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홈즈맨 [THE HOME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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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작성한 리스트에는 23편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10편만 선정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여러 편의 영화를 제외해야 했다. 2014년의 영화로 선택한 < 보이후드 >의 리뷰에 앞서 전체 리스트를 수정 공개함을 알려 드린다.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23편 2014년의 영화 보이후드 Boyhood ,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4 다섯 편의 장르영화 나를 찾아줘 Gone Girl , 데이비드 핀처, 2014 더 홈스맨 The Homesman , 토미 리 존스, 2014 다크 밸리 Das Finstere Tal , 안드레아스 프로차스카, 2014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 마틴 스콜세지, 2013 콜드 인 줄라이 Cold in July , 짐 미클, 2014 로버트 패틴슨이 나온 두 편의 영화 더 로버 The Rover , 데이비드 미쇼드, 2014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14 다섯 편의 아트하우스 더 원더스 Le meraviglie , 알리체 로바허, 2014 도원경 Jauja , 리산드로 알론조, 2014 실스 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 올리비에 아싸야스, 2014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 장 뤽 고다르, 2014 에덴 Eden , 미아 한센 로브, 2014 두 편의 다큐멘터리 야만의 땅 Pays Barbare , 예르반트 지아니키안/안젤라 리치 루키, 2013 위로공단 , 임흥순 , 2014 두 편의 한국 드라마 절경 , 남근학 , 2014 한여름의 판타지아 , 장건재 , 2014 여섯 편의,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한 영화 호스 머니 Cavalo Dinheiro , 페드로 코스타, 2014 사랑스러운 자매 Die Geliebten Schwestern , 도미닉 그라프, 2014 프랑스 공주 La Princesa de Francia ,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4 아프리오리 Mula sa kung ano ang noon , 라브 디아즈, 2014 신이 되기는 힘들다 Trudno Byt Bogom , 알렉세이 게르만, 2014 위플래쉬 Whiplash , 데미언 차젤, 2014 (링클레이터는 < 스쿨 오브 락 >의 개봉 후에 아역 배우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 도중 그 편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멋진 시간을 함께 보냈음을 상기시키는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배우의 길을 걸어가라고 부추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인생에서 보낸 하나의 좋은 챕터가 곧 가장 좋은 시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 곁에 머무는데, 나는 그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긍정적인 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그게 완성된 것이 아닌 경험을 위한 것이라 여긴다. 부모의 이혼으로 메이슨과 누나 사만다는 엄마와 함께 산다. 아빠는 멀리 알래스카에서 일한다고 했다.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엄마는 공부와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친정이 있는 휴스턴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다. 때마침 아빠도 근처로 거처를 옮긴 차였다. 이후 12년 동안의 시간 흐름을 담은 < 보이후드 >는 제목 그대로 메이슨의 소년기이자 누나 사만다의 소녀 시절 이야기이고 엄마와 아빠의 이혼의 기록이다. 촬영은 실제로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사실만으로도 <보이후드>는 충분히 감탄을 불러낼 만하다. 링클레이터는 이미 ‘비포 연작’을 통해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보여주었던 감독이다. 그리고 < 스쿨 오브 락 >(2003)이나 < 배드 뉴스 베어즈 >(2005) 같은 장르영화를 만들 때면 어김없이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던 사람이다. 그에게 <보이후드>가 뜬금없는 작업이 아니란 이야기다. 기실 영화가 12년 정도의 시간 흐름을 담았다고 해서 무조건 열광할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앱티드는 1964년부터 지금까지 50년이 지나도록 ‘업(Up) 연작’을 계속 연출하고 있다. 소년의 성장을 20년 넘게 극화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또 어떤가. 그래서 <보이후드>에서 우선 관심이 갔던 것도, 시간 속에서 인물을 포착하는 감독의 태도였다. TV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시작된 ‘업 연작’은 매번 유명한 문구 - ‘7살 때까지 아이를 맡겨 달라. 그러면 인간을 보여주겠다’ - 로 문을 연다. 이 문구를 살짝 바꾸면 곧 < 보이후드 >의 모토가 된다. ‘7살짜리 꼬마를 맡겨 달라. 그러면 소년 시절을 보여주겠다.’ <보이후드>를 본 평자들은 누구나 ‘업 연작’의 영향을 이야기하며, 링클레이터 또한 인터뷰에서 앱티드의 영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음을 내비친 적이 있다. 2012년의 <56 업>까지 매 7년마다 한 편씩의 영화로 발표된 ‘업 연작’은 현실의 인물에서 ‘가족, 친구, 애정, 교육, 계급, 타자, 빈부, 정치, 기회, 종교, 도덕, 꿈’을 읽어내 영국의 미래를 논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사회의 축소판이자 거대한 실험장으로 발전한 ‘업 시리즈’의 감동은 삶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나온다. 신비롭게 자유자재로 흘러가는 삶의 전개 방향이야말로 다큐멘터리로서 ‘업 시리즈’가 드러낸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보이후드>의 주인공 엘라 콜트레인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는 평범한 6살 아이였으며 영화가 만들어지는 12년 사이에도 배우로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보이후드>는 콜트레인과 직업 배우들이 서로 소통하며 찍은 반 다큐의 느낌을 준다. 링클레이터는 매해 소년에게 일어난 변화를 영화에 반영했음은 물론 콜트레인이 직접 소년기의 대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업 연작’이 시간의 경과 위로 사회와 문화의 지도를 그리려 한 작품이라면,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얼굴 그리기에 더 치중한 작품이다. 