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기애애
- 감독
- 장희선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김꽃비, 길해연, 백현우, 이수민, 이원종, 김태범, 백소미, 이미은, 홍승일, 채민석, 박현영, 김왕근, 한세은, 김택수, 강재은, 신윤주, 마크사무엘, 강경태, 김성윤, 김진숙, 송윤신, 이윤경, 장경수, 김지영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경기도 시흥군 동면 안양리(현 안양시), 얼핏 봐도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일 정도로 인파가 북적이는 이곳.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일까? 흙먼지 폴폴 날리는 공사장에 말이다.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짓고 있는 중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 앞에서 멋들어지게 늘어서서 단체 사진은 또 왜 찍고 있는 걸까? 혹시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일까? (좌) 홍찬, 현제명 등 / (우) 박계주, 조경희 (좌) 한형모, 허백년, 이진섭 등 / (우) 김학성, 유계선 등 엄청나고 대단한 것이 들어설 것 같은 흥분으로 가득한 이곳은 다름 아닌, 동양 최대 규모의 영화 스튜디오가 될 수도영화사(대표 홍찬 ) 안양촬영소 정초식 및 상량식(이하 정초식) 현장이다.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속 여러 장에 걸쳐 발견되는 일련의 사진들에는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과 현제명 박사, 문학가 박계주 와 조경희, 시나리오 작가 유한철 과 이진섭 , 영화평론가 임영 과 허백년 , 스틸 작가 백영호 , 감독 한형모 , 배우 이민 과 유계선 등의 인물들이 포착되어 있다. 생전 이 사진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던 촬영감독 김학성 의 모습 역시 박혀있다. 그러나 이 행사에는 문화계 인사만 자리한 것이 아니었다. 단신에 가까운 신문 기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동정을 따라가는 <대한뉴스>에서 확인되는 이날의 공식 기록은 이러하다. 안양촬영소 정초식은 1956년 10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안양리 공사 현장에서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현제명 박사는 공사 경과를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최규남 문교부 장관의 축사가 이어졌다. *주1 그 밖에도 여기에는 당시 민의원 의장이었던 이기붕과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익흥 등의 정부 인사 역시 자리했다. 영화배우 주증녀 가 영화인 대표로서 단상에 올라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전달했고, 정초식 이후 대통령은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촬영소 모형도를 살폈다. *주2 이 같은 공식 기록을 놔두고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의 사진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그것이 다름 아닌 ‘개인의 기록’이라는 데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열거하며 대통령의 동정에 초점을 맞춘 공적 보도와 달리, 이 일련의 사진들은 순수하게, 안양촬영소 건립에 들뜬 영화인의 시선으로 기록된 것들이다. <대한뉴스>에서 전달되는 근엄하고 정제된 분위기와 달리, 사진은 어딘가 다소 어수선하고 북적인다.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시각 요소만 담겨 있지만, 그럼에도 왠지 이곳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 북적이는 인파와 공사장의 소음이 그대로 들리는 것만 같다. 공적 기록과 달리 정제되지 못한 개인의 사진(심지어 이 사진들은 인화되지 못한 채 필름으로 남아 있다)은 이렇게 예상외의 것마저 전달한다. 그렇다면 영화인뿐 아니라 여러 문인과 정부 관계자들이 나서서 모두 축하하고 있는 안양촬영소 건립이란 당시에 어떤 의미였을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국내의 영화인들은 영세한 자본에다 촬영소는 물론이고 변변한 영화 기자재도 없는 현실을 탄식하며 탄탄한 자본력을 가진 영화 기업을 기대했고, 영화 예술을 위해 헌신하는 굴지의 독지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있는 시설마저 파괴되었으니, 영화인들이 느꼈을 실망과 좌절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고 쉬이 짐작 가능하다. < 춘향전 >(이규환, 1955년 국도극장 개봉) 흥행을 계기로 영화 제작에 숨통이 조금 트였다고는 하지만, 안양촬영소가 개소하기 전까지 국내에 있는 영화촬영소라고는 미국의 아시아재단 원조로 들여온 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정릉 스튜디오와 < 자유부인 >(한형모, 1956)의 제작사 삼성영화사가 서울 군자동에 설립한 삼성스튜디오 정도였다. 