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아, 사랑해
- 감독
- 김기현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정재연, 현재성 , 이현욱, 이연주, 장두이, 김형자, 안진수, 주호성, 김명국, 김영식, 이경운, 한덕호, 송귀인, 윤형민, 최준원, 성훈, 김성균, 유달산, 박하니
작년, 임순례 감독의 < 리틀 포레스트 >(2018)는 150만 명의 관객들을 동원하며 잔잔한 힐링 영화라는 장르 중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피할 수 없는 꼬리표가 있었다. “현실적이지 못하다”, “농촌의 낭만화”, 영화 이전부터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시골 농촌이라는 배경에 대한 논란이었다. 영화는 허구이지만 현실에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그 비판은 충분히 유의미하다. 그러나 이번 비평은 그 비판 때문에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관객들에게 전하는, 영화에 대한 변호이다. 영화는 밝고, 따스하고, 반짝거린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밝은 색감을 고수하는데, 이는 관객들에게 농촌에 대한 무조건적인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혹은 그를 통해 귀농을 장려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임순례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이 영화는 하나의 주장을 하는 대신 ‘힐링’을 관객들에게 선물해주고자 하는 영화이다.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를 발견해내거나, 그런 사회를 거세게 비판하기보다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관객들의 마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주인공인 혜원을 통해서 스크린에 등장한다. 영화 초반, 혜원의 도시 생활은 관객 대부분이 겪는 사회 현실과 다를 게 없다. 현대 한국 사회 속 개인은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그 선택 또한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조건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안정적인 선택지를 고르고, 혜원도 마찬가지로 임용고시라는 선택지를 고른다. 혜원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빠르게 지나가는 노량진 장면은 그녀가 안정적인 삶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상징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혜원은 허겁지겁 삼각 김밥을 먹고, 노량진에선 제대로 앉지도 않고 서서 컵밥을 먹는다. 치열한 경쟁 속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먹지 않는 식사는 경쟁에 초조한 현대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도시에서의 속도는 불안만큼 빠르다. 그러나 혜원의 노력은 통하지 않았고, 애인이었던 ‘훈’은 결국 합격했다. 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혜원은 그와 비교됨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공부를 했다면, 조금 더 빨랐다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도시는 그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빠르게 먹어치운 식사는 빨리 사라진다. 혜원이 느끼는 허기는 열심히 노력했던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없어 생기는 간극이다. 같은 시대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관객들 또한 갖는 이 허기를, 영화는 혜원을 통해 해소 시켜준다. 혜원의 고향인 미성리는 도시와는 정반대로 흘러간다. 이 공간은 거리라는 문제 때문에 물건 거래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이 공간은 ‘자급자족’을 바탕으로, 영화의 속도를 조정한다. 영화 속 “최고의 요리는 자신이 직접 해먹는 요리”라는 말처럼, 직접 만들어서 먹는 요리는 느리지만,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허기를 완벽하게 채워준다. 영화 속 혜원은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농사는 혼자 할 수 없는 일로, 고모와 함께 혹은 친구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수확한 쌀, 팥, 채소 등의 먹을거리는 다시 요리로 나눠 먹게 된다. 도시가 무한 경쟁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공간이라면, 자연의 공간인 미성리는 협력과 나눔으로 움직이는 공간이다. 갑작스러운 태풍으로 인해 농사를 망치게 되었어도,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혜원은 다시 일할 뿐이다. 이때 혜원은 투덜거리며 일을 하는데, 초반 도시에서 자신에게 책임을 몰아세우던 모습과는 다시 상반된다. 모든 걸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야, 혜원은 자신을 떠난 엄마라는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그저 ‘자연히’ 일어난 일이라는 걸 이해하는 것. 영화의 ‘힐링’은 이에 밑바탕을 둔다. 지금 답을 찾지 못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것과, 함께 답을 찾다 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답이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이야기다. 