긴 세월에 걸쳐 콜트레인이라는 배우와 메이슨이라는 인물이 은연중에 작가처럼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년의 성장을 연대순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 보이후드 >는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트뤼포는 앙투안 역할을 맡을 배우로 어린 장 피에르 레오를 선택했고, 감독과 배우와 인물이 어우러진 다섯 편의 영화 - < 400번의 구타 >(1959), < 앙투안과 콜레트 >(1962), < 훔친 키스 >(1968), < 부부의 거처 >(1970), < 사랑의 도피 >(1979) - 가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런데 트뤼포 자신이 말했듯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드라마이며, 그러한 성격은 <보이후드>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지향점과 어느 정도 상치되는 부분이다. 꼭 그 점이 아니어도 나는 <보이후드>와 비교되어야 할 작품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이 아니라 장 외스타슈의 < 나의 작은 연인들 >(1974)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소년 다니엘의 딱한 형편은 <보이후드>의 메이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니엘은 할머니와 살다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 남부로 이사 가게 된 소년이며, <나의 작은 연인들>도 소년 다니엘이 성장해 어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를 다룬다. 단, 외스타슈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링클레이터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보이후드>와 상반되게) <나의 작은 연인들>은 극 중 소년의 외모가 별로 변하지 않은 상태를 지속시키며 외부의 세계와 단절된 인상을 강화한다.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나의 작은 연인들>을 굳이 불러내 비교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짧은 장면 때문이다. 다니엘은 한 소녀와 노변 풀밭에 누워 있다. 곧 어른이 돼 순수의 시대와 작별을 고할 소년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서 금방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다. 이 장면은 <보이후드>의 첫 쇼트 - 여섯 살 메이슨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 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흡사 링클레이터는 고통스럽고 아픈 소년 시절을 보낸 다이넬의 시간을 돌려 메이슨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른 태도로 새롭게 쓰려는 듯하다. 그는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애쓴다. 자신을 포함해 당신들도 소년 시절의 통증을 겪었음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극에 뛰어들어 아파하는 척하지도 않는다. 링클레이터 영화의 특징은 ‘단순한 자연미’다. 장르 영화를 찍을 때도 그렇지만, 그것이 더 잘 드러나는 경우는 그만의 소품을 찍을 때다. < 비포 미드나잇 >(2013)이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는지 확인해보라. 영어에 ‘Don’t make a scene(야단법석을 떨지 마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의미는 달라도 링클레이터 영화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매년 사나흘 동안 제작진과 배우들이 모여 15분 분량의 촬영을 거듭한 < 보이후드 >에는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게 일어나지 않는다. 상업영화로서 너무 심심해 보일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어느 날 어느 십 대 소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한 장면을 손질하지 않고 내놓는 것, 그 이상을 영화는 욕심 내지 않는다. 지금 장면이 어떤 해에 벌어진 일인지 구분해 밝히지 않기에, 흐르는 음악과 열중하는 게임과 구경 간 스포츠 경기와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대충 어느 정도 지점의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배우가 카메라를 보는 실수를 하는데도 숨기지 않아 자연스러운 맛을 강조하기도 한다. 부모를 비롯한 인물들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소년이 겪을 성싶은 일들이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게 다인 것 같은데 <보이후드>는 시간의 에센스를 놓쳤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건 소년의 얼굴 덕분이다. 그냥 몸이 커지고 머리 스타일이 바뀌는 게 다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가고 세상이 변화하면서 흘린 흔적은 차곡차곡 쌓여 메이슨의 얼굴에 자국을 남긴다. 16살 생일을 맞는 해에 메이슨의 얼굴은 밉다. 이전까지 오랫동안 사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했던 콜트레인은 무슨 일인지 잔뜩 우울한 표정과 지저분한 얼굴로 메이슨이란 인물을 연기한다. 사춘기여서 그랬을 터인데, 링클레이터는 일부러 예쁘게 분장하지 않았고, 콜트레인도 통과 중인 시기가 입혀준 표정을 거짓 마스크로 가리지 않는다. 링클레이터는 < 보이후드 >를 찍는 과정이 결과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했다. 상영시간이 165분인 영화가 대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에서 막을 내릴까. 평범한 영화였다면 메이슨이 차를 몰고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끝났을 것이다. <보이후드>로 인해 유명해진 인디그룹 ‘패밀리 오브 더 이어’가 부른 <히어로>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큰사람이 될 마음이 없어요. 나는 여기저기서 사람들과 싸우고 싶어요. 나를 놓아줘요’라는 가사가 엄마의 품을 떠나는 장면과 썩 어울려 이 정도면 엔딩으로 훌륭하다 싶었다. 끝없이 뻗은 텍사스의 도로를 보며 누구나 감동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링클레이터는 그런 감상을 빚을 생각이 없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소년은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며, 배경음악으로 ‘콜드플레이’의 <옐로>가 흐른다. 노래의 가사는 ‘별을 바라봐, 별은 너와 너의 행동을 모두 보고 있어’이다. 소년이 무엇을 보는지 모르는 나는 대낮인데 설마 별을 보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 또는 내 생각과 달리 소년이 자신만의 별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년이 보는 것은 화면 바깥에 놓인 무엇이었다. 