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주로
- 감독
- 크리스 마르케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쟝 네그로니, 에티엔 베커, 데이보스 하니치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군사 기록 영상을 분석한다는 것 한국영상자료원에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문서고(National Archives) 2관에서 2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 관련 기록영상 223편 280릴이 있다. 그 중 현재 < 미국 NA II 소장 노획영상 컬렉션 >으로 공개 중인 37편을 제외한 나머지 영상들은 대부분 미군 내 각종 촬영조직들이 6.25 전쟁기와 전후 재건기에 한국에서 촬영한 기록들이다. 올해는 4차에 걸쳐 이 컬렉션들을 공개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할 계획이다. 그 첫 단계로 얼마 전에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1) >을 통해 61편의 VOD와 자료집이 공개됐다. 미군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때부터 이미 통신부대에 사진 촬영 임무가 지정되기 시작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카메라 친화적인 조직이었다. *주1 미군의 전투 카메라 부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 정교하게 조직화됐고, 체계적인 매뉴얼과 프로세스를 가지게 됐다. 모든 촬영은 전투 및 행사 기록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작전 분석, 지도 제작, 군 내 교육, 대외 선전, 다큐멘터리 제작 등 다방면에 활용할 것을 의도한 크고 작은 프로젝트 체제로 진행됐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컬렉션은 판문점 정전회담과 정전협정, 전쟁포로 수용소 및 상병포로(傷病捕虜) 교환, 부평 제24군수지원사령부(ASCOM City) 등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당혹스럽고 불가사의한 전쟁 중 하나였던 6.25 전쟁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이나 주제를 담백하지만 생생하게 담고 있다. 하지만 군 기록 영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기록영상을 분석할 때보다 더 많은 지식과 공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우선 군 조직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다. 군 편제, 복잡다단한 부대 명칭의 역사, 군복과 계급의 군종별 차이, 군 장비와 무기의 식별과 제원 정보 등을 밀리터리 마니아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접근이 가능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영상에는 음향이 없어서 상황 파악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대부분 야외에서 촬영됐다는 것 자체가 큰 장벽이다. 벌판과 숲과 능선과 망망대해와 구름을 보고 그 곳이 어디인지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판문점 정전회담 영상만 해도 늘 같은 방법으로 도착하고 떠나는 대표단들과 비슷하게 생긴 천막들을 보고 이날의 회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는 것은 거의 운에 좌우된다. 등장하는 대표단의 면면을 보고 대략 본회의인지 분과회의인지 구분하는 것으로 출발해, 다행히도 슬레이트 장면이 있고 날짜 정보가 있다면 회담록 자료와 대조해서 범위를 좁히는 정도가 최선이다. 원 소장처인 National Archives의 카탈로그 정보가 제법 충실한 경우에도 안심할 수 없다. 이따금 명백히 틀린 정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주2 조종사의 전공(戰功) 증빙, Movie of Bullets *주3 가장 곤란한 부류는 건 카메라(Gun Camera) 영상이다. 이번 컬렉션에는 건 카메라 푸티지가 4점 있는데, 대체로 이런 식이다. 바다 수평선과 하늘과 구름 장면 사이로 작은 점처럼 등장하는 MIG-15기가 있다. 짧은 빔이나 점 같은 모양으로 순간적으로 보였다 사라지는 기관총 발사 장면에 이어 MIG-15기가 연기를 뿜으며 떨어지거나 도주한다. 여긴 어디이며, 어떤 작전 과정에서 이뤄진 교전인가? 이 MIG-15기는 격추(shot down)됐는가, 피해(damaged)만 입고 생존 귀환했는가? 미군 제트기가 저고도로 기동하며 지상에 기총소사(strafing)를 가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작전에 의해 어떤 지역의 무슨 목표물을 폭격하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이런 영상은 왜 촬영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모두를 알아내는 것은 힘들다. 최선을 다해 식별할 뿐이다. Bell & Howell의 Gun Camera(Type M-4A, 미 해군 납품 모델). (출처: aeroantique.com ) 건 카메라는 육군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말 그대로 총에 달린 카메라(였)다. 기관총을 발사하여 목표물에 적중했는지 여부를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의 방향을 조준선과 일치하도록 달았으므로 정확히는 GSAP(Gun Sight Aiming Point) 카메라라고 한다. 마침 항모항공단(CVG)을 운용하기 시작했던 미 해군은 이에 착안하여, 지형도 작성을 위해 사용하던 항공촬영 카메라(Aerial Camera)처럼 공중교전이나 지상폭격 장면을 기록할 수 있는 GSAP 카메라를 만들고자 했고, Fairchild Aviation사가 이 요구조건에 맞는 카메라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주4 이후 여러 가지 모델이 출시됐지만, 공통적으로 일반 영화용 16mm 필름을 최대 50피트까지 담은 카트리지 형태의 매거진을 소형 카메라 본체에 장착하는 구조였다. 촬영 속도는 초당 16, 32, 64프레임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이는 기관총의 연사속도를 고려하여 고속촬영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고고도 저온 환경에서의 촬영이 가능하도록 온도조절기와 히터가 달렸다. 카메라는 제트기 기종에 따라 날개, 동체 하부, 조종석(Cockpit), 기수(Nose) 등에 장착했다. 제트기 조종간의 발사 스위치와 연동시켜서, 스위치를 누르면 촬영이 시작되고, 더 누르면 기관총이 발사되며, 스위치를 해제해도 1~2초 더 촬영이 되도록 고안됐다. 사격 직후의 목표물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F9F-2 Panther의 경우, 우측 날개 공기 인입구 밑에 장착했다. *주5 어느 참전용사의 수기 *주6 에 따르면 GSAP 푸티지를 촬영하는 목적은 작전의 성공 여부와 조종사의 전공(戰功)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격 작전에 투입된 전투비행대대가 돌아오면 건 카메라의 필름 매거진을 일본으로 보내 현상을 맡긴다. 며칠 후 프린트 필름이 돌아오면 조종사들과 장교들이 브리핑룸에 모여 차례로 필름을 영사한다. 영사가 끝나고 불을 켜면 조종사마다 본인이 주장하는 작전 수행 결과가 필름 영상의 내용과 맞는지 판정한다. 이 글에서는 적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하던 한 조종사가, 경황이 없는 중에 아군기를 격추시키는 장면이 찍힌 필름을 보고 고개를 떨궜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제 건 카메라 자체를 둘러싼 약간의 궁금증은 풀렸다. 다시 컬렉션의 건 카메라 푸티지로 돌아가서 분석을 시도해 보겠다. 영상은 컬렉션 페이지 에서 VOD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푸티지: GUN CAMERA FOOTAGE (Korea) (local ID: 428-NPC-13233) *주7 1. 이 영상에는 슬레이트가 딱 한 번 등장한다. 이외의 단서는 없다. 슬레이트 정보는 “Lt. Davidson, VF-31, 50.” 이다. 2. 건 카메라의 촬영자는 언제나 조종사 자신이므로, 이 푸티지는 VF-31(제31전투비행대대) 소속의 Davidson 대위가 수행한 어떤 작전의 기록영상이다. ‘50’의 의미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필름 매거진에 최장 길이 50피트를 담고 출격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주8 3. VF-31은 1948년부터 F9F-2 Panther로 구성된 최초의 제트기 전투비행대대로 출발했고, 1952년부터는 F2H Banshee 기종으로 교체됐다. *주9 슬레이트 다음 컷의 7프레임 동안(51초 부근) 항모 활주로 위에서 정비 중인 제트기의 뒷모습이 나오는데, 꼬리날개의 높이로 봤을 때 F9F-2일 가능성이 높다. 즉, 촬영시기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2년 중 어느 시점, F2H로 개편되기 전으로 좁혀진다. 428-NPC-13233 (00:00:51:02) (좌) F9F-2 Panther / (우) F2H-2 Banshee 4. VF-31은 CVG-3(제3항모항공단)에 편성되어 1950년 9월 6일부터 1951년 2월 3일까지 미 항공모함 USS Leyte(레이테, 항모지정코드는 CV-32 *주10 )에 소속됐다.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활동 기록이 없고, 다시 항모항공단으로 배속되어 등장하는 시기는 1972년이므로 이 영상과 무관하다. *주11 5. 영상에는 기관총에 맞은 MIG-15기가 연기를 뿜으며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USS Leyte(CV-32)의 작전 기록 및 다른 출처의 ‘1950년 이후 해군과 해병대의 적기 격추 기록’을 보면, 1950년 11월 18일 에 VF-31의 베버 소위가 압록강 철교 폭격 작전 중 MIG-15를 격추시켰다. 이 목록에 포함돼 있다는 것은 미군과 소련군 양측에서 격추를 인정했다는 말이다. CV-32의 항모항공단 CVG-3은 이후 12월 26일까지 주로 장진호 전투의 항공근접지원(CAS)과 흥남부두철수작전 지원 임무를 수행한 후 바로 일본 사세보로 간다. 이듬해 1월 7일에 한국 동해상으로 복귀하지만 원주 지역에 잠시 투입됐다가 1월 19일에 미국으로 귀환한다. 따라서 1950년 11월 18일의 주목할 만한 작전 이후에는 영상과 크게 관련이 있을 만한 활동은 없었다. *주12 428-NPC-13233 (00:01:56:11), 피격당해 연기를 뿜으며 퇴각하는 MIG-15 6. Davidson 대위의 건 카메라 푸티지도 11월 18일에 촬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해군과 항모 관련 문헌들을 종합한 미 해군 포럼 사이트의 한 아티클 *주13 에 따르면 이날 VF-31의 F9F-2 2개 편대가 공중전투초계(TARCAP, 공대지폭격기의 엄호 임무)를 위해 출격했고 제2편대장이 Davidson이었다. 그는 만주로부터 공격해 들어온 MIG-15의 무리 중 1기에 손상을 입혔다. CV-32의 활동 보고서(Action Report) *주14 와 대조해 보면, MIG-15 1기가 (Weber에 의해) 격추됐고 1기가 (Davidson에 의해) 타격을 입었음이 명확해진다. U.S.S. Leyte(CV-32)의 활동보고서 중: 압록강 철교 상공 교전 보고 내용 7. National Archives 카탈로그는 이 영상이 ‘ 1950년 12월 8일 ’에 촬영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CV-32의 작전 기록 *주15 에 따르면 이 날은 작전을 쉬고 연료를 보충한 날이었으므로 잘못된 정보이다. 그래서 영상을 중심으로 다른 자료들을 찾아 대조하다가 또 다른 단서를 얻었다. National Archives의 사진 컬렉션 중 2장이 이 영상의 장면과 일치했다. 