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폰다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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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헨리 폰다
- 참여 작품
- 헨리 폰다를 대통령으로 (2024), 황금연못 (1981), 시티 온 파이어 (1979), 홀리데이 킬러 (1977), 미드웨이 (1976), 무숙자 (1973), 에스피오나지 (1973), 모스크바의 야간 탈출 (1972), 스탬퍼가의 대결 (1971), 대탈옥 (1970), 샤이안 소셜 클럽 (1970),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1968), 마디간 (1968), 보스턴 교살자 (1968), 파이어크릭 (1968), 비밀 대전쟁 (1965), 발지 전투 (1965), 혼자는 못살아 (1964), 태양은 가슴마다 (1963), 서부개척사 (1962), 워싱턴 정가 (1962), 지상 최대의 작전 (1962), 와록크 (1959), 여배우 지원 (1958), 12인의 성난 사람들 (1957), 가슴에 비치는 별 (1957), 전쟁과 평화 (1956), 누명쓴 사나이 (1956), 미스터 로버츠 (1955), 픽쳐 (1951), 아파치 요새 (1948), 애수의 사랑 (1947), 황야의 결투 (1946), 옥스보우 인서던트 (1943), 임모탈 서전트 (1943), 미드웨이 전투 (1942), 빅 스트리트 (1942), 레이디 이브 (1941), 분노의 포도 (1940), 청년 링컨 (1939), 무법자 제시 제임스 (1939), 모호크족의 북소리 (1939), 제저벨 (1938), 단 한번뿐인 삶 (1937), 트레일 오브 더 론섬 파인 (1936)
수집자료
James Stewart The Signature Collection: The Cheyenne Social Club/ Firecreek
- 매체규격
- DVD
- 상영시간
- —
-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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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관위치
- —
황금연못
- 매체규격
- DVD
- 상영시간
- —
-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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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관위치
- —
무법자 제시 제임스 [제시 제임스 콜렉션]
- 매체규격
- DVD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The Greatest Western Movie Themes
- 매체유형
- CD
- 연주시간
- 48:33
The western Movie Themes
- 매체유형
- LP
- 연주시간
- 63:31
스크린(SCREEN 45)-영화음악 20년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54:00
헨리폰다의 인생과 사랑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도서
- 보관위치
- —
영화계 불멸의 허슬러
- 실물구분
-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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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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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포드/탄생100주년 LA서기념영화제(박흥진의 할리우드통신:63)
- 실물구분
-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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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스크랩
- 보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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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순례여행 Pilgrimage
이 연재에서 존 포드의 1930년대 작품 중에는 1939년의 신화적인 두 영화 < 역마차 >(글)와 < 젊은 날의 링컨 >(글)을 제외하면, < 굽이도는 증기선 >(글)(1935) 밖에 다루지 않았다. 이것이 존 포드의 세계가 1930년대 말에야 원숙해졌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인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위의 세 편만 만들었다 해도 존 포드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등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의 포드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빛나는 순간을, 압도적인 걸작들에 가려진 영화들 곳곳에 새겨놓았다. 그중에서도 < 순례여행 >(1933)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들이 전사한 어머니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 순례여행 >은 무성영화 < 네 아들 >(글)(1928)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캐릭터의 면에서라면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독일 시골 마을이 무대인 <네 아들>의 어머니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이고 순박한 전통적인 어머니이다. 반면 미국 시골 마을이 무대인 <순례여행>의 어머니는 거의 정반대로 권위적이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이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외아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더 많은 땅을 가지길 원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들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 비정한 가모장은 아들의 아이를 가진 연인과 떼놓기 위해 아들의 입대서류를 제출한다. 