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 감독
- 유철용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이병헌, 지성, 송혜교, 박솔미, 이덕화, 선우은숙, 임현식, 조경환, 김태연, 허준호, 최준용, 최정원, 정유석, 진구
올해 초쯤, 계속되는 팬데믹 속에 적응해 나가는 한국영화 제작사들에 대한 취재를 한 적이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기승 덕분에 국내의 한 해 총 관객수가 73.7% 급감했던 터다. 극장 개봉 일정들은 미뤄지거나 아예 취소 되어서 작품들이 OTT 서비스로 직행하는 경우가 속속 나왔다. 그리고 제작사들을 취재하다 보니 원래 극장용 영화로 기획 되던 작품들이 예산을 줄여 작은 화면 OTT용으로 만들 궁리를 하거나 심지어 시리즈물로 변환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계 생존을 위한 현실적이고 당연한 처사였다. 유독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와 통화했을 때, OTT에 열려 있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사람들이 돈 내고 영화관에서 보고 싶게 만들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현실성과 적응력을 보였지만, 외유내강은 거기에 더해 패기를 보였다. <모가디슈>라는 영화가 그런 제작사에서 나온 것이 놀랍지 않다. 뉴욕 아시안 영화제 조직 위원장 사뮤엘 자미에는 ‘카 체이스 씬 하나만 보려고 극장에 가도 될 만 한 영화다’라고 하면서 올해 개막작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부터 유엔 가입을 먼저 하는 것을 목표로, 남한과 북한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고 한다. 1990년 말 소말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숙적이던 두 대사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어떤 때는 실화가 더 거짓말 같을 때가 있다. 관객들이 못 미더워 할 같아 많은 취재와 고안 끝에 카 체이스 씬도 나온 것이라 류승완 감독은 말한다. 아이들까지 해서 네 대의 차량에 나눠 탄 두 대사관 사람들은 구조 비행기를 마련한 이탈리아 대사관을 향해 간다. 류 감독은 실제로도 처음에는 정부군이 반군으로 오인하면서 사격을 가했고, 탈출 하는데 반군이 또 정부군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결국 양쪽의 추격과 사격을 받으면서 이탈리아 대사관 50미터 앞까지 가는데 한 사람만 사망한 실화가 너무 기적 같아서 고민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 영화로 처음 이것을 접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싶어 조사 하다가 당시 AK 소총이 전화번호부 한 권을 뚫지 못했다던가, 명중률 자체가 낮은 데다가 정부군 조차도 훈련이 잘 안되어 있어서 표적을 잘 못 맞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사관에 있는 책과 문짝, 즉석에서 헌 옷으로 만든 모래 주머니를 박스 테이프로 차에 붙여 임시방편으로 나름의 방탄 차량을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와중에 아이들 팔에 매직 마커로 크게 혈액형을 적어주는 모습이 잠깐 나온다. 죽거나 다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직시 하며 현실적으로 대비 하는 모습이 긴장감을 한층 높여 준다. 준비 끝에 서커스단 차량처럼 색색가지 물건으로 뒤덮이고 그 무게에 눌려 기우뚱거리는 외교관 차량 네 대의 행렬은 가관이다. 실제로 촬영 중에 이 80년대 자동차들은 세월과 물건들의 무게를 못 이겨 가다가 서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은 ‘스펙타클 보다 서스펜스’를 목표로 연출했다고 말한다. 총알 세례 추격전 중에 네 대의 차량 내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샷인 듯한 것으로 모든 이의 공포와 서스펜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창문에 매달린 군인과 싸우는 모습까지 가미해 결국 액션, 서스펜스, 스펙타클 두 마리도 아닌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모가디슈> 언론배급시사를 놓치고 광복절 주말 극장에 가서 보고 이틀을 못 참고 다시 보러 간 사람으로서 카 체이스 씬에 더해 하나를 더 꼽는다면, ‘양주 장면’이다. 엄청난 소리와 액션과 위험이 따르는 카 체이스에 반해, 늦은 밤 대사 집무실에서 조용히 벌어지는 장면이지만 서스펜스와 솔솔한 재미가 있는 장면이다. 