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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송예진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조민경, 조우현, 김주연, 안민영, 곽민규
이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첫 장면에 달려있다. 버스 정류장에 근처에 예닐곱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고정숏으로 보여준다. 어안렌즈로 찍은 것처럼 곡선으로 구부러진 버스가 정차 후 지나가면 버스 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남는다. 그들은 마치 사람들 사이 보호색을 띠었던 양 이제야 눈에 띄는데, 행색을 보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젊은 여자와 나이 든 여자는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린 한 쌍처럼 보인다. 이들은 뒤로 보이는 연방 우체국의 우편물을 노린 3인조 가족 사기단이다. 이 장면의 압권은 딸 올드 돌리오(에반 레이첼 우드)가 선보이는 특별한 준비 동작이다. 굼떠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날랜 동작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낮은 난간을 뜀뛰기 하듯 넘나드는 모습이 놀라움을 안긴다. 그렇게 해서 과연 CCTV를 피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동작은 눈길을 끈다. 이는 임무 완수를 위한 제의 혹은 스트리트댄스 같다. 우스꽝스러운 동작은 다시 등장한다. 버블 공장에 딸린 사무실을 집처럼 사용하는 이들은 몇 달째 집세를 밀린 상황이다. 주인의 시선을 피해 낮은 담 아래로 몸을 굽히고 걸어가는데, 유독 돌리오만은 림보를 하듯 허리를 거의 180도로 뒤로 꺾은 채 성큼성큼 걷는다. 그 모양은 우스운 것을 넘어 그를 도시 공간과 소통하는 거리의 무용수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명백한 몸개그로, 이것이 몸의 영화임을 다소 난해한 방식으로 예고한다. 이들의 거주지는 매일 일정 시간마다 천장 벽 틈새로 분홍색 비누 거품이 새어드는 곳이다. 그럴 때마다 집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에 가까워지며 무생물과 같은 거주자들과 반대 방향에서 접점을 만든다. 가짜 가족처럼 보이던 이들은 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인데, 애초에 이들에게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붕괴한 것 같다. 여기에서 가족은 비즈니스적 공동체이며 감정적 유대가 아닌 공평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수익과 손해는 3분의 1로 정확히 나눈다. 동시에 울리는 손목 알람에 따라 정해진 일을 수행하고 몫을 나누어 갖는다. 딸 올드 돌리오는 < 산책하는 침략자 >(2017)의 개념을 잃어버린 신조(마츠다 류헤이)처럼 모든 개념을 처음부터 습득해야 하는 부적응자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26살에 뒤늦게 시작된 돌리오의 성장기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는 성장기가 아니라 ‘출생기’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사람과의 신체 접촉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 하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접촉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환불 불가능한 마사지 쿠폰을 포기하는 대신 생애 처음 마사지를 받은 돌리오는 작은 터치에도 몸을 떨고 눈물을 보인다. 한 임산부의 부탁으로 예비 부모를 위한 강연에 참석한 돌리오는 아기가 어머니와 감정적 유대를 맺는 최초의 행위인 ‘브레스트 크롤’(태아가 엄마의 젖가슴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행위) 장면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태어난 직후 엄마 테레사(데브라 윙거)와 접촉했는지 여부를 궁금해한다. 비행기에서 부모와 떨어져 앉게 된 돌리오는 우연히 부모님과 나란히 앉은 멜라니(지나 로드리게즈)가 자신보다 더 그들의 딸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테레사의 애정에 더욱 집착한다. 돌리오가 대리 참석한 강연장에서 출산 영상이 등장하는 대목은 다소 급작스럽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 속의 모든 상황은 ‘태어남’을 은유하기 위한 치밀한 우연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한 돌리오의 우체국 진입 장면 이후에는 우편함을 뒤지는 돌리오의 손을 보여주는 숏이 등장한다. 