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주님의 품안에
- 감독
- 홍의봉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198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던 장르를 꼽는다면 ‘종교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멸종된 건 아니다. 최근 < 일사각오 >(권혁만, 2016) 같은 영화가 소박한 흥행을 거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바보야 >(2011)),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의 의자 >(2011)), 옥한흠 목사(< 제자, 옥한흠 >(2014) 등 종교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울지마, 톤즈 >(2010)나 < 소명 >(2009)처럼 오지의 성자들에 대한 작품도 있다. 다른 건 소속된 리그다. 최근 종교 관련 작품들이 다양성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면, 1980년대의 종교 영화는 메인 스트림 안에 있었다. 이 영화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당시로선 큰 흥행인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으며, 사극일 경우 거대 예산이 들어간 대작이었다. 특정 종교의 역사, 인물, 교리 등을 테마로 삼는 종교 영화는 1980년대 상업영화의 한 축이었으며, 비록 그 종교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강한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 가톨릭, 불교는 물론이고 증산도를 다룬 < 화평의 길 >( 강대진 , 1984), 무속을 소재로 한 < 피막 >( 이두용 , 1981) < 무녀의 밤 >( 변장호 , 1982) < 불의 딸 >( 임권택 , 1983) < 태 >( 하명중 , 1986) < 업 >(이두용, 1988) 등이 이어졌고, 수련을 통한 초능력을 다룬 < 단 >( 김행수 , 1986)이나 사이비 종교에 대한 < 백백교 >( 최영철 , 1993) 등도 있었다. 1980년대 이전에도 기독교와 가톨릭을 다룬 종교 영화들은 있었다. 그 영화들은 사극, 전쟁 영화, 반공 영화 등에 걸쳐 실존적 철학과 이념적 갈등과 역사적 사실 등을 다루었다. 유현목 감독의 < 순교자 >(1965) 최하원 감독의 < 새남터의 북소리 >(1972) 이성구 감독의 < 악마의 제자들 >(1974)과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1973) 당대 종교 영화 트렌드의 중심은 기독교였다. 조짐은 1970년대 말부터 있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주요작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기독교 영화의 붐이 일기 시작했던 걸까? 이것은 당시 기독교의 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5일 동안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대회엔 전국 각지의 크리스천이 300만 명 이상 모였다. 이후 1974년엔 김준곤 목사의 엑스플로 대회가 있었고, 1977년엔 민족 복음화 성회, 1980년엔 세계 복음화 성회, 1984년엔 선교 100주년 대성회 그리고 88 세계 복음화 대성회 등이 이어졌다. 이 시기 뉴스에서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접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1980년대 중반에 오면 ‘1,000만 기독교인’이라는 자체 집계가 발표된다. 이른바 ‘대부흥의 시대’였다. 자고 나면 교회가 생겨나던 시절, 기독교 영화에 대한 잠재적 수요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이때 < 사랑의 원자탄 >(강대진, 1977)이 포문을 열었고 뒤를 이은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임원식 , 1981)는 서울 관객 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흥행작이었다. 다음 해 < 죽으면 살리라 >(강대진, 1982) < 하늘 가는 밝은 길 >( 김성호 , 1982)이 나왔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신앙을 실천했던 손양원 주기철 안이숙 등이 주인공이었던 이 영화들은 한참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 기독교인들에겐 일종의 교재였다. 실화 영화로서 이 작품들이 지닌 이분법적이고 감정적이며 극적인 감수성은 절절한 간증이 되어 신도들의 가슴을 쳤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최하원 감독은 < 초대 받은 사람들 >(1981)과 < 초대 받은 성웅들 >(1984)를 내놓는다. ‘천주교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초대 받은 사람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약 15만 5,000명의 서울 관객을 모은 흥행작. <초대 받은 성웅들>은 ‘천주교 조선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며 서울 대교구의 지원으로 제작되었다. 최인현 감독의 < 소명 >(1984)도 200주년 기념작. 이 작품들은 이승훈 김대건 이벽 등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올 시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그린다. 특히 1984년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며 가톨릭의 열기가 뜨거웠던 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주요 종교 영화들의 중심 테마는 순교와 박해였다. 이 영화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하드고어에 가까운 표현을 하기도 했다. <사랑의 원자탄>은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해방 후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그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들였다. (상단 오른쪽)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로 결국 옥사한 그의 이야기는 <하늘 가는 밝은 길>과 <일사각오>로도 영화화되었다. (하단) 최하원 감독의 <초대 받은 사람들>과 <초대 받은 성웅들>.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오던 시기 겪었던 박해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처럼 1980년대 초 기독교와 가톨릭이 이끈 종교 영화의 열풍은 종교적 이벤트와 신도의 양적 성장을 토대로, 억압 받았던 수난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의 만남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 영화들을 통해 기독교와 가톨릭은, 신분제 사회와 식민지 체제에서 평등 사상과 민족 정신을 주장하고 지켰던 종교로서 일종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흥미로운 건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사례다. 원래는 1977년에 제작되어 개봉 예정이었지만, 유신 정권은 이 영화에서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는 주기철 목사(신영균)의 모습을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으로 여겼던 모양. 