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의 노래
- 감독
- 마츠오카 조지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고바야시 카오루, 유키 사오리, 야스다 나루미, 다나카 테츠시
어쩔 수 없이 고다르를 베끼면서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우리들 사이에 '한국고전영화'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걸까? 『한+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문화예술에서 논하는 고전이란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사상집이나 문예 작품"을 일컫는단다. "모범"이란 표현에 딴지를 걸고 싶어지긴 하나, '세계고전문학'이나 '클래식 음악' 같은 말이 통용되는 바를 떠올려보면 그래도 말뜻에 납득이 가긴 한다. 그런데 '한국고전영화'라? 나로선 이 말을 기어이 꺼내려다가도 결국엔 어색해서 주춤하게 된다. 과연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이란 무얼 지칭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무엇이 고전일 수 있을까. 당신의 생각이 정말 궁금한데, 왜냐하면 나는 이 물음 모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고전기가 있다면 이는 언제부터 언제인가? 달리 말해 한국영화의 뼈대가 세워진 시기는 언제인가? 한반도에 영화 기술이 들어오고 식민지 조선인들이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일까, 아니면 이 시기를 포함해 한반도 영화계의 짧은 해빙기였던 광복 전후일까, 그도 아니면 한국전쟁부터 5.16 쿠데타 직전까지인 이승만 정부 전후일까, 이도 아니면... 확언하기 어렵다. 사실 고전영화라는 말 자체가 실은 '옛날 영화'를 좀 더 고상하게 부르려는 세속적 용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미국이나 일본의 영화사 연구에서 고전기라는 범주가 이런 용법을 넘어 이론 안에서도 ('파벌'에 따라 구분은 상이할지언정) 어느 정도 설정되어있다는 걸 떠올리면, 한국영화의 경우는 역시나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는 식민지나 군사 정권의 경험을 가진 비 서구 국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 아닐까? 하지만 (발리우드 스타일이 일찍이 굳게 자리 잡은) 인도나 (빈곤한 환경으로 인한 문화적 혼종성을 오히려 '내수용'으로 스타일화한) 브라질의 영화사를 떠올리니 금방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요컨대 한국영화사에 있어 "일제강점기"나 "유신 체제 시기" 같은 사회적 구분은 가능하더라도 자체적인 '고전기'에의 설정 및 구분은 임의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어째서? 아마 21세기 전까지 한국영화가 스스로 독자적인 문화로서 성립된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윗세대 영화인들의 문화적 투쟁을 폄하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들 다수의 오만한 행보와 의심스러운 작업에 대해선 깊은 불만이 있어도, 그들의 투쟁의 결과를 향유하며 살아가는 입장인 만큼 투쟁 자체에 대해선 오히려 깊은 존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투쟁이 (사실 현재진행형으로)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역시 한국영화가 독자적인 문화는 아니란 의식을 모두가 갖고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는 1998년 필름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국가가 일제강점기 때의 영화를 단 한 편도 소유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고, 1970년 이후 외국영화 수입쿼터제를 충족하기 위해 수많은 한국영화가 제작되기'만' 했음을 알고 있으며, 제작이고 비평이고 무관하게 1980년대의 '신세대'들이 총체적인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활동을 겨우겨우 이어갔음을 알고 있고, 같은 1980년에 공개되었음에도 (당시 국산영화 최대 흥행작이었던) 〈 미워도 다시 한번 '80 〉 대신 〈 전원일기 〉를 '옛날'의 지표로 흔히 떠올리고 있다. 역사의 연속이나 단절을 논하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해 독자적인 문화로 선 적이 없고, 그러니 (우스꽝스럽게도, 선후배의 엄격한 계열은 있어도) 스타일과 방법론에 있어 표준이나 관습으로 삼을 역사적 대상이 내부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에 고전기는 역시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얼마나 있나? 아마도 이 물음에 당신은 즉각 김기영의 이름을 거론할 것이다. 그래, 확실히 창작자든 관객이든 한국영화와 깊이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 하녀 〉를 비롯한 김기영의 영화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아니, 그 이전에 이 조건 자체를 뒤집어봐야 하지 않을까. 