다만, 이 사진과 관련된 기술(description)에는 지명 정보는 없고 날짜만 ‘ 1950년 11월 23일(Photograph is dated 23 November 1950) ’로 적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도 CV-32가 출격을 쉬고 연료와 탄약을 보충한 날이었다. *주16 이 경우는 현상이 끝난 필름이 도착한 날 또는 카탈로거가 사진 자료를 정리한 날 기준으로 기재했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영상 428-NPC-13233 (00:01:34:03) 사진 80-G-424090 (원문 열람: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영상 428-NPC-13233 (00:00:45:07) 사진 80-G-424091 (원문 열람: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결론. 이 영상은 미 해군 제31전투비행대대 소속으로서 USS Leyte의 제3항모항공단에 배속됐던 Davidson 대위가 1950년 11월 18일 압록강 철교 폭격 작전에 공중전투초계 임무를 띠고 F9F-2 제2편대를 이끌던 중, 만주 쪽에서 공격해 온 MIG-15와 교전하고 그중 1기에 타격을 입히는 순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지금까지의 수집된 모든 단서를 충족하는 유일한 출격 기록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이 영상에는 ‘Davidson’의 슬레이트 전과 후에 각각 MIG-15기가 피격되는 장면이 하나씩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는 Weber 소위의 격추 장면일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푸티지: CARRIER AIR STRIKES (Korea) (local ID: 428-NPC-20247) 앞의 영상은 운이 좋았다. 이번에는 보다 일반적인 경우이다. 우선, 7분 14초 지점에 전투기가 항모를 이륙하는 장면에서 함상 활주로 바닥에 “37”이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주17 이 숫자는 미 항공모함 프린스턴(USS Princeton)의 항모지정코드였던 ‘CV-37’을 의미한다. 프린스턴 호는 코드가 몇 차례 바뀌었고 바뀐 일자도 기록으로 남아 있으므로 촬영시기를 대략이나마 판정하는 데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일단은 이 단서를 기억해 두자. *주18 428-NPC-20247 (00:07:34:11) 하지만 이 외에는 슬레이트도 없고 지역을 알아볼 만한 장면도 없으니, National Archives 카탈로그의 정보 로부터 출발해 보겠다. 경기천년바탕체 R (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여기서 ‘Kyosen’, ‘Pukchong’ 등의 지명은 미군이 사용하던 표기인데, 현재의 지도와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지도를 비교하여 원 지명을 찾아 한글로 바꿔 놓은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은 한반도의 작전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사용하던 지도를 기반으로 개량해 나갔으며, 극동사령부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은 구분되지 않은 하나의 작전 영역으로 취급되기도 했으므로 *주20 자연히 일본어 발음의 지명이 지도에 섞여 들어갔다. 거기에, 미국인에게 들리는 발음대로 표기한 지명도 상당 부분 있었으니 적어도 1950년 초에 미국 육군지도국(Army Map Service, AMS)이 제작한 한반도 작전 지도와 이를 사용했던 미 해군들 사이에서 통용됐던 지명은 종종 우리가 아는 것과 달랐다. 다음의 지도 발췌본을 보면 ‘Chosin Reservoir’가 ‘장진호’로, ‘Fusen Reservoir’가 ‘부전호’로 수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10~12월, 미 해병대 1사단 작전지역 지도(부분확대) *주21 AMS L552 NK52-10 (Edition 4) 중 부분확대 이 정도의 정보가 주어졌다고 해도, 장소 식별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영상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고원, 부전, 회령, 북청인지 알 길이 없다. 구글어스에서 동해안을 따라 샅샅이 훑어봤지만 유일하게 고원 다리 폭파 지역만 찾을 수 있었다. 일치하는 정보가 있으니 National Archives의 장면 설명이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음을 확인하는 성과는 얻었다. 다만, 이로써 (a) 부전 수력발전소 폭격 시퀀스와 (b) 고원 다리 폭격 시퀀스 순서가 뒤집힌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점은 있다. 어쨌든 장소 식별은 더 이상의 진전이 있을 것 같지 않다. Google Earth: 현재 고원군 다리 지점 (39°26'56"N 127°14'52"E) 영상 428-NPC-20247 (00:04:59:05), 폭격으로 검은 연기가 솟고 있는 고원군 다리 장면 다음으로, CV-37의 활동보고서에 따르면 위 National Archives의 정보 (g)항의 J. Sweeny 중령의 소속은 VF-192가 아니라 VF-191(제191전투비행대대)이 맞다. 기록에 따르면 위 정보에 등장하는 VA-191, VF-192, VF-195는 다른 비행대대들과 함께 제19항모항공대(CVG-19)에 소속됐다. CVG-19가 ‘CV-37’ 상태의 USS Princeton에 배속되어 있던 시기를 헤아려보면 영상의 촬영 시기를 좁힐 수 있다. 그런데, CVG-19와 USS Princeton의 관계는 조금 복잡하고 관련 기록 *주22 이 명확하지 않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다음과 같이 개조식으로 정리해 보겠다. ♦ 1950년 11월 9일 : USS Princeton이 ‘CV-37’로 지정받고 CVG-19와 함께 하기 시작 ♦ 1951년 5월 29일 : CVG-19가 USS Princeton을 떠나 일본 요코즈카 기지로 이동 ♦ 1951년 5월 31일 ~ 8월 29일 : USS Princeton(CV-37)이 새 항모항공단 CVG-19X를 받아 임무 수행 ♦ 1951년 8월 29일 : USS Princeton(CV-37)과 CVG-19X 임무 종료 ♦ 1952년 3월 21일 ~ 11월 3일 : USS Princeton(CV-37)이 CVG-19와 다시 임무를 시작. 10월 1일부터 CVA-37로 지정코드가 변경됨 마지막이 석연치 않은데, 이 기간에 대한 활동보고서 *주23 에는 지정코드가 변경됐다는 언급이 없고, 그 다음 회차에 제출된 보고서 *주24 에는 발신자가 CVA-37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0월 1일부터 11월 3일까지 USS Princeton의 코드가 실제로 CVA-37로 바뀌었던 것은 맞고 CVG-19도 이와 무관하게 계속 임무를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결국 CVG-19 항모항공대의 VA-195, VF-192, VF-191 비행대대 *주25 가 “CV-37” 또는 “CVA-37”에 배속되어 출격할 수 있었던 기간은 1950년 11월 9일부터 1951년 5월 29일, 그리고 1952년 3월 21일부터 11월 3일까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전투기의 출격과 건 카메라 촬영은 이 기간 중 언젠가에 발생했다. 장소에 대한 단서가 명확하지 않아 신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National Archives가 제시하는 ‘1952년 9월’이라는 촬영 시기는 이 추론 범위 안에 들어온다. 두 번째 푸티지를 둘러싼 맥락 추정 : 공중작전의 변화 양상 추정 범위를 좁히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국내외에 아카이빙되고 있는 항공사진을 모두 모아 영상의 각 시퀀스와 일일이 대조할 게 아니라면 이 정도가 최선이다. CV-37의 활동보고서를 전수조사하는 방법도 그다지 효과가 없다. 6.25 전쟁기의 미군의 공중 폭격은 늘 있었기 때문에 시기를 특정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6.25 전쟁기의 해상과 공중은 미국 제7함대의 기동전투단 ‘Task Force 77’에 의해 완벽히 장악됐다. 소련이 ‘비공식 참전’이어야 했던 정세적 상황과 ‘가용 비행기지의 부족’으로 당대 가장 진보한 스펙의 MIG-15을 가지고도 대체로 활동영역이 압록강 이남의 평안도 영역, 소위 ‘미그 회랑(MiG Alley)’ *주26 에 집중됐던 것에 반해, 미국은 Task Force 77의 작전 통제에 따라 미국 항공모함이 동서해안을 봉쇄하고 여기서 항모전투단들이 자유롭게 이륙하여 해안과 내륙을 지배했다. “MIG Alley” vs. Task Force 77 *주27 이 시기 Task Force 77의 전략폭격 방향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적의 포대, 전차 등 원거리 무기체계를 사전에 무력화하고 아군 진로상의 위험요소를 해제하여 지상 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근접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으로서, 연합군은 CAS에 의해 전쟁기 내내 우위에 서서 전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 CAS는 육군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공군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은 ‘차단(Interdiction) 작전’이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병력 이동 및 보급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차단하여 전력을 약화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 거점의 철로, 트럭, 보급소는 수시로 파괴됐지만 빠른 시일 내에 복구됐다. *주28 따라서 차단 작전은 ‘대규모 공세의 지속기간을 줄인다’는 정도의 목적으로 끝없이 계속되어야 했다. 차단(Interdiction) 작전 목표: 북한 동해 연안 주요 수송 거점들 *주29 마지막으로는, 주요 수력발전시설을 집중 폭격하여 북한군의 피해복구 역량을 원천적으로 저지하자는 것이었다. 근접항공지원과 차단 작전이 전쟁기 내내 지속됐던 반면, 이 마지막 안은 파괴 자체의 어려움, 막대한 전후 복구 비용, 중국 측 전력수급과의 관련성 등 여러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2년 5월에 와서 이 작전이 승인된 것은, 전쟁이 길어지면서 다른 작전의 효율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군의 피로감이 누적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1년 가까이 지지부진하게 끌어오고 있던 정전회담에서 더 나은 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한 무력행사, 즉 공중압박작전(Air Pressure Operation)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6월 23일과 24일에 수풍댐 등 북한 주요 수력발전소에 대한 집중 공격이 실행됐으며, 7월 10일에는 극동공군의 작전 기조가 그간의 ‘지연, 방해’에서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파괴’로 바뀌었다. *주30 북한지역 수력발전소 공중타격 대상 분포 (원 지도 중 일부) *주31 두 번째 푸티지: 촬영시기 2차 추정 이런 맥락에서 프린스턴함(CV-37)과 제19항모항공대도 1952년 6월을 기점으로 폭격의 규모와 빈도가 달라지는데, 이 시기는 영상의 추정 기간 중 후반기에 해당한다. 아울러 National Archives가 언급하는 수력발전소 공격 에 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단 추정 시기 중 전반기, 즉 1950년 11월에서 1951년 상반기는 제외하고 후반기 내에서 일정을 좁혀 보기로 하자. 먼저, 1952년 6월 4일부터 21일까지는 안변, 원산, 함흥, 길주, 청진까지 이르는 북한 동해안 지역의 주요 거점을 순회하며 건물, 철로, 수송차량, 수력발전소 등을 집중 폭격했다. 이 시기의 활동보고서에는 작전 지역을 ‘원산에서 청진까지’, ‘함흥에서 안변까지’ 등으로 넓게 뭉뚱그려 기재하고 있다. 또한 이 일대는 ‘차단 작전’에 의해 전에도 간헐적으로 공격해 왔던 곳이다. 