남한 대사 한신성 역을 맡은 김윤석 배우가 안기부에서 파견된 강대진 참사관 역을 맡은 조인성을 회유하는 장면이다. 양주병을 들고 이야기하면서 술을 따라주려다가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 섭하다 한숨을 내쉬면서 마치 무의식적으로 양주병을 내려 놓는 한 대사, 시선이 은근히 양주병을 따라가다가 자기 차례 대로 회유에 나서는 강 참사,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한국 고유의 풍습 대로 자작은 또 서로 못하게 하는 등 둘의 안무는 큰 화면에서 가히 볼 만 하다. 이런 경우, 연기도 스펙타클이다. 소말리아에서는 계속 되는 내전으로 현지 촬영이 불가능하여 모로코에서 100% 촬영한 영화다. 2019년 11월 11일부터 2020년 2월 18일까지 에사우이라와 케니트라 두 항구 도시에서 찍고, 수개월의 후반작업으로 90년대 초 모가디슈 모습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대대적인 오디션 끝에 한국, 케냐, 그리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배우를 데려와 한국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통역도 여러 명 둔 촬영 현장이었다. 그리고 무술팀이 현지에서 임시 액션 스쿨을 만들어 배우들을 훈련 시켰다고 한다. 이 영화, < 블랙 호크 다운 >이 아니다. 역시 소말리아 내전 배경으로 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1년 영화도 모로코에서 찍은 것이라 비교가 되기도 하는데, 아는 사람이라면 비교가 아니라 대조라 해야 할 것이다. 할리웃 액션영화만큼 잘 만들고 재미있을 지는 몰라도, <모가디슈>에 나타나는 세계관이나 인간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다르다. 아프리카 현지인을 ‘우리 주인공들이 그저 넘어서야 할 장애물’ 또는 악당 역으로만 그리는 일반 할리웃 영화와는 달리, <모가디슈>가 소말리아인들을 그리는 방식은 한국인들을 그리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관객이라면 안다. 사실상 멀지 않은 과거의 한국에서도 소말리아와 마찬가지로 부패한 정권에 대한 저항과 독재 타도를 위한 시위, 폭력진압, 그리고 심지어 학살까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정부 인사가 자녀 학자금 명목으로 뇌물을 요청할 때, 민간인들이 시위를 하고 무참히 밟힐 때, 전쟁통에 시장에서 난리가 날 때, 우리는 한국의 비슷한 상황들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피부색은 달라도 사람들의 행동 모습들이 너무 낯익어 기억 속의 영상들과 중첩 될 때가 있다. 주인공들이 드디어 떠날 때 창 밖을 보며 재난이 닥친 그 나라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가는 모습도 그래서 더 와닿을 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사를 모르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모가디슈>가 무조건 할리웃 영화처럼 현지인들을 치부할 것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런 편견을 깨는 것도 우리 몫일 지 모른다. 그 외에 한국인들에게는 친숙하고 당연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리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먹는 것과 거기에 담긴 의미에 관한 게 있다. 국내에서 많이 회자 된 ‘깻잎 장면’은 남북 대사관 사람들이 서로 긴장된 첫 식사 자리에서 깻잎 반찬이 붙어 북한 사람이 난감해 할 때 남한 사람이 잡아주는 장면이다. 같은 아시아인끼리도 김치나 깻잎 같은 걸 잡아주면 깜짝 놀라서 고마워 하는 경우는 봤지만 이런 행동을 당연 시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아주 쬐그만 행동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에서 같은 동포임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습격을 받고 중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려다가 남한 대사관까지 와서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까지 서로 온갖 방해 공작에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이던 두 대사관 사람들이다. 한 대사가 들여보내주기를 거부하고 허준호 배우가 맡은 북한 림용수 대사에게 계속 핀잔을 준다. 그러다 같이 나온 꼬맹이들에게 눈길이 가면서 ‘아이들 밥은 먹였소?’ 하는 순간, 우리는 게임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명분은 필요 없다. 