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미
- 감독
- 한재빈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강지구, 강민서
지난 12일 SK와이번스가 8년 만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며 길었던 프로야구 시즌이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소재는 야구이다. < YMCA 야구단 >(김현석, 2002)에서도 그려졌던 것처럼 20세기 초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한 세기 넘게 한국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스포츠 중 하나가 야구이다. 한국전쟁 중에도 피난지인 부산에서 전국 리그전이 개최될 정도 1) 로 야구는 역사 현장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뉴스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야구는 스포츠 소식 중에서도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긴 역사를 갖는 만큼 시대를 반영하는 다양한 야구 뉴스들을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중요한 야구 소식’이 한국전쟁부터 1970년대까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시기별로 정리해 야구 역사의 발자취를 부분적으로나마 조명해보려 한다. 1950년대 영상은 아무래도 미국이 제작‧배급한 뉴스 위주로 보존되어 있다 보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미국 메이저리그 관련 소식이다. 특히 한국전쟁 관련 뉴스에서는 유명 메이저리거들의 한국전 참전 소식이 눈에 들어온다. 예를 들면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설적인 4할 타자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테드 윌리엄스(1918~2002)가 전쟁에서 귀환하는 푸티지(< 군 복무 마치고 귀국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테드 윌리엄스 Ted Williams Back From Korea >(1953))라든가 필라델피아 필리스 출신으로 역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 커트 시몬스(Curt Simmons, 1929~ )가 한국전 참전 소식을 직접 알리는 캠페인 영상(< AMERICA IN TRANSITION >(1950))을 들 수 있다. 커트 시몬스 영상의 경우 장래 유망한 젊은 투수가 시즌 중에 징병 되는 상황을 야구선수로서의 모습과 군인으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본인의 내레이션을 삽입해 한국전 참전의 당위성을 높이는 프로파간다로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유명 선수들의 참전 소식과 함께 월드시리즈의 경기 결과를 알리는 뉴스들이 ‘해외소식’의 한 꼭지로 전해지기도 했다. <AMERICA IN TRANSITION>의 커트 시몬스 장면: 투구를 하는 커트 시몬스의 모습이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전환되고 한국전쟁 소식을 알리는 뉴스를 전하며 자연스럽게 미군 참전의 당위성으로 연결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는 보다 다양한 야구 소식들이 전해졌는데 그중에서도 비중이 크고 눈여겨볼 것은 해외 야구팀의 내한과 친선시합 뉴스이다. 미국 대학팀이나 청소년 야구팀, 일본의 다양한 야구팀들의 방한은 한국야구의 ‘이벤트’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친선시합들은 한시적인 국제 이벤트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장비 원조와 기술 전수를 받음으로써 한국야구가 성장하는 데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 야구팀의 경우 대학 야구팀부터 실업 야구팀 그리고 내한을 위해 결성된 재일교포 야구팀까지 다양한 리그의 야구단들이 방한해 전국의 야구팀들과 시합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광복절 행사’ 같은 국가행사 기념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기획’된 재일교포 야구팀의 방한과 친선시합들은 1960년대 실업 야구리그가 자리를 잡고, 고교야구리그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스포츠 자체로서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과는 별개로 이처럼 국가가 기획해 한편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한 뒷이야기는 당시의 뉴스 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2014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 