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다스릴 수 없는가
- 감독
- 이우용
- 제작년도
- 2005
사진: " 플로우 ", IMDb 한국영화로는 두 편을 골랐다. 이란희 의 < 3학년 2학기 >(2024)는 < 다음 소희 >(정주리, 2022)와 겹치는 영역을 다루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르다. 멜로드라마는 최소화되었고 아마도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차분한 일상성이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처럼 일상의 노동과 그 환경에 이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화는 오래간만이다. 윤가은 의 < 세계의 주인 >(2025)을 통해 자주 다뤄진 특정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단호하고 명쾌한 방식은 놀랍고 새로우며 아름답다. <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2025)과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는 올해의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재료와 스타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까. < 내 말 좀 들어줘 >(마이크 리, 2024)는 마이크 리의 방법론이 아직도 새롭고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올해는 프랑스 영화가 두 편인데 < 여름의 랑데부 >(발렌틴 카디크, 2025)에서 우린 에릭 로메르에서 시작된 전통이 로메르의 영역을 넘어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는 아마도 올해의 코미디인 것 같다. 사악하게 어처구니없지만 그러면서도 연민과 사랑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그리고 <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2024)이 그려보이는 뭄바이는 영화가 도시를 그리는 가장 완벽한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애니메이션을 두 개 골랐다. 너무 처참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너무 작정하고 못생겨서 오히려 사랑스러운 < 달팽이의 회고록 >(아담 엘리어트, 2024)과 바로 오늘 다룰 < 플로우 >(긴츠 질발로디스, 2024)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플로우>를 고른 데에는 개인적 이유가 있다. 작년에 나는 같이 살던 고양이 한 마리를 떠나보냈다. 사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플로우>를 처음 보았을 때 내 개인적인 경험은 영화의 감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가 드림웍스의 < 장화 신은 고양이 >(크리스 밀러, 2011)처럼 의인화된 고양이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만큼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긴츠 질발로디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고양이를 그렸느냐. 그러지도 않았다. 이 영화의 이름 없는 고양이는 그사이의 가느다란 길을 걷는다. 담벼락 위를 산책하는 진짜 고양이처럼. 질발로디스가 창조한 세계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들은 크게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고양이가 사는 집에는 그곳에 살았던 인간들이 만든 것 같은 고양이 조각상과 스케치가 있다. 마치 마리 셀레스트호의 사라진 선원들처럼 인간들은 그냥 이유도 없이 갑자기 존재하기를 멈춘 것 같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이상하다. 고양이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같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캐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우리가 사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이라고 퉁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물리적 실제성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이곳은 실재하는 공간보다는 애묘가의 몽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곳은 인터넷 사람들이 고양이별이라고 부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감독의 개인 경험을 의심하게 되는데, 정작 감독은 개를 기른다. 하지만 고양이와 살았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이 영화의 정서적 흐름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엔 대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집에 살던 고양이가 갑자기 홍수와 마주친다. 고양이는 물을 피해 달아나고 그러다가 빈 보트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다른 동물들이 한 마리씩 보트 위에 오른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타고난 습성도 다르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같이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물들이 나오는 고전적인 틀의 동화이다. 영화는 동물을 의인화한 수많은 동화에서 논리와 구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지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키를 잡고 보트를 조종하고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먹이사슬이 교묘하게 탈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잡아먹히는 동물들은 물고기밖에 없고 그들에겐 포유류나 조류의 생기가 제거되어 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이 정도면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영화의 묘사는 거기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여전히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수상쩍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캐피바라나 뱀잡이수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럴싸하다. 동작이나 행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그렇다. 이렇게 정교하게 고양이 표정을 살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나 싶다. 스크린 위에서 이런 이야기와 이런 묘사와 결합되면 관객들은 아주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Peullou( 좌 , 우 )", IMDb 홍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성서 이야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 하지만 이 두 주제는 이 영화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홍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하지만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인간은 사라지고 없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로 보더라도 아귀가 맞지 않는데, 이 세계는 온난화를 촉진했을 기계 문명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목가적 폐허와 환경 문제를 연결해 해석을 시도하면 여러모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서 그냥 일상일까? 