우체국 내부는 사방이 작은 우편함으로 구획된 어딘가 비현실적인 공간이며, 돌리오는 그중 한 곳을 열고는 좁은 구멍 속에서 손을 좌우로 더듬으며 우편물을 찾는다. 그러다 옆 칸에 놓인 긴 직사각형 형태의 우편물을 조심스럽게 빼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좁은 구멍으로 분만을 유도하는 출산 장면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멍을 통과한 뒤에는 진동처럼 지진이 찾아온다. 가족이 약진에 유난스럽게 반응하며 길가에 얼어붙을 때, 옆에서 행인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모습이 목격된다. 지진을 통해 세상은 개념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운동성을 드러내고, 그럴수록 이 가족은 무생물처럼 고정된다. 진동하는 비행기는 이들이 세상을 체감하는 방식을 요약한 공포 체험의 장소다. 갑작스러운 난기류로 차체가 흔들리는 현상이 벌어지자 이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른다. 세상을 은유하던 비행기는 작은 우편함 구멍과 출산 비디오 영상과 어우러져 출산 체험을 위한 기구가 된다. 비행기는 누구나 망각했을 태어남의 순간을 내부에서 단체로 경험하는 물질로 도약한다. 내부의 시점에서 출산을 체험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은 후술하는 장면을 통해 마침내 성공적으로 충족된다. 테레사가 무심결에 멜라니를 ‘아가’(hon(ey))라고 부르자, 돌리오는 수하물 분실을 조작해 얻은 여행보험금을 걸고 자신에게 ‘아가야’라고 말해보라고 테레사를 채근한다. 그러나 테레사는 끝내 돌리오를 ‘아가야’라고 부르지 못한다. 이 집단에서 막내딸 정도의 역할일 줄 알았던 멜라니는 자신의 진짜 역할이 어머니임을 자각하고는 돌리오의 손을 잡고 집단을 벗어난다. 멜라니는 자신의 집을 새로운 활동 기지로 삼아 ‘아가야’라고 불러주기를 비롯해 테레사가 거절한 것의 목록을 만든 뒤 하나씩 실행에 옮긴다. 리스트의 핵심 항목은 단연 브레스트 크롤이다. 멜라니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며 실감나는 재현을 위해 불이 들어오지 않는 화장실로 돌리오를 데려가 문을 잠근다. 어둠 속에서 지진이 찾아오자 겁에 질린 돌리오는 이것이 자신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진동이 멈춘 뒤 문이 열리고 다시 빛을 보게 된 돌리오는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기쁨에 젖어 만나는 모든 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생의 축복을 만끽한다. 아직 가장 중요한 동작이 남았다. 화장실에 갇힌 패닉 상황에서 실언을 내뱉어 멜라니에게 상처 입힌 돌리오는 그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콘크리트 바닥을 기어 멜라니에게로 다가간다. 돌리오의 첫 브레스트 크롤은 엄마의 품보다는 다소 거칠지만, 그보다 넓은 세상의 맨몸을 더듬는 행위이다. 덧붙여 누군가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이는 최초의 시도다. 그렇게 돌리오는 태어난다. 그리고 비로소 산다. <카조니어>에서 미란다 줄라이가 보여준 것은 아직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던 방식으로 시도된 사랑스럽고 무모한 퇴행이다.
사실 이 영화는 내가 2년 전에 먼저 보고는 진짜 친한 친구들 아니면 알려주지 않았던 작품이다. 왜냐하면 내가 리메이크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리메이크할만한 작품이면 오히려 더 알려서 영화 자체의 지명도를 올려야 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 텐데, 이 영화는 숨겨야만 했다. 이유는 너무나 강력한 반전을 지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전이 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영화 사상 반전이 강력한 작품들은 많다. < 식스 센스 >나 < 유쥬얼 서스펙트 >는 물론 좀 과거로 가 보면 < 혹성 탈출 > 등이 떠오르는데, 그런 반열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영화는 아니다. 평이한 가족 코미디 영화일 뿐이지만 어마어마하게 눈물 폭탄을 던질 수 있는 대반전을 지니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글을 읽으실 분들에게는 그 반전의 힘이 좀 약해질 수 있겠다. 