그라운드의 이방인 >(김명준, 2014)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좌) 1957년 내한한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의 모습 (우) 시합이 열린 경기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관중 (<국방뉴스 제73호>) 1957년 경무대를 방문한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대한뉴스 제126호>) 1962년 일본 도에이팀 소속으로 내한 시합을 가진 장훈과 경기가 열린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관중 모습 (<대한뉴스 제391호>) 1970년대는 명실공히 고교야구의 시대였다. 특히 1972년 제26회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부산고등학교를 상대로 9회 말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한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로 불리며 고교야구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군산상고 야구팀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이 경기를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대한뉴스에서 다루는 것을 넘어 별도의 문화영화(<승리의 기록>(1976))로 제작한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TV 매체가 급속도로 성장하긴 했지만, 스포츠 중계 여건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TV보다는 여전히 라디오 중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고, 따라서 시차는 있지만, 뉴스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는 경우도 잦은 편이었다. 따라서 당시 고교야구경기 영상을 보면 현재 프로야구의 인기에 버금갈 정도로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인파의 열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교야구의 열기는 뉴스와 문화영화의 인기 소재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하이틴영화의 인기와 맞물려 < 영광의 9회말 >( 김기덕 , 1977), <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 >( 정인엽 , 1977) 같은 야구영화 제작에도 영향을 끼쳤다. <영광의 9회말>과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는 실제 군산상고 야구부원들의 출연을 두고 경쟁을 벌인 끝에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가 군산상고를 소재로 제작을 했다. 이에 따라 <영광의 9회말>은 경북고 야구부를 영화에 출연시켰다. 이와 관련한 뒷이야기는 김기덕 감독의 구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황금사자기 우승을 한 군산상고 야구팀과 경기가 열린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관중 모습 (<승리의 기록>) <영광의 9회말>과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 시작이야>의 한 장면 1) 『동아일보』, 1951년 10월 6일자 2면. 출처 < Ted Williams Back From Korea >(1953), < AMERICA IN TRANSITION >, < 국방뉴스 제73호 >(1957) -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 승리의 기록 >(1976), < 대한뉴스 제126호 >(1957), < 대한뉴스 제391호 >(1962) - KTV e영상역사관 공영민, 「김기덕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70년대 한국영화 2 - 김기덕‧김수동‧김종래 』, 한국영상자료원, 2016.
3편이 끝난 후, <애마부인> 시리즈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영화제작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정인엽 감독은 ‘두손필름’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고 < 파리 애마 >와 < 짚시 애마 >(1990. 이석기)를 내놓은 것. 