이 홍수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암시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속 동물들은 주기적인 홍수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이 영화의 월드 빌딩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느 단계에서 이상해진다. 결국 모든 게 애묘가의 꿈이라는 게 가장 그럴싸한 답이다. 영화를 연달아 보다 보면 이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이 세계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둘째로, 이 영화를 이루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 동정, 이해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친절함과 연대는 세상의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기 위해 굳이 세계의 숨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 없이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사진: " Peullou ", IMDb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 해당 칼럼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알바트로스라는 바닷새가 있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알바트로스는 날 수 있는 조류 중 제일 큰 새로 꼽힌다. 알바트로스는 날개짓을 하기 보단 상승과 하강기류를 활용해 바람을 타며 이동하기 때문에 하루에 천 킬로미터도 거뜬히 난다고 한다. 그러나 유려한 비상과 활강을 가능하게 하는 큰 날개는 땅에서는 균형감을 잃고 걷기 힘들게 한다. 이 때문에 땅 위에서 날개를 꾸깃꾸깃 우겨넣고 뒤뚱뒤뚱 걷거나 엎어지며 슬랩스틱을 보여주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은 < 딱따구리(The Woody Woodpecker Show) >(1957) 같은 고전 애니메이션에서 희화화되기도 했다. < 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2001)의 주인공들은 알바트로스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죽음을 불사한 사랑은 가능하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상은 심각하게 거추장스럽거나 불가능한 것이 된다. 심지어 그들의 살아있음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모욕과 혐오로 점철되고 죽음은 필연이 된다. 사랑은 죽음을 통해 증명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이고 오프닝과 엔딩을 통해 수미상관을 이루는, 카메라가 활강하는 씬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사랑과 불가능한 세속적인 삶을 은유한다. 오프닝 장면은 구불구불한 협곡을 따라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유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을 보여준다. 특정 인물의 모습이나 목소리가 등장하진 않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협곡을 따르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히 멋진 자연풍경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관찰자적 시점이 아닌 실제로 공중에서 활강하고 있는 누군가의 신체적 움직임이자 주관적 시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그들이) 누구인지의 궁금증은 엔딩에 가서야 해소된다. 영화는 촬영기법을 통해 주인공들의 운명을 오프닝에 예정하면서도 엔딩에서야 명확한 답을 주며 관객을 몰입시키는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를 구현한다. <번지 점프를 하다>(이하 <번지>)는 2001년 개봉한 영화로, 당시 한국영화는 < 접속 >(장윤현, 1997), < 미술관 옆 동물원 >(이정향, 1998), < 정사 >(이재용, 1998) 등 격정적 감정에 호소하는 ‘신파’를 덜어내고 세련된 영상미와 독특한 관계성을 가진 로맨스 영화들이 부상하던 때였다. <번지> 역시 그러한 영화 중 하나로 평가 받았다. <번지>는 앞에서 기술한 오프닝과 엔딩의 유려한 헬기 씬,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적재적소의 음악사용, 해변의 저녁노을을 이용한 그림자 연출 뿐 아니라 운명적인 필멸의 사랑을 설득해 내기 위해 환생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두 파트로 서사를 나눠 미스터리적 구조를 취하며 관객들이 마지막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도록 했다. 영화는 1983년의 1부와 2000년의 2부로 나눠진다. 82학번 국문과인 인우( 이병헌 )는 같은 학번 조소학과인 태희( 이은주 )를 ‘우연히’ 마주치고 첫 눈에 반한다. 비오는 날, 우산이 없는 태희가 인우의 우산 아래로 뛰어들어 버스 정류장까지 바라다 달라고 하고 인우는 태희를 사랑하게 된다. 이 장면은 이후 다른 정보들이 추가되며 재해석된다. 관객들은 태희와 같은 과 친구의 대화에서 비오는 날 태희가 먼저 인우에게 호감을 갖고 우산이 없는 척하며 다가갔다는 진실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한 사건을 두고도 여러 각본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한다. 1부가 인우의 입영일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태희가 죽으면서 급작스럽게 끝나고, 2부는 17년이 지난 2000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국어교사가 된 인우는 고2 담임을 맡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학생 중 하나인 현빈( 여현수 )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18세 남자 아이임에도 현빈은 태희를 연상시킨다. 무언가를 들 때 새끼손가락을 펼치는 버릇, “젓가락은 시옷 받침인데 왜 숟가락은 디귿 받침이냐”는 질문,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을 좋아하는 것, 심지어 태희가 인우에게 선물로 줬던 라이터를 갖고 있는 것까지 태희와 같다. 영화는 1부의 태희와 2부의 현빈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작은 실마리들을 흩뿌려 놓으며 관객들이 인우와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도록 유도한다. 인우의 현빈을 향한 감정은 모두가 알아차릴 정도로 커져가고 결국 인우는 동성애자라 비난받으며 학교에서 쫓겨난다. 이후 전생이라 할 수 있는 태희의 기억을 떠올린 현빈이 인우를 찾고 둘은 1983년 약속했던 번지점프를 하러 뉴질랜드로 떠난다. 그리고 줄 없이 뛰어내린다. 인우와 태희, 현빈과 인우 로맨스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들 간의 사랑을 방해하는 대상이다. 사적 사랑을 억압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랑은 더 강해지고 진정성을 얻으며 영원한 운명이 된다. 그렇기에 방해하는 대상은 대부분 개인의 힘으로 바꾸거나 해결할 수 없는, 매우 견고한 것이 된다. 1부가 그러한 방해물을 죽음으로 두었다면, 2부는 동성애와 학생-교사 간 로맨스를 배치한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인 이상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에 로맨스 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방해 대상이다. 