아들이 프랑스에서 전사한 뒤에도 아들의 아이를 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10년이 지난 뒤, 프랑스 전장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 어머니들의 프랑스 순례여행에 마지못해 참여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바뀐다. < 순례여행 >은 곡예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이 드라마엔 두 가지 난제가 있다. 어머니 한나 제솝(헨리에타 크로스맨)은 포드의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에 속한다. 포드의 다른 영화에서 이만큼 부정적인 중심 캐릭터는 < 아파치 요새 >(글)의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 정도지만, 그의 곁엔 요크 대위(존 웨인)라는 포드적 영웅이 있었다. 한나는 <순례여행>의 유일한 중심인물이다. 용납하기 힘들 정도로 이 부정적인 주인공의 긍정적 변화를 서사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또 다른 난제는 희극의 도입이다. < 순례여행 >은 기본적으로 스산한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희극의 표정이 있고 유머러스한 사건이 있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아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죽음을 맞게 한 어머니의 이야기에 어떻게 조금이나마 희극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아들을 죽게 만든 어머니가 참회 이전에도 유쾌하게 웃는 장면을 관객이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심지어 함께 웃도록 만드는 게 가능할까. 포드의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다. 두 난제를 단 몇 쇼트의 배치와 간단한 대사만으로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드라마적 곡예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만큼 경묘한 솜씨다. 미학적 전위성을 앞세운 나머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장인적 능력을 경시해선 안 될 것이다.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작가이고, 그의 작가로서의 위대성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요구하는 서사경제를 경유해 발현되었다. < 순례여행 >은 포드가 이미 1930년대 초반에 어떤 이야기라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걸출한 장인이 되었음을 증언한다. 물론 포드가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그가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이야기 자체의 자질은 시나리오작가의 능력에 속하며, 1930년대부터 < 웨건 마스터 >(글) 외에 그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는 없다. 세 편의 포드 영화에서 각본을 쓴 누널리 존슨은 포드가 “자신의 생각을 종이에 써서 전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대신 포드는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고치면서 특히 “대사에 대한 눈부신 감각”을 발휘했다. 포드와 13편의 영화를 함께 한 시나리오작가 프랭크 뉴전트는 그래서 완성된 영화는 “언제나 포드의 것이었고, 시나리오작가의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 순례여행 >은 이야기꾼으로서의 포드의 능력이 위대한 단순성이라는 부를만한 특유의 간결한 터치에 있음을 입증한다. 이 터치의 중심에 한나 제솝이라는 여인, 혹은 그 여인을 연기한 헨리에타 크로스맨의 얼굴이 있다. 이 영화 외엔 영화사가 기억할만한 작품을 남기지 않는 이 배우의 시선과 표정의 쇼트에 포드는 분노와 집착, 불안과 연민, 망설임과 혼란의 긴 이야기를 새겨 넣는다.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빌리면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이 여인의 눈 속이다. 포드는 영화적 풍경의 발명가이지만 배우 연출의 대가이기도 했다. “영화의 비밀은 배우의 눈을 찍는 것”이라는 인상적인 말도 포드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순례여행>은 여인의 표정과 시선의 영화다. #1 #2 #3 #4 < 순례여행 >은 한나의 표정과 시선에서 시작된다. 들판에서 일하는 아들(#1)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2)은 만족스러운 것 같다. 아들과 농장이 그녀의 소유다.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이 땅에서 한나는 제왕이다. 아들과 땅의 소유자인 그녀는 동시에 시선의 권력자이다. 그녀는 적어도 여기선 다 볼 수 있다. 농장이 원경으로 보일 때도 지평선은 보이지 않거나 화면의 상단에 드러난다. 게다가 이 농장은 < 선라이즈 >의 마을을 연상시키듯 안개와 옅은 어둠에 갇혀 있다. 이곳은 한나의 시선이 편재하는 그녀의 폐쇄된 왕국이다. 그러나 그 소유와 시선의 권력은 처음부터 금이 가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들은 울타리를 넘어간다. 그는 연인 마리에게 달려가는 중이다(#3). 한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소유물인 아들을 앗아갈 대상인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권력의 위기를, 전 장면과는 다른 불안한 표정의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4). #5 #6 #7 #8 아들 제임스가 연인을 만나는 장면은 아름답다. 제임스는 무언가를 보면서 환한 얼굴로 연못에 돌을 던진다(#5, #6). 연못의 물이 파문으로 너울거리다 파문이 가라앉으면서 마리의 얼굴 윤곽이 수면에 드러나고 카메라는 틸트업으로 마리의 얼굴이 비춘다(#7). 연못을 사이에 둔 수줍은 두 연인의 애틋한 유희. 그런데 더없이 아름답게 촬영된 이 유희에는 어딘지 모를 불안과 비애가 있다. 연못이라는 작은 격리, 장난이자 신호이지만 수면에 비친 연인의 이미지의 훼손을 경유해서 비로소 마리가 등장할 때 마리의 얼굴은 놀랍게도 기쁨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8). 마치 앞으로의 서사에서 펼쳐질 격리와 훼손을 이미 예감하고 있다는 듯. #9 #10 마리의 클로즈업은 이 영화의 가장 훌륭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이 장면과 비교하기 위해 어머니와 아들이 마주 보고 대화할 때의 숏-리버스 숏을 떠올려 보자. 