판권이 연방영화에 속해 있기에 ‘애마부인’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못했고, 캐릭터 이름도 애마 대신 오해리( 유혜리 ), 필라 김( 이화란 ) 등으로 설정해야 했지만, 이 두 편의 외전은 이후 이어지는 정전보다 오히려 더 ‘애마 정신’을 구현하는 작품이었다. <파리 애마>의 유혜리, <짚시 애마>의 이화란 두 영화는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이라는 이국적 배경 속으로 들어간다. 1~3편에서 정인엽 감독과 호흡을 맞춘 이석기 촬영감독은 <파리 애마>에서도 기존의 애마 시리즈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화면을 선보였고, <짚시 애마>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이 영화들은 나름 당대의 파격이었다. <파리 애마>의 설정은 오해리가 이혼한 남편을 찾아 파리로 찾아간다는 이야기. 외국에서의 낯선 성적 경험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강한 남자’였던 전남편( 현석 )에게서 벗어난다. <짚시 애마>의 필라는 나이 많고 남편 몰래 짚시 남자와 욕정을 불태우지만 결국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패션 모델 출신의 이국적 외모를 지닌 여배우를 캐스팅해 당시로선 이례적이던 유럽 로케이션을 감행한 이 영화들은, 내용보다는 비주얼의 업그레이드를 노렸고, 두 편 모두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며 성공했다. 여기서 ‘애마 프랜차이즈’의 연대기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애마의 남편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의 현우(임동진), 2편의 현우(최윤석), 3편의 노 박사(이정길) 그리고 <파리 애마>의 장석환(현석). 특히 장석환은 가장 강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편이었다. 1편의 문호(하명중)와 2편의 성현(신일룡). 애마의 옛 애인과 현재 애인. 1편과 2편의 동엽(하재영), 4편과 5편의 호진(김호진). 애마를 사랑하는 연하남들. 3편에서 애마의 첫사랑과 현재 애인, 1인 2역으로 등장한 장승화. 11편과 12편의 김주철. 그들은 13편의 이대준과 함께 <애마부인> 시리즈의 ‘헝크’(몸 좋은 남자) 계보를 잇고 있다. 장승화는 외전인 <겨울 애마, 봄>(1991)에도 출연했다. ‘<애마부인> 2기’는 1990년에 시작된다. < 은하에서 온 별똥동자 > 시리즈(1987~88)의 석도원 감독이 < 애마부인 4 >(1990)의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후 그는 10편까지 총 6편의 <애마부인> 시리즈 정전과 외전인 < 드라큐라 애마 >(1994)를 연출한다. 석도원 감독이 등장하면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진화를 일단 멈추고 불균질적인 시기를 맞이한다. 어떨 땐 황당할 정도로 급진적이고(5편의 남편( 최동준 )은 하나코( 민희 )라는 정부에 의해 일본도에 찔려 살해된다), 어떨 땐 1960년대 신파 멜로를 연상시킬 만큼 보수적이었다(7편의 애마( 강승미) 는 성불구 남편( 이무정 )에게 돌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의 에로 영화는 극장이 아닌 비디오 대여점에서 경쟁하고 있었고, 흥행 성적도 서울 관객 5만 명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에로 영화 지형도에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어느새 ‘올드 스타일’로 밀릴 상황이었다. < 복카치오 > 시리즈(1991~94) 같은 새로운 감각의 프랜차이즈가 등장했고, <애마부인> 시리즈도 경쟁을 위해 변해야 했다. 석도원 감독의 뮤즈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4편의 주리혜, 5편의 소비아, 6편의 다희아, 7편의 강승미, 8편의 루미나, 10편의 오노아. 소비아는 이후 비디오 영화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배우 임옥경의 동생인 주리혜는 이후 비디오 영화 <쌍파울로 애마 신바람 났네>(1996. 유진선)의 주연을 맡았다. 소비아는 ‘10대 애마’ 진주희와 함께 <애마 섹시 월드>(1998. 조명화)에 출연했다. 오노아는 역시 석도원 감독이 연출한 <드라큐라 애마>(1994)에 출연했다. 이때 석도원 감독이 끌어들인 것이 바로 퍼포먼스다. 애마나 그녀가 우연히 만나는 남자들의 직업적 설정(행위예술가, 현대무용가 등)을 통해 구현되는 스테이지는, 전체적인 스토리와 분리되면서도 이 시리즈가 지니는 에로틱한 면모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때론 섹스 신에 실제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편엔 사도마조히즘 섹스 컨셉트가 도입되는데, 이때 아티스트 원석( 원석 )은 애마를 묶으며 “이것도 예술입니다”라고 말한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티스트 그룹의 토론 장면엔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과 아르토의 잔혹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거론된다). 5편에서 시작되는 퍼포먼스의 전통은 이후 김성수 와 조명화 로 감독이 바뀌어도 유지된다. 