다만 특별히 이 기간 동안은 2~3일 폭격하고 1일 정비하는 3~4일의 일정을 한 주기로 하여 쉼 없이 반복했으니, 폭격의 집중도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들은 이어 1952년 6월 23일 오후 4시경, 압록강 수풍댐 폭격에 참가하는 한편 같은 시각에 부전 제3수력발전소를 동시 타격했으며, 24일에는 오전 9시 30분과 오후 4시 30분 2회에 걸쳐 부전 제3수력발전소와 풍산 제1~3수력발전소를 공격했다. *주32 25일에 ‘원산에서 안변까지’ 공격한 것까지 하여 CV-37의 6월 대폭격 임무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영상은 6월의 장면일 가능성이 높을까? 과연 활동보고서만 놓고 보면 이후에 발전소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다시 차단 작전에 주력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수력발전소에 대한 집중 공격은 이듬해 봄까지도 계속되었다. *주33 무엇보다, 6월까지의 모든 활동보고에서 아직 ‘회령’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았다. CV-37의 활동보고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회령’이 언급되는 부분은 ‘ 9월 13일 ’의 기록이다. 이날 ‘회령의 운수시설, 저장소, 병영을 폭격했다’는 기록은 National Archives의 정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정리하면, 6월 기록에는 회령에 대한 언급이 없고, 9월 기록에는 수력발전소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렇더라도 활동보고서의 기술 상세화 수준이 때마다 달랐던 것을 감안하면, 6월에 실제로 회령 공격이 있었을 수도 있고, 9월에도 부전 수력발전소의 재공격이 있었을 수 있다. 다만 6월 작전의 규모와 중요성, 이에 따른 당시 보고서의 상세한 내용을 고려했을 때 이때 회령 공격이 있었는데 누락됐을 가능성은 배제해도 될 것이다. 이에 따라 9월 가설이 힘을 얻는다. 또한 건 카메라 푸티지는 짧게는 2~3일의 작전 주기 단위로, 길게는 통상 1개월 안팎이었던 TF77의 항공모함 투입 주기, 즉 하나의 활동보고서가 다루는 기간 *주34 내에서 하나의 필름 릴에 묶여 브리핑실에서 영사됐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회령 공격이 있었던 9월 13일을 중심으로 앞뒤 며칠을 포함한 기간의 작전 상황이 영상에 담겼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후자라면, 회령 폭격을 언급한 보고서가 포괄하는 기간인 1952년 8월 20일부터 9월 17일까지 를 촬영 시기로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이상의 추정은 회령 공격 장면이 있다는 National Archives의 정보가 맞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전쟁기록영상: 불편한 사료의 딜레마 기록영상에 찍힌 모든 것을 식별하고 이로부터 시기와 맥락을 정리하는 일은 이후 진행될 모든 분야의 연구를 위해 초석을 다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유한한 인간이 다른 시공간을 넘나들며 엿보는 즐거운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쟁기록영상은 얘기가 다르다. 여기에는 실제 일어났던 인명살상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희생을 각오하고 전쟁에 동의했을 리 없는 민간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CV-37의 활동보고서에는 “1:50,000 축척의 AMS L751 지도를 참고하여 정확한 목표지정(pin-pointing target)이 가능했다”라는 등 작전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문구가 수차례 들어가 있다. 하지만 1950년대 초의 공대지 폭격은 기동 중에 기총소사와 낙하 또는 비유도탄을 발사하는 방식이었으므로, 북한군이 고의적으로 민간 거주지 인근에 기지를 구축했을 경우에 타겟만 선별 폭격한다는 것은 당시의 정확도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선악을 구분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전쟁에는 불가항력이 내포되어 있고, 선악을 명확히 나눌 수 없는 총체적인 혼란이 수반된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는 침략을 막아내었다. 그렇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전쟁기록영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정한 기록일지라도 사실관계를 캐내어 정리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전쟁은 의외로 다른 모든 분야의 역사와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받는 불편한 사건이고, 자료를 쥐고 있는 자는 그 첫 열쇠를 진열해야 하는 책무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주1. “ Before APC ,” Army Pictorial Center . 주2. 이해한다. 기록영상의 식별과 카탈로깅은 100% 정확하기 어려우며, 새로운 정보가 발굴되면 계속 개선해 나가야 한다. 실제로 National Archives의 카탈로그 정보도 계속 수정되고 있다. 주3. Bailey, R. H. “Movies of Bullets,” American Cinematographer (April 1944): 114.; Bill Todd, “The Korea Files 6: The Gun Camera.” Disciples of Flight . 주4. 이후에는 Kodak이나 Bell & Howell사도 협력 또는 단독 생산의 방식으로 출시했다. 주5. U.S. Navy, Pilot’s Handbook: Grumman F9F-2 Panther (ca. 1952). Public domain. (WorthPoint.com에 게재된 스캔 이미지 중 발췌) 주6. Bill Todd, 앞의 글. 주7. ‘local ID’는 원 소장처인 National Archives가 부여한 자료 식별 번호 중 하나로서, 문서군(Record Group)과 시리즈 정보를 직관적으로 담고 있어서 유사한 제목의 푸티지들을 서로 구분하기 용이하다. 주8.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건 카메라 장비는 게이지상의 수치가 매거진의 생필름 길이에 맞도록 조정해 주는 부분이 있었다. 주9. “ VF-31 (VFA-31) the Tomcatters ,” Military Aircraft Historian. 주10. Hull Classification Number, 또는 Hull Designation Number를 ‘항모지정코드’로 번역한 것이다. 주11. Grossnick, Roy A, William J Armstrong, and Naval Historical Center (U.S.). United States Naval Aviation, 1910-1995 . Fourth ed. Washington, D.C.: Naval Historical Center, Dept. of the Navy, 1997., pp. 700, 714. 주12. “ Leyte III (CV-32) 1945-1969, ”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Appendix 33, p. 767. 주13. Tillman, B. (2021, August). “ Naval aviators vs. the MiGhty MiG-15, ” Naval History Magazine , U.S. Naval Institute. 주14. Commanding Officer, U.S.S. LEYTE(CV-32), Narrative Report of Action for the period 5 November 1950 through 30 November 1950 . 주15. Commanding Officer, U.S.S. LEYTE(CV-32), Narrative Report of Action for the period 1 December 1950 through 26 December 1950 . 주16. 주11의 문헌. 주17. 이 장면은 특이하게도 카메라가 전투기 진행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주18.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 425. 주19. 기총소사(strafing)란, 전투기가 이동하면서 지상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시기의 전투기들은 보통 20mm 기관총을 장착했다. 주20. 김경록(2021). 「6・25전쟁과 미 공군의 항공지도 제작과 활용」, 『한일관계사연구』, 74, pp. 433, 475-515. 주21. Montross, L., & Canzona, N. A. (1957).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 III.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Historical Branch, G-3 Division, Headquarters, U.S. Marine Corps. p. 12. 주22.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p. 700-701. 주23. Commanding Officer, U.S.S. PRINCETON (CV37), Action Report for period 28 September 1952 through 18 October 1952 . 주24. Commanding Officer, U.S.S. PRINCETON (CVA-37), Action Report for the period 8 March 1953 through 3 April 1953 . 주25. VA-195는 AD-4 Skyraider, VA-192는 F4U-4 Corsair, VA-191는 F9F-2 Panther 제트기로 구성됐다. 주26. ‘Alley’는 골목, 회랑 등 좁고 긴 형태의 길을 의미하므로 MIG-15의 제한된 영향력에 대한 미군 측의 멸칭일 수도 있겠다. 주27. (왼쪽) Robert F. Futrell,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New York: Duell, Sloan and Pearce, 1961, rev. ed. Washington, D.C.: Office of Air Force History, 1983), p. 292; (오른쪽) James A. Field Jr.,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2), p. 317. 주28. William T. Y'Blood, “ The Korean Air War ”, Air Force History and Museum Program , Seventh Air Force . 주29. 원 지도에 일부 지점 표시. U.S. Navy Department, Navy Interdiction Korea, Volume II (Washington, D.C.: Naval Historical Center, 1953), p. 1. 주30.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파주: 창비, 2013), pp. 363-366. 주31. Robert F. Futrell,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New York: Duell, Sloan and Pearce, 1961, rev. ed. Washington, D.C.: Office of Air Force History, 1983), p. 484. 주32. 제트기 1,200기(sorties) 이상이 출격한 이 2일 동안의 폭격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였고, 6.25 전쟁에서 모든 미군 군종이 최초로 연합한 작전이었다.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 194) 주33. 김태우, 앞의 글, p. 366. 주34. 이 시기에 CV-37을 비롯한 항모들은 대체로 1개월 가량의 기간 동안 Task Force 77 작전지역(주로 동해안)에 투입된 후 일본 요코즈카 제7함대 기지로 귀환했고 7~10일 안팎을 보낸 후 다시 TF 77 지역으로 투입됐다. 또한 활동보고서는 이 주기에 따라 제출됐다. 주35. 6.25 전쟁기에 유도탄(Guided Missile)은 실용화되지 않았다. 저고도 비행으로 비유도탄의 정확도를 올리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1952년 8월 28일에 무인기(drone)로 개조한 F6F-5K가 흥남의 철교 폭격에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다.