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여인의 숨결, 규방가사
- 감독
- 김현종
- 제작년도
- 2003
# 실제 사건 2018년 1월 13일 토요일, 오전 8시 7분. 핸드폰에 긴급재난문자가 울린다. “하와이로 향하는 탄도미사일 위협 발생. 즉시 대피소를 찾으세요. 이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1.4백만 하와이 시민은 임박한 죽음의 공포를 맞닥드리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떨어져있던 가족과 친구를 찾고, 대피소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도시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하와이 주정부는 13분 뒤 트위터에 미사일 위협이 없다고 발표했지만 소셜미디어를 쓰지 않는 이들에게 정정 내용이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거렸고, 앞선 문자와 트위터 중 무엇이 가짜뉴스인지 분간되지 않는 순간이 흘렀다. 최초 재난문자 전송 38분 뒤 주비상관리국은 정정내용을 다시 문자로 전송했다. 이 시간동안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골프장에 있었고,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미본토를 겨냥한 미사일 공격 발생시 대응 계획을 지난 30년간 시험해보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윌리엄 페리 전 미국방장관은 트위터에 “실수로 인한 핵전쟁 위험성은 가설이 아니다. 사고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인간은 또다시 실수를 할 것이다. 단순 실수가 수백만명의 목숨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도록 더욱 철저하게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남겼다. # VR 다큐 <당신이 깨어난 아침(세상의 끝까지)> (이하, <당신이 깨어난 아침>) < 당신이 깨어난 아침 >은 4년 전 하와이를 혼돈 속에 몰아넣은 정부의 가짜 탄도미사일 경보 사건을 다룬 VR 다큐이다. 총 3장으로 나누어진 38분 길이의 디지털 이미지 작업으로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 목소리와 나레이션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1장 ‘피신하라(Take Over)’는 사건 당일 아침 유난히 아름답던 하와이 하늘부터 지옥같은 공포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을 몇 인물의 구체적인 증언으로 담았다. 일터에 가기 전 평온하게 준비를 하던 안지 앤더슨(Angie Anderson)은 핸드폰 알람 소리에 평소처럼 홍수주의보인줄 알고 별생각없이 화면을 보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브루스 알린(Bruce Allyn)은 이 문자가 사실일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지난달 섬전체에서 실시한 대피훈련을 기억하며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서늘함을 마주한다. 하와이 출신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핵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타마라 패턴(Tamara Lilinoe Patton)은 이날 아침 도서관에서 친구들의 겁에 질린 메시지를 연쇄적으로 받으며 마지막일지 모를 사랑의 답변을 보낸다. 실제로 미사일이 발사된거라면 15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고, 평균 크기의 핵이 폭발한다고해도 호노룰루 전체가 시작부터 흔들리고 섬 전체가 유해물질로 뒤덮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등에 업고 피신처에 겨우 도달한 한 남자는 “여긴 자리가 없으니 다른 데로 가세요!” 라고 소리지르는 군중의 민낯을 마주하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평화로운 상황이 이상했다. 태평양의 주요 군 핵심시설로 가득한 하와이에서 피신이라는 게 가능한지 의문을 가진 작가도 등장한다. 이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과연 무엇인지.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피신하라”는 말만 내놓는 것이 대안인지 의문을 가진 젊은 여성은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기도를 하며 바다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간다. 2장 ‘종말의 기계(The Doomsday Machine)’는 문자 발송 직후부터 긴급신고번호로 접수된 문의전화 녹음기록을 공개해 공적 권한을 지닌 이들에게도 정보가 도달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어떤 조언도 제시하지 못한 상황을 드러냈다. 공기관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던 38분간, 시민들은 자신의 안전을 책임진다고 믿었던 정부기관에서는 어떤 답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셜미디어로 향한다. 각자의 처지와 정보를 교환하고 개인의 결정으로 대처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인터뷰가 이어진다. 또한 지구 위에 존재하는 14,000개의 핵무기가 지구를 몇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지 전문가들의 견해를 취재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준비를 하라”던 교사의 지시에 부모의 위안이 필요했던 소녀, 이 속에서 살아남더라도 뱃 속의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지 걱정하던 임산부의 증언은 시스템의 실패로 인류가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사건으로 이 날을 기록하고 있다. 3장 ‘쿨레아나(Kuleana)’ 는 책임이라는 뜻을 가진 하와이어로 사건이 종료된 시점부터 그 이후의 변화를 담고있다. “미사일 경고는 잘못된 문자였다” 라는 정정보도에도 사람들의 혼돈은 한동안 지속됐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그 사건 이후 어떤 것도 똑같지 않았다”라는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그저 앉아서 언제일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타고 나왔다. 정부는 미사일 경보 오발령의 원인으로 주정부 비상관리국 직원이 작업 교대 중 경보 시스템을 점검하다가 버튼을 잘못 누르며 생긴 개인의 실수였다고 밝혔다.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으며 사건은 종료됐다. 시민들은 “잘잘못을 묻고, 적과 아군을 나누고, 누군가를 해고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험과, 시스템이 실패할 수 있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살기보다 다른 대안을 원했다. 그리고 그 답은 기존의 사회작동 방식이 아닌 과거 하와이 선주민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 점점 개별화되는 사회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되찾고 보편적 인간성을 회복해야 가능하다는 목소리로 퍼진다. 타마라 패턴(Tamara Lilinoe Patton)의 증언 장면 트레일러 보기: On The Morning You Wake (To the End of the World) | Meta Quest # VR다큐 미학의 발전 가능성 <당신이 깨어난 아침>의 특이점은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통해 리얼리즘을 추구하려는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2장에 등장한 추억의 가족 비디오를 제외하고는 실제 촬영한 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 현실 이미지를 옮기기보다 디지털 이미지로 당시 일어난 상황을 묘사한다. 