여기서 하나의 혐의는, 잘만 킹 영화의 영향력이다. <애마부인> 1편에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면,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에선 당시 한국 에로 콘텐츠 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 레드 슈 다이어리 >(1992. 잘만 킹) 스타일의 에로틱 느와르 톤이 묻어나며, 이것은 다소 난폭한 섹스와 결합된다. 퍼포먼스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행위이자 모티프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7편에선 바닷가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가 퍼포먼스를 한다. 6편엔 4대 애마 주리혜와 5대 애마 소비아 그리고 6대 애마 다희아가 자매로 나온다. 영화 초반부, 그들은 철로 위에 눕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8편엔 밴디지 컨셉트가 등장한다. 11편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공연 장면. 조금은 장황한 모놀로그나 대사를 통해 영화의 테마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영화의 감성적 측면을 고려한 석도원 감독의 의도로 여겨지는데, 그 의미가 모호하여(게다가 비문이 많다) 그다지 효율적이진 않았다. 6편은 ‘말 잔치’인데 애마( 다희아 )는 언니( 소비아 )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지금의 언니의 모습은 정상궤도를 이탈한 빗나감이며, 사랑의 배신에 대한 반항이고, 결국은 후회하게 될 독선의 모습이야.” 이후 이혼을 결심한 애마의 독백은 이렇다. “순수와 영혼의 진한 사랑의 연습이, 크고 작음을 모두 잉태해낸 너는, 이제 허공에 익숙해진 사랑의 노래다. 높은음 외마디 끓어오르는 진실, 사랑의 한 맺힌 신음으로 고뇌하는 아픔, 네 귀를 후려치는 듯한 울음소리로, 울음소리로, 사랑의 바람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슬픔이여, 내 앞에서 그대 눈물이었다. 어떤 고통의 미움이 들었나. 독하디독한 미움을 마시고 보면 새까만 허공, 침묵의 계절. 무거운 돌 바위 무너져 내리듯 슬퍼하자, 슬퍼하자.” 영화의 시작이나 끝은 선언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문장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8편은 “에로티시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에로티시즘은 우리들을 착각적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 또 다른 활력소일 수도 있다”는 문구로 시작해 “시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시를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시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사람이든 시든 모두가 사랑이었나”라는 자막으로 끝난다. 이외에도 “우리의 사랑은 짧게 빛나는 불협화음이었나.”(4편) “그대 영혼으로 그리움 엉기어 우리의 사랑은 눈꽃이 되었나.”(5편) 같은 한탄조의 대사들이 영화를 마무리한다. 김성수 감독이 발굴한 9대 애마 진주희. 최연소 애마였다. 이후 그녀는 소비아와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이때 등장한 김성수 감독은 < 애마부인 9 >(1993)을 연출하며 혁신을 일으킨다. < 색깔 있는 남자 >(1985)로 유명한 그는 ‘최연소 애마’ 진주희를 캐스팅하는데, 그녀는 기존의 애마들과 다른, 차라리 하이틴 아이돌이나 로맨스 히로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범죄 스릴러 요소와, <색깔 있는 남자>의 반전 엔딩을 장식했던 레즈비어니즘의 터치가 결합되면서, <애마부인 9>는 석도원 감독이 이식한 사변적 톤을 걷어내며 “몸은 주더라도 마음은 주지 마라? 그따위 논리가 어딨어!”라는 직설법으로 승부한다. 특히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애마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라는 자막이 뜨는 대목은, ‘애마 프랜차이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엔딩일 것이다. 조명화 감독의 11편에 출연한 이다연과 12편에 출연한 서지은. 10편으로 다시 석도원 감독에게 메가폰이 넘어간 시리즈는 11편과 12편에서 조명화 감독을 만난다. 액션 요소를 대거 도입한 조명화 감독은(그는 < 우뢰매 >와 < 슈퍼 홍길동 > 시리즈의 연출자 중 한 명이었다) 아마도 가장 거친 스타일의 <애마부인> 시리즈를 연출한 감독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 이 시리즈는 에로 비디오 시장에 거의 잠식 당한 상태였고, 마지막 13편은 김성수 감독이 돌아와 대미를 장식했다. 1990년대 중반은 ‘애마 프랜차이즈’의 대혼란기였는데, 1995년을 보면 11편과 12편이 나왔고, 외전인 < 애마와 변강쇠 >(김문옥) < 애마와 백수건달 >(김문옥)이 등장했으며, 비디오 시장엔 <적도 애마>(김인수)와 <빨간 애마>(유세기)가 출시되었다. 