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먼트 헌터
- 제작년도
- 2009
<BECK: Mongolian Chop Squad> 중 (사진: " BECK: MONGOLIAN CHOP SQUAD ", MUBI)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H2』, 『러프』 등을 그린 청춘 스포츠 만화의 거장, 아다치 미츠루의 『미유키』엔 위와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한 소녀에 대한 소년의 애정을 편집자적 논평으로 일체화해 드러낸 귀여운 사례다. 이 발화는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미학적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다치 미츠루가 소녀를 그린 만화의 컷은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정말 커다랗다. 다만, 이 진담 섞인 농담처럼 만화의 컷은 진정 마음의 크기로 고스란히 치환될 수 있을까. 만화는 지면의 물리적인 크기 조정을 통해 독자적 의미 작용을 생성하는 매체일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만화(일본식 만화인 ‘漫画’에 한정)의 컷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원리를 따르는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만화와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란 매체 사이의 차이, 그리고 ‘실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감각이 무엇을 낳았고 낳을 수 없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장난스러운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치자면 우선 말의 역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화 속 감정의 크기가 컷의 크기에 따라서만 조율되진 않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 숏을 떠올리게 하는 아다치 미츠루의 공백 컷이 대표적인 만화적 감정의 형성 방식이다. 서사의 고조가 일어나야 할 플롯의 이음매에 잠자리나 하늘, 물과 같은 자연물을 집어넣어 감정과 정취 사이의 낙차를 일으키는 그것. 투수가 던진 야구공이 포수의 글러브 혹은 타자의 배트에 닿기 전, 그 찰나의 순간을 유예하려 들어선 무관한 이미지의 연속과 충돌들. 이처럼 아다치 미츠루는 칸의 크기뿐 아니라 청춘 스포츠 만화의 장르적 내러티브에서 탈락한 오브제의 개입과 몽타주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작가다. 아다치의 몽타주는 곧바로 영화의 용어로도 (거슬러 올라가) 통역된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에 따라 모더니즘 시대의 일본 만화가들은 에이젠슈타인과 쿨레쇼프의 몽타주 등 소련 아방가르드 영화 이론과 렌즈 기반의 카메라 문법을 흡수하여 만화의 컷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컷과 구분하기 위해 만화의 컷을 ‘칸’이라 씀) 망가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는 이로부터 영화 기호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더불어 말년의 데즈카 오사무 등은 ‘필름 만화’를 통해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더 긴밀하게 고찰했다. 필름 만화란 필름의 한 프레임에 담긴 움직임 하나하나를 만화의 칸 하나하나에 그대로 대입하여 그린 방식이다. 영화의 1초 24프레임 상영 이전 단계에서부터 컷과 칸의 의미를 사유하고, 이로써 필름 운동의 근원적 사진 이미지를 고찰하며,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연결한다. 근래의 만화가들도 이 유산을 지키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체인소 맨』의 후지모토 타츠키는 인물의 움직임을 앵글이나 칸 사이즈의 변화 없이 다수의 컷으로 나누어 그리는 필름 만화의 작법을 즐겨 쓰는 이다. 그러니 칸의 연속과 충돌이든, 몽타주이든, 기호적 이미지의 작용이든 만화와 영화의 칸-컷은 대개 분리 불가한 의미론 속에서 순환하는 편이다. 만화와 영화의 경계는 이래저래 더욱 희박해진다. 『H2』 중 (사진: “ Mitsuru Adachi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Original artist Mitsuru Adachi ‘천상의 목소리’란 <BECK>의 제약 만화와 영화의 친족관계를 하나씩 밝히다 보니 만화가 영화처럼 보이고, 영화가 만화처럼 읽힐 지경이라 어지럽다. 그럼에도 두 매체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는 명확하고, 이 차이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선 또 다른 만화가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겠다. 재즈 만화 『블루 자이언트』의 작가 이시즈카 신이치가 처음 편집자에게 『블루 자이언트』의 기획을 전했을 때다. 편집자는 “자네, 종이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단 거 알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이에 작가는 “그렇긴 하죠. 