완고한 기록 정신으로 촬영을 이어가던 다큐멘터리 영화는 몇 개월이 지나도록 이야기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기용 선생의 삶에 끌려다니며 육 개월 이상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정기용 선생이 진행했던 다양한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돌아보았다.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조예가 없는 내가 보기에도 별로로 보였다. 세련되고 멋진 공간들을 기대했던 나는 실망스러웠다. 물론 무개성의 저렴한 빌딩을 대충 만들어놓고 내부공간도 대충 나누어 쓰는 일반적인 건물과는 달랐다. 뚜렷한 콘셉트가 있어 보였고 스케일도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후져 보인다. 그것은 결국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돈 문제였다. 정기용 선생의 대표적인 공공작업인 무주 프로젝트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가 모두 최소한의 예산, 그리고 작업자들의 헌신으로 때워져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인공을 이해하려는 마음이었다. 한 공간에서 오래 머물며 들여다보니 공간들이 이용하는 이들에게 그 어떤 불편함과 위화감을 주지 않는 것도 느껴졌다. 그 동네 주민들의 편안하고 일상적인 옷차림과 공간이 잘 어울렸고 이상하리만큼 소음은 공간에 스며들었다. 어디든 시끄럽지 않았다는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햇볕이 잘 들었으며 이용하는 주민들은 오후가 될수록 많아졌다. 그렇다고 그 공간들이 딱 마음에 든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좋아한다고 믿었던 공간과 건축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촬영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정기용 선생의 건축사무소 직원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말했다. 정기용 선생님은 누군가 꼭 기록을 해둬야 한다고. 그래서 나에게 늘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가 원하는 기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기록이란 사랑하는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자 홈비디오를 구입하는 젊은 부부의 애틋한 마음 같은 거였다. 그 애틋한 마음에 이끌려 끝을 알 수 없는 기록자의 임무를 나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제작비를 모았고 장기전을 대비하며 일주일에 한두 번씩 촬영을 이어나갔다. 정기용 선생은 자타가 인정하는 기록광이었다. 식당의 냅킨에 남긴 자필 메모마저 스스로 챙기는 분이었다. 어린 시절 쓴 일기마저 버리지 않고 사무실 한켠에 은밀하게 보관하는 사람이었다. 며칠 건너뛰고 촬영을 하러 가면 그는 촬영하지 못한 현실을 아쉬워했다. 그저께 눈이 펑펑 내린 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말로 묘사하면서 그걸 촬영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정기용 선생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버리지 않았고 자신의 일상과 말들이 모두 기록되기를 희망했다. 그것이 정기용 선생의 타고난 천성인지 아니면 죽음을 앞둔 인간의 회한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기용 선생은 삶의 쓸모없는 부스러기조차도 사랑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낭만적인 분이었다. 내가 다큐멘터리로 정기용 선생의 삶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었던 말을 세상에 전하는 메신저로 내가 선택되었을 뿐이었다. 정기용 선생을 존경하던 어떤 교수님은 암 투병 중인 선생을 끌고 다니며 촬영을 진행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선생님의 건강을 악화시켜놓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야윈 모습을 극장에 공개해 돈을 버냐며 나를 비난했다. 영화 < 말하는 건축가 > 안에는 죽음을 향해 가는 정기용 선생의 육체가 고스란히 노출되어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면서 그 행위에 대해 윤리적인 질문을 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말이다. 만약 큰돈을 벌게 된다면 그 윤리적인 질문은 더욱 피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극영화처럼 배우들에게 출연료를 주고 고통을 재현하는 것이 더 윤리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로 돈을 벌기를 원하지 않는다. 몇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유사한 기획의 다큐멘터리가 많아진다. 극영화의 흥행공식이 존재하듯 다큐멘터리 영화의 흥행공식도 존재한다. 타인의 고통을 촬영하는 대가로 나는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를 비난했던 그 교수님이 < 아파트 생태계 >를 보러오셨다. <아파트 생태계>를 보고도 그분은 냉정한 비판을 이어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은 비판이 미안했는지 본인의 수업 중에 < 말하는 건축가 >를 다시 본 이야기를 했다. 개봉 당시에는 나에게 무척 화가 났지만 이번에 다시 보면서 그래도 정기용 을 영화로 남겨둬서 다행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나에게 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속성에 눈뜨게 한다. 당장은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는 그 기록들이 시간이 지나 어떤 변화를 만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하는 건축가>에 담긴 시간의 기록과 영화가 공개된 이후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달라진 기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다큐멘터리스트들은 어쩌면 도저하게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에 맞서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나는 가급적이면 다큐멘터리에서 타인의 고통을 많이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자세하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 영화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뛰어드는 일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점점 넓어져 간다. 그 과정에서 이해하지 못할 말들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애틋한 우정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분노는 에너지가 되고 친절은 위로가 된다. 사람들의 하소연을 듣고 함께 밥도 먹는다. 서로에게 특별한 비용을 제공하거나 향응을 베푸는 일도 없다. 그저 같이 시간을 보낸다. 다큐멘터리가 기록을 통해 완성되는 이야기라고 할 때 나는 비교적 성공적인 선택을 한 셈이었다. 정기용 선생의 주변인들은 그가 기록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꾸준히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정기용 선생은 기록되는 것이 남는 것이고, 그것이 곧 역사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기용 선생은 말했다. 어딘가에 길이 하나 있다. 그리고 새로운 길로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는 길을 찾아 헤맨다. 다른 한 사람도 같은 길을 헤맨다. 그렇게 사람들이 헤맨 길이 다시 새로운 길이 된다고.(끝) #1. 아파트 생태계(Ecology in Concrete) -재개발에서 재건축으로 #2. 말하는 건축 시티:홀(Talking Architect City:Hall) -우리가 공간에 대한 결정에 직면했을 때 #3. 말하는 건축가(Talking Architect)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