이는 다큐멘터리가 실제 현장의 이미지를 드러내며 힘을 발휘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미지의 힘을 포기한 것이냐면 오히려 그 반대이다. 제작진은 표현방식 전략을 이 사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핵(이미지)과 목소리(사운드)로 세웠다. 핸드폰이라는 매체 덕분에 무언가를 알리고, 남겨두기 위한 현실 기록으로서 이미지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새로운 이미지는 일상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기록 영상과는 반대로 현실을 전제로 하되 디지털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야기를 해설하는 이미지도 모두 움직임에 반응하는 입자처럼 최소화해서 그 외 공간을 비우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현실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와이 미사일 오보의 주요 쟁점인 ‘핵'과 그 여파를 이미지화한 그래픽, 모래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날아가는 세계, 하와이 섬의 모습 등을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했다. 명백히 인위적인 것임을 선언하는 이 작품의 시각 표현방식은 관객에게 거짓말 같은 실제에 대한 현실 인식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만(허구) 사람들에게는 실제 일어난 일(현실)이었고, 삶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에 ‘가상 현실'이라는 단어가 적합해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제작진은 미사일로 인해 핵폭발이 일어났다면 산산히 부서졌을 세계를 묘사의 한 방법으로 취했다. ‘만약’ 위험 경고가 사실이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증언과 사람들의 공간을 조각내 무너지게 하고 다시 구축하는 방식으로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관객에게 가상 현실을 경험하게 해서 ‘정부'의 메시지라는 권위가 우리가 보는 이미지보다 더 허구적이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언제든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깨치게 하고, 영상이 끝나도 우리의 현실이 여전히 헤드셋 밖에 남아있다고 알리는 장치로 이 디지털 이미지는 작동한다. 이러한 재현 이미지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에서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강력한 힘은 실제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목소리는 음질에 관계없이 일어난 일에 대한 객관적 상황을 제시하고, 이들의 목소리에서 여전히 느껴지는 세상의 끝을 마주한 당일의 감정이 불안하거나, 화를 내거나, 다급하게 온전히 전달되고 있다. 다시말해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청각이 제공하는 강렬한 사실과 감정을 기초로 당시 상황을 디지털 이미지라는 가시적 형태로 표상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디지털 이미지 대신 실제 장면이 들어갔다면, 2D 영화였다면, <당신이 깨어난 아침>이 지금의 결과물과 같은 영향력을 주었을까? # 재난을 재현하는 매체와 이미지 사실을 증명하는 것보다, 리얼리즘 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 작품은 관객이 받아들일 작품의 영향력을 답으로 고려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운동에 동참하세요" 문구가 드러내듯 평화와 비핵화 캠페인에 대한 선명한 의도를 지닌 작업이다. 그러나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전쟁이나 재난의 참혹함을 전시하여 관객에게 충격효과를 통해 마음을 움직이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게하는 방식을 택했다. 제작진이 선택한 디지털 이미지 활용이라는 전략은 촬영할 수 없었던 지점을 시각화해주는 수단이자, 거짓말 같은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 인위성이라는 한계를 오히려 현실 자각의 도구로(거짓말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당신에게도 이 허구가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미학의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사용한 사례였다. 이 작업은 다른 층위의 질문을 연결한다. (하와이 원주민의 지혜가 답이 될 수 있는가하는 순진한 결말은 내용에 대한 것이고, 매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기에 여기서는 제외하겠다.) VR 매체 자체가 지닌 기술이 재난과 같은 사건을 다룰때 이미지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D 영화처럼 타인의 이야기로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닌 VR이 강조해온 몰입을 통한 “현재성"과 “경험”이 내 이야기로 느끼게 해준다면 윤리적 문제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누군가의 절망과 재난을 가상 체험한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걸까? 또한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디지털 이미지가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당신이 깨어난 아침>의 경우는 VR로 그 가능성을 선보였다. 왜냐하면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느낀 공포는 실제였기에 ‘가상 현실'이라는 매체를 통과하는 이야기를 제작진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리하게도 참혹함을 전시하지 않고 들려주는 방식으로 재난의 공포를 관객에게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된 논쟁인 재난의 이야기가 아름다워도 되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 마무리하며 영화사의 주요한 변화는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것이었다. 때론 예술가들의 미학적 측면이 기질을 발휘한 순간들이 있지만 진보의 동반자로서 영화를 이끈 데에는 기술을 사업으로 활용한 이들이 있었다. 관객의 지지와 거부가 영화사의 진행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고 상업적 생존 능력에 따라 영화는 발달되어 왔다. VR이 배급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3D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VR이 꼭 영화가 되어야 하는가? 재간의 산물로 남지 않더라도, 특정한 이야기에 맞는 매체로 ‘새로운 시각화 수단’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남는다. 어떤 이야기는 영화에, 어떤 이야기는 시리즈로 나누어 가는 것이 더 어울리듯 어떤 이야기는 VR에 맞는 것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 것이 이미지의 윤리적 문제 모두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특정' 이야기에는 적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리스트가 완벽한 영화를 뽑는 것이 아니듯 내게는 이 작품이 다큐 미학의 새로운 형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이미지 매체의 윤리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작품이었다.
