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
- 감독
- 김주희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심형래, 김문희, 최길호, 여운계, 이성웅, 한인수, 박윤배, 김민순, 배광현, 김용학, 길달호, 최재호, 손전, 김경란, 유명순, 권일정
일단 <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2023)를 골랐다. 이 영화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 룸 넥스트 도어 >(2024) 사이에서 몇 초 망설였는데 그래도 빅토르 에리세의 신작을 넣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에리세의 영화를 내 리스트에 넣을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까. 어떤 때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스페인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파블로 베르헤르의 < 로봇 드림 >(2023)인데, 아직 쌍둥이 빌딩이 건재했던 1980년대 뉴욕을 기가 막히게 재현한 애니메이션이다. 거기에 절절한 로봇과 개가 주인공인 멜로드라마를 넣어서. 오로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한 마법이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오시야마 키요타카의 < 룩백 >(2024)이다. 창작과 창작자에 대해 깊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짧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운 예술가 영화다. 예술가 영화도 두 편이 더 있다. 하나는 위에 언급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 다른 하나는 모나 아샤쉐의 < 리틀 걸 블루 >(2023)로, 감독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여러분이 프랑스어권 유성애자 여성작가의 피학적인 오토 픽션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멀리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그런다면 여러분은 마리옹 코티아르가 펼친 최고의 명연 하나를 놓치게 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냐고? 그렇긴 한데 그와 상관없이 감독은 코티아르에게 자기 어머니 역을 시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해가 간다. 모녀 이야기는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조지 밀러, 2024)의 도입부를 여는 중요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꼭 필요한 무언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2015)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주게 재미있는 액션물이고, 이 영화의 실망스러운 흥행성적은 관객들이 뭘 모를 때가 많다는 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알려준다. 하긴 관객들은 개봉 당시 존 카펜터의 < 괴물 >(1982)도 대충 넘겼다. 그냥 그렇다고. 로즈 글래스의 < 러브 라이즈 블리딩 >(2023)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필름 누아르로, 몸과 섹스와 퀴어성에 대해 정말 신나고 뻔뻔스러운 장면들을 엮어대는 오락물이다. 아, 그리고 재미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하는 말인데, 션 베이커의 < 아노라 >(2024)와 모함마드 라술로프의 < 신성한 나무의 씨앗 >(2024)이 주는 재미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성노동자가 연결된 계급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 인디 영화와 마흐사 아미니 시위를 다룬 사회파 이란 영화가 이렇게 갑자기 대중적으로 (심지어 거의 고전 할리우드스럽게) 재미있어지면 관객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과는 별도로 재미있는 영화들이 주는 즐거움을 주제의 무게나 구질구질함을 두려워하며 버릴 필요는 없다. 한국영화를 두 편 골랐다. 더 고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방에 종말론적 예언이 나팔처럼 울려퍼지고 있었지만 올해 한국영화를 보는 경험은 여러모로 즐거웠다. 그런 경험을 제공해준 영화가 주류영화가 아니었을 뿐이다. 올해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퀴어, 특히 여성 퀴어 영화들의 공습으로, 어떤 때는 네 편의 영화가 동시에 극장에 걸려 다들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당사자성 넘치는 사실주의극인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부터 올해 가장 뻔뻔스러운 길티 플레저인 < 히든 페이스 >(김대우, 2024)까지 다양하기도 했다. 세상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 때문에 드라마 < 정년이 >(2024)의 비겁함이 더 짜증난다. 오정민 의 < 장손 >(2023)은 거의 임권택 과 이두용 의 직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이러면 당연히 올드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텐데, 아니다. 이 영화도 ‘재미있다.’ 거의 1세기에 가까운 한반도의 역사를 가족사에 녹여낸 재주, 대한민국 가부장제에 대한 냉정한 고찰만큼이나 신기한 건 이런 주제로 신선한 재미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열 편 중 아홉 편은 호오도를 떠나 대중적으로 매우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고른 영화가 남궁선 의 < 힘을 낼 시간 >(2024)이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유로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다섯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팝 아이돌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수없이 이야기하는 거 같은데,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면 전보를 쳐라’라는 옛 할리우드의 격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놓고 뻔뻔스럽게 교훈과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들은 많다. 