정전과 외전과 비디오 시장을 아우르는 상황. 이후 그 주도권은 완전히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갔지만 대세는 진도희 의 < 젖소부인 > 시리즈였고, 1998년 이후 ‘애마’라는 이름을 붙인 영화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가 2016년 < 애마부인 2016 >이 나왔다. IPTV 시장의 확산을 통해 18년 만에 애마가 부활한 셈이다. 외전의 여주인공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겨울 애마, 봄>의 애리(박엘리자), <애마와 변강쇠>와 <애마와 백수건달>에서 애옹(애마+옹녀)과 애미/미치코 역을 맡은 박양희, <빨간 애마>의 설희(정세희), <애마부인 2016>의 은혜(류현아). 애마 프랜차이즈의 조연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독고영재는 6편에서 주희(주리혜)의 전남편으로 등장하고, 이후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원석과 유병완은 석도원 감독의 단골배우였다. 그들은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원석은 종종 애마의 애인으로 등장했다. 맹찬재와 노현우는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와 외전에서 남편 역할을 주로 맡았다. 4편에서 에리카의 결혼 파트너였던 신성하는 12편과 13편에 남편으로 등장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 ‘애마 프랜차이즈’의 역사는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테마와 스타일과 산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여성들이 절규하듯 내뱉었던 대사들은, ‘에로 영화’라는 장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때론 강렬한 울림을 주었다. < 애마부인 9 >에서 강희가 애마에게 던지는 충고는 아마도 프랜차이즈 전체의 테마를 요약할 것이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애마에게 강희는 말한다. “진정 네가 필요한 남자를 선택해. 윤리, 도덕, 이런 거에 얽매일 필요 없어.” 그리고 못을 박는다.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최초로 ‘진솔한 욕망’과 ‘원초적 본능’의 세계를 가져왔던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 한국영화의 ‘위대한 유산’까지는 아니라도, ‘역력한 흔적’ 정도로는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1960년 5월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 당시 26세의 청년이었던 피터 쿠벨카는 300석 규모의 상영관을 빌려 자신이 새로 완성한 영화의 시사회를 마련했다. 작품 제목은 < 아르눌프 라이너 >였고, 당시 오스트리아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젊은 예술가이자 쿠벨카의 친구기도 했던 아르눌프 라이너 본인을 비롯해 250명에 달하는 초대 손님들이 극장 안을 메웠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시작되고 나니 관람객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해 상영이 끝났을 때는 고작 12명이 남아 있었다. 영화의 상영시간은 정확히 6분 24초였다. 라이너와 그의 회화 작품들을 담은 촬영본은 아예 영화에 활용조차 되지 않았고,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될 것이라 기대했을 라이너는, 쿠벨카의 증언에 따르면 “침울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지만 끝까지 남아 있기는 했다”고 한다. 이상은 쿠벨카가 마크 웨버와의 인터뷰에서 묘사한 <아르눌프 라이너> 첫 상영회의 모습이다. <아르눌프 라이너>가 당대의 가장 중요한 실험영화 가운데 하나로 재발견된 것은, 1960년대 중반 조나스 메카스 등의 주선으로 쿠벨카의 영화들이 미국 예술가들에게 소개되면서부터였다. 