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오브 화이어
- 감독
- 리차드 마컨드
- 제작년도
- 1987
- 출연
- 루퍼트 에버렛, 밥 딜런, 수잔느 버티쉬, 머리 체이킨, 이언 더리, 줄리안 글로버, 리치 하벤즈, 래리 램브, 마크 라이런스
“나는 본디 활동사진을 좋아하는 터에 단성사 신파 활동사진을 요새 가 보니까 참 조선에 처음 되는 것으로 어찌 마음에 상쾌하고 좋은지 모르겠어요.” -애활가(愛活家), 《매일신보》 1919년 10월 31일자 4면. 1919년 10월 《매일신보》의 독자 한 사람이 단성사에서 공개된 조선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김도산, 1919)를 관람한 후, 연쇄극에 삽입된 활동사진에 대한 감격을 신문에 투고했다. 그는 자신을 “애활가(愛活家)”라고 소개했다. 애활가란 ‘활동사진 애호가’를 가리키는 말로, 종로와 본정(本町)을 중심으로 극장이 들어서고 그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구경꾼이 늘어난 1910년대 중후반부터 신문지상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 용어다. 《매일신보》에 투고한 이 애활가는 연극과 영화가 결합한 연쇄극 <의리적 구토>에서 전성기를 지나 저물어가는 신파극의 긴 그림자보다 조선 사람들도 활동사진을 제작할 수 있다는 여명(黎明)을 보았다. 같은 해 12월 어느 날, ‘예술잡지’ 『녹성(綠星)』(편집 겸 발행인 이일해)이 발간되었다. ‘경성 죽첨정 1정목 39’에 발매소를 둔 『녹성』은 원래 문예지로 기획되었지만, 사정상 첫 호는 영화 분야의 재료만 다루었다. 근대 초기의 불안정한 출판 환경 속에서 나온 잡지들이 그렇듯 『녹성』도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는 불운에 처했고, 그러다 보니 『녹성』 창간호는 본의 아니게 ‘애활가’에 의한, ‘애활가’를 위한, ‘애활가’의 잡지가 되었다. 환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여배우를 표지 모델로 내세우고, 제럴딘 파라(Geraldine Farrar), 그레이스 커나드(Grace Cunard), 몰리 말론(Molly Malone)과 에디 폴로(Eddie Polo) 등의 권두 화보를 넣어 만들었지만, 본문 중에는 화보가 거의 없어서, 구경하기 좋아하는 애활가들의 욕구를 만족스럽게 채워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 애활가들을 실컷 울렸던 블루버드 영화사(Blue Bird Photoplay Inc.)의 신파영화 해설부터 “아무리 큰 우수(憂愁)를 안고 있는 우려객(憂慮客), 아무리 사경에 빠진 병자라도 그의 동작에는 큰 소리로 웃지 아니치 못”하는 중절모의 ‘잡후린(雜侯麟, Charlie Chaplin)’ 선생까지 모두 이 한 권의 책 속에 모았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었으리라. 대중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물적 기반으로서 극장의 출현이 중요했듯이 그 공간을 향유할 수 있는 관객 집단의 등장 역시 주목할 장면이다. ‘애활가’라고 밝힌 이가 자신의 감상평을 직접 신문에 투고하고 애활가 집단을 겨냥한 잡지가 출간되는 등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초 서울의 분위기는 소박하나마 적극적인 관객층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애활가들은 문명국가에서 온 박래품의 신기함 때문에만 극장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활동사진 그 자체에 매료된 이들이었고, 그러한 스스로를 특별히 ‘애활가’라 칭함으로써 다른 관객과 자신을 구분 지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이라면 『활동사진계(活動寫眞界)』, 『활동화보(活動畵報)』, 『영화세계(映画世界)』와 같은 일본 영화잡지를 보고,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나 더글라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gbanks) 등 외국 배우들의 이름을 곧잘 입에 주어 담으면서 은근히 뽐낼 줄도 알았다. 영화를 보고 비평하며 그 자신의 고급한 취향을 과시하는 애활가. 이런 애활가가 된다는 것은 근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체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1920, 30년대의 잡지에는 애활가가 되려면 그에 앞서 극장에서 지켜야할 예법(禮法)을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마냥 「고급영화팬 되는 비결 십칙(十則)」 1 이나 ‘극장 예법’을 다루는 ‘모던 생활 강좌’ 2 같은 글이 잡지에 실리곤 했다. 조선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과잉의 형식을 설명하고 있는 예법 강의는 그런 매너가 몸에 배어야 ‘고급(high and noble)’한 모던 라이프를 진정 향유할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겼다. 