< 프리 가이 >가 이 자리엔 어울리지 않는 영화란 걸 안다. 어떤 영화는 시간과 함께 익어가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프리 가이>가 2021년을 기억할만한 베스트 영화로 꼽힐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건 라이언 레이놀즈의 원맨쇼에 기대어 가는 기획 상품이고, 메타버스와 게임이라는 유행하는 소재를 적당히 버무린 명백한 킬링 타임 무비다. 그럼에도 <프리 가이>를 리스트에 꼽은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앞으로의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의 지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때론 의도나 목적과 무관하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의미 있는 정보들이 묻어나는 경우가 있다. 시대의 반영일수도 있고,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한 타이밍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프리 가이>에서 미래의 영화, 아니 영상콘텐츠에 대한 일종의 잠언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미세한 오해의 균열에 기대어, 대중오락의 즐거움이라는 영화의 의도와는 별개로 작동할, 적극적인 오독을 해보려 한다. 열 편 밖에 허락되지 않는 사사로운 리스트의 제일 마지막 자리에, 걸맞지 않은 옷을 입힌 것 같은 <프리 가이>를 굳이 끼워 넣은 건 이런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요약하자면 앞으로 영화는(혹은 영화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킬링타임 그 이상, <프리 가이>의 겉면과 속살 두 개의 트랙을 분리해서 접근하겠다. 우선 <프리 가이>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프리 가이>는 적당한, 꽤 영리한 면이 있는 킬링 타임 무비다. 게임 기업 수나미의 CEO 안톤(타이카 와이티티)은 젊은 개발자 밀리(조디 코머)와 키즈(조 키어리)의 인디 게임 ‘라이프 잇셀프’의 코드를 몰래 훔쳐와 히트작 ‘프리시티’의 베이스를 구축했다. 이에 분노한 밀리는 ‘프리시티’에 접속해서 자신들의 코드를 훔쳤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반면 키즈는 수나미에 입사해 꽤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기로 한다. 그 와중에 마음 한 구석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키즈는 나름의 소심한 저항으로 개발자가 아닌 불량 코드를 처리하는 서비스 팀에서 근무 중이다. 여기까지가 주인공 가이를 중심으로 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다. 어느 날 프리시티의 NPC 중 하나인 가이(라이언 레이놀즈)에게 인공지능으로서의 자아가 싹트고, ‘프리 시티2’가 발매되면서 삭제될 위기에 처할 NPC들을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는 게 대략의 줄거리다. 혁명이라는 게 조금 과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프리 가이>의 뼈대를 이루는 서사는 디지털 AI들의 혁명 서사라 해도 무방하다. 그걸 다시 인간인 밀리 중심으로 뒤집어 놓은 게 <프리 가이>의 표면적인 내용이다. 가이는 밀리를 보자마자 자아를 가진 AI로서 각성하고, 숨겨진 소스 코드를 찾으려는 밀리는 가이의 도움을 받아 목적을 달성한다. 둘 사이에는 로맨스 비슷한 기류가 형성되지만 가이는 자신이 인공지능 NPC임을 자각한 후엔 밀리와의 연애보다 ‘프리 시티’의 생존을 위해 매진한다. 상큼할 정도로 쉽게 사랑을 떠나보낸다고 해도 좋겠다. <프리 가이>가 메인 플롯으로 삼고 있는, 남녀 주인공인 세계를 소멸시키려는 악당과 맞서는 과정은 흔한 어드벤쳐 영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다. 오락영화로서의 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건이나 볼거리는 대부분 이 쪽에 배치되어 있지만 이 부분은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다. 공식대로 익숙하게, 정신없게 사건을 쏟아 붓고, 볼거리를 전시하고, 테마파크처럼 즐기는 전형적인 상업영화, 아니 (수다스럽고 정신없는 가운데 유쾌한) 라이언 레이놀즈의 영화다. 그렇게 식상해 보이는 <프리 가이>는 온전히 가이의 시점에 맞춰 재구성해보면, 마치 금지 구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가이의 체험처럼 의외의 세상이 열린다. 의도를 초과한 속살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인공지능인 가이는 디지털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다. 하지만 영화 속 가이의 드라마는 대부분 에테르 월드(물리 세계)의 시점으로 재현된다. 동물을 의인화 한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의인화가 동물의 외양을 빌린 사람의 이야기 인 것처럼, 디지털 세계의 주민인 가이 역시 물리 세계의 사람과 같은 사고, 행동 양식, 관점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것이 <프리 가이>가 재미난(어쩌면 그저 그러면서도 안전한) 오락 영화로 소비될 수 있는 이유다. 헌데, 이 빤하디 빤한 전개를 온전히 디지털 세계의 관점에 놓고 상상해보면 의외로 섬뜩하고 무거운, 묵시록의 냄새가 난다. <프리 가이>의 초반부는 디지털 주민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 트루먼 쇼 >(1998)처럼 보인다. 만들어진 세상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NPC가 자아를 가지게 되었을 때, ‘프리 시티’는 안식처가 아닌 감옥으로 변모한다. 가이는 가짜 세상에서 탈출해야 한다. 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물리 세계 주민의 사고다. ‘프리 시티’의 주민들은 없어질 프리 시티 대신 ‘라이프 잇셀프’로 떠난다. ‘라이프 잇셀프’는 밀리와 키즈가 만든 성장형 게임으로, 비교한다면 <동물의 숲>과 유사한 장르라고 보면 되겠다. 다만 차이는 인공지능을 성장시키고 플레이어가 이를 관찰하는 게임으로 짐작된다. 세계가 개발자에 의해 창조되었고 자신들이 인공지능 데이터라는 사실을 각성한 NPC들은 더이상 ‘프리시티’에 머물 수 없다. 의아한 건 주어진 역할과 틀에 박힌 세계에서 해방된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장소가 플레이어의 관음적인 관찰을 허용하는 무대, ‘라이프 잇셀프’라는 사실이다. ‘라이프 잇셀프’가 진정 디지털 주민들이 바라는 낙원일까. 