곧 누군가 소년을 부르고 소년은 극 중 현실로 돌아온다. 이어 12년의 시간을 산다. 내성적인 소년은 사진을 사랑하는 청년으로 자라 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제 소년은 하늘이 아닌 자기 앞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조금 슬픈 얼굴의 여섯 살 소년은 엷은 미소를 띤 열여덟 살 청년으로 컸다. 변하지 않은 것 하나, 첫 장면처럼 마지막 장면에서도 메이슨은 화면 바깥을 응시한다. 청년이 된 메이슨이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또 다른 메이슨에 해당하는 자신을 바라본다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앞에 펼쳐진 미래를 기대하는 게 아니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보이후드>는 시간을 과거에 흘러간 어떤 것이라는 개념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살아가야 할 매 순간이자 현실이라고 <보이후드>는 말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나의 소년기를 향수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나의 소년기 혹은 삶의 한순간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있었던 거다. 메이슨의 알싸한 성장통이 나의 것인 양 내 몸이 반응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서부에 선 사나이 존 포드의 < 수색자 >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이든(존 웨인)은 왜 끝까지 가야만 했을까? 가족을 무참히 살육한 인디언에 대한 복수는 서사의 표면적인 이유만 될 뿐이다. 영화가 중반에 이르면 그와 함께 추적에 나섰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버리고 그는 철저히 혼자만의 여정을 지속한다. 그 여정 속에서 그는 서부를 횡단하고 때로는 여러 인디언 부족들과 맞닥뜨리지만 정작 이 영화가 목도하는 것은 개인에게 투영된 서부라는 거대한 공간과 19세기 중엽의 미국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붕괴하고 파괴된 한 사나이의 황폐한 내면이다. 그래서 종종 불모한 서부를 포착하는 익스트림롱쇼트들은 객관적 풍경 쇼트로서가 아니라, 그다음에 제시되는 이든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의 클로즈업을 부연하는 심리적 쇼트로 전화한다. 결국 <수색자>는 파괴된 사나이의 황폐한 내면을 그려내는 심리적 스릴러로 다시 읽힐 수 있다. 여기서 이든이 왜 집착적이고 광적으로 복수의 추적을 계속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종종 서부 사나이 특유의 ‘명예율’로 응답된다. 자신의 법과 숙명에 충실한 사나이들. 죽음의 공포 속에서 흔들림 없이 그저 예정된 운명으로 치닫는 단독자들. 세상의 질서와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논리에 충실한 소통불가의 사나이들. 현대 영화에서 이를 가장 흥미롭게 계승했던 캐릭터는 의외로 코엔의 ‘안톤 쉬거’였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서 그는 서사의 초반에 부과됐던 행동 명령(돈 가방을 둘러싼 청부)이 무화된 이후에도 살육을 계속한다. 때로는 그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야기할 결과에 동의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는 숙명처럼 자신의 명예율, 자신이 내뱉은 언어에 충실하기 위해 끝까지 간다. 이는 흡사 이든과 닮아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에서 코엔 형제의 주제의식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따로 존재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에 가장 충실한 캐릭터로서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마을 보안관 ‘벨’이다. 은퇴를 앞둔 이 노년의 보안관은 쉬거의 흔적들을 추적한다. 쉬거가 이든처럼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결코 회피하지 않고 질주하는 단독자였다면, 벨은 그의 흔적들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 삶의 무력함을 읽어내는 존재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벨의 공포와 두려움, 주저와 회피에 대한 욕망은 단순히 나약한 인간의 표상이 아니라 오랜 시간 삶을 지속해 온 노인의 경험과 혜안이 만들어낸 결과로서 그려진다.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하는 노년의 보안관 벨은 삶의 불모함과 우발성, 공포와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력함을 아는 인간으로 형상화된다. (이는 이스트우드의 노인-현자의 캐릭터와는 대별된다) 표정의 웨스턴 토미 리 존스는 얼굴의 미장센이 가능한 배우이다. < 수색자 >에서 장엄한 모뉴멘트 벨리보다 중요한 쇼트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존 웨인의 근심 어린 얼굴-이미지, 클로즈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어떤 풍경이나 소품을 동원한 미장센보다도 심연의 깊이를 지닌 얼굴의 불가해 한 이미지들은 때로는 그 자체로 압도적인 미장센을 형성하곤 한다. 이것은 젊고 아름다운 배우들의 클로즈업과는 차원이 다르다. 노년의 배우들, 영화의 역사 속에 자신의 삶을 오롯이 새긴 배우들의 역사, 그들 얼굴의 주름과 표정이 겹쳐질 때, 그 얼굴 이미지들은 영화의 주제를 응축하는 쇼트가 되기도 한다. < 용서받지 못한자 >(혹은 < 스페이스 카우보이 >)에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이 그랬고, < 웨이 백 >에서 에드 해리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혹한의 시베리아 풍경의 잔혹함보다 에드 해리스의 얼굴 이미지 한 컷이 더 많은 삶의 공포와 고난을 설명한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서 토미 리 존스는 삶이 두렵고 불가해 하지만, 비록 주저할지언정 회피할 수 없음을 아는 노인이다. 그래서 그는 한발 늦더라도 그 자리(서사의 자리, 사건의 자리, 숙명의 자리)에 끝까지 가야만 했던 인물이다. 그 자리들은 언제나 죽음을 둘러싼 자리이다.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의 형상, 혹은 죽음이 벌어지는 결정의 순간, 또 혹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는 숙명의 순간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토미 리 존스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배우-캐릭터의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이는 이후 자신이 연출하게 되는 일련의 영화 속 죽음과 캐릭터와도 닮았기 때문이다. 과거로의 횡단 토미 리 존스가 연출한 첫 번째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2005)이었다. 