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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국제적 교류의 장을 만든 '2010 세계 강문화 화천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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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지전’ 모티브 화천 425고지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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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스크린 너머의 숫자들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2월 2일,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를 오픈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2월 2일. KMDb는 20주년을 맞이한다. 우리는 KMDb를 기획·구축하며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다. 누군가 ‘무비씨’라는 이름을 제안한 적이 있다는 것은 기억나고,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가를 따라 한 것 같지만 그 이상의 이름은 없다고 판단해 KMDb로 지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은 kmdb.or.kr 도메인을 구매했다. KMDb에는 20년간 생겼다 없어진 콘텐츠와 기능이 많다. 초기에는 사용자가 직접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도 상당했으나 생각보다 양질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어려워 하나둘 폐기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 전용 KMDb를 따로 만들었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통합된 상태에서 최대한 간결한 기능과 콘텐츠로 운영하는 중이다. KMDb를 준비하며 호기롭게 “풀 크레딧을 가지고 갑시다!”라는 (제안을 내가 한 것 같고 그래서) 고생문이 활짝 열린 정책을 시작하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어디에도 없는 데이터를 보유하게 된 KMDb는 영화·영화인 DB 서비스뿐 아니라 VOD로 한국고전영화 스트리밍을 시작했고, 영화글로 다양한 필자의 글을 소개했으며 리스트와 컬렉션이 순차적으로 오픈해 지금에 이르렀다. 2006년 2월 1일. 오픈 전날 디지털정보화팀의 담당 세 명은 그제야 동명이인에 대한 이슈를 발견하는 사고를 친다. 비슷비슷한 나이의 정유미 배우가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명이래! 라는 비명을 한밤중에 지르며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인물을 분리하며 밤을 지새다 퇴근해 다음 날 오픈시켰다. 그리고 그 동명이인 이슈는 지금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완전할 수가 없다. IMDb도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이슈를 KMDb 라고 별수 있겠는가. IMDb 매니저는 이름이 짧은 한국 인명으로 동명이인에 대한 고충이 더 심하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성명이 “정유미”인 배우 3인에 대한 KMDb 영화인 정보 KMDb는 영화·영화인 데이터의 완벽함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이제는 영화인이 자신의 필모를 증빙하기 위한 웹사이트로 그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문득 KMDb에 쌓인 데이터가 어떤 모양새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사용자들도 궁금해할까? KMDb 20주년 이벤트를 근사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데이터로 가득한 사이트의 20년 묵은 통계를 소개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축하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지난 20년의 통계 10선을 소개한다. 1.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극·비극) 의 수: 50,787편 2. KMDb에 등록된 한국영화인 의 수: 83,279명 3. 가장 많이 접근된 영화인 페이지 정윤희(1위), 임권택(2위), 신성일(3위) / 사진: 전승열, 정기성 1위 | 정윤희 2위 | 임권택 3위 | 신성일 4위 | 김기영 5위 | 이상사 6위 | 김지미 7위 | 박노식 8위 | 김진규 9위 | 신상옥 10위 | 안성기 4. 작품 리스트(필모그라피) 가 가장 많은 영화인 1위 | 현동춘 | 편집 | 994편 2위 | 김희수 | 편집 | 863편 3위 | 최형래 | 음향효과 | 850편 4위 | 손인호 | 음향효과 | 793편 5위 | 김기범 | 배우 | 753편 6위 | 허장강 | 배우 | 687편 7위 | 임해림 | 배우 | 660편 8위 | 김재경 | 음향효과 | 657편 9위 | 윤일주 | 배우 | 650편 10위 | 최남현 | 배우 | 609편 5. 한 작품(장편영화)에 가장 많은 크레딧 을 올린 영화인 1위 | 노영석 | THE 자연인 (노영석, 2023) | 17개 공동 2위 | 박용철 | 싸이더:애,심 (박용철, 2019) | 16개 공동 2위 | 준오 | 휴게소 (준오, 2016) | 16개 ※ 노영석 감독은 <THE 자연인>에서 감독, 각본, 출연, 프로듀서, 촬영, 조명, 편집, 음악, 미술, 의상, 동시녹음, 사운드(음향), 시각효과, 색보정, 예고편, 포스터, 기타스탭(캘리그라피)을 담당함. 6. 참여 스태프 가 가장 많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1위) 1위 | 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2022) | 1,665명 2위 | 백두산 (이해준, 김병서, 2019) | 1,612명 3위 | 안시성 (김광식, 2018) | 1,502명 4위 | 미스터 고 (김용화, 2013) | 1,492명 5위 | 신과 함께–죄와 벌 (김용화, 2017) | 1,487명 7. 