어머니의 클로즈업과 아들의 클로즈업은 얼굴의 크기가 다르다(#9, #10). 한나의 강조된 클로즈업에는 프레임을 지배하는 모종의 표정이 있다. 하지만 제임스의 평범한 클로즈업에는 단순한 리액션의 표정만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권력관계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서사 내에서의 둘의 다른 지위를 반영한다. 이 영화는 아들 제임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11 #12 마리의 클로즈업(#8)이 인상적인 것은 그 크기와 표정의 강도에서 연인인 제임스의 쇼트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가 제임스를 바라볼 때, 그녀는 연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갈 어머니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리의 클로즈업은 제임스의 클로즈업의 리버스숏이 아니라, 이 프레임에 존재하지 않는 한나의 클로즈업(#4)의 리버스숏이다. 한나의 시선의 편재성이, 그 권력의 강력함과 비정함이, 그리고 자신들의 비극적 운명까지 이 기묘한 클로즈업에 담겨 있다. 포드는 불과 4분 만에 이 모든 상황과 예감을 단 몇 개의 숏만으로 압축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의 현실적 대면은 조금 뒤에 이루어진다. 한나는 마리를 찾아와 아들을 떠나라고 강요한다. 이 장면의 숏-리버스숏에서의 두 인물은 정확히 같은 크기와 강도로 담겨있다(#11, #12). < 순례여행 >은 두 여인의 이야기인 것이다. #13 #14 제임스가 프랑스 전장으로 떠나는 기차역에서의 가련한 두 남녀의 마지막 조우 장면(#13)도,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한나는 보고 있었다. 이 장면과 대조를 이루는 기차역 장면이 얼마 뒤에 등장한다. 제임스가 전장에서 생매장당해 죽은 지 10년이 지난 뒤, 한나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멀찍이 있던 마리와 아들 지미는 기차로 다가와 창가에 앉은 한나에게 자신과 아들을 위해 제임스의 묘지에 놓아달라며 꽃송이를 내민다(#14). 두 장면을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모두 최종 목적지가 프랑스이며 주요 인물이 모두 등장하지만, 전자의 제임스는 후자의 꽃으로 대체되었고, 마리의 배 속에 있던 태아는 이제 열 살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전자의 장면에서 보이지 않았으나 시선으로 존재했던 한나는, 제임스 대신 기차를 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단 한 장면을 꼽으라면 바로 이 숏(#14)이다. 이 장면의 요점은 꽃을 받아드는 한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전 장면에서 한나는 땅을 20에이커나 더 샀다. 그녀의 왕국은 더욱 커졌고, 그 강대한 왕국에 마리와 아이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미혼모의 자식이라고 놀림받는 아이는 한나를 할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제임스의 개에게 접근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한나는 마리의 꽃을 받았고, 포드는 그녀의 얼굴을 찍지 않았다. 이 카메라의 시선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나가 자신의 얼굴을 숨긴 것인가. 아니면 카메라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찍은 것인가. 달리 말하면, 인물이 보지 않는 것인가, 카메라가 보지 않는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후자가 맞지만, 심리적으로는 전자가 맞다. 우리는 사실상 양자를 식별할 수 없다. 포드는 인물을 볼 수 없는 지점에 카메라를 두는 것으로 그 인물을 진정으로 드러낸다. 극 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객관적 시점의 카메라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보는 것이 불가능한 자리를 선택함으로써 인물의 태도와 심리를 표현하는 것, 아니 그 인물의 고통을 존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도 다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의 감정을 카메라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포드가 감정의 미스터리를 찍는 방식이다. 이런 장면 앞에서 카메라의 시점에 관한 복잡한 기호학적 논의는 사실상 거의 무용하다. 나는 이런 카메라를 경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과 40여 분이 지났을 뿐이지만 여기서 영화가 끝났고 이후는 여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한나는 자신의 죄의식과 고통을 감춘 채 순례여행을 떠날 것이고, 결국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이 미스터리의 감정 숏에는 영화 전체에 값하는 긴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 이후에는 웃음이든, 참회의 눈물이든 허용되지 못할 것이 없다. 그 모든 예감이 이 신비로운 숏 안에 모두 담겨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두 가지 난제의 해결하는 포드의 방식이다. #15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이후의 프랑스 장면들은 전반부와 대조적이다. 한나의 농장을 감싸던 폐쇄적 안개는 사라지고, 개방된 세상 앞에서 이제 한나는 제왕이 아니라 낯선 순례자가 된다. 자신의 왕국을 노려보던 한나의 시선은 이제 감시의 시선이 아니라 방황과 발견의 시선으로 바뀐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아들과 같은 고뇌에 빠진 청년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기적 어머니를 만나고, 자신의 왕국에는 없던 축제를 발견한다. 이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와, 감췄던 자신의 표정을 마리와 아이에게 보여줄 일만 남았다. 아들의 아이와 사실상 처음으로 마주 볼 때(#15), 순례는 끝난 것이다.(계속)
웨건 마스터 Wagon Master