고전이란 이미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후적인 (재)평가 속에서 (위태롭게) 성립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가령 에드거 앨런 포우가 오늘날 같은 문학의 정전에 등재되도록 선제적으로 상징투쟁을 벌인 건 당대의 미국인들이 아니라 샤를 보를레르를 위시한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이었으며, 이 상징투쟁의 영향은 포우가 죽고 한 세기 이후에야 미국에 도달했다. 또 오랫동안 잊혀졌던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바흐 사후 세간에 재발견된 것은 물론 젊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강력한 열정 때문이기도 했으나, 관습을 타파한 새로운 예술적 장을 마련하고자 한 (멘델스존을 포함한) 신세대 음악가들의 전투적인 의식과, 국가와 종교에 대한 세간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자 한 지식인들의 계산적인 의식이 예기치 않게 연합하여 이끌어낸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기영이 1990년대에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의 영화광들에게 공통적인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식? '우리에게도 컬트영화가 필요하다'라는 '국제적'인 의식. 많은 연구자와 비평가들이 합의했듯, 오늘까지 이어지는 김기영의 위상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에 더해, 영화사 연구자 금동현은 「협잡꾼 당신-『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1)」에서 김기영의 1971년 이후 영화들이 대부분 (해외 영화제 실적을 중요시한 문화융성정책에 따라) 시체스 국제영화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음을 지적하며, "해외를 경유하여" "한국 혹은 한국영화라는 구조에 순응/활용하는 김기영의 행위성"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을 내딛으면 우리는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뒤틀린 (...) 한국영화의 부정교합 자체가 도착적인 미학으로 승화된 것"으로서, 곧 가장 한국영화적인 한국영화로서 김기영의 영화들을 재정의하는 영화평론가 유운성의 「이식과 기생 : 봉준호의 < 기생충 >을 계기로 다시 읽는 임화의 영화론」과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김기영의 '귀환'은 역사의 관점에선 필연적인 결과였을까? 확신할 수야 없지만, 90년대 이후의 김기영 수용에 또 다른 (무)의식이 있었으리란 '잠재적인' 가설은 분명 흥미진진하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한국영화가 가진 것은 집단적인 스타일과 방법론이 자의적으로 형성된 고전기가 아니라, 각각의 스타일과 방법론 사이에 일말의 계열을 만든 환경인 게다. 한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김기영 같은 취급을 받은 이는 결국엔 김기영뿐이었다. 물론 이만희와 임권택 역시 한국영화사의 만신전에 올랐다. 하지만 이만희는 2005년 〈 휴일 〉의 발견과 함께 뒤늦게 관객들을 (다시) 자극한 경우였고, 임권택은 이미 영화계 내외에서 한국영화의 아버지상으로 군림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그를 제작자에게나 관객에게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예외로 취급받도록 만들었다. (내친김에 부연하자면, 나는 한국영화의 가장 이질적인 작가는 다름 아닌 임권택이라고 보는 쪽이다) 요컨대 이들에겐 김기영 만큼의 폭넓은 애정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2000년대 들어 대기업 자본의 (재)진입으로 인해 통째로 재편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은 충무로에 기반을 둔 21세기 이전의 영화 혹은 영화인들 대부분을 망각과 은퇴로 몰아넣었고, 한국영화사에는 또 한 번의 극심한 단절이 일어났다. 예컨대 이순재는 알아도 김지미를 아는 한국의 2~30대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한국영화에는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과 대중음악에서도 비슷한 단절이 일어났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쟁점, 그렇다면 추후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터무니없는 도박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곧장 대답을 내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떼보자. 지금 같은 단절의 상황이 연속되는 한은 역시나 어렵지 않을까? 이는 앞서 언급한 '대중적' 단절만 지시하지는 않는다. 옛날 한국영화를 새로운 고전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엔 (결코 많지는 않은) 국내 시네필들의 몫일 터이다. 한데 그들이 영화 제작 환경에 편입되는 것도, 옛날 한국영화를 끈질기게 보러 다니는 것도, 아예 이런저런 극장을 다니며 영화 관람을 지속하는 것도 요원한 게 요즈음의 상황이지 않던가? 한국영화를 이루는 행위자들은 갈수록 서로 간의 마주침과 뒤섞임 없이 분열되기만 하고 있다. 