영화가 말하는 힐링이 어렵지 않았던 것처럼, 감독은 그 메시지도 쉽게 전하려 한다.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영화처럼 어렵게 삶을 성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영화 속 혜원과 마찬가지로 관객들도 책임감을 덜어내고 잠시라도 편하게 지내길 원하기 때문이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단순한 메시지가 각종 화려한 편집 방법으로 전해진다면 그것 또한 모순이기 때문에, 감독은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끔 스크린에 보이는 이미지에 집중한다.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작업, ‘개인에게서 책임감을 덜어내는 것’은 도시와 미성리라는 공간의 색감차이로 시각화한다. 혜원이 도시에 있을 때 살았던 방은 밤이라 어둡기도 하지만, 형광등 불빛, 냉장고 안에서 나오는 인위적 불빛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칙칙한 느낌이 든다. 그러한 공간 속에 놓인 인물은 ‘좋아했던 남자친구와의 경쟁에서 졌다는 사실’만큼이나 어두워 보인다. 그러나 미성리에서의 혜원은 창과 문이 많은 공간에 있다. 언제든 자연광이 바깥에서 안을 비출 수 있고, 안에서 혜원이 불을 뗄 수도 있다. 창문을 통한 햇빛이나 난로 불이 비추는 혜원은 따뜻하고 깨끗해 보인다. 도시의 인공적 불빛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 혜원은 자신을 짓누르던 책임감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힐링의 두 번째 요소는 ‘함께’이다. 영화는 인물에 대해 클로즈업을 최소화하고, 등장인물들이 늘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도록 구도를 잡는데, 이 구도는 인물들이 더욱 더 가까워보이게 한다. 이러한 구도가 잘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로, 혜원, 재하, 은숙, 셋이 함께 막걸리를 먹는 장면에서도 처음엔 막걸리 잔에 초점을 맞춘 카메라는 앉아있는 옆모습이 모두 보일 때까지 줌아웃한다. 카메라와 거리가 멀어지면서 셋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줄어든 것처럼 보이게 되고, 덕분에 ‘함께’라는 요소를 더욱 부각시킨다. 롱쇼트는 ‘함께’라는 가치를 나타낼 때에도 쓰이지만, ‘자연스러움’이라는 가치를 나타낼 때에도 쓰인다. 혜원이 농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야외의 ‘자연적인’ 공간에 놓이는 장면마다 카메라는 그녀와 거리를 더 벌린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봄과 가을의 장면에서는 혜원의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익스트림 롱쇼트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뜻 보면 이런 구도는 인간이란 존재가 자연에 비해 너무나 사소하고 작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 같다. 그러나 자연은 혜원을 억압하고 있기 보다는 그녀와 함께 장면을 완성해주는 역할을 하고, 혜원은 자연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계절이 바뀌는 시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이는 계절의 순환성이라는 자연의 특성과 다시 한 번 연결된다. 자연의 연결점들 속 혜원은 점차 ‘자연스러움’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타이밍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아주 특별한 영화는 아니다. 영상, 인물, 주제의식 어떤 면에서도 영화는 평범하고, 그러나 평범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관객에게 더욱 다가갈 수 있었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힐링 때문에 농촌이 너무 낭만화된 것 아니냐는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영화가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작은 숲’은 혜원의 공간일 뿐, 관객들이 가질 힐링의 공간은 그 어떤 곳, 도시 깊숙한 안이 되어도 상관없다. 그저 그럴 수 있는 공간을 찾기 바란다는 메시지와 함께, 영화를 조금 더 편하게 보는 관객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내외의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했으나, < 사회생활 >( 이시대 , 2019)은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한국영화들 가운데 가장 눈에 들어온 ‘발견’이었다. 전주, 전북 지역 작품 공모를 통해 선정된 이시대 감독의 이 데뷔작은 프로그래머들 간 논의 끝에 한국경쟁에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이시대는 장우진 , 김대환 , 임태규 감독을 배출하면서 최근 한국 독립영화의 산파 구실을 하고 있는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 전문대학원 출신의 신인이다. 어떠한 지원도 없이 오로지 감독의 의지만으로 밀어붙인 고투의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되는 이 영화에서 그는 우리네 삶의 문제를 탐사하고자 한 작가정신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현실의 탐색 후에야 가능한 뼈저린 자성을 견고한 양식적 전략으로 다룰 줄 아는 이시대의 묵묵한 연출에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영화의 무대는 서울에 본사를 둔 지방 소도시 지사의 사무실이다. 