이마저도 모두 안양촬영소가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1956년 10월의 안양촬영소 상량식이 영화계, 나아가 문화계 전반의 큰 행사이자 축제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안양촬영소는 대지 면적 32,000평, 건평 5,400평의 규모로, 자타공인 당시 동양 최대 스튜디오였다. 한국영화 1세대 촬영기사이자 테크니션이던 이필우 의 설계를 바탕으로, 3개의 스튜디오(500평, 380평, 150평)와 래보라토리(105평), 녹음실(60평), 소도구 및 대도구 제작실(150평), 분장실(100평), 촬영 장비 저장소(100평) 등을 구비했고, 식당과 샤워실, 총 3,300kW 출력이 가능한 변전실 3개 등의 부대 시설까지 완비했다. 기자재로는 당시 접하기 힘들었던 미첼 NC 카메라 3대와 웨스트렉스 녹음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최신 설비와 시설을 자랑했다. *주3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확인되는 이 같은 모습을 차츰 갖춰가고 있던 1956년 10월, 사진 속의 이날은 그렇기에 더욱 흥분과 경이로 가득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하게 차려입고 이곳에 모인 많은 이들의 상기된 표정은 안양촬영소가 영화인들에게 와닿는 의의를 설명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편 안양촬영소가 여전히 한창 공사 중이던 1957년 3월의 어느 날, 수도영화사 대표 홍찬은 《국제영화》와의 인터뷰에서 촬영과 조명, 소품, 의상, 메이크업 등의 기술 스태프 500여 명을 전속으로 기용할 예정임을 은연중에 밝히기도 했다. *주4 홍찬이 발표한 이 말이 사실이라면,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건립은 영화인들에게 또다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속’이라 함은 곧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가 안양촬영소 건립과 함께 제시한 청사진은 영화인들이 불안정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수도영화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스태프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위 사진들의 원 소장자 김학성이 수도영화사와 촬영감독 전속 계약을 맺은 사실은 그의 컬렉션을 통해 확인된다. 김학성의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 임명장 (한국영화박물관 상설 전시 자료, 우측은 필자의 한글 병기) 수도영화사의 전속 촬영감독으로서, 김학성은 이곳에서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 창립 작품 < 생명 >(이강천, 1958)의 촬영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도 수도영화사 전속 촬영감독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양촬영소 상량식 사진들 못지않게,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는 그가 <생명>을 촬영할 당시에 찍은 사진들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도영화사 사무실에서 촬영된 필름을 검토하고 있는 모습부터 <생명> 고사 현장, 한강 로케이션 촬영 현장과 안양촬영소 세트장에 이르기까지, 사진 자료만도 89점에 달한다. 이는 그가 참여한 작품에 관한 컬렉션 사진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성대하게 지어진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의 수명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못했다. 수도영화사는 창립 작품 <생명>에 이어 < 낭만열차 >(박상호, 1959)를 제작했지만, 두 작품의 잇따른 흥행 부진으로 수십억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안양촬영소는 1959년 4월 부도 처리되며 상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이후 선민영화사와 홍성기 감독, 범아영화사가 잠시 운영을 맡기도 했지만, 한동안 방치되었고 1966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인수돼 안양필름(1967~1968),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1970~1973) 등의 스튜디오로 활용되었다. *주5 *** 주1. “안양촬영소 정초식 성대”, 《조선일보》 1956. 10. 18., (석)3면. 주2. “ 대통령 각하, 안양촬영소 정초식에 임석 ”, <대한뉴스> 제94호, 1956. 10. 주3. 안재석, 「 안양촬영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4. “[신춘대담 no.3] 현란한 문화기업의 개화전: 영화산업의 왕자 ‘수도’의 구상”, 《국제영화》 1957년 4월호(15호), 93쪽. 주5. 안재석, 앞의 글; 조준형, 『영화제국 신필름』, 한국영상자료원, 2009.
