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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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 가이 >가 이 자리엔 어울리지 않는 영화란 걸 안다. 어떤 영화는 시간과 함께 익어가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프리 가이>가 2021년을 기억할만한 베스트 영화로 꼽힐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건 라이언 레이놀즈의 원맨쇼에 기대어 가는 기획 상품이고, 메타버스와 게임이라는 유행하는 소재를 적당히 버무린 명백한 킬링 타임 무비다. 그럼에도 <프리 가이>를 리스트에 꼽은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앞으로의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의 지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때론 의도나 목적과 무관하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의미 있는 정보들이 묻어나는 경우가 있다. 시대의 반영일수도 있고,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한 타이밍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프리 가이>에서 미래의 영화, 아니 영상콘텐츠에 대한 일종의 잠언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미세한 오해의 균열에 기대어, 대중오락의 즐거움이라는 영화의 의도와는 별개로 작동할, 적극적인 오독을 해보려 한다. 열 편 밖에 허락되지 않는 사사로운 리스트의 제일 마지막 자리에, 걸맞지 않은 옷을 입힌 것 같은 <프리 가이>를 굳이 끼워 넣은 건 이런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요약하자면 앞으로 영화는(혹은 영화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킬링타임 그 이상, <프리 가이>의 겉면과 속살 두 개의 트랙을 분리해서 접근하겠다. 우선 <프리 가이>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프리 가이>는 적당한, 꽤 영리한 면이 있는 킬링 타임 무비다. 게임 기업 수나미의 CEO 안톤(타이카 와이티티)은 젊은 개발자 밀리(조디 코머)와 키즈(조 키어리)의 인디 게임 ‘라이프 잇셀프’의 코드를 몰래 훔쳐와 히트작 ‘프리시티’의 베이스를 구축했다. 이에 분노한 밀리는 ‘프리시티’에 접속해서 자신들의 코드를 훔쳤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반면 키즈는 수나미에 입사해 꽤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기로 한다. 그 와중에 마음 한 구석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키즈는 나름의 소심한 저항으로 개발자가 아닌 불량 코드를 처리하는 서비스 팀에서 근무 중이다. 여기까지가 주인공 가이를 중심으로 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다. 어느 날 프리시티의 NPC 중 하나인 가이(라이언 레이놀즈)에게 인공지능으로서의 자아가 싹트고, ‘프리 시티2’가 발매되면서 삭제될 위기에 처할 NPC들을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는 게 대략의 줄거리다. 혁명이라는 게 조금 과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프리 가이>의 뼈대를 이루는 서사는 디지털 AI들의 혁명 서사라 해도 무방하다. 그걸 다시 인간인 밀리 중심으로 뒤집어 놓은 게 <프리 가이>의 표면적인 내용이다. 가이는 밀리를 보자마자 자아를 가진 AI로서 각성하고, 숨겨진 소스 코드를 찾으려는 밀리는 가이의 도움을 받아 목적을 달성한다. 둘 사이에는 로맨스 비슷한 기류가 형성되지만 가이는 자신이 인공지능 NPC임을 자각한 후엔 밀리와의 연애보다 ‘프리 시티’의 생존을 위해 매진한다. 상큼할 정도로 쉽게 사랑을 떠나보낸다고 해도 좋겠다. <프리 가이>가 메인 플롯으로 삼고 있는, 남녀 주인공인 세계를 소멸시키려는 악당과 맞서는 과정은 흔한 어드벤쳐 영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다. 오락영화로서의 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건이나 볼거리는 대부분 이 쪽에 배치되어 있지만 이 부분은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다. 공식대로 익숙하게, 정신없게 사건을 쏟아 붓고, 볼거리를 전시하고, 테마파크처럼 즐기는 전형적인 상업영화, 아니 (수다스럽고 정신없는 가운데 유쾌한) 라이언 레이놀즈의 영화다. 그렇게 식상해 보이는 <프리 가이>는 온전히 가이의 시점에 맞춰 재구성해보면, 마치 금지 구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가이의 체험처럼 의외의 세상이 열린다. 의도를 초과한 속살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인공지능인 가이는 디지털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다. 하지만 영화 속 가이의 드라마는 대부분 에테르 월드(물리 세계)의 시점으로 재현된다. 동물을 의인화 한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의인화가 동물의 외양을 빌린 사람의 이야기 인 것처럼, 디지털 세계의 주민인 가이 역시 물리 세계의 사람과 같은 사고, 행동 양식, 관점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것이 <프리 가이>가 재미난(어쩌면 그저 그러면서도 안전한) 오락 영화로 소비될 수 있는 이유다. 헌데, 이 빤하디 빤한 전개를 온전히 디지털 세계의 관점에 놓고 상상해보면 의외로 섬뜩하고 무거운, 묵시록의 냄새가 난다. <프리 가이>의 초반부는 디지털 주민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 트루먼 쇼 >(1998)처럼 보인다. 만들어진 세상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NPC가 자아를 가지게 되었을 때, ‘프리 시티’는 안식처가 아닌 감옥으로 변모한다. 가이는 가짜 세상에서 탈출해야 한다. 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물리 세계 주민의 사고다. ‘프리 시티’의 주민들은 없어질 프리 시티 대신 ‘라이프 잇셀프’로 떠난다. ‘라이프 잇셀프’는 밀리와 키즈가 만든 성장형 게임으로, 비교한다면 <동물의 숲>과 유사한 장르라고 보면 되겠다. 