멕시코 국경 지역에 사는 미국 농장주 피트 퍼킨스(토미 리 존스)는 자신이 고용한 불법 이주노동자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자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멕시코 불법 이민자인 그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고 묘비명도 없는 곳에 묻어버린다. 이에 피트는 홀로 범인을 잡아선 멜키아데스의 시체를 파낸 뒤, 멜키아데스가 고향이라고 말했던 미지의 공간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와 닮았다. 시간적 배경은 현재지만,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으로 설정된 이 풍경 쇼트들은 흡사 19세기 중엽을 배경으로 하는 황폐한 웨스턴의 풍경처럼 보인다. 국경을 가르는 경계들, 인종적 갈등들, 국가의 논리와 개인의 논리가 충돌하는 이 영화적 공간은 오롯이 현재의 미국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정복의 논리, 살육의 논리, 탈주의 논리를 반영한다. 범인이자 백인 국경수비대원인 남자를 불법으로 납치한 피트는 헬기와 자동차로 추격해오는 경찰 당국의 추적을 따돌리며, 서부 사나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멜키아데스의 시신을 실은 말을 타고 멕시코로 넘어간다. 그러나 흡사 과거(서부시대)로의 횡단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서부극과 달라지는 지점은 피트의 여정이 무엇에 의해 추동되는지 납득할 만큼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 수색자 >에서 이든은 자신의 명예율과 숙명에 의해 끝까지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여정과 결과(조카를 되찾아 마을 공동체에 되돌려 놓는 것)는 공동체가 수긍할만한 최소한의 명분이나마 획득한다. 그러나 피트의 기이한 여정은 다르다. 간혹 제시되는 플래시백들은 피트와 멜키아데스가 과거 단순한 고용주-고용인 관계가 아니라 우정 이상을 쌓은 친구였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영화의 리듬과 에피소드들, 그리고 종종 희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연기들, 특히 죽어버린 시체를 산 사람처럼 여행의 동반자로 삼은 뒤, 시체의 썩어가는 얼굴까지 닦아가며 애정을 쏟아 붓는 행위는 흡사 시체애호증이거나 자신만의 제의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로드무비 혹은 웨스턴과 닮아 있는 이 영화는 여정의 끝에 기존 장르가 충족해주는 결과를 제시하지 않는다. 여정은 피트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치유하지도, 새로운 삶을 약속해주지도 않았다. 그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는 전혀 납득될 수 없는 제의를 완수하고 홀연히 사라질 뿐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의 매혹은 그 설명되지 않은 모호함과 끝낼 수 없는 여정의 지속에서 발생한다. 2000년대 이후, 미국의 주요 작가 영화들이 드러내는 상실감, 인과론의 실패, 불안과 공포의 정서들이야말로 고전적 서사의 충족 욕구를 외면하면서 새로운 경향으로서 등장했던 것처럼, 토미 리 존스의 캐릭터들은 행위와 감정의 객관적 설명을 거부한다.(가령 포스트 9.11 이후의 재난 영화, SF 영화들에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의 인과론들. 영웅의 부재, 실존 그 자체의 불안 등) 과거의 사나이 그리고 서부의 여성들 토미 리 존스의 두 번째 영화 < 더 홈스맨 >(2014)(이 영화 역시 올해 칸 영화제 경쟁에서 소개됐다)은 흡사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의 후속편처럼 이어진다. 그리고 전작의 피트는 이 영화에서 ‘브릭’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정말로 서부 시대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여전히 황폐한 서부를 횡단하고 있으며, 역시나 자신만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그 여정을 끝까지 완수해내고, 여정이 끝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정박할 수 없고, 삶 앞에 무력하며, 또 다시 불모의 땅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더 홈스맨 >은 ‘개척의 시대’ 혹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유럽 이민자들이 북아메리카 서부 정복을 정당화하는 용어)이라 칭했던 제국의 논리가 지배했던 시대를 횡단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초반을 지배하는 캐릭터는 힐러리 스웽크가 연기하는 ‘메리 비 커비’이다. 삼십 대에 접어든 그녀는 홀로 자신의 땅과 가축, 집을 지키는 강인한 여성, 노동하는 여성, 무엇보다도 ‘결혼하지 못한’ 여성이다. 그러던 중 자신이 속한 마을 공동체 여성 세 명이 고단한 삶에 지쳐 광기로 치달아 버린다. 남편의 학대와 강간 속에서 미쳐버린 여성, 황폐한 서부에서 극도의 빈곤으로 내몰린 여성, 출산한 아이들 모두를 질병으로 한꺼번에 잃어버린 여성. 공동체와 남자들은 이 여자들을 처분(!)하기 위해 치료라는 명목으로 그녀들을 모두 동부의 한 마을로 보낼 것을 결의한다. 그러나 무려 5주나 소요될 그 횡단의 여정을 책임지겠다고 선뜻 나서는 마을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메리 비 커비가 그 여정의 책임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여성을 불신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곱지 않지만, 아무도 그것을 대신하고 싶지 않기에 그 모든 고난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되고 만다. 이 영화 < 더 홈스맨 >은 명백히 여성들에 관한 영화이다. 올해 칸 영화에 인터뷰에서 토미 리 존스는 이 영화에 페미니즘의 프레임을 적용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영화를 많은 기자들이 ‘서부극’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으며, ‘장르’적 틀로 한정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제국주의에 관한 영화, 페미니즘에 관한 영화, 미국 역사에 관한 영화”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길 원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장르적 포뮬라나 컨벤션을 철저히 외면한다. 대신 그는 서부극을 우회하며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고전적 서부극의 공간과 시간, 사건과 인물들을 거부하고 그 결을 거스르며 새로운 19세기 미국의 풍속화를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서부극을 탈신화하고 19세기 미 제국주의가 자행했던 그 내부의 민낯을 배치한다. 영화는 고전적 서부극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부에서 서부로 나아가는 것(팽창과 정복의 논리)이 아니라, 서부에서 동부로 거슬러 횡단한다. 