애들은 굶기는 게 아니다. 보면서 속 시원했던 것이 하나 있다. 모든 한국인들의 정말 한국적인 영어 사용법이었다. 예전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걸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던 게 기억난다. 영어 문장은 세련된 고위 관료의 것인데, 발음은 기가 막히게 아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하고 보면 당연하다. 그 시대, 그 세대 외무고시를 보고 외교관 된 사람들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공부했겠는가? 발음 연습과 교정의 기회가 얼마나 됐겠는가? 지금처럼 편리한 인터넷과 DVD나 방송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안기부 직원이라면 외신 기자에게 담배 한 보루 선물 던져 주면서 “Your favorite cigarette!”을 그냥 (사실 단수가 아닌 복수가 맞는데) 한글로 발음 적어놓은 듯, “유어 패이버릿 시가렛!”을 노래 부르는 어조로 하는 것이 사실상 더 자연스럽다. 대사관에 쳐들어오려는 현지 경찰들을 막으려고 “Listen, you can’t come in here!”라고 해야 되는데 흥분해서 “리슨, 유 캔트 낫 컴 인 히어어”로 (이중 부정의 문장을 만들어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발음으로) 소리치는 서기관의 모습, 그런 모습들이 더 자연스럽고 개연성 있다. 한국 배우가 영화 속 인물에 적절하지도 않은 영어 숙어나 문장 구조와 발음을 구사하면서 연기는 뒷전, 부자연스러운 대사를 얼마나 잘 외웠나, 발음은 얼마나 잘 하나, 무슨 줄타기 곡예 구경하듯 긴장하면서 보는 한국 영화는 이제 많이 없어져서 속 시원하다. 발음이 너무 한국적이어서 해외 배급할 때 자막 깔아야 하면 그냥 깔면 된다. 우리도 북한말 나올 때 한글 자막 까는데 무슨 상관인가? 인물에 맞는 말하기 방식과 발음,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올 때 전달 되는 게 더 많다. <모가디슈>에 대한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이것저것 더 할 수 있겠지만, 일단 ‘2021년 사사로운 영화’의 원고는 여기서 이만 줄인다. 다만 이 작품을 보면서 한국 영화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것, 패기가 넘친다는 것에 기쁨을 표할 뿐이다.
하나, 김정민의 영화를 보았다. < 감자 >(2018)가 2019년에 가장 뜨거웠던 단편영화 중 한 편이라는 거, 나는 몰랐다. 당연히 김정민이란 감독의 이름도 알 리 없었다. 그러다 < 긴 밤 >(2020)이란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2020년에 열린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 은근히 < 기생충 >(2019)에 딴지를 거는 듯한 영화에 매혹당하는 데는 단 몇 분이면 족했다. 너무나 예쁜 컬러 – 근래 김정민이 만드는 영화들의 특징 중 하나다 – 로 포장된 세계는 아마도 반지하나 지하로 보이는 어떤 공간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기괴한 행태, 혹은 사건은 페미니스트들이 기겁하고 입을 막을 그런 류의 것이다. 당연히 영화제마다 받아들이는 형국이 극과 극으로 다를 수밖에 없을 터, 사실 그것은 김정민이란 감독이 그간 만들어온 수십 편의 단편영화가 겪었을 수난의 한 예에 불과하다. 내가 아는 한 제일 먼저 나온 김정민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라는 제목의 2016년 작품이다. ‘홍상수 영화’라니. 홍상수에 관한 영화인가 싶었는데 그야말로 홍상수 영화를 따라가며 흉내 낸 그런 영화다. 극 중 대사를 빌리자면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보다 똑같이 베끼는 게 영화제 취향에 맞을 것 같다’라는 논지다. 영화제 취향을 어설프게 간파한 죄인지,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가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아마도 영화제의 예심을 보는 수많은 사람에게 비웃음을 사며 여기저기 떠돌다 사라진, 그런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김정민이 방향을 튼 거 같지는 않다. 노골적인 베끼기는 아니어도 특정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거나 오마주를 바친 듯한 영화의 리스트는 끝도 없이 전개되었다. 내가 대충 감을 잡은 감독의 이름만 나열하더라도 ‘홍상수, 봉준호, 왕가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장 뤽 고다르, 오즈 야스지로, 기타노 다케시, 스탠리 큐브릭, 폴 토마스 앤더슨, 허준호, 이마무라 쇼헤이, 미카엘 하네케’ 등이다. 