매우 규범적인, 반대할 여지가 없는 대학생 간의 이성애 연애가 방해를 받을 정도가 되려면 죽음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편 2부의 동성애와 학생-교사 간 로맨스는 사회적 변화에 따른 선택으로 보인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성소수자들이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에 가시화되었을 뿐 아니라 성소수자 운동은 시민권 운동의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배우 하리수 가 2001년 도도 화장품 CF 모델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트랜스젠더임을 밝혔고, 배우 홍석천 은 2000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 했다. 성소수자의 가시화는 대중적 인지를 가져오고 그에 따른 혐오와 차별도 두드러졌다. 특히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 다큐멘터리 < Out: 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 >(이영, 2007) 같은 영화들은 학교에서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차별을 그려내며 당대의 변화를 포착했다. <번지>는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 2부에서 동성애를 사랑의 방해물로 그린다. 학생과 교사, 미성년과 성년이라는 강력한 방해대상이 있지만 이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금기는 단연 동성애다. 로맨스에선 개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대상 그 자체만큼이나 개인들이 그 억압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번지>의 주인공들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가 아닌, 동성애 자체를 부정적 방해물이자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취급한다. 인우와 현빈 모두 자신이 실제로는 동성애자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증명하려 애쓴다. 영화는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반복한다. 인우는 정신병원에서 성적 정체성과 관련된 검사를 받고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의사의 (의문스러운) 진단을 받을 뿐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아내와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려 한다. 현빈은 인우를 만나기 전만 해도 또래 여학생을 좋아하고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평범한 이성애자 십대 남자 아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현빈은 호감을 갖고 있던 혜주( 홍수현 )에게 의도적으로 속옷이나 누드화를 선물하며 성희롱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즉 인우와 현빈 모두 성적 정체성에 있어 ‘문제없는’ 이들이었음이 강조된다. 혜주와 현빈 이 에피소드들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적인데 하나는 이성애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 대부분 성적 폭력에 기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사랑보다 동성애 부인에 무게 중심이 간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계속 강조하는 건 인우가 현빈을 태희로 느끼고 운명적 사랑을 재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우와 태희는 어떤 성별로 태어나도 서로를 알아볼 것이며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대화를 나눈 바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 서사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따라서 인우와 현빈이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든 어떤 성별로 전환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1부의 태도와 달리 2부는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즉 사회적 차별과 억압을 넘어선 사랑보다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분명 둘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즉 태희가 환생해서까지 재회하고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한다. 이것은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죽음도 뛰어 넘은 둘은, 동성애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둘은 뉴질랜드로 가서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한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장면 없이 주변 사람들의 비명 소리 이후 오프닝의 활강 씬이 반복된다. 인우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을 읊조린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내레이션에 따르면 그들은 사회가 용인하고 당사자들이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는 규범적인 이성애 커플로 당첨될 때까지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채 계속 죽고 환생해야 한다. 확률 게임처럼 말이다. 엔딩 카메라의 “끝이 없는 활강(반복된 죽음과 환생)”은 착륙지로 내정된 이성애 사랑을 위해 죽어야 하는 동성애자들의 운명이 된다. 이 카메라의 활강은 그 자체로 당대 퀴어 스크린의 일면이 된다.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처음으로 좋아한 격투기는 프로레슬링이었다.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를 보며 가슴 졸이고 환호했다. 홍수환, 유제두, 박종팔 등의 복싱도 열심히 봤다. 그리고 프라이드와 UFC 등을 접하며 종합격투기에 빠져들었다. 격투기는 원초적인 스포츠다. 프로레슬링은 번외로 하자. 프로레슬링은 육체의 기술을 갈고닦아 캐릭터와 스토리를 더해 만들어진 쇼다. 육체의 화려함과 열정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 엔터테인먼트. 프로레슬링은 쇼이지만, 복싱과 종합격투기는 일상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 후두부와 성기 등 급소를 때리지 않는 정도의 규칙만 있을 뿐이다. 맹수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물을 사냥하고, 인간끼리의 다툼에서 필요한 생존의 기술은 격투기로 발전했다. 내가 격투기에 빠진 이유는 단순했다. 싸우는 그들에게 끌렸다. 격투기의 결과는 승패로 갈린다. 하나는 이기고, 다른 하나는 진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상대를 때리고, 걷어차고, 꺾는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하지만 격투기를 보면서 승자에게만 열광하지는 않았다. ’졌잘싸‘라는 말이 있다. 졌지만 잘 싸웠다, 의 줄임말이다. 비록 승부에서는 패배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를 보면 가슴에 무엇인가 일렁인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서, 치사한 전략으로 일관하는 놈을 보면 짜증이 일어난다. 단지 지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녀석을 보면 그저 한심하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격투기의 감흥을 떠올리는 것은 어딘지 이상하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격투기, 복싱의 희열이 무엇인지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복싱을 택한 청각 장애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다. 