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권투선수
- 감독
- 홍두표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문주하, 최민성, 유호재, 김희철, 신소영, 김규리, 김채원
1971년 말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영화정책의 급변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영화검열 체제는 매우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는 주로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검열(외화의 경우 수입 허가 단계)에 집중되었다. 이중검열 혹은 삼중검열의 혼란을 낳은 60년대 후반 시나리오 검열은 1970년에 이르러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적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변화와 혼란의 시발은 1971년 12월 갑작스럽게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였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12월 6일, ‘중공’의 유엔 가입으로 안보가 더 불안해졌고, ‘북괴’의 도발이 날로 격화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 태세를 확립한다, 2.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 불안요인을 배제한다, 3.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삼가야 한다” 등 6개항 조치를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문화공보부는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영화 분야에 다음과 같은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1.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성실, 근면, 검소한 생활자세를 바탕으로 하는 국민상을 그린 내용의 영화제작을 권장한다. 2. 건전한 국민정서로 순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의 영화, 민족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의 영화를 정선, 수입하도록 한다. 3. 국내영화제작의 질적 향상을 위해 72년도 제작편수를 1백50편으로 한정하고 안보관계 영화를 연 30편 이상 제작하여 매월 최소한 2편 이상 상영토록 의무화한다. 72년도 외화수입을 50편으로 한정하되 안보관계 영화를 15편 정도 수입하도록 한다. 4. 음란, 선정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있는 내용,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내용, 사치와 낭비 등 소비성향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내용은 배격한다. 1) 국가비상사태 선포 내용을 담은 일간지 기사(『동아일보』, 1971년 12월 6일) 이러한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영화시책”은 안보 위기 상황을 맞아 그간 “섹스 퇴폐풍조 눈물 한숨 패배의식 등을 철저히 규제” 2) 함으로써 한국영화를 수정하겠다는 정책당국의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 체제 이후 1972년 신년부터 검열이 강화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강화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간 진행되었던 시나리오의 검열은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무수정, 개작, 부분 개작, 반려 등의 단계에 따라 절차가 진행된 반면, 새로운 체제에서는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제작될 수 있는(외화의 경우 수입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검열의 수준을 벗어나는 조치다. 왜냐하면 기존 우리가 생각하는 검열은 주어진 작품에 대한 수정과 (예외적으로) 반려를 포함하는 것이지, 제작할 작품을 선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어느 면에서는 최고 수준의 검열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에 따라 시나리오 단계의 검열 과정은 60년대 후반에 이어 다시 이중화된다. 이에 당시 문공부 장관 윤주영은 “저질영화 제작과 무분별한 외국영화 수입을 막고, 국가 안보 우선의 영화제작 장려책으로” 제도를 바꾸었다고 밝혔다. 3) 문제는 시나리오 심사에서 통과한다 하더라도 제작쿼터를 부여받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었다. 즉 문공부는 예륜에서 사전심의한 작품에 대해 20인의 “쿼터” 심의위원을 두어 재심사 과정을 거친 후 국산영화 제작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1972년의 한 글에 따르면 320여 편의 시나리오 가운데 1백 50편이 제작쿼터를 부여받았고, 최종적으로는 29편만이 영화화되었다고 언급된다. 4) 물론 이는 감독들의 대담 가운데 나온 발언이라 수치가 정확한지 확인할 수 없고, 1972년의 한국영화제작편수가 29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후술하겠지만 영화진흥공사 자료집의 통계는 이 해 제작된 편수가 122편이라 밝힌다). 1971년으로부터 넘어온 제작쿼터가 상당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5) 아마도 1972년에 부여된 제작쿼터의 상당량은 다시 1973년으로 이월되기도 했을 것이다. 