< 웨건 마스터 >는 여러 면에서 이색적인 서부극이다. 예산은 999,370달러로 포드 서부극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하며, 흥행성적도 당시 포드 서부극의 평균수입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 포드의 영화에 여러 번 등장했던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같은 당대의 스타 대신 무명에 가까웠던 벤 존슨과 해리 캐리 주니어(무성영화 시절 포드 영화의 스타였던 해리 캐리의 아들)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포드의 배우라고 해도 좋을 평생의 영화적 동지였지만 영원한 조연이었던 워드 본드가 여기선 그나마 가장 알려진 배우였다. 또한 이 영화의 스토리는 포드가 스스로 작성했는데, 이것은 1930년 이후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이런 외적인 요소들만으로도 우리는 이 영화가 포드의 가장 개인적인 서부극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웨건 마스터 >에는 서부극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카우보이(여기선 말 장사꾼), 무법자, 인디언, 정착민 마을, 황야의 횡단, 마차의 질주, 총격전과 같은 전형적 서부극의 관습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술 취한 광대(철학자), 도박과 춤과 노래와 같은 존 포드 서부극의 특징적 요소들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포함한 어떤 서부극과도 닮지 않았다. 극히 단순하고 느리고 천하태평이며 사소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이 기이한 서부극을 두고 포드는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에 가장 가까운 영화이며,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말했다. 앞서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다루면서 언급했듯이, 이 최고의 서부극 마스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고전적 서부극 혹은 관습적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 그의 비전형적 서부극 중에서도 가장 일탈적인 이 영화를 가장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부르는 포드의 편에 선다면(사견으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부극은 다시 정의되거나 정의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여기엔 문명과 황야, 동부와 서부, 질서와 무질서 같은 서부극의 기본적 대립항이 아예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착민 공동체도 인디언 마을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집단이며, 그저 마차의 경유지일 뿐이며, 악당들이 등장해 여정을 지체시키지만 짧은 액션만으로 퇴치되어 버린다. 말하자면 < 웨건 마스터 >는 가장 비서부극적인 서부극이다. 장르 연구가들이 포드의 서부극을 다루면서 <웨건 마스터>를 잘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곤경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곤경은 장르 연구가들의 것이지 포드 세계의 여행자인 우리의 것은 아니다. <웨건 마스터>는 우리의 여정에서 가장 멋진 도착지 가운데 하나이며, 또 다른 걸작이다. 스토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100여 명의 모르몬 교도의 마차 행렬과 그들을 이끄는 두 ‘웨건 마스터’(마차 행렬의 가이드이자 한시적 지도자)는 황야의 곤경과 무법자의 위협을 극복하고 모르몬의 정착지를 향해 순례를 계속한다.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극적 장치나 로맨틱한 연애담은 물론, 포드의 다른 걸작들에도 남아있는 감상적 정념조차 없다. 마차 행렬은 몇 차례의 고비를 겪지만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이것이 영화의 거의 전부다. < 웨건 마스터 >를 ‘사치스런 B급 서부극’이라고 표현한 하스미 시게히코는 여기엔 마차 행렬의 ‘완만한 운동’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풍경이 있고 인물이 있다면, 풍경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의 움직임을 찍는다는 카메라의 가장 단순한 행위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태그 갤러거는 비슷한 뉘앙스로 “이 영화의 미스터리는 인물이 다음에 무엇을 하는가의 미스터리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그의 생동의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질베르토 페레스는 그냥 “소박하고도 위대한 영화”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 웨건 마스터 >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너무도 유연한 것이어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킨 다음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주제와 정조를 집약한 한 장면을 끄집어내 특별한 찬사를 바치고 싶어도, <웨건 마스터>는, 이상한 일이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멈추기가 어렵다. 아마도 ‘완만한 운동’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면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부드럽고도 민첩한 이 영화의 생동감과 역동성이 교류하는 수려한 멜로디는 평자에게 달콤한 패배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그 아름다움을 직접 말할 수 없다면, 이 특별한 서부극의 뭔가 다른 점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으리라. #1 < 웨건 마스터 >의 이례적인 점 가운데 하나는 풍경의 위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들을 순례하면서 풍경의 초월성을 몇 차례 거론한 바 있다. 사건들이 닿을 수 없고, 물질적으로는 이야기 내부에 존재하지만 그것의 아우라가 이야기를 초월하는 풍경의 이중성은 포드 서부극의 발명이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의 풍경은 인물과 친화한다. 