전보로 전달한 텍스트의 다발과, 주제에 공감하는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결합한 결과물의 차이는 엄청나다. 당연히 ’공익영화’는 비하 단어가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영화가 그렇듯 좋은 공익영화와 나쁜 공익영화 그리고 그 사이에 걸쳐진 광대한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힘을 낼 시간>은 여러모로 일단 효율적인 공익영화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러닝타임 안에서, 선정적인 실제 사건의 구체적인 재현 없이 한국 연예계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이것만 해도 엄청난 성취인데, <힘을 낼 시간>은 이 모든 정보와 메시지를 다 담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매력적이다. 공익영화로서의 기능은 영화의 매력에 어떤 핸디캡도 되지 않는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이 영화의 다음 성취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케이팝이라는 장르에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물을 만들려는 시도는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초창기의 시도는 김기영 (동명이인이다)의 < 진실게임 >(2000)이다. 아마 더 이전 작품도 있을 거고 사실 여기서 정확한 경계선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그래도 20년은 더 됐다. 하지만 성공작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들 주저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들은 < 내일부터 우리는 >(윤성호, 2017), < 아이돌 권한대행 >(윤성호, 박현진, 2017), <탑 매니지먼트>(2022)로 이어지는 윤성호 의 시리즈들이다. 만드는 사람들의 아이돌 문화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개성적인 유머 속에서 조화를 이룬 작품들인데 이 작품들이 아이돌 스토리텔링의 주류가 된 적은 없다. 아쉽게도. 나머지는 대부분 성공보다는 실패로 기억된다. 그 중 가장 처참한 실패는 아무래도 드라마 <청춘시대 2>(2017)였던 거 같은데. 일단 이 시리즈는 왜 아이돌 이야기를 왜 굳이 거기서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건 여러모로 최악의 오타쿠적 선택이었다. <힘을 낼 시간>은 소위 ’망돌‘이라는 소재를 공유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청춘시대 2>와 반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장점이다. 일단 영화는 왜 이 영화가 ‘망돌들’의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아주 명쾌하고 당연한 이유를 갖고 있다. 주인공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세 주인공 중 망돌은 ‘파이브 갓 차일드‘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였던 태희( 현우석 )뿐이다. 여자 아이돌 그룹 ‘러브앤리즈’의 멤버 수민( 최성은 )과 사랑(하서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제법 히트한 노래도 한 편 이상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이 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더 먼저 떠올리고 제대로 정산을 못 받고 은퇴한 건 태희와 다를 게 없다. 하여간 이 셋은 전재산 98만원을 챙겨들고 제주도 여행을 오는데, 그만 첫날에 한 명이 사고를 내 돈 대부분을 날려버린다. 이 정도면 너무 어이가 없어 슬슬 웃음이 나오는 가학적인 블랙 코미디를 기대해 볼 만도 한 상황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얼마 전에 < 십개월의 미래 >(2020)를 만든 남궁선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보다 평화롭고 진지한 길을 간다. 세 사람은 귤 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자기들을 알아보는 케이팝 팬도 만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힐링’이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따분하게 들린다면 미안하지만, <힘을 낼 시간>은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치유의 과정에 대한 영화이고 여기에 진지하다. 이 영화에서 치유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게 쓰이지 않는다. <힘을 낼 시간>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의미로’ 머글스럽다는 것이다. 이 영화엔 다른 케이팝 아이돌 관련 작품들에서 쉽게 발견되는 징그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케이팝 아이돌의 친숙한 이미지를 따르고 그걸 페티시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부당한 노동 조건 속에서 시달리다 버려진 젊은 노동자들을 그린다. 이 영화가 정공 공익영화로 기능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 무지 재미없게 들리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은 대부분 대중적 재미가 풍부한 작품이다. 그건 일단 이 진지함의 정공법이 드라마에서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영화엔 더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오타쿠적인 선택 대부분을 피해가고 있고 일부러 아이돌 캐스팅도 하지 않은 영화인데도 여전히 아이돌스러운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대 장면 하나 나오지 않고 ‘가상의 아이돌 그룹 만들기 게임’에 집착하지 않으며 골수팬을 등장시키지 않는데도 영화는 부서진 홀로그램 조각처럼 케이팝 그룹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노력한 팬이라면 러브앤리즈 팬픽을 쓰는 게 가능할 정도다. 영화의 의도는 전혀 아니겠지만. <힘을 낼 시간>은 최선 또는 최악의 타이밍에 개봉한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정치 상황이 모든 이슈를 잡아먹었으니 개봉하는 영화에겐 타격이 크다. 