카메라는 폐소공포증을 자아내는 이 사무실 바깥으로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이 사무실의 실질적 관리자인 이현제 대리는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 본사로부터 쫓겨나 이곳으로 좌천된 이혜원 대리의 관리 감독을 맡게 된다. 관리 책임을 맡긴 팀장의 감시와 채근이 격화되면서, 냉정한 조직의 논리 안에서 생존해야 하는 현제는 혜원이 제 발로 걸어 나가도록 냉대와 멸시의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부정(不正)한 계율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하는 혜원은 꿋꿋이 버티고, 종종 똑부러진 일처리로 현제를 돕기도 한다. 순응과 굴종을 강요하는 집단 공작의 약발이 먹히지 않을 때쯤, 혜원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이 돌고 코너에 몰린 혜원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사회생활>은 한국 사회를 잠식한 조직문화의 이면을 폭력의 순환으로 형상화한다. 신입사원 면접시험으로 열리는 플롯은 혜원의 좌천 수난기가 비극적으로 종료된 후 또 다른 면접시험으로 닫힌다. 회사 안에서 인정받고 진급하기 위해 엄격한 위계와 패거리 문화, 집단주의에 투항한 현제를 통해 이시대는 한국식 조직문화의 냉엄함,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공할만한 밀도로 그려낸다. <사회생활>은 조직과 개인, 조직 안의 개인과 개인을 끝끝내 만날 수 없는 대립적 갈등관계로 묘사한다. 메마른 조직문화의 생리에 밀려난 자들의 패배는 그 세대에 그치지 않고 대물림된다. 현제와 혜원이 잠시나마 희미하게 교감하였다는, 패배의 질적 변별성에도 불구하고 패배는 그저 패배일 뿐이다. 여기서 대립적 세계인식을 통어(通御)하는 작가의 심층인식이 드러난다. 개별성을 말살하는 조직, 제도, 시스템의 폐쇄성과 그 정황을 그리고 있는 <사회생활>은 대립적 세계 상황에 포박된 자들의 속절없는 패배를 ‘아이러니’의 수사학으로 그린다. 구태여 희망과 미래를 보여주려 하지 않는 아이러니는 반성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존재 의의가 있다. 좌절스러운 이 패배로부터 이시대는 자신이 견지하고자 하는 시스템에 대한 날선 관점을 추출한다. 우리는 얼마나 세상에 굴종하며 살고 있는가, 또 폭력을 온존케 하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가담하거나 최소한 방조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가. 개별자들의 자존과 위엄을 짓밟는 제도와 시스템의 억압을 고발하는 영화의 톤은 얼음장 같이 차갑다. 무엇보다 <사회생활>의 도드라진 성취는 그 표제만큼이나 정직한 스타일의 일관성, 일체의 과장이나 수식을 배제한 미니멀한 장면연출에서 찾을 수 있다. 대다수의 쇼트는 롱테이크로 찍혔고, 그 무게는 육중하다. 흡사 아마추어 감독의 습작을 보는 것 같은, 놀라우리만치 강직한 이시대의 스타일은 그가 연출한 두 단편영화 <오늘의 중력>(2016), < 업무시간 >(2016)에서부터 이어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대못을 박아둔 것처럼 어떤 움직임도 없이, 인물들의 뒤편에서 저들의 뒤통수를 찍거나, 무언가에 가려지고 잘려진 몸의 일부, 세트의 일부를 찍는 카메라는 좀체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감옥의 형상으로 이 사무실을 그린다. 시스템의 감옥에 억류된 존재의 비의를 묘사하는 롱테이크 장면들은 범속한 세상사와 조직생활의 저열함을 보는 사람들에게까지 전이시킨다. 불합리한 세계의 비의를 형상화하는 범상한 수사 전략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정서와 드라마의 긴장을 집요하게 화면에 새기는 이시대의 완력은 근래 한국 독립영화에서 보기 드문 종류의 재능이다. 나는 이러한 재능을 가진 이 감독이 후일 더 가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재목(材木)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 5월, 4K로 복원된 옛날 한국영화 두 편을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하나는 < 성춘향 >< 신상옥 , 1961)이고, 다른 하나는 < 파업전야 >(장산곶매, 1990)이다(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말하는 <성춘향>은 144분짜리 복원본이 아니라 영상자료원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발굴, 복원, 그리고 재창조’의 개막식에서 있었던 90분짜리 ‘필름 판소리, 춘향’이라는 공연이다). 두 편의 영화 사이에는 대략 30년의 간격이 있지만 각자가 놓인 시대적 맥락에서 저마다 다른 의미에서 영화적 사건이 되었던 작품이고, 그런 만큼 이미 여러 번 기념 상영되고 그때마다 반복해서 이야기되어왔던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을 함께 묶어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게 만든 것은, 두 작품이 각각 취하고 있는 ‘공연’과 ‘상영’이라는 공개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거의 동시적으로 나를 찾아온 두 작품을 체험하며, 새삼스럽게 영화의 복원이 지닌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 또는 상념과 마주하게 되었다. <파업전야>의 재개봉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등장한다. ‘90년 노동영화의 전설이 돌아온다!’,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30년 만에 극장 정식 개봉!’ 