극장을 찾는 자신을 특별히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글이지만, 애활가가 되고 싶은 이들의 귀는 이런 글에도 제법 솔깃했을 듯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애활가의 일은 먼저 신문광고에서 볼 만한 영화를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애활가는 그 영화의 감독과 주연배우, 스틸 컷 등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고 극장을 찾아야 하며, 극장에서 받아보는 프로그램 순서지의 도움 없이도 영화의 플롯이나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영사가 시작되었는데도 불빛을 훔쳐 프로그램을 읽으려 애쓰는 사람은 ‘영화팬’의 기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평소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영화비평을 정독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무릇 애활가라면, 이미 본 영화를 또 보더라도 옆 사람에게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며 프로그램 진행 중에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간혹 박수를 칠 만한 장면에서도 너무 흥분하지 말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그치기 전에 박수를 끝내는 것이 좋다. 프로그램 중간 ‘10분 휴식’ 시간에는 극장의 전속 악단이 음악을 연주해 주는데, 이때는 휴식 시간이므로 연주가 끝났다고 해서 손뼉을 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주악’에 너무 귀를 기울이거나 “헐하게 감격”하지 않는 것이 요점이다. 극장의 스크린 옆에는 유리등을 끼워놓고 호출할 사람의 이름을 적어 신호하는 통고등(通告燈)이 있는데, 여기에 이름이 비치면 전화가 왔거나 일행이 찾는 것이니 조용히 일어나 나가면 된다. 스스로가 활동사진 애호가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고 공공질서를 지켜가면서 조용히 영화를 즐기고 감상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사실 극장 예법을 잡지에서 배운 사람이 조선에서 그의 이상대로 조용하고 우아하게 영화라는 예술을 ‘고급하게’ 감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그려진 극장의 풍경은 무성영화가 상영되는 시대의 극장이 온전히 감상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암시한다. 변사는 때로 영화와 무관하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하고, 자막을 잘못 해설하기도 한다. 그런 변사의 해설에 관객들은 울고 웃고, 때로는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입에 손가락을 넣고 휘파람을 불어대거나 손뼉을 치거나 발을 동동 구르며 관객들이 한바탕 법석을 벌이는 것이다. 영화 상영 중에도 과자를 파는 사람이 객석을 돌아다니고, 전화 온 손님의 이름을 버럭 부르는 직원도 있다(극장의 전화 교환은 다른 관객들의 관람을 위해서 점차 통고등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 자주 정전이 발생하고, 영사가 돌연 중단되는 일도 많다. 어떤 관객은 옆 사람의 입에서 품어져 나오는 담배 연기에 숨이 막히는 듯 했을 것이다. 냉난방 설비가 충분하지 않은 극장에서는 여름이면 겨우 몇 개의 부채, 겨울이면 화로 몇 점으로 더위와 추위를 견뎌야 했을 것이다. 결국 애활가의 극장 예법이란 극장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노하우, 그런 매너를 갖춘 관객이 되는 법이었다. 1) 스크린 빨-쥐, 『별건곤』 제 29호(1930년 6월), 108~11쪽. 2) 청의아(靑衣兒) 생, 「현대 신사 숙녀로서 알아 둘 모던 생활 강좌」『조광』 1936년 1월호, 222쪽. 상단 그림. 극장 안 풍경 출처: 석영 생, 「서울행진(5) 480석, 5년간 중학생 학비」 《조선일보》 1928년 11월 7일자 3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1. 「극장만담」『별건곤』 제5호(1927년 3월), 94~5쪽. (부분 발췌) 근일에는 극장을 가보면 관객의 변천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장내가 소란치 않은 것이다. 그리고 유년 관객이 적어진 것이니 그것은 입장료가 고가이고 예전과 다른 정도 높은 영화를 해득하기에 어려운 까닭이라 할지 가정에서 감독이 심한 까닭인지는 모르나 비판력이 모자라는 그들에게는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특별히 변한 것은 희소하던 부인석에 남자석 이상으로 매일 만원인 것이다. 노부인, 여염집 부녀, 기생 그리고 여학생들인데 진기한 일은 그중에서 성에 갓 눈뜬 여학생이 반 수 이상을 참렬한 것이다. 그 뿐 아니다. 경악할 인은 ‘키쓰’하는 장면–그 순간에는 반드시 질식할 듯한 외마디 소리가 부인석에서 의례히 돌발한다. 그런데 부인석 중에도 머리 틀어 얹은 젊은 여인들 모여 앉은 곳에서. 이 말은 거짓말인가. 거짓말이 아닌 것은 극장 출입 잦은 이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다. 