하지만 뉴진스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사람들이 아이돌의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바로 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아이돌 팬들이 응원봉을 국회 앞에서 휘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 이 영화에 맞는 시기가 있을까.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사실은 우리는 서로가 필요 없어 알면서 서로가 이유 없이 그리울 뿐 - 크리스탈 티, 「낭만파A.I.」 나는 내가 어렵다. 어느덧 알람 없이 눈을 뜰 정도로 반복적인 주5일 출퇴근과 아침 공기가 몸에 익숙히 자리 잡았음에도, 그것만으로 나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령 근황을 묻는 이들에게 ‘직장인’이나 ‘회사원’이라는 말을 선뜻 건네는 대신, 이력서를 이곳저곳 찌르다 보니 기회가 닿아 어찌어찌 일을 하는 중이고 천만다행으로 장기 백수 타이틀은 면했으며 입에 풀칠은 하고 있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답을 하게 되는 식이다. 대답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사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결국 나의 태생적 기질에서 튀어나오고야 마는 저 대답의 자조적 뉘앙스가 듣는 이에게 작은 부담을 안겨 실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저 말이 치장된 겸손처럼 보여 이 사람은 모두에게 친절한 척하는 위선자라고 판단되는 것은 아닌가, 한편으로 간단한 질문에 간단히 답하지 않고 무언가 해명하는 사람 마냥 주절거리는 모양새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아가 나는 왜 이런 모습마저도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 대해 말하는 일은 내게 중대하게 다가오고 중대하게 여긴 바로 그 탓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고, 요즘 말로 하면 찐프피(INFP 100%)다. 갑자기 류현진 투수의 이야기를 다룬 책 제목이 떠오른다. 생각이 많으면 진다…… 졌다. 이런 기질은 ‘영화평론가’로서의 나에게도 예외 없이 들러붙어 있다. 공식 지면으로 불릴 만한 부산영화평론가협회를 통해 등단했음에도, 여전히 나는 나를 영화평론가로 소개하는 것이 어렵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청탁을 받은 뒤 오랜 시간 내적으로 씨름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해 그냥 곤란함을 드러내기로 했다. 다만 분명한 입장도 있는데, 먼저 직업으로서의 평론가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의 영화 평론계가 등단 이후 생계를 영위할 정도의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 길을 생계로 정했다면, 외부 강의든 메일링 서비스든 독자적인 지면 생성이든, 치열한 부가 활동으로 수익을 창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어떤 방식의 활동이든 기초가 되는 것은 ‘자기PR’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 시작도 못하고 멈춘다. 멋지게 자기 소개하는 능력이 내게는 부족하고, 부족한 능력은 부족한 욕구에서 온다. 커리어를 쌓는다거나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내게 뒷전이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겸손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를 소개해보라는 충고도 종종 들어왔지만, 그 사려 깊은 마음에 부응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고민은 언제쯤 확신이 될 수 있을까? 아직까지 분명한 것은, ‘1인분’의 문제가 내게 큰 동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고민이 ‘취미로서의 평론가’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이어진다. 세상에. 취미로서의 평론가라니.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나도 겁이 난다. 그런데‘-가’를 떼고 ‘취미로서의 평론’이라고 하면 조금 괜찮다고 느낀다. 내게는 행위 자체와 행위자라는 그 차이가 일단 중요한 것이다. 영화를 마주한 나의 그 비언어적 체험에 다가가고자 일단 적어내리고, 좀 더 가까워지고자 이 단어가 아닌 저 단어를 고르고, 때로는 영화를 보고 한 대 맞은듯한 저릿함을 표현하고자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대신 간명한 문장으로 아등바등 매듭지어보려는, 그 치열한 감탄과 반목의 과정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좀처럼 자신을 갖지 못하는 나에게는 항상 ‘1인칭’의 문제가 다른 무엇에 앞서는 것이며 그와 씨름하다 어떤 단계에 다다르고 나면 종종 뿌듯함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 더 분명해지고 싶다. 1인칭. 나만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남과 다른 나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나를 소개하고 개성을 뽐내는 것. 자신을 어필하는 과정에서 1인칭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단초가 된다. 타인에게 '나'의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 콘텐츠의 지배적 양식이 1인칭 시점인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여주는’ 일이란 이 사동적 표현이 담지한 대로, 무엇보다 내가 남을 의식한다는 역설을 전제로 한다. 너를 보는 나의 눈은 항상 너의 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종종 ‘나의 시선’ 대신 ‘나만의 시선’이라는 표현을 선택하는 우리의 습관은 그 자명한 사실을 강조한다. 나만의 시선. 나는 이 앞에서 종종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적에, 듣고 싶지 않았지만 사려 깊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기어코 듣고 말았던 한 마디를 떠올린다. “그래 알았어. 내 취향이야. (꺼져)” 각자의 취향이 넘쳐흐르는 동시대의 풍경은 코로나를 기점으로 무한히 확장되었으며, 이는 곧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의 동반사멸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를 문제라고 느끼는 불편함은 그 자체로 ‘나’의 고된 일상을 짓누를 뿐이니, 이 자리를 채우는 건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유튜브 알고리즘 서비스일 것이다. 