제작쿼터가 부여되었음에도 제작이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앞의 잡지기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해당 연도인 72년도 배정 코타분의 제작 진척이 극히 부진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영화계의 전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당해연도의 「코타」가 과년도 「코타」에 비해 제작완성율이 뒤떨어진다는 상례에 비유하기에 앞서 최근의 영화산업이 사양의 문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세계적인 조류의 축소판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겠다. 또한 예로는 「선각본 심사제」라는 큰 변화가 처음으로 실시됨에 따라 제작에서 다소 주춤했던 제작자들의 태도도 영향의 일부로 볼 수 있겠다. 6) 1970년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산업의 부진이 급격히 진행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관객수의 경우 1969년까지는 1.71억명에서 1.73억명으로 소폭이나마 증가하였으나, 1971년 처음으로 1.46억명으로 2천만명이 줄었고, 1972년에는 1.18억명으로 거의 3천만명이 줄어들게 된다. 제작편수는 1969년 229편을 정점으로 1971년 202편으로 줄었다가 1972년 122편으로 급감하였다. 말하자면 1970년 시작된 불황은 1972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다. 그리고 그 원인 중 하나가 어쩌면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 이후 강경해진 영화정책 변화일 수 있을 것이다. 유신과 4차 개정 영화법 이러한 상황에서 1972년 10월 말 다시 유신이 선포되었다. 유신과 함께 1972년 검열체제는 더욱 강화된다. 특히 유신 체제 하 예륜은 새로운 18개의 심의기준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기존의 검열사항 외 “1.10월유신 조치를 왜곡, 비방하거나 유인비어 날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는 내용, 2.총력안보에 역행하거나 국토 통일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3.남북적십자 회담을 비방하거나 이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등 사항이 눈에 띈다. 7) 1973년 2월에는 영화법이 개정, 4차 영화법이 공포되었다. 4차 개정 영화법은 70년 3차 개정영화법이 시행했던 제작과 수입의 분리 정책을 이전으로 되돌려 제작사만이 외화수입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국영화 제작사의 독점적 권리를 보장했다. 또한 제작사 등록제를 허가제로 강화하여 마찬가지로 제작사를 독점화했다. 표면적으로 이는 60년대 내내 추진되었던 영화정책의 중점 방향인 메이저 기업화 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메이저 기업화 정책이 이미 파탄의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고 정부의 권위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소수의 제작-수입사를 통해 영화콘텐츠 전반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짐작된다. 이와 함께 기존의 영화진흥조합은 영화진흥공사로 개편되었다. 광의의 검열 행정체제와 관련하여 사단법인 한국영화배급협회의 창립을 별도로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배급협회는 1973년 5월 11일 창립총회를 통해 발족했다. 지방배급사(흥행사)의 부당한 간섭과 영화 수입의 누출을 막고 전국적으로 일원화된 배급체제를 구축하고자 설립된 배급협회의 초대 이사장은 김태수, 상임이사는 안재홍이었고, 이사진으로는 제작(수입)사 쪽 2명, 공연자 쪽 2명, 영화진흥공사 1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영화배급협회는 중간배급업자(지방흥행사)를 배제함으로써 중간 유출되는 수입을 줄이고, 제작자와 상영자라는 직접 이해당사자간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8) 이에 따라 문화공보부는 “①모든 영화는 영화배급협회 이외의 경로를 통하여 배급하지 못한다. ②영화의 배급에 관하여 임의로 계약하여 이를 위장해서는 안된다. ③모든 공연장은 배급협회를 통하지 아니한 여하한 극영화도 상영해서는 안된다. ④ 영화배급신청서는 제작신고 및 수입추천 시에 영화배급협회에 제출해야 한다” 9) 등 배급협회에 관한 행정방침을 시달하여, 모든 영화의 배급은 배급협회를 거치도록 강제했다. 1973년 6월 21일 진행된 영화배급협회 현판식 사진(김태수 배급협회 이사장(좌), 문공부 이치순 예술국장(우) 출처: 『영화』, 1973년 8월호) 이와 함께 매년 영화정책의 구체안을 포함한 영화시책이 1973년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발표되었는데, 4차 개정 영화법이 공포된 1973년 영화시책은 영화검열의 내용과 체제에 있어서 강화된 안을 담고 있다. 10) 우선 우수영화 제작방침에서 “10월유신을 구현하는 내용,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애족의 국민성을 고무 진작시킬 수 있는 내용, 의욕과 신념에 찬 진취적인 국민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내용, 새마을 운동에 적극 참여케 하는 내용,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슬기롭고 의지에 찬 인간상록수를 소재로 한 내용” 등 유신 이후의 변화된 상황을 담았고, 우수외화의 기준으로 “유신이념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영화, 민족주체성과 애국, 애족정신을 북돋아줄 수 있는 영화, 새마을운동의 가치관을 설득시킬 수 있는 영화” 등 유사한 기조의 15개 항이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검열에 있어서의 주안점 역시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민총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의 지양, 음란 선동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짙은 내용의 지양” 등 6개 항이 별도로 제시되었다. 