하나같이 위대한 거장의 이름이니 창피함을 무릅쓴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 참 겁도 없다 싶다. 그런 경향의 작품 가운데 피식대며 본 작품도 있고, 썩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다. 2018년 작품 <세 아들>은 후자에 해당한다. 4:3 화면비에 흑백으로 찍은 카메라의 눈높이가 정확하게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과 일치하고, 제목(특히 영어 제목 - A Winter Afternoon)이나 음악도 영락없이 오즈의 그것이다. 만약 오즈가 이 영화를 본다면 네 인물이 빚는 관계의 이야기에 슬며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단, 온전히 오즈의 인장만 박힌 것도 아니다. 김정민의 감성과,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21세기 청년의 분위기가 이건 디지털영화라고 말한다. 물론 김정민이 그런 영화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여기저기를 찔러대는 시도가 별로 바뀌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색채를 갖춘 작품도 하나둘씩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감자>가 그런 작품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5년에 걸쳐 어림잡아 스물다섯 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근작인 <감자>와 <긴 밤> 외에 주목을 받은 영화는 드물다. ‘숏컷 시리즈’라 이름 붙인 영화들은 습작처럼 보이고 완결성이 아쉬운 터라 그간 영화제에서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왼다리>(2019)와 <첩첩산중>(2019)처럼 느슨하게 연결된 영화의 경우 나란히 보지 않으면 매력을 놓쳤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유를 따져 보면 너무나 많은 (영화제) 불합격의 사유를 꺼낼 수 있겠으나, 그중 가장 큰 것 하나를 들자면 ‘이단성(異端性)’ 때문이라 하겠다.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앨범 재킷을 먼저 보았으면 한다. 그룹 ‘스틸리 댄’의 명반 시대를 연 1972년 앨범 <Can’t Buy a Thrill>의 재킷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김정민 특유의 색감이 궁금하다면 이 앨범의 재킷을 보면 된다. 노랗고 빨간 색깔에 변형을 가해 어딘지 인공적이고 조잡한 인상을 주는데, 김정민은 여기에 파스텔 톤을 좀 더 강화해 ‘이것이 김정민의 세계다’라고 주장한다. 위 재킷에서 컬러보다 더 신경 써서 보아야 할 건 소재다. ‘거리의 여성, 나체의 남자와 여자, 욕망을 은유하는 싸구려 물품’은 재킷의 컬러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포스트 히피 시대에나 어울릴 것들인 게 사실이다. 스틸리 댄의 앨범 재킷이 종종 육감적인 소재를 다루긴 하지만, 이 앨범의 키치적 취향은 다른 앨범 재킷의 고상한 톤과 거리가 멀다. 21세기에 저런 재킷을 앨범의 커버로 사용하는 팔푼이는 없을 게다. 김정민의 영화가 저런 소재나 주제를 다루지 않지만, 시대와 주변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생산해 내는 그의 영화와, 위의 재킷이 주는 인상이 스무드하게 오버랩된다. 이상한 세계의 앨리스의 눈으로 현실의 세계를 보려는 정신 나간 시도. 심지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살짝 다룰 때에도 현실감보다 생뚱맞은 시선을 들이대곤 한다. 굳이 김정민의 영화를 독립영화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주류 독립영화의 경향과 그의 영화는 어떤 연결점이 없다. ‘똑같은 고민, 지배적인 정서, 하나의 목소리’가 반복되는 독립영화와도 거리가 먼, 김정민의 영화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발견된다. 만듦새에서 부족할지 몰라도 나는 그의 개성을 찬양한다. 게다가 그는 한 해에 최소 다섯 편 정도의 영화를 쏟아낸다. 그건 열정의 다른 얼굴이다. 아무도 안 봐주는데 이렇게 미치도록 영화를 만들어내는 열정, 무기력한 영화들 사이에서 그 에너지가 어찌 각별하지 않겠나. 둘, 김정민의 집을 찾아서. 몇 개월 전, 어찌어찌 <감자>와 <긴 밤>을 본 뒤로 나는 김정민이란 감독에 대해 호기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엔 그가 그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우연히 지인이 그를 한 영화제에 초대했다는 걸 알게 돼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다. 