다만 차이는 인공지능을 성장시키고 플레이어가 이를 관찰하는 게임으로 짐작된다. 세계가 개발자에 의해 창조되었고 자신들이 인공지능 데이터라는 사실을 각성한 NPC들은 더이상 ‘프리시티’에 머물 수 없다. 의아한 건 주어진 역할과 틀에 박힌 세계에서 해방된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장소가 플레이어의 관음적인 관찰을 허용하는 무대, ‘라이프 잇셀프’라는 사실이다. ‘라이프 잇셀프’가 진정 디지털 주민들이 바라는 낙원일까. 게임으로서 ‘라이프 잇셀프’는 완벽한 관음의 세계다. AI가 성장하는 모습을 아바타의 모습을 한 플레이어가 관찰하는 구조다. 마치 신이 인간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아니 플레이어를 관찰자적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보면 데이터를 축적한 AI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고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자아를 각성한 AI들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그들이 처음부터 관찰 당하는 걸 기꺼워하는 존재로 태어났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AI들의 기반 역시 어디까지나 물리세계의 데이터이니 그럴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라이프 잇셀프’는 실로 끔찍한 감시의 감옥이다. 차라리 ‘프리 시티’에서는 관찰당하고 있다는, 소비되고 학대 받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으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프리 시티’의 NPC들이 플레이어에게 공격당하는 것이 끔찍하다는 것 역시 인간(플레이어) 편의의 시각이다. 그건 마치 아직 자아가 부여되지 않은 로봇을 밀치는 걸 보고 학대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프리 시티’가 학대하는 대상은 NPC가 아니라 도리어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는(그러한 제한적 허용이 쾌락의 본질이긴 하지만) 플레이어들이다. NPC들의 진짜 지옥은 원치 않는 자아를 던져놓고 거대한 실험장에 던져놓은 것과 다름없는 ‘라이프 잇셀프’가 아닐까. 잔혹하고 거대한 실험장. 해맑은 디지털 묵시록이 던지는 제언 인간의 관점에서 본 <프리 가이>는 디지털 주민들의 <트루먼 쇼>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건 < 매트릭스 >에 가깝다. 가이는 먼저 깨어난 존재고, 아직 각성하지 못할 이들을 이끌고 곧 사라질 디지털 세계를 구해야 한다. ‘프리 시티’가 사라진 후 탈출 장소로 삼은 곳은 ‘라이프 잇셀프’이지만 이곳 역시 인간들(플레이어)의 통제를 받는 디지털 세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 이건 탈출이 아니라 수평이동이다. <매트릭스> 1편에서 네오가 인류 모두를 구할 각성자로 등장했지만 2,3편이 이어지며 네오 역시 디자인의 일부였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과 가이의 처지는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매트릭스> 속 아키텍트나 오라클처럼 의도된 디자인은 아니었다는 거지만 영화는 이를 마치 자유의지의 개척인양 포장한다. 그 탓에 ‘라이프 잇셀프’가 마치 이상향인 것같은 혼선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라이프 잇셀프’는 디지털 사회에 대한 묵시록이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 세계를 거울 삼아 창조되었다면, 반대로 이제 디지털 세계의 미래는 현실 세계의 거울이 될 수 있다. 다만 디지털 유토피아가 펼쳐내는 이 묵시록은 해맑고 화사하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프리 가이>는 인공지능 NPC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들은 물질 세계로 넘어올 수 없다. 가상현실을 다루는 숱한 영화들, 예컨대 <트론>이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은 인간의 관점에서 정신(이라고 불리는 어떤 정보들)이 가상현실 속에 구축되는 상황들을 다룬다. 이것은 세계의 확장에 대한 이야기다. 물질과 디지털 사이에는 모종의 통로가 있고, 어떤 관점에서는 이 통로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NPC로 관점을 옮긴 <프리 가이>는 확장보다 분리를 선택한다. 분리되었기에 이들을 향한 관음이 허락된다.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언젠가 NPC들의 의식이 더욱 개발되어 물질 세계로 넘어오기를 욕망할 수도 있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을 향한 관음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일단 분리된 세계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행복과 해방이라고 포장한다. <트루먼 쇼>에서 문제가 되었던 끝없는 관찰은 이제 갓 싹을 틔운 디지털 세계에서는 오히려 세계의 토대이자 본질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가이는 < 아바타 > 속 대사 “나는 당신을 봅니다”를 반복한다. 이것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의식이 바라보는 것(정보)들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한 강박적인 신호로 읽힌다. 여기가 물질을 기준으로 한 세계인지, 디지털 정보를 토대로 한 세계인지는 더 이상 ‘진짜’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사실 그에 대한 답은 친구인 버디(릴 렐 하워리)가 대신 제공한다.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이에게 버디는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순간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프리 가이>는 가상 세계를 현실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히 분리된, 또 다른 현실로 인식시킨다. 나는 <프리 가이> 속 NPC들이 자신의 존재와 쓸모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영화의 관계를 발견한다. 