한편 전년 크게 문제가 되었던 시나리오의 심의는 “예륜 심의를 거쳐 다시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심의 결정하던 것을 예륜 심의를 강화하여 당부가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972년의 번거로웠던 시나리오 검열의 단계, 그리고 이로 인한 제작 부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개선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의 변경이 반드시 소위 이중검열의 폐단을 개선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문공부 담당자의 직접 결정은 양면의 날과 같아서, 강화의 기조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제작권은 1972년 제작편수의 급감을 의식한 탓인지 전년 150편에서 130편으로 줄었다. 요컨대 1971년 말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선언” 이후 진행된 영화정책은 4차개정영화법까지 권위주의 강화를 향해 치달았다. 단순히 영화검열만의 문제는 아니다. 60년대 영화산업정책의 폐단이 4차개정영화법을 거치며 반복강화되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바로 이 시기에 영화산업의 불황이 시작되었다. 산업적 불황과 정권의 권력유지 욕망의 산물로서의 영화정책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영화산업의 장기불황이 진행된다. 각주 1) "안보 우선 주체의식 고취, 대중연예에 새 기풍, 문공부서 쇄신책 마련, 영화검열 기준강화, 제작편수를 연 1백50편으로 한정", <매일경제신문> 1971년 12월 11일 2) "줄지을 「안보영화」, 국민총화 담긴 외화 우선 수입, 사회불안·섹스 등 다룬 작품 철저 규제, 방화도 새 가치관 따라서 개작", <동아일보>, 1972년 1월 12일 3) "「선심사」 「후 수입쿼터배정」, 윤문공 안보 우선의 영화정책 마련", <조선일보>, 1972년 4월 14일 4) “신춘좌담: 바람직한 새해 영화풍토는”, 『코리아시네마』, 1973년 1월호, 46-47쪽 5) 당시 한 잡지의 다른 기사에 따르면 1972년 11월 14일 현재 시점에서 1971년 이월쿼터 73편 중 63편이 검열을 끝냈고, 72년도의 경우 93편이 제작신고 된 가운데 29편이 검열을 필했다. “72년도 국산영화 개황, 「건전」 「우수」로 경향 바꿔져”,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39쪽 6) 앞의 기사, 39쪽 7) “뉴스토픽, 「문화유신」을 다짐, 연예계 인사 간담회에서, 예륜 18항의 새 심의기준 발표”,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57쪽 8) “배급협회 발족: 영화계 숙원인 배급 일원화 위해”,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7월호, 73쪽 9) “[알아둡시다] 영화배급에 관한 행정지침을 시달”,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8월호, 67쪽 10) 이하 영화시책 내용은 “영화시책”,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1977, 225-227쪽 참고
“‘너 왜 그랬어’라고 물어봤을 때 ‘몰라 그냥 한 건데’라고 한 거는요, 그 사람이 정말 생각 없이 행동했던 게 아니라 지금 생각 없이 대답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잖아요 선생님.” 영화 리뷰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이경미 감독에게 가장 많이 보이는 키워드가 ‘괴작’, ‘괴랄하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주에서 온 감독’, ‘신선한 문법’이라는 키워드도 찾을 수 있다. 나는 전자와 후자 모두가 이경미 감독을 수식할 수 있는 좋은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가파른 호흡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른 말, 그리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 학생들에게 ‘전따’라는 말을 듣는 선생. 자신의 손을 가위로 내리찌르고, 딸의 허밍을 떠올리며 모든 의심을 거두지 않는 엄마. 이경미 감독은 < 미쓰 홍당무 > (2008)과 < 비밀은 없다 >(2015) 두 편의 장편영화에서 강력하다못해 폭주하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의 행동을 먼저 등장시키고, 불규칙한 사운드와 인서트를 통해 퍼즐 맞추기를 하듯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경미 감독의 도치법적인 연출은 위의 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고.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는 전혀 다른 장르이다. 하지만 두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많다. 무엇보다 아주 장르적이면서 동시에 장르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각각 코미디와 스릴러의 장르성을 강력하게 띄고 있으면서도 이경미 감독의 문법으로 코미디와 스릴러의 공식을 빗겨간다. 여기서 우리는 단번에 알 수 있다. 