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후편)
- 감독
- 이명우
- 제작년도
- 1936
- 출연
- 이금룡, 이경선, 유선옥, 이종철, 나웅, 김한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90년의 역사: 광주 지역 최초의 조선인 대상 상설관으로 출발하다 광주극장은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46번길에 있는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1일에 개관했다. *주1 광주의 향토극장으로는 지금은 사라진 ‘무등극장’을 비롯, 두 개 정도의 극장이 더 있었으나 이제는 오롯이 광주극장 하나가 남아있다. 광주극장은 현존하는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자, 인천의 애관극장 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극장이다. 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관극장으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 할 수 있다. 개관 이후 거의 90년의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광주극장은 단순한 극장이 아니며 영화인들은 물론 광주시민, 지역주민들에게 그 공간 자체가 갖는 가치와 상징이 크다. 광주극장이 광주 지역 최초의 극장은 아니다. 광주극장 이전 광주좌와 제국관 , 광남관 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극장은 일본인 극장주가 경영을 하였고, 주된 대상 관객 역시 광주에 있던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대상의 극장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1928년부터 광주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영화관 설립의 불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세워지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어, 1935년에야 조선인이 극장주가 된 광주극장이 개관했다. 광주극장이 세워진 위치 자체도 조선인들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에 그 의미가 더 컸다. 원래 충장로에서 남해당이라는 큰 상점을 경영하던 이준실이란 사람이 광주극장을 계획했는데,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학교법인 유은학원의 설립자이자 만석꾼이었던 최선진에게 건축 중인 건물을 넘겼다. 최선진은 1933년 30만원의 자본금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35년 1,250명 수용 규모의 광주극장을 개관했다. 광주극장의 역사를 1933년으로 헤아리는 것은 법인이 설립된 해 기준이다. 현재까지 그 자손들이 광주극장 건물의 소유주이자 서류상 광주극장 대표로 되어 있다. 광주극장 1층 로비와 출입문 광주극장은 충장로 5가에 위치했는데, 충장로 1가, 3가는 일본인들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반면, 5가는 조선인들 상권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었다. 즉 충장로 5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선인들의 접근성이 높았는데, 조선인의 자본으로 조선인이 세우고 직접 운영하다보니 조선인들을 위한 문화적 공간이 되었음은 물론, 단순한 극장을 넘어 민족적이면서도 지역의 구심점이 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광주극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영화 상영 외에도, 창극이나 판소리 등의 공연, 조선인 단체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면서 조선인 지역극장의 정체성을 지켰으며, 해방 후에는 김구의 강연회를 포함한 정치집회, 음악회, 연극제를 여는 등 문화교육운동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역극장으로서의 특성은 일제의 감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는데, 그 검열의 흔적은 아직도 극장 안에 남아있는 ‘임검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검석이란 상영이나 공연이 진행되는 현장을 점검하는 검열관들을 위해 만든 좌석으로, 임검은 사전 검열과는 다른 별도의 행정 단속 절차였다. 또한 호남지역 최초로 한국인이 세운 극장이었기에 일본인 소유의 극장에서는 올리지 않는 영화들인 < 홍길동전 >(김소봉, 이명우, 1935)과 < 춘향전 >(이명우, 1935) 등과 같은 영화를 광주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광주극장 내 남아있는 임검석 1968년, 극장에 큰 화재가 나서 건물 대보수를 했고 1968년 10월 4일 재개관했는데 현재의 광주극장(864석)이 재개관한 광주극장 건물을 그대로 유지 보수하여 쓰고 있다. (1997년에는 내부 좌석 교체와 개보수 및 건물 전면 일부를 변경) 화재 당시 건물이 타면서 극장 안에 보관 중이던 1968년까지의 자료도 함께 불타버린 점이 가장 큰 손실이다. 예술영화 전용관이 되다 광주극장이 지금처럼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98년 6월, 극장이 학교보건법 상 정화구역 내 유해업소로 지정되어(15m 안에 유치원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진 이전 하거나 2000년 12월 말까지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광주극장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야 예술영화 프로그램을 신설해 다른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 교육청은 행정명령 불이행으로 극장주를 검찰에 고발했고, 극장 측도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면서 맞섰다. 결국, 2004년 5월 27일, 헌재는 학교정화구역에서의 극장 영업을 금지한 학교보건법 관련 조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영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광주극장은 2016년경 한 번 더 위기를 맞이한다. 광주극장은 2002년부터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왔다. 그러다 2016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 전용관 사업’이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사업’으로 바뀌었는데, 위원회가 정하는 영화의 상영 기준을 충족하는 영화를 상영해야 지원을 하는 제도였다. 