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 메탈
- 감독
- 제럴드 포터턴
- 제작년도
- 1981
- 출연
- 돈 프랭크스, 리차드 로마너스, 수잔 로만, 알 왁스맨, 하비 아킨, 존 캔디, 마릴린 라잇스톤, 재키 버로우즈, 오거스트 쉘렌버그
앞서 소개한 <THE OA> <키딩>이 집에서 보기 좋은 작품이었다면 이번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극장에서 꼭 보고 싶어서 준비한 영화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볼 수 있는 <사운드 오브 메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극장에서 즐기고픈 욕망에 흽싸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듣고 싶은’ 본능을 채우고 싶어진다. <사운드 오브 메탈>을 보고 나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시작과 끝에서 나는 소리다. 고막까지 울리는 쇳소리와 정적. 먼저 우리의 주인공 루벤을 만나보자. 헤비메탈 그룹 블랙하몬의 드러머 루벤은 자신의 연인이자 보컬 루이즈와 공연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예전엔 약물 중독자였지만 지금은 약을 끊었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이제 그에겐 열정을 쏟아낼 드럼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해피엔딩에서 시작한다. 음악으로 약물 중독을 이겨낸 주인공의 화끈한 공연.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데 행복한 주인공 루벤은 갑자기,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된다. 정말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청력을 상실한다. 간혹 영화는 ‘개연성’이란 항목으로 그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사고는 대부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발생한다. 청력을 잃은 루벤은 자신이 듣지도 못하는 드럼을 쳐보지만 무의미하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더는 드럼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루 아침에 청력을 상실한 루벤에게 의사는 말한다. “잃은 청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여기까지가 영화 시작 후, 18분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로 150분 동안, 소리를 되찾기 위한 루벤의 사투가 이어진다. 현재, 이 영화는 아마존 프라임, 구글 무비, 네이버 시리즈온 등에서 지금 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이 글을 통해, 극장 상영 추진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딱 하나다. 소리가 듣고 싶어서. 미치도록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의 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루벤이 청력을 잃은 이유로 영화 대부분이 조용하게 유지되는 이 영화를 굳이 듣기 위해서 극장 상영을 원한다고? 초반에 쨍하게 울리는 드럼 소리가 전부인데? 이해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거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영화로 쌓아올린 영화사를 들여다봐야할 것 같다. 알다시피 1927년 10월, 소리가 들리는 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가 개봉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자막으로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던 영화가 이젠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이 내는 소리를 담게 됐다. 그때만 해도 일부 영화인들은 소리(Sound)가 생긴 영화가, 결국엔 영화를 망치게 될 것이라 말했지만 현대 영화에서 소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가끔 이미지보다 소리로 그 영화를 기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 샤이닝 > 메인 타이틀곡을 들으면 구불진 길을 따라 오버룩 호텔로 향하는 한 가족이 떠오르고 < E.T .> Flying 테마곡을 들으면 자전거에 외계인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꼬마가 생각난다. 더 강조하지 않아도 소리는 영화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데, 어떤 영화들은 일부러 소리를 줄인다. 그것을 우린 무음 또는 정적이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또 어떤 영화들은 귀에 들리지 않지만 머리에는 ‘들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영화가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그걸 영화에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운드 오브 메탈>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강렬하게 퍼지는 드럼의 쇳소리로 시작한 영화가, 10분 즈음 고장 난 헤드폰을 낀 것처럼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루벤은 귀를 두드려보지만 들리는 건 삐--- 소리뿐이다. 나 역시 이어폰이 고장 났는지 확인해 보기도 하고, 귀를 손바닥으로 때려보기도 했는데, 실은 영화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느껴지는 싸늘함. 그 고요함이 만드는 공포. 루벤은 정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됐다. 이제 영화를 보는 우리도 이 들리지 않는 소리에 적응해야만 한다. 근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이 소리에 적응하지 못한 루벤은 아는 사람 소개로 ‘청각 장애 공동체’가 사는 마을로 향한다. 루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수화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웃고 떠드는 곳. 