미안하지만 이 영화의 반전은 ‘반전이 있다’는 정보를 가진 상태로 관람했을 때의 효과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반전을 잊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는 뻔뻔한 제안을 해 본다. 이 영화는 멕시코 작품이고, 스페인어가 주로 사용되는데 주 배경은 미국이다. 2013년 미국 개봉 당시 5천만 달러 이상의 박스 오피스 성적을 거둬 스페인어 영화 역사상 미국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결코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 수 없을 것만 같은 외모를 지닌 한 남자가 온갖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고, 여성들은 그에게 결혼을 원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 남자의 이름은 그야말로 로맨틱한 뉘앙스의 발렌틴. 어쨌든 발렌틴이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고, 또한 자신도 그런 여성들과의 관계를 신나게 즐기고 있다는 설정 자체가 하나의 과장에 의한 코미디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한 여인이 침대 위에서 두 여인 사이에 누워 있던 발렌틴을 찾아온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말이다. 이쯤 되면 < 과속 스캔들 >도 떠오르고 <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 >도 떠오르고 온갖 내가 모르는 내 아이가 내 눈앞에 나타나는 수많은 가족/혹은 섹스 코미디가 떠오르는데,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이 엄마는 택시비를 내러 가겠다고 한 이후 기약이 없고, 발렌틴은 아이를 떠맡게 된다. 이런 경우 보통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떠맡아 기르는 한 남자의 분투기가 펼쳐질 텐데 발렌틴은 가열차게 아이를 거부하며 미국으로 간 아이 엄마를 찾아 아이를 돌려주기 위한 여행을 펼친다. 그러면 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로드 무비로 전개돼야 할 텐데 여행은 싱겁게도 짧게 끝나고 LA에 도착하고 만다. 하지만 아이 엄마는 이미 뉴욕으로 떠나 버렸고 발렌틴은 아무 연고도 없는 타국 땅에서 아이와 함께 덩그러니 남게 된다. 그러던 중 발렌틴의 놀라운 재능 하나가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스턴트맨의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딱 맞췄는지 그 자리에 스턴트맨 매니저가 있었고 발렌틴은 할리우드에서 매우 잘 나가는 스턴트맨이 된다. 그러면서 수입이 생겨 아이를 키우며 살게 된다. 아이의 이름은 매기. 태어나서 한 번도 아이를 돌본 적이 없는 싱글 대디 발렌틴은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건지 아닌지 무조건 아이를 행복하게만 만들어 주려고 애쓴다. 엄마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온갖 환상적인 일을 하는 모험가로 소개됐고, 발렌틴은 매기에게 세상은 온갖 판타지로 가득 찬 곳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발렌틴이 친구의 병원에서 ‘치유가 되지 않는다’는 불치병 판정을 듣게 된다. 아, 그 유명한 시한부 드라마가 펼쳐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뉴욕에서 변호사로 화려하게 변신한 아이 엄마가 자신의 여성 연인과 함께 나타나 매기를 도로 찾아가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리고 마치 < 아이 엠 샘 >처럼 아이를 놓고 서로 데려가겠다는 법정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쯤 되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게 되는데, 후반부의 정서는 다분히 여성 혐오에 기대고 있어 만약 누군가 리메이크를 한다면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수정해야 하겠다. 이후에 펼쳐지는 반전은 계속 잊고 보시는 게 좋겠는데 또 이야기를 해 버렸네. 죄송. 제목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국 개봉 제목은 < 사랑해, 매기 >, 제목을 짓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1초 만에 반사적으로 만든 후 아무 생각 없이 내놓은 듯한 느낌의 무취 무미 무감각한 제목이다. 미국 개봉 제목, 그러니까 영문 제목은 < Instructions Not Included > 번역하자면 ‘사용설명서 없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에 정식 수입되기 전에 매체 혹은 인터넷에서 돌던 제목은 <사용설명서 없는 선물>이었다. 