어쨌든 세상은 변하였다. 극장 간판―이 간판도 수년 전에 비하면 여간 발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늘 보면 그 간판의 그림은 그림으로 보아서는 덜 추하나 그 영화 중에 그 영화 전편을 통하여 제일 주요한 신을 빼놓고 영화 자체에 있어서도 제외하여 버려도 실패가 안될 장면만을 그리는 때가 많은 것이 그 간판, 더욱이 극장 간판의 임무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러한 극장 간판 중 좀 미안한 말이지만은 우미관 간판이 좀 천한 느낌이 있다. 그 간판은 입장료를 5전씩 받던 옛날 그 시절과 현재와 별반 차도가 없는 것이 그 관을 위하여 좀 불안하다는 말이다. 극장 내부―근일에는 단성사의 영화막(스크린) 상하좌우의 장치가 예전보담은 색채라든지 구성이 좀 아담한 듯하다. 그리고 조선극장은 옛날과 그리 현격한 변화가 없지만은 그저 추하지는 않다. 우미관도 그저 그러하다. 10분 휴식―10분 휴식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관객의 피로한 뇌를 쉬게 하는 데는 퍽 유효할 것 같다. 그러나 그때에 변사가 나와서 잔소리하고 서있는 것이다. 한마디도 들어서 유리할 데 없는 자기의 회포를 천 명이나 오백 명의 청감을 가진 관객에게 늘어놓아서야 미안치 않은가? 다음번에 갈릴 영화 예고를 한다는 목적이라 하더라도 무대 위에 예고간판을 세워놓고 프로그램지에 적어놓고 또 무슨 필요가 있을까? 물어본다. 그리고 10분 휴식 간에 오케스트라도 있으려니와 무슨 다른 여흥이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경영난인 현금의 극장에 주문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무도나 독창이나 독주나 있었으면 10분 휴식하는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음악―어느 극장이나 오케스트라는 좀 변화가 지체되는 감이 있다. 영화 차환할 때마다 새 곡조로 갈았으면 어떨지. 너무 들어서 도리어 감정을 괴롭게 한다. 그리고 좀 정도를 높였으면 어떨지 물어본다. 변사―변사 제군에 하나 제안한다. 다른 게 아니라 그 ‘하얐다’, ‘하얐었다’가 글 쓰는 데는 모르겠지만 말로 하는 때에 듣는 사람으로서는 어떨지? 처음 극장가는 노인은 대분개할 것이다. 그 조(調)를 고치고 ‘하였습니다’, ‘하였었습니다’ 하면 어른에게나 어린이에게나 퍽 다정하게 들릴 것이다. 더구나 인정극에리오. 그리고 변사계에 한 가지 유행이 있으니 ‘마음자리’라는 말이다. ‘마음자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마음의 돗자리라는 말인지, 마음이 깔고 자는 자리인지 어쨌든 해석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한참 긴장한 장면에 가서 농담(醜談)을 탁 터뜨리는 변사가 있다. 그 변사는 원래, 희극에는 더 우는 조로 하는 이인데 청승맞은 것은 좋으나 너무 그 음성이 청승맞아서 너무 천하게 들린다. 그리고 한 가지 우스운 일이 있으니, 어떤 변사는 한참 자기도취로 “자연의 의지와 우주의 이성이 아–슬프다!” 하니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러한 고상한 문자를 안 써도 능히 할 수 있는데 얼토당토않은 문자를 쓰는 것이 도리어 자기 폭로에 지나지 않을 줄 안다. 그리고 장면이 벌써 지났는데 지난 장면을 가지고 떠들고 섰으니, 그것도 자기 취미지만 관자(觀者)는 그러한 변사를 원치 않을 것이다. 특히 이 점에 생각 좀 하여 주었으면 고맙겠다. 전화―극장에 온 손님에게 전화가 올 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소리를 버럭 질러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당자는 (더구나 여자) 퍽 불쾌할 것이다. 여기에는 완전치는 못하나마 조선극장에서 하는 방식이 좋을 것이다. 스크린 옆 기둥을 뚫고서 유리등을 끼워놓고 그 유리에 부를 사람의 이름을 써놓고 전등으로 신호하는 방식이다. 1-2. 「극장만담」『별건곤』 제6호(1927년 4월), 108~9쪽. (부분 발췌) 모든 것이 구각(舊殼)을 벌어 젖히고 자체로부터 신생물의 싹을 좇는 이 봄에 근일에 각 극장에서는 2, 3년 전에 수입되었던 영화를 다시금 되풀이하고 있으니 여기에 극장경영자의 몰상식을 규시(窺視)할 수 있다. 설령 2, 3년이나 1, 2년 전에 일반 팬에게 호감을 산 영화이어서, 그것을 수십 차라도 되풀이하여도 매야(每夜) 만원의 성황을 이룰 수 있다치더라도―원래 수입되는 서양영화는 대개가 3, 4년 전 혹은 5, 6년 전 심지어 십 년 전 제작된 영화가 (기적적으로 1년 이내에 수입되는 것도 간혹 있지만) 상장되는 것인 그만큼, 먼 과거에 제작된 영화인 터에도 그것을 재삼 상장한대서야 시대 변천에 너무나 몰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영업 편으로 보아서는 유리한 방책이라 하더라도 일반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말이다. 여기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새로운 경지를 향하여 움직이는 팬보다도 더 앞서 나아가지 않으며 어느 시기에든지 큰 실패를 맞이하리라. 