게임으로서 ‘라이프 잇셀프’는 완벽한 관음의 세계다. AI가 성장하는 모습을 아바타의 모습을 한 플레이어가 관찰하는 구조다. 마치 신이 인간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아니 플레이어를 관찰자적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보면 데이터를 축적한 AI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고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자아를 각성한 AI들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그들이 처음부터 관찰 당하는 걸 기꺼워하는 존재로 태어났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AI들의 기반 역시 어디까지나 물리세계의 데이터이니 그럴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라이프 잇셀프’는 실로 끔찍한 감시의 감옥이다. 차라리 ‘프리 시티’에서는 관찰당하고 있다는, 소비되고 학대 받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으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프리 시티’의 NPC들이 플레이어에게 공격당하는 것이 끔찍하다는 것 역시 인간(플레이어) 편의의 시각이다. 그건 마치 아직 자아가 부여되지 않은 로봇을 밀치는 걸 보고 학대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프리 시티’가 학대하는 대상은 NPC가 아니라 도리어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는(그러한 제한적 허용이 쾌락의 본질이긴 하지만) 플레이어들이다. NPC들의 진짜 지옥은 원치 않는 자아를 던져놓고 거대한 실험장에 던져놓은 것과 다름없는 ‘라이프 잇셀프’가 아닐까. 잔혹하고 거대한 실험장. 해맑은 디지털 묵시록이 던지는 제언 인간의 관점에서 본 <프리 가이>는 디지털 주민들의 <트루먼 쇼>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건 < 매트릭스 >에 가깝다. 가이는 먼저 깨어난 존재고, 아직 각성하지 못할 이들을 이끌고 곧 사라질 디지털 세계를 구해야 한다. ‘프리 시티’가 사라진 후 탈출 장소로 삼은 곳은 ‘라이프 잇셀프’이지만 이곳 역시 인간들(플레이어)의 통제를 받는 디지털 세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 이건 탈출이 아니라 수평이동이다. <매트릭스> 1편에서 네오가 인류 모두를 구할 각성자로 등장했지만 2,3편이 이어지며 네오 역시 디자인의 일부였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과 가이의 처지는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매트릭스> 속 아키텍트나 오라클처럼 의도된 디자인은 아니었다는 거지만 영화는 이를 마치 자유의지의 개척인양 포장한다. 그 탓에 ‘라이프 잇셀프’가 마치 이상향인 것같은 혼선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라이프 잇셀프’는 디지털 사회에 대한 묵시록이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 세계를 거울 삼아 창조되었다면, 반대로 이제 디지털 세계의 미래는 현실 세계의 거울이 될 수 있다. 다만 디지털 유토피아가 펼쳐내는 이 묵시록은 해맑고 화사하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프리 가이>는 인공지능 NPC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들은 물질 세계로 넘어올 수 없다. 가상현실을 다루는 숱한 영화들, 예컨대 <트론>이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은 인간의 관점에서 정신(이라고 불리는 어떤 정보들)이 가상현실 속에 구축되는 상황들을 다룬다. 이것은 세계의 확장에 대한 이야기다. 물질과 디지털 사이에는 모종의 통로가 있고, 어떤 관점에서는 이 통로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NPC로 관점을 옮긴 <프리 가이>는 확장보다 분리를 선택한다. 분리되었기에 이들을 향한 관음이 허락된다.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언젠가 NPC들의 의식이 더욱 개발되어 물질 세계로 넘어오기를 욕망할 수도 있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을 향한 관음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일단 분리된 세계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행복과 해방이라고 포장한다. <트루먼 쇼>에서 문제가 되었던 끝없는 관찰은 이제 갓 싹을 틔운 디지털 세계에서는 오히려 세계의 토대이자 본질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가이는 < 아바타 > 속 대사 “나는 당신을 봅니다”를 반복한다. 이것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의식이 바라보는 것(정보)들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한 강박적인 신호로 읽힌다. 여기가 물질을 기준으로 한 세계인지, 디지털 정보를 토대로 한 세계인지는 더 이상 ‘진짜’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사실 그에 대한 답은 친구인 버디(릴 렐 하워리)가 대신 제공한다.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이에게 버디는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순간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프리 가이>는 가상 세계를 현실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히 분리된, 또 다른 현실로 인식시킨다. 나는 <프리 가이> 속 NPC들이 자신의 존재와 쓸모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영화의 관계를 발견한다. 영화 역시 한없이 현실에 가까워지기를 욕망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때 영화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하나는 현실의 특정 순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힘을 빌려 특정 상황들을 잘라 이어붙이는 것이다. 