이경미 감독은 무엇을 아주 강력하게 뒤집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영화적 요소에서부터 ‘전복’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미쓰 홍당무>에서 미숙은 삽질을 하며 종철에게 자신이 전화를 한 이유에 대해서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말 하고, 복장검사에 걸린 종희에게 ‘못되게 굴다가 한 번 착한 짓을 하면 사람들이 다 착하게 본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지 말아라’라는 말을 쏟아낸다. <비밀은 없다>에서는 고향을 숨기던 연홍이 딸의 실종을 파해치던 중 극에 달하자 ‘여기 사람들 하나도 못 믿것다야.’라며 굉장히 토착적인 호흡의 사투리를 구사한다. 관객 입장으로서는 한 번에 이해가 안 되는 대사들인데다가, 배우들의 호흡이 빨라서 잘 알아들을 수도 없다. 또한, ‘괴랄하다’라는 키워드가 가장 많이 보였던 <비밀은 없다>의 허밍음에 대해서도 관객들은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경미 감독은 인터뷰에서 평소 영화를 만들 때 음악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며, <비밀은 없다>의 허밍음은 배우에게 촬영 전부터 연습시켜 녹음한 중요한 장치라고 밝혔다. 실제 영화의 절반 가까이의 사운드를 이 허밍음이 차지하고 있는데, 관객들은 이에 대해 ‘불쾌했다’라는 평을 종종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배우와 감독이 가진 역량의 부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다분히, ‘의도성’을 가진 연출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미쓰 홍당무>는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을 ‘타의적’으로 웃기게 만든 것이 아닌, ‘내가 나여서’ 그랬던 거라며 그러나 동시에 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관객은 웃지만 너무나도 슬프게 울어버리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코미디의 기존 문법을 빗겨간다. <비밀은 없다>는 실종된 딸에 관한 의문을 밝히는 스릴러로 포장되어있지만 단순히 딸을 찾는 엄마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배우들의 가파른 호흡과 폭주하는 스토리텔링으로 기존 서사의 문법을 명쾌하게 빗겨갓듯, 기존 서사 공식과 감독만의 호흡을 넘나들며 분위기를 환기한다. 이는 감독의 한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다. ‘내 영화에 여성이 등장하는 이유는 남성 영화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여성 영화가 많이 나오는 시대가 되면, 그때 나는 남성 이야기를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이경미 감독은 자신만의 새로운 화법으로 세계 속의 이면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영화적인 소스에서만 변주를 주었을까. 이경미 감독은 ‘캐릭터’라는 아주 강력한 무기로 자신의 의도를 더 확고히 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여성을 발견하는 새로운 시선으로 기존 문법을 또 한 번 비튼다. 바로 ‘감정적인 여성캐릭터’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여성캐릭터는 중요한 순간에 ‘감정’에 호소하며 영화 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린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를 뒤집기 위해서 이경미 감독은 ‘이성적인 여성 캐릭터’를 배치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엄청나게 감정적인’, 즉 아주 신경질적인 여성 캐릭터(미숙과 연홍)를 세계와 갈등하게 함으로써 여성을 새롭게 발견한다. <미쓰 홍당무>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 짝사랑 상대 앞에서 실제로 ‘삽질’을 하며 폭주하듯 자신의 마음을 쏟아내는 미숙은 제자의 부모님의 이혼을 막을 대책으로 내연녀와의 성적인 문자를 기획하고, 제자와 합이 잘 맞지 않자 컴퓨터 실 부품을 부시고 서로 상처를 낸다. 또 생뚱맞게 피부과 의사에게 자신의 하루를 털어놓는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캠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곳에서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이성적인 수사방식이 아닌 굿, 최면술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딸의 메일 비밀번호를 알아내려고 고객센터에 딸의 목소리를 흉내낸다. <미쓰 홍당무>의 미숙과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신경질적인 여성’으로서 세계와 대립하며,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발견하게 한다. <미쓰 홍당무>가 감정적인 여성, 신경질적인 여성들(미숙과 종희)의 연대를 그리고, 여성들 사이에 남성(종철)을 존재하게 했다면, <비밀은 없다>에서는 그러한 여성을 남성의 세계로 대립하게 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지점은 ‘여성 청소년 캐릭터’이다. <미쓰 홍당무>의 종희와 <비밀은 없다>의 민진은 청소년물이나 성장영화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영화의 키를 쥐고 있는 건 종희와 민진이고,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말이 무색하게 정말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종희와 민진은 청소년이 아닌 종희와 민진 그 자체로 주체성을 획득하는데, 종희와 민진이 가장 중요하게 가지고 있는 키는 ‘연대’와 ‘전복’이다. 종희와 미숙, 그리고 민진과 미옥, 연홍의 연대는 신경질적인 여성을 세계와 대립시키는데 핵심적으로 작동한다. 종희와 민진은 왕따를 당하고 있는 청소년으로서 사회에 소외된 주체인데, 이들은 기성 여성(선생인 미숙과 엄마인 연홍)을 자신보다 멍청한 존재로 판단하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며, 지켜주기까지 한다. 