그래도 뭐 책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기도 하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답한다. 요컨대 만화와 영화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역시 소리이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사운드가 기재될 수 없는 만화, 그 대척에 있는 영상 매체의 틈이 사운드의 유무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발상이겠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서 소거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속성이 있다면 그것 역시 투수의 150km/h 짜리 직구가 날아가는 소리, 필로 숏 속 잠자리의 울음소리에 있을 것이란 뜻이다. 만화 『BECK』 시리즈(한국어판) 표지 (사진: “ BECK 10 ”, “ BECK 30 ”, 교보문고) 이러한 논지에서 만화와 영화의 관계 일변을 가장 적절히 포착할 수 있는 예시는 해롤드 사쿠이시 작가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연재한 소년 밴드 만화 『BECK』이다. 『BECK』이 걸작의 자리에 오른 큰 이유는 만화가 밴드 공연을 그린다는 본원적 모순에서부터 나온다. 밴드의 라이브 무대를 라이브의 순간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는 만화 매체의 커다란 제약이 있는 것이다. 이 한계에서 『BECK』이 택한 전략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주인공이자 밴드 BECK의 멤버인 유키오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상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이다. 기타를 잡은 지 2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유키오가 단숨에 밴드 신의 스타가 되는 근거로 (아마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를 모티프로 한) 그의 목소리가 제시된다. 즉 만화 『BECK』은 음악 없는 음악 만화라는 제약에 ‘목소리 없는 천상의 목소리’라는 이중의 제약을 가한다. 마치 『헌터x헌터』에 등장하는 제약과 서약의 원리(무언가를 제한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얻는단 설정)와도 같다. 유키오의 목소리를 만화로 그리지 못할 바엔 그것을 더욱 추상적인 경지로 이끌어, 독자에게 최대한 커다란 상상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BECK』에겐 커다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바로 인기 만화의 상업적 운명으로 인해 작품의 영화화가 이뤄진 것이다. 보통이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실사화할지란 큰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영화 < BECK >(츠츠미 유키히코, 2010)은 아주 파격적인 작법을 택한다.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실사화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아예 유키오가 노래하는 목소리를 작중에서 소거해 버린 것이다. 유키오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순간마다 영화는 보컬의 마이크를 끈 듯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처리한다. 2010년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관객과 평자들은 이 선택을 비난했다. 음악 없는 음악 만화야 매체의 본질적 제약이라 친다 해도, 음악 있는 음악 영화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렇다면 영화 <BECK>은 영화적이지 않은 것일까. 라이브 무대에 실사의 ‘소리’를 덧대지 않았기 때문에? 글쎄, 외려 영화 <BECK>이 택한 소리의 공백은 원작 만화의 설정을 이어가며, 소리의 효과를 이미지의 기호로 펼치는 영화적 역량을 보여준 사례다. 영화 <BECK>의 방식은 근원적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영화 기호론과 같은 일본 만화 고유의 작법을 세심히 이식한 쪽에 가깝다. 영화에서 유키오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화면은 일련의 몽타주를 늘어놓는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슬로 모션으로 만화적 놀람의 표정을 기호로 발산하는 관객의 표정 등이 교차한다. ‘천상의 목소리에 놀란다’라는 사실을 가시적 문법이 아닌 기호의 원리에 빌려 구현하고, 소리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가 강속구의 시간을 잠자리 등의 자연물과 인물들의 표정에 가뒀다면,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구름 등의 자연물과 청중들의 표정에 구속했다. 시간의 리듬을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만화의 영화적 작법이 한 바퀴 돌아 영화에 쓰인 것과도 같다. 