극 중 네브래스카의 황폐한 자연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동부 아이오와의 도시로 향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사의 생존을 위한 역주행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영화는 서부극에서 배제된 여성의 위치를 재정립한다. 엄마와 창녀라는 이분법으로 재단됐던 고전적 서부극의 존재감 없던 여성들은 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남성 지배와 착취의 논리, 혹은 위선적인 종교의 논리 속에서 사멸해 갔는가에 집중한다. 이 영화의 초반 미니멀하게 촬영된 영화적 쇼트들은 혹독한 자연과 남성들 질서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학대당하는지를 몹시 처연하면서도 섬뜩하게 그려낸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이 크리스 멩게스(켄 로치의 오랜 촬영 감독)의 카메라에 의해 멕시코 접경 미국의 풍경을 황폐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그려냈다면, 이 영화 < 더 홈스맨 >은 오히려 사건의 처연함과 공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듯 아름다운 이미지 수사학으로 배치한다. 로드리고 프리에토(주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를 촬영했던 감독)의 프레임은 토미 리 존스와의 협의하에 조셉 알버스(Josef Albers), 도달드 주드(Donald Judd)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영화로 재현했다. 가혹한 현실의 풍경들, 현실과 환영의 기이한 공존 속에 속박당한 여성들. 잔혹하지만 처연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들의 존재. 그 속에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개척자들의 빈곤한 집 혹은 인간 군상. 광포한 폭력과 비참한 여성들의 아름다움은 기이한 몽타주를 형성한다. 토미 리 존스의 캐릭터 조지 브릭은 이때 등장한다. 무단으로 한 집을 점유하다가 마을 남자들에 의해 처형당할 뻔 한 그를 커비가 우연히 발견해선 구해주는 대가로 이 여정의 수행원이 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얼핏 야비하고 희극적으로 행동하지만, 그는 충분히 탈주할 수 있는 무수한 순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험난한 여정 동안 커비의 옆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여성들을 보살핀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에서 시체를 목적지에 끝까지 가져가야만 했던 피트처럼 이 영화 속 브릭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의지로 역시나 끝까지 간다. 죽음과 장례식, 그리고 무덤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은 제목에서부터 세 번의 장례, 즉 매장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멜키아데스는 단 한 번 죽었지만, 제의는 진정한 애도가 종결될 때까지 피트에 의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비록 여정의 마지막 순간, 피트는 진심이라 믿었던 멜키아데스의 가족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상의 고향을 설정한 뒤 장례를 올린다. 그를 움직이는 것 혹은 그의 욕망은 현실적인 질서와 명령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만이 종결지을 수 있는 애도의 이상적(비현실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정, 애도의 제의는 동시에 대단히 정치적인 풍속화이기도 하였다. 국경과 인종, 탈주와 추적, 제국과 식민의 논리 속에서 무수한 폭력과 죽음들이 발생하고 방치된다. < 더 홈스맨 > 역시 그러한 역사적 알레고리를 형상화하는 여정으로 향한다. 제목의 역설, ‘집으로 데려다 주는 남자’가 아니라, 애시당초 이 영화 속 모두는 멜키아데스처럼 집도 고향도 불분명한 존재들이었다. 여성들은 동부로 추방당하는 것이었고, 기병대 탈영병이었던 브릭 역시 그 어디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든과 피트처럼 미션이 완료된 후 또다시 공동체를 떠나야만 하는 숙명의 방랑자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 더 홈스맨 >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영화의 역사적 정치학, 서부의 탈신화, 페미니즘의 역사가 아니라 ‘죽음’의 표식과 그것을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토미 리 존스의 제의에 관한 부분이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처럼 이 영화에도 무수한 죽음과 무덤들이 등장한다. 우선 첫 번째 죽음은 영화의 초반부에 무수하고 일상적인 것으로서 제시된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이 겪어야만 하는 어린 자식의 죽음, 혹은 광기에 의해 행해진 자식 살해,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끝내 사라지지 않고 그들 곁을 배회하는 죽은 자들의 유령들이 등장한다. <더 홈스맨>은 죽은 자 혹은 죽고자 하는 자들과 함께 시작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죽음이 커비와 브릭의 여행을 야기한다. 두 번째 죽음은 여정 중 발견한 인디언의 무덤에서 브릭이 시체를 감싼 모피를 훔쳐내는 장면과 그 사건 이후 바로 이어지는 백인 소녀의 무덤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브릭이 인디언 시체의 옷을 벗겨 가졌던 것처럼 소녀의 무덤 역시 인디언들이 옷을 얻기 위해 파헤친 것이었다. 커비는 여기서 여정을 잠시 중단한다. 곧고 신실한 마음을 가진 그녀는 소녀의 무덤을 제대로 수습해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브릭은 기다릴 수 없다며 여자들과 함께 먼저 떠나버린다. 무덤을 수습하고 브릭 일행을 쫓아갈 작정이었지만 사방이 황폐한 지평선에 불과한 그곳에서 커비는 길을 잃는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그녀를 태운 말은 브릭 일행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소녀의 무덤과 묘비명 앞으로 되돌아온다. 죽음의 반복강박증.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녀가 간신히 브릭 일행을 만나게 됐을 때, 브릭은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인디언을 대량 학살한 기병대원으로서의 과거, 추악한 과거로부터 그는 탈출하는 중이다. 세 번째 죽음은 돌연한 커비의 죽음이다. 강인하지만 결국 심리적으로 붕괴하고만 그녀는 새벽녘 낯선 숲 속 나뭇가지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브릭은 처음으로 죽음에 예의를 바쳐 그녀를 매장한다. 세 번째 죽음 즉 커비의 죽음은 그가 이제 미쳐버린 여자들과의 여행을 지속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녀들과 함께 동부로의 여행을 지속하는 것을 택한다. 