상 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 1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58회 2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45회 3위 | 추격자 (나홍진, 2007) | 41회 4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40회 공동 5위 | 괴물 (봉준호, 2006) | 31회 공동 5위 | 벌새 (김보라, 2018) | 31회 ※ KMDb에서 관리하는 영화제·시상식에 한함 8. 리스트에서 본 영화로 가장 많이 체크된 작품 <올드보이>(1위), <괴물>(2위), <기생충>(3위) / 사진: 디씨어터 1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 | 2,581명 2위 | 괴물 (봉준호, 2006) | 2,355명 3위 | 기생충 (봉준호, 2019) | 2,178명 4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2,055명 5위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2001) | 1,672명 6위 | 아가씨 (박찬욱, 2016) | 1,648명 7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2000) | 1,574명 8위 | 마더 (봉준호, 2009) | 1,533명 9위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1,515명 10위 |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1998) | 1,438명 ※ 박찬욱 감독 작품 4편, 봉준호 감독 작품 4편 9. 리스트에 본 영화 체크를 가장 많이 한 사용자 1위 | bo**** | 2,076편 2위 | ha**** | 1,865편 3위 | gs**** | 1,747편 4위 | ba**** | 1,696편 5위 | in**** | 1,636편 ※ ****는 ID의 글자 수와 일치하지 않음. 10. 가장 많은 조회수의 영화글 1위 | “ [시네필 안내서]서문: 시네필의 세계로 들어서고 싶은 당신에게 ” (영화천국 Vol.48) | 정성일 | 91,634회 사실 진정한 20주년 이벤트라면 올해 KMDb가 전면 개편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득하지만 어찌 됐든 2026년 말 새로운 KMDb가 문을 열 것이다. 오랜 KMDb 관여자로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20년이 지난 이젠 누구나 KMDb를 KMDb(b를 소문자)로 써주길 바란다는 것 정도. 소박한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나의 한국옛날영화
1. “'나의 한국고전영화'(가제)라는 주제로 (…) 한국고전영화 대해 애정을 쏟는 부분이나 관심을 갖게 된 지점 등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의 이야기를 KMDb 에 싣고자 합니다. (…) 조금 더 개인적인 에세이 형식의 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원고 청탁은 덜컥 받았지만―KMDb에 글을 써보는 게 소망이었다.―빈 문서에 주제 적어두니 정말 불안하고 의아해졌다. ‘나의’는 불안하게 만들었고, ‘한국고전영화’는 의아하게 만들었다. 먼저 의아함은 ‘한국고전영화’라는 단어의 모호함과 관련된다. 비슷한 이름의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Classical Hollywood Cinema’가 특정 역사적 시기나 미학 체계를 지칭하는 것과 달리, 1) ‘한국고전영화’는 용어로 정립되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영상자료원 운영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는 많은 영화가 업로드 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 〉(이규설, 1920년대 추정), 〈 귀로 〉(이만희, 1967), 〈 미지왕 〉(김용태, 1996)도 있다. 이 세 편 영화를 하나로 묶는 역사적 시기와 미학 체계를 찾는 건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조선영화, 남한영화, K영화… 이런 식이라도 따로 지칭하는 게 더 실재에 가까울수도 있을 것 같고. 아무튼 ‘한국고전영화’를 모호하게 사용하는 예는 논문, 기사 어디에서도 비근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고전영화’는 그냥 이렇게 사용되는 것 같다. “여러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졌던 영화, 여러분들의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봤던 영화, 한마디로 옛날영화(김홍준, 2008)” 2) 당연하지만 ‘한국고전영화’를 “한마디로 옛날 영화”라고 해서 의아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의아해진다. 올해 태어난 내 친구의 아들에게는 〈 범죄도시 3 〉이 한국고전영화가 되는 걸까? ‘한국고전영화’를 ‘한국옛날영화’로 넘어간다 해도, ‘나의’라는 수식어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나의 한국옛날영화’ 이 말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특히 “한마디로 옛날영화”라는 말을 하필 김홍준으로부터 찾았다는 것은 더욱 더. 시간을 조금 돌려보자. 2021년 나는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영화제-오래된 미래’에 김홍준의 〈나의 한국영화〉 연작을 초청했다. (아마도 〈나의 한국영화〉에서 따왔지 않을까 하는) ‘나의 한국고전영화’라는 주제를 받자마자, 나는 그 영화와 그때 보낸 추천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지고 있었고, 시네마테크 같은 근사한 이름들은 멀게 느꼈던, ‘굿다운로더’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과거. (합법 영역이 욕망을 좌절시켰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웹하드를 통해 한국고전영화-사실 거의 모든 영화-를 다운로드 하고, 봤다. 다른 영화 파일과 달리, 한국고전영화는 구성이 유달리 이상했는데 꼭 어떤 사람의 해설이 영화 앞에 붙어있었고, 때때로 출연진과의 짧은 대담이 이어지기도 했다. 