이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온전히 돌리려는 것도, 행위자들이 서로 반드시 마주치고 뒤섞여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상황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국내 시네필들은 (어느 시대의 작품이건 간에) 한국영화에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다. (2010년대 전후로 한국영화사 연구의 헤게모니가 국문학과로 옮겨간 것은 그 결과이자 원인일 테다)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국제적인 것'이 대도시와 대도시 간의 연결로서 블록으로만 환원되는 것과 유사하게, 국내 시네필들은 한국영화와 거의 단절된 채 '국제적인 것'에 스스로의 위치를 잡는다. 그 원인에 대한 규명은 본고에서 책임지고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넘어가야겠지만, 하여튼 옛날 한국영화의 낮은 접근성은 (불균질한 더빙을 비롯한) 형식적 층위의 어색함에서만 기인하지는 않는 것이다.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비평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 역시도 이런 상황의 바깥에 있지는 않아서, 불과 몇 주 전인 5월 7일에 강수연 배우 1주기 추모전의 일환으로 상영된 〈 경마장 가는 길 〉을 (거의 8년 만에 다시) 보고 나서야 나는 앞선 쟁점들을 포함한 '한국(고전)영화'를 문제다운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 '한국'도 '영화'도 '한국영화'도 온전히 믿지 않는 장선우의 태도가 이 영화를 통해 순식간에 전염됐다고나 할까? 그동안 옛날 한국영화들을 찾아보고 그에 관한 연구들을 찾아보았어도, 또 동시대의 믿을 만한 동료들이 한국영화와 씨름한 결과물들에 지지를 보냈어도 나는 결국 '한국(고전)영화'를 개입해야 할 문제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혹은 다소 의무적으로 수행한 제스쳐들을 갖고 스스로가 이미 개입하고 있다 착각했던 건 아닐까. 말하자면 이 글은 그런 늦은 깨달음에 따라 서둘러 쓴 반성문이라 해도 좋다. 이렇게, '한국고전영화'는 몹시 잠정적인 개념으로 남는다. 하면 우리는 이런 잠정성에 대해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하는가? 리액션으로서 큐레이션에 대해선 영화연구자 박진희가 이미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 – 나의 경우」를 통해 솔직하고 재밌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럼 리액션으로서 비평이나 연구는? 실망스럽게도 많은 이들은 두 개의 우회로만을 길로 인식하고 있던 것 같다. 이미 고전으로 꼽힌 작품들만 텍스트로 삼거나, 아니면 사회적 압력에 주목해 한국영화사를 연민해야 할 상처투성이로만 기술하거나. 나는 그 대신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리 만무한) 당장은 이 잠정성을 고스란히 전면화하는 길을 택하고 싶다. 허황된 관념이 된 '한국영화'가 환희에 이른 지 얼마 안 돼 금방 처참히 붕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붕괴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실패와 망각과 단절과 분열로 나타났던) 오랜 기반이었음을 적극적으로 증언해야 하지 않을까? 다만 붕괴가 새로운 사유를 가능케 하리라는 식의 역전적 논리가 아닌, 붕괴 속에서 하여튼 '한국(고전)영화'라는 것이 잠정적으로나마 존재해왔다는 식의 '경험론적' 논리를 갖고서 말이다. 지난날 전복적이라 여겨졌던 형식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게 대안 우파들인 요즈음에 역전적 논리는 부정적인 조건의 부정성을 간과할 위험이 크다. 그러니 (헤이든 화이트를 따라)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기반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한 채 말을 이어가자. 가령, (한국의 모든 문화예술이 그렇지만) 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어떤 기형적인 형체로써 ‘반복’되어왔는가? 금동현과 유운성이 간접적으로 일러주었듯 한국영화에 있어 붕괴와 반복은 한 몸이다. 달리 말해 붕괴의 반복이야말로 한국영화의 조건이요 전통이다. 그렇기에 나는 새로운 것 대신 오래된 것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와 단절된, 하나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오래된 것을. ‘한국영화’와의 대면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 모어 >는 무용수, 드랙퀸 예술가, 뮤지컬 배우,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인 모지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의 제목 ‘모어’는 모지민의 예명으로 ‘more(조금 더)’와 ‘毛漁(털 난 물고기)’를 함의한다. ‘more’는 화려하고 과잉된 드랙퀸 미학을 지시할 수도 있지만, 트랜스젠더인 그를 향한 사회의 잔인한 편견에 의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꿈과 욕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육지에서도 물에서도 이질적인 ‘털 난 물고기’처럼 관습적으로 주어진 자리를 넘어서 그 이상의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선 비규범적 존재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털 난 물고기’에게 ‘털’이 살아가는 데 무슨 소용이냐고 존재 이유를 따져 물으며 괴롭히지만, 모지민은 오히려 그 털의 움직임과 방향, 그리고 길이와 색을 다양하게 만들며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실천해오고 있다. 