발렌틴에게 처음 매기가 도착했을 때의 느낌을 제목화 한 것이다. 그렇다면 멕시코 개봉 당시의 스페인어 제목은 무엇이었을까. < No Se Aceptan Devoluciones >다. 구글 번역기의 영험한 힘을 빌려 우리말로 옮기면 ‘환불 불가’라는 간단한 어구가 뜬다. 이쯤에서 제목의 태도들을 한 번 살펴볼까. 멕시코의 원제는 반전을 절대 들키지 않고 관객들을 완벽하게 속이겠다는 마케팅실의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거추장스러운 딸을 맞이하게 된 발렌틴’이라는 초반부의 플롯에 집중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미국 개봉제목 역시 비슷하다. ‘인생에 없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어쩔 줄 몰라 하는 발렌틴’의 이야기로 영화를 설명한다. 그에 비해 <사랑해 매기>는 그야말로 장사를 포기한 제목이다. 제목 그 자체의 무 취향은 둘째 치고, 발렌틴의 매기에 대한 사랑만을 강조하면서 뒷부분의 드라마에 기대를 가지고 집중하게 한다. 이 영화는 주로 ‘영화 개봉 전 누구나 접하게 되는 초반부 스토리라인에 기대를 가지고 들어와 후반부 예상을 뒤엎는 전개에 놀라고 반전에 낚여 눈물 흘리는 관객’들을 타깃으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렇게도 저주받은 이유는 개봉 제목이 한몫한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에서의 대성공을 뒤로하고,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 Demain tout commence >(내일 모든 것이 시작된다)라는 제목으로 올해 리메이크돼 며칠 전에 개봉했다. <언터쳐블: 1%의 우정>의 오마 사이가 주인공을 맡았다니 흥행이 기대된다. 아무래도 후반부의 여성 혐오적 부분이 프랑스 관객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혹은 그 부분을 어떻게 수정했는지가 성공 여부의 관건이 될 것 같다. 한국에서도 어느 영화사에서 리메이크를 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던데, 나를 감독으로 채용하진 않을 것 같다.
아, 임성민 ! 누군가 내게 한국영화계 최고의 미남배우가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고(故) 임성민이라 말할 것이다. 물론 남궁원도 잘 생겼지만 임성민이 좀 더 섹시했다. 고교 육상선수 출신의 탄탄하고 매끈한 체격, 그야말로 훤칠한 조각미남의 대명사였던 그는 ‘변강쇠’ 이대근 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후반 토속에로 장르의 반대편에서 치명적인 도시 남자의 ‘지골로’(gigolo)스러운 매력을 뽐냈다. 물론 마흥식 , 이영하 처럼 비슷한 계열의 다른 배우들이 있었지만 역시 그가 가장 섹시했다. 마치 ‘한국의 미키 루크’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섹시함을 과시하며 < 달빛 멜로디 >(1984)에서는 안소영 , < 바람난 도시 >(1984)에서는 이미숙 , < 탄드라의 불 >(1984)에서는 오혜림 , < 무릎과 무릎 사이 >(1984)에서는 이보희 , 그리고 < 색깔있는 남자 >(1985)에서는 무려 오수미 , 오혜림 , 오경아 트리오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입지를 다졌다. 이즈음, 요즘 한창 잘 나가는 TV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 류수영 의 본명인 ‘어남선’처럼 뭔가 수산업을 연상시키는 ‘임관배’라는 본명을 내던진 것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달빛 멜로디 , 무릎과 무릎 사이 , 그리고 장사의 꿈 세월이 흘러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4)에서 최진실 에게 납치당한 한국 최고의 미남 배우도 바로 그였다(당시 최진실의 지시로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무명의 신인배우가 바로 유오성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95년 8월 17일, 어린 딸을 하나 남겨둔 채 간경화 악화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 사의 찬미 >(1991)에서 윤심덕( 장미희 )과 사랑에 빠진 와세다대학 영문과 학생 김우진으로 출연해,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지적인 모습을 뽐내며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하는 등 배우로서의 원숙미를 서서히 드러내던 시기였다. 그렇게 남자배우로서 한창 뻗어 나갈, 불과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한국형 하드보일드 장르가 안착한 지난 몇 년간 멋진 고참 형사나 보스로 출연한 그의 모습을 가끔 상상해본다. 