어쩌면 뜻이 맞는 쪽으로 향한다는 취향(趣向)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하고 내 몸에 배어있는 냄새와 다름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취향(趣香)으로 고쳐읽는 편이 쇼츠와 릴스로부터 도파민을 수혈받는 이 시대에 더 그럴듯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내게 평론은 감정과 욕망을 늘어놓는 취향의 잔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과 욕망에 흠뻑 취하면서도, 대체 그 만족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혹시 그곳에 정반대의 그림자가 도사리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그 어둠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원천은 아닌지…… 비유컨대 평론은 빛과 어둠을 오간다는 점에서 고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나를 간섭하는 외부가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 기쁨이다. 이것이 분명하다. 더 분명히 하면, 이것이 나의 취미다. 아, 들려온다. 그게 무슨 취미냐, 취미란 그보다 가벼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레와 같은 성원이. 이런 취미의 자리는 하루빨리 ‘연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듯, 몇몇 이들은 내게 “대학원 안 가세요?”라고 묻거나, 처음 듣는 각종 영화 이론서와 철학서를 줄줄이 열거하기도 했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그 자리를 어색하게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응답하며 읽은 척하기도 했다. 미안합니다.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반대편에 있는 ‘애정’과 마주하며 그 과도함에 질식할 뻔하기도 했다. “이 영화 봤어요? 저 영화 봤어요? 그 영화 봤어요?” 혹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어디 가서 봤다는 소리 하지 마라!” …… 다시 고백한다. 미안합니다. 저 그 영화 본 적 없고, 이 영화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봤어요. 하지만 당신의 즐거움을 뺏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종종 뇌가 멈추거나 숨이 막혀 거짓말을 하는 나약한 관객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사과합니다. 맨눈의 감상과 두뇌의 관찰, 사적 일기와 시네마의 역사, 시네필리아와 학자의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내 모습을 보며 한 편의 영화를, 아니 인물을, 아니 얼굴을 떠올린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박종원, 1992) 속 한병태. 일찍이 인터넷 서핑에 익숙했던 나는 초등학교 시절, 좌우가 잘려나간 화면비와 일본어 자막이 달린 버전으로 이 영화를 만났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화질. 다행히 한국영상자료원이 박종원 감독과 진행한 복원 작업을 통해 이제는 깨끗한 화질 로 만나볼 수 있고, 나 역시 오랜 매혹의 정체를 얼마간 더듬거릴 수 있었다. 일그러진 화질의 복원과 함께 일그러진 얼굴이 복원되었다. 나는 이 영화를 틈이 날 때마다 주변에 추천하고는 했는데, 그들의 첫 마디는 모두 동일했다. “어, 홍경인 이다!” 그렇다. 우리는 영화 속 캐릭터 엄석대를 만나기 전에, 영화 바깥의 명배우 홍경인부터 만나는 것이다. 그는 무표정을 통해 엄석대가 된다. 방금 학교에 첫 발을 들인 한병태에게 급장 엄석대가 명령한다. “상고 머리, 이리 와 봐.” 하지만 서울 출신의 이 당돌한 녀석은 답한다. “할 말 있으면 쟤가 이리 와도 되잖아!” 처음 맞닥뜨렸을지 모를 저항 앞에서도, 엄석대는 상고머리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다. 엄석대의 침묵과 무표정은 고압적 언행 없이도 모두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그를 차별화하는 중심이 되고, 모르긴 몰라도 당시 엄석대를 연기한 홍경인은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홍경인은 메소드를 훌륭히 수행하며 엄석대가 된다. 이 세계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그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드라마적 주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 탓에 앞서 말한 것과 모순되지만, 나는 홍경인을 잘 모르는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거꾸로 홍경인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 엄석대다!” 다른 한편, 이름 모를 수많은 아역이 화면을 채운다. 얼마나 많냐고? 유튜브에 접속해 이 영화의 설명란에 ‘5학년 2반 아이들’이라는 역할로 얼마나 많은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시라. 여전히 나는 저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화면을 채운 그들의 뒤통수와 앳된 얼굴에서 발생하는 힘은 느낀다. 때때로 저 ‘5학년 2반 아이들’ 중 몇몇은 이야기의 감초가 되기도 하지만, (김영팔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이들에게는 서사의 국면을 뒤집을 만한 개별적 플롯이 없다. 더불어 이 아이들이 비전문 배우들이었을 것이라는 심증까지 더해지는데, 그러고 나면 이들에게 ‘연기를 잘한다’라는 관습적 평가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절정 부분, 새로 부임한 김 선생(“어, 최민식 이다!”)이 엄석대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그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대목이 다소 간지럽다고 느끼는데, 사이다 같은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의 노골성에 덧붙여, 아이들의 목소리가 소위 말하는 연극톤에 가깝기 때문인 것 같다. 진지한 대목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귀엽다고 느끼면서 흐뭇해지는데, 요컨대 드라마를 벗어난 리얼의 기습에 웃음이 툭툭 새어 나오고야 마는 것이다. 차라리 아이들의 말과 몸짓은 엄석대가 장악한 공기에 상쾌함을 불어넣는 매력적 실패에 가깝다. 서로 다른 얼굴을 마주한 한병태는 어쩔 줄 모른다. 그는 시종 고개를 떨구거나 주위를 둘러본다. 음악시간. 선생님이 풍금을 켠다. 