근일에 영화열이 팽창함에 따라서 팬의 수효도 배전(倍前)으로 증가되어 어느 날이든지 극장은 대만원의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말할 것은 그러한 때에 좌석이 참도 불고(不顧)하고, 그저 공간만 있으면 관객의 눈에 스크린의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더라도 불고하고, 그저 우릿간에 송아지 몰아넣듯이, 막 쓸어 넣는다 하면 너무도, 관객에게 불친절이 지나치지 않는가? 그뿐 아니라 젊은 색시들이 남자의 틈에서 비명을 질러도 그저 쓸어 넣어서 한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하여서야 될 수 있는가? 그러한 까닭에 종차(從次)로는 입장권에 좌석 순차표를 첨부하여서 누구든지 먼저 입장한 이를 제일 좋은 자리에 앉히고 그 다음 순차대로 좌석을 정돈시킨 후 좌석만 차면 문을 닫아버리면 어떨까 하는 것을 참고로 말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관객의 피로를 덜어 주었으면 좋을 줄 안다. 그리고 입장권 매팔구(賣捌口) [필자 주: 판매소] 에는 써 붙이지 않고 내용으로 특등석을 설치하여 놓고 돈을 더 받으니, 이것은 경찰과 무슨 약속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경찰의 허가도 없이 비밀히 하는 일인가? 우리로서는 그 진의를 알 수가 없다. 그이들의 것 무슨 구실이 있다 할지라도 이상에 말한 방법으로 한다면, 특등석도 없어질 것이요, 따라서 그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당하는 창피도 없어질 것이다.(상층 하층을 구별치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변사와 대(對) 관객(특히 남녀 학생과 소년)과의 관계를 말하려 한다. 변사들이 영화대본(설명서)을 보지 않는지, 영화의 내용과는 아주 다른 추담을 베푸는 변사가 많은데, 항용 청소년 혹은 남녀 학생들의 염서(艶書)나 담화에까지 그 추담병이 전염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서 희극변사 최병룡 군(단성사)의 추담 없이도 점잖게 웃기는 그 비결을 좀 배웠으면 어떨지? 그리고 변사의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영화에 역할된 인물의 성명(영어나 기타 외국어에)을 어떤 나라말이든지 발음의 만능인 조선말을 하는 사람이 그대로 못하느냐, 모르면 누구에게든지 물어볼 수 없을까. 예(例)하면, ‘짹크’를 ‘짯구’라니 외국인의 웃음거리를 장만할 필요는 무엇 있는가. 일본 것이 아무리 좋대도 나쁜 것은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2. 강사 스크린·빨-쥐, 「고급영화팬 되는 비결 십칙」『별건곤』 제29호(1930년 6월), 108~11쪽. 현대청년이란 그 언어에 있어 행동에 있어 처신에 있어, 아니 손가락 한 개를 놀리는 데 있어서도 모름지기 고급이어야 한다. 고급! 얼마나 입맛이 당기는 말이냐! high and noble. 존 바리모어(John Barrymore)의 프로필과 같은 noble. 미국이면 마천루 꼭대기와 같은 high. 그러한 것을 집어삼킨 듯한, 자신과 같은 풍도(風度)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점잖으면서도 완미(頑迷)한 구석이 없고 경쾌연미(輕快軟美)하면서도 부경(浮輕)한 맛이 없어야만 소위 고급에 속하는 영광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고급의 시대 철학적 해석은 다음 강의에 미루고 오늘은 제군들 앞에서 영화의 고급팬 되는 비결을 해설하는 영광을 내가 먼저 가지기로 한다. 1 대개 수요일이나 목요일 석간신문에는 각 영화관의 사진 교체 광고가 다투어 난다. 제군이 고급영화팬이 되려면 먼저 그러한 광고 가운데서 한번 감상할 가치가 있음직한 영화를 선택한 다음에 그 영화의 감독이며 주연배우 등의 이름을 외워두고 사진 내용에 들어가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다소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위연만한 영화이면 봉절하기 전에 신문이나 잡지에서 「시사실에서」란 제(題)로 간단한 비평 비슷한 것이 실리는 법이다. 제군은 무엇보담도 먼저(1면 기사보담도) 그 기사를 통독해 두어야한다. 그러고 보면 제군이 제군의 연인과 더불어 산보를 나왔다가 “차나 한잔 마시려오, 극장엘 가시려오?” 할 때도 그러한 예비식견이 여간 유효한 게 아니다. 더구나 여자들이란 사진이 좋지 못하면 그 사진을 같이 간 사나이가 만들기나 한 것처럼 짜증을 내고 책망을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가령, 이를테면 “이까짓 걸 다 사진이라고 구경 오랬어요! 당신두 참 딱도 하시우!” 혹은 “인젠 두 번두 당신하고 같이 극장에 오진 않을 테야요. 내가 그래 겨우 이 따위 사진을 보러 왔단 말이요……?” 이런 매서운 선고 등이다. 무섭지 않느냐!? 또 설사 이러한 연애, 구애 관계 등의 이득을 도외시하고도 노상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질문에 응하여 시방 아무 영화관에서는 무슨 영화를 상영 중인데 그 영화는 운운, 이렇게 즉석에서 대답할 수 있는 이익이 따르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즉석에서 남의 질문에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일이고 간에 남의 찬탄을 받는 법이다. 