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 194)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라고 18세기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말했다. 그러나 금정연은 SNS에 음식 사진을 올리지 않는 사람이다. 셀카도 안 올리고 남이 찍어준 자기 사진도 안 올린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는데 관심이 없는 걸까. 금정연이 요즘 업데이트하는 건 자기 블로그 캡쳐 사진인데, 이것도 자기 어필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속적이거나 유의미한 방식은 아니다(참고로 그는 오디오 전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가 석달 만에 그만뒀다. 구독자는 2022년 7월 기준 40명. 가장 최근 올린 영상은 6개월 전의 것으로 GENE의 <I Say A Little Prayer>을 바이닐 판으로 재생한다. 조회수는 96. 댓글은 2개. 댓글 내용은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참고로 한 사람이 두개의 댓글을 달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의 SNS는 중구난방이다. 트위터에선 트위터의 법을 따르고 인스타그램에선 인스타그램의 법을 조금 따르긴 하지만, (육아 때문인지 마감 때문인지) 대체로 정신이 나가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개인적으로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의 SNS 자아는 실제와 거의 같다. 샤토브리앙은 이렇게 썼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프랑스 작가 중에서 자신의 작품과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바꿔 쓰면,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작가 중에서 자신의 SNS와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금정연이 유일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그가 3년 만에 극장에 가서 < 탑건: 매버릭 >을 보고 < 헤어질 결심 >도 보고 트위터에 소감도 남겼다. 심지어 한영한사 지난 연재에는 탑건에 대한 글도 남겼다. 나는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연재에 왠 탑건이냐고 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 R2B >가 있잖아요, <창공>도 있고, 라고 했던가. <창공>이 뭐예요? 내가 묻자 정연씨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지돈씨. 왜 저랑 다른 세대인 척 해요? 네? 류시원이랑 김원준 나온 드라마 있잖아요. 류시원이요? 지돈씨도 알죠? 김원준이 류시원 데뷔시켜준 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정연씨가 왜 탑건에 대해 썼을까. 비천한 영화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서? 아니면 어쩌다 극장에서 <탑건: 매버릭>을 봤고 마감은 다가왔고 억지로 논리를 맞춰야 해서? 모든 연재가 그런 식 아닌가? 그러나 어디서도 말한 적 없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톰 크루즈고 정연씨는 물론 그 사실을 안다. 지친 아저씨 류의 배우를 좋아하는 정연씨는 예순이 되어도 지칠 기색이 없는 톰 크루즈가 이해되지 않는지 내게 종종 묻기도 했다. 지돈씨, 지돈씨는 톰 크루즈가 왜 좋아요? 글쎄, 왜일까. 사실 이번 글에서 이렇게 답할 생각이었다. 톰 크루즈야말로 자본주의적 추상의 현현이라고,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히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마크 피셔는 말합니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닐 매콜리야말로 포스트 포드주의의 화신이라고. 닐 매콜리는 “익명의 이름, 가짜 여권의 이름, 역사가 없는 이름이다. … 하나의 스크린, 암호, 깊이를 알 수 없는, 냉정하고 전문가적인, 완벽한 준비.” 닐 매콜리에게 도덕이나 윤리, 역사는 무의미하거나 나중 문제다. 그는 단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까 마이클 만이 21세기 초에 찍은 영화가 뭡니까. 바로 < 콜래트럴 >이죠. 포스트포드주의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탈역사적 회색 킬러와 낭만주의적이고 포드주의적이며 아메리칸 드림의 신봉자인 택시기사의 대결. 그 킬러가 바로 톰 크루즈죠. 떠올려보세요, <탑건: 매버릭>에서 적의 존재를. 헐리웃 영화 역사상 가장 추상적인 적군이 나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애국주의적 영화는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체 어느 나라에 충성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데(나라가 있다면 그건 톰 크루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톰 크루즈와 <탑건: 매버릭>의 감독인 조셉 코진스키가 함께 했던 2013년작 < 오블리비언 >에서 예고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오블리비언>의 외계인은 외계+인도 아니고 사실상 유기체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로, 표면적으로는 인간을 복제해서 내세우는 추상적 도형(원, 세모, 네모)의 형상을 한 추상 그 자체인데 이 추상적 존재에 의해 끝없이 복제되는 톰 크루즈의 적은 다름 아닌 톰 크루즈입니다. 영화를 보면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지만 물론 정연씨가 이 영화를 볼 리는 없겠죠. 하지만 < 엣지 오브 투모로우 >를 떠올려보세요. 여기서 톰 크루즈는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의 리셋-존재로 현현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영화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정말 단지 그 이유일까요. 제 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는 탑 배우 중에 내면이 없는 사람은 톰 크루즈 하나라고요. 그러므로 “하나의 스크린, 깊이를 알 수 없는”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톰 크루즈가 복제 가능하고 복제될수록 (존 말코비치처럼) 거북해지는 게 아니라 매력이 더하는 이유는 그에게 내면이나 깊이, 모순 따위가 없기 때문이죠. 그는 사실상 아무것에도 충성하지 않고(이단 헌트는 가족도 없고, 직책도 없고 상급자도, 국가도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충성하고 적과의 싸움만 반복하는데, 그것은 그가 표면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추상성을 재현하는 일은 디지털 이미지도 포스트 시네마틱한 확장 영화도 아닌 복제 톰 크루즈가 하고 있다고, 마블 영화가 자본주의의 변명으로서 자본주의를 지속시킨다면 톰 크루즈의 영화는(사실상 지금의 헐리웃 영화는 이 둘로 나뉩니다) “서사를 포기한 채 충격과 스릴, 흥분이라는 감각적 경험에 모든 것을 내거는 것처럼 보인다” 1) 고 나는 정연씨에게 답하려고 했지만 우선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다는 엔데믹 이후 다시 원래의 자리를 복귀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에 대해서, SNS에 줄을 잇고 있는 영화 인증에 대해서 묻기로 했다. 그러니까 왜 내 주변에는 < 헤어질 결심 >과 < 애프터 양 >과 하마구치 류스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인지,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도 왜 “헤결”은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은 건지(한 신문 기사에 의하면 “헤결” 각본집은 7월 18일 예약 판매 시작후 하루만에 6,00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2) …), 왜 어떤 사람들은 <탑건: 매버릭>은 보고 “헤결"은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 왜 < 토르: 러브앤썬더 >를 본 사람은 한명도 없는지에 대해 묻기로 했다. 선호하는 작품이 다르고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평가가 다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정연씨는 지금도 그러한 사실에 깜짝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역사의 불의를 처음 마주한 마르크스처럼 말이다. 똑같이 훌륭한 시민인데 어떻게 같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정반대의 말을 할 수 있는가. 문학에선 그런 일이 흔치 않다. 기본적으로 같은 문학 작품을 읽은 경우가 드물고 읽었다면 이미 그들은 합의의 공동체 또는 장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문학은 끝났고 영화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임재철 평론가가 말했던 것 같다고 정연씨는 말했다. 정확히는 맨날 보는 애들만 보면 뭐하냐, 안 볼 사람도 봐야 진짜 예술이지, 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안 볼 사람이 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것들의 인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영화를 무엇으로 변형시키는 것일까. 영화는 사바랭의 음식이 된 걸까. 며칠 전에 미팅을 진행한 어느 출판사는 사내 행사로 직원들이 다 같이 <헤어질 결심>을 봤다고 했다. 다른 업종의 회사도 “헤결”을 볼까? 아니면 < 범죄도시2 >? 노동자들이 함께 보는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케빈 켈리는 <통제 불능>에서 생명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 복잡적응계를 비비시스템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벌이나 개미처럼 개별적으로는 연약하지만 군집이 되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들이 그 예다. 개별적일 때는 존재하지 않는 특성이 창발하는 것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픽사의 공동 창업자인 로렌 카펜터는 라스베이거스의 회의장에서 5000명의 군중들과 실험을 했다. 사전 준비 없이 비디오 스크린 화면을 보며 다 같이 하나가 되어 비디오 게임 <퐁>을 하거나 카드섹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절정은 비행기 조종 시뮬레이션이었다. 왼쪽에 앉은 사람들은 비행기의 좌우기울기roll을 조종하고 오른쪽 사람들은 상하요동pitch를 조종했다. 대형 스크린 위에 비행기는 떠 있고 조종사는 경험이 전무한 5,000명의 사람이다. 비행기는 분홍 산들 사이의 분홍 계곡에 있는 활주로를 향하고 있었다. 상황은 곧 급박해졌다. 회의장은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찼다. 왼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군집은 혼란을 일으켰고 비행기는 갈지자를 그리며 추락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5,000명의 조종사는 착륙 시도를 중단하고 고도를 높이고 기수를 돌렸다. 그들이 갑자기 어떻게 합의한 것일까? 지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크게 선회했다. 