다들 노래를 따라 부르지만, 한병태는 아이들을 둘러본다. 엄석대를 바라본다. 선생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갈 곳 잃은 눈길은 결국 음악 교과서에 머물 뿐이다. 그의 방황하는 시선은 말꼬리를 흐리는 목소리와 짝을 이루며 한병태의 얼굴을 완성한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청소 검사를 합격 받고자 엄석대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려는 그의 얼굴이 인상 깊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저 배우를 통해 원작의 인물들을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각기 다른 얼굴을 선연하게 포착하며 세계에 대한 직관을 심화한다. 불타버린 재와 같이, 어린 시절의 곤혹스러운 표정은 무기력과 공허로 변모해 어른 한병태의 얼굴을 뒤덮고 있다. 당시의 까까머리 아이들은 몰라볼 정도로 저마다의 직업과 풍채, 목소리를 가진 보통 어른이 되었지만, 김 선생의 매질로 추방되었던 엄석대는 단지 무성한 소문과 근조화환으로만 그 존재가 환기되며 진정한 신화가 되었다. 그 사이의 한병태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 뿐이다. ‘엄석대’ 이름 석 자가 적힌 화환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병태는 느지막이 자리를 뜬다. 힘없는 발걸음 위에 내레이션이 얹힌다. “… 내가 사는 오늘도 여전히 그때의 5학년 2반 같고, 그렇다면 그는 어디선가 또 다른 급장의 모습으로 5학년 2반을 주무르고 있을 게다.” 우수와 권태에 젖은 한국영화사의 남성이 (또) 완성되는 순간이다. 뚜렷한 자리 없이 곤혹스러움으로 세계를 지탱하고 다시 보게 하는 한병태가 주인공이라는 점은 퍽 인상적이다. 그의 곁에는 김영팔이 그때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함께하지만, 여전히 한병태는 방금 전학 온 학생처럼 쭈뼛거린다. 그는 김영팔과 5학년 2반 시절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대신, 입을 닫는 쪽을 선택한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김영팔은 과거에서 시간 여행을 한 듯 그때 그 얼굴로 이곳에 있는데, 용의주도한 캐스팅이 암시하듯 한병태는 30년 전 김영팔의 해맑은 얼굴을 보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동이 틀 때까지 침묵을 지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갖은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항상 곁을 함께했던 김영팔과의 재회도 그에게는 고민거리였던 것일까? 물론 한병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하나의 낯섦과 충돌을, 나아가 변화를 마주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는 대화를 통해 과거를 갱신하는 대신, 적당히 견딜 만한 자신의 정서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선택을 지지하기라도 하듯, 우연히 엄석대를 마주치는 원작의 결말 대신 그의 존재를 간접화하는 방식으로 중년 남성 한병태의 비극적 파토스를 한 층 강화한다. 그렇게 한병태의 세계는 굳세어진다. 자기만의 정서로 침잠하는 한병태를 보면서, 이상하지만 자주 영화를 보고 가끔 쓰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언제부턴가 “영화는 이제 재미없다”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꺼내고 다녔다. “나는 시네필이 아니야”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모종의 관객과 나를 구분하는 오만함을 부리기도 했다. 나아가 “영화 보다가 인생 망했다”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뒤 “영화를 진짜 좋아한다는 것은 뭘까?” 하는 관념에 빠지면서 진짜 망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몇 번 망한 적이 있다. 언젠가 어떤 영화글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이 쓴 것 같은” 글이 좋다고 답한 적이 있다. 요즘따라 떠오르는 말이다. 과잉정보의 시대에 사전지식 없는 관객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연구자와 평론가와 시네필과 직장인 모두 한 편의 영화 앞에서 벌거벗은 관객이 된다는 공상에 자주 빠진다. 이와중에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하나 둘 극장이 사라지면,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도 사라지겠지. 그렇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가 원칙 없이 상영관과 방구석, 스크린과 모니터, 소셜미디어와 극장 로비에서 환멸과 행복을 오고 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평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용을 쓰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내가 어렵다. 그래서 네가 궁금하다. 호기심과 질문을 던지는 일이 도박에 가까운 시대라고 느끼지만, 그럴수록 네가 궁금하다. 물음표를 껍질로 두른 확신의 언어가 난무하는 탓에, 네가 궁금하다. 영화 평론은 애정과 연구만을 결과로 남기는 양자택일의 바벨탑이 된 걸까? 모르겠다. 나는 이리저리 치이는 당구공이 되어 어디론가 오갈 뿐이다. 여전히 영화가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 홍상수 )이라면, 영화를 닮은 그 몸짓을 1인칭이라 부르고 싶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1926년 12월 2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함완섭은 진학을 위해 상경해 외숙부인 김성춘 조명기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차 자신과 함께 작업하게 되는 영화인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일제강점기 <전과자>(김소봉, 1934)의 최진과 더불어 1세대 조선인 조명기사로 활동했던 김성춘은 해방 후 한국영화 조명기사의 계보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영화 기술자들에게 ‘오야지(おやじ, 親父)’로 통했던 인물이다. 