또 그리고 만약 제군이 극이나 영화의 기맥에 다소간 통하는 바가 있다면 그 답을 할 때 살짝살짝 첨부 삽입 작용을 하고 보면 효험이 더욱 날 것이 틀림없다. 2 자, 그러면 제군이 광고의 안내로 (혹은 연인이나 친구들의 요청에 응해서든지 상관이 없지만) 이제 영화관의 한 좌석을 차지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때 제군이 가장 먼저 취할 방법 이 무엇일까? 제군은 무엇을 먼저 하여야 할 것인가!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저 변소에 가라는 게다. 우스운 말 같으나 이 변소에 가라는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다음 방책을 세우는 데도 필요한 것이다. 사진관에 들어가 보아서 시작하기까지에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는 변소에 갔다 나와서 유유름름(悠悠凜凜)한 태도로 당하나 통로 같은 데를 거니는 것도 흥이 있다. 이때 태도는 아주 침착하고도 무게 있게 보여야 하나니 하여간 일견지하에 남들이 짐짓 아마 놈이 영화계 명사인가 보다 하고 남에게 경계와 찬미의 탄사가 흐르게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지루해 못 견디어 하는 얼굴로 하품을 하는 것도 남의 주의를 끌기는 하나 이 방법은 도로히 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기가 쉬우니 이 방법을 택할 때는 기미를 잘 보아서 하지 않으면 실패다. 그리고 만약 제군이 사진관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는 사진쯤 상관할 것 없이 자리를 잡아 모자나 외투를 놓아두고는 변소부터 먼저 가야 할 것이다. 이미 시작된 사진일 것 같으면 2, 3분 동안 더 보나 덜 보나 마찬가지다. 그것보다는 변소에 다녀오는 게 더 필요하다. 한 사진이 끝나고 다시 다른 사진이 시작되는 짧은 휴식 시간에 부리나케 변소에 갔다가 황급히 자리에 돌아오는 사람을 많이 보는데 그것은 극히 졸렬한 행동이요, 적어도 고급에 있어서는 물론 사회도덕의 관념에서 말하더라도 그리 칭찬할 바 행동이 못된다. 3 그리고 사진이 시작되기 전에 급해 빠져서 프로그램이나 『위클리』에 쓰인 플롯을 읽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아름답지 못한 일이라. 대관절 영화를 보기 전에 그런 류의 해설을 읽지 않고는 영화의 스토리나 연락을 모른대서야 영화팬으로서 적지 않은 문제라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팬의 자격은 완전히 상실된다고 각오하고 있어도 좋다. 크게 주의할 일이다. 프로그램 같은 것은 집에 돌아가서 눈을 한번 거치면 그만이다. 더구나 기막히는 것은 사진이 시작되어 전등이 꺼진 뒤에도 그 캄캄한 불빛을 훔쳐서 프로그램을 읽으려 애쓰고 있는 친구들이다. 이렇게 되면 비참 우(又) 참담, 실로 언어도단이다. 영화란 원래 그 first scene과 아울러 최초에 나오는 자막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 제작역할을 일별하고는 미소를 띠어서 아래턱을 쓰다듬게쯤 되지 않고는 아직도 고급팬 되기는 멀었다. 그리고 모르는 친구들은 hero와 heroine이 서로 껴안기만 하면 벌써 다 된 줄 알고 일어나서 무엇이 그리 급한지 출구로 우르르 몰려나가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적지 않은 실책인 것이, 영화란 그 뒤에도 사건이 시작되는 수가 있으며, 첫째 last scene을 보지 않고 일어선다는 것은 영화팬으로 용서치 못할 일이다. 어떠한 일이고 첨이 있고 끝이 없는 법은 없다. first scene과 last scene은 영화를 논함에 있어서 반드시 팬들의 입에 오르는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4 그 다음 휴식 시간에 주악(奏樂)이 있을 때는 그것을 들어도 좋고 듣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단지 요점은 주악에 너무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더구나 끝난 뒤에 감격해서 손뼉을 치든지 하고 보면 남의 조소를 받을 우려가 많은 것이니 주의할 일이다. 하여튼 고급영화팬이란 그리 헐하게 감격해서는 견뎌나갈 수 없는 처세술(?)이다. 무엇이고 “정말 우스워 못 보겠네”라든지 “나 원, 기가 막혀 이걸 어떻게 듣고 있어”라든가 “이건 지독한데” 등등의 능청스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늘 머릿속에 명념(銘念)해 두어야 한다. 5 그러면 제군! 영화 중에 돌연히 필름(film)이 끊어질 때는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때는 크리스트와 같은 얼굴을 하고 묵묵히 앉아 있어야 한다. “사진 망했다”, “불 켜라” 하고 노호한다든가 영사실을 힐끗힐끗 들여다보는 것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또 정전이 되었을 때에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다. 