그러더니 아무런 논의 없이 함께 날개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평선이 어지럽게 돌아가면서, 비행기는 크고 아름답게 360도 회전을 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케빈 켈리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철새떼들이 하는 행동, ‘무리지어 날기’를 했다고 썼다. 새들은 그들이 어떤 모양을 만드는지, 규모나 배열, 형태 등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들은 단지 군집에 감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패턴을 만들어내고 개별일 때보다 더 놀라운 반응과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별 영화가 새라면, 시네마는 철새떼, 개별 영화가 벌이라면, 시네마는 벌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한편의 영화를 보고 거기에 대해 말하고 반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영화가 지금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영화가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한 사유는 걸작이나 비천한 영화 개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뛰어난 작가-감독이나 명배우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숫자와 그것들의 연결에서 온다. 루이스 부뉴엘은 “노동자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며 이들의 노하우가 부럽다”고 말하며, 안제이 바이다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한 편의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흘러가는 비밀스러운 연속성 속 무언가가 내게 감동을 준다.” 3) *** 1) 서동진, "시네마 이후의 이미지 : 자본주의적 추상은 재현 가능한가"(2021) 2) 이투데이, "N차 관람→'왜놈 칠 결심' 밈까지...'헤어질 결심'의 조용한 신드롬" 3) 루이스 부뉴엘, 이윤영 옮김 <루이스 부뉴엘>(을유문화사, 2021)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사태가 대단히 복잡하지 않은가. 상징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고, 현전은 부재이며, 지연되지 않은 것이 지연되며, 희열은 죽음의 위협이다. 더구나 이런 체계, 대리보충의 이 이상한 경제에 추가되어야 할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미 판독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위협인 대리보충은 또한 최초의 가장 확실한 보호라는 점이다. 그 위협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이 때문에 대리보충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말은 내가 아니라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의 제2부 두 번째 장 ‘이 위험한 대리보충...’에서 루소의 「참회록」을 설명하며 꺼내 든 것이다. 너무 유명한 문장이라 모두들 이미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구태여 대리보충(la supplement)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다만 아주 제한적으로 이상하게도 우리를 막아서면서 환원 불가능하게 버티어선 그 흔적을 설명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결정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결정의 망설임. 그 흔적이 무언가 더해진 잉여의 덧셈에 따라 보충된 것인지(le supplement) 아니면 다른 무언가와 바꿔치기 당한 다음 대리하는 것인지(la suppleance) 그저 하염없이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장소. 물론 루소를 경유하여 데리다가 말하려는 것은 예술과 자연 사이의 대차대조표이다. 나는 거기서 물러나서 단지 이 텍스트 안에서 활동하는 저 텍스트가 왜 항상 환대받지 못하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왜 스스로 충만하지 못한 채 그 틈새 사이에서 출몰하는 저것은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저 안의 외침. 바깥이라는 안. 안에 있는 바깥. 무엇이 부족함을 대신하고 그런 다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일까. 「그라마톨로지」 사태를 좀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임권택 의 영화들, 그중에서도 불편한 영화들을 볼 때마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참조 틀의 어딘가가 부서져 나갔다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단지 1967년 그 어딘가에서 1977년 어디까지에 한정 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 욕망의 결산 >(1963), 혹은 < 달빛 길어 올리기 >(2009), < 신궁 >(1979), 그리고 < 아다다 >(1989). 단지 그 부서져 나간 표면의 범위를 따분하게도 바깥과의 대화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한 알리바이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과정이 있을 것이다. 각자의 영화는 영화사에 대한 각자의 은유라고 고다르가 말했다. 그걸 단지 어디선가에서 빌려온 영향이라고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반대로 처음부터 거기 있었기 때문에 안에서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뛰어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이 논리를 좀 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핵심은 안에서 긍정하기 위해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도를 위해서 방법의 전위(轉位)와 그 수순에 따른 재평가의 결과로 나타난 영화에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요구를 순순히 따라야 한다. 여기서 왜 내가 까다로운 데리다의 전술적인 용어를 내세웠는지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 불편함을 말할 때 종종 그 영화에 제한적으로 주어진 데서 설명을 시작하는 것이 잘못된, 아주 잘못된, 그래서 임권택의 진정한 시작의 지점을 놓치는 실패를 항상 가져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반대로 이것을 최종 결과의 효과라는 데서 시작해보면 안될까. 이유들의 순서에 종속되지 않은 대리, 그사이에 재빨리 끼어드는 보충. 우리는 올바른 시작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불편한 실패들 속에서 자기원인의 동어반복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악순환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진화론적인 모델을 거부한다. 그건 그 영화들 사이에 놓인 영향 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꾸만 그 어딘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목적론적인 설명의 함정에로 이끈다. 나는 영화들 사이의 관계에서 서사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임권택의 영화들은 내게 그런 설명이 결국에는 왜 불가능한지를 알려주는 목록이다. 월하의 검 (1970) < 월하의 검 >을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재난에 가까운 실패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임권택 에게 의미 있는 실패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여기서 무언가를 의식하고 있지도 않다. 그 어떤 것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 무언가를 해본 것도 아니다. 1970년은 임권택에게 그런 해이다. 그 해에 임권택은 여덟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 애꾸눈 박 > < 이슬 맞은 백일홍 > < 비내리는 선창가 > < 그 여자를 쫓아라 > < 밤차로 온 사나이 > < 속눈썹이 긴 여자 > < 비검 > 그리고 < 월하의 검 >. 어떤 일관성도 없는 영화들. 하지만 이 실패가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임권택의 무능력에로 돌리기에는 그에 앞선 영화들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의 마지막 시퀀스 전부. 혹은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 나는 자꾸만 그의 실패한 영화들을 실패한 작품들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실패한 상황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 영화들은 실패라는 조건 속에서 자기들의 방법으로 실존하는 중이다. 실패와 부딪쳐서 부서져 나가는 영화의 모습. 나는 그 모습을 지금 바라보는 중이다. 그때 부서져 나가는 참조 틀 사이로 드러나고, 재생산되고, 존재하는 잉여들의 혼란스러운 모방과 마주친다. 잠깐. 모방이라고 했나요? 물론이지요. 그건 다른 무언가가 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니까요. 그때 모방은 나에게 효과라는 최종 결과라는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거기서 멈춰 세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는 여기서 무엇보다도 과정이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 최종이라는 종착지. 임권택 은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감독으로 언제나 정창화 를 이야기한다. 그는 정창화 밑에서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에서 충무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영화는 기계군의 활동이며 조직이다. 공장과도 같은 시스템. 그 안에서 개념의 추상화와도 같았던 이미지를 세계 안에서 찍은 다음 배열해야 한다. 여기에는 규칙과 문법이 있다. 그것을 쳐부순다고 말해도 그 안에서 진행되는 부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임권택이 정창화를 말하는 것은 그 인정의 테두리 안에서이다. 그런 다음 (펠리니의) < 길 >과 네 명의 할리우드 영화감독, 존 포드와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조지 스티븐스를 언급했다. 나는 여기 세 명의 이름을 더하고 싶다. 임권택이 언급하지 않는 이름. 그의 영화 전체는 아니지만 우리들이 실패작이라고 부르는 영화들이 만들어지던 시기, 실패의 상황이라고 내가 명명한 조건 아래서 만들어진 영화에서 마주치는 그림자들의 이름. 셀지오 레오네와 끌로드 를루슈, 그리고 장철. 물론 그 이름들은 잠시 후에 임권택의 영화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실패의 상황 속에서 남과 여를 주연으로 한 영화들과 < 남과 여 >, 그리고 쇼 브라더스 영화들은 마치 그림 안의 그림처럼 거기 그림자로 남았다. 영화가 한참을 자신의 서사를 진행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이미지들. 그것이 다시 나타날 때 종종 지나치게 실패해서 그것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는 느낌을 받기조차 한다. 미처 예기치 않았던 출현. 주인공이 자기의 몰락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그가 놓여진 상황이 다른 영화 안의 반복을 향해 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에 약간의 주석을 달고 싶다. 