기술학교인 홍아학원을 거쳐 1944년 경성전기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함완섭은 김성춘의 추천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광희동 촬영소 조명부에 입사하면서 영화 조명 일을 시작했다. 1942년 9월 발족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조선영화령(조선총독부제령 제1호)에 의거해 기존 10개의 민간 영화사가 강제 통합되어 친일,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한 국책 영화사였지만, 200여 평의 촬영 스튜디오를 비롯해 녹음실, 현상소, 최신식 기자재 등을 구비하고 말단 기술진에게도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지급했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사진 1]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창립 기념 사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김성춘의 조명 조수로 최인규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1945)에 참여한 함완섭은 해방 후에도 김성춘을 따라 조선영화건설본부의 뉴스영화와 최인규가 설립한 고려영화협회의 <자유만세>(최인규, 1946), <독립전야>(최인규, 1948),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등에 조명 조수로 참여했다. 그리고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48년 계몽영화인 <국민투표>(최인규)로 최연소 조명기사로 데뷔한다. [사진 2] 영화 <사랑과 맹서>(최인규, 1945) [사진 3] 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 [ 사진 4] 영화 <독립전야>(최인규, 1948) 같은 해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원작자였던 김성민의 감독 데뷔작 <사랑의 교실>(1948)로 극영화 조명기사로 정식 데뷔한 함완섭은 이후 조수 시절 인연을 맺은 최인규의 조감독 출신들인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 등의 감독 데뷔작 조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 <여성일기> 1948년 함완섭은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데뷔작 <여성일기>(1949)에 조명기사로 참여했다. 바로 1년 전 일본계 미국인이 촬영한 기록영화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이 컬러로 제작된 바 있지만, 순수 국내 자본과 제작진으로 만들어진 극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사진 5]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의 신문광고(출처: 경향신문 1949년 6월 6일자 2면) ‘최초’라는 수식어답게 함완섭은 이 영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컬러 영화의 조명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큰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자신은 물론 감독도 촬영기사도, 심지어 스승인 김성춘도 컬러 촬영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함완섭은 늘 하던 대로 흑백 영화 촬영 때처럼 조명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고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컬러 필터를 쓰는 법도 몰라 낮에도 텅스텐 조명을 그대로 쓴 데다 마침 낙엽이 지는 가을에 촬영해 화면에 붉은색이 많이 돌았던 것이다. 더욱이 <여성일기>는 네거티브 단계 없이 원본 자체가 포지티브 프린트로 변하는 리버설 필름(reversal film)으로 촬영했는데, 이 때문에 러쉬(rush)를 뜰 수가 없어 원본 필름으로 편집해야 했고 프린트도 만들 수 없어 극장에 영사기 두 대를 설치해 원본 필름과 녹음 필름을 따로 걸어 상영했다고 한다.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다지만, 기술적으로는 함완섭의 표현대로 “반쪼가리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함완섭은 <애국자의 아들>(윤봉춘, 1949), <여인애사>(신경균, 1950)를 거쳐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를 촬영하던 중 전쟁을 맞았고, 피난 시절에도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최후의 유혹>(정창화, 1953), <출격명령>(홍성기, 1954)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홍성기 감독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 한국전쟁 후 김성춘의 조명 조수 출신인 고해진, 이한찬 등과 함께 2세대 조명기사로 자리매김한 함완섭은 신경균, 윤봉춘, 이병일 등 원로 감독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홍성기, 정창화, 유현목 등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특히 홍성기와의 작업이 많았는데, <열애>(1955), <애원의 고백>(1957), <실락원의 별>(1957), <별아 내 가슴에>(1958), <실락원의 별(후편)>(1958) 등 그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했다. [사진 6] 영화 <애원의 고백>(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사진 7] 영화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의 한 장면 사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은 열악하고 부족했던 기재와 여건 등으로 인해 조명기사 고유의 미학적 조명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단지 화면을 밝히는 수준의 인물 삼점 조명(three point lighting) 같은 기본적인 조명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성기는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한 함완섭을 유독 신뢰했고 조명에 있어서만큼은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고 한다. 이 시기 홍성기 감독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열애>는 당시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을 잘 보여준다. 세트 촬영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영화의 모든 공간을 오픈에서 촬영했는데, 실내 낮 장면에서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치고 촬영했던 것은 바깥의 광량을 커버할 만한 실내 조명이 부족해서였으며, 벽에 인물 그림자가 많이 지는 것은 세트 촬영일 경우엔 부감대 같은 높은 위치에서 조명을 할 수가 있지만 오픈에선 아무리 조명기의 키를 높여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8~11] 영화 <열애>(홍성기, 1955) 속 장면들. 