풍경과 인물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매우 가깝거나 거의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달리 말해 인물과 풍경이 서로를 건드린다고, 혹은 인물과 풍경이 동행한다고 말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포드의 다른 서부극에서는 이런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인물들은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암석봉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으며, 주로 바위산 위에서 등장하는 인디언을 제외하고는 대개 멀리 암괴로부터 떨어져 평원을 걷거나 마차를 달린다. 하지만 < 웨건 마스터 >에서 인물은 풍경을 쳐다보고 그것과 접촉하며 때로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샌디는 날카롭게 치솟은 한 암석봉을 쳐다보며 “언젠가 저걸 보고 산타페의 성당을 닮았다고 얘기했잖아”라고 말한다.(#1) #2 #3 #4 그들은 풍경을 보고 그것을 기억하며, 때로 접촉하고 변형시키며 그들의 여정의 일부로 만든다. 움직임 혹은 완만한 운동이 사건의 일부로 재현되는 게 아니라 순수한 운동 자체로 제시되자 풍경이 움직임을 껴안은 형국, 달리 말해 운동의 초월성이 마침내 풍경의 초월성과 조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풍경과 인물을 함께 담는 쇼트들에서 인물들은 풍경과 가까이 있거나, 아니면 풍경이 보이지 않는 앙각 쇼트로 촬영된다. 마차 행렬을 바위산의 언덕에 길을 만들어서 오른 뒤 그들 스스로 풍경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2, 3, 4) 물론 이런 표현들은 모두 포드 서부극들에만 통용될 수 있다. 이야기를 지속시키려는 규범적 구심력과 이야기를 잊거나 폭파시키려는 탈규범적 원심력의 긴장이 포드 서부극의 특별한 활력을 빚어낸다. 모뉴먼트 밸리의 거대하고 황량하며 기괴한 형상은 후자의 원심력과 이야기를 넘어선 층위에서 내통한다. 포드의 인물들이 만취해 주정을 부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때로 이상심리의 광기를 보일 때, 혹은 이야기가 자신의 출발점을 잊은 듯 세부에 몰두할 때, 우리는 포드의 세계에 임한 취한 신의 손을 혹은 무심한 우주적 운명의 그림자를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에서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 웨건 마스터 >에서는 내통할 필요가 없다. 구심력의 규범이 사라지자 원심력은 기꺼이 풍경과 친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날뛰는 말(馬)들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말의 동작에 극의 많은 긴장이 걸려있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은 없다. < 웨건 마스터 >는 날뛰는 말들의 서부극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말은 인간의 통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고 그것으로써 인간의 서사에 봉사하지만, 휘파람, 총소리, 뿔피리 소리와 같은 모종의 자극에 날뛸 수 있다. 말이 날뜀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말이 날뜀으로써 말의 순응 능력에 의존한 인간의 운동,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이 지속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말과 황야의 영화인 서부극의 이상일 것이다. <웨건 마스터>가 그런 영화이다. 말이 순응할 때가 아니라 날뛸 때의 아름다움에 관한 영화이다. #5 말들은 언제 날뛰는가. 말 장사꾼이자 능란한 조련사인 샌디의 휘파람에 날뛴다. 해리는 보안관이 헐값에 말을 산 뒤 올라타자, 동료인 트레비스(벤 존슨)과 눈빛을 교환하고 휘파람을 분다. 말은 날뛰고 보안관은 간신히 매달리다 땅바닥에 처박힌다.(#5) 보안관은 살인강도인 클레그 일당을 추적하는 질서의 수호자이지만, 동시에 모르몬교도를 추방하려는(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지만 떠돌이 약장사이자 광대패를 이미 추방한) 문명의 악덕의 집행자기이기도 하다. 포드는 여기서 굳이 이 보안관의 캐릭터를 탐구하지도, 혹은 그가 대변하는 문명과 질서의 본질을 사색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와 거래한 뒤 골려준다. 말이 날뛴다고 문명과 질서가 무너지진 않는다. 다만 동요할 뿐이다. 문명과 질서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동요로서의 유희, 유희로서의 동요일 뿐이다. 그 동요와 유희의 한가운데 날뛰는 말의 약동이 있다. 샌디는 극의 후반부에 다시 휘파람을 분다. 이때도 당하는 건 보안관 일행이다. 수배 중인 살인강도 클레그 일당은 마차 안에서 총을 겨눈 채 대기하고 있고, 보안관 일행은 마차를 수색하려던 중이다. 많은 인명이 희생될 지도 모를 위기의 순간에 해리는 휘파람을 불고 말은 다시 날뛴다. 또 한 번 혼쭐이 난 보안관은 다시 핏대를 내며 마차 행렬을 떠난다. 살육의 총격전은 저지되며 말의 날뜀으로 비로소 말과 인간의 운동은 지속된다. #6 날뛰지는 않지만 날뛰기 직전에 이르는 장면들도 있다. 워드 본드는 분노의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술을 마셔도 안 되는 모르몬교도 행렬의 대장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곧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다혈질의 사내다. 이 사내가 흥분할 때마다 말들은 콧김을 내뿜으며 동요한다.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한 이 장면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워드 본드의 흥분과 말들의 동요는 감탄스러울 만큼 너무나 적시에 이어져, 마치 계획된 동시화처럼 보인다. 이때 워드 본드와 말은 같은 기질 혹은 같은 운명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워드 본드도 말도 순응과 날뜀 사이를 오가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긴 순례, 오랜 운동을 지속할 것이다. 서사 안에서 종료되지 않는 그 순례는 아마도 그들의 삶 내내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말의 거친 움직임을 오해해 욕을 쏟아낸 워드 본드가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말에게 사과하는 장면(#6)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7 #8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장면은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발견한 샌디의 외침과 총소리에 마차 행렬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장면(#7)이다. 