뒤늦게 알았다만 그 파일은 ‘한국영화걸작선’을 녹화한 것이었고, 해설자는 김홍준이라는 사람이었다. / 〈나의 한국영화〉는 김홍준이 한국영화걸작선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비디오를 획득할 수 있었던 위치를 활용해 만든, (모든 에피소드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오디오비쥬얼에세이’ 작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한국영화>를 시네필 1세대-문화원 세대-가 바라본 ‘한국영화’, 또 오디오비쥬얼에세이의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가능성이 담겨있는 작품이라 소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고 천진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의 한국영화〉가 저작권을 클리어하지 않고 제작되었다는 점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한국영화’라는 간단한 이름처럼, 그저 대면하고픈 작은 욕구에서 관점의 순수성이, 그리고 그로부터 새로운 형식이 가능했던 거라 믿는다. / 〈나의 한국영화: 에피소드 4 키노99〉는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다. 저작권 문제로 마지막 배경음악은 제거 되어있는데, 제거 된 노래의 이름은 ‘Je te veux’ 한국어로는 ‘당신을 원해요’다. 〈나의 한국영화〉의 첫 편 〈나의 한국영화1: My 충무로〉에서 김홍준은 〈 개벽 〉(임권택, 1992)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기억, 〈 서편제 〉의 마지막 장면에 자신의 딸이 출연했던 것, 〈어느 여배우의 고백〉과 충무로 활동 경력을 내레이션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는 화자가 그 피수식어와 맺고 있는 삶의 관계를 함축하는 수식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인 한국옛날영화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인 주제로는 아무런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고,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한국고전영화 = 불안+의아함 = 포기… 임재철: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대해 냉담하다. 미국을 제외하면 거의 그렇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자국영화가 자국어를 사용해서 그렇다. 그걸 나는 ‘영화는 외국어다’라는 명제를 써서 설명하는데, 그게 문자 그대로 영화가 외국어여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는 외국어처럼 쉽게 포착이 안 되는 게 본질이라는 거다. 예를 들어 한국 영화 보는 경우엔 우리 현실에 안 맞다 거나 연기가 서툰 것을 굉장히 빨리 포착한다. 영화라는 건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곳, 우리가 막연히 몽상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점이 있어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건데 3) 정성일: 영화는 보지 말라고 하니까 더 매혹적이고, 힘을 얻는 것이다, 문학도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찾는 사람이 없는데, 왜 영화를 벌써 박물관으로 보내려 하느냐, 그런 얘기였다. 지금 영화는 공식문화가 돼버려, 매력적인 대상이 되기엔 힘이 부족한 것 같다. / 김홍준: 매혹과 열정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옛날 한국영화를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봐라. 모르는 거니까, 흥분할 수 있다. 둘째. 제도교육으로 배우려 하지 말아라. 4) 그렇게 원고를 회피하다가 영화평론가 임재철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리고 정성일·김홍준의 좌담을 떠올리고 포개어보았다. 임재철에게 ‘영화는 외국어’라서, 분명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불분명한 점이 있어서 매혹적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냉담하다 5) 정성일·김홍준의 문제의식도 유사하게 읽을 수 있다. 그들은 공식문화가 된 이후에 영화는 매력을 잃었다고 말한다. 물론 임재철, 정성일·김홍준이 겨냥하는 지점에 차이는 있다. 임재철은 스크린 내 요소들의 익숙함이 매력을 저감시키는 점을, 정성일·김홍준은 스크린을 접하기 이전 정보의 과다함이 순수한 체험을 방해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표면적인 연상으로 두 인터뷰를 포개어보자. 영화는 외국어라서 흥미롭다(임재철) 그런데 공식 교육에서 외국어를 너무 가르치곤 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흥미로운 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옛 우리말이다(김홍준)? 실로 옛 우리말은 지금의 우리말보다 불분명하다. 훈민정음의 유명한 구절을 안다면 들리는 것과 써진 것을 함께 떠올릴 수 있지만, 그냥 음성만 듣고 있으면 꼭 외국어 같다. 그러다가도 ‘사람마다’라거나 ‘사람이니라’ 같은 부분에서는 또 익숙하여, 불분명하던 앞뒤의 말을 이어맞춰보곤 한다. 그리고 더 궁금증이 생긴다면 ‘우리말’이므로, 여러 방면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편하다. 개인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나의 한국옛날영화’라며 말할 수 있는 고유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측면이다. ‘한국옛날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시네필의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어서 희귀한 ‘순수한 감상자’의 자리를 허용한다. 친절한 공급자도 적고, 알고리즘의 되먹임(KMDb가 알고리즘 기반 vod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기를…)도 없다. 그런데 영화 혹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에 궁금하거나 의아한 점이 생긴다면 그 영화·사람의 주변/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2001년 정성일·김홍준이 ‘한국옛날영화’를 모르는 것으로 거명했을 때보다 한국영화사 연구는 훨씬 많이 누적되었다. 