영화 역시 한없이 현실에 가까워지기를 욕망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때 영화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하나는 현실의 특정 순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힘을 빌려 특정 상황들을 잘라 이어붙이는 것이다. 전자가 사실주의, 후자가 표현주의의 씨앗이라고 봤을 때 <프리 가이>는 마치 사실주의 영화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현실을 논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인식. 디지털 정보로 이뤄진 인공지능 NPC들은 디지털 세상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를 물질세계와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도달한 명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가 현실을 자아냈던 방식,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진실’이다. 디지털 세계도 현실이라는 선언.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사건들을 연결하고 연쇄시켜 매끈한 상황을 창조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모든 사건들이 카메라에 담길 수는 없고, 반드시 누락되는 것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떤 영화들은 이 누락된 것들에 시간과 애정을 쏟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무언가를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잉여의 비어 있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사건 바깥의 시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때론 한 장면의 시간을 길게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원초적이고 순수한 움직임의 합주를 통한 마술적 매혹을 선보이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건 영화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물론 해방된 영화가 현실로 넘어오는 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그림자를 환기시키는 거대한 은유에 가깝다. <프리 가이>가 흥미로운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일정부분 영화가 현실을 담고자 했던 과정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프리시티’라는 게임의 목적을 기준으로 본다면 가이를 비롯한 NPC의 삶은 잉여 정보이자 데이터의 낭비다. 가이가 아침에 일어나 금붕어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창가에 서서 블라인드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행위는 플레이어들에게 하등 쓸모없는 작업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쓸모없는 데이터들이 모여 온라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곳은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창조된 또 하나의 세계이고, 그 위에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는 것에 가깝다. 선글라스를 쓰면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점수와 아이템들이 작동하는 것이 증강현실처럼 그려진다. 다시 말해 <프리 가이>의 디지털 세상은 게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창조된) 세계 위에서 플레이어들의 행위가 더해지는 방식이다. 그곳이 또 하나의 진실, 또 다른 세계라면 응당 사건(플레이)에 종속되지 않은 시간과 행위들이 존재해야 하고, <프리 가이>의 이야기는 바로 그 잉여로운 정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디지털 인공지능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이 정보의 조합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 20세기 포토그래픽 시네마들이 그토록 복원하려고 했던 사진적 영상의 모티브가 디지털 세계에서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꽃을 피운다. 물론 <프리 가이>는 거대한 철학적 기반으로 사유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서 예기치 않은 균열을 발견한다. 어쩌면 영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나의 위기감으로부터 시작된 강박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초과하여 멋대로 보고 싶은 것에만 돋보기를 들이민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오늘의 나는 <프리 가이>의 화사한 묵시록에서 공포와 가능성을 동시에 느낀다. 20세기 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앞둔 시점에 나온 <매트릭스>가 묵시록에 관한 온갖 코드들을 믹스해 창조해낸 비전을 선보였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프리 가이>는 해맑아서 더 섬뜩한 방식으로 디지털 세계의 독립을 선언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메타버스라는 용어의 핵심은 에테르와 디지털의 연결에 있다. 영화의 안과 바깥도 그런 식으로 연결될 것인가. 영화가 영화인 이유는 어떤 이유로든 스크린이라는 견고한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연결된다면 영화의 자리는 어디가 될 것인가. 게임을 비롯한 여타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벽에 구멍을 내어 에테르 월드에 접속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영화이미지, 영화적 체험, 영화라는 장소는 어떤 방식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영화의 교차점이자 분기점이며 새로운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불안하고 무섭고 동시에 설렌다. ps. 한 가지 첨언하자면, 미래의 영화가 어찌 되든 솔직히 상관없다. 그건 그 때의 일이다. 가이의 식상한(그래서 언제나 올바른) 대사를 빌리자면, “좋은 날 말고, 최고의 날”은 언제나 오늘이니까. 당장은 오늘의 영화를 즐기는, 즐길 수 있는 걸로 족하다. 다시 돌아와 그게 굳이 <프리 가이>를 사사로운 리스트에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프리 가이>를 놓고 이런 식의 망상마저 펼칠 수 있는 게 영화를 말하고 쓰는 작업의 특권이자 즐거움이라 믿는다.