과연 < 아르눌프 라이너 >는 어떤 영화이기에 그처럼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쿠벨카는 자신의 영화가 필름 이외의 다른 매체로 전환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만든 여덟 편의 영화는 여전히 DVD나 블루레이 등으로 출시되지 않고 있다. ‘계측영화’(metric film) - 조나스 메카스와의 인터뷰에서 쿠벨카는 이 용어가 미터법을 뜻하는 독일어 표현 ‘Metrisches System’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의도를 살려 여기서는 ‘계측영화’라 옮겼다. - 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 대부분(<아데바르> <슈베하터> <아르눌프 라이너>)은 오늘날 유튜브 등의 온라인 플랫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조악한 화질의 동영상을 통해 그의 작품이 주는 감각적인 충격을 고스란히 감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아래의 사진은 <아르눌프 라이너>라는 작품과 관련해 적어도 그 구조적 특징만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르눌프 라이너>의 35mm 필름 프린트 전체가 배열되어 있는 벽 앞에 서 있는 쿠벨카의 모습이다. 사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이 벽에는 가로 64단과 세로 144단으로 총 9,216개의 프레임이 왼쪽 상단 모서리에서 오른쪽 하단 모서리까지 빼곡히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5mm 필름의 정상 영사속도는 초당 24프레임이므로 이 벽에 배열된 필름을 영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총 384초, 즉 6분 24초라는 계산이 나온다. 또한 벽에 배열된 프레임들은 모두 흑색 아니면 백색(정확히 말하자면 투명)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필름을 영사하게 되면 스크린 상에는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광경 이외에는 아무런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깜빡임 영화’(flicker film)라 부르기도 한다.) 사운드트랙에 관해 말하자면, 잡음 아니면 전적인 무음 상태로만 구성되어 있다. <아르눌프 라이너>는 암흑과 (모든 파장의 빛을 포괄하는) 백색광, 무음과 (모든 주파수의 소리를 포괄하는) 백색잡음, 이렇게 영화의 기본이 되는 네 가지 뼈대만으로 이루어진 작품인 것이다. 더불어 쿠벨카의 계측영화는 영화란 (모종의 이미지가 담긴 ‘사진’이 아니라) 스틸(still)이 연속적으로 영사되는 것이라고 보는 그의 입장을 무척이나 과격한 방식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숏이 아니라 프레임이야말로 영화적 분절(articulation)의 최소단위라는 입장(“영화는 프레임 사이에서 말한다.”)을 줄곧 견지해 왔다. 그에 따르면 통상적인 영화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분절을 보이지 않게 하면서 숏과 숏 사이의 분절을 통해서만 의미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말하자면 세상의 ‘거의’ 모든 영화는 프레임들 간의 ‘약한 분절’(weak articulation)에 기초한 숏들만을 활용한다. 차이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미묘하게 변화하는 이미지들이 담긴 일련의 프레임들이 일정 시간 동안 연속적으로 영사되면서 움직임의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쿠벨카의 용어법을 따르자면, 가장 약한 분절은 연속되는 프레임들에 담긴 이미지들이 동일한 경우, 즉 우리가 통상 ‘정지화면’이라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강한 분절’(strong articulation)이 나타나는 것은 대개 숏과 숏이 전환되는 경우에 국한된다. 반면 무척이나 짧은 간격으로 이질적인 프레임들이 이어지는, 즉 빈번하게 강한 분절이 나타나는 영화를 떠올려 보자. 이때 우리는 스크린 상에서 ‘깜빡임’ 효과를 보게 될 것이며 이미지의 내용보다는 시각적 자극 자체에 보다 민감해질 것이다. <아르눌프 라이너>보다 2년 앞서 발표된 쿠벨카의 또 다른 계측영화인 <슈베하터>의 35mm 프린트 가운데 일부를 찍은 아래 사진을 보라. 강한 분절을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영화적 방법론이 쿠벨카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될 것이다. (쿠벨카에 대해 논하는 평자들은 종종 이 점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아 오해의 여지를 남겨두곤 한다.) 영화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 1920년대에 이미 아벨 강스나 장 엡슈타인 같은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감독들은 1~2프레임으로 이루어진 짧은 숏들을 활용한 운율적 몽타주의 힘을 빼어나게 보여준 바 있다. 지극히 감정적인 멜로드라마이면서 혁신적인 영화적 효과를 대담하게 구사한 강스의 <바퀴 La Roue>(1923)는 당대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철로의 백장미’라는 제목으로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도 개봉되어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쿠벨카의 계측영화들의 새로운 점은 강한 분절을 과감하게 노출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영화적 이미지의 내용을 최소화하면서 고도로 형식적으로 강한 분절을 활용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 데 있었다고 말해야 옳겠다. 