그럼에도 정전(canon) 이외의 작품은 소위, ‘작가’의 작품인 경우에도 아직 충분히 감상 되지 않았으며 해명되지 않았다. 한국옛날영화는 우리 영화팬에게 감상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명을 충분히 시도해 봄직한 미개척의 공간이다. 박진희가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에서 거명한 “역사가로서의 강력한 감상자”는, ‘옛 우리말’이라는 부분적인 분명함의 조건에서 비단 영화사 연구자/영상자료원 직원에게 한정되지 않는 모델이 될 수 있다. 6) 2.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하나의 한국옛날영화감독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소개해보고 싶다. 이만희는 연구사의 첫머리부터 ‘숙명적 운명론자’로 논해지곤 했다. 사람들의 삶에는 조건과 한계가 정해져있고 그로부터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만희의 주제는 반복되는 노동 혹은 일상의 갑갑함이었다. 이만희 또한 자신의 주제를 분명히 인지했던 것 같다. 그는 1973년 08월 「혼자이기 때문에」라는 짧은 글을 썼다. 이 글은 지금껏 인용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이만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 우리 인간이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 중에서 맨 처음의 감정이나 또는 이 세상에 미련을 남기며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마지막의 감정은 바로 소외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읍내의 극장에서 화려한 상류(上流) 생활을 그린 영화를 보고 어두운 논뚝길을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시골처녀, 사방 1미터도 채 안되는 공간 속에 하루종일 앉아서 담배를 피는 아주머니,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 잠깐 한눈 팔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는 개구장이들을 마치 간수처럼 하루종일 지켜야 하는 어머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기묘하게 폭발하고 말듯이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 사이에 끼어서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턱을 고이고 앉아 있는 여대생, 장성한 자식들과 출세한 남편은 제 볼일로 각기 바빠 값비싼 장신구와 함께 버려져 있는 중년부인… 등등, 여유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지식 수준이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어디선가 남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며 쭉쭉 뻗어가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이 아무 변화 없이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날로 퇴보하고 있는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 (…) 나로서 가장 관심이 깊은 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이 소외감이다. 영화를 통해서 나는 인간들이 그 소외감을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처리해 가는가를 그리려고 애써 왔다. 그러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소외감 그 자체는 명백한 인간의 조건일 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따라서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결론은, 자기의 소외감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해소시키려 할 때 무리가 생기고 악이 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그래야만 우리는 훼진 운동화를 신고도 남루한 옷을 입고도 아무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며 번화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이다. 7) 이 글에서 이만희는 인간 보편의 문제에 가까운 소외를 주목한다. 이만희는 이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일을 제시하지만, 마지막 문단의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이라는 반복은 소외의 극복이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강조―기실 이만희는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과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처럼 반복되는 일에서 소외를 찾고 있다―한다. “훼진 운동화”, “남루한 옷”이 풍기는 쓸쓸한 정서는 극복 불가능한 소외를 강화하는 전략 같이 느껴진다. 이런 글과 그의 영화에서 나는 우거지상 혹은 무표정한 사람으로 이만희를 떠올렸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국영상자료원’이 2015년 04월 29일에 facebook에 올린 포스트를 보게 되었다. (https://www.facebook.com/koreanfilmarchive/photos/%EC%B5%9C%EA%B7%BC%EC%97%90-%EC%98%81%ED%99%94%EB%B0%B0%EC%9A%B0-%EB%AC%B8%EC%88%99%EB%8B%98%EC%9D%B4-%EC%83%88%EC%82%BC-%EC%A3%BC%EB%AA%A9%EF%BF%BD/797165160399351/) 이 포스트에는 멋진 사진이 있었다. (사진에는 1974년 여름 〈 삼포 가는 길 〉 촬영장이라 적혀 있지만, 입고 있는 옷은 문숙과 이만희가 처음으로 작업을 함께 한 〈 태양 닮은 소녀 〉의 촬영장이 분명하다.) 급하게 촬영한 것처럼 초점은 흔들려 있고, 초점이 맞지는 않지만 사진 속의 이만희는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이 웃음이 낯설었고, 좋았다.