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끝
- 감독
- 홍원찬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곽인숙, 이상렬, 이영신, 차형묵, 오세인, 김현철, 김인영, 윤희선, 박선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가 궁금하다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홍원찬 , 2020)를 보았다. 타격감을 강조한 액션 연출이나 황정민 , 이정재 , 박정민 배우의 강렬한 연기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사건의 무대가 되는 국가마다 폭력의 전개 양상, 또는 강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었다. 일본에서 야쿠자와 싸우는 인남(황정민)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아지트에 잠입하고 총은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최종 목표를 노릴 때는 줄로 목을 조르는 방법을 택했으며, ‘일’을 끝낸 뒤에도 위장한 채 얌전히 현장을 벗어난다. 레이(이정재)도 마찬가지다. 레이는 언뜻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캐릭터 같지만 시마다(박명훈)를 죽일 때는 다른 이들의 손까지 빌려가며 가능한 신중하게 남들의 눈을 피하려 한다. 한국에서는 폭력의 세기가 좀 더 약해진다. 인남의 동료들은 소음기가 달린 총으로 어두운 밤에 비밀스럽게 사람을 죽이며, 레이의 살인 과정은 아예 생략된다(아마 몰래 잠입해 칼로 죽인 것으로 보인다).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인남의 총격신 역시 엘레베이터 안의 한정된 공간에서만 벌어진다. 이 폭력들은 작은 규모로 빠르게 일어나며 폭력 후의 수습에 더 많이 신경쓰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 걸 목표로 한다. 반면 태국에서는 상황이 갑자기 크게 변화한다. 레이는 일본이나 한국에서와는 달리, 마치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큰 칼과 중화기로 무장한 채 도심을 휘젓고 다니고 지금까지 비밀스럽게 행동했던 인남 역시 레이에 맞서 폭력의 강도를 높인다. 그 결과 관객이 보게 되는 건 거리를 가득 채우는 총성, 화염이 치솟는 폭발로 쑥대밭이 된 골목 그리고 널부러진 시체들이다. 즉, 태국에서 벌어지는 폭력들은 일본과 한국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규모와 성격으로 그려진다. 이때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건 주인공들이 국경을 넘는 순간, 다시 말해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장면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은 일본에서 한국, 한국에서 태국, 태국에서 파나마로 옮겨다니지만 감독은 이들이 비행기나 배를 타는 이동의 순간을 단 한 숏도 그리지 않는다. 숏이 바뀌면 인물은 이미 그 국가에 도착해있으며, 국가 간 이동은 마치 순간 이동처럼 간단하고 빠르게 이루어진다. 이처럼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과정을 과감히 생략한 연출로 인해 주인공이 도착한 국가에 따라 폭력의 세기가 달라지는 특징이 더욱 도드라진다. 다시 말해 레이와 인남은 어디서든 자신의 일관적인 행동 양식을 고수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장소에 따라 행동 양식을 즉각 바꾸는 예측 불가능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폭력의 강도를 신중하게 조절하던 일본과 한국에서의 레이가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얼굴에 피를 잔뜩 묻힌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적어도 폭력에 관한 행동 양식만 놓고 보면 일본-한국의 레이와 태국의 레이가 같은 캐릭터라고 보기 어렵다. 인남 역시 딸의 구출을 알리바이 삼아 일본-한국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과감하고 거친 행동을 선보인다. 특히 레이가 범죄 조직은 물론 국가 공권력인 경찰 특공대와 아무 예고 없이 전면전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약간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러니 태국에서 펼쳐지는 액션 장면들을 캐릭터 구축의 개연성 관점에서 비판할 수도 있다. 단지 다른 국가에 갔다는 것만으로 다른 캐릭터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분명 납득하기 힘든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단점으로 지적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런 불균질한 측면이 쉽게 예측하기 힘든 긴장을 서사에 부여하고 예고 없이 터져 나오는 폭력이 어떤 쾌감을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태국 범죄 조직의 두목 앞에서도 일단 폭력부터 먼저 행사하고 보는 레이의 모습에서는 일본-한국에서 응축한 긴장을 일순간 폭발시키는 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예외적 폭력을 위한 간편한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태국이란 이국적 공간을 손쉬운 도구로 사용했다는 의심이 들긴 하지만, 세 개의 국가를 무대로 펼쳐낸 서로 다른 성격의 폭력 묘사, 또한 이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 규범을 그때그때 손쉽게 바꾸는 인물을 보는 건 정말 즐거웠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독특한 개성 역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속편이 보고 싶어졌다. 