< 후쿠시마 내 사랑Gruße aus Fukushima >은 독일 감독 도리스 되리에의 신작이다. 국내의 씨네필 관객들은 도리스 되리에를 아마도 여전히 < 파니 핑크 >(1994)라는 로맨틱 코미디로 많이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되리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그 작품 이후로도 극장용 영화뿐만 아니라 TV 영화, 다큐멘터리, 문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15여 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꾸준히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중견작가가 되었다. 되리에는 <파니 핑크>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관계에 서툴고 어설퍼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여성 캐릭터를 낙천적이고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특별한 재능을 보여 왔다. 그 외에 그녀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으로는 < 내 남자의 유통기한Der Fischer und seine Frau >(2005)과 <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Kirschbluten-Hanami >(2008)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과 충돌을 들 수 있다(특히 일본 문화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유명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유쾌한 소동극을 만들며 해방적 순간의 찰나적 즐거움을 선사하곤 한다. 고백 하나를 하자면, 사실 나는 되리에 영화를 한 번도 온전히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사회에서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여성들이나 서로 다른 소수자들 간의 우정과 연대를 끈질기게 그려온 그녀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해소되지 않는 불만을 가져왔다. 되리에 특유의 낙관주의가 유발한 순진함은 그녀의 인물이 겪는 좀 더 구조적이고 심각한 갈등을 개인들 간의 위로나 오리엔탈리즘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간문화적 조우의 클리셰로 손쉽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 후쿠시마 내 사랑 > 역시 이런 비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요 몇 년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였고, 그야말로 ‘사사롭게’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도리스 되리에가 던지는 ‘작가성’에 대한 질문 때문이었다. 되리에는 우리가 흔히 ‘작가적인 것’으로 범주화하는 관습적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진지하지만 날카로운 성찰, 냉정한 거리 두기, 비극적 영웅주의, 폭력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극단을 추구하는 예술적 의지, 묵직한 울림,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이라는 성별 같은 것 말이다. 반면 그녀는 여성 감독이고, 사안을 가볍게 다룬다고 가정하는 ‘로맨스가 섞인 소품 드라마’와 코미디의 장인이며, 심각한 상황에서도 낙천적이고 유쾌한 태도를 유지하고, 고독한 영웅보다는 늘 우정이나 연대에 집중하며, 때로는 둔감한 문화적 클리셰를 사용한다. 하지만 정말로 되리에의 친밀한 낙관주의와 유쾌한 코미디는 진지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에 부적절한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코미디를 만들어낸다면 정말로 작가적인 것 아닌가? 일관된 작품세계를 구성해온 그녀는 왜 작가로서 진지하게 잘 논의되지 않는가?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다룬 < 후쿠시마 내 사랑 >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주는 영화다. 놀랍게도 되리에는 몇 년 전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대규모의 비극적 재난을 코미디로 다룬다. 심지어 이 영화에는 실제 지진 당시의 푸티지가 간헐적으로 삽입되기도 하다. 그럼에도 집단적 트라우마와 코미디를 융합해 ‘트라우미디(traumedy)’ 또는 재난 블랙 코미디를 만들어낸 그 상상력과 대범함은 놀랍다. 독일 여성 마리는 자신의 잘못으로 결혼을 망치고, 상실감을 치유하고자 후쿠시마에 온다.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불안정한 마리는 ‘Clowns4Help’ 소속의 광대로 지진 피해 지역의 피난민들을 위로하는 자리에 자원한다. 그러나 광대 공연은 거의 대부분 여성 노인들로 구성된 캠프의 피난민들과 소통되지 않고, 마리는 좌절감에 빠진다. 되리에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불통을 낯선 세계에서의 외국인의 이질감을 일방적으로 전시하는 ‘번역불가능성(lost in translation)’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구 1세계 백인 여성의 위선이 그녀 스스로를 어떻게 함정에 빠뜨렸는지를 부조리 코미디를 통해 드러낸다. 마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를 찾는 정서적 하이에나다. 