그렇다고 너무 생각하는 척 하노라고 눈을 감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면 야단이다. 6 다음 해설자가 쓸데없는 것을 늘어놓는다든지 자막 같은 것을 오역했을 때는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면, 그때는 아주 무서운 얼굴로 해설자가 서있는 편을 노려보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주관적 견지에서 본다면 정의의 열혈이 끓어오르는 지사와 같은 흥분을 느끼게 되어 다시 없이 마음이 쾌(快)한 것이다. 7 자! 제군은 인제 영화를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비평할까가 나머지 문제일 것이라. 스토리는? 시나리오는? 감독은? 배우는? 이렇게 판에 박은 듯한 비평을 한다면 벌써 제군은 고급영화팬이 못된다. 그런 것을 지껄이는 도배(徒輩)를 가리켜 제군은 식소사번(食少事煩) [필자 주: ‘먹을 것은 적고 할 일은 많다’는 뜻.] 의 주문돌이 [필자 주: 미두장 등에서 주문을 대행해주는 브로커.] 라고 비소(鼻笑)하고 있어도 좋다. 그보다는 경구(警句)를 토해야 한다. 한 말로 그 영화를 차 던져야 한다. 기다란 변설(辯舌)을 농(弄)하여 내용의 공허를 폭로시킨다든지 자기의 부족처를 남에게 보이든지 하는 것은 모던 고급팬들의 관여할 바 못된다. 무엇이고 Make believe의 세상이니 말이다. 8 그리고 보면 금세의 고급영화팬 된 자 반드시 이름 있는 영화를 전부 다 보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아니, 보지 않더라도 고급팬으로 통할 수 있다. 그 대신 신문잡지에 실리는 영화비평을 정독해 두었다가 다른 사람들이 왜 안보느냐고 물을 때는 그 비평의 공격 부분만을 외워두어서 “결국 허잘 것 업는 스토리에 좌우된 영화였지 뭐야! 흥, 그까짓 걸 누가 보러간단 말이야” 하고 한마디로 격퇴해 버리면 고만이다. 그러고는 외국 영화잡지 등을 일별해두었다가 “그러나 이번 미국 ○○회사에서 제작하고 있는 △△란 영화만은 나로서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걸! 그것이 건너오기만 하고 보면 억만 사(事)를 제처 놓고도 보러 가겠네만은……”하고는 슬쩍 영화통인 점을 보여서 상대자의 간을 주물러 놓는 것도 속 시원한 노릇 아니냐. 9 복색은 너무 혼란해서는 못 쓴다. 너무 지나치게 화려하다든지 제법(製法)이 별나고 보면 부랑자나 모뽀로 잘못 보이기가 쉬워서 헛되이 명성을 떨어트리게 된다. 영위계구(寧爲鷄口)일지언정 불위우후(不爲牛後) [필자 주: 혹은 ‘영위계구 물위우후(寧爲鷄口勿爲牛後)’.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는 뜻으로 큰 집단의 말석보다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낫다는 의미이다. 줄여서 ‘계구우후’라고도 한다.] 로 맑스·뽀이로 보일지언정 모뽀로 잘못 보여서 쓸까보냐다. 또 그러고 촬영감독이나 카메라맨으로 보여서도 안 된다. 고급영화팬은 촬영소 인종들과 혼동되는 것을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피해야 한다. 비평가 부류의 인종하고도 혼동이 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촬영소 인종들을 자본가의 영리한 주구(走狗)로 보아 경멸하고 비평가를 기생충이나 어용 매문업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고 영화잡지 같은 것은 외국 것이면 몰라도 절대로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 요컨대 고급영화팬은 시네아스트의 긍지를 가지고 스넙 [필자 주: snob] 하면서 우울하여야 하고, 경멸할 줄을 알고 천학박식(淺學博識)이어야 하며, 또한 교묘한 궤변가여야 하며, 기타 여러 가지여야 한다. 10 끝으로 한 가지 부언해 둘 것은 요사이 유행 영화인 토키(talkie)에 대한 것인데, 우리 고급영화팬들은 그것이 사운드·픽처이면 상관이 없지만 불행히도 토킹·픽처일 때는 근신을 해야 한다. 하고(何故) 하면 제군이 뛰어난 어학자이거나 기막힌 즉흥시인이 아닌 이상 동반자(예컨대, 군들의 연인)의 질문에 응하지 못하여 천추에 회한을 남길 염려가 없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노니 고급영화팬은 광범 심원한 지식과 교양을 요하는 것은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덮어놓고 경이원지(敬而遠之)하고 그 대신 매멸(罵蔑)하는 것을 유일한 Motto요, 철학이요, 전술로 알고 굳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B급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칼럼을 쓰다 보니 항상은 아닐지라도 ‘뭐 괜찮은 거 없나’ 하며 눈과 귀를 코를 쫑긋거리며 다니기 일쑤다. 몇 번 이야기한 적 있을 테지만, 한국의 B무비란 참 애매한 것이다. 외국영화의 예를 든다면 그냥 정리가 가능할 텐데, 한국의 경우를 설명하라고 한다면 뭐라 말하기가 정말 어렵다. 못 만든 거? 너무 많다. 이상한 거? 90년대 이전의 못 들어본 영화를 꺼내면 거의 다 이상하다. 그럼 웃긴 거? 그것도 아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름대로 이쪽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소개하고 싶은 욕심에 이래저래 찾고는 하지만, 소문 듣고 찾아보고 실망한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고 다 아는 영화를 소개하자니 티끌만 한 양심이 간질거려 매번 그러지는 못하고. 