셀지오 레오네는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이 끝난 다음, 그것도 거의 끝난 다음, 그래서 펠리니가 그 방법을 버린 다음, 안토니오니가 리얼리즘을 거의 추상에로 밀고 나아간 다음, 황무지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에 대한 아이러니로 시작하였다. <길>을 자신의 거의 유일한 걸작이라고 말하는 (게다가 전형적인 한국 고전영화문법 안에서 배움을 얻어온) 이 사람은 < 석양의 무법자 >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정창화에게서 충무로의 영화문법을 배운 임권택의 영화에서 잠시 동안 <남과 여>에서 무차별하게 사용된 시네마 베리테의 촬영과 누벨바그의 데쿠파주에 대한 키치적인 활용이 홀연히 등장하는 순간을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마주칠 때 나는 어떤 쇼크를 받았다. 구체적으로 <남과 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의 한국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이었기 때문이다. <남과 여>는 한 시기의 한국영화들을 거의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미처 < 히로시마 내 사랑 >과 < 비브르 사비 > < 어느 여름의 연대기 > <사촌형제> < 롤라 > < 활주로 > < 쥘과 짐 > <사자좌> <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 > < 파리는 우리의 것 > <아듀, 필리핀> <산타 할아버지는 푸른 눈을 가졌다>를 보지 못했다. 그저 < 네 멋대로 해라 >와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경험은 중단되었다. 아마도 오직 김기영 만이 영화‘歷’사의 시간을 좇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김기영은 (인터뷰에 따르면) 1960년대 그 부근 언젠가부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오로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도쿄에 방문했다. 풍문으로 누벨바그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일본을 경유하여 각색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기의 글 자료들을 읽은 내 독후감은 그렇다. 그들은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고, <남과 여>가 굉장한 영화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의 법칙과도 같았던 고전영화 문법을 무시하면서 그저 그렇게 떠오르는대로 찍고, 연출하고, 편집하고, 그래도 괜찮은 영화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거기서 어떤 자유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을 지배했던 도제제도로부터의 해방. 그때 임권택은 모던 시네마의 방법에 가까이 다가갔다. 실패한 상황. 예기치 않은 보충, 혹은 무엇이 무엇을 대리하기 시작했을까. 이 위험한 대리보충. 어쩌면, 정말 어쩌면, 여기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그의 영화가 모두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임권택은 재빨리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도 방법의 흔적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다소 기형적인 양태로 분산되고 분할되어 머물렀다. 우리는 임권택 안에 들어서기 위해서 방법을 잘 따라야 한다. 무엇이 멈추자 무엇이 활동하기 시작했을까. 거기서 우리는 영화의 어떤 역량이 표현되기 시작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때로는 긍정적인 역량. 때로는 실패해버린 표현. 거기에 적합한 개념. 거기서 멈춰버린 기능. (위) 정창화 와 <길>, (아래)셀지오 레오네, 끌로드 를루슈, 장철 나는 여기서 세 번째 이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할 생각이다. 장철. 張徹. 1968년 5월 23일 서울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가 개봉하였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그렇게 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홍콩 쇼 브라더스 무협영화는 한국 영화문화 안에서 하위 장르의 하위 장르이면서 동시에 재개봉관을 중심으로 컬트영화가 되었다. 임권택 은 이 이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길게 언급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저 스쳐 지나갔다. 내 질문은 왜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 버렸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 시기의 임권택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영화 안에서 장철을 수 없이 다시, 거듭해서 다시, 호명할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셀지오 레오네와 < 남과 여 >를 불러낼 것이다) 이것이 단지 불균등한 위계적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권택은 장철과 셀지오 레오네, 그리고 <남과 여> 없이 더 나아갈 수 없었고, 아니, 차라리 그것들의 대리보충 없이 참조 틀을 부술 수 없었고, 그런 다음 거의 불순물과 다름없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서는 다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실패해버린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 위험한 명제. 임권택에게 그가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충무로는 참을 수 없는 문법이었고, 그런 다음 부서져 가는 그의 영화 안에서 셀지오 레오네와 <남과 여>, 장철은 다시 견딜 수 없는 대가가 되었다,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설명을 따분하게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방식으로 도식화시키지는 말아주기 바란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바로 여기이다. 갑자기 여기서 새로운 쟁점이 나타난 것이다. 임권택은 오류 안에 자기가 찾고 있는 진정한 목표가 있는 것처럼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오류 안에서만 견딜 수 있는 형식을 찾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때 장철이 단지 쇼 브라더스 무협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말고 그 영화들이 광동오페라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판본 위에서 시작했다는 사실 안의 사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임권택과 장철이 공유하는 것은 무협활극이라는 표면적인 약속의 장르 사이에서의 트랜스 내셔널 네트워크가 아니라 피와 시체들, 복수의 정념과 의리의 도덕 뒤에 수줍게 숨어있는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매혹이다. 더도 덜도 아닌 매혹. 그 속에서 그들이 즐기는 기쁨. 바로 거기서, 마치 그것을 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참조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에 대한 참조라고 할 정도로 < 월하의 검 >은 장철의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 대협객(大刺客) >과 (부분적으로) < 심야의 결투(金燕子) >의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몇몇 장면에서는 거의 같은 구도, 같은 활극동작을 빌려온 살진(殺陣)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여기서는 단지 오마주라거나 두 영화 사이에서의 상호 텍스트성이랄까, 이런 설명과는 완전히 다른 교차가 나타난다. 나는 실패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패한 오마주라고 말해버리면 어떨까. 이 말을 잘 음미해주기 바란다. 오마주를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효과로서 나타나 버린 오류라는 실패한 오마주, 그 안에서 이행의 대리보충을 붙잡아야 한다. 무언가 저 영화가 이 영화에 구멍을 내고 그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단지 거기에 동의한다거나 혹은 이미 해놓은 것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감흥의 복종과는 다른 것이다. < 대협객 >(1967) < 심야의 결투 >(1967) < 대협객 >은 쇼 브라더스에서 장철이 왕우를 주연으로 하여 1967년에 만든 홍콩영화이다. 무협영화 팬들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다른 장철 영화들과 달리 긴 드라마가 장황하게 이어진 다음 아주 잠깐, 그래서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하지만 몹시 인상적인 무협활극 장면이 나오는 절정의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고 나면 서둘러 끝나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서는 1969년 10월 4일 종로 3가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등장하는 자객열전 중의 하나이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백성이었던 섭정은 출중한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 재능을 시기한 동문 서식의 음모로 인해 스승은 당시 제나라와 적대관계에 놓인 나라의 첩자로 몰리고 무술 도장은 쑥밭이 된다. 이에 섭정과 그의 친구 두파는 복수를 한 다음 섭정은 모든 걸 포기하고 백정이 되고 두파는 옆 나라인 한나라로 피신하여 거기서 한나라의 충신 엄중자의 자식 무술 사범이 된다. 그런데 엄중자는 재상 한괴가 끊임없이 그를 음해하고 임금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며 몹시 괴로워한다. 그러다 보다 못한 엄중자가 두파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는 자기보다 훨씬 무술이 훌륭한 섭정을 추천한다. 제나라까지 찾아온 엄중자의 마음을 알고 그와 의형제까지 맺은 섭정은 다만 자기에게는 아직 병상에 누운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누이가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몇 해 후, 어머니 상을 치루고 누이가 시집을 가자 섭정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엄중자를 찾아온다. 그리고 하얀 백의에 백마를 타고 귀공자로 분장하여 혼자 수백 명의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한괴를 찾아가 그를 처단하고 자결한다. 나는 주변에 있는 섭정과 그의 연인, 그리고 누이와의 이야기는 모두 그냥 지나쳤다. 그런 다음 < 월하의 검 >. 이 이상할 정도로 기괴한 우울함으로 가득 찬 이야기가 임권택 이 직접 쓴 시나리오라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물론 임권택은 첫 영화를 만들 때부터 끊임없이 영화를 찍으면서 시나리오를 고쳤다. 