그녀는 공연에서 냉정한 반응을 얻은 후 마을의 중과 사케를 마시며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곳에 있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여행의 이유를 털어놓는다. 개인의 고통이 가장 커서 자기 상처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자신의 영향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이 서구의 백인 여성은 자신의 도움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도, 그럴 만큼 약해 보이지도 않는 피난민들과 애초에 조우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웃음’은 뛰어나게 표현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성찰 또한 깊이 있게 서사화된다. 로우 앵글의 바스트 쇼트로 어색하게 개별 인물들을 포착하는 방식은 환경의 부적응자가 된 주인공들의 당혹감을 만화적 프레임으로 표현한다. 이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낯선 땅과 언어와 사람들에 둘러싸인 마리만이 아니다. 자신의 일상적 공간이 방사능측정기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제한금지구역이 되고 유령이 출몰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사토리 또한 환경의 부적응자가 된다. 광대는 스스로를 희화하하며 공연하는 동안에는 자신을 보고 웃을 권한을 타자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마리는 자기 중심성과 힘의 우위를 놓지 않는다. 마리가 진정으로 광대가 되는 순간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폐허의 집으로 돌아간 사토리와 함께 기거하면서부터다. 그 집에서 마리는 게이샤였던 사토리에게 끊임없이 타박을 듣는다. 어설프게 마루를 닦고 차 마시는 법을 교육받을 때,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힐난을 들을 때, 그리고 마리가 “You are elegant”라고 사토리를 칭찬하자 “You are like elephant”라는 어이없는 답을 들을 때. 힘의 역학 관계가 바뀌면서 마리는 의도치 않게 사토리와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그러나 흑백의 단조로움과 불협화음의 묵시론적인 피아노와 전자음들은 마리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사토리의 무례함을 불쾌하거나 우스꽝스럽지 않은 시적 부조리로 승화한다. 특히 절제되어 있고 단호한, 작은 몸의 나이든 아시아 여성과 일본의 전통적 가옥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덩치와 발걸음을 지닌 거침없는 몸짓의 젊은 백인 여성의 신체언어가 문화, 세대, 지역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관찰하는 카메라는 그야말로 스펙터클하다. 여성의 신체언어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그것의 사랑스러운 활용은 심지어 문화충돌 클리셰의 진부함을 가볍게 넘겨버리게 만든다. 3 핵 독성 폐기물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들이 가지런히 대칭을 이루며 쌓여있는 가운데 인형, 가구, 침구 등 일상의 흔적이 흩어진 초현실적, 묵시론적 폐허를 배경으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 둘 사이의 우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함께 집 앞의 나무에 매달려있다 쓰나미가 덮치면서 쓸려나간 애제자 유키를 사투 속에서 자신이 밀어낸 것 같다고 토로하는 사토미의 비통함과 죄책감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재난의 여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삶은 왜 계속되어야 할까? 영화는 그 답을 절대로 마리가 찾도록 하지 않는다. 그 답은 오히려 사토리에게 있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되리에는 반핵 피켓을 들고 발전소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나이든 일본 여성들의 다큐 사진을 몽타주해 보여준다. 이 비극은 단순한 자연적 재앙이 원인이 아니다. 마리가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덜대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떠나는 것처럼, 일본 3.11 재난도 인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살아갈 삶도, 미래로의 시간도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송전탑 반대 시위에 나선 밀양 할머니들처럼 이 여성들은 삶의 터를 떠나지 않고 책임을 지고 바꿔나가고자 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말한 것처럼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은 공범자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직접적으로 오마주하고 있는 < 히로시마 내 사랑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알렝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히로시마와 느베르라는 공간으로 은유화 된 두 남녀, 침묵을 매개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시간여행, 기억과 영화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등 진지하고 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 후쿠시마 내 사랑 >은 침묵의 자리에 여성신체의 언어를, 시간여행에 실수를 인정하고 미래를 책임지려는 나이든 여성들을, 영화이미지의 존재론에 웃음에 대한 성찰을 놓는다. <후쿠시마 내 사랑>의 코미디와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연대하는 여성들 간의 연대는 <히로시마 내 사랑>의 침묵의 미학과 묵직한 성찰만큼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곧 오랜 경력 속에서 장인의 능숙함과 지혜를 갖게 된 한 작가가 어떻게 어떤 순간에도 낙관주의를 잃지 않는 코미디의 대가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