선생인 미숙이 자신의 아빠를 짝사랑하게 된 이유가 ‘아빠가 귀에 대고 속삭여서’라는 어이없는 말을 듣고, 미숙에게 아빠가 ‘귀를 핥았다고 하라’며 지시한다. <비밀은 없다>에서는 <미쓰 홍당무>에서 이경미 감독이 스스로 다뤘던 선생-제자의 문법을 다시 비틀어, 아빠의 내연녀가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민진이 선생에게 돈을 요구하고 일방적인 욕을 퍼붓는다. 선생인 미숙은 종희가 자신의 팔이 아플까봐 ‘커진다 커진다 커진다’를 대신 써줬다는 얘기를 하며 베시시 웃고, ‘엄마는 멍청해서 지켜줘야 해요’라는 민진의 유언을 들은 엄마 연홍은 민진의 친구 미옥을 안아준다 바로 여기서 감독이 보여준 종희와 민진이 기성 여성을 연대하는 동시에 그들의 위치를 전복시키는 영화의 구조는 감독이 세계를 뒤집고 비틀고 있는 여러 단서들을 증명하는 격이 된다. 이경미 감독이 뒤집고 있는 세계에 대한 단서를 내가 다 파악하고 통찰하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경미 감독이 두 영화에 공통적인 화법으로 던져놓은 다른 소스들에서 조금의 단서들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작 <Love Set>를 통해 한 번 더 확고히 했다고 생각한다. 극 중 IU(이지은)와 두나(배두나)는 20분 가량의 단편 러닝타임 대부분을 테니스 코트에서 움직인다. 역시 어딘가 화나 있는 듯한 신경질적인 여성 캐릭터, 아빠를 내어주기 싫은 건지 남자친구와 결혼하기 싫은 건지 확실하진 않지만 강력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여성 청소년 캐릭터. 테니스 경기 동안 배우들의 신음, 랠리, 자두를 씹어먹는 소리, 그리고 피를 뚝뚝 흘리는 여성의 신체를 클로즈업한다. 이들은 경기를 끝내고 손을 맞잡게 되는데, 몇몇 영화 리뷰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동성애적 코드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해석한다. 또, male gaze가 담겨 있는 작품이라는 평도 많은데, 이 작품의 감독은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부딪히고 있다. 이경미 감독은 대중에게 영화가 한 방면으로 해석될 여지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연출점으로부터 이경미 감독과 대중의 관계는, 이경미를 지독하게 싫어하거나, 열렬히 응원하거나. 이 둘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전따와 전따 애인은 바로 무대로 올라와주시길 바랍니다.” “니가 전따고 내가 전따 애인이지?” “무슨 소리에요! 선생님이 전따고 내가 전따 애인이지!” <미쓰 홍당무>에서 미숙의 담당과목은 원래 러시아어였다. 하지만 뭐든지 자신보다 잘나 보이는 양희에게 담당 과목도, 짝사랑 상대도 빼앗겨버린다. (이 점에서 여성과 여성이 대립하는 방식에 대해서 아쉽다는 평도 있지만, 나는 영화 속에서 여성과 여성이 대립하는 것은 여성의 연대와 그 이면의 전복을 얘기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얼굴이 빨개서 뭘 하든지 우스워보이고, 학생들에게 선생이 ‘전따’라고 불리며, 학생보다 영어를 못해서 아침마다 영어학원에 가야하는 미숙은 자신의 사랑도 지켜야하고 공연 연습도 해야하기 때문에 잠을 잘 시간도, 밥을 먹을 시간도 없다. 게다가 피부과는 미숙을 피해서 이사를 가 버린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지역 감정이 심한 경상도에서 전라도가 고향인 걸 숨기며 살다 들통이 나서 ‘정말 전라도에요?’라는 질문까지 받는다. 전라도면 전라도지 ‘정말 전라도에요?’라는 질문은 굉장히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출생지, 외모와 같은 것들로 차별받는 주인공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남편의 세계에서 점차 소외된다. 이경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 여성주의에 한정되어 작품을 찍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화 속 여성을 분리되고 약하고 소외된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단면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사람들의 편견들을 넣고 싶었고, 그것과 싸워서 극복하고 이기는 인물을 그려내고 싶었다. ”라고 한 점에서 비추어 볼 때, 이경미 감독이 여성캐릭터를 새롭게 발견한 점, 기존 문법과 다른 새로운 화법을 구사하며 신선한 장치들로 영화를 구성했다는 점들은 이경미 감독이 영화를 빌어 세계에 하고 싶은 말이 배타적인 동시에 이타적인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보게 된다. ‘나여서, 내가 나여서 그랬던 거에요.’라며 자신을 한 없이 자조적으로 끌고 갔던 미숙이, ‘전따와 전따 애인’일지라도 우리는 너희와 수준이 다르다며 열심히 연습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다. 연홍은 민진의 가사를 해석하고, 미옥을 끌어안는다. 이윽고 어지럽게 나열되어있던 불규칙들이 한 곳에 모이고, 이들이 버티고 있던 세계는 전복된다. 미숙과 종희가 서로 등 지고 팔짱을 낀 채로, 번갈아가며 세계에서 발을 뗀는 것처럼, 한 발씩, 한 발씩.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 사회가 켠 가스등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부정당해왔다. ‘미친 여자’는 오로지 남성의 경험에 의해 판정되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미스터리였다니!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보살필 의무가 있다. 여성의 인식과 자신감을 믿자, 서로에게 가스등을 켜지 말자. - 애드리언 리치 <비밀은 없다>와 <미쓰 홍당무> 어느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다. 