공교롭게도 임성민 은 역시 세상을 뜬 장국영과 1956년생 동갑인데, 그보다 한 살 많은 1955년생 임달화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임성민이 살아있다면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헛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황석영 원작, 신승수 감독 < 장사의 꿈 >(1985)은 ‘털보’ 임성민 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씨름 선수 차일봉(임성민)은 서울에 올라와 방황하던 중 돈을 벌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에 나선다. 당연히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다. “어이, 거기 털보! 덩치가 좋구먼. 나랑 같이 일하러 갑시다.” 하지만 공사판의 한 할아버지가 그의 육체가 부러운 듯 점잖은 표정으로 독설을 내뱉는다. “힘이란 믿을 게 못 되지. 늙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제 힘은 별로 쓸모가 없을 거외다. 용이 뭍에 오르면 개미가 덤비는 법이지.” 그러자 일봉은 갑자기 밥을 먹다 말고는 쌓아놓은 벽돌 탑을 단숨에 넘어트리며 장사의 희열에 젖는다. 고향에서는 황소를 독차지할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전국 규모의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크게 명함을 내밀 수준이 못 되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더 큰 도전의식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런 식의 B무비스러운 고속촬영 판타지 장면은 영화 내내 반복되는데, 아마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장사의 꿈>이 흉내 낼 수 없는 영화적 효과를 위한 장치일 것이다. 영화의 시작, 털보 임성민 이후 그는 불고기를 사주는 돈 많은 게이( 남포동 )의 유혹에 넘어갈 뻔하면서 도시의 삭막한 공기에 눈뜨게 된다. 그러다 급기야 영문도 모른 채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만들어지는 에로영화에까지 출연하게 되는데, 그 촬영현장에서 맨 처음 맞닥뜨린 헐벗은 애자( 금보라 )를 보고는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바지가 부풀어 오른(-_-;) 일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대로 된 ‘합’을 맞춰보기도 전에 애자의 기둥서방 마대수( 송경철 )는 애자를 데리고 누드캘린더를 촬영하는 곳으로 휭 떠나버린다. 그래도 일봉의 남다른 체격과 외모 때문인지 곧 두 사람은 음지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 부기 나이트 >(1997)의 덕 디글러(마크 왈버그)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그전까지 대머리 중년 남자배우와 뒹굴던 애자 역시 싱싱한 일봉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당연히 최고의 에로배우를 얻은 감독( 정진 ) 역시 신이 난다. 거리로 나간 고다르가 < 네 멋대로 해라 >(1960)를 찍었던 똑같은 16밀리 볼렉스 카메라로 골방에서 에로영화를 찍고 있는 처지일지언정, 그는 생긴 것과 달리 에로영화에 대해 진지한 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예술이 별건가, 바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거다. 자연의 아름다움, 육체의 아름다움. 그중에서도 남녀가 사랑할 때의 아름다움이 가장 아름답다. 사랑 앞에서는 어떤 가치도 무의미하다. 어서 옷을 벗고 그 폼 나는 육체를 아낌없이 뽐내고 자랑하라!” 급기야 그들은 깊은 산 속에서의 야외 로케이션도 감행하게 되는데, 쇠사슬을 두른 ‘타잔’ 임성민 이 쇠사슬을 끊고 하얀 천을 날리며 헐벗은 채 뛰어오는 ‘선녀’ 금보라 를 향해 달려간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게 야성을 되찾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감독의 하나 마나 한 개소리가 이어지는데 어쨌건 북한산에서 이뤄진 ‘타잔과 선녀의 합궁’이라는 아찔하고 키치적인 동서양의 만남 앞에 그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순간 이마무라 쇼헤이의 < 인류학 입문 >(1966)이 살짝 떠올랐다고 고백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타잔 임성민 , 선녀 금보라 임성민 도 그렇지만 ‘cute’와 ‘sexy’가 하나로 만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금보라 의 매력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 장사의 꿈 >에서 일봉이 과거 시골 읍내를 주름잡던 천하장사였다면 애자는 바닷가 마을의 해녀였다. 