그건 ( 송길한 이 시나리오를 쓴) < 만다라 >를 찍을 때도 그러했고 ( 이청준 이 시나리오를 쓴) < 서편제 >를 찍을 때도 그러했다. < 취화선 >을 찍을 때는 심지어 시나리오를 탈고한 다음에도 계속해서 매일 아침에 새로운 대사를 쓴 시나리오를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다시 고치는 것과 처음부터 쓰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야기에 뒤 이어 와서 그것을 닮은 다른 이야기가 이미 앞에서 포위하고 있을 때 그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가 다른 하나의 대리보충이 될 때 어느 쪽이 앞에 있고 무엇이 뒤에 있는지 그렇게 쉽게 분간할 수 있을까. 후렴구. 나는 지금 실패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아마도 조선 시대. 하지만 그런 다음 더 이상 어떤 것도 분명한 지표가 없는 사극의 무대.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 월하의 검 >을 볼 방법이 없고 잘 정리된 줄거리도 없기 때문에 이 글을 먼저 읽을 수밖에 없다. (...) 임금은 무능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화당 최씨의 미모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그러는 동안 나라의 권세를 포도대장 최걸에게 모두 넘겨준다. 최걸은 자신을 비방하는 충신들을 모두 척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래서 빼어난 무술을 지닌 장무력을 고용하여 마치 연화당 최씨를 암살하기 위해 잠입한 것처럼 꾸민 다음 최씨를 지키는 호위무사 박필에게 붙들리는 계교를 꾸민다. 임금 앞에 잡혀간 장무력은 자신을 고용한 자들의 명단으로 충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열거하고 곁에서 통곡을 하며 연화당 최씨는 그들을 모두 참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한다. (여기가 영화의 시작이다)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고 이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충신들은 심산유곡에 자리한 절로 피신하여 이제 남은 방법으로 연화당 최씨보다 더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을 궁궐로 보내 임금의 총애를 받은 다음 진실을 알리고 간신배들을 벌할 것을 상소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 다음 이들은 이미 참수당한 충신의 딸 향아가 이에 적합한 미모를 가졌으며 그녀의 효성이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데 합의한다. 문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행방이 묘연한 향아를 찾는 것인데 우연히도 위험에 처한 그녀를 연화당 최씨의 호위무사 박필이 구하게 된다. 박필은 천애 고아로 어려서부터 최걸이 돌보면서 무술을 배우고 그 아래서 최걸의 자객이자 누이인 연화당 최씨의 호위무사가 된 몸이었지만 자신의 신세에 대해 처량함을 느끼며 그저 시간 날 때마다 조선팔도를 이리저리 떠돌며 그림을 그리면서 허송세월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무술만은 조선 최고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박필은 향아의 정체도 모른 채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변장을 하고 궁에 잠입한 향아를 보고 모든 계획을 깨달은 박필은 부디 이 위험하고 허망한 복수를 중단하고 자신과 멀리 떠나자고 말하지만 향아는 반대로 자신을 도와 복수를 이룬 다음 함께 멀리 떠나자고 부탁한다. 우여곡절 끝에 향아는 임금의 처소에 들고 그의 마음에 들지만 (여기서 나는 그사이에 향아의 정체가 탄로 나고 연화당 최씨의 인두질로 얼굴이 망가져 궁궐 바깥으로 내쳐지지만 심산유곡 절의 주지스님이 지극정성으로 치료한 묘약으로 미모의 얼굴을 고친 다음 다시 궁궐에 입궐한 사연을 둘러싼 대목을 건너뛰었다) 하룻밤 정사를 치르고 나서 증거가 없으니 연화당 최씨와 그 오빠를 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 최걸은 이제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장무력을 제거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박필에게 제안한다. 박필은 장무력을 찾아가 일대 결전을 벌이지만 막상막하의 실력을 갖춘 두 사람은 결국 승패를 가리지 못한다. 지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과 대결을 하면서도 결정적인 한 수를 쓰지 않는 박필의 마음속 진심을 본 장무력은 기꺼이 그를 위해 임금 앞에 가서 진실에 관한 증언을 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박필은 그 증언이 모두 끝날 때까지 바깥에서 임금의 처소를 향해 수 없이 몰려드는 병사들과 홀로 싸워야만 한다. 장무력이 모든 증언을 마쳤을 때 박필은 수백 명의 병사들의 시체 곁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중이다. 그 곁에 온 향아는 그를 비로소 여보, 라고 부르며 품에 넣어둔 극약을 먹고 그와 같은 운명의 선택을 한다. 그 시간에 연화당 최씨는 모든 비밀이 밝혀지자 자결을 한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임금은 홀로 남겨진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 포스터에 있는 주연배우들의 명단을 보면서 당신은 포도대장 최걸을 허장강이 연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배역의 컨벤션이라는 약속. 하지만 김지미 는 향아가 아니라 악독하기 짝이 없는 연화당 최씨를 연기한다. 향아는 김명진 이 연기한다. 물론 배역은 일종의 수건돌리기 게임이다. 영화 바깥의 여러 가지 복잡한 변수가 있긴 하지만 누구든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질문은 이야기 안에서 이들 사이의 오류를 불편하게 만드는 문턱에 관한 것이다. 먼저 이 영화에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아마 이 말이 당신을 당황시킬지 모른다. 그렇다고 무언가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결말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순간은 결말이 다가왔다기보다 무언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선악이 분명하며 우리가 누구 편에 서야 할지 따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점점 그 경계는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무언가를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비웃으면서 보편적인 믿음을 우스꽝스럽게 처리해버린다. 여기서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정박지인 임금은 단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과도하리만큼 색욕에 빠져 있다. 그 역을 연기하는 김순철 은 다른 배우들과 전혀 달리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어색한 코미디의 연기를 한다. 김순철은 단 한 장면에서도 다른 배우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김명진 과 침소에서 운우지정을 나눌 때조차 그러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는 홀로 존재한다. 불편한 고정점. 나는 당신에게 임권택 이 영화 연출을 할 때 언제나 연기를 교정하는 것에서 그 인물의 형상화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 정창화 감독은 나를 카메라 옆에 앉혀놓고 배우를 보라고 시키는 거예요, 어떤 배우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약점이 보이는 거예요, 그게 내가 시나리오와 인물 사이의 오차 범위를 줄이는 방법이었어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겠다. 임금은 만월이 뜨는 밤이면 내시 한 명을 데리고 홀로 비원에 행차해서 그 달을 보면서 술을 마신다. 이건 궁중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며 그래서 향아는 임금이 혼자가 되는 그 시간에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박필에게 애원한다. < 월하의 검 >이라는 제목은 달빛 아래서 대결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에 거기에 가야만 하는 향아와 그녀를 거기에 보내야 하는 박필의 애처로운 사연의 알레고리이다. 하나의 시간. 만월의 밤. 세 개의 선. 임금과 향아와 박필. 서로 맞지 않는 정념들 사이에서 운명적으로 짜 맞춰져야 하는 매듭 사이로 벌어진 틈. 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애초부터 그 자신들이 짓지도 않은 죄를 짊어진 상태란 무엇일까. 말하자면 비극의 수순. 그런 다음 매듭을 자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임권택은 (장철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이 이야기가 죽음에로 귀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박필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역설적으로 스스로 운명 앞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녀의 간절한 소원. 하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내가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저 사람은 임금의 침소에 들어 육욕의 대상이 될 것이며 그에게 벌거벗은 살을 내주어야 할 것이다. 임권택은 거의 기술적으로 감당이 안 되는 1970년의 한국영화 촬영기술을 바탕으로 무리할 정도로 반복해서 몇 번이고 만월(滿月)의 밤을 찍는다. 미첼 카메라의 둔중함과 값싼 아그파 필름, 그리고 조악한 조명은 한밤중에 만월을 찍는 것이 불가능한 장비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모든 만월의 밤은 한낮에 밤 장면을 찍었다. (day_for_night) 종종 잘못 색 보정된 다음 무성의하게 현상된 필름들은 이 만월의 밤 장면들이 낮에 촬영되었음을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월하의 검>은 기술적으로 거의 재난에 가깝다. 그걸 임권택이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면서도 그냥 그걸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걸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의도라면 그건 나쁜 의도이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그래도 상관없다, 는 자포자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나는 임권택의 심리적인 상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걸 설명하는 것은 전기 작가의 몫이지 내가 할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권택은 여기서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월하의 검>은 미학적 기준으로 무자비하게 설명하기를 단 한 순간도 망설일 필요 없는 영화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는커녕 그걸 먼저 알아차리고 실패라는 조건을 받아들인 다음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기묘한 실패의 정식화를 끌어낼 수 있다. 그건 실패가 외재적 조건일 때 이미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부정에 대한 긍정이라는 역설이다. 이때 영화는 임권택에게 일종의 자기 심문과 같은 것이 되어간다. 마치 영화가 자기의 속살을 내보이듯이, 정말 부끄럽게, 필름의 한계와, 촬영의 제한적인 조건과, 제작의 무성의한 진행에 관한 모든 과정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끔찍할까.