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고 궁금했다. 혹시 이만희는 일상의 갑갑함이나 소외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랑을 찾은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정말 그랬던 것 같았다. 비록 앞서 길게 인용한 「혼자이기 때문에」처럼 이만희가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이만희의 경력에서 사랑은 하나의 주제를 이뤘다. 먼저 14년의 짧은 경력 동안 이만희는 무려 5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을 실천하듯 이만희의 영화 제작 소식은 그의 활동 기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만희는 사랑을 했다. 감독 데뷔 시점부터 사실혼 상태였던 이만희는 1966년 〈 만추 〉의 배우 문정숙과 연애를 했고, 1974년의 시점에서는 배우 문숙과 연애를 했다. 1975년 4월 13일 이만희의 사망 이후에도 신문·잡지에는 이만희의 연인들의 말이 널리 보도되었다. 영화배우인 이혜영이 그의 아버지 이만희를 추억하는 글에 붙인 제목처럼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인용자-이만희),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8) 그런데 이만희의 이 편력에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여성 편력이 (특히 당사자 여성에게) 통념상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희와 시간을 함께 보낸 여성들은 그와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만희의 두 번째 아내 9) 인 오흥순은 이만희와 결별 후에도 “그이와의 7년간의 결혼생활이 내게는 너무 아름다운 추억”이었기에 오랜 기간 재혼을 하지 않았다. 10) 문정숙 또한 이만희가 죽은 후에도 “「만추」(이만희와 함께 촬영한 영화의 제목-인용자)라는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고 매해 가을 “낙엽속에서 그의 숨소리와 뜨거운 「영상의 혼」을 발견”하곤 했다. 11) 그의 마지막 연인인 문숙 또한 2007년 한 권의 책 마지막 한해를 통해 이만희와의 사랑을 추억했다. 12) 이만희는 사랑을 많이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사랑을 참 열심히 그리고 잘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학부 때였나? 수업 시간에 한 교수가 사랑의 비효율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사랑에 목을 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고, 대학생이 조심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그 교수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목맬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복된 일이다. 사랑이 끝난다고 해서 그 복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준다. 소외를 말한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 옆에서 웃을 수 있었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사료/정보로부터 우리는 이만희 영화에서 무엇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삼포 가는 길〉(이만희, 1975)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영달과 정은 백화를 떠나 삼포로 향한다. 이만희는 떠나는 영달과 정의 얼굴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일상적 삶의 프로젝트에서 상상되지 않는 백화라는 존재를 담을 수 없는 그들을 이만희는 화면에서 추방시켜 버린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 개발의 증표로 ‘삼포’라는 가짜-외부가 영화에 삽입된 것이 나는 참 슬프다.) 이미 정해진 원고 매수는 넘었고, 나는 무엇보다 당신이 이러한 정보들을 참조하며 (아마 그의 가장 언급되지 않은 영화 중 한 편인) 〈태양 닮은 소녀〉(이만희, 1974)를 보길 바란다. 이 영화에는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일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어떤 의미로 배치된 걸까? 나는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을 만나 활짝 웃는 걸 떠올린다. 그리고 찰칵!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이 남은 것에 대해서도. *** 1) 임재철,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세계영화사 강의: 초기영화에서 아시아 뉴웨이브까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123-151쪽 참조. 2) 김홍준, 「한국의 고전영화 읽기―사실적 재현, 장르, 스타일, 공간의 구축」, (영화감독 10인의) 연출 수업 1, 동서대학교 임권택 영화연구소, 2012, 98-99쪽. 3) 임재철, 한승희, 「영원한 구경꾼: 임재철」, 필름 2.0, 290호, 2006.07. 74쪽. 4) 김홍준, 정성일, 박은영 정리, 「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5] - 영화광·에필로그」, 씨네 21, 2001.02.22. http://m.cine21.com/news/view/?mag_id=573(2023.06.18. 확인) 5) 미국을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편, 브라질의 영화평론가 Filipe Furtado는 이렇게 트윗한 적 있다. “누구나 자국 영화에 애증 관계를 갖습니다. 다만 미국인들은 자국 영화를 기본값으로 보는 데 너무 익숙해서 애초에 그것을 ‘자국 영화’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https://twitter.com/filipefurtado/status/1172522298093506560) 6) 박진희,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 마테리알 7호 https://ma-te-ri-al.online/archive/641 7) 이만희, 「혼자이기 때문에」, 샘터 4권 8호, 샘터사, 1973.08. 