복싱은 케이코에게 중요하지만, 생활을 압도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케이토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복싱을 택했을 뿐이다. 누군가가 아니라, 세상을 때리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싸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던져진 것이니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일본 최초의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2011)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미야케 쇼는 오가사와라의 모든 이야기를 영화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모든 시간과 사건을 그리지 않는다. 미야케 쇼는 말한다. ‘복싱을 다룬 것만이 아닌, 하루하루 링 위에서 그리고 링 밖에서 싸워나가는 한 여성을 그린 영화다.‘ 오가사와라 케이코가 소속된 체육관의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재능은 없어요. 키가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고요. 하지만 뭐랄까.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케이코는 반항적인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는 분을 못 이겨 선생을 때릴 정도였다. 보통 아이들과 다른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분이 많고, 쌓인 감정을 발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반항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케이코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 일을 하고, 복싱을 시작한다. 케이코는 말한다. ‘때리면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또 말한다. ‘맞을 때 아픈 것이 싫어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다. 치열하게 싸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케이코를 비롯한, 싸우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치고받으며 싸우는, 마지막까지 전장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면 어딘가 연대감이 느껴진다. 처참하게 패배할지라도, 함께 끝까지 싸워보고픈 마음이 든다. <내일의 죠>의 명대사처럼, 마지막까지 ‘하얗게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랄까. 실베스터 스탤론의 < 록키 >처럼, 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난 후 링 위에 꿋꿋하게 서 있고 싶어진다, 할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젊을 때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미야케 쇼는 인터뷰에서 ‘나는 솔직히 말해 10대부터 20대까지 꾸준히 성실하게 살자, 라고 하는 구호에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대에 접어드니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숏 한컷 한컷이 쌓여 완성되는 영화처럼 인생의 의미란 것이 결국 아주 조그마한 것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느리고 작은 움직임이 소중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영문 제목을 떠올려 보니 ‘Small, Slow But Steady’다. 작고, 느린 것이 소중함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케이코의 위대한 승리나 처절한 노력을 말하지 않는다. 케이코는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체육관에서 열심히 훈련한다. 그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합에서 지는 일은 벌어진다. 그렇다고 상대가 엄청난 것도 아니다. 그 역시 케이코와 마찬가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 복서다. 천재도, 셀럽도 아닌 그들의 성취는 작고 느리게 이루어진다. 미야케 쇼는 케이코의 일상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케이코는 들을 수 없지만, 세상에 가득 찬 소리들. 케이코가 다니는 체육관과 강변 그리고 골목길 등을 채우는 햇살과 공기 그리고 먼지들. 우리들의 일상은, 문득 멈추어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작고 느린 것들로 가득하다. 16밀리 필름으로 촬영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다정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사려깊다. 소리도, 공기도, 어느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고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한다. 작고 느린 것들은 꾸준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아니 존재한다. 케이코는 아픈 것이 싫다. 복싱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다. 세상도 그렇다. 때리고 싶고 싸우고 싶은 마음만큼 도망치고 싶고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넘친다. 그런 케이코를 붙들어주는 존재는 타인이다. 오랜 시간 권투를 했고, 지금은 후배를 키우는 체육관 관장. 나이가 들어 육체는 쇠하며 병이 들었고, 재개발로 인하여 체육관을 닫아야 한다. 세상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케이코를 가르친다. 청각 장애인인 케이코가 싸워나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은 일상의 싸움을 무수하게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공감했을 것이다. 관장만이 아니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인물들은 모두 예사롭지 않다. 음악을 하는 케이코의 남동생은 말한다. 누나는 강하다고. 자신은 누나처럼 강하지 않다고. 흑인 혼혈인 남동생의 애인 하나는 케이코에게 선뜻 다가가 인사를 하며 친해진다. 하나는 케이코에게 춤을 알려준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재능이 있고, 최고가 아닐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된다. 그들은 자신의 길에서 작고 느리게, 꾸준하게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윗세대인 케이코의 엄마와 체육관 관장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미리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파에 움추러든 아이들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준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따뜻한 영화다. 케이코는 결코 외롭지 않다. 언제나 그들이 있고, 풍경이 있다. 케이코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풍경 속에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소리와 공기가 가득 차 있다. 케이코도 우리도, 언제나 함께, 세상 안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