광주극장은 이 방침을 ‘사전검열’이라고 보고 지원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만의 특색과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운영 수익의 35%를 차지하는 지원금이 막히면서 광주극장은 극장 유지에 고비를 맞게 됐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후원회원 모집’ 캠페인을 진행, 현재 약 450여 명의 후원회원을 두고 있다. 현재는 영화진흥위원회와 광주광역시의 사업 보조금, 그리고 광주극장 후원회원의 후원금으로 운영 중이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광주광역시 동구청은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광주극장 살리기에 나섰다. 광주 지자체 최초로, 고향사랑기부제의 구체적인 사용처를 적시한 프로젝트다. 광주극장 상영관 1층 내부 전경 광주극장은 관객의 영화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영화 시작 전에 상업광고는 절대 하지 않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조명을 켜지 않는다. 비좌석제라서 들어가서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면 되고, 지금도 필름 영사기를 보관하고 있어서 일 년에 3~4번 정도는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20년 이상 극장에서 일하셨던 영사기사 두 분이 디지털과 필름 영사기를 돌리며 극장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역사를 간직한 채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광주극장에 들어서면 극장 곳곳에는 극장 역사를 알 수 있는 많은 기록과 자료, 기자재들이 가득하다. 아이스크림을 팔던 기계, 영사기, ‘개봉푸로’라고 적힌 오래된 안내판, 극장 간판을 그리는 박태규 화백의 작은 간판 작품이 놓여 있다. 박태규 화백은 1992년 광주극장에 입사하여 2004년까지 간판을 담당했다. 마지막 직함은 간판실 부장이었다. 박태규 화백은 단순한 간판 화가가 아니라, 민중미술가로서도 활동해 왔는데 최근에는 간판 미술을 전시하고 교육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2015년부터 광주극장과 함께 영화간판시민학교를 운영해오고 있다. 영화간판학교의 결과물이 전시된 광주극장 전면 포스터대 한편 광주극장은 극장 뒤편 관사를 개조한 영화의 집에 건립 당시의 극장 전경과 주변 거리 풍경이 담긴 사진첩과 그동안 광주극장을 거쳐 간 많은 사람의 근무기록부, 영화 및 공연 기록, 입장권 수불표 등도 보관하고 있다. 1960년대는 영화 상영 전 아나운서가 멘트를 하고 영화를 상영했는데 아나운서 멘트 노트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극장 자체가 영화박물관인 셈이다. 지금은 광주의 구도심이 되어 버렸지만 예전에 많은 한복집과 보석상들이 자리 잡았던 광주 충장로 골목은 해방 이전에는 호남상권의 중심으로 전성기를 보냈고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호남 사람들의 중심지이자 번화가의 역할을 맡아, 지금도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2020년 광주광역시 조사 당시 광주에서 30년 이상 된 가게 160곳 중 120곳이 충장로에 모여 있었는데, 이는 충장로에 위치한 가게가 2,000여 개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1935년 시작하여 90년 가까운 시간을 지켜온 광주극장에 이어 1946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전남의료기상사가 아직도 충장로 5가에 있으며, 이외에도 충장로의 흥망성쇠를 보고 자라며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가게도 많다. 충장로의 오래된 가게는 그 자체로 지역민들에게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광주극장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애정과 호응 역시 광주극장이 위치한 거리의 특성과 더불어 개관 당시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2020년 광주시 동구는 광주극장 옆 골목길을 ‘영화가 흐르는 골목’으로 조성하였고, 나아가 광주극장과 문화공간 ‘영화의 집,’ 독립서점 ‘소년의 서’ 등 골목에 소재한 문화자원을 적극 활용해 광주극장 인근 골목을 영화·문학·문화가 흐르는 광주의 대표 예술 골목으로 재탄생시킨 바 있다. 원래 광주극장 옆 골목길은 쓰레기가 넘치고 악취가 많이 풍겼는데, 박태규 화백이 직접 그리는 손간판뿐 아니라 광주의 극장 문화사를 담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전시하여 거리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영화가 흐르는 골목 벽면 전시-광주의 극장문화사 광주극장은 시네필들의 성지나 광주의 가장 오래된 극장(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극장)이나 랜드마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이자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소비자가 자부심 느끼며 영화와 공간을 모두 이용하는 상징적 소비를 하는 극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46번길 10 2. 설립일 : 1935년 10월 1일 3. 대표자 : 최용선 4. 규모 : 연면적 2,264.85㎡, 대지면적 1,286.6㎡, 건축면적 999.4㎡ / 지하 1층, 지상 4층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수) : 1개관, 856석, 장애인 좌석 30석 6. 운영시간 : 10:40 – 22:00 7. 입장료 : 성인 1만원, 청소년 9천원, 조조 8천원, 실버·장애인·초등학생·CMS 후원회원 7천원, 패키지 티켓(1인 사용) 5편(2개월) 4만원, 3편(1개월) 2만 7천원 8. 조직 구성 대표(최용선, 극장주), 전무이사(김형수, 실질적인 운영), 영사실장(정홍주), 매표직원 2인(비정규), 미술실 박태규 화백은 ‘영화간판학교’ 프로젝트로 참여 글/진행 : 김문경 사진 : 허 성 취재 일자 : 2023년 7월 27일 *** 주1. 위경혜의 연구에 따르면 10월 1일에 낙성을 하고 10일에 개관식을 했다고 한다. 위경혜, 『광주극장: since 1933』,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8, 46쪽. 이하 이 글의 상당 부분 내용은 이 책을 참고로 했음을 밝힌다.