짐작했듯이 영화와 별로 상관없는 학교를 나와 주변 사람들을 모아 영화를 찍는다고 했다. 진짜 발견은 유튜브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그는 ‘정민김’이란 집을 지어 그와 친구들이 찍어온 영화 전부를 공개해 두었다(<감자>와 <긴 밤>은 판권이 팔린 건지 제외됐다). 유튜브의 거대한 세계에서 김정민이란 이름으로 집을 지었다간 검색해도 쉬 찾기 힘들 텐데, 정민김으로 검색하면 그가 세운 영화의 집이 바로 뜬다. 동영상 항목을 누르면 스물다섯 편이 넘는 영화와 영상이 쭉 나열된다. 보통은 영화 속 이미지 하나를 따서 영화를 소개하기 마련인데, 김정민은 영화와 어울릴 만한 이미지를 따로 구해 썸네일을 만들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아주 예쁜 디자인 하우스의 홈페이지 같은 인상을 준다. 듣기로, 심리학을 전공한 서른 청년이라는데, 예쁘게 세워놓은 유튜브의 집과 과감하고 와일드한 영화 중 그의 본디 모습이 어디에 가까울지 마구 궁금해진다.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김정민은 필름과 거리가 먼 세대다. 그가 열 살을 지날 즈음 세상의 영화는 디지털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러니 극장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보는 행위가 그에게 익숙하다면 거짓말이다. 당연히 그즈음 영화 매체는 디지털을 화두로 삼아 영화의 미래를 논의했다. 초기에 디지털로 찍은 초기의 박철수의 영화에 대고 비판했던 글들이 기억난다. 그 영화는 디지털의 자세로 찍지 못했다고 뭇매를 맞았다. 대상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느니, 카메라의 움직임이 필름의 그것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느니, 그 영화는 그런 비판을 들어야 했다. 지금 그 평자들이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들이 짧은 시선으로 예상하고 그렸던 디지털 영화가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영화 산업이 디지털로 재편된 현재, 대다수의 영화는 그들이 말했던 영화와 전혀 딴판이다. 적어도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밋밋하고 시시해졌다. 극장에 걸리는 대중영화 사이에서 독특한 이미지를 발견하는 건 필름 시대와 비교해 더 힘들어졌다. 필름에서 벗어나 뭔가 혁명적인 이미지가 나올 거라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가, 디지털은 그냥 ‘표준화된 컬러와 이미지’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시대로 발전했다. 앞서 말했듯이 김정민은 필름 시대의 영화감독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고전적인 필름 시대의 영화와 뮤직비디오 같은 비디오 시대의 이미지 사이에 위치한다. 필름 영화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만, 동시대의 디지털로 영화를 만드는 데 별로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 같지 않다. 필름의 질감을 흉내 낸 영화도 만들고, 다수의 독립영화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디지털 질감의 영화도 만들면서 그는 어느덧 김정민스러운 디지털 영화를 하나씩 내놓는 중이다. 물론 내가 본 그것들이 최후의 완성된 형태는 아닐 것이다. 김정민스러운 컬러를 보여준다고 해서, 김정민스러운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해서, 김정민스러운 간략한 편집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게 김정민의 디지털 영화다, 라고 말할 생각은 아직 없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고작 4년에서 5년 정도 영화를 만들어온 초보 작가일 따름이다. 무어 그리 대단한 영화를 만들었겠나. 그렇다면 인터넷, 유튜브에 있는 집을 찾아가면서까지 김정민이란 감독의 영화에 왜 호기심을 보이는지 나는 설명해야만 한다. 대답은 그가 영화를 생산하고 관객과 만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포지션을 영화감독이라는 데 두고 있으며, 그 직업에 맞게 꾸준히 영화를 찍는 게 자신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렇게 영화를 찍다 경지에 오르면 다행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영화감독이 영화만 찍다 죽었다고 해서 욕을 들을 일은 없다. 