루벤은 연인 루이즈와 다시 만난 날을 기약하며 머물게 됐지만,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걸 알게 하는 건 루벤의 표정과 행동에 더해지는, ’정적’이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정적’은 두 종류다. 하나는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들리는 일상의 소리. 다른 하나는 루벤을 제외한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한마디로, 첫 번째 정적은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두 번째 정적’을 어떻게라도 들으려고 하는 루벤의 사투가 만들어낸 정적이다. 그래서일까? 루벤이 청각 장애 공동체에 적응할수록 영화는 첫 번째 정적이 아닌 두 번째 정적을 들려준다. 하지만, 두 번째 정적은 다르게 말해서 루벤이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루벤은 들리지도 않는 드럼을 치기 시작하고, 영화에선 다시 첫 번째 정적이 들려온다. 그 말은 루벤이 그곳을 떠난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모두가 알아챈다. 영화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소리(Sound)는 루벤 그 자체라고. 자연스럽게 영화명이 ‘사운드 오브 메탈’인 비밀도 풀리게 된다. 메탈 음악처럼 단단한 루벤이 여러 일을 겪게 되면서 나는 내면의 울림을 소리를 담았기 때문. 그렇게 생각하고 직역하면 영화명은 ‘루벤의 소리’가 된다. 하지만, 아직 소개하지 않은 루벤의 진짜 소리가 남았다. 내가 극장에서 듣고 싶은 소리. 공동체에서 나온 뒤, 영화는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메탈 음악처럼 질주한다. 로벤은 소리를 듣게 해준다는 임플란트를 심고, 연인 루이즈를 찾아간다. 약 끊고 해피엔딩을 맞이했듯, 소리를 되찾으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소리마저도 불완전하다. 의사 말에 따르면, 그건 진짜 듣는 게 아니라 기계를 통해 뇌가 듣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루벤, 그에게 남은 건 뒤통수와 귀에 어설프게 걸쳐진 기계뿐이다. 이제 루벤은 어떤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걸까? 루벤은 어느 ‘정적’도 선택하지 못한다. 두 번째 정적인 일상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임플란트를 심어 기계음까지 섞인 첫 번째 정적도 듣고 싶지 않다. 루벤은 짜증 섞인 감정을 담아 귀에서 기계를 뽑아 버린다. 갑자기 이어지는 무음에 가까운 정적. 그런데? 앞서 경험한 공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귀로 들리진 않지만, 느껴지는 무언가. 그때부터 영화가 들려준 것은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매우 특별한 소리다. 들을 수 없는데 더 잘 들리는 소리. 이게 착각이라도 좋다. 분명 루벤과 우린 뭔가를 듣고 있다. 이 부분을 다시 듣고 싶다. 실망한 루벤은 공원에 위치한 의자에 힘없이 앉아있다. 그의 눈앞엔 스케이트보드를 가지고 노는 두 명의 아이가 보인다. 그가 듣는 정적은 기계음으로 표현되는 괴이한 소리다. 사실상 소음에 가까운 정적. 그때! 기계를 벗자 사실상 무음 상태가 된다. 완전한 정적. 그 공허함 속에서 루벤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본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들었다. 한 아이가 보드 위에 올라가자 다른 아이가 치는 박수소리를, 하늘에 뜬 해를 가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루벤의 표정도 뭔가를 들은 느낌이다. 아마도 내가 들은 것과 비슷한 걸까. 물리적으로 들을 수 없는걸,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개연성 없는 설명인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유성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현실에서 들리는 소리를 표현해서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소리를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들리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를 보여준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 루벤 주변을 채운 정적을, 그건 영화가 제시한 하나의 소리였다. 그의 마지막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웃고 있지 않았을까? 나처럼 당신도, 영화의 시작을 알린 거친 메탈 음악처럼 끝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정적의 울림도 들었으면 좋겠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해줬기 때문일까, <사운드 오브 메탈>은 93회 아카데미에서 음향편집상과 음향효과상이 합쳐진 최초의 음향상을 수상했다. 나는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을 들을 날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에서 내달 무대에 설 뮤지션의 오디션을 갖는 중이다.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무대 앞에 여유롭게 앉아 있고, 바텐더이자 덩치로 보이는 남자는 다소 성마른 표정으로 바 너머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휑뎅그렁한 플로어에는 몇몇 뮤지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섰다. 그러다 모던락을 연주하는 밴드가 연주를 시작한다. 그들이 떠나고 다시 무대는 조용해진다. 내공을 겨루기 전 실력을 가늠하려는 걸까, 무대 주변은 흡사 고수들이 무협을 겨루는 객잔을 방불케 한다. < 라이브 클럽 그레이하운드 >라는 제목으로 먼저 소개된,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의 풍경은 그러하다. ‘머저리클럽’의 두 멤버와 그들의 친구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으나, 영화는 오디션 무대에 선 뮤지션들의 연주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모던락에 이어 헤비메탈이 무대를 뒤흔들고, 여성 재즈 듀오가 퓨전의 아름다움을 펼치는가 하면, 흑인 블루스 연주자가 기타 연주와 노래로 흑인의 영혼을 전한다. 