30-31쪽. 8) 이혜영,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여성동아 185호, 1983.02. 9) 이혜영에 의하면 이만희는 55년에 한 번 결혼을 한 후 바로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난 것이 오흥순이다. 이혜영은 오흥순이 “극예술협회라는 극단에 들어가셨어요.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더라구요.”라고 구술한 바 있다. (이혜영, 「이만희를 말하다」, 영화천재 이만희, 한국영상자료원, 2006, 258쪽) 이와 달리 오흥순은 이만희와 그가 처음 만난 것이 ‘서울문화학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오흥순과 이만희는 각각 ‘서울문화학원’에 배우와 연출이 되기 위해 다녔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오흥순, 「사랑이 머물다 간 세월」, 아리랑 21권 8호, 아리랑사, 1975.08. 172쪽.) 서울문화학원의 한국연극학회가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공연한 것은 1955년 11월이다. (「全國大學演劇 콩클 作品은 「푸른聖人」」, 경향신문, 1955.11.06.」)이다.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극예술협의회(劇藝術協議會)’ 주최로 1956년 06월이다. 오흥순이 출연한 기록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劇藝術協議會 創立 公演」(경향신문, 1956.06.0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천재 이만희 15쪽에 실린 ‘57년 공연장에서’라는 사진 또한 1956년 공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이 공연에는 이만희가 감독으로 데뷔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김승호도 출연했다. 10) 오흥순, 위의 글, 174쪽. 11) 문정숙, 「그 만추의 못잊을 사랑」, 여성동아 185호, 동아일보사, 1983.02. 236쪽. 12) 문숙, 마지막 한해, 창비, 2007.
1972년 이후 검열체제 변화와 <수절> 검열자료 해제 2
<수절>(하길종, 1973) 행정서류를 통해 본 1970년대 초 제작 전 검열절차 나는 한때 영화를 거의 포기하였다. <화분>을 연출한 후, 써낸 시나리오는 매번 제작자의 거부 반응을 받거나 칼자루를 든 관에서 나의 시나리오는 항시 보이콧을 받아왔다. 그래서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서 만든 <수절>이란 영화는 작품의 배경이 한사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라는 이유로 20분 길이의 필름이 무참히 커트당했고, 극장 스크린에서는 알맹이가 빠진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졌다. 나는 그때 마치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 하나가 잘려나간 나의 모습을 공개하는 것 같은 큰 아픔을 느꼈고, 구토와 분노를 함께 느끼며 영화를 포기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1) 이번 편에서는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1973년 작 <수절>의 검열서류를 통해 이 시기 검열제도와 환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절>은 한사군 시대를 배경으로, 전쟁을 하러 타지에 간 유신(하명중)을 기다리던 부인 질례(박지영)와 그녀의 딸 용분(이영옥)이 온갖 고초를 겪다 남편의 스승이자 폭군인 지거도사(윤일봉)와 그 패거리에게 강간과 죽임을 당한 후 귀신이 되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10년 만에 돌아온 유신은 부인과 딸의 귀신을 만나 그녀들의 억울한 사정을 안 후 지거도사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수절>은 미국 UCLA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하길종이 <화분>(1971)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한 작품이다. 1970년 귀국한 하길종은 독립 제작의 어려움 끝에 겨우 데뷔작 <화분>을 완성하였으나, 이탈리아 영화 <테오라마> 표절 시비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고심 끝에 두 번째 작품 <수절>을 연출하였으나,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서 만든” 이 영화 역시 고난의 상황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감독 본인이 무려 20분 길이의 분량을 검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영화의 검열서류를 통해 당시 한국영화 검열( 및 행정) 절차와 환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1960년대(특히 후반) 이후 영화의 검열은 크게 제작 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후 본편 검열로 나누어졌다. 시나리오 검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1962년 제정 영화법 이래 존재했던 제작신고 절차에서 문공부가 시나리오를 검토한 후 제작상의 유의사항을 전하는 관행이 제도화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나리오 검열이 실질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고, 1970년부터는 예륜을 통한 시나리오 검열이 독자적으로 시행되었다. 이와 함께 문공부가 주관하는 제작신고 역시 존속하였다. 그러다보니 제작 이전 검열 혹은 행정 절차는 1970년 이후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와 문공부의 제작신고로 대별된다. 특히 이 편이 주목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바, 1972년 이후 시나리오 단계에서 검열 혹은 제작신고 체제의 변화를 서류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 검열체제의 주요한 변화와 혼란은 거의 항상 시나리오 검열단계의 복잡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나리오 신청과 제작신고 단계의 절차를 영상자료원 검열서류의 일자 순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1973.6.25. 