돌고 돌아 만화와 영화는 또 비슷해지는 것일까. <BECK> 중 여기-있을 것의 애니메이션 여기에서 홀로 다른 선택을 하여 사고를 확장한 『BECK』의 산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코바야시 오사무 감독이 2004년에 만든 『BECK』의 애니메이션 <BECK: Mongolian Chop Squad>다. <BECK: Mongolian Chop Squad>는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란 문제를 정공법으로 받아 쳤다. “HUSKING BEE”라는 실존 밴드의 보컬리스트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를 유키오의 가창 성우로 기용한 것이다. 유키오의 보컬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진 TVA 12화의 <Moon on the water> 라이브부터 BECK이 일본 최고의 화제 밴드로 일약 올라서는 그레이트풀 사운드 페스티벌 무대에서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아닌 실제의 소리(가창)로 드러낸다.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가 ‘정말 천상의 목소리냐?’를 따지는 일은 무용하다. 여기서 재론하려는 바는 결국 매체 간의 차이다. 만화와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소거하고도 작동할 수 있었지만, 왜 애니메이션은 실사의 목소리를 택해야 했던 것일까. 단서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영상’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두지 않는 일에서부터 발견될 것이다. 앞서 반복했듯이 만화와 영화의 유사성을 짚고, 그 바깥에서 애니메이션만이 독자적으로 지니는 돌출성을 찾음이 마땅하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의 허구성을 ‘여기-있음’으로, 사진 매체의 경험을 ‘여기-있었음’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든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는 공백의 범주에 있고, 사진은 놀라울 만큼 이전의 시간을 비논리적이고 마술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다. 영화와 만화 <BECK>이 유키오의 목소리를 현실화하지 않고 소리의 불능이란 제약에 묶어뒀던 것을 이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처럼 만화의 원류가 영화적 뿌리에 깃들어 있다면 만화는 시간의 일상적 흐름을 거부하는 사진의 역량, 이와 동시에 칸과 컷의 공백(혹은 몽타주)을 활용해 감정의 찰나를 유예하는 영화의 힘을 함께 작동시킨다. 영화 <BECK>은 그러한 만화의 메커니즘을 영화에 거꾸로 옮겨와 실현한 경우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어떠한 지대에 존재하는 매체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1995)과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츠루마키 카즈야, 1997)의 현대성에 대한 글에서 애니메이션을 ‘여기-있을 것’을 바라는 매체라고 설명한 적 있다. [1] 영화적 이미지는 현실-스크린-관객 사이에서 도래하는 결과물이고, 만화는 그러한 영화적 망상에서 기반한 칸의 펼침이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의 망상은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도’의 집합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없는 시공간을 인공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곤 사토시의 말처럼 애니메이션의 “모든 장면엔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연은 없다.” 애니메이션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창작자(들)의 순수한 망상이다. 현실에 ‘없던 것’이자 ‘없는 것’의 표현이다. 말하자면 유키오의 ‘천상의 목소리’란 현실에 기반한 영화와 만화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이데아적 사건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이 무한의 상상을 ‘의도적으로’ 실현해야만 자신의 미학을 지킬 수 있는 매체다. 요컨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로 분화한 <BECK>의 선택, 구체적으로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표현한 방식들은 각각의 매체성을 즐거이 논할 수 있는 사례다. 밴드물의 정전이라 불리는 세간의 평가에 합일될 정도로 각 매체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문제작이자 걸작이다. 아, 그러면 이쯤에서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라는 아다치 미츠루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되새길 수 있겠다. 아마 의도의 측면에선 참이나 결과적으론 거짓일 듯하다. 