코로나 시대에 영화와 극장의 운명을 두고 여러 예측이 오간다. 흥미로운 말씀도 있고 별것도 아닌 걸 대단한 양 예언한 글도 읽었다. 지금은 습관이 변하는 시간이다. 그게 언제 어떻게 문화를 형성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문화가 형성되리라는 것뿐이다. 관객의 수가 줄어든 것을, 극장이 문을 닫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거꾸로, 우리가 그동안 너무 많은 영화를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마을마다 극장이 들어선 것이, 골목마다 들어선 교회만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의 영화 과소비가 극장을 편의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에도 김정민은 멈추지 않고 영화를 찍는다. 아마 이런 시기를 반영한 영화를 찍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는 <다큐멘터리: 일렉트릭 러브>라는 괴상한 영화를 만들었고, 그걸 유튜브의 자기 집에 선물처럼 올려두었다. 향후 영화와 영화 문화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내겐 김정민 같은 감독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으로 족하다. 평범한 감독이 만든 아무 감흥 없는 영화 열 편보다, 내가 사랑하는 감독의 영화 한 편 한 편이 더 소중하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김정민은 그렇게 만든 영화들로 자기 집을 만든다. 그게 꼭 극장이 아닌들 무슨 상관인가.
탐정으로서의 장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아니, 엄마에 대해 비밀도 오차도 없이 모두 다 알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랑하건 혐오하건 엄마는 엄마다. 그래서 자녀들은 종종 엄마를 철저히 현재형으로 단순화한다. ‘우리 가족’으로 포섭되기 이전의 엄마의 삶이란, 종종 막연한 두려움을 낳는다. 나와 내 아버지만 없었다면 혹시 그녀의 삶이 더 행복하지는 않았을까? 가족의 풍경이 지옥이 될 때, 이 질문은 화살표의 방향을 돌연 바꾸어 놓기도 한다. 부모가 없다면, 가족만 없다면, 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래서 곧 성년을 앞둔 < 결백 >( 박상현 , 2018)의 주인공 정인( 신혜선 )은 그 나이대에 누구나 그러하듯이, 엄마를 탐구하는 대신 자기 삶의 돌파구를 택한다. 야반도주다. 폭력적인 아버지, 자신보다 언제나 먼저인 남동생, 딸의 대학 진학을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너무도 무력한 엄마.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친다. 십여 년 후 그는 서울에서 잘 나가는 대형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로 자리잡는다. 아무도 정인의 과거를 모르고, 알려 들지도 않는데, 그러자 이번엔 고약한 운명이 다시 고개를 든다. “사건 좀 가려 받아요”라고 로펌 대표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 냉철한 변호사로 하여금, 회의 도중 아무렇게나 틀어놓은 뉴스 화면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늙고 병 든 엄마는 여전히 그대로인 그 고향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뤘고, 심지어는 장례식에서 벌어진 농약 막걸리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당했다. 번쩍이는 고급 세단의 문이 열리고 칼주름이 잡힌 바지 정장에 힐을 신은 여자의 발이 내려온다. 낡은 시골집 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은 축축한 진흙 위에 군데군데 돌이 솟아나 있어 혹여 구두굽이 잘못 걸리지는 않을까 위태롭다. 정인의 귀환을 알리는 첫 이미지는 세월이 흘러 그가 얼마나 고향과 이질적인 인물이 되었는지 간명하게 보여준다. 부연하면 정인은 불편한 존재다. 폐쇄적인 시골 마을에서 농약 막걸리 살인 사건은 그 자체로 파열음인데다, 사람들을 탐문하고 다니는 서울 변호사는 성마른 불안과 위협으로 다가온다. 정인의 직업이 변호사라는 사실은 영화 장르를 범죄 스릴러이자 법정 드라마로 이끄는 상업영화의 검증된 장치이기도 하겠으나, 앎의 권력에 관한 젠더 이슈와 연계했을 때 생성되는 의미들과 함께 비로소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10대의 정인에게 알콜 중독으로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가 가장 큰 적대자였다면, 귀환한 변호사 정인에게는 지역의 권력자 추시장( 허준호 )이 나타난다. 