‘욕창’은 문자 그대로 이 영화의 주요 제재이자 은유이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어떤 주저함과 마음의 덜컥거림이 생겨났다. 의학사전에서 한 번은 보았던, 눈을 회피하게 만드는 이미지, 그리고 노년의 중증환자와의 친연성이 생성해내는 근심과 견뎌냄의 의미 덩어리가 영화적 체험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저어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년과 질병은 그 피할 수 없음으로 인해 더 피하고, 미루어 두고 싶은 문제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노년이나 질병이 혹은 노년의 질병 문제가 영화 속에서 진지하게 잘 다루어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욕창 >( 심혜정 , 2019)은 아내이자 어머니인 한 여인의 엉덩이 위에 생겨난 질환 ‘욕창’을 둘러싼 한 가족의 이야기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어찌 보면 이 영화에서 욕창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러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이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그 증상이 촉발한 ‘가족 시네마’에 소극(笑劇)적 성격이 배어든다. 감독은 “겉에서 봐서는 모르고, 얼마나 깊은지가 문제”인 욕창이라는 증상을 둘러싼 가족 세계의 표피를 사실주의적으로 구축해가면서, 동시에 피부 심층 피하조직의 궤양의 깊이를, 대상으로부터의 거리의 확보를 통해, 가족 관계에 대한 은유적 의미로 바꾸어낸다. 시작과 함께 영화는 누가 이 실내극의 이방인인지를 질문한다. 장년과 초로의 이음새 즈음에 있는 듯한 창식과 재중동포 어투를 가진 수옥 사이의 적당히 화기애애한 두 사람만의 공기는 휠체어를 탄 중증환자 길순의 등장으로 깨진다. 정지된 듯 움직임 없는 그녀의 외피는 화표면에 이질성을 도입하며 공간의 기운을 바꿔놓는다. 길순은 이방인이다. 이 ‘집’의 이방인은 간병인이지만, 시각적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이방인은 아내인 것이다. 감독은 이처럼 공간 안을 순환하는 미묘한 기운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딸 지수가 어머니의 욕창 발생 소식을 듣고 창식의 집에 들러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의 묘사다. 카메라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걸레질을 하느라 엉덩이가 불쑥 솟아 난 수옥의 뒤태를 지수의 시점 쇼트로 잡는다. 그 엉덩이의 활력은 길순의 욕창 아래 엉덩이와 대비되며, 또한 창식이 욕망하는 어떤 것을 현시하면서, 그 삶의 활력이 그 것의 상실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몰고 올, 앞으로 이 실내에서 펼쳐질 갈등의 드라마의 기미를 스크린 표면 위에 낯설게 도입한다. 그것이 창식의 시점 쇼트였다면 진부하고 느끼한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가족 구성원 각각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는 거울상과 같은 다른 대상과의 마주침, 대비, 변주 등을 통해 의미의 폭을 넓혀간다. 예컨대, 지수가 처해있는 이중의 딜레마는 친정과 자신의 집의 거실 풍경의 대조를 통해 깊어지고, 영화 속 이질적 요소인 빨간 파카를 입은 중증 장애인 남자와 가족 구성들과의 우연한 마주침들의 변주는, 길순과는 다른 층위에서, 누구나 언젠가는 마주할지 모르는, 피할 수 없는 나이듦과 중증질환의 문제를 객관화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아버지의 물건들과 어머니의 손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가부장의 상징적 권위를 안쓰럽게 주장하고 있는 아버지의 의자, 삶의 에너지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을 물질화하는 스텝퍼와 만보기. 그와 같은 물건들을 통해서 창식이 묘사된다면, 이미 물건 소유의 의미를 놓쳐버린 길순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그녀의 손이다. 우리는 한 사람 분의 노동력을 가리켜 ‘손’이라 한다. 누군가 다른 이에게 무엇을 차려주고 돌보는 데에는 손이 필요하다. 타인의 손에 의지하고 있는 길순에게 그녀의 손은 대부분 침대에 묶여 있는 거의 유일하고 미약한 의사소통의 도구다. 불만을 똥칠로, 살아 있음을 남편의 팔목을 잡는 것으로, 안쓰러움과 사랑스러움을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표현하는 길순의 손이 그것이다. 심혜정 감독은 실험 비디오 작업과 퍼포먼스로 경력을 시작하여 단편 다큐와 극영화 작업을 병행해 왔다. 대개의 미술 학제의 배경을 가진 연출가들의 작업이 서사보다는 이미지 자체의 물질적 성격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편견과 달리, <욕창>에서 이미지는 한 치도 서사에서 돌출하여 자신의 독자적 도드라짐을 퍼포먼스하지 않는다. 정공법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미지는 서사가 요구하는 만큼만의, 서사와의 조응 속에서 그 움직임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심혜정은 장편 데뷔작을 통해 비 내러티브 작업뿐만 아니라 내러티브 작업에도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몇 미터만 걸어도 땀이 삐질삐질 흐르던 지난 7월 초, 올 상반기 개봉작 중 1만 관객을 돌파한 독립영화의 젊은 피 3인과 자리를 함께 했었다. < 혜화, 동 >의 민용근 감독, < 파수꾼 >의 윤성현 감독, < 무산일기 >의 박정범 감독이 그들이었다. 