결국 토미 리 존스는 계속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둘러싼 불모한 환경과 거역 불가능한 삶의 숙명들, 원초적인 고독과 불안들, 삶의 불가해 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의 벨로부터 < 더 홈스맨 >의 브릭까지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발버둥 치거나 탈주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숙명의 길을 두려움과 회한 속에서 받아들일 뿐이다. 그들이 탈주하지 않는 것은 이미 그들이 오랜 삶을 살아왔기에 어떤 운명의 길이 펼쳐질지 직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벨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읊조리는 꿈 장면의 어둠 속 행렬과 불안처럼). 다만 토미 리 존스는 여기서, 죽음이 거역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차라리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다. < 멜키아데스의 세 번의 장례식 > 역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존재에 대한 필사의 제의이며, < 더 홈스맨 >에서 브릭이 마지막 순간에 가슴에 안고 있었던 커비의 묘비 역시, 흔적 없이 사라질 존재에 대한 기억의 의지이자 애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과 의지조차도 어떻게 세상에 의해 쉽게 붕괴되는지 혹은 지워지는지 또한 토미 리 존스는 잘 알고 있다. 만취한 브릭이 커비의 묘비를 가슴에 앉고 새로운 여정을 위해 배에 올랐을 때, 한켠에 내려놓았던 묘비는 누군가의 무심한 발길질에 의해 물속으로 빠져버린다.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브릭의 마지막 노래와 춤사위는 그 자신의 고통조차도 감춰버린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더 홈스맨>은 그렇게 사위어간 무수한 개인들, 여성들, 이제는 삶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된 가련한 노인에 대한 기억과 회한의 영화인 것이다.
고다르의 첫 번째 장편 3D 영화 < 언어와의 작별 >에 대해 무언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지난 10월에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한 번의 감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라는 식의 편리한 변명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일단 보고 나면 그것에 관해 자꾸 무엇인가 말하고, 쓰고 싶게 만든다. 우리를 언어를 향해 돌려세운다. 그렇게 다시 돌아서서 언어와 마주하고 나면 고다르적 연상의 벡터를 따라 온갖 상념이 흐르고, 갈라지고, 또 퍼져나간다. 이건 작별(‘언어여 안녕’)의 말 한가운데 자리한 모음이 돌아서면 환대(‘언어야 안녕’)의 말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고 나니, 한국어로는 ‘언어와의 작별’보다는 ‘안녕, 언어’라는 제목이 영화의 무드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원제 ‘adieu au langage’는 고다르의 언어유희를 따라 ‘Ah dieux, Oh langage’(오 신들이여, 오 언어여)로 읽히는 데 그치지 않고 - 그런데 왜 신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 호명되는 것일까? 왜 언어는 여전히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일까? - ‘a dieu, au langage’(신에게로, 언어에로)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작별, 호명 그리고 지향. D: 차원(Dimension) 고다르가 즐겨 인용하는 앙드레 바쟁의 금언 가운데 하나는 “원근법은 서구 회화의 원죄”라는 것이다. < 언어와의 작별 >이 3차원의 환영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입체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겠지만, 이토록 단순한 방식으로 3D의 개념을 전복하는, 혹은 혁신하는 영화가 될 거라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다르는 때로 (‘3D 안경’을 쓰고 볼 때) 좌우 양쪽 눈에 아예 서로 다른 이미지가 입사되도록 함으로써 중첩(superimposition)의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이는 입체적이라기보다는 ‘입체파적’(cubist)으로 여겨진다. 두 대의 분리된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두 개의 눈에 각각 입사시켜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스테레오스코프의 원리는 고스란히 차용하되, 좌우 양안에 비치는 두 이미지가 반드시 시각적으로 유사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순진한, 하지만 매우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고다르가 3D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이미지의 특성에 대한 그의 오랜 사색의 노정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사각의 프레임 안에 담긴 시각적 정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지란 사실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란 무엇보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상이한 리얼리티의 ‘관계’이자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그것을 통한 ‘생성’이다.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가 < 열정 >(1982), <리어 왕>(1987), < JLG/JLG: 12월의 자화상 >(1995) 그리고 < 영화의 역사(들) >(1988~1998) 등에서 즐겨 인용해 온 피에르 르베르디의 「이미지」(191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그것은 얼마간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리얼리티에 의해 생성되는데 그들 간의 비교가 아니라 조화를 통해서다. 이러한 두 개의 리얼리티의 관계가 멀고 진실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더욱 강력해지고 보다 감정적인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 유추(analogy)는 창조의 매개체이다.” 두 대의 카메라,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두 개의 눈이 지향해야 할 것은 시각적인 깊이의 환영이 아니라 유추를 가능케 하는 거리를 둔 둘(deux)의 관계로부터(만) 생성되는 정신적 이미지, 사유의 이미지다. 말라르메가 자신의 시에서 선언했듯,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불러낸다.”(Toute pensee emet un coup de des) 하지만,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지하지 못할 것이다.”(Un coup de des jamais n’abolira le hasard) 그리고 “아무것도 [...]