대개 그렇듯 아내‘만’ 바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 중이다. 기지개를 켜며 남편이 다가와 묻는다. “내 여권 못 봤어? 12시 비행긴데, 큰일이네”. 이 경우, 아내의 ‘바람직한’ 반응은 무엇일까. “(쿨하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여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격하게) 아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어젯밤에 말했어야지! (그랬으면 내가 찾아놨지……)” 남편은 화를 냈다. “너는 찾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소리부터 지르냐.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억울한 아내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남녀 불문, 자기 물건은 자기가 간수해야 하고 더구나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남자는 자기 여권 찾는 일이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내 역시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왜 나한테?”가 아니라 “왜 이제야!”라고 안타까워한다. 결국, 모든 잘못 - 여권 안 챙김 + 그걸 아내에게 물음 - 은 남편이 했는데도, 아내는 ‘소리만 지르는’ 부부 갈등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명절을 앞두고 내 친구가 계속 문자를 보낸다. 다급하고 불안한 말투에다 자기 분열적인 내용이다. 친구는 소위 전문직에 종사한다. 이번 연휴에 진급과 관련한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시댁에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시댁에 안 가는 대신 백만 원을 보냈단다. 시집에서는 별말이 없다. 남편의 직업은 사회운동가이지만 수입은 없다. 친구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데도, 자기 본업에 집중을 못 하고 있다. 동시에 집중을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가 치미니까 시집과 남편 욕을 하다가, 사회를 비난하다가, 자책하다가 결국은 매번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로 문자를 마친다. 남성 생계 부양자라면, 명절에 ‘처가집’ 방문으로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위의 사례들은 성 역할 규범(norm)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 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와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다. 평소 나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정신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돼.”, “가만, 생각을 하자.” 나는 거의 매일,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짐을 거듭한다. 객관적으로 그럴 만한 상황인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건가? 핵심은 그게 아니다.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혹은 당한 이유라도 알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경미 감독의 < 비밀은 없다 >에서 국회의원 출마에 나선 엘리트 정치인의 아내로 나오는 연홍(손예진 분)은, 선거 운동 와중에 딸이 실종되는 사건을 겪는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혼란과 분노……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믿을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고 “정신을 차리자”를 반복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운다. 이 영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미쓰 홍당무(Crush And Blush) >(2008년) 가 나왔을 때, 한국 영화에서 드문 여성 캐릭터의 등장에 찬사가 쏟아졌다. <비밀은 없다(The Truth Beneath)>(2015년)의 손예진 과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 은 같은 캐릭터다. 미쓰 홍당무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니 내가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극 중 손예진의 중학생 딸의 대사처럼, 두 영화의 주인공은 남성성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 다만, 연홍은 나름 든든한 남편을 둔 기혼여성으로 김밥을 맛있게 만드는 전업주부이고, ‘미쓰 홍당무’는 미혼에 새벽부터 영어학원에서 다니는, 세상사에 열심인 현직 교사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남성 사회, 젠더 법칙, 출세, 인간관계 원리, 진짜 돈 버는 방법 등등 공적 영역이 작동하는 원리를 모른다. 두 여성 모두 나이브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 주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이 싫다. 한편으로는 주변을 돌보는 착한 여성들이다. 