마침내 등장한 머저리클럽이 펑크를 연주하지만 그들의 무대는 실패의 판정을 받고 만다. 그들의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뒤늦게 나타난 플라밍고 기타 연주자가 의자에 앉는다. 그렇게, 황량했던 무대는 점차 음악의 전시장으로 변한다. 흑백의 이미지 위로 색채를 입히는 것은 음악의 색깔들이다. 어지간한 음악 프로그램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듣는 맛이 눈길을 끄는 영화인 셈이다. <라이브하드>의 ‘겨울 편’은 제천영화제에서 단편으로 앞서 소개된 바 있고, 황욱 감독은 앞과 뒤에 ‘늦가을 편’과 ‘봄 편’을 덧붙여 부천영화제의 장편 섹션에 초대받았다. 만들어진 시기가 다른 만큼 오리지널 단편과 새로 추가된 파트는 촬영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두운 지하의 공간에서 주로 촬영된 겨울 편이 인물 가까이 긴밀하게 접근한다면, 늦가을 편과 봄 편의보다 넓은 앵글은 느슨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오디션과 해프닝의 기록에 가까운 겨울 편과 비교해, 인물의 배경이 추가된 장편 버전이 오밀조밀한 이야기의 구조를 갖춘 것은 물론이다. 덕규(크리스 라이온 분)는 멀리 한국에 와 블루스를 연주하려고 했으나 그에게 요구되는 건 인기 있는 힙합이다. 겉보기에 그는 흑인이기 때문이다. 머저리클럽의 베이스 주자인 철( 이재호 분)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베이스나 잘 치라는 말을 듣는다. 사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머저리클럽의 리더인 임재(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자취를 감추었고, 남은 멤버인 철과 섭(갈치 분)은 그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은정( 공민정 분)은 임재를 사랑하는데 그는 매번 다른 여자와 놀아난다. 여자들이 떠나면 그가 언제나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음악에 관한 영화였던 ‘겨울 편’은 ‘가을’과 ‘봄’ 편을 얻으면서 가난하고 쓸쓸한 청춘의 이야기로 화한다. 황욱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결합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든다. 그가 그것을 의도한 것인지 앞으로도 그런 스타일을 유지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지금까지 소개한 두 편의 영화 - < 개 >(2015)와 < 라이브하드 >의 스타일은 그러하다. 한국에서 근래 발표된 음악영화들이 대부분 다큐멘터리였던 상황에서 <라이브하드>의 형식은 괜히 낯설다. 두 편의 필모를 가진 감독답지 않게 황욱은 배우들의 연기 연출에 단연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뮤지션인 사람과 뮤지션이 아닌 사람, 배우인 사람과 비전문 배우인 사람이 뒤섞여 있으면 영화가 뒤뚱거리기 마련인데, <라이브하드>는 그런 단점 따위는 없다는 양 자유롭다. 뮤지션들의 연주 부분과 이야기를 맡은 배우들의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돼 단순한 영화 너머로 일상의 한순간을 완성한다. 전작 <개>가 마치 사건 르포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듯이, <라이브하드>는 가난한 뮤지션들이 처했음 직한 상황에 세세한 마음을 쓴다. 그것으로 현실감을 득한다. 그게 전부다. 그들을 대변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거나 그들을 위로하는 척하는 태도가 없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위대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일까. 차가운 현실을 차갑게 그린 영화는 적지 않다. 거꾸로, 차가운 현실을 따뜻하게 포장한 영화는 더 많다. <라이브하드>는 좀 이상한 영화다. 차가운 현실을 애써 포장하지 않아 뮤지션의 하루를 절감하게 하면서도 마냥 우울하지는 않다. 차가운 방에 작은 스토브를 켜놓아 온기를 나누는 느낌이랄까. 천사처럼 한 남자가 그들 곁에서 계속 춤을 추며 기운을 북돋우기 때문일까. 세 번째 이 영화를 보면서 어렴풋이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영화에서 뮤지션과 친구들은 각자 거울을 바라본다. 헤비메탈 밴드의 리더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는다. 덕규는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이 거울 앞에서 얼굴을 씻는다. 철은 현실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거울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은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는 그들 자신밖에 없다, 당연히. 그렇다면 <라이브하드>는 그들의 자화상을 그리는 영화일까?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화가들이나 할 짓이다. 뮤지션들은 자화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무대 앞의 관객을 바라보며 연주를 해야 한다. <라이브하드>에서 관객에 해당하는 사람은 클럽 ‘라이브 와이어’의 사장이다. 카메라는 문득, 기타를 들고 포크를 부르는 여자 싱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그는 분명 무대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의 눈길은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한다. 홀로 객석을 지키는 남자인 그의 눈길은 현실의 슬픔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관객은 혼자 남았고, 뮤지션은 그를 보며 슬픔을 연주한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슬픔을 위로하는 존재다. 그게 작은 불씨를 만든다. 그 불씨를 간직한 사람이라면 <라이브하드>의 마지막 장면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다. <해피투게더 독립영화> 상영작: 2018.9.29.(토) 17:00 시네마테크KOFA 2관(G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