지금 말들이 총소리에 놀라 날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마른 동물이 물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탈진해 있던 말들이 모종의 자극으로 호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워드 본드는 우왕좌왕하며 “말을 세워!”라고 외치지만, 말도 사람도 듣지 않는다. 그 맹렬한 속도에 흙바람이 몰아치며 마차에 매달려 있던 가재도구들이 우수수 떨어진다.(#8)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데, 가재도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장면이 그토록 강렬한 감흥을 느끼게 할 줄은 < 웨건 마스터 >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말의 질주는 고결하고 무구한 천상의 운동이 아니다. 타는 갈증의 표현이라는 동물적 본능의 운동이고, 소중한 가재도구를 찌꺼기로 남기는 불완전한 운동이며, 소란과 무질서의 운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통제되지 않고 통제될 수 없는 움직임이 어떤 악덕도 조성하지 않는 운동, 물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단순하고도 투명한 운동이다. <웨건 마스터>를 순수한 서부극이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말의 순응과 날뜀이 운동의 투명성에 이르기 때문이다. #9 < 웨건 마스터 >를 보고 난 뒤 우리는 서부극을 잠정적으로나마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서부극은 인간과 말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약속의 땅을 찾아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의 영화다. 그 움직임은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운동이다. 비록 그 인물과 장소가 과거에 속한 것이라 해도 과거에 닫혀있지 않으며, 질베르토 페레스의 표현을 빌리면 “미래에 열려있는 과거”이다. 황야의 순례자들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강을 건너고 있다.(계속)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는 앞서 다룬 < 데이 워 익스펜더블 >(1945), < 도망자 >(1946)와 함께 ‘어둠의 3부작(dark trilogy)’이라고 불린다. 물론 1940년대 후반의 할리우드에서, 어둠은 존 포드의 것만은 아니었다. < 시민 케인 >(오슨 웰스, 1941)과 < 말타의 매 >(존 휴스턴, 1941)에서 시작된 필름누아르의 유행은 1940년대의 할리우드를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 불안정하고 광적인 인물, 뒷골목과 그림자의 불길한 형상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어둠은 필름누아르의 장르적 관습에 그치지 않고, 할리우드 전반에 스며들었다. <황야의 결투>가 등장한 해에 그토록 낙천적이던 프랭크 카프라는 < 멋진 인생 >에서 유례없이 우울한 정조를 빚어냈으며, 윌리엄 와일러는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에서 삶의 바닥으로 추락한 귀향 병사들의 어두운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 빅 슬립 >(하워드 혹스), < 길다 >(찰스 비도르) 등 필름누아르의 명편들도 이 해에 쏟아져 나왔다. 2차대전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필름누아르의 전성기에 어둠의 3부작이 등장한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어둠의 3부작이라는 명명이 유용한지는 잘 모르겠다. 거의 모든 존 포드 영화에서 어둠과 광기가 내재적이라는 점을 논외로 한다 해도, < 황야의 결투 >를 다른 시기의 포드 영화들 예컨대 < 젊은 날의 링컨 >(1939), < 분노의 포도 >(1940), <일곱 여인>(1963) 등에 비해 더 어둡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존 포드 영화를 말하는 데 장르 어프로치가 종종 무력해지는 것처럼 시기별 구분법 역시 개별 작품의 고유한 활력에 둔감해지게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게 <황야의 결투>는 그저 또 다른 존 포드 영화일 뿐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전직 보안관 와이어트 업(헨리 폰다)은 세 형제와 함께 소 떼를 이끌고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툼스톤에 다른 세 명이 휴식을 취하러 간 사이에, 홀로 소 떼를 지키던 막내 제임스는 살해당하고 소 떼는 도둑맞는다. 복수를 위해 툼스톤 보안관을 자청한 와이어트는 이 마을이 도박장을 운영하는 동부 의사 출신의 닥 할러데이(빅터 머추어)와 난폭한 목장주 클랜튼 일가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 클레멘타인이 옛 연인 닥 할러데이를 찾아오면서, 클레멘타인에게 첫눈에 반한 와이어트, 클레멘타인을 거부하는 닥, 닥을 좋아하는 술집 가수 치와와 사이에 긴장이 흐른다. 우연한 계기로 범인이 클랜튼 일가임이 드러나고, 와이어트와 닥은 클랜튼 일가와 결투를 벌인다. < 황야의 결투 >의 러닝타임은 93분이다. 첫 15분간 막내 제임스의 죽음과 소 떼 절도 사건 이후에 와이어트 업이 보안관을 자청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는 이후 50여 분간 살인과 절도 사건은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마치 와이어트 업 자신이 그 사건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복수 이야기에서 러닝타임의 반 이상 동안 복수 모티브가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이상한 복수 이야기다. 대중영화에서 복수는 편리한 장치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존재(가족, 연인, 친구)를 억울하게 죽게만 하면 이야기꾼에게는 많은 것들이 거저 주어진다. 우선 슬픔과 분노(상실감과 복수심)라는 감염력 높은 정념이 자동적으로 마련된다. 서사의 행로도 분명해진다. 이제 이야기는 살인자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에 몰두하면 될 것이다. 이야기의 층을 두텁게 할 수 있는 사적 복수와 법 집행 사이의 도덕적 딜레마, 복수와 용서 사이의 윤리적 딜레마도 확보된다. 무능한 혹은 유능한 법 집행자들의 방해 혹은 협력의 서브플롯은 옵션이다. 