시나리오 심의 신청(화천공사->예술문화윤리위원회) 2. 1973.6.29. 시나리오 심의의견서(문화예술위원회) 3. 1973.7.3. 국산 극영화 제작권 배정신청서(화천공사->문화공보부) 4. 1973.7.9. <수절> 시나리오 심의결과 통고(예술문화윤리위원회->문화공보부) 5. 1973.7.13.(작성, 7.16일 접수) 73 2/4분기 시나리오 심사 작품 제출(화천공사->문화공보부) 6. 1973.7.20.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대한 작품 지정(문공부 내부서류) 7. 1973.7.21. 영화제작신고서(화천공사->문화공보부) 8. 1973.7.21. 우리영화 제작현황(문공부 내부서류) 9. 1973.7.24. 73.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따른 작품 지정(문화공보부->화천공사) 10. 1973.7.25. 극영화 “수절” 제작신고 수리통보(문화공보부->화천공사) "국산극영화 제작권 배정신청서"와 "73년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따른 작품 지정"(영화 <수절>) 1970년을 거치며 체계화된 영화정책에 따르면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자는 예륜을 통해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한 다음(1, 2, 4번) 이를 바탕으로 문공부에 제작신고를 진행해야 했다(7, 10번). 제작신고는 말 그대로 제작이 시작된다는 것을 정부에 신고하는 행정절차이나, 실제 문공부는 예륜과 별도로 시나리오를 심의하곤 하여 시나리오 단계의 이중검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런데 앞의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두 단계에 별도로 제작사에 대한 제작쿼터(제작권) 부여 단계가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서류에도 이 절차에 따른 변화가 나타난다.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이 71년까지 존재하지 않던 서류들이다.(3, 5, 6, 8, 9번) 제작사 별로 양적인 제작권을 부여하는 방식(연간 00편, 분기별 0편 등)과 달리, 개별영화에 대한 심사를 거쳐 제작사에 제작권을 배정하는 절차는 국가비상사태 이후 권위주의 정권의 영화검열 강화를 위해 신설된 것이다. 1972년에는 이 제작권 배정을 위해 영화계 안팎의 권위자 20명 내외가 예륜의 심의 이후 별개로 문공부 촉탁으로 참여하여 시나리오를 검토하게 하였는데, 이는 실질적인 검열의 과정이었다. 그 결과 1972년 신규 제작의 부진으로 이어졌고, 이를 감안 1973년 영화시책을 통해 문공부가 직접 결정하기로 했다는 점은 전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1973년 실질적인 검열이 아닌 형식적 행정절차로 전락한 이 제작권 배정절차가 절차의 번거로움을 강화하는 외에 어떤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는지 의문시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73년 들어 예륜의 심의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영화 제작현황(1973.7.21)(<수절>) 그럼에도 이 절차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영화법 개정 이후 새롭게 허가받은 12개 사의 제작내역을 미리 점검함과 동시에 통제하는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인적(생산주체) 통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8번 “우리영화 제작현황”이라는 양식은 다소 흥미롭다. 제작신고가 접수된 날 작성된 이 양식은 본편 검열예정일, 상영예정일과 극장, 촬영 일정까지 적시되었다. 국가가 영화의 제작 및 상영일정과 개봉관, 주조연 배우까지 관리하는 이러한 상황은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압박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수절>의 주요 검열사항 검토 이제 이 영화의 주요 검열 사항에 대해 살펴보자. 1973년 영화시책이 밝히고 있듯이 73년부터 예륜에 의한 시나리오 검열이 강화되었다. 당시 영진공의 기관지 『영화』의 한 기사에 따르면, 1973년 6월부터 11월까지 시나리오 심의를 마친 작품 53편의 경우 반려가 11편, 전면개작이 6편, 개작이 9편, 수정통과가 26편이며 수정이 되지 않고 초심에서 통과된 작품은 단 1편 뿐이었다. 2) 그렇다면 <수절>의 시나리오 검열은 어떠했을까? 이 영화에 대해 예륜은 13개의 사항을 지적했고, 재심 판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53편 중 26편에 해당하는 “수정통과” 작품 중 하나였던 셈이다. 13개 내역 중 자구나 사실관계 수정 정도에 해당하는 사항이 5개, 잔혹성 지적이 4개, 외설성 지적이 1개, 고증 유의 1개, 사유 불명 2개 등이다. 항목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당시 반 이상의 작품들이 반려나, 개작을 통한 재심 및 삼심까지 이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검열이 심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수절> 시나리오 검열 수정지시 사항 13개 영화 촬영 후 촬영본 본편에 대한 검열은 11월 14일에 신청되었다. 첨부된 문서 중 “영화배급신청서 접수필증”(11월 17일자)이 눈에 띈다. 제작사인 화천공사가 한국영화배급협회(이사장 김태수)로부터 발급받은 접수필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4차 개정 영화법 이후 영화배급의 전국 일원화를 목표로 설립된 영화배급협회가 관련된 행정절차의 흔적을 보여준다. <수절>의 본편 검열은 1973년 11월 17일에 진행되었다. 당시 영화 본편의 검열은 문화공보부, 중앙정보부, 내무부(치안국) 3개 기관이 주관하였다. 순전히 공무원 중심의 검열체제였다. 