무성영화시기부터 1950년대까지 아방가르드 영화의 계보가 거칠게 말하자면 시적 흐름과 추상적 흐름 사이에서 진동하며 전개되었다면, 쿠벨카식 계측영화의 정점에 자리한 <아르눌프 라이너>는 전적으로 프레임 단위에서 영화를 사고하는 한편 모종의 형식적 규칙을 고안해 전체 영화에 적용하는 구조적 흐름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아르눌프 라이너>가 “모더니스트 영화의 지주(支柱) 가운데 하나”(스테판 그리세만)로까지 평가되곤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만 <아르눌프 라이너>를 본 연재에서 나중에 다루게 될 ‘구조영화’들의 선구로 볼 수 있을지의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쿠벨카 자신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쿠벨카가 <아르눌프 라이너>에서 활용한 구조적 형식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로 그는 엄청나게 꼼꼼한 계획, ‘악보’라 해도 좋을 작업노트에 따라 그의 계측영화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쿠벨카는 그의 영화에 대한 냉담한 반응에 실망한 나머지 1962년에 거의 모든 작업노트들을 파기해 버렸고, 이 때문에 <슈베하터>와 같은 작품의 정확한 구조는 아직까지도 연구자들에 의해 해명되지 않고 있을 정도다. 저명한 영화학자인 애덤스 시트니는 <슈베하터>에서 해명되지 않는 부분은 사실 애초부터 쿠벨카의 주관적인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아르눌프 라이너>는 2, 4, 6, 8, 9, 12, 16, 18, 24, 36, 48, 72, 96, 144, 192 그리고 288개의 프레임들에 기초한 시청각적 ‘주제’ 혹은 ‘악구’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주제를 이루는 프레임의 수는 임의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산술적 조작을 통해 쿠벨카가 ‘기저 리듬’(ground rhythm)이라 부르는 (영화에서 1초에 해당하는) 프레임 수인 24와 관련될 수 있는 수들에만 엄격하게 국한되어 있다. 이 열여섯 종류의 프레임 수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라 얻어낼 수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한 방식이며 사람에 따라 다른 절차를 통해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1) 24보다 작은 수들 가운데 서로 곱해서 24가 될 수 있는 수들만을 고른다. 그러면 2, 3, 4, 6, 8, 12 총 여섯 개의 수를 얻게 된다. (세 개의 연산: 2×12=24, 3×8=24, 4×6=24) (2) (1)에서 얻은 여섯 개의 수 각각에 짝수인 2를 곱하거나 홀수인 3을 곱한다. 그 결과로 얻은 수들 가운데 (1)에서 얻은 수들과 중복되지 않는 수들을 고른다. 그러면 우리는 9, 16, 18, 24, 36 총 다섯 개의 수를 추가로 얻게 된다. (3) (1)에서 얻은 여섯 개의 수 각각에 24를 곱한다. 그럼 우리는 48, 72, 96, 144, 192, 288 총 여섯 개의 수를 추가로 얻게 된다. (4) 우리는 이제 2, 3, 4, 6, 8, 9, 12, 16, 18, 24, 36, 48, 72, 96, 144, 192, 288 총 열일곱 개의 수를 얻었다. 하지만 쿠벨카에게 있어서 17은 영사기의 영사속도, 즉 기저 리듬과 조화되지 않는 수이다. 따라서 이 수들 가운데 3을 제외시키고 열여섯 개의 수만을 남긴다. 3은 목록에서 제외되더라도 이상의 수들을 산출한 연산과정에 가장 깊숙이 개입한 ‘잠재적’ 수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쿠벨카가 <아르눌프 라이너> 작업을 위해 작성했던 ‘악보’이다. 이번에는 이해를 돕기 위해 악보의 특정 부분과 필름 프린트에서 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캡처해 위아래로 배치해 보았다. 악보 상의 검은 십자표시는 흑색 프레임, 붉은 십자표시는 백색 프레임에 해당한다. 각각의 십자표시 아래에는 작은 줄이 함께 표기되어 있는데 검은 줄은 무음, 붉은 줄은 백색소음에 해당한다. 이 사진을 통해서는 필름의 사운드트랙 부분은 알아보기 어렵지만, 각각의 십자표시와 프레임이 정확히 대응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앞서 살펴본 열여섯 종류의 프레임 수 가운데 최소에 해당하는 2프레임에 기초한 ‘주제’ 또는 ‘악구’의 조합을 떠올려 보자. 흑색과 백색, 소음과 무음의 네 개 요소를 통해 네 가지 다른 조합(흑색/소음, 흑색/무음, 백색/소음, 백색/무음)의 프레임이 가능하므로, 2프레임짜리 주제는 열여섯 가지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다. 