그래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던 영화는 198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고, 큰 흥행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종교 영화들이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전진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시기 충무로는 산업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떠오르던 종교 이슈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큰 흥행은 자극제 역할을 했고(이 영화는 속편이 기획되기도 했다), 무산되긴 했지만 <정의가 나를 부를 때> <빛을 마셔라> <이천석 목사> 등도 제작될 예정이었다. 기독 영화인들의 모임도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모이기 시작한 그들은 1976년 ‘새롭게 하소서’라는 공연으로 연예인 선교의 단초를 마련했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는 개런티 없이 참여하기도 했다. 신영균 고은아 를 비롯 최민수 의 어머니인 강효실 , < 예수 천당 >( 홍의봉 , 1991)의 이영후 , 그리고 임동진 문오장 구봉서 곽규석 윤복희 (가수) 송도영 (성우) 등이 대표적 인물. 한편 종교적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감독들도 등장했는데 복음주의적 입장의 강대진 감독은 <사랑의 원자탄>과 <죽으면 살리라>를(그런데 1984년에는 증산도에 대한 <화평의 길>을 연출하기도 했다), 실존주의적 입장의 유현목 감독은 < 사람의 아들 >(1981)과 < 상한 갈대 >(1984)를, 선교적 입장의 홍의봉 감독은 < 휴거 >(1990) < 천국의 비밀 >(1990) < 예수 천당 >을 내놓았다. 여기서 1980년대 종교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장호 감독과 이동철(본명 이철용) 작가다. 그들은 한국 종교 영화에 본격적으로 ‘민중’의 개념을 가져왔다. 기독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찬송가였다. 이 영화들의 OST는 대부분 찬송가 멜로디의 변주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다 해방을 맞이해 극적으로 살아난 안이숙의 이야기인 <죽으면 살리라>. 가수인 윤복희가 주인공을 맡아,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들려준다. 이 시기 기독교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는 ‘회개’였다. <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에서 최자실 목사는 빈민촌에서 교회를 세우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킨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무당( 김을동 )이 회개하는 대목이다. 이동철 원작의 < 꼬방동네 사람들 >은 빈민촌의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그 중엔 고물 장수 목사가 있다. 그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 과부춤 >은 천민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를 이야기한다. 부흥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교회의 모습이 풍자된다. 그 시작은 <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2)였다. 안요한 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청준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신의 부름을 받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종교적 체험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한국 종교 영화가 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도시 빈민의 모습이다. 안요한(이영호)은 시력을 잃은 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판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모습은 이동철 작가 원작인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인)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도 등장한다. 영화에는 리어카를 끌며 고물 장사를 하는 목사( 송재호 ) 캐릭터가 있는데, 그는 ‘꼬방동네’(빈민촌) 사람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대형화와 함께 중산층화를 겪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소외 당한 자들에 대한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민중 교회가 등장했는데, 이런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 매체가 바로 영화였다. 이런 시각은 창녀촌을 배경으로 한 < 밤을 기다리는 해바라기 >( 엄종선 , 1982) 같은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의도하지 않게 드러나기도 했고, 김진홍 목사의 빈민 선교 이야기인 < 새벽을 깨우리로다 >( 이기원 , 1990)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김수형 , 1982)은 한국 대형 교회의 상징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최자실 목사(송도영)의 일대기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장호 감독, 이동철 원작의 <과부춤>(1984)은 본격적인 종교 영화는 아니지만, 당대 한국 기독교를 적나라하게 풍자한 수작이다. 광적인 부흥회, 돈에 눈먼 목사, 교회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신도 등 <과부춤>은 ‘천만 기독교인’ 시대의 이면을 들춘다. 이 영화는 단순한 기독교 비판에 그치지 않고, 종교 없인 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멘털리티를 보여주며, 그 이면엔 ‘가난’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세상에 대한 당대 기독교 영화의 관심은 불교 영화와도 일맥 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 만다라 >를 시작으로 1980년대 불교 영화는 끊임없이 속세와 종교적 깨달음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중광 스님의 이야기인 < 허튼 소리 >(김수용, 1986)를 비롯해 <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1989)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그리고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배용균 , 1989)까지 이 시기 불교 영화엔 사바 세계에 대한 미련과 번민이 있다. 