영화적 논리에 기댄 칸의 크기는 결국 이미지와 시간의 공백으로서 독자(관객)의 능동성에 복무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의 만화는 결국 태초의 영화적 속성과 떼놓을 수 없이 다수의 실사 영화적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니메이션만의 ‘의도적 세계’는 만화-영화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이란 추상을 자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그리하여 <BECK: Mongolian Chop Squad> 유키오의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고, 이 속의 유키오는 <Moon on the water>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 <BECK> (사진: “ BECK 22 ”, 교보문고 / “ Beck: Mongolian Chop Squad ”, IMDb) *** [1] “ [기획] 안녕? 에반게리온, 21세기 오타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탐하다 ”, 《씨네21》 1440호, 2024. 1. 18. 이우빈(영화기자) l 《 씨네21 》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나 보러 다니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본 1997년생.
요즘은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예전 영화를 많이 재개봉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 회로 >를 다시 봤고, 스탠리 큐브릭의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을 4K로 봤다. 미이케 다카시의 < 오디션 >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봉했다. 비디오나 DVD가 나온 적이 없었고, 영화제에서만 상영했다. 해외에서 꽤 화제를 모았던 영화이고, 한국에도 마니아들이 있었지만, 그동안 정식으로 선보이지 못했다. 마니아들은 해외 DVD를 사고, 그것을 복사하거나 파일로 변환해서 돌려봤다. 과거에 봤던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면, 새로운 감흥이 일거나 기억과는 다른 장면과 대사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오디션>은 3, 4번 봤었는데,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한 10여 년 만에 다시 보니 느낌이 약간 바뀌었다. 그 남자는 자연재해처럼 난데없는 불행에 휩싸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의 마음은 모두 진심이었다. 애타게 전화를 기다린 것도, 완벽한 사랑을 갈구한 것도. 물론 다리를 자른 것도. 미이케 다카시는 V시네마의 걸작들을 다수 연출하며 유명해진 감독이다. 1989년,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 도에이의 산하에 있는 도에이 비디오는 ‘V 시네마’라는 레벨명으로 <크라임 헌터>를 출시한다. 20, 30대 남성을 타겟으로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바로 비디오로 출시되는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극장용 영화보다 제작비는 적지만, 일반적인 인디 영화보다는 훨씬 스케일이 크고 상업적인 장르 영화를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도에이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고, 다른 제작사들도 V시네마에 뛰어들었다. 미이케 다카시는 1991년부터 <돌풍! 미니파트대> 등으로 감독 데뷔를 하며, 일년에 서너 편의 영화를 만드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1995년부터 만든 ‘흑사회 3부작’-<신주쿠 흑사회>, <극도흑사회>, <일본흑사회>는 극장 개봉도 했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이케 다카시는 V시네마를 대표하는 감독이면서 종종 극장 개봉작과 해외영화제 수상작을 연출했고, 2000년대 중반 순조롭게 메이저로 진출했다. 1999년에 연출한 <오디션>은 2000년 로테르담영화제에 출품되어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영화를 본 한 관객은 미이케 다카시를 보고 ‘악마’라며 욕을 했고, 보다가 나가버린 관객들도 아주 많았다. 이후 해외에서 개봉을 했을 때, 충격을 받아 병원에 실려 간 관객이 나오기도 했다. 주간지 <타임>이 2007년 발표한 ‘공포영화 톱 25’에 선정되었고, 영국의 영화지 <토탈 필름>의 ‘공포영화 역대 베스트 50’의 29위에도 올랐다. 메이저에 간 후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다소 느슨해졌고, 평범해지기도 했지만 2천년대 초반까지 미이케 다카시는 가장 기발하고, 독특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 이치 더 킬러 >, < 극도 공포대극장 우두 >, < 비지터 큐 >, <중국의 조인> 등을 만들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원작인 <오디션>은 중반이 넘어가기까지 큰 사건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호러영화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모호함이 맴돌 뿐이다. 아오야마는 아내가 죽은 후 7년 동안 아들 시게히코와 함께 살아왔다. 시게히코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오야마의 사업도 안정됐다. 하지만 일본은, 그들의 세계는 불안정하다. 당시 일본은 장기 불황의 한복판이었다. 아오야마는 재혼을 하기 위해 오디션을 만든다. 명분은 영화의 주인공을 찾는다는 것. 지원서를 뒤지던 아오야마는 한 여인에게 꽂힌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지만 부상으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던 아사미. 