실제로 <아르눌프 라이너>에는 열여섯 가지의 2프레임짜리 주제가 모두 활용되고 있다. (4프레임짜리 이상의 주제에 대한 계산은 생략하기로 한다. 경우의 수가 너무 커서 모두 활용하기 힘든 경우, 쿠벨카는 몇 개의 주제를 선별적으로 골라 활용했다는 점만 밝혀둔다.) 쿠벨카는 <아르눌프 라이너> 전체를 총 16개의 섹션으로 나누었는데 각각의 섹션은 576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576은 영화의 기저 리듬에 해당하는 수인 24를 제곱(24×24)해서 얻은 것이다. 서두에서 이 영화의 총 프레임 수는 9,216개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섹션의 수(16)와 각 섹션의 프레임 수(576)를 곱한 것이다. 쿠벨카가 운용하고 있는 수적 ‘게임’의 목록을 기술하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겠지만 이쯤에서 정리하기로 하자. 여기까지 읽어 온 독자라면 분명 다음과 같은 의문을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아르눌프 라이너>가 철저하게 지적이고 형식적인 방식으로 구성된 영화임은 알겠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그 구조를 전혀 지각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이 모든 작업 과정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쿠벨카 자신은 항상 변함없는 답변을 들려주곤 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자연현상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감각과 유사한 종류의 감각을 전해주는 영화라고 말이다. 우리는 자연현상이 모종의 법칙과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실제의 자연을 마주하는 순간에 그러한 법칙과 원리를 지각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무지로 인해 자연을 감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쿠벨카의 계측영화들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원리를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 영화들을 통해 형성되는 감각의 장에 온전히 몸을 내맡길 수는 있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천둥을 동반한 번개와도 같은 작품인 <아르눌프 라이너>를 맞이하는 최선의 방식일 것이다. ※ <아르눌프 라이너>의 구조와 방법론을 개괄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이 글에서는, 쿠벨카의 다른 계측영화들 및 다소 성격을 달리하는 그의 영화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또한 ‘탈전문화’를 표방하며 영화 이외의 예술은 물론이고 요리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기울여 온 그의 이력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았다. 쿠벨카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면 다음의 자료들을 찾아보길 권한다. 쿠벨카는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특별전 참석차 방한한 바 있는데, 당시 영화제에서는 『피터 쿠벨카: 영화의 본질』이라는 제목의 50여 페이지짜리 소책자를 발간한 바 있다. 이 소책자에는 (쿠벨카 자신이 공동설립자 가운데 한 명인)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 관장 알렉산더 호바트와 연세대학교의 서현석 교수가 쓴 작가론을 비롯해 인터뷰와 작품별 리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국역본이 나와 있는 애덤스 시트니의 기념비적 저술 『시각영화 Visionary Film: The American Avant-Garde, 1943~2000』에서도 <아르눌프 라이너>를 비롯한 쿠벨카의 작품 대부분이 다뤄지고 있어 참고할 수 있다. 영문으로 된 자료 가운데서는, 1966년 10월 1일 조나스 메카스가 쿠벨카를 인터뷰한 기록과, 오스트리아 실험영화작가로 쿠벨카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인 피터 체르카스키가 쓴 「쿠벨카에 따른 세계 The World According to Kubelka」를 추천한다. 메카스의 쿠벨카 인터뷰는 피터 지달이 편집한 『구조영화 선집 Structural Film Anthology』(1978)에 수록되어 있으며, 「쿠벨카에 따른 세계」는 체르카스키 자신이 편집한 『틀이 없는 영화: 오스트리아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 Film Unframed: A History of Austrian Avant-Garde Cinema』(2012)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