요컨대 복수의 정념이라는 출발점, 후던잇(WHODUNIT)의 플롯, 딜레마의 해결이라는 종결 그리고 몇 가지 옵션들로 이뤄진 복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더없이 유용한 패키지 서사다. <역마차> <수색자> <황야의 결투>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복수 모티브는 세 번 등장한다. < 역마차 >(1939), < 수색자 >(1956) 그리고 < 황야의 결투 >에서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편(11회)에서 언급했듯 포드 서부극에서 공동선의 모티브와 사적 복수의 모티브는 임의적으로 일치한다. 복수의 대상이 하필이면 공동악인 것이다. 존 포드는 그 일치의 임의성을 감추지 않는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와 <수색자>의 이산 에드워즈는 공동체에 완전히 무관심하며 복수를 완수한 뒤 공동체를 떠난다. <황야의 결투>의 이상한 점은 와이어트 업이 사적 복수에도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이 도착하자 와이어트는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복수를 잊어버린 것 같다. 그는 도박하고, 먹고, 이발하고, 빈둥거리다 클레멘타인과 춤춘다. 그 사이 와이어트가 행한 공동선은 클랜튼 일가에게 붙들려 있던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를 극장에다 데려다 놓은 일뿐이다. 그렇게 50분이 지난 뒤, 죽은 동생의 목걸이가 우연히 발견되자 와이어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살인자-도둑을 쫓아 황야의 결투를 벌인다. 존 포드는 복수 이야기의 유용성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유용성을 조롱하듯 복수의 정념도 범인 찾기의 퍼즐 풀기도 딜레마의 해결도 무시해버린다. 대신 복수 모티브를 머리와 꼬리에 배치하면서 몸통은 삼각관계 연애담 중심의 에피소드들로만 채워버린다. 물론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 전개는 거의 모든 포드 영화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본론과 여담이 긴장된 매듭의 연쇄를 이루지 않고 이처럼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례는 다른 작품에선 찾기 힘들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 황야의 결투 >의 서사는 실패한 서사다. 이런 시나리오를 제출한 학생은 낙제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이 실패가 존 포드의 실패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유능하지만 독선적인 프로듀서 대릴 자눅은 러프컷을 본 뒤 군더더기와 유머가 과도하다고 판단해 직접 30분가량 잘라냈다고 한다. 와이어트가 클레멘타인의 볼에 키스하는 마지막 시퀀스의 한 쇼트도 포드가 찍지 않은 자눅의 작품이다. 잘려나가 사라진 장면들이 되돌아온 또 다른 영화를 상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 황야의 결투 >의 사라진 장면들은 정말 궁금하다. 그 장면들이 되돌아온다고 이 영화가 더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대릴 자눅은 포드도 인정하는 뛰어난 편집감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전후의 포드는 자신의 제작사를 차리면서 이전보다 더욱 깊이 개인적인 비전과 비관습적인 표현에 이끌렸다. 자눅은 포드가 주류영화를 만들 때 최소한의 균형을 잡는 데 조력자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눅이 제거한 ‘과도한’ 장면들이 돌아오면 이 영화가 도리어 더 크게 실패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토바코 로드> 나는 더 과격하고 더 맹렬한 실패의 버전을 보고 싶은 것 같다. 실패작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진정한 예술가의 특권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잡은 균형보다 실패를 감수한 절박한 불균형이 때로 우리를 더 깊이 움직인다. 이런 말들을 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포드의 < 토바코 로드 Tobacco Road >(1941)이다. 포드가 생애 최고작들을 빚어내던 영예의 시기에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온 이 게으르고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코미디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터무니없어 머리를 멍하게 만든다. 이런 막강한 실패작은 평자에겐 최고의 난제에 속하므로 아마도 이 연재의 마지막쯤에 가서야 겨우 말하게 될지 모르겠다. < 황야의 결투 >로 돌아오자. 우리의 관심사는 물론 실패한 서사를 성립시키는 포드의 방식이다. 내가 접한 <황야의 결투> 논평들은 대개 서사의 복합성, 시적이고 음악적인 영상에 찬사를 보낸다. 예컨대 질베르토 페레스는 “이완되고 분산적이며 에피소드 중심적인 따라서 액션보다 캐릭터와 상황에 몰두하는 포드의 스타일은 진정으로 여성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두 남녀의 춤이 결투보다 더욱 중요하며 더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고 썼다.(「The Material Ghost: Films and Their Medium」) 이 영화에 완전히 빠져 포드의 열광자가 된 린지 앤더슨은 “(서부극의) 전통적 분위기와 전통적 주제를 다루면서 특별한 온기와 특별한 친숙함을 빚어낸다... 모호하면서도 심원한 무언가, 그러니까 일종의 도덕적 시학(moral poetry)로부터 이 영화의 마술이 태어난다.”고 말했다.(「About John Ford」) 토마스 샤츠는 또한 “웨스턴 장르의 친 사회적 가치와 이상이 극단적으로 단순한 그러나 영원히 기억될만한 이미지와 결합했다”(「할리우드 장르」)고 평했다. 동의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표현들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평자들에게 앞서 말한 실패가 보이지 않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단 두 대목만 말하려 한다. 정리된 줄거리에는 결코 등장하지 않을, 그러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만취한 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전문배우 쏜다이크다. 