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장소 밖에서는 [...] 아마도 [...] 하나의 별자리 [...] 를 제외하고는.”(rien [...] n’aura eu lieu [...] que le lieu [...] excepte [...] peut-etre [...] une constellation) 여기서 이어지는 생각, 주사위 던지기와 별자리. D: 주사위(Dice) < 언어와의 작별 >에 대한 예고편과도 같았던 3D 단편영화 <세 가지 재앙>(2013)에서 고다르는 ‘3D’의 ‘D’를 ‘재앙들’(desastres)로, 거기서 더 나아가 ‘주사위들(des)―별들(astres)’로 바꿔 읽었다. 말라르메적 상상? 물론이다.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말라르메의 시와 수리철학자 고트롭 프레게의 언급을 다음과 같이 (멋대로?) 포갠다. “프레게는 사유가 수(數)를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를 구성한다고 했다.” 그런데 고다르는 왜 말라르메의 주사위―별자리에서 프레게를 떠올린 것일까? (혹은 프레게에서 말라르메로 간 것일까?) 혹시 프레게의 다음과 같은 언급 때문이었을까? “주사위의 네 눈(目)에 대한 표상에서 우리는 ‘넷’이라는 낱말에 대응하는 그 무엇이 나타난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 수는 자립적 대상으로도 외부 사물의 성질로도 표상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는 감각적인 것도 외부 사물의 성질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수 0의 경우 가장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0개의 별을 표상하려고 해보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상상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 ‘별’이란 낱말이나 0에 대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지금 아무 별도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황을 표상할 뿐이다.”(「산수의 기초」 제59절) <세 가지 재앙>은 세 개의 주사위를 통한 세 번의 주사위 던지기로 진행된다. (위 사진 참조) 의미심장하게도, 세 번째에 가서는 텍스트가 주사위들의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지 않고 그저 검은 화면 위에 떠오른다. (3D는 아직 그에 걸맞은 가능한 이미지 생성의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는 고다르식의 일갈일까?) 이 주사위 놀이 클립 영상은 1977년에 고다르가 안느-마리 미에빌과 함께 만든 12부작 시리즈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두 명의 아이들을 통한 프랑스 여행’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심지어 영상 위에 입혀진 내레이션까지 고스란히 가져왔다. “괴물의 진화는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미시적 사건들과 돌연변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개념은 시간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에서는 이 뒤로 “계속되는 주사위 던지기, 하나의 하부단위에 이은 또 다른 하부단위의 생성, 이러한 우연의 게임으로부터 괴물의 신체를 형성할 수십만 번의 연쇄작용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태양계의 수명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 괴물들과 관련된 두 개의 가장 중요한 발명은 섹스와 죽음이다.”라는 내레이션이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프랑스/여행/우회로/둘/아이들>의 주사위 놀이가 세 개의 주사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3D 테크놀로지에 대한 숙고의 과정에서 고다르가 사후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에 따라 ‘괴물’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대중에서 디지털 독재로. 이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언어와의 작별 >에서 고다르는 (다시 세 개의) 주사위로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 다시 한 번, 근본문제(Grundproblem)에 대한 접근은 순진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D: 디지털(Digital), 0과 1이라는 거짓된 둘 <세 가지 재앙>에서 고다르는 “디지털은 독재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한 바 있다. 디지털 영화, 폭넓게는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사유는 텔레비전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맞닿아 있다. < 언어와의 작별 >에서 그는 블라디미르 츠보리킨이 텔레비전을 발명한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선출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츠보리킨이 텔레비전 시스템을 고안한 것은 사실 1933년이 아닌 1923년이다. 이러한 연대 착오는 두 개의 일견 무관해 보이는 역사적 사실을 몽타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영화의 역사(들) >에서 텔레비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은 오늘날 디지털 문화에 대한 고다르의 진단으로 고스란히 연결된다. “전 세계의 스펙터클을 허름한 침실들로 가져간다는 레옹 고몽의 꿈이 텔레비전을 통해 실현된 것이라면, 그것은 목동의 머리 위의 광활한 하늘을 엄지동자 톰(Tom Thumb)의 높이로 축소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문장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언어와의 작별>에서 한 등장인물은 스마트폰 화면의 아이콘을 엄지동자 톰이 길을 찾기 위해 사용한 조약돌과 비교한다.) ‘텔레-비주얼’(tele-visual)이 도처에 존재하는 것(독재)이 된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서이다. 고다르는 1970년대부터 그의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노이즈’에 대한 관심을 전면화하는 것으로 그에 맞선다. 디지털적 이미지가 우리의 보는 방식을 표준화한다면, 고다르는 디지털적 이미지 생산의 기제들을 총동원해 그것들을 충돌시키고 각각의 차이와 부조화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즉 디지털적 이미지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언어와의 작별>을 제작하기 위해 일곱 가지 다른 종류의 카메라 - 캐논의 DSLR, 파나소닉의 Lumix 그리고 ‘웨어러블’(wearable) 카메라인 GoPro에 이르기까지 - 를 활용했는데, 촬영된 영상들은 균질하게 마름질되지 않은 채 뒤섞여 가히 ‘시각적 노이즈’의 카니발이라 할 만한 광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도래하는 건, 적어도 예견되는 건, 오직 이 소란 속에서다. 