(그림1) <홍길동>(신동헌, 1967) 신문광고, ‘한국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나왔다 홍길동’ 1) (그림2) <호피와 차돌바위>(신동헌, 1967) 신문광고. ‘약속대로 또 나왔다!’ 영화의 예고편을 TBC-TV를 통해 매일저녁 광고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2) 어쩌면 ‘홍길동(洪吉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홍길동’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견본용 이름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의를 실천하고자 한 가상의 위인이자 의적(義賊, Dark Hero), 홍길동이 평범한 인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16세기 경)에서 탄생한 홍길동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아마 이 두 형제의 역할이 혁혁하지 않았을까.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1300여회 연재)에서 홍길동은 그 모습을 찾고, 형 신동헌 감독의 한국 최초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에서는 드디어,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던 그 <홍길동>이 2008년 5월 41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소년 용자 길동(少年勇者ギルドン)>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이 영화는 일본 오사카 필름아카이브에 일본어판 16밀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를 복제해 한국에 남아있던 사운드 필름과 동기화시켜 복원, 10년 전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림3) 신동우의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연재) 3) 당시 신문기사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듯이 <홍길동>이 개봉된 1967년은 ‘특수오락영화 붐’이었다. 특수영화란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같은 공상과학 영화, <흥부와 놀부>(강태웅) 같은 인형극 영화는 물론 <홍길동>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의 영화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특수영화는 ‘사랑 타령의 극영화에 식상한 관객에게 무한한 공상과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4)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장르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관객으로 하는 장르로 일컬어지던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렇게 특수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신문들을 보고 자라 나름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일군의 관객으로 성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 상영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에 선두로 나섰다. 신동헌의 <홍길동>은 1967년 1월 21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만들어진 <호피와 차돌바위>는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 15일 또 다시 스크린에서 어린이 관객과 만났다. (그림4) 당시 방송인 전영우, 여성 산악인 김정심, 한글학자 양주동, 극작가 이서구 같은 명사들이 등장해 광고했던 한독약품의 소화제 훼스탈 광고에 신동헌 감독도 기용되었다. 5) 화백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화의 모든 유형-만화 삽화와 한 칸 만화, 서술형 만화와 단행본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까지-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한 가히, 한국만화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다. 벽성공립보통학교와 회령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부, 도서부, 미술부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학생잡지 《형설시대》와 《학생》에는 그가 그려 보낸 만화가 당선되어 실린 적도 있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의 교편을 잡다가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내려와서는 학원 교재 삽화일과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대학교 예과 이과 갑류에 진학하였다. 충무로에서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을 만나 인연을 맺어 『스티브의 모험』(1947)을 간행한 것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대부분은 인천, 거제, 동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부산 《연합신문》 문화부에 전속만화가로 근무하면서 4컷 만화 「주태백」을 그렸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신동헌은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잡지 《여원》, 《새벗》, 《학원》 등에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그가 신문사의 전속만화가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옮겨가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해 3월부터 극장과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달부의 ‘럭키 치약’ 애니메이션 광고, 엄도식의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인기를 끌었고, 신동헌 역시 진로소주의 제안으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에 뛰어들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1961년 12월 KBS가 개국하면서 이를 텔레비전용 16미리로 축소 프린트로 만들어 송출했다. 6) 그는 자신의 집에 ‘신동헌프로덕션’을 차려놓고, 해외 전문 서적을 찾아가며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연구했다. 