중앙정보부는 국가 안보사항, 내무부 치안국은 미성년자 관람가부를 중심으로 보았고, 문화공보부가 전체 검열사항을 종합하여 의견을 내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위 중앙정보부 검열관의 검열사항은 4개에 불과한데, 최종적으로 문화공보부가 지시한 검열사항은 9개처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문화공보부의 추가 검열사항이 부가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문화공보부가 중앙정보부나 내무부 치안국의 검열사항을 취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종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최종적으로 통보한 9개처의 검열사항은 대사삭제 2개처(“상납할까요”, “돈과 권력이면 전부지” 등), 화면삭제 4개처(강간 장면 2개처 등), 화면단축 3개처(나체로 춤추는 여자들과 이를 보는 질례의 얼굴 등)이다. <수절> 본편 검열 수정사항 시나리오 단계의 엄격한 검열을 거친 후,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본편 완성본의 경우 검열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당시 관행을 감안할 때, 9개처에 달하는 이 영화의 본편 검열 분량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며 꽤 심각한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라는 이유로 20분 길이의 필름이 무참히 커트당했”다는 감독의 주장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자. 우선 검열서류 상 절제된 이후의 총 분량은 96분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검열되지 않은 원본으로 추정되는(실제 서류상 검열사항이 모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오리지널 네거티브(ON) 원본을 변환하여 서비스 중인 동영상의 러닝타임은 1시간 32분 28초(93분 28초)가량이다. 오히려 원본이 짧은데, 영상자료원 버전에 크레딧롤이 빠져있어 발생한 결과로 보인다. 크레딧롤이 길어야 3-4분임을 감안할 때 검열의 분량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20분가량 “커트”됐다는 감독의 회고는 다소간의 과장이거나, 시나리오 검열 단계까지 언급한 것이거나, 공식적인 서류에서가 아니라 막후에서 조정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하나의 주제로 “저항적” 혹은 “반사회적”이라는 면에서 검열당했다는 감독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사 2개에 대한 검열 근거는 저항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직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나머지 7개 처 외면상 잔혹이나 신체 노출 등의 이유로 절제된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데 있다. 관습적인 의미에서라면, 감독의 자의식에 찬 주장과 달리 이 절제된 장면들이 “저항적”이라거나 “반사회적”이라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장면들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충분히 저항적이거나 반사회적이라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 우선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권력에 대한 비판을 목표로 진행된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사실 <수절>은 과도한 실험성과 다소 미숙한 촬영이나 편집, 개연성 없는 인물간의 관계 설정, 앞뒤 안 맞는 서사 등이 난삽하게 흐트러져 전체적으로 잘 조율된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는 감독의 전작 <화분>에서 역시 마찬가지지만, 어찌된 일인지 <화분>에 비해 그 문제가 두드러져 보인다. 본인이 익숙하지 않은, 당대 유행하던 검술영화라는 장르적 외피 속에 자신의 메시지와 실험정신을 새기고자 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는 사실 과할 정도로 당대 권력자의 횡포와 피수탈자의 고난(유신의 부인과 딸) 장면들을 강조 내지 나열하고 있고, 이는 앞서 언급한 영화의 단점들과 어우러져 영화를 매우 보기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 영화적 실패로 볼 수도, 당대 상업 주류 영화들이 도외시한 영화적 실험의 성취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평가가 어떠하건, 이 영화가 유신 이후 강화되어가던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역사무협극을 경유하여 권력 일반의 폭력에 대한 매우 노골적인 고발의 의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 절제된 외설적이거나 잔혹한 장면들은 대개 권력자들의 횡포와 폭력을 가시화하는 사례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들이 직간접적으로 비판적이거나 반사회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보겠다. 영화 <수절>의 한 장면 또한 박정희 정권기, 특히 유신 이후의 권위주의 정권기에서 높은 수준의 섹슈얼리티나 잔혹함, 혹은 사회적 일탈행위의 재현 일반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면이나 글의 성격상 이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겠으나, 당시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에게 요구했던 절제와 질서, 미풍과 양속의 덕목들, 그리고 그러한 덕목의 강화를 통해 현행 권력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과도한 잔혹성과 퇴폐, 섹슈얼리티, 일탈은 도구적 이성을 넘어서는 정동과 개인적 욕망들의 분출을 표방함으로써 권력의 체제에 구멍을 뚫고 탈주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무)의식적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각주 1) 하길종, "신문 광고와 바보의 초상", 한국영상자료원, 『하길종 전집1, 태를 위한 과거분사, 백마 타고 온 또또』, 2009, 263-264쪽 2) “양질의 작품 빈곤: 시나리오”,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12월호, 33-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