적잖은 평자들이 <언어와의 작별>을 보며 스탠 브래키지의 < 독 스타 맨 >(1964)을 떠올렸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자연으로 향하는 통로로서 은유를 활용”(블레이크 윌리엄즈)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닮아 있다. 또 하나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D: 만남으로 개시되는 둘(Deux) 은유(metaphor)란 무엇인가? 그것은 응축된 픽션이다. 그것은 픽션의 한계이자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픽션이다. < 언어와의 작별 >이 하나의 시청각적 ‘실험’에 그치지 않는 것은 여기서 고다르가 어떻게든 이야기(하기)의 가능성을 붙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두 커플에 대한 두 번의 같지만 다른 이야기라고 한 고다르의 말을 믿어야 한다. <필름 소셜리즘>(2010)에 출연한 바 있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고다르와 작업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고다르의 차기 작품에서 저는 어쩌면 호화 유람선 횡단에 참여한 철학자-강연자 역할을 맡아 한 장면에 출연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다르에게는 사랑이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랑과 저항 사이의 접속에서 고다르와 저의 차이는 바로 멜랑콜리인데, 이것은 고다르에게 모든 것의 색깔을 의미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사랑 예찬」) <언어와의 작별>과 관련해서, 여기에 바디우의 다른 텍스트를 겹쳐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만남을 통해 개시된 둘, 사랑이 그 진리를 실행하는 둘은 그 자신에게 닫힌 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둘은 통로이고 중심점이며, 최초의 수적 성격이다.”(「베케트에 대하여」) <언어와의 작별>을 구성하는 한편 작품 곳곳에 산포된 여러 ‘둘’들, 영과 무한, 자연과 은유 그리고 고다르적 픽션에 관한 이야기는 이 영화를 다시 본 다음에나 가능하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남아 있다. 고다르적 멜랑콜리? < 언어와의 작별 >이 고다르의 고별사일까? 이 글에서는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고다르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원기 왕성하며 활력으로 넘쳐난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 네 멋대로 해라 >(1960)를 당대에 보았던 이들은 꼭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하고 멋대로 상상해 보곤 했다. 영화의 폐허 속에서 ‘영화 같은 무엇’의 섬광이 춤추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16편 영화천구 Celestial Sphere of Cinema (2013년 11월 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북극]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장-뤽 고다르, 2014 야만의 땅 Barbaric Land, 예르반트 지아니키안 & 안젤라 리치 루키, 2013 서유 Journey to the West, 차이밍량, 2013 물 속의 도시, 김응수, 2014 [황도] 시인 요아브 The Kindergarten Teacher, 나다브 라피드, 2014 도원경 Jauja, 리산드로 알론소, 2014 자유의 언덕, 홍상수 프랑스 공주 The Princess of France,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4 [적도] 더 홈스맨 The Homesman, 토미 리 존스, 201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 웨스 앤더슨, 2014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마틴 스콜세지, 2013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데이빗 크로넨버그, 2014 [남극] [TV 시리즈] 트루 디텍티브 True Detective, 캐리 후쿠나가, 2014 [필름 퍼포먼스] 간섭의 셀룰로이드 Cellule d’intervention, 메탐킨 평행 I~IV Parallel I~IV, 하룬 파로키, 2012~2014 사진측량, 변재규, 2013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요청한 것은 개봉작과 미개봉작을 모두 고려해 2014년 11월 1일부터 2014년 10월 31일까지 제작, 공개된 영화의 베스트 10 리스트를 꼽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있지 않은 이상, 지난 1년 간 나온 영화들을 신속히 폭넓게 접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고민 끝에 나는 가능한 이 설문의 취지를 존중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리스트의 각 ‘구역’이 (그저 ‘최고의 영화들’의 나열이 아니라)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지난 1년 간 내가 관측할 수 있었던 ‘영화천구’의 짜임을 추정케 하는 별자리들이 되게끔 구성해 보았다. (황도의 4편의 영화들 가운데 2편은 천구의 북반구 쪽에, 2편은 남반구 쪽에 자리할 것이므로, 관측자는 북극 쪽을 향하건 남극 쪽을 향하건 10편의 영화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관측자가 북극이나 남극 어느 쪽을 향하건 항상 보이는 것은 적도의 영화들이다.) 이 리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그간 미처 보지 못한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보려 하지는 않았다. 즉, 위 리스트의 영화들은 베스트 10 설문에 참여하게 될 것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고 편견이나 강박이 없이 본 것들이다. 또한 영화관에서 본 작품들과 (부득이한 경우) HD 화질로 모니터한 작품들 가운데서만 골랐다. 기회가 없어 보지 못했거나 적절한 환경에서 감상할 수 없었던 것들 가운데 특별히 다음의 영화들은 조만간 꼭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다. 페드로 코스타의 <호스 머니 Horse Money>, 라브 디아즈의 <아프리오리 From What is Before>,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 조 단테의 <베링 디 엑스 Burying the Ex> 그리고 임흥순의 <위로공단>. 이 리스트를 작성하기 전(11월 13일 이전) 가장 최근에 본 개봉작은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였는데,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시리즈물 <하우스 오브 카드> 첫 번째 시즌에서 그가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처럼) ‘스타일적 장치이자 서사를 위한 구실로서의 냉소주의’가 지나쳐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