신능파(넬슨 신), 정병권, 김대중, 신동철, 신동우 등 애니메이터와 컬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진로소주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다. (그림5) 진로소주 두 번째 광고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 (그림6) 진로소주 세 번째 광고 ‘파라다이스’ 첫 번째 광고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에 연료로 진로소주를 넣는 것이 그 내용이고, 두 번째는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라는 내레이션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직장인들이 진로소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제작한 ‘파라다이스’ 광고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라는 광고 음악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선원들이 파라다이스 섬에 내려 그곳의 여인들과 소주를 즐기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신문사 기자의 자격으로 해군 함정을 타고 하와이까지 항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이 광고에 삽입한 음악은 부산 MBC 피디였던 손권식이 작사하고, 허영철이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이 방식, ‘선녹음 후작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텔레비전 광고로서는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었다. 음악과 동작이 리듬감 있게 맞아떨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이후 신동헌프로덕션에는 제약회사, 양조회사, 섬유회사, 전자회사의 극장용·방송용 애니메이션 광고 문의가 쇄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사용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일부와 애니메이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어린이 대상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애니메이션의 제작의 포문을 열은 영화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계몽이나 선전을 위한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던 국립영화제작소를 제외하면 민간에서는 애니메이션 광고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계몽과 상품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는 중요한 매체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들은 애니메이션과 대중을 보다 친숙하게 해주는 매개였던 데다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인력들의 실질적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그림7) 신동헌이 제작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중,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이 제공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갖인 이 한표로’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장면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장면 정부는 공명선거 중요성 인식을 위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7) 의 제작을 신동헌프로덕션에 의뢰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국립영화제작소 이전의 담당기관)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공명선거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이후 새롭게 제정된 양원제를 담은 선거법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이 문화영화의 후반부 3분가량의 애니메이션은, ‘선거일 7월 29일이 참다운 민주주의 기초를 이룩할 뜻 같은 날이므로,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의사로 공명한 선거를 실시해야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두 번의 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와 정부 부처에서 의뢰하는 문화영화의 애니메이션 부분 제작을 통해 신동헌은 24프레임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렇게 경험이 무르익은 그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영화에 도전한다. 영화 선진국에서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그림8) 신동우의 연재만화 단행본 『홍길동』 1권 표지(근일문화사, 1968년 발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전」이 만화가 신동헌 씨의 총지휘로 완성되었다. 상영시간 1시간 15분의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양민을 괴롭히는 양반에 소년 「홍길동」이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에 현대적인 「코믹」 「스타일」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66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만 여 장의 그림을 그려 7개월 만에 제작 완료되었다. 일반영화완 달리 연기 「로케」 「세트」 등이 필요 없지만 「홍길동전」엔 백 8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애니메이터」 50여 명, 채색원 130여 명). 한국에선 처음 시도된 일이라 상상 이상의 노력이 들었고 많은 NG를 내야했다는 것. 화면의 한 동작에 필요한 그림이 60여 장씩이나 들었다고 한다. 