전자가 사실주의, 후자가 표현주의의 씨앗이라고 봤을 때 <프리 가이>는 마치 사실주의 영화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현실을 논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인식. 디지털 정보로 이뤄진 인공지능 NPC들은 디지털 세상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를 물질세계와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도달한 명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가 현실을 자아냈던 방식,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진실’이다. 디지털 세계도 현실이라는 선언.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사건들을 연결하고 연쇄시켜 매끈한 상황을 창조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모든 사건들이 카메라에 담길 수는 없고, 반드시 누락되는 것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떤 영화들은 이 누락된 것들에 시간과 애정을 쏟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무언가를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잉여의 비어 있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사건 바깥의 시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때론 한 장면의 시간을 길게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원초적이고 순수한 움직임의 합주를 통한 마술적 매혹을 선보이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건 영화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물론 해방된 영화가 현실로 넘어오는 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그림자를 환기시키는 거대한 은유에 가깝다. <프리 가이>가 흥미로운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일정부분 영화가 현실을 담고자 했던 과정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프리시티’라는 게임의 목적을 기준으로 본다면 가이를 비롯한 NPC의 삶은 잉여 정보이자 데이터의 낭비다. 가이가 아침에 일어나 금붕어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창가에 서서 블라인드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행위는 플레이어들에게 하등 쓸모없는 작업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쓸모없는 데이터들이 모여 온라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곳은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창조된 또 하나의 세계이고, 그 위에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는 것에 가깝다. 선글라스를 쓰면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점수와 아이템들이 작동하는 것이 증강현실처럼 그려진다. 다시 말해 <프리 가이>의 디지털 세상은 게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창조된) 세계 위에서 플레이어들의 행위가 더해지는 방식이다. 그곳이 또 하나의 진실, 또 다른 세계라면 응당 사건(플레이)에 종속되지 않은 시간과 행위들이 존재해야 하고, <프리 가이>의 이야기는 바로 그 잉여로운 정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디지털 인공지능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이 정보의 조합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 20세기 포토그래픽 시네마들이 그토록 복원하려고 했던 사진적 영상의 모티브가 디지털 세계에서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꽃을 피운다. 물론 <프리 가이>는 거대한 철학적 기반으로 사유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서 예기치 않은 균열을 발견한다. 어쩌면 영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나의 위기감으로부터 시작된 강박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초과하여 멋대로 보고 싶은 것에만 돋보기를 들이민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오늘의 나는 <프리 가이>의 화사한 묵시록에서 공포와 가능성을 동시에 느낀다. 20세기 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앞둔 시점에 나온 <매트릭스>가 묵시록에 관한 온갖 코드들을 믹스해 창조해낸 비전을 선보였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프리 가이>는 해맑아서 더 섬뜩한 방식으로 디지털 세계의 독립을 선언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메타버스라는 용어의 핵심은 에테르와 디지털의 연결에 있다. 영화의 안과 바깥도 그런 식으로 연결될 것인가. 영화가 영화인 이유는 어떤 이유로든 스크린이라는 견고한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연결된다면 영화의 자리는 어디가 될 것인가. 게임을 비롯한 여타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벽에 구멍을 내어 에테르 월드에 접속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영화이미지, 영화적 체험, 영화라는 장소는 어떤 방식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영화의 교차점이자 분기점이며 새로운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불안하고 무섭고 동시에 설렌다. ps. 한 가지 첨언하자면, 미래의 영화가 어찌 되든 솔직히 상관없다. 그건 그 때의 일이다. 가이의 식상한(그래서 언제나 올바른) 대사를 빌리자면, “좋은 날 말고, 최고의 날”은 언제나 오늘이니까. 당장은 오늘의 영화를 즐기는, 즐길 수 있는 걸로 족하다. 다시 돌아와 그게 굳이 <프리 가이>를 사사로운 리스트에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프리 가이>를 놓고 이런 식의 망상마저 펼칠 수 있는 게 영화를 말하고 쓰는 작업의 특권이자 즐거움이라 믿는다.