당연히 나와야 했을 몇 몇 영화가 아직 다루어지지 않는 게 그런 이유다. 이번엔 < 로보캅 > 개봉에 맞추어 맹구가 살해당한 뒤 ‘18만 2천 원’을 들여 사이보그로 활약하는 <18만 2천 원짜리 맹구>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으나 자료원에 영상이 없어서 포기. 아쉬운 대로 캡콤사의 유명게임 ‘스트리트 파이터2’를 패러디한 <맹구짱구 스트리트 화이어>를 써볼까 했으나... 나 자신을 속이는 일 같아 그만두었다. 쉽지 않다. KMDb에도 없는 영화 <18만 2천 원짜리 맹구> 그러던 중, 얼마 전 극장에서 좀 멀쩡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 싶어서 고른 게(‘멀쩡한’이라는 형용사를 써놓고 한 선택이 이거라니 나도 점점 맛이 가고 있는 것 같다) < 프랑켄슈타인 : 불멸의 영웅 >이었다. 영제는 < I, Frankenstein > 아이작 아시모프가 띠요옹~ 했을 것 같은 원제를 지닌 이 영화는 우리가 아는 그 프랑켄슈타인에다가 < 스폰 >을 갖다 붙인 이도 저도 아닌 영화였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질문이 미묘한 과정을 거쳐 ‘나는 악마와 싸우는 영웅이다’에 도착하는 그런 판타지. 건진 거라면 영화에 등장하는 가고일 여왕이 내 취향이었다는 것과 오늘 소개할 영화가 떠오르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장르영화가 그리 부흥한 적은 없었지만 그 시도는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시도’만 이어지고 있다는 게 눈물 쏙 빼는 이야기입니다만) 해외의 괴물, 귀신에 대한 수입 역시 영화사 초기부터 이루어지고는 있었는데 지난 주에 소개한 < 우주괴인 왕마귀 >도 그렇고 오늘 소개할 < 공포의 이중인간 > 역시 그런 시도 중의 하나다. 이용민 감독의 1975년 연출작인 이 영화는 한국판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라고 할 만하다. 청평 정신병원 에서 시체를 살리는 연구를 하는 정 박사 일당 영화가 시작되면,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쏟아지는 불길한 날씨를 뚫고 옥경이 길을 간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제법 그럴듯하게 괴기스러운 건물. ‘청평정신병원’(실제로 이런 병원은 없다고)에 당도한다. 이 병원에는 환자의 시신을 이용해 죽은 자를 깨우는 실험을 하는 정 박사( 이예춘 )가 조수 준호와 박 군이 있다. 이들이 하는 실험은 서양의 프랑켄슈타인과 좀 다르다. 메리 셀리가 제시한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몸을 기계-장치로 생각했을 때 그것의 활동을 재생시킬 수 있다고 치고, 자아의 문제는 어쩔 것이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정 박사는 이 책을 봤는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이에게서 영혼을 이식하는 방식으로 실험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뭐 이러나저러나 정체성에 문제가 생기는 건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들은 병원에서 일하던 박 간호사의 몸에 3명을 살해한 개망나니 남자 살인범의 영혼을 심었기 때문이다. 실험에 실패한 줄 알고 내다 버린 그녀는 벼락을 맞고 ‘작동’을 시작해 온갖 행패를 부리며 결국 자신의 몸을 바꿔놓은 정 박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온다. 그녀가 이 영화의 제목이 지칭하는 ‘공포의 이중인간’인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적당히 잘 흘러갔다면 무척 괜찮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용민 감독은 촬영 감독 출신으로, 지금 보아도 꽤 잘 찍었다 싶은 장면들이 많다. 특히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어떤 장면에서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미장센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멀쩡한 영화라면 ‘한국영화걸작선’에 갔겠지 이 ‘삐용삐용B무비’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다. 우선 정 박사가 이 실험을 하는 이유를 알아보자. 정 박사가 죽은 자를 깨우는 실험을 하는 이유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서의 긍지!인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청년시절 일본군 학도병이었는데, 당시 대장이었던 ‘오노 소좌’는 수많은 다이아몬드를 오대산 어딘가에 숨겨놓았다. 이 사실을 안 정 박사는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30년간(전쟁은 45년에 끝나고 영화는 75년에 개봉한다. 이 놀라운 디테일을 보라)죽은 자를 깨우는 실험에 실험을 거듭, 오노 소좌를 살려내 다이아몬드의 위치를 ‘물어보려’고 한 것이다. 