등이 그것이다. 30년 만에서 4K로 복원된 <파업전야>를 극장에서 보는 것은 분명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복잡한 질문을 품게 만들기도 했다. <파업전야>의 ‘전설’의 많은 부분은 영화의 상영 자체가 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파업전야>의 필름은 더 높은 해상도로 복원되었지만, <파업전야>의 ‘영화적 사건성’의 어떤 측면, 즉 그 상영투쟁을 둘러싼 온갖 전설과 무용담은 기억되거나 증언될 수는 있을지언정, 복원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건성을 근사치에 가깝게 복원하는 방법은 당대에 다양한 위치에서 그 사건을 체험했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담는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이거나, 에이젠슈테인이 < 전함 포템킨 >이나 < 시월 >에서 했던 것처럼 대규모 대중을 동원하여 그 사건을 재연하고 그것을 영화 안에 담는 픽션적 방식일 것이다. 30년 만에 극장에서 (재)개봉된 <파업전야>는 오직 포스터의 배경 이미지(당대의 사건성을 기록하고 증언하고 있는 다양한 신문 기사들의 스크랩-몽타주)를 통해서 그 사건성의 희미한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 이번 <파업전야>의 (재)개봉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파업전야>를 다시 보면서, 뒤늦게 발견한 이 작품의 의미 또한 적지 않다. 오프닝의 배우 소개와 엔딩 크레딧에서 배역의 중요도나 역할의 기여도와 상관없이 오직 ‘가나다 순’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데서 드러나는 ‘장산곶매’의 철저한 ‘공동창작’의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사건성이다. <파업전야>가 80년대 리얼리즘 미학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할리우드 리얼리즘의 개인적 영웅서사와 소비에트 리얼리즘의 전형성의 미학 사이의 긴장을 품고 있다는 점은, 새롭게 이야기될 만한 가치가 있다. 어쩌면 <파업전야>의 리얼리즘이 보여준 사건성은 당대의 노동현실을 충실히 취재-반영한 후 앞서 말한 혼종성의 리얼리즘 스타일로 그것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앞서 내다보고 있는 일종의 ‘예지적 리얼리즘’이라는 점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안에서 한수(김동범)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스패너를 들고 일어나게 한 것이 용역 깡패들의 무자비한 폭력이었듯, 영화 밖에서 <파업전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대중들이 각목과 화염병을 들고 떨쳐 일어나게 만든 것은 당시 공안 당국의 과잉 탄압이었다. 영화가 당대의 노동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던 만큼이나, 당대의 정치현실이 영화의 만듦새를 반영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예지적 리얼리즘의 측면이 <파업전야>의 ‘영화적 사건성’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그것의 복원은 불가능한 것에 가까운 것이다. ‘필름 판소리, 춘향’은 김태용 감독의 연출, 이소연 소리꾼의 판소리 공연, 손성제 및 최혜원 이라는 두 뮤지션의 현장 연주를 통해 재창조된 ‘복합예술 공연’이다. 거의 60년 만에 이루어진 이 공연은 애초에 <성춘향> 개봉 당대의 ‘영화적 사건성’의 반복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던 기획이다. 그 공연은 영화 <성춘향>이 재매개한 원전인 판소리 현장 공연과 결합된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역-재매개로서의 복원이고, 두 뮤지션이 연주하는 전자음향과 결합된 여러 매체 사이의 크로스-오버라는 점에서는 새롭게 반복되는 재매개로서의 복원이다. 2000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가 한 편의 영화 안에 이 복잡한 재매개 과정을 담아내려 한 시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필름 판소리, 춘향’은 그것을 영화 작품 밖으로 풀어헤쳐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자의 시도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복원된 몇몇 무성영화의 공개 시에 시도되었던 공연을 유성영화인 <성춘향>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디지털 복원은 원래 영화의 시청각적 질료를 최대한 원래의 것과 가깝게 복원해 내거나(<성춘향>의 경우), 심지어 그것보다 더 나은 해상도로 복원해 내기도 한다(<파업전야>의 경우). 그러나 이 복원의 충실도는 매체의 질료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성과다. 하지만 한 편의 작품이 갖는 영화적 사건성에는 그 매체의 질료적 차원 이상의 것이 항상 개입되어 있기 마련이다. 상영조건과 상영 형식의 측면(또한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당대의 사회적 조건과 관객성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파업전야>의 (재)개봉은 일종의 ‘과소 복원’이고, ‘필름 판소리, 춘향’ 공연은 일종의 ‘과잉 복원’이다(이 ‘과소’ 또는 ‘과잉’이라는 표현은 단지 상대적인 비교를 위한 묘사적인 형용사일 뿐, 어떤 가치 평가적 함축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과소와 과잉은 과거의 영화가 지닌 사건성을 총체적으로 복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 총체적 복원 불가능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복원의 정치학을 위해서는 매체의 질료적 측면의 복원만이 아니라, 그것의 공개 형식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과 실험이 요구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