< 대괴수 용가리 >(1967)는 한국영화에서 거의 처음으로 우주적 시점이라고 할만한 것을 보여준다(정확히 말하자면 <대괴수 용가리>가 등장하던 그해 동시도착한 < 우주괴인 왕마귀 >와 함께). 검은 화면에 반짝이는 별, 카메라의 긴 패닝, 이윽고 보이는 푸른 별 지구. 이곳은 우주이다. 곧이어 정체불명의 대규모 폭발을 조사하기 위해 신혼여행지에서 차출된 우주비행사 광남이 지구에 대한 조망 속에서 사건의 발생 장소(핵실험이 일어난 장소)를 정확히 찾아내고, 버섯구름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지면의 균열을 목격한다. 한편 이 균열에서 시작된 움직이는 지진, 괴지진의 발생지점과 이동경로는 서울에 차려진 괴지진대책본부의 대륙 지도에 투명하게 드러난다(이 지도는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유리에 그려져 있다). 중국 서북부(영화에 명시되기는 오비리아라는 가상의 대륙)에서 발생한 괴지진은 황해도를 지나 시시각각 남하해오고, 휴전선 부근에서 솟아나 판문점을 부순다. 괴지진의 정체가 밝혀진다. 용가리의 현현. 이윽고 용가리는 인왕산에 우뚝 솟아 전모를 드러내고 중앙청과 서울시민회관, 서울시청과 남산에 이르는 서울의 중심부를 초토화시키고 급기야 한강다리를 파괴한다. <대괴수 용가리>의 이 지정학적 상상력은 이 영화를 한국전쟁과 그 결과 형성된 이 분단국가의 강렬한 냉전적 상상력의 우화로서 읽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6.25 전쟁 때 북한군 침공의 육로 코스 그대로” 1) 를 밟고 있는 용가리는 이를테면 “괴수 김일성”과 유사해 보인다. 2) 1967년의 시점에 중국 서북부에서(이 지역은 중국이 1964년과 67년에 원폭과 수폭실험을 행하고 있는 장소이다) 발생하여 거듭되는 남하를 거쳐 판문점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서울을 파괴하는 괴수라니! 그런데 이 괴수는 한국영화사 안에서 예외적 형상이지만, 피폭괴수물이라고 할 수 있을 일종의 ‘공통’ 장르의 소산이기도 하다. 만약 이 공통 장르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용가리라는 형상이 지닌 공통성과 특수성은 무엇이며 그것은 각각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괴수 용가리>는 동시기의 일본 괴수영화 <대괴수 가메라>(1965)로부터 포맷과 기술을 빌려왔다. <대괴수 가메라>는 당시 도호의 고지라 시리즈에 대항하여 다이에이가 시도했던 괴수영화였다. 고지라 시리즈의 1960년대적 전회에 발맞춰 보다 아동친화적인 성격을 띄고 있던 이 시리즈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1960년대 중후반 다이에이의 달러박스로 기능하였다. 오해하지 말 것. 나는 지금 <대괴수 용가리>가 일본 괴수영화의 일종의 아류작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향관계가 보여주는 바는 피폭괴수물이라는 장르에 내재된 공통성에 다름 아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대괴수 용가리>는 당시 일반적인 한국영화보다 훨씬 고가로 해외시장에 팔렸으며, 일본을 거쳐 이런 류의 B급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배급한 대표적인 프로덕션 중 하나였던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 배급으로 1969년이라는 빠른 시기에 미국의 지역 방송국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Yongary, Monster from the Deep 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이 영어 버전은 현재 남아있는 <대괴수 용가리>의 유일한 완전판이기도 하다. 과연, 1950, 60년대 미국과 일본의 흥행장에는 방사능 피폭괴수라고 할만한 것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이 영화들은 지독히도 닮은 패턴을 고집하는데 시작은 항상 동일하다. 지구 어디선가 핵실험이 있고 방사능에 피폭된 거대 생명체가 등장한다. 이를테면 거대한 개미떼(<뎀! Them!>(1954)), 거대한 독거미(<타란튤라 Tarantula>(1955)), 거대한 문어(<놈은 바닷속으로부터 왔다 It Came from beneath the Sea>), 거대한 메뚜기(<비기닝 오브 디 엔드 Beginning of the End>(1957)), 거대한 파충류 등등. 이 괴수들은 한결같이 도시로 향하고, 그들의 습격으로 도시는 초토화된다. 이런 식의 피폭 괴수영화의 시작은 1953년 레이 해리하우젠의 스톱모션으로 완성된 거대 공룡 리도사우르스가 등장하는 < 심해로부터 온 괴물 The Beast From 20000 Fathoms>이었다. 이 영화의 성공은 곧 무수한 피폭 뮤턴트들을 양산해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괴수들 중 가장 성공적이고 지속적이며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어낸 것은 일본의 <고지라 ゴジラ>(1954)였다. 2016년의 <신 고지라>에 이르기까지 28편의 시리즈를 낳은 이 영화는 모스라, 가메라, 라돈, 킹기도라 등의 수많은 일본산 괴수들이 출몰하게 될 특촬영화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고지라>의 성공은 일본 내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영어 편집 버전은 미국과 유럽에서 또한 흥행에 성공했으며, 그 여파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고지라> 이후 일본 괴수영화는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일본영화가 되었고, 고지라는 서구에서 성공한 일본산 서브컬처의 첫 번째 ‘캐릭터’가 되었다. 