종종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에 갇히기도 하지만(유난히 비구니 캐릭터가 많았던 건 그런 이유일까?), 관념적 화두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이후 임 감독은 <비구니>를 만들려 했지만, 촬영 도중 중단되어 결국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법난 이후 불교계와 정권은 갈등을 빚었고, 그 와중에 조계종은 이 영화의 제작을 반대하여 결국 중단 사태까지 간 것. 이후 감독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비구니>의 한을 풀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을 넘어, 세계 불교 영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를 전후로 충무로에 잠깐 불교 영화의 붐이 일었다. 실존주의자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 시기 종교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는 초월적인 기적의 순간을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초대 받은 사람들>에서 정혜(원미경)의 가슴에 십자가 빛이 새겨진다. 1980년대 종교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군사 정권의 군홧발 아래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전두환에게 달려가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었고, 불교계는 10.27법난(1980년)을 겪으며 초토화되었다. 가톨릭은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 기복 신앙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고, ‘종교 과잉’과 ‘사이비’의 시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카오스 속에서 ‘영적 상품’으로 기획된 종교 영화들은 전반기엔 기독교 영화가, 하반기엔 불교 영화가 중심을 이루며 1980년대를 장식했다. 하지만 1990년대 기획 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영화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기업 자본에게 ‘종교’는 매력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부활한 건 2010년 전후 즈음. 몇 편의 다큐멘터리가 다시 신앙과 선교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후 주기철 목사에 대한 <일사각오>를 비롯 < 신이 보낸 사람 >( 김진무 , 2014) < 로마서 8:37 >( 신연식 , 2017) < 산상수훈 >(유영의, 2017) 등의 극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1958년도에 데뷔하여 육십여 년을 작가로 활동하신 김지헌(본명 김최연)은 1930년 9월 26일 평안남도 진남포 비송리에서 태어났다. 작가는 어린 시절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진남포와 경성을 오가며 살았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소개령이 내린 경성을 떠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이 있던 강원도 평창으로 피난을 떠나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사진1] <만추>(이만희, 1966) 작가 김지헌 [사진2] 김지헌 작가는 시나리오 지망생 시절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인 최인규를 무작정 찾아가 영화에 대해 물었다. 최인규 감독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극영화, <자유만세>(1966)을 연출했다. 최인규 감독은 김지헌 작가에서 숙제를 내줬고 그 숙제는 작가가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가는데 큰 가르침이 되었다.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작가는 소학교를 거쳐 명문 진남포공립중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했다. 당시는 일제말기로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본인이었다.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일본어를 쓰고 말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해방 후 작가와 가족은 서울, 장충동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경동공립중학교에 진학했다. 문학과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작가는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화가가 되기를 꿈꿨던 작가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다가 형님에게 발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화가의 꿈을 접고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고향 형님의 권유였다. 형님은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를 써볼 것을 권유하였고 작가는 한달음에 국립도서관을 찾아가 시나리오와 영화에 관련된 책을 모두 섭렵하였다. 그 시절 처음 본 책이《키네마 순보》이다. 이 후 작가는 평생 《키네마 순보》를 구독하였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며 당대 최고의 감독인 최인규 감독을 만나기 위해 고려영화주식회사에 찾아갔다. 몇 차례 문전박대를 당한 뒤에야 최인규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최인규 감독은 작가에게 한 영화가 몇 개의 커트로 구성되어있는지를 세어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돌려보냈다. 작가는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의 커트를 세며 보냈고 결국 좋은 영화란 커트를 세기 어려울 만큼 흡인력이 강한 영화라는 결론을 얻었다. 작가가 터득한 결론에 최인규 감독은 관객을, 손님을 절대 놔주지 않는 흡인력 있는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이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전부라며 작가에게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작가 김지헌은 본격적인 영화공부를 위해 서라벌예술학교의 전신인 서울예술학원에 입학했다. 1949년에 설립된 서울예술학원에는 이광래, 김진수, 백철, 양주동, 박목월, 서정주, 오영진 등 당대의 문인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작가는 학교에서 시나리오 부장을 맡는 등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러한 학교생활도 한국전쟁과 함께 일단락되고 만다. 하지만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전쟁 중에 소중한 인연으로 돌아왔다. 9. 28수복 이후 작가는 친우들과 함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하지만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가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논산으로 떠난다. 논산에서 만난 이가 서울예술학원 동문인 시나리오 작가 하유상이다. 