영화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발레의 길에서 이탈한, 그럼에도 예술가로서 살아남은 모지민의 삶을 예찬한다. 발레 전공으로 예고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발레리노가 아닌 발레리나가 되고 싶던 모지민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그 길에서 이탈한다. 여성성을 버리라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무용계에서 모지민은 예술가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발레리나라는 최선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세상은 그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드랙퀸 공연은 그 대체제였다. 그래서 드랙퀸 공연은 그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그가 발레리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비극, 그럼에도 춤과 공연이라는 예술적이고 신체적인 표현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 환희의 무대, 그리고 클럽에 놀러 온 관중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엔터테이너로서 감정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노고. 그에게 드랙퀸 공연은 복합적인 대상이다. 영화 <모어>는 드랙퀸으로서의 모지민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다. 클럽에서 드랙퀸 공연을 하고, 뮤지컬 오디션을 보고, 애인에 대한 애정과 소소한 갈등을 드러내고, 농촌지역에 사는 부모님을 방문하는 등 모지민의 일상이 스케치 되는 가운데 화려한 쇼가 계속된다. ‘쇼는 계속 된다’는 뮤지컬 장르의 정언명령에 의해서 말이다. 서울과 뉴욕 같은 대도시 한복판에서, 부모님의 살고 계시는 고향의 논밭 사이에서, 아버지가 운전하는 경운기 위에서, 황량한 항구에서, 눈 내리는 산 속에서 그는 화려한 분장과 의상을 더한 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드랙퀸은 기본적으로 과잉의 미학이다. 여성성의 인위적 과장은 기존 사회에서 규범화된 여성성이 원래 얼마나 과장되고 인위적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정해진 자리와 규범을 초과하는 일탈의 쾌락을 공유하고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전시한다. 드랙퀸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무언가를 ‘더(more)’ 덧붙이는 방식으로 모지민을 보여준다. <모어>는 미국의 드랙 리얼리티 경연쇼 <루폴의 드랙 레이스>(2009~현재)나 드랙 문화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포즈>(2018~2021)에 나올 법한 프로페셔널하고 미학적인 드랙 공연을 삽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과장되고 장식적인 아름다운 드랙쇼 만큼이나 집중할 것은 덧붙이기보다는 덜어냄을 통해 만들어내는 공연과 마음들이다. 영화는 자주 삽입되는 야외 공간에서의 드랙쇼 외에 실내의 어두운 무대에서 나체로 춤을 추는 모지민의 공연을 길게 보여준다. 이 공연에서 모지민은 어떤 분장이나 의상도 없이 춤을 춘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모지민이 큰 갈등과 어려움 없이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지냈다고 과거를 기억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어른들은 알 수 없거나 눈치 채도 크게 의미두지 않았던 따돌림과 폭력이 있었다. 나체로 춤을 추는 한 장면에서 모지민의 뒤로 중학교 시절 친구로 은유되는 댄서가 어둠 속에서 등장해 그의 목을 조른다. 그는 강렬한 분장을 하고 있다. 어른들이 아름답게 추억하는 이면에는 어린 모지민의 혼란, 고통, 분노, 좌절이 공존했다. 영화는 그가 감당했어야 할 어두운 이면이 무엇이었는지 깊고 상세하기 묘사하기 보다는 춤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비수술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모지민은 자신의 신체가 표현하는 주체이자 오브제이기도한 예술가로서 자신과 세계와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표현과 장식을 덜어내고 어두운 이면을 보여줄 것을 선택한다. 더함과 덜어냄, 넘침과 모자람, 화려함과 단순함 모두 모지민이기 때문이다. 장난스럽고 인위적이고 과장된 독백의 내레이션과 대화하듯 자연스러운 내레이션이 교차해 나오지만 둘 모두 모지민의 목소리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분명 뮤지컬적인 드랙의 화려한 스펙터클에 매혹되어있고 그것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동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동시에 모지민이라는 예술가가 표현하고 싶은 어둡고 미니멀한 춤과 침잠되어 있던 마음을 표현할 자유로운 무대를 펼쳐주기도 한다. 극단의 표현들은 대립적이지 않고 서로를 밀고 당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하는 스크린과 다 보여줄 수 없는 스크린 밖 현실이 그 경계를 끊임없이 이동시킨다. 