그가 오노 소좌의 시체를 파내려 오대산에 갔을 때, 동행한 조수 박 군은 묻는다. 괜한 소리해서 죽는 박 군 “아니 이것 때문에 그 오랜 시간 연구를 하신 겁니까? 그냥 산을 전부 뒤졌으면 훨씬 빨리 찾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 박사는 “이놈이 내 다이아몬드를 노리는구나.”라며 그를 죽여버린다. 과연 매드 사이언티스트. 마치, 이렇게 묻는 관객들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는 감독의 메시지 같기도 하다. 일단 전제가 이러하니 이야기가 잘 풀릴 리가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끌어가고자 하는 무리수가 상당 부분 등장하는데, 이게 요즘 말로 ‘꿀잼’이다. 박 간호사의 육체에 살인범의 영혼이 깃들어진 여자는 영혼이 남자이므로 자신의 집에 찾아가 아주 당연한 듯이 행패를 부리는데 그곳은 본인의 빈소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불쌍한 아내를 패주고 나오다가 육체(박 간호사)의 딸을 만나 박 간호사의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린다.(박 간호사의 딸이 먹을 것을 주자 넙죽 받아먹는 귀여운 모습을 보이기도) 그러다 다시 청평정신병원으로 찾아가 정 박사에게 복수를 하려는데 그곳에서 현재 간호사 옥경이를 만난다. 그러고는 ‘예쁘다. 너를 좋아한다’며 강간을 하려 한다. 여자 둘이 이러고 있는 사이 정 박사가 나타나자 문득 생각난 듯 그를 죽이려고 달려든다. 목 부러져 물론 그의 시도는 실패. 결국 정 박사는 옥경이의 영혼을 이용해 오노 소좌를 살려내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전 실험에서는 분명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나지는 않았는데, 이번엔 살아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었다. 오노가 정신을 차리자 다이아몬드의 행방을 묻고, 옆에 있는 옥경의 육체 쪽으로 목을 잡아 돌리며 영혼을 옮겨 저 여자로 살게 해주겠노라 약속한다. 부패한 육체의 오노는 아주 힘겹게 말한다. “목..부...러...져...” 죽은 지 30년 된 자가 하는 말치고는 꽤나 신선해서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암, 목이 부러지면 큰일나지... 이외에도 재미난 부분이 상당하다. 물론 의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로선 다루기 어려운 소재였을 것이다. 1910년 토마스 에디슨이 최초의 프랑켄슈타인 영화를 제작한 이후 많은 영화가 이 괴물을 다뤄왔다. 그러나 그 소재의 섬뜩함과 주제의 깊이가 당시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 공포의 이중인간 >은 어찌 됐든 75년의 한국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프랑켄슈타인을 영화화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무리수들이 등장하고 영화의 꼴은 좀 우습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가 정말 좋다. 황당한 설정, 이상한 행동과 대사, 밑도 끝도 없는 연출이 얼기설기 엮여져 있으면서도 조명과 촬영이 상당한 수준이라 보는 재미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금 봐도 지루한 부분은 거의 없을 정도다. 게다가 당시로써는 보기 힘든 노출까지 담고 있어(왜 전라의 여자 실험대상은 전선과 반창고를 꼭 유두 부분에 부착해야만 했을까.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B급 공포영화에 바랄 수 있는 모든 부분이 충족된다. 안타깝게도 무섭지는 않지만, 다른 부분들이 그 아쉬움을 채우고도 남는다. 공포의 이중인간 이용민 감독은 꽤 재미있는 이력을 가졌다. 촬영감독으로 더 많은 경력을 가진 영화인인데, 그가 기획하거나 연출했던 영화들의 많은 수가 공포영화다. < 무덤에서 나온 신랑 >, < 악마와 미녀 >, 특히 각본, 감독을 모두 맡은 < 살인마 >, < 목 없는 미녀 >, < 공포의 이중인간 > 은 나름대로 분위기와 재미를 잘 전달하고 있으니 공포영화 전문감독이라 불려도 좋지 않을까? 당시로써는 상당히 현대적인 감각으로 촬영, 편집을 해내고 있어서 내가 본 그의 모든 영화가 무척이나 좋았다. 좀 더 제대로 된 각본가와 작업을 했더라면 정말이지 걸작이 한 편 나올 수도 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국 컬트, B무비라는 으레 언급되는 감독들이 있다. 그 사이에 이용민의 이름이 왜 들어가지 못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에라도 많은 분들이 그의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더 많이 이야기될 (조금 다른 의미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P.S : 현재 KMDb VOD 기획전(2014년3/4월)을 통해 집에서 공짜로 볼 수 있다. 참고 하시라. 이예춘 김옥진 진봉진 감독: 이용민 각본: 이용민 개봉극장: 중앙 관람인원: 6,886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