하유상의 도움으로 잠시 논산에 머물렀던 작가는 자형을 찾아 광주로 갔지만 도착했을 때 자형은 이미 광주를 떠난 뒤였다. 극심한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작가에게 도움을 준 이가 문학평론가 장백일이다. 장백일의 도움으로 건강을 추스른 작가 광주 군관학교에서 발행하는 정훈잡지 편집관 모집에 응시하여 편집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면접관이 작가 선우휘이다. 편집관으로 일하면서 작가는 서울에서 피난 온 그리고 광주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렸고 이들을 따라 광주에 내려와 있었던 시인 서정주와 만난다. 서정주 시인에게 보여준 한 편의 시는 후일 서정주의 추천으로《현대문학》에 실렸다. 작가의 시 <종 鐘>은 정전 이후 출간된《현대문학》4호(1955년 4월호)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시로 실렸다. 정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온 작가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창간한《중앙일보》에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 작가는 문화부 기자생활을 하면서 당대의 문화계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작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난 인연들과 경험이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고 구술하였다. 기자로 일하던 중 작가는《조선일보》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이 신설된 것을 알고 오랜 꿈인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기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문학청년의 꿈을 일궈낸 광주로 내려가 응모작을 준비하였던 작가는 스승인 오영진의 부름을 받고 스승을 찾았다. 언론계에서 일한 탓에 아는 이가 많은데다가 스승인 유치진과 오영진이 심사위원이라는 것을 알고 예명으로 출품한 작품이 최종에 올라갔는데 심사위원인 오영진이 당선 후보자의 면모가 궁금하여 작가를 부른 것이다. 오영진 선생은 당선 후보자가 자신의 제자인 것을 알고 놀라면서도 당연한 결과라며 당선을 축하했다. 작가는 이때 사용한 예명인 ‘김지헌’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사진3] 해방 후 신세대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신예프로덕션에 김지헌 작가도 참여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영화의 포스터이다. 영화는 전후의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렸다.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를 받았다. 시나리오 당선과 함께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작가는 이성구 감독, 이강원 감독, 제작자 전홍식 등과 함께 신예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영화계에 새로운 세대의 바람을 일으켜보자며 의기투합한 이들을 당대의 영화인들은 영화계의 젊은 그룹이라 칭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신예프로덕션의 창립작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평론가 이영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영일은《영화예술》에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의 특집을 게재하였는데 이제 진짜 영화가 나왔다는 평을 실었다. 영화계 원로들은 이영일의 사무실을 찾아가 젊은 영화인들에게 지나친 호평이라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일본의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장본인인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신예프로덕션의 작품들은 언론과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전후의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는 이들 영화는 새로운 세대를 가로막는 당시의 불안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진4] 김지헌 작가의 대표작인 <만추>(1966)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 [사진5] 1966년 개봉한 신성일, 문정숙 주연의 <만추>(이만희)의 포스터이다. 안타깝게도 영화를 볼 수 없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세련된 감수성이 돋보이는 연출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사진6] 이만희 감독과 함께 한 또 하나의 작품 <원점>(1967)의 포스터이다. 설악산 여행을 함께 떠난 이만희 감독과 작가가 설악산을 배경으로 구상한 영화이다. [사진7]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는 작가가 가장 아쉬움을 갖고 있는 작품중 하나이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어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작가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사진8] 1982년 김수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만추>의 포스터 이다. 원작에서 문정숙이 맡았던 혜림역은 김혜자가, 신성일이 연기한 훈은 정동환이 맡았다. [사진9] <만추>(이만희, 1966)는 2010년 다시한번 리메이크 되었다. 연출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 민규동, 1999)와 <가족의 탄생>(2006)을 감독한 김태용이 하였다. 영화의 배경은 시애틀로 바뀌었고 혜림 역은 중국배우인 탕웨기가, 훈 역은 현빈이 연기하였다. 김지헌 작가는 40년의 간극을 두고 만들어진 원작과 리메이크 작품이 두 감독의 개성과 시대를 잘 담아내었다고 이야기했다. 1960년대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하고 상생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는 것에 목말라 했다. 그 갈증을 해소시켜 준 이가 바로 이만희 감독이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1965)로 인해 고초를 겪을 당시 만났던 동료 재소자를 만난 일화를 들려주었고 이를 예사로이 넘기 않은 작가가 시나리오 만든 것이 영화 <만추>(이만희, 1966)이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을 누구보다 뛰어난 연출력과 창의력을 가진 감독이라고 회고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와 쫓기고 있는 남자가 함께 국수를 먹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울음이 터졌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스크린 안의 배우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연출이 이만희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작가는 설명하였다. <만추>(이만희, 1966)의 흥행이후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설악산 여행을 떠났다. 