그래서 “애자 씨는 너무 차가워요”라는 일봉의 질문에 “어려서부터 해녀로 자라서 피가 차가운가 봐요”라는 나름 그럴듯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 차가운 매력은 에로 연기가 서투른 일봉의 연기를 교정하는 데 있어서도 능수능란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지는 게 아니라 조명 불빛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라는 충고는,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에로영화들에서도 깨닫지 못한 최고의 ‘연기론’과 ‘형식미’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그 차가움 속에 서울로 올라와 산전수전 다 겪었을 애자의 깊은 슬픔이 묻어나온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친절한 몽타주 역시 가슴을 후벼 판다. “서울은 캄캄한 어둠 속의 동굴과도 같다. 줄곧 어둠 속에서 살았다”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올 때는 친절하게도 그 건너편에서 시각장애인 두 명이 지팡이를 짚고서 걸어가고 있다. 암흑과도 같은 도시생활을 시각장애인의 그것과 비교하며 B스럽다기보다는, 너무나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EBS스러운 몽타주라고나 할까. 또한 서울을 헤매고 다녔다는 말에는 곧장 벌거벗은 채 새벽 명동거리를 질주하는 애자의 싱싱한 뒤태를 보여준다. 정말 충격적인 몽타주가 아닐 수 없다. 앞서 김수용 감독의 < 도시로 간 처녀 >(1981)를 비롯해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81) 등으로 깜찍한 신인의 미모를 뽐냈던 그녀는 <장사의 꿈> 이후 < 금달래 >(1986), < 늑대의 호기심이 비둘기를 훔쳤다 >(1988) 등에 출연했다. '조명 불빛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지고 난 다음부터가 문제다. 촬영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못된 대수를 일봉이 무력으로 제압한 이후, 에로영화 촬영장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두 사람은 떠돌이 신세가 된다. 우연히 만난 약장수 태산거사( 김인문 )과 함께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펠리니의 < 길 >(1954)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애처롭고 정감이 넘친다. 하지만 그들에게 행복은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교통사고로 애자가 유산한 이후 1년 동안 떨어져 지내기로 한 것. 일봉은 남창으로, 애자는 그 문제의 기둥서방을 다시 만난다. 이때부터 영화에서 애자는 사라지고 일봉의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다. 뚜쟁이인 방배동 오여사( 김영애 )의 안내로 산속에서 (둘 만의 암호인) 초록색 물통을 든 여사님( 김애경 )을 만나 격렬한 정사를 나눈 뒤부터 산에서도 하고, 호텔에서도 하고, 기차에서도 하고, 아이를 원하는 여자의 대리부 노릇도 한다. 수많은 여사님들에 둘러싸여 자라피도 마시며 승승장구하지만 이내 정력은 고갈되고 만다. 급기야 그는 함께 샤워를 하며 정사를 나누던 한 여사님으로부터 “이거 병신이잖아. 어쩌다 이따위를 보냈지”라는 씁쓸한 환불요구에 직면하는 신세가 된다. 병원의 의사로부터 “몸도 마음도 황폐해졌어요. 좀 쉬어야 합니다”라는 진단까지 받고 보니, 마치 그 모습이 혹독한 연예계 생활에 지쳐 간경화로 쓰러진 현실의 임성민 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아프다. 말하자면 < 장사의 꿈 >은 고 임성민의 레퀴엠처럼 느껴지는 슬픈 에로영화다. 나이트클럽에서 수많은 남자들의 담배 연기에 파묻혀 나체쇼를 하고 있는 애자와 일봉이 조우하는 마지막 장면 또한 실로 충격적이다. 성인이 되어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그 마지막 장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더랬다. 1980년대 에로영화에 대해 막연한 조소와 냉소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장사의 꿈>은 그야말로 감동의 명편이다. 마지막 장면 임성민 금보라 정진 김영애 감독: 신승수 각본: 신승수 개봉극장: 코리아, 동아 관람인원: 12,601(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