포드의 단골 캐릭터인 주정뱅이 철학자의 변주에 해당하는 이 인물은 와이어트와 닥의 첫 대면에서의 긴장이 가까스로 수습된 직후 등장해 두 영웅을 내면적으로 화해시키고, 클랜튼 일가의 무지와 무례를 폭로케 하며,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대사로 닥의 심경과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는 등, 미묘하지만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가...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 아닌가. 그저 칼 한 자루면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끝장낼 수 있는데.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결국 분별심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쏜다이크가 공연 다음 날 떠나는 시퀀스에 있다. 주민들과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작별인사를 나눈 쏜다이크는 마지막으로 한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전날 밤부터 쏜다이크와 동행했고 이 장면 이후로 다시 등장하지 않는 노인은 이름도 정체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 작별 장면에서 그의 표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다.(#1, #2) #1 #2 쏜다이크는 역시 셰익스피어 풍의 대사로 노인에게 말한다. “진실한 영혼은 서로에게 충절과 불타는 우정을 요구하노라. 안녕히... 안녕히... 어린 왕자여.” 포드의 형인 프랜시스가 분한 이 노인의 슬픈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주정뱅이 배우가 그를 ‘어린 왕자’라고 부르며 손을 맞잡는 장면의 온기를 잊을 수가 없다. 영화의 쇼트란 아니 영화란 기묘한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이 복수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제임스 피살 장면(#3)을 기억하지 않고, 이름도 없는 단역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주인공 형제의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보다 내력도 모르는 주변 인물의 사소한 이별 장면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가. #3 영화는 사건을 다루지 못한다. 그렇게 보이는 영화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가 가장 오랫동안 빈번히 애용해온 사건인 죽음은 너무도 많이 사용된 나머지 그것이 등장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어떤 패턴에, < 황야의 결투 >에서라면 복수 이야기의 패턴에, 편입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착한 형제가 살해당하고 나면 주인공에게 할 일이 달리 뭐가 남겠는가. 갖가지 서브플롯을 첨가해 빤한 복수의 결말에 이르는 여정을 복잡하고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소위 유능한 이야기꾼이 하는 일이다. 물론 존 포드가 그런 부류의 이야기꾼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황야의 결투>에서 포드가 택한 것은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영화가 그것을 잊어버린다. 이름없는 노인의 슬픈 표정은 리버스 쇼트인데도, 리버스 숏에 선행하는 쇼트는 그를 바라보는 쏜다이크의 시점 쇼트가 아니라, 두 사람을 잡은 투 쇼트이다. 노인의 표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인칭의 시선이며 영화의 시선이다. 이 사소한 쇼트는 살인 사건조차 잊어버리겠다고 작정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는 위대한 결단의 쇼트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와이어트 업도 사건을 잊어버린다. 보안관이 되고 나서 그가 한 첫 일 중 하나는 도박이다. 클레멘타인이 도착한 뒤로는 오직 그녀에게 다가서는 일만이 그의 관심사가 된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가장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런 장면 가운데 하나가 등장한다. 서투르게 멋 낸 시골뜨기 모양새의 이발을 하고 향수까지 뿌리고 난 뒤, 그는 사무실 앞 현관 기둥에 발을 올리고 발 바꾸기 놀이를 한다.(#4) #4 영락없는 동네 건달과도 같은 이 행위의 숨은 동기가 클레멘타인을 기다리는 것임은 물론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장면에서 모두가 칭송하는, 그리고 서부극 역사의 전설이 된 두 남녀의 아름다운 행진과 왈츠가 이어진다. 하지만 그녀가 닥의 여자임을 알고 있으므로 이 발 바꾸기 놀이는 구애의 준비도 아니다. 이 장면의 요점은 그의 행위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한심한 놀이는, 이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고 말한다. 이 순간은 복수의 목적이 망각된 시간 속에서도, 사소한 에피소드조차 멈춰버린 이야기의 완전한 진공상태인 것이다.(이 장면은 헨리 폰다가 촬영 휴식 시간에 혼자서 발 바꾸기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포드가 즉석에서 만들어냈다고 한다.) 포드에게 부과된 서부극 만들기라는 직업적 책무, 혹은 서부사나이에게 부과된 복수 혹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윤리적 책무 모두로부터 완전한 자유의 순간. 이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복수 이야기에서 출발한 포드가 왜 실패의 서사를 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포드가 말하지 않은 그의 진정한 소망은 아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위의 서부극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서부극이었을 것이다. 그 소망은 포드 스스로 “내가 만들고 싶었던 서부극에 가장 가깝다”라고 말한, 또한 하스미 시게히코가 ‘이토록 사치스런 B급 서부극’이라고 부른 < 웨건 마스터 >(1950)에서 비로소 실현되었을 것이다. 대릴 자눅이 현명하게 제거한 장면들이 돌아온다면 그래서 더욱 무모한 실패의 서사가 < 황야의 결투 >에서 실현되었다면, 포드가 가장 사랑한 자신의 웨스턴 명단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