부족한 실내 조명으로 인해 커튼과 블라인드로 광량을 조절해야 했으며, 그림자가 벽면에 가득 드리워졌다. 또한 당시 영화들에서 카메라에 감마(gamma) 필터를 끼워 낮에 밤 장면을 찍는 데이 포 나이트(day-for-night) 촬영이 많았던 이유는 산이나 해변에서 촬영할 경우 전기를 끌어올 재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만, <열애>에서 영옥(염매리 분)의 집 앞 장면처럼 전기를 끌어오기 용이한 장소에서의 촬영은 당시에도 웬만하면 밤에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12, 13] 영화 <열애> 속 야외촬영 장면들. 촬영 장소의 전기 수급에 따라 촬영 방식과 시간을 바꿔야 했다. 화영공작소와 <자유결혼> 1950년대 중반 조명 기재는 김성춘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시절 일본의 아라시간주로(嵐寛壽郎)프로덕션에서 수입해 보유하고 있던 조명기 150kw와 전쟁 당시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온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조명기 100kw, 미공보원(USIS)에서 썼던 미제 조명기 70kw 등이 있었는데, 파손이 심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영화 한 편에 50~100kw 정도의 조명기가 필요했는데,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보니 함완섭은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김성춘의 작업 현장으로 조명 기재를 실어날라 가며 번갈아 사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7년 함완섭은 자신이 대여해 쓰던 미제 조명기를 샘플로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총 120kw의 조명기를 자체 제작했다. 화영공작소는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 조수로 일했던 김종철이 설립한 조명 기재 제작소로, 비록 수공업적 방식이긴 했으나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화 조명기를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게 되어 한국영화 조명인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곳이다. [사진 14] 영화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자유결혼>(이병일, 1958)은 함완섭이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제작한 조명기를 사용한 첫 번째 작품으로, 당시로선 나름 풍족했던 조명기 덕에 <열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된 조명이 보여진다. 오픈 실내 장면에서 벽에 드리워졌던 인물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졌고, 낮임에도 항상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쳐놓아 답답했던 화면도 커튼을 걷어냄은 물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촬영해 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사진 15~18] 영화 <자유결혼> 속 장면들 함완섭은 이러한 것이 풍부해진 조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실내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세트 촬영을 하면 조명기의 위치를 높일 수 있고 실외 광원 설정도 조명기로 조절할 수 있어 여러모로 오픈 촬영 때보다 작업하는 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최훈 감독과 광보영화사 함완섭은 홍성기의 조감독 출신인 최훈 감독의 데뷔작 <모녀>(1958)에서 조명을 맡은 후부터 <느티나무 있는 언덕>(1958), <사모님>(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등 최훈과 호흡을 맞추어 나간다. 그렇다고 홍성기와의 작업을 곧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사진 19] 영화 <모녀>(최훈, 1958)의 한 장면 [사진 20] 영화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의 한 장면 당시 제작 편수에 비해 조명기사가 부족해 기사 한 명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함완섭은 3팀을 운용했으며 각 작품마다 제1조수가 책임을 맡고 자신은 세트 촬영이나 로케이션 밤 촬영 같은 어려운 촬영에만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작업한 홍성기의 <별아 내 가슴에>, <실락원의 별(후편)>도 당시 최고참 조수였던 방영원(방기찬)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함완섭은 <청춘극장>(홍성기, 1959)부터 아예 그를 독립시켰으며 이후에도 자주 홍성기의 촬영장을 찾아 일을 도왔다. <사모님>,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작업하며 기획⋅제작에도 관여했던 함완섭은 1959년 최훈과 함께 광보영화사를 설립한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풍작을 거두고 있었고, “영화가 흥행을 하면 몇 배가 남는 장사가 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후죽순 영화사를 만들던 시기였다. 1958년에 제작된 작품 편수가 74편인데 반해 당시 영화사가 72개사일 정도였다. 1959년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를 넘어 111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로 변신한 함완섭에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광보영화사로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 <아버지>(최훈, 1961) 등을 제작했는데, 하필 <어느 여교사의 수기>가 개봉할 때 4.19가 터졌고 <아버지>가 개봉할 땐 5.16 쿠데타가 일어나 흥행은커녕 손해만 크게 입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되며 영화사 통폐합 조치가 내려졌고, 광보영화사는 동아영화흥업주식회사와 통합되고 만다. [사진 21] 영화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의 포스터 [사진 22] 영화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의 포스터 이후 함완섭은 동아영화흥업에서 제작 담당으로 일하며 <사랑의 승부>(최훈 ․ 이용호, 1962), <비밀통로를 찾아라>(이용호, 1962), <천동(天動)>(정승문, 1963)을 기획, 제작했지만, 동아영화흥업마저도 1963년 6월 영화사 등록요건이 더 강화된 제1차 개정 영화법의 시행으로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상옥 감독과의 재회 <에밀레종>(홍성기, 1961) 이후 조명을 중단했던 함완섭은 1964년 최훈 감독의 <눈물의 자장가>(1964)를 시작으로 다시 조명기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홍성기 감독의 <대석굴암>(1964), <처녀성>(1964), 최훈 감독의 <울지마라 물새야>(1964), <파도>(1967), <밀어(密語)>(1967), <지금 그 사람은>(1968), <난풍(暖風)>(1968), 김묵 감독의 <폭력지대>(1965), <최후의 대결>(1967) 등을 작업하며 조명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68년 함완섭은 신상옥의 부름을 받는다. <악야> 이후 16년 만이었다. <지옥화>(1958) 때부터 신상옥의 대부분 작품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이계창이 1967년 3월 베트남에서 <여자 베트콩 18호>(강범구, 1967)를 촬영하던 중 불의의 폭파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공백을 함완섭에게 대신 맡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상옥과 해후한 함완섭은 <여자의 일생>(1968)을 시작으로 <내시>(1968), <천년호>(1969) 등의 조명기사로 신상옥과 함께했다. [사진 23, 24] 영화 <여자의 일생>(신상옥, 1968) 속 장면들 당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를 인수하고 자회사를 설립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국내 최대의 영화사였고, 일본의 류덴샤(柳電社)에서 수입한 조명기 등 최신 기재를 보유하고 있던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함완섭은 <내시>를 작업할 때 당시 보통 영화 한 편에 소요되던 광량의 두 배에 달하는 1,200kw를 썼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촬영 스튜디오에는 300kw 이상의 기본 전력이 들어왔고, 한 장면에만 100kw 이상 쓴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었다. [사진 25, 26] 영화 <내시>(신상옥, 1968) 속 장면들 [사진 27, 28]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 속 장면들 하지만 그 호사(好事)도 오래가지 않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고 신필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그 조짐은 함완섭이 신상옥의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부터 보였었다.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양산해야 했지만, 흥행 성과는 미미했고 빚만 불어나는 악순환이 이미 그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더욱이 신필름은 1970년 시설 기준 미달로 등록이 취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규모가 대폭 줄어든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로 재설립된다. 함완섭은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를 작업한 후 1972년부터 최은희가 교장으로 있던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조명과 전기 등을 관리하는 시설감독으로 근무했다. 이후 1973년 <삼일천하>(신상옥)에 조명기사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1975년 7월 신상옥이 외화 쿼터를 획득하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어수선해지자 퇴사했다. [사진 29] 영화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 장면 [사진 30] 영화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의 한 장면 <세종대왕>과 마지막 작품 함완섭은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지내다 1978년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대작 사극 <세종대왕>(최인현)에서 조명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이 조명기사로 참여한 59편의 작품들 중 가장 애착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 이 영화에서 함완섭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작업했다. 낮 장면에 쓰는 데이라이트(daylight) 조명기 10대를 홍콩에서 전구를 수입해와 자체 제작했고 경복궁 오픈 촬영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기존의 텅스텐 조명기도 당시 모을 수 있는 최대의 물량을 동원해 유려한 롱 쇼트 밤 장면을 구현해내기도 했다. 더욱이 1년여의 긴 촬영 기간에 로케이션과 오픈 촬영이 많아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었지만, 그해 대종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수상은 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사진 31~33]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영화 <세종대왕>(최인현, 1978) 속 장면들 이후 함완섭은 1979년부터 현진영화사에서 조명실장으로 재직하며 직접 나서기보다 후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1980년 <느티나무 있는 언덕>에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로 만나 오랫동안 친구로 인연을 맺어온 심우섭 감독의 <난 모르겠네>를 마지막으로 극영화 조명을 그만두었고,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영화의 조명을 끝으로 은퇴했다. [사진 34~36] 함완섭이 참여한 마지막 극영화 작품 영화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속 장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