감독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모지민은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 끊임없이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멘터리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극영화보다 얇고 투과성도 높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거나, 완성된 다큐멘터리가 단순히 현실을 변화시키는 식의 일방향으로만 힘이 흐르지는 않는다. <모어>는 영화와 현실, 보고 싶은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 보여줄 만한 것과 끝끝내 보여주지 못한 것 사이의 얇은 경계막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파열되고 움직이고 있는 현장을 포착해 낸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156분의 러닝 타임 동안 어둠의 한가운데로 인간을 몰아넣는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 곡성 >(2016)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라스트 신의 페이드아웃으로 종결된다. < 추격자 >(2008)와 < 황해 >(2010)로 이어지는 전작에서와 같이 나홍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괴적이 되어가는 서사를 통해 능숙하게 통제된 폭력 장면들을 단계적으로 제공한다. 기이하게 뒤틀린 내러티브와 감정의 격동을 야기하는 대담한 묘사를 내장한 이 영화는 물과 나무, 약초, 동물, 산으로 둘러싸인 전라남도의 작은 마을 곡성을 미스터리에 휩싸이게 한다. <곡성>의 줄거리는 뇌우, 번개, 안개, 악몽, 좀비, 퇴마사, 교수형에 처해지는 사내 심지어 죽은 사슴의 시체를 먹는 악마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 조형되는 공포의 확장에 의존한다. 주술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고요한 마을에서 끔찍한 죽음이 발생하고 그 뒤를 좇아 기이한 사건들이 공동체를 압박한다. 동네 경찰이자 아버지인 종구(곽도원)가 미스터리를 조사하는 탐정 역할을 맡는데, 이 순박하고 익살스러운 시골 경찰이 광기와 착란의 상태로 변질되는 과정이 서사의 주조를 이룬다. 이 병증을 퍼뜨리고 있는 용의자는 깊은 산중에 사는 과묵한 일본인(쿠니무라 준)이다. 외지인으로 불리는 그가 불길한 기운을 몰고 오면서 종구의 딸 효진(김환희)에게도 발진이 돋고 험악한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반쯤 벌린 종구는 아버지의 본능이 발동하면서 공격적이고 위협적으로 변한다. 어린 소녀의 천진함에 반해 선과 악의 공존은 인간의 본성이며 감정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비극을 더욱 강조할 수 있는 소재이다. < 엑소시스트 >(1973)와 < 캐리 >(1976), < 유전 >(2018) 같은 전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원을 추정하기 힘든 악령의 공세는 어린 소녀를 향할 때 더욱 끔찍하게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의 소문, 속담, 신념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공포와 불편함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무기력한 느낌을 전하는, 반복되는 롱 쇼트가 암시하듯이 악령은 공동체 곳곳에 그윽하게 도사리고 있다. 나홍진의 전작들이 도시 환경의 조건을 활용한 착란적인 편집을 구사한 것에 비해, 원시적인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 <곡성>은 쇼트의 지속시간을 늘림(퇴마의식을 묘사하는 신들)으로써 공포의 시간을 부채질한다. 공포가 퍼지고, 스며들면서 도입부에 존재했던 어두운 유머를 빠르게 쓸어버리면서 나홍진은 관객을 마지막 동굴의 공포로 인도하기 위해 그럴듯한 개연성을 만든다. 믿음에 대한 성찰로 장식된 이 무자비한 어둠의 움직임은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영화적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나홍진은 그가 다루는 영화의 언어 규범을 숙달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면서 관객을 원하는 곳으로 안내하거나 이야기를 조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돌리는 데 있어 능숙함을 보여준다. 마을을 휩쓴 테러의 원인이 영원한 수수께끼로 봉인되기 때문에 종구의 탐색과 구조 노력이 무너지고 마을 사람들은 광기와 영적 위기의 가장자리로 내몰린다. 관객은 종구와 마찬가지로 길을 잃고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딜레마를 감수해야만 한다. 당황한 인물들 역시 세상이 점진적으로 사악해져가는 이유에 대해 해명할 길이 없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나홍진의 영화는 냉정하게 답한다. 이유는 없고, 인간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먹잇감이고, 악은 상황의 문제일 뿐이다. 등장인물들에게 내리는 폭우도 공포와 유혈 사태를 씻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무력함을 동반한 채 악마가 숨어 있는 지하 통로를 배경으로 하는 피날레는 타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곡성>이 던지는 질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영적인 차원에 놓여 있다. 