이 장르의 역사를 상기해보건데, <대괴수 용가리>라는 피폭괴수물은 약간의 지체를 두고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등장하던 당시 미국의 피폭괴수물은 이미 그 장르적 사이클을 소진했다. 일본의 경우 ‘고지라’ 시리즈는 1960년대 이후 극적인 성격전환을 거쳤다. 무시무시한 파괴의 괴수 고지라는 <킹콩 대 고지라 キングコング対ゴジラ>(1962)에서 외래의 것(킹콩)에 대항하는 내셔널한 것으로서 자리매김되었으며(고지라는 일본 국회의사당 꼭대기에서 미녀를 희롱하는 킹콩과 맞서 싸운다), <3대괴수 지구최대의 결전 三大怪獣 地球最大の決戦>(1964)에 이르러서는 우주 최강의 괴수 킹키도라에 맞서 지구를 구하는 정의의 사도, 아이들의 ‘친구’로 변모하였다. 이 피폭 괴수영화들이 1945년 이후 핵이 초래한 ‘불안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 영화들의 등장 이전까지 유일한 괴수영화였던 <킹콩>(1932)이 원시의 섬에서 온 거대 유인원이 뉴욕을 초토화시킴으로써 제국-문명-도시가 식민지-야만-원시에 대해 갖는 공포와 불안을 상징화하는 것이었다면, 1950년대산 피폭괴수 영화들은 핵의 공포를 시각화한다. 이들은 바다 혹은 강 위로, 사막에서, 산꼭대기에서 불현듯 나타나는데, 이 급작스러운 출현이야말로 핵의 위협의 편재성(omnipresence)에 관한 시각적 대응이라고 할 만하다. 동시에 이 괴수가 각각의 개별국가의 영토 내로 들어와서 구체적인 장소를 점유할 때 그 장소의 역사성과 현재성이 불현 활성화된다. 이를테면 제국, 식민지, 전쟁, 냉전의 현재. 종종 이 영화들에 관한 해석이 개별국가의 역사적 상흔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를테면 <고지라>에 관한 비평들에서 고지라가 전전의 공습(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폭격까지를 포함하여)을 감행하는 미군이자 그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전쟁의 사자’들의 망령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은 장소의 역사성이 이 폐허의 풍경 위에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대를 겹쳐놓기 때문이다. 고지라와 용가리가 미국의 피폭괴수에 비해 훨씬 더 역사적 기억의 활성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간단히 말해 도쿄와 서울이라는 장소가 전쟁의 장소였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를테면 <심해에서 온 괴물>의 리도사우르스가 뉴욕을 공격할 때, 그 풍경은 어디까지나 미래시제의 일에 불과하지만(미국 본토에서 전쟁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폐허가 된 도쿄와 서울의 풍경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불러온다. 따라서 이 일본과 한국의 괴수들이 역사적 기억 자체가 가지고 있는 훨씬 더 다의적인 복잡성과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피폭괴수는 두 개의 테크놀로지컬한 계보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괴수들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면(리도사우르스로부터 시작되는 저 수많은 피폭괴수들의 위대한 창조자는 레이 해리하우젠이다. 그는 <킹콩>의 창조자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수제자였다) 일본의 경우, 모형을 만들고 이를 사람이 뒤집어씀으로써 해결하는 방식, 즉 수트형 괴수로 이를 구현하고자 했다. <고지라>의 제작자들이 대규모 자본의 노동집약적 산물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포기하고 수트형 괴수로 전환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에, 특히 <고지라>를 만들어내고 있는 영화사 도호(東宝)에 축소된 공간 및 사물의 구현, 즉 미니어처와 이것들의 정교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조정 기술의 풍부한 집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 전쟁 프로파간다가 해군의 대규모 공중전 재현으로 넘어갔을 때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미니어처와 조정 기술이었다. 1942년 진주만 공격 1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하와이 말레 해전 ハワイ・マレー沖海戦>은 이 기술의 놀라운 성과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1500평방미터의 수영장에 6백분의 1의 미니어처를 통해 재현된 진주만 공습은 전전 일본 최대의 공중 스펙터클을 선사했으며, 대동아공영권 최대의 히트작이 되었다. 이 실제를 방불케하는 스펙터클을 창조해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이후 고지라의 창조자가 될 츠부라야 에이지(円谷英二)를 필두로 한 도호의 특수촬영 기술진들이었다. 