녹음도 「배터런」성우인 김수일·이춘사 등이 맡았고 음악은 전정근. 【세기상사 제작】 8) 1967년 1월 21일 공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해 8만 5천 명을 동원하는 파격적인 흥행을 거두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상도 수상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은 1966년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수십 명의 동화부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간 애니메이션 광고 작업을 진행해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지만 장편 영화를 위해서는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보름이나 개봉을 연기하며 작업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긴 셀룰로이드 위에 비닐 컬러 (vinyl color) 물감이 없어 포스터 컬러(poster color) 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채화용 포스터 컬러 물감은 뜨거운 카메라 조명 아래서 금방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컬러리스트가 붓을 들고 촬영 현장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림9) <홍길동>의 주요 장면. 잘 알려졌다시피 원작 「풍운아 홍길동」은 신동헌의 동생인 만화가 신동우(1936~1994)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티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동우가 원작자였지만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는 신동헌의 조수로 활약했다. 지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는 배경과 인물, 움직임의 표현에 있어서, 또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매체 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신동헌은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바꾸었다. 또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눈은 까만 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는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담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눈처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홍길동>은 성우들의 녹음을 먼저 진행했는데 홍길동은 역은 KBS 성우 공채 1기의 김수일이, 차돌바위는 TBC성우 4기로 데뷔한 여성 성우인 김순원이 맡았다. 먼저 녹음을 진행한 성우들의 대화에서 원작자나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효과와 감정이 드러나 후작화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아낸 큰 수확이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 같은 만화왕국’을 꿈꾸었던 신동헌은 <홍길동>을 제작하고 난 직후 한국 만화영화의 가능성은 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가 고민한 것은 ‘외국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대로의 동작의 선을 확립해야한다. 우리 만화영화의 한국적인 동작을 어떻게 창안할 것인가’였다. 9) (그림10)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그림11) <홍길동>에 등장했던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뜻의 차돌바위 (그림12)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홍길동>이 대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서 세기상사와 갈등을 빚었다. 납품 일자를 어겼다고 수익을 배분해주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이후 작품에 재투자로 이어지기 만무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진 신동헌프로덕션은 곧 합동영화사의 제안으로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개봉했다. 원화 6만 장을 그려 상영시간 75분짜리로 찍었고, 그 제작비로 1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홍길동>을 만들면서 신동헌은 <속 홍길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속편이 여의치 않자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로 선회했다. 호피는 호랑이 가죽을 쓴 의로운 인물이라는, 차돌바위는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의미의 마치 배트맨과 로빈을 연상시키는 이 짝패는 「풍운아 홍길동」에서 단역으로 등장하는, 신동우가 창조한 서브캐릭터였다. 세기상사와의 생겨날 수 있는 판권문제를 염두 했던 신동헌은 『홍길동전』이나 <홍길동>에는 없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후속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경계 지역인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신동헌, 신동우 형제답게 이 영화에서는 여진족이 서사상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호피(명호)의 아버지(유세진 장군)가 정벌하던 오랑캐 여진족, 호피의 아버지를 모함한 사또 최진달, 또 그 사또가 연합한 세력인 여진의 욕심 많은 괴물 도마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몽적인 장면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사상의 적은 ‘여진족’으로 명시되지만 은유적으로 이는 북한의 공산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삭풍 선생 : 이 역적무리들. 봐라, 이것이 최진달 일파가 우리나라를 도마술에게 바치겠다는 문서다. 정신 차려라, 호피야. 북녘의 야만인의 피에 굶주린 발톱이 우리나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노리고 있는 이때에, 너 같은 젊은 놈이 그 좋은 칼솜씨를 지니고도, 나라를 위해서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도둑질만 일삼다니.