상복도 많았고, 관객들의 사랑도 담뿍 받은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고 기억된다. 세 감독 모두 서로 동년배 친구사이거나 이미 영화제 등을 통해 얼굴을 익힌 사이인지라 따로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을 만큼 인터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상반기에 특히나 사랑을 받았던 만큼 각자의 소회도 남달랐다. 상처받은 스물 셋 혜화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던 민용근 감독은 이제는 독립영화계에서 유행이 되어버린 ''''찾아가는 GV''''에 대한 뒷얘기를 들려줬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았던 터라 매일 자신의 데스크톱 컴퓨터를 켜 트위터로 약속을 잡고 관객들을 만나는 ''''출퇴근 생활''''의 반복이었다는 토로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 기저엔 당시의 설렘과 데뷔 감독으로서의 흥분이 묻어나고 있었다. 연이은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으로 받은 상금을 바탕으로 차기작을 만들 수 있게 됐다는 박정범 감독은 탈북자를 친구로 둔 고등학생에게 지속적으로 메일을 받았노라 털어놨다. 그만큼 < 무산일기 >가 탈북자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비정함을 기민하게 포착했다는 반증이리라. 박정범 감독은 민감한 주제인 만큼 탈북인들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또 탈북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렇기에 박정범 감독은 ''''작가가 가져야 할 사회적 책무''''란 표현을 썼을 터다. 전날 새벽까지 이어진 작업 덕에 이날 가장 늦게 도착한 윤성현 감독은 할 말이 가장 많아 보였다. 세 사람의 젊은 피 중 가장 혈기왕성하다랄까? 기사에서는 전부를 실을 수 없었지만, 그가 첫머리부터 꺼낸 화두는 배급환경에 대한 문제였다. 독립영화 감독이라면, 아울러 독립영화를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은 이라면 누구라도 생각해 봤을 바로 그 문제. 데뷔작에서 남다른 주목을 받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감독이라면 제 새끼와도 같은 완성품을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픈 마음, 그 누구도 다르지 않으리라. 사실 이 세 명의 감독과 얘기를 나누며 귀결되는 것 또한 바로 이 배급환경의 문제였다. 천만 관객 시대에 1만 돌파가 큰 뉴스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독립영화의 배급환경 말이다. 첫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직접 운영하는 인디플러스가 개관한 것이 올 3월이다. 많은 독립영화인들이 전용관의 복구를 안도해야 할지 반신반의했던 것은 점점 축소되고 있는 독립영화, 작은영화 상영관의 숫자들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일 터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도 자연스레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지방극장들의 브랜드화랄지, 멀티플렉스를 소유한 거대 배급사들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같은 실질적인 논의가 오고갈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언제, 어떤 독립영화인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솔깃하고 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방안은 시군구 단위 구청이나 시민회관 등의 스크린을 이용, 독립영화를 평소 접하기 힘든 관객들과의 만남을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다. 독립영화를 지속적으로 지지하는 관객들만큼 향후 힘을 보태줄 수 있는 관객들이 바로 독립영화를 처음 접하고 그 오묘한 맛을 알아가는 대중들일 테니 말이다. 며칠 전 해외의 작은영화를 수입하는 한 영화인을 만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독립영화''''란 정의가 유효한가 물어왔다. 그러면서 좋은 영화를 알아보는 관객의 힘은 변함이 없다, 그런 만큼 멀티플렉스에서 운영하는 예술영화전용관들에 힘을 실어주는 기사를 좀 더 많이 쓸 필요가 있는 것 아니냐고 힘을 주듯 말했다. 관점은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되는 듯 했다. 멀티플렉스가 점령한지 오래인 현 지형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관객들과의 접점을 넓혀갈 수 있을까. ''''좋은 영화는 결국 관객이 알아본다''''식의 낙관주의에 빠져있는 독립영화인은 분명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관주의에 빠지기엔, 상업영화들의 게으름을 반성케 하는 독립영화들이 예나지금이나, 더욱이 요 몇 년 연이어, 더 활발히 출현하고 있다. 지내온 시간만큼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배급환경에 대한 다양하고 성숙한 논의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해 본다. 물론 이 배급환경을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열쇠를 함께 쥐고 있는 문화부와 영진위 그리고 관련 민간 자본들의 자성과 변화가 수반되어야 할 터다. 개인적 바람이 있다면, 내년 여름 이 세 감독과 다시 만나 개선된 배급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