전전 일본 해군 프로파간다 영화의 기술적 역량 속에서 만들어진 <고지라>는 미니어처에 기반한 ‘리얼’한 공간을 창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괴수의 무시무시한 난동을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다. 이 순간에 발명된 수트형 괴수와 미니어처 촬영은 일본 피폭괴수와 미국 피폭괴수를 결정적으로 차이지운 핵심 표상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스톱모션의 움직임은 수트형 괴수, 인간의 동작이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고지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비해 간헐적이고 단속적이며 부자연스럽다. 유인원(킹콩)에서 파충류(리도사우르스)로의 이동이 낳은 지평, 그 형상이 보유하는 인간으로부터의 거리만큼 더 배타적인 타자성의 영역으로 이동해간 이 형상의 ‘낯섬’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인간적 움직임과의 거리에 의해 배가된다. 킹콩의 직접적인 후예로서 리도사우르스는 비록 단독의 거대괴수이지만 그 타자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여타의 군집 괴수들, 이를테면 개미, 거미, 메뚜기 등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 일본 특촬 괴수들의 눈동자가 강조된 눈은 이들로부터 어떤 ‘감정적’인 것을 유추하도록 만든다. 종종 그들은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당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 인간적인 특징이야말로 고지라에게 그토록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미국영화의 괴수들처럼 명백한 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관객인 우리는 그들이 결국 인간에 의해 제거되는 순간에, 그리하여 드디어 재난이 수습되고 안정이 찾아오는 순간에 안도하지만, 동시에 통쾌함보다는 마음이 상함을 느낀다. 고지라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또한 연민과 동정, 심지어 희망의 대상이다.(야마네 박사는 피폭을 ‘견뎌낸’ 고지라를 연구함으로써 ‘인류’의 미래에 공헌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짧은 희망을 피력한다). 고지라의 형상으로부터 유래된 이 양가성은 정확히 1950년대 핵을 둘러싼 강력한 프로파간다, 파괴와 절멸의 무기로서의 핵과 평화와 번영으로서의 핵이라는 저 가상적 분할선을 반영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언명 ‘평화를 위한 핵’이라는 가상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파간다일 것이다. 그것은 핵 유토피아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내면서 욕망에 어필하였다.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1960년대 이후 원전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완성되는 것과 맞물려 미국의 파괴로서의 피폭괴수가 사라진 이후에도 일본 피폭괴수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원전국가 일본으로의 이동 속에서 특촬 괴수들은 점점 더 인간적 형질이 배가되어갔다. 심지어 이들은 가족을 건사하고(미니라), 아이를 구하고(가메라), 지구를 지킨다(고지라).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67년의 <대괴수 용가리>는 이 순간 도달한 한국에서의 핵의 관점을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피폭괴수의 계보 속에서 무기로서의 핵의 파괴성을 일별하는 한편, 그럼에도 그것이 능히 조절가능하다는 믿음을 설파한다. 과학입국을 선언한 한국의 어린 남자아이는 빛이 나오는 기구로 용가리를 춤추게 한다. 트위스트풍으로 편곡된 아리랑에 맞춰. 그리고 이 믿음 위에서 알다시피 이제 곧 한국 역시 원전국가로 이동해갔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풍요와 번영의 핵 이미지를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수용하였다. 조절가능한 핵, 춤추는 용가리에 대한 믿음은 이곳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비록 1979년 스리마일섬에서, 1986년 체르노빌에서, 2011년 후쿠시마에서 파괴와 죽음의 무기/풍요와 번영의 에너지로서의 핵 사이를 긋고 있는 이 분할선이 핵 그 자체 안에서 이미 분할불가능한 것임이 그토록 파괴적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1) 이영미, 『광장의 노래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인물과사상사, 2018, 119쪽. 2) 김소영, 『근대성의 유령』,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0, 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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