만약 다음 이야기의 중심이 태국이나 다른 외국이 아닌 한국이라면 감독은 과연 어떤 폭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장르는 언뜻 리얼리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장치 같지만, 결국 모든 영화는 현실의 조건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한국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액션에 어떤 제약을 부여하는 공간이었고 이 때문에 본격적인 활극의 무대가 되지 못했지만, 만약 한국이 이야기의 중심이 됐을 때 그 영화의 주인공들이 어떤 성격의 폭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보고 싶다. 즉,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 아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감독은 예외적인 강렬한 폭력의 순간을 그릴 수 있을까? 비록 영화는 파나마의 이국적인 풍경으로 끝났지만 한국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욱 강렬한 흥미로운 장면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한 번 쯤은 달리기를 해봤을 것이다. 운동회의 릴레이든, 체력장의 오래달리기든 하다못해 트레이드 밀을 달린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호흡의 중요성이야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릴레이를 할 때는 바통을 움켜쥔 채 단박에 내달렸을 것이며, 오래달리기를 할 때는 앞으로의 거리를 생각하며 페이스를 조정하지 않았을까. 뭐가 됐든 너무 많이 삼켜서도 너무 빨리 내뱉어서도 안 된다. 적절한 호흡이 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 성긴 듯 급박한 호흡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있다. 바로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두 가지 흐름의 호흡을 통해 방콕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살인극을 그린다.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성긴 호흡과 감정적 이음새로 이뤄진 액션의 급박한 호흡이 바로 그 두 가지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어떤 의미일까. 엄밀히 따져 영화는 극을 견인하는 치밀하고 뚜렷한 개연성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 개연성은 부족할지언정 분명 존재하며 그가 진정 필요한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정보를 전하는 영화의 흐릿한 흐름이 전략적 호흡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관객은 러닝타임을 따라가는 내내 이야기의 명확한 인과성을 얻을 수 없다. 영화는 ‘인남(황정민)’이 왜 하필 일본으로 떠났는지, 어쩌다 암흑가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심지어 복수의 원인이 되는 ‘영주(최희서)’와 과거 어떤 특별함을 가졌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남의 대사와 엘리베이터 속 단 하나의 총격 씬만이 둘의 과거를 압축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인남은 그저 시간이 흘러 영주가 죽었다는 전화 한 통과 그녀의 아이가 행방불명되었음을 듣고 방콕으로 향한다. 인남의 대척자 ‘레이(이정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레이는 인남이 자신의 형을 죽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남을 쫓는다. 형제의 과거가 간략히 언급되긴 하나 그들만의 특별한 무언가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흘러가는 줄곧 맹목적 복수의 이유를 뒷받침할 형제의 우애나 연인의 사랑 더 나아가 조명될 법한 인남의 부성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죽어버린 과거의 인연만이 복수를 헐겁게 부여잡을 뿐 복수를 담아두는 줄거리의 개연성과 호흡은 다소 느슨하고 성겨 보인다. 이는 영화가 복수극이 아닌 살인극으로 전환되는 이유기도 하다. 더하여 이런 전개에 앞서 느슨한 개연성은 하나의 전략으로 영화적 전환을 뒷받침한다. 치밀한 복수의 이유와 계획이 제시되었다면 영화는 호쾌하게 질주할 수 없다.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족한 개연성은 극을 이끄는 하나의 주요한 호흡으로 거듭난다. 이는 급작스레 시작되는 복수의 긴장감을 내뱉는 날숨의 과정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터 몰아쳐 올 액션의 시작을 전제하는 주요한 바탕으로서 영화의 장치가 된다. 영화는 이렇게 개연성의 필요를 물으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속도감 있는 액션이다. 듬성하니 채워진 복수의 뒤를 짚어 가던 관객은 점차 희미해지는 복수 대신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받는다. 