자기중심적이기도 한데, 이기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정돈과 자기 단속에 바빠서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간혹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약간의 신경증과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 어쩌면 이 여성들의 신경증 정도에 따라 영화의 장르가 달라질지 모른다. 안면 홍조증인 여자가 신경질을 내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면 코미디가 될 것이요, 중산층 가정의 미모의 불안한 여자가 남편을 의심하면 스릴러일 것이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이 남성이라면 어떨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미쓰 홍당무>는 ‘외모’를, <비밀은 없다>는 ‘모성’을 다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비밀은 없다>가 작품성과 대중성에 비해 흥행이 안 된 이유 중에 제목을 꼽는 이들이 꽤 있었다. 제목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사실, 평범함을 넘어 진부했다. 아니, 틀렸다. 세상에는 비밀이 많다. 제목이 인상적이지 않아도 입소문이라도 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사람들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비밀은 없다고 생각한다. 입이 ‘싼’ 사람에 의해 종국에는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노! 그렇지 않다. ‘모르는 사실’과 ‘없는 사실’은 다르다. 모르는 사실은 없다. 모를 뿐이다.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지와 무지의 경계는 권력이 정한다. 권력이 있는 모든 곳에는 비밀을 둘러싼 정치가 있다. 비밀, 고통, 권력이 삼각형을 이룬다. 비밀로 인해 이익을 보는 자, 억압을 당하는 자, 손해를 보는 자, 고문을 당하는 자……. 비밀(언어, 사실, 정보, 역사……)은 권력 관계의 정점이다. ‘여성’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있고, 민초들이 자각하면 안 되는 팩트가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왜 그토록 미움을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자들은 비밀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피억압자들에게 앎, 깨달음은 해방이기도 하고 기꺼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일, 여성들이 밥하는 일이 여자의 ‘운명’(성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성들은 삼시 세끼 준비 스트레스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느라 역사를 창조하지 못했으리라. 최저 임금 액수가 정규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당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어딘가를 습격한다면?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비밀을 알아내고 사회를 습격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복수극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은 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연홍 같은 캐릭터가 불안해 보이는 이유는, 매 순간 이 구호를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작동하도록 뇌의 방향을 수시로 회전시켜야 한다. 믿었던 것과 알게 된 것 사이에서 약자의 경험과 지배 언어의 간극을 그린 고전으로 잉그리드 버그먼과 샤를 부아예가 주연으로 나온 1944년 작 영화 <가스등(Gaslight)>을 꼽는 데 주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어떤 인식론과 접속해도 의미 만점의 텍스트다. 원작은 패트릭 해밀턴의 2인 대사의 희곡인데, 영화는 조지프 코튼과 안젤라 랜스버리를 등장시켜 사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부인의 유산을 노리는 남편은 가스등을 조작하여 깜빡이게 하고, 아내는 자신이 본 가스등과 믿어주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녀는 남편의 의도대로 정신병자가 되어 가지만 결국 자기가 본 것을 믿는다. 가스등(Gaslight) 이 작품은 이후,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애드리언 리치를 필두로 수많은 메타포와 문학 작품, 논문을 낳았다. 거짓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장치, 인식 과정의 성별 정치학과 사회성, 자신만의 언어는 어떻게 획득 가능한가 등 수많은 쟁점을 제공한다. 미국의 심리 상담가 로빈 스턴은 이 영화를 소재로 쓴 책 「가스등 이펙트」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의 인식론적 곤경을 ‘가스등 효과’라고 명명했다. 여성들은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라고 말하며 방황한다. 남자는 개인이 아니라 세상을 대변한다. 책의 부제는 ‘보이지 않는 조종에서 살아남는 법(How to spot and survive the hidden manipulation)’이다. 그렇다. 문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성별, 계급, 인종 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다. 서로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다’. 어렵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다른 땅(위치)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섬에서 땅으로의 이동이 쉽겠는가. 