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이놈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목숨을 투계와 같이 버리며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왔다. 알겠느냐? 북쪽 오랑캐들은 이 나라를 삼킬려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려왔으니. (그림13) <호피와 차돌바위>(1967) 중 삭풍 선생의 뼈아픈 훈계를 듣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호피의 모습 하지만 <홍길동>은 물론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흥행 수익을 둘러싸고 제작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다. 영화제작사들은 흥행 수입만을 챙기고 애니메이션 제작 재투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신동헌 감독은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극영화보다도 제작비가 더 많이 들고, 제작 소요 기간도 길며, 오랜기간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인력과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제작사 간의 불협화음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아쉬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림14)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타이틀 크레딧 장면들 신동헌 감독이 이렇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와 안타까운 결별을 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오프닝 크레딧은 조애희가 부르는 주제가 “말띠 신부”(음악 최창근, 작사 유호)의 멜로디에 맞추어 등장인물 커플을 애니메이션으로 캐리커쳐하여 소개하는데 이를 신동헌이 담당했다. 또 이어령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은 신동헌프로덕션의 크레딧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철훈이 구상한 소설 내용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동헌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10분가량 들어있다. (그림1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중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부분 그 외에도 TBC의 풍자해학 사극 <여보 정선달>(1971~1974)에도 신동헌이 참여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비상한 조선의 정선달이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 주제가에 맞추어 타이틀 크레딧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MBC의 장수 어린이프로그램 <뽀뽀뽀>(1983~1992)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뽀뽀뽀>의 고정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배경을 그려 넣었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꼭지에서는 예의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빛을 발했다. 2008년 유실되었던 필름을 되찾은 후 그는 애니메이션 관련 인터뷰나 강연으로 맹활약했고, 2014년 제14회 만화의 날에 기념공로상을 받았다. (그림16) <뽀뽀뽀>(MBC, 1989년 1월 9일) 중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만든 장면들 신동헌 감독을 회고하면서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홍길동>은 ‘프랑스 아네시영화제(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 10) , 실제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하지는 않은 것 같다. 1967년 <홍길동>이 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신동헌 감독이 직접 참관했더라면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신동헌』 편에 실린 필자의 「신동헌 해제」와 구술문,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시된 DVD <홍길동>에 포함된 필자의 「신동헌 감독 소개」를 참조해 재구성하였습니다. 1) 《동아일보》 1967년 1월 19일 5면. 2) 《경향신문》 1967년 8월 12일 5면. 3) 《소년조선일보》 1965년 9월 11일. 4) “[연예오락] 특수 오락영화 「붐」. 괴수물·만화 등, 영화로 뒤쫓는 우주시대 국내기술로 제작 가능”, 《한국일보》 1967년 6월 18일자 7면. 5)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 6) 광고정보센터 한국광고 100년 홈페이지 http://data.adic.co.kr/ 참고. 7)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명선거의 노래>는 “공명선거의 노래”(1분 41초)와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3분 8초)의 두 개 영상으로 나뉘어 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후자의 영상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영화의 제작년도가 1961년으로 오기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목록(1950~1993)』, 37쪽;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ehistory.kr. 8) “첫 선보인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전」, 7개월간 6만 여 장 그려”, 《한국일보》 1967년 1월 19일자 7면. 9) “만화영화 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동아일보》 1967년 1월 28일 5면. 10) “만화영화 홍길동 아네시영화제 출품”,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5면.
