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북녀
- 감독
- 박상호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신성일, 고은아, 황정순, 한은진, 김희갑, 방수일, 이낙훈, 이수련, 박지현, 한유정, 문미봉, 이정애, 김은옥, 박상호
2010년, 제 14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한 저예산 영화가 상영되었다. 초저예산 영화로서는 생각보다 진지하게 구현된 CG, 당시로서는 그리 흔하지 않았던 인터넷 커뮤니티 담론을 전면 수용한 영화로 소소한 화제를 일으켰다. 이 바람을 타고 ‘장기하가 에드우드를 만났을 때’(영화평론가 이동진), ‘지구를 지켜라 이후 가장 발칙한 데뷔작(영화평론가 김도훈) 등의 평을 들으며 극장 개봉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B급 영화, 맛이 간 영화, 아무튼 뭔가 이상한 영화에 꽂혀있던 나는 그 실체를 확인하러 한 달음에..!는 아니고 버스를 타고 걸어서 이대 후문 필름 포럼에 갔던 것이다. 좌석에 앉아 있으니 불이 꺼졌고 영화가 시작하나 보다 싶어 시선을 앞에 두었던 그 때, 갑자기 스크린 옆의 문이 열리며 왼손으로는 턱 밑에 둔 핸드폰으로 플래쉬를 켜 얼굴을 비추고, 오른팔은 위쪽으로 쭉 편 채 스크린 중앙까지 말없이 걸어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졌다. 사내는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불청객을 만든 이응일이올시다.(‘이올시다’라고 하시지는 않았을텐데, 상황과 분위기가 너무 잘 어울려 그냥 그렇게 기억하기로 했다.) 갑자기 이 영화를 떠올린 이유는 역시 ‘삐용삐용 B무비 시즌 2’에 원고를 쓰기 위해서이다. 시즌 1을 할 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루한 영화만 잔뜩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옛날에도 지금은 흉내도 못 낼 ‘충분히 맛이 가버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박노식 감독의 < 왜? >나 최영철 감독의 < 삿갓 쓴 장고 > 같은 영화들은 지금 생각해도 (두 영화는 정 반대 방향에 있긴 하지만) 매우 썩 훌륭하게 미친 그런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이 때 소개한 영화들은 영상자료원에 직접 방문하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그 땐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끝내주는 영화들이 있으니 영상 도서관에 오셔서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2023년에 다시 ‘삐용 삐용 B 무비’를 시작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도 아주 좋은 영화가 많이 올라가 있고, 여러 OTT를 통해서 영화를 접하기 매우 쉬운 환경이 된 지금,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라는 건 예전보다 마음의 거리가 훨씬 멀게 느껴진다. 이번 시즌에서 소개할 3편의 영화는 되도록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리라 마음을 먹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 바로 이응일 감독의 < 불청객 >이다. 이응일 감독은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영화 전편을 올려놓아서 누구나 손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서울시 관악구의 어느 자취방. 고시생 진식은 오늘도 공부에 여념이 없다. 함께 살고 있는 취준생 강영과 응일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빠져 자고 있지만, 시골에 혼자 계시는 홀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그는 오늘도 양치를 하며 민사소송법 제90조 소송대리권의 범위...를 중얼중얼 외우고 있다. 그 때 택배가 하나 도착한다. 택배에는 ‘개봉이파괘되면계약을성맆댄것으로간주함니다’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꺼림칙한 마음에 쉽사리 열지 못하던 그 때, 방금 잠에서 깬 응일이 방에서 나와 택배를 뜯어 버린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은하계 론리스타 금융그룹에서 포인트를 관리하는 ‘포인트맨’. 그는 진식, 강영, 응일의 수명을 지금 포인트로 적립하면 나중에 영원한 삶으로 전환하여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들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에 당황하며 거부한다. 이에 화가 난 포인트맨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라!’라고 일갈하며 이들의 자취방을 우주 어딘가로 날려버린다. 여기서부터, 이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SF를 독립, 아니 이 정도라면 개인 영화라고 부르는게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 규모에서 시도하는건 매우 드문 일이다. 개념이나 논리적인 부분으로 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눈으로 보이는 우주를 구현하겠다는 야심은 대단하다. 특히 영화의 가장 주요한 아이디어인 ‘자취방 창문 밖은 우주’라는 점을 쉽게 처리하고자 한다면 그냥 말로만 때웠으면 될 텐데 굳이 창문을 열고 우주를 보여주며 불사조 성운, 블랙홀까지 구현하고 있다. (우리 같은 백수가 밖에 더 있어! 라고 외치는 장면 뒤에 국회의사당이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이 붙어있다.) 상업영화에 비교할 수는 없는 CG이지만, 영화 전체의 톤앤매너와 착붙는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서 이 만듦새 자체가 영화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여러번 돌려볼 수록, 이상하게 촬영과 CG가 절묘하게 훌륭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데 이거 혹시 진짜 되게 잘한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글을 다 쓸무렵에는 아. 진짜 잘 만든거 맞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농담들이 정말 재밌어서 많이 웃었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괜시리 반복적으로 리코더를 찾는 강영이나(중반부 쯤에 왜인지 ‘울밑에 선 봉선화’를 연주한다), 포인트맨의 초능력으로 갑자기 영어만 사용하게 된 응일, 포인트맨과 싸우다가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해서...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 호강시켜드려야 되는데... 이젠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씁쓸히 되뇌이는 진식 등 전반적으로 뜬금없고 어설프며 지금 보면 예스러운 농담들이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고시생, 취준생이라는 신분으로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어색한 위치가 되어 곰팡이 가득한 자취방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청년들. 그들에게 ‘수명’을 강탈하려는 포인트맨. 그는 자취방 브라더스의 수명을 앗아가려는 명분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성공한 사업가와 정치인을 욕만 할 뿐. 그들을 따라잡려 노력할 의지도 없는 녀석들! 인구는 해마다 감소하는데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으며 산소와 영양분을 소비하며 지구의 공간만 차지하는 놈들! 너희는 잉여인간이야! 쓰레기 같은 쓰레기들! 빌어먹을 루저들! 내가 너희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을 할 기회를 주겠다.” 그 보람된 일은 수명을 포인트로 바꿔 미국 앨러배마에 거주 중인, 민간의료보험을 경영하며 국가에 헌신한 77세의 잭 도슨씨에게 넘기는 것이다. 너무 직접적이라 뭐 더 해설이 필요없는 정도의 직유다. 마치 UCC를 보는 듯한 화질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2006년쯤부터 촬영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괜찮은 화질이었을 것이다. (SONY의 PD-150을 사용했다고 한다.) 4K, 8K도 접하기 쉬운 지금 본다면 아쉬울 순 있지만, 이 부분만 견딘다면 굉장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며 여러번 돌려보았는데, 묘한 것이 개봉 당시에 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재밌고, 이야기 또한 더욱 시의적절하게 느껴져 웃다가 괜히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나 꼭 한 번쯤은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2010년에 봤을 때보다 훨~씬 크게 들었다. 이응일 감독은 <불청객> 이후 몇 편의 단편, 웹드라마 등을 연출했고 현재는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신다고 한다. 언젠가의 그의 작품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이런 재능을 단 한편으로 갈음하는 건 관객으로서 정말이지 너무도 아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불청객>은 이응일 감독의 유튜브 채널 ‘토토모’에서 관람할 수 있다.
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
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