그 사이에서 정인의 엄마 화자( 배종옥 )는, 이런 표현을 쓰기 싫지만, 남편과 추시장이 지배하는 세계의 피해자로 붙잡혀 있다가 어느새 미쳐버렸다. 탈출하지 못한 자가 망각(치매)을 택했다는 사실만큼 가슴 아픈 단서가 있을까. <결백>은 정인의 직업과 화자의 병을 장르(스릴러)와 주제(젠더 권력)적 측면에서 모두로 적절히 활용하는 영리함을 보여준다. 엄마의 진술에 의지할 수 없다는 불가항력적 상태가 정인에게 변호사 본연의 책무 이상으로 탐정에 가까운 역할을 요구하고, 정인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간다. 보태자면 용의 선상에 있는 추시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막걸리 농약 사건의 피해 당사자라는 점 또한 정인에게 오히려 더 적극적인 앎의 기회를 준다. 그들 중 일부가 목숨을 잃거나 병원에 입원한 상태이고 추시장 캐릭터 역시 그의 노쇠함이 얼마간 부각된다. 어떤 시대가 끝나려하고 있고, 정인은 그 어둠이 맥없이 덮히기 전에 밝혀내려는 것이다. <결백> 개봉을 앞두고 박상현 감독을 인터뷰 차 만났을 때, 감독은 영화 속에 등장한 소품을 굿즈로 제작해 내게도 선물로 건넸다. 하나는 영화 속에서 범인을 쫓는 중요한 단서로 쓰이는 노래방 라이터이고, 또 하나는 추시장과 그의 패거리들이 젊은 시절 바닷가에서 물놀이 중에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다. 라이터 디자인에서 베어나오는 지독히도 한국적인 무언가가 재밌었고, 영화 속에서 부패의 무리로 그려지는 남자들이 보내는 즐겁고 빛나는 한 때의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이 두 개의 기호만으로도 정인의 세계가, 정인의 고향 마을이 뜻하는 '구시대'가 어떤 것인지 감지되는 듯 했다. 영화가 추시장 무리의 젊은 한 때를 비추는 이 사진은 비출 때,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안으로 그 어떤 추악한 모의를 꾸미더라도 밖으로는 명명백백 해맑은 소년성을 내보일 수 있는 그들의 자신감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폐쇄적인 시골 마을에서 펼쳐지는 <결백>은 그들이 풍미했던 나날을 한마디로 ‘은폐’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농촌개발 정책과 함께 부와 권력의 획득을 꿈꾼 이들은 암암리에 고급 정보를 공유하며 살인 모의도 서슴지 않는다. 화자는 그 과정에서 영문도 모른 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정인에게는 출생의 비밀을 남겼다. 문학평론가 오은교는 남편 가족의 제사 풍경을 서늘하게 써내려간 강화길의 소설 <음복>을 해설하며 “가부장이라는 권력이 절대적인 사회에서 앎은 온전히 젠더화되어 있다”(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여성주의 가족 스릴러', 44p, 문학동네)고 썼다. <음복>에서는 남자가 가족 내부의 첨예한 긴장 관계에 무지할 권리를 갖고, 여성은 모든 것을 너무 많이 알게 되어 괴로운 감정 노동의 부역자로 자리한다. <결백>은 반대로 부와 권력의 관점에서 오로지 남성들 사이에서만 공유되고 은폐되는 정보들과 그로 인한 범죄를 짚는다. 그 과정에서 배제된 여성, 망각과 사적 복수를 택한 여성, 도망쳤다가 힘을 길러 다시 되돌아온 여성이 차례로 등장한다. 배제와 은폐로 집약되는 구시대의 작동 원리를 끊어내려는 정인은 특이하게도, 자기 출생의 비밀 자체에는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정인과 화자의 눈물겨운 접견 장면에서 신파조의 연출이 개입하기는 하지만, 그 절절함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엄마의 삶에 대한 위로와 연민의 감정이지 잃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통한이 아니다. 오히려 정인은 그동안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놓고 향유할 수 없었던 엄마에게 뒤늦게 서사를 쥐어줌으로써 차라리 후련한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연출자의 선택과 집중이라면 그 경제성의 동의하고, 만약 다른 의미가 있다면 정인을 과거의 공동체로부터 분리하려는 의도이길 바란다. 대중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천천히 진화해가고 있다는 증거로서 <결백>은 꽤 흥미로운 지표로 간주될 영화다. 구시대의 쇠사슬을 끊기는 했지만 사법적 정의에 의하면 어느 쪽도 결백한 사람이 없다는 마지막 시퀀스의 서늘함도 유효하다. 정인의 시대 또한 분명히 하나의 과도기일 것이라는 물러서기, 그리고 다음 번에는 더 대담하고 자유로운 K-장녀가 등장할 것이란 기대가 <결백>의 크레딧에 미덥게 따라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