아사미에게 끌린 아오야마는 오디션이 끝난 후 연락하고 만나기 시작한다. 아오야마의 친구는 뭔가 의심스럽다며 신중하라 하지만, 푹 빠진 아오야마는 무시한다. 아사미도 아오야마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닷가의 호텔로 여행을 간다. 아사미는 어린 시절 학대받은 과거를 고백한다. 아오야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첫 섹스를 한다. 아마도.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섬뜩한 장면이 가끔 등장하지만 아오야마와 아사미의 연애가 진행되는 중반까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한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아오야마는 호텔 방에서 아사미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아무 연락이 없고, 수소문해도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아사미의 흔적을 찾아가는 곳에서 두 발이 잘린 남자를 만나고, 여자가 토막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파고들면 들수록 아사미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집에 있던 아오야마는 아사미의 습격을 받는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커다란 바늘이 몸에 꽂히고, 발이 잘려나간다. 도대체 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무라카미 류의 소설 <오디션>은 1997년 <펜트하우스 재팬>에 연재되었다. 오로지 환락과 희망, 밝은 미래만이 충만했던 버블경제가 끝난 1990년대의 일본은 혼돈이었다. 1995년에는 한신 대지진과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사건이 있었다. 범죄의 잔혹성과 대담성, 14세의 범인이라는 사실에 모두 당혹스러워했던 고베아동연속살인사건은 1997년이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무차별 살인과 범죄도 증가했다. 버블 붕괴 후의 일본은 모든 것이 닫힌 회색의 시공간이었다. 모두가 외롭고, 모두가 누군가를 혹은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영화 <오디션>에서는, 공룡에 심취한 아오야마의 아들 시게히코가 가장 현명해보인다. 호사로운 향락에 빠지지도 않고, 불투명한 미래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중년의 아버지에게 재혼을 권하고, 자신의 미래를 담담하게 준비해간다. 아오야마도, 아사미도 누군가를 만나 완전한 소통을 바라는 기성세대다. 타인과의 완전한 사랑을 통해 자신이 완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다. 친척의 학대, 어머니의 남자가 가한 폭행은 아사미를 고립되게 만들었다. 아사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해 줄 남자를 갈구한다. 하지만 둘만의 완벽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한 그녀는 남자가 도망갈 수 없도록 발목을 잘라버린다. 아사미는 아오야마를 고문하며 말한다. “말은 거짓이어도 아픔만은 믿을 수 있죠,....아프니까 잘 알겠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깨달을 수 있을 때는 괴로울 때나 힘들 때죠. 정말 괴로울 때만 자신의 마음이 보여요.” 아사미는 아오야마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하기 위해 아오야마를 들여다봤다. 나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아오야마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아오야마는 세속적인 인간이다. 크게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욕망에 충실하고, 자신의 이익이 제일 중요하다. 아마도 아오야마의 부하 여직원은, 그에게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발목을 잘라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사미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강렬하게 타인을, 타인의 사랑을 원하고 있다. 자신의 순수한 사랑이 좌절되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그들은 폭력적으로 변한다. <오디션>의 세계는 세기말의 일본만이 아니라 지금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원작에서는 아오야마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안 아사미가 충격을 받은 것으로 설명된다. 나만을 사랑하겠다는 아오야마의 말이 거짓이었으니까. 영화 <오디션>에서는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랑의 과정으로 보였지만, 갑자기 아사미가 사라져버렸다. 미이케 다카시는 인터뷰에서 ‘이유 없는 재난’이라고 말했다. 길을 가다가 건물 공사장 위에서 떨어진 벽돌에 머리를 맞는 사고 같은 것. 이유가 없고, 예측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사고. 