바로 인남과 레이의 쫓고 쫓기는 액션 활극이다. 사실 이런 영화적 변환은 복수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영화의 장소가 방콕으로 옮겨온 뒤 인남은 복수의 단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고문하며 살해하지만 결국 영주의 복수라는 근원에 닿지 못한다. 레이 역시 인남을 향한 살의의 이유를 잃어버린다. 즉 이들의 파괴 행위는 곧 복수라는 행위의 파괴이다. 결국, 관객과 두 인물이 새로운 선택지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둘의 파괴 행위를 호쾌한 액션으로 재생하며 이전의 헐거운 개연성은 오히려 복수를 벗어던질 장점이 된다. 아이만은 살려 줄 수 없느냐 말하던 인남이 어느 순간 태도를 바꾸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 쫓아오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인남이 레이에게 전하는 대사이다. 이는 곧 영화의 내적 전환을 확언한다. 관객은 레이에게 향하는 인남의 태도 변화를 통해 그의 목적성이 변화하였음을 깨닫는다. 영화의 초반 영주의 복수와 아이의 행방을 위해 피를 흘렸던 인남에게 새로운 목적이 부여된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자 내러티브적 선택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연인의 복수(그 이유 역시 확실치 않고 불친절한)를 성긴 호흡으로 채워 왔다. 남은 시간 앞으로 내달리기에는 그 이유도 호흡도 부족하다. 새로운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그렇기에 인남은 복수가 아닌 살인을 선언한다. 자신과 작은 아이의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 힘든 곳에서 그는 인간의 살인을 목표로 새롭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인남과 레이의 싸움은 후반부로 향할수록 속도를 더해간다. 영화는 변화했고 헐거운 복수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피 끓는 투쟁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호흡의 매개는 무엇일까. 둘의 이야기가 액션을 위주로 변화되었다고 해도 영화는 분명 그 원동력을 가져야만 한다. 영화의 줄거리가 다소 힘을 잃었다고 해도 단지 그렇게 둘 수 없음만은 분명하다. 벌어져 가는 영화를 단단히 부여잡는 것은 바로 인남과 레이 두 주인공이 내뿜는 뜨거운 감정이다. 이것이 바로 점차 벌어져가는 복수를 접합시킬 아교이자 호흡이다. 이들이 가지는 맹목적 살의와 파괴성은 피를 연료로 삼아 영화를 불태운다. 하늘을 적시는 붉은 노을과 둘의 싸움으로 불타는 거리의 연기는 두 남자의 매연인 것이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치와 그들이 표출하는 감정으로 달려가는 관객의 호흡을 다시 한번 정렬시킨다. 많은 대사는 필요치 않다. 둘의 눈빛과 부딪히는 육체만으로도 다소 심심했던 영화의 흐름은 활기를 띈다. 이런 영화적 흐름은 레이의 대사를 통해서도 구체화된다. 왜 그렇게 인남을 죽이고 싶어 하냐는 질문에 레이는 “더 이상 이유는 중요치 않아.”라고 답한다. 그렇다. 이는 곧 영화적 변화를 매듭짓는 결정타이며 극의 마무리를 내정하는 한 줄이 된다. 줄곧 언급했듯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와 그 과정에서 살인과 생존으로 옮겨갔다. 두 인물은 더 이상 복수의 원인과 결말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자 한다. 끈적한 살의를 품은 액션은 성기던 영화의 호흡을 급박하게 바꾼다. 치밀하지 못했던 복수로 비어있던 스크린의 빈틈은 이렇게 투쟁적인 들숨으로 가득 찬다. 마침내 숨은 영화의 말미 턱을 뚫고 뛰쳐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인남과 레이는 부서진 자동차 속 피투성이가 된 채 나란히 죽어간다. 레이의 대사가 인상 깊다. “결국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인남은 레이를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 어떤 말도 행동도 없다. 이는 곧 인남의 긍정이자 레이의 긍정이다. 둘은 죽어가는 와중 서로의 곁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단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몸은 문제가 아니다. 인남도 레이도 어느새 복수의 이유를 잃은 채 그저 서로를 죽이고자 달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조용히 앉아있더라도 더는 숨을 들이마셔 달릴 힘이 없다. 달릴 수 없다면 멈춰야 한다. 성긴 호흡으로 시작된 발걸음이 이리도 빠른 헐떡거림으로 바뀌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말이다. 느린 듯 성큼성큼 나아갔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전력을 다하는 달음박질이 되었다. 호흡 역시 그에 따라 조금씩 거칠어져 흐트러진다. 영화가 빨라지는 만큼 거칠게 변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 어떤 달리기라도 결승선은 존재한다.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위해 달렸든 주자는 결국 결승선에서 멈춰 선다. 복수로 시작해 살인이란 생존으로 달려갔던 인남과 레이. 둘은 단지 죽음이란 선에 멈추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