이만희 감독과 작가는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 술잔을 기울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작가는 이를 시나리오로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이만희 감독이 1967년에 연출한 <원점>이다. 갑작스런 이만희 감독의 죽음을 작가는 많이 안타까워했다.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인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를 영화화 해보고 싶다는 전화통화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만추>(이만희, 1966)는 일본에서 상영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1972년 사이토 고이치가 <약속 約束>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였다. 한국에서도 1981년에는 김수용의 연출로 그리고 2010년에는 김태용의 연출로 다시 만들어졌다. 영화가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해 재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안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품성이 숨 쉬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태양은 다시 뜬다>(1966)로 제5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만추>(이만희,1966)의 흥행 그리고 <태양은 다시 뜬다>(유현목, 1966)의 대종상 수상까지, 1966년 한 해 동안 작가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일궈냈다. [사진10] 1966년에는 김지헌 작가의 대표적인 두 작품, <만추>(이만희)와 가 개봉하였다. 작가는 <태양은 다시 뜬다>로 제5회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사진11] <태양은 다시 뜬다>(1966)를 연출한 유현목 감독은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특히, 문예영화 연출에 있어서 독보적인 감독이었다. 1960년대 작품성과 흥행성 있는 작품을 두루 발표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작가는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4차 개정 영화법과 시나리오 사전심의제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영화계 전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유신체제 하의 영화는 검열로 훼손되기 일 수였다. 작가는 이 시기 본인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현대물에 대한 검열은 더욱 심해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이 시대물 혹은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현실을 작가는 이야기했다. 작가는 1973년 한일합작영화를 준비하였다. 한일 양국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는 연방영화사 주동진 사장이 제안하여 쇼치쿠 영화사와 합작을 계획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는 <가야금-겨울의 가락>이다. 하지만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영화의 합작계획은 표류하게 되었다. 작가는 국내영화사의 제안으로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유현목의 연출로 1977년 <문>이란 제목으로 완성되었다. [사진12] 1977년 개봉한 영화 <문>(유현목)은 김지헌 작가가 1973년 한일합작영화로 준비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목은 <가야금-겨울의 가락>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시나리오는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다. 1977년 유현목 감독의 연출로 완성되었다. [사진13] 일제말기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 1977)는 극장 상영 중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상영이 중지되었다. 후일 미국 이민을 떠난 뒤 비로소 본 영화는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였다. 작가는 검열로 다른 작품이 된 영화를 이국 땅에서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하였다. [사진14] 김지헌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 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영화법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던 작가는 검열로 영화가 훼손되어가는 과정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1970년 대 후반 영화의 검열은 더욱 엄혹해졌다. <야시>(박남수, 1979)도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 중 하나이다. [사진15] 김지헌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망명의 늪>의 포스터이다. 작가는 1976년《조선일보》4월 23일자 5면에 「영화시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국산영화 향상을 위한 제언’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에서 작가는 영화업의 허가제, 우수영화 수입추천제, 시나리오 사전 검열 한국영화의 발전과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영화인 모두가 공감하였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영화인들은 박정희 정권과의 마찰을 두려워했다. 작가는 정부의 영화정책이 궁극에는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를 야기할 것이라 예견했고 결국 스크린 위의 검열로 훼손된 영화들을 통해 그 결과가 보여졌다. 작가는 1968년 통혁당 사건이 발생한 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소환의 이유는 영화 <학사주점>(박종호, 1964) 때문이었다. 통혁당 사건의 관련인이 명동에 학사주점을 하였는데 그것이 이유였다. 영화 속 주인공(신성일)이 군에서 제대하고 아버지(김승호)를 찾아갔는데 아들을 본 아버지의 첫 마디가 “쌀값도 비싼데 왜 벌써 제대를 했느냐” 였다.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에게 쌀값 운운하는 것이 말이 안 되고 또 남한이 그렇게 못사는 나라라는 뜻인지, 이는 이적행위라며 작가를 불러간 이들은 추궁했다. 