하지만 미이케 다카시는 영화의 꿈 장면에 많은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아오야마는 아사미의 고문을 당할만한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 너무 가혹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잘못은 있다. 아오야마만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럴만한 이유와 공동 책임이 있다. 미이케 다카시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그대로 각색하면서도, 자신만의 시선을 분명하게 투사한다. 아오야마는 좋은 남자이지만, 중년의 회사 사장이라는 위치에 걸맞는 비열함을 또한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자루 속의 남자와 아오야마의 고문, 계속 머릿속에서 들리는 ‘끼릭끼릭’ 소리 등 <오디션>을 보고 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은 그 시절의 미이케 다카시만이 연출할 수 있는 기괴한 풍경이다. 지금 봐도 너무나 선명하고 강렬하다. 아마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넷플릭스’하면 떠오르는 작품을 뽑으라면, 딱 하나만 말하기가 내심 아쉽다. 오락으로 치면 조폐국을 터는 <종이의 집>이 재밌고, 긴장감으로 따지면 <마인드 헌터>를 따라갈 작품이 많지 않으며, 역사와 인간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놓고선 <로마>를 빼놓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여 이렇게 질문을 바꿔보는 건 어떨까? 넷플릭스가 2016년 1월 7일 한국에 진출한 그 시점으로부터 여러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머리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장면을 뽑으라면 그게 무엇이냐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 답은 딱 하나다. ‘담담한 표정으로 자살하는 한 여성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The OA>라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The OA>는 휴대폰으로 찍힌 영상으로 시작한다. 가로 화면 중앙에, 휴대폰으로 찍힌 세로 영상이 틀어진다. 한 여성이 자동차 틈 사이를 헤집고 막다른 난간에 선다. 세로 화면이라 그 옆에 뭐가 있는지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떨어지면 죽는다. 휴대폰 주인인 아이는 소리친다. “엄마, 난간을 넘었어요!” 차를 급히 멈춘 엄마는 여성과 눈이 마주친다. 이상하게도 여성의 표정은 두려움보단 단호해 보인다. “안 돼!” 엄마는 급히 말리지만 여성은 망설이지 않는다. 곧이어 아이가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뛰어내렸어요” 작품이 시작한 지 30초 만에 일어난 일. 엄마와 아이 그리고 우리는, 차 안에서 한 여성이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해 버린다.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 하나. ‘여성은 왜 자살하려고 한 것일까?’ 이 질문은 기나긴 이야기의 끝에서 이렇게 바뀐다. ’여성은 단지 자신이 가야 할 세계로 이동하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지금은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휴대폰 세로 화면 촬영으로 잘린 여성의 우측엔 강이 아니라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부모를 통해 동화책을 보게 된다. 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잠이 들기 전 듣고, 가끔 꿈에서 그 세상을 탐험하곤 했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걸 진실이라 믿었던 때도 있었다. 나이가 한 살 두 살 먹어 오즈 야스지로 영화가 사실은 꽤 재밌는 스릴러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엔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아침이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셰이브 오브 워터>나 <옥자>를 봐도 영화의 고리타분한 철학만 끄집어낼 뿐, 꿈같은 거짓말을 더는 믿지 않게 됐을 지도 모른다. 이게 어른이 되는 거라면, 참 슬픈 일이다. 그 순간 생각나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믿음. 모든 예술은 진실과 거짓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며 우리의 동심(?)을 끄집어내는 기술이라고. 그 대단한 피카소 역시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를 다시 어린아이로 만들 거짓말 같은 작품이 필요했다. 난간에서 뛰어내린 후 지금 막 눈을 뜬 여성의 이름은 ‘프레이리’. 7년 동안 실종된 딸을 만나게 된 노부부는 당황하는데, 실은 프레이리가 맹인이었기 때문이다. 7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프레이리는 앞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며, 자살은 또 왜 하려고 한 것일까? 나처럼 그녀의 부모도 그게 너무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다. 