악마의 확연한 존재 앞에서 보이지 않는 신을 믿을 수 있는가? 신성에 대한 의문과 확신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 영화는 따라서 보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구축한다.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한 스토리 안에서 나홍진은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사실과 증거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애쓴다. 외지인의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은 이와 관련된다. 일본인으로 설정된 외지인의 정신은 너무 괴물적이어서 그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국가 혹은 민족적 경계를 흐리는 이 인물은, 순박한 무지렁이들의 세계를 교란한다. 일본인이 공동체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관념은 국가 정체성의 형성과정에서 축적된 뿌리 깊은 위기의식을 소환한다. 컨텍스트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만연한 악의 본성은 그것이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통제불가능한 것이다. 일종의 보안관인 종구는 가족, 공동체, 민족의 수호자로서 정당한 이유가 없이 횡행하는 악마의 공격에 맞서야 한다. 심리 지리학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것은 외지인이 기거하는 어둡고 허름한 집을 묘사하는 두 개의 신이다. 종구와 그의 동료 경찰 성복(손강국)이 처음 외지인의 집을 탐문할 때 카메라는 안에서 방으로 향하는 종구를 찍고 있다. 조류도감과 음화 등이 발견되는 이 날의 탐사에서 종구는 찢어진 창호지에 난 구멍 사이로 불이 켜진 신당을 훔쳐보다 돌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진입한다. 종구의 액션이 진행되는 동안 성복의 수색이 교차편집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방 안의 가려진 장소를 들춰내기 위해 문을 여는 성복의 액션과 신당으로 들어서는 종구의 액션이 평행하게 이어지는 상황에서 두 인물은 각자의 시점으로 밀실의 풍경을 본다. 기괴한 형상의 조형물과 무당 의식용 밧줄, 향로, 흑백 사진이 붙은 신당과 죽음의 이미지가 덕지덕지 붙은 사진들의 몽타주를 카메라가 훑는 동안 카톨릭 부제 양이삼(김도윤)의 발을 물고 짖어대는 맹견의 흉포함이 또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며 나란히 놓인다. 개에 물려 바지가 뜯겨나가는 소동은 마을에서 벌어진 죽음의 이미지를 촬영한 사진들의 몽타주와 편집된다. 삼분할 액션을 나열한 이미지들의 조합은 연쇄적인 죽음의 모티프를 환기하면서 신성(神聖)의 침탈과 그 대가를 형상화한다. 외지인의 집에 대한 두 번째 방문은 동일한 궤적으로 진행되지만 반대의 방향에서 조망된다. 종구와 양이삼, 두 사람만 등장하는 이 신에서 카메라는 종구의 위치에서 방을 찍는다. 그가 처음 방으로 들어갔을 때 보이는 것은 낡은 상 위에 삶은 닭발이다. 극단적으로 낮아진 위치에서 찍은 로우 앵글의 측면 쇼트는 벗겨진 벽지와 서까래를 배경으로 프레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종구의 위태로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방 안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찢어진 신문지가 너덜너덜 붙은 벽을 배경으로 시효를 다한 향로와 초들이 놓인 신당이 드러난다. 카메라는 마침내 종구가 보는 것을 드러내는데 완전히 꺼진 제단은 그 위에 소용돌이치는 증오와 처벌의 앞날을 예고한다. 첫 번째 방문에서 이삼의 바지를 문 맹견이 종구를 공격하기 위해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응징이 시작된다. 촬영감독 홍경표는 이때 혼돈의 우주 속 인물의 고립을 강조하고 사건의 임의성을 강조하는 수평적인 와이드 쇼트를 별안간 보여준다. 이성을 상실한 종구가 귀신들린 집 안에서 맹견과 사투를 벌일 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외지인의 모습은 바스트 쇼트에서 익스트림 롱 쇼트로 후퇴하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거리로 퇴각한 카메라는 익명의 눈을 암시하듯 느리게 앞으로 이동한다. 이 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두 장소 간의 교차편집은 신체의 정신적 혼란과 그 병이 즉각적인 공간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한다. 외지인의 방은 심리 지리학의 시각적 구현이다. 벗겨진 벽지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흉가가 숨겨진 정신병의 공간화라면 곡성은 그 증상이 발현되는 곳이다. 건축학적으로 이 집은 바깥에서는 그리 눈에 띄는 공간이 아니다. 친숙하고 무해해 보이는 집은 표면은 깊고 불길한 내부 방을 숨기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곡성>의 미장센은 경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여러 겹의 레이어와 비밀을 숨긴 공간을 설정한다. 나홍진에게 이런 설정은 익숙한 것이다. 데뷔작 <추격자>에서 그는 연쇄살인마의 음울한 내면을 시각화한 집을 <곡성>의 그것과 동일한 형상으로 구조화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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