다행히 작가는 풀려났지만 엄혹했던 한 시절에 벌어진 웃지 못 할 일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영화가 상영 중에 금지를 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1977년 작품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은 검열에 합격해 극장에 상영되었으나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결국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사전심의에서부터 불순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기독교 측의 반정부 투쟁이 격렬했고 정부는 이 영화를 이러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작품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영화는 상영이 취소되었고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 합격하여 극장 상영을 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미 미국이민을 떠난 뒤였다. 작가는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가 되어있었지만 작가는 영화가 만들어진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검열로 원안과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를 보는 것은 작가에는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야시> (박남수, 1979), <망명의 늪> (김수용, 1978) 등 작가의 많은 작품들은 검열의 과정에서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사진16]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80년 김지헌 작가는 미국 이민을 떠났다. 이민 생활 중에도 쉬지 않았던 창작 활동의 결과물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시나리오 선집은 한일 양국에서 출판되었다. 작가는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을 뒤로하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1980년 1월 작가는《조선일보》1980년 1월 27일 5면에 「80년대의 한국문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나, (9) 영화 제작-표현의 자유를. 자질 향상 위한 해외연수-기금확보도」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새로운 정치권력에게 한국영화계의 문제점들을 타파하고 발전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희망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고 작가는 미국이민을 결심하였다. 뉴욕을 거쳐 LA에 정착한 작가는 미주 영화인들과 함께 영화화를 도모하는 한편 작품 창작도 쉼 없이 하였다. 작가는 각기 활동해 오던 한미영화학회와 미주한국영화인회의를 통합한 미주한국영화인회의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작가는 감독 홍의봉, 제작자 주동진 등과 함께 재미교포 이철수 사건을 영화화를 모색하였다. 또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오는 한국영화인들을 지원하는 등 미국에 머물면서도 한국영화계와 밀접하게 지냈다. 작가는 1987년 미국에 머물 당시 <별의 유역>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989년 영화진흥공사 지원작으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이민을 떠난 지 십년 만에 귀국하였다. <별의 유역>은 방대한 스케일 때문에 영화화되지 못하였지만 작품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한일 동시 출간된 이 작품집에는 미발표된 다수의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십년 만에 돌아온 한국영화계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비디오 대여 시장과 케이블 TV의 영향으로 대기업이 영화제작투자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신진 인력들이 영화계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작가는 귀국 후 영화제작과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요동하는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였던 김지헌은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꿈꿨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였던 작가는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전후의 불안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당대의 젊은 이들의 삶을 스크린에 담고자 하였던 작가는 영화계의 신진들과 힘을 합쳐 신예 프로덕션을 설립,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을 만들었다. 전후의 영화계에서 새로운 영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이들은 누벨바그, 네오리얼리즘 등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한국영화계에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년 간 백 여 편 이상의 영화를 생산해내던 당시의 한국영화계가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바람은 기성의 영화인들에게는 불안함으로 느껴질 수 있었겠지만 영화에 대한 이들의 문제의식이 당대의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였음을 앞서 기술한 평론가 이영일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하고 대표작으로 <만추>(이만희, 1966)를 꼽았다. 또한 1960년대를 자신의 전성기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유신체제가 시작되면 작가의 삶은 녹록치 않아졌다. 작가는 유신체제하의 엄혹한 현실에서도 창작자의 당연한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쓰는 한편 검열과 싸우며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이 지나가고 작가는 다시 겨울로 들어서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작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1990년대의 한국영화는 사뭇 달라진 환경이었다. 영화사의 설립과 관련한 법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이 되었고 수입자유화와 외화 직배 그리고 비디오가 활성화되면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영화제작자로 다시 영화계에 돌아와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고 영화계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였다. 1958년 이병일 감독의 <자유결혼>의 각색으로 데뷔한 김지헌 작가는 1990년 <홀로서는 그날에>(석래명)의 윤색에 이르기까지 60여 편의 각본과 20여 편의 각색과 윤색을 담당하셨다. 1990년 이후로는 제작과 후학 양성에 힘써 오신 김지헌 작가는 2014년 영상자료원과 함께한 원로영화인 구술사 작업을 마치시면서 좋은 작가란 동시대를 고민할 줄 알아야한다고 했다. 한국영화와 60여 년을 동거동락한 작가의 경험이 깊이 새겨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