집에 돌아온 프레이리는 안정을 취하기도 전에 이상한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마을 주변을 맴돌며 학교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소외된 5명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늦은 밤, 프레이리 말에 따라 자신의 집 문을 열어둔 친구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에 모인다. 곧이어 친구들 눈을 감긴 프레이리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부모처럼, 자신이 7년 동안 겪은 무섭지만 신비로운 이야기를 한 페이지씩 넘기듯 들려준다. 이때부터 <The OA>는 프레이리의 입을 통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러시아 부호의 딸로 태어나 죽음을 경험한 이야기를 거쳐 사후세계를 연구하는 박사에게 납치된 이야기까지. 온통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그녀의 존재다. 프레이리는 자신의 진짜 이름은 ‘오에이’이며 정체는 ‘천사’라고 말한다. 천사라고? 듣고도 믿기 힘든 존재가 아닌가. 자, 이쯤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왜 휴대폰으로 찍은 ‘오에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일까. 혹시, 이 30초짜리 영상 안에 아직 숨겨진 진실이 더 있다고 믿는 것일까? 요즘 들어,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는 일이 빈번해졌다고 한다. 휴대폰이 이미 존재하는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휴대폰을 가로로 돌리지 않고 ‘세로’로 영상을 찍고 휴대폰 앱으로 편집해서 유튜브에 올리거나 친구들끼리 돌려본다고. 어른들은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영상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그들을 더 끈끈하게 묶어준다. 거기엔 우리가 믿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어른들이 돈이 될 것 같은 ‘메타버스’란 단어에 매몰됐을 때, 아이들은 이미 그들 만이 머무는 세상을 따로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The OA>는 바로 어른들에게 소외되고, 버려진 아이들 세상에 들어가는 ‘문’같은 작품이다. 그리고 그 문은 작품의 첫 장면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단지 우리가 그 문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 다시 30초. 이 영상은 캠코더나 DSLR이 아닌 휴대폰으로, 아이에 의해 찍힌다. 그러니까 그 바쁜 도로 위에서 정처 없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오에이’를 발견한 건, 어른이 아니라 아이다. 더 정확하게는 세로로 찍힌 영상을 통해서, 지금 우리는 아이의 눈으로 드러난 세상을 잠깐이라도 체험해보는 거다. 그래서 촬영도 이전 시대가 고수한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찍힌다. 영상 속에서 어른은 자신의 아이에게 잔소리하듯 ‘안 돼!’라고 가르치지만 화면 속 아이(오에이는 몸이 컸을 뿐이다)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군요’라는 표정으로 뛰어내린다. 유튜브에서 이 영상을 보고 7년 만에 딸을 발견한 노부부의 모습도 절대 우연이 아니다. 노부부는 병원에서 딸을 먼저 본 게 아니라 영상으로 먼저 만났다. 단지 이해하지 못했을 뿐. 오에이는 다시 한번 어른들에게 손짓하는 것이다. 세로로 열린 이 문으로 들어오세요. 프레이리를 이해하고 싶었으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딸을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문을 열었다면, ‘여성은 왜 자살하려고 한 것일까’라는 질문은 끝에서 이렇게 바뀔 것이다. 오에이가 건너간 세상엔 무엇이 존재할까. 노부부는, 나는, 어른들은, 그 세로로 된 문을 열수 있을까?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이 기막힌 동화책을 본 우린,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린다. 휴대폰에 찍혀 거짓말처럼 돌아온 프레이리처럼, 오에이가 된 프레이리의 동화는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게다가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와 유사한 내용이 담긴 소설책들이 발견되자 우리의 믿음은 급격히 흔들린다. 역시, 그럼 그렇지 애들이 뭘 알아. 현실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딨어. 천사는 존재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읽는 이야기는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잊고 지낸 아이들의 세상으로 가기 위해선 오에이가 다섯 아이들에게 알려준 것처럼 문을 열고 늦은 밤, ‘오에이’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혹시, 문을 열었다면? 어디에 있든, 지금 <The OA>를 틀면 된다. 그때! 오에이는 당신에게 속삭일 것이다. “내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