같은 여성이라도 강간을 경험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젠더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란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4.3 사건, 호모포비아 억압처럼 타인이 상상하기 힘든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말하기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일단, 자신이 경험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자기도 못 믿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이야기하겠는가. 자기 검열과 정치적, 사회적 검열은 연속선을 이룬다. 그래서 평생을 특정 사건의 후유증(aftermath, 餘波)으로 보내는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자기가 경험한 것, 본 것을 믿어야 한다. 특히 가시화되기 힘든 사건들은 믿는 정도가 아니라 인식론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도 안 믿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믿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적 의미의 전통적인 방어기제, 부인(否認, denial)이다. 어떻게 선거에 출마하고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학교 교사랑 섹스를 하고, 교사는 그게 약점이 되어 자기 딸에게 시험지를 유출하고, 그로 인해 아이가 살해된 현실. 믿어지겠는가. 더구나 이 모든 사건 자체가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궤도 밖에 있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한 세계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엄마를 지켜주겠다는 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생존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자기 분열이다. 자신이 본 것과 인식 사이의 분열, 자신의 인식을 타인에게 말할 때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분열, 말한 다음에 가까운 사람에게마저도 추궁당하고 의심받을 때 ‘나는 제정신’이라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분열……. 이때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말이 “정신을 차리자”이다. 이것은 방언이다. 사투리가 아니라 자기만이 알아듣는 주문(呪文)이다. 말로써 자신을 붙잡는 것이다.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난민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사회가 이들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나 여성의 일상은 공적 영역의 규범에서 제외된다. 페미니스트의 곤란 혹은 문제점도 이것이다. 나는 내가 만나고 도움을 ‘준’ 가정폭력, 성폭력, 성 산업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많이’ 썼다. 그런데 같은 여성주의자들조차 믿지 않는다. 고통받은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대화가 가능한 지점은 흐릿하고 아슬아슬하다. 마치 위험한 물건이 들어있다는 자루에 손에 넣는 기분이다. ‘지나치게’ 진실에 집착하면 파문(破門)당한다. 이 영화에서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는 할 일이 많을 때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본 것과 남(편)이 말하는 것 사이에서 불일치할 때 나온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세계는 혼돈(dis/order)의 연속이다. 질서(order)는 ‘저들의 것’이다. 저들의 질서가 나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나만의 삶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불안이 정상이다. 불안은 몸의 외부와 자신의 몸이 불일치할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성(理性)이다. “안정되어 보인다.” 나는 이 말,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욕망하는 현실이 싫다. 안정만큼 계급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 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이런 인생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동시에 피억압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말이다. 악이란, ‘객관’은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믿는 ‘정신 승리자들’의 세계다. 승리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인데, 승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 한가한 사람들 때문에 현실은 왜곡된다. 극 중 연홍이 자기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에이, 그럴 리가.”, “루머겠지.”, “미쳤구만.”……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을 믿고 마법을 걸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외롭고 서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