최운봉 (崔雲峯, 1914(?) ~ ?)의 공식적인 영화 이력은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 >(1935)의 단역으로 출발한다. 원래 그는 기술 분야에 뜻을 두고 영화계에 입문해, 경성촬영소의 < 홍길동전 후편 >(1936)의 촬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 방한준 감독의 < 한강 >에서 한강 뱃사공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면서부터 배우로 전향해, < 도생록 >(1938), < 국경 >(1938), < 귀착지 >(1939) 등으로 점차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실질적인 데뷔작 < 한강 > 이후 최운봉 이 주연급 연기자로 이름을 알린 영화는 최인규 감독의 < 국경 >이다. 여기서 그는 빚쟁이에 몰려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밀수를 하고,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해 귀향한 날 과실치사(過失致死)로 징역을 살게 되는 ‘세림’ 역을 맡았다. 국경지대의 음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했던 이 영화는 일본에서도 호평을 얻었는데,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는 ‘영자’ 역을 맡은 김소영 에게 집중되었을 뿐 최운봉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방한준 감독이 정비석 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 성황당 >(1938)에서는 산에서 숯을 구우며 살아가는 ‘현보’ 역을 누구보다도 잘 소화하며, 그때까지 출연작 중 가장 좋은 연기였다는 호평을 얻었다. <국경>과 <성황당>에서 그가 맡은 배역의 이미지는 자신이 속한 세계(‘고향’ 혹은 ‘자연’)가 외부의 폭력에 위협당한 선량한 사람이었다. ‘애인’이나 ‘아내’를 빼앗아가는 식민지 근대의 위력, 그리고 그러한 위기에 몰린 남성 주체의 무기력이란 나운규 의 무성영화들로부터 이어지는 조선영화의 일관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최운봉이 연기한 인물들은 나운규의 영화처럼 그 무기력이 살인이나 방화로 이어지는 ‘피의 세계’가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자연의 섭리를 믿는 ‘땅의 세계’에 존재했다. 이러한 그의 남성 이미지는 194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박영희 원작을 안석영 이 연출한 < 지원병 >(1941)에서 최운봉 은 우울과 무기력에 휩싸여 있는 ‘춘호’ 역을 맡았다. 중학을 중퇴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마름 일을 하고 있는 ‘춘호’는 김 첨지의 모략으로 마름 자리에서도 밀려나고, 사랑하는 약혼녀 ‘분옥’( 문예봉 )과도 오해가 쌓여 궁지에 몰린다. 영화는 이러한 춘호의 무기력과 우울,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갈등 상황을 ‘조선인도 황군(皇軍)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춘호에게 출정(出征)의 기회를 던져줌으로써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지원병이 되어 출정 기차에 올라타는 마지막 순간 좀처럼 웃지 않는 ‘춘호’=최운봉의 얼굴에서 출정의 감흥을 읽기는 어렵다. 이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최운봉의 표정에서는 연인과 노모(老母), 어린 여동생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후 최운봉 은 < 그대와 나 >(1941) < 병정님 >(1944) < 감격의 일기 >(1945) < 우리들의 전장 >(1945) 등 여러 편의 선전영화에 출연한다. 그러나 모두가 적극적이고 자발적이며 건강하고 명랑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그 시기에, 우울하고 무기력한 식민지 남성의 이미지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법인 조영에서 남승민과 같은 새로운 배우가 부상하는 가운데, 최운봉은 조연이나 단역으로 밀려났고, 때로는 코믹 릴리프(comic relief)를 담당하는 희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해방 후 그는 한때 조선영화동맹에 가담하여 서울지부 집행위원으로 영화 대중화 운동에 참여했고, < 똘똘이의 모험 >(1946) < 새로운 맹서 >(1947) < 마음의 고향 >(1949) 등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많은 월북영화인들이 그러했듯이, 남한의 영화 제작 환경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미 그의 ‘좋았던 시절’은 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1950년 5월 정인택 원작을 영화화하는 <하얀 쪽배>에 출연할 예정이라는 기사(「<하얀쪽배> 영화화」, 「경향신문」 1950년 5월 18일 자)를 마지막으로 최운봉 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한국전쟁 중 월북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월북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