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수수방관해야만 할 때, 그때 거기서 할 수 있는 방어의 기술이 전혀 없을 때, 임권택은 반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바로 거기서 위험천만한 상실이라고 할까, 그 자신의 영화의 내부적인 멜랑콜리가 불연속적인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기 시작한다. 영화 안의 질문. 지금 이것은 그래도 성립되고 있습니까. <월하의 검>은 거의 부서진 영화이다. 그런데도 가까스로 버티고 선 무언가가 이 영화에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그것을 방어하면서 성립시키고 있다. 재앙을 피해야만 해.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해. 여기서 나는 그럴 때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장철의 < 대협객 >이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을 쳐다보게 된다. 그때 그건 영화라기보다 차라리 제도 바깥에서 나타난 부정성이다. 몹시 사악하고 거의 지켜지지 않는 규칙들. 강제적인 영화의 속도. 쇼 브라더스 영화의 처음 보는 기이한 문법. 거기서 섭정의 삶은 자유자재로 스튜디오 속을 거닐며 자기의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다음 마지막 순간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오른다. 그렇게 사람이 날아가도 상관없는 것일까. 새로운 동선. 영화에서의 새로운 선, 하지만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선. 그 자신의 학습을 통해 얻어낸 경험을 앞지르는 건너편의 방법이 나타나서 부서져 가는 참조 틀 사이로 대리하고 보충하는 시간은 이 영화가 발작하는 순간들이다. 상감,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옵니다. 사실이옵니다. < 월하의 검 >을 보다가 누구라도 멈춰 서게 될 두 장면, 그런데 거의 마지막 장면, 그래서 이야기가 멈추는 두 장면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여기서 임권택 은 장르 안에서의 연쇄를 갑자기 끊어버린다. 그런 다음 이야기를 밀어내고 어떤 대체의 구조를 찾기라도 하듯이 인물에서 그것을 보충하려 든다. 어떤 절단. 그런 다음 그것을 떠안아야 하는 부담을 감수하기라도 한 듯한 결정. 장무력이 임금의 앞에 가서 진실을 고하고 나자 포도대장 최걸과 연화당 최씨를 불러 그 말이 모두 사실이냐, 라고 묻는다. 그러자 최걸은 그 모두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로 시작하는 사극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나는 상투적인 대사를 시작한다. 물론 악인들이 사악할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 짝이 없다는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약을 내리기에 조금도 자비심이 필요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때 최걸 의 말을 자르면서 연화당 최씨가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표정으로 모두 사실이옵니다, 라고 대답한다. 임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본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요구를 거절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동시에 권리와 정의를 일치시키는 제스처를 취하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임금과 국가의 (상투적인) 변증법. 하지만 연화당 최씨는 이 일련의 자동적인 연쇄를 중단시킨다. 그런 다음 임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질문한다. 저년과 저, 둘 중에 누가 더 예쁜가요? 목숨이 걸려있는 순간에 이 질문은 적절치 않은 내기이다. 왜냐하면 임금의 대답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그녀의 목숨에 대한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생명에 무관심한 듯한 질문. 하지만 이때 임금은 여기서 그 자신의 대답이 결정의 이해관계로부터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연화당 최씨의 질문은 임금의 자리로부터 그녀의 침소에서 몸을 탐했던 한 남자에로 임금을 추락시켜버린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런 다음 연화당 최씨는 임금으로부터 그건 물론 네가 더 예쁘긴 하지만, 이라는 대답을 듣자 거기서, 바로 그 대답의 거기서,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짓고 옆에 서 있던 신하의 칼을 빼 들어 그 자리에서 자결한다. 대답이라는 패배. 대답을 통한 권리의 상실. 정의의 연쇄적인 추락. 자기 목숨에 대한 연화당 최씨의 스스로의 결정. 임금은 순식간에 결정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빼앗긴다. 그러므로 거기서 임금의 명령이 대상을 놓칠 때 그렇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얻어낸 진실은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월하의 검>에는 표면적인 결론과 달리 드라마의 효과가 만들어내는 사필귀정의 카타르시스가 없다. 주인은 자기의 권리를 빼앗기고 주인의 주인은 그 권리를 죽음으로 돌려준다.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연화당 최씨가 자살을 할 때 향아는 임금께 고하는 장무력의 고백을 위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밀려드는 병사들을 상대로 희망 없는 칼부림 끝에 죽어가는 박필에게 달려온다. 물론 이 장면은 장철의 < 대협객 >의 마지막 장면의 변주이다. 혹은 < 심야의 결투 >의 마지막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대결을 끝낸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서 피를 흘려가며 끝없이 밀려드는 무사들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필사적인 결투를 계속하는 은봉황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른다. 박필은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고 그가 입은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계단에 쓰러진 채 죽어가는 중이다. 달려온 향아는 그를 껴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여보, 라고 부르며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자고 말한다. 박필은 향아에게 이제는 만족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반복해서 향아의 복수를 말렸고 그녀의 희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설득했으며 단 한 번도 그녀의 결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도와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향아는 복수에 성공했고 그녀는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때 향아는 박필의 질문에 대답한다. 저 탐욕한 무리들을 떠나 당신과 함께 떠나겠어요. 연화당 최씨의 대답과 마찬가지로 여기까지 향아의 동선을 쫓아온 당신은 갑자기 멈춰 설 것이다. 탐욕한 무리들. 그 대답에서 가리키는 탐욕한 무리들은 최걸과 연화당 최씨가 아니라 그들에게 희생당한 충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아를 궁궐에 보내 자신들의 억울함을 탄원해달라는 명령을 내렸던 아버지의 친구들. 대의를 위한 희생. 향아는 그 충신들을 최걸과 연화당 최씨 남매와 별 차이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단지 그들은 서로 권력을 잡은 자와 잃은 자의 반대의 자리에 놓여있을 뿐이다. 향아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었고, 그런 다음 연화당 최씨가 자살을 한 그 빈자리, 임금의 옆자리에 가면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한 다음 품에서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만일의 경우를 준비한 독약을 아낌없이 자기 입에 털어 넣는다. 두 개의 자살. 즐비한 시체. 여기서 자살은 어느 쪽도 자포자기가 아니다. 그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살을 선택하면서 무언가를 항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대하는 행위는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길고 긴 영화의 목록 끝에 자신의 영화에 대한 철학적 정식화가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말한 이 사람의 영화에서 끈질기게 자살이 반복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심지어 그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부를만한 < 취화선 >에서조차 마지막 장면에서 오원 장승업은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결론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그런데 장승업에 관한 전기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그저 실종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임권택의 영화에서는 각자의 이야기에서 살고 있는 각자의 주인공들이 살아온 삶의 결론에 이르러 각자의 죽음을 선택한다기보다는 그들이 어디서 시작했건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어떤 (텅 빈 상태의 공허한) 중심에로 이끌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역사 그 자체. 나는 <취화선>에서 바로 이어지는 또 한편의 전기인 < 하류인생 >의 마지막 장면을 유심히 바라본다. 여기서 자기의 자리를 텅 빈 구멍으로 만들어버리는 행위는 무엇을 목표로 한 것일까. 나는 임권택에 관한 논의를 더 멀리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실패한 선택으로서의 장철의 쇼 브라더스 영화를 경유할 필요를 느낀다. 거기서 시작했고, 거기 머물지 않기 위해서 비극적인 것에서 진정한 비극에로 점핑하면서 도약하는 과정이, 오로지 그 과정이, 임권택의 목록을 쫓아가는 내게 감동을 준다. 방법론으로서의 소용돌이의 심연. 무한정한 회의. 그 안에서 탄식하는 부자연스러운 매혹. 먼저 덧셈을 한 다음, 보충한 다음, 그다음은 빼내는 것이다. 거기서 원래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대리를 다시 바꿔야한다. 대리보충에 대한 대리. (데리다의 표현을 빌려) 이중의 세션. 물론 모든 문제 안에는 대답이 포함되어 있다. 그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얼마나 주어져 있는가. 이제까지 나는 < 월하의 검 >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서 모든 장면들이 보고 난 다음 내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임권택 은 내가 보고 있는 이야기 안에서 어떤 장면을 종종 바늘처럼 찌르듯이 불쑥 내밀 때가 있다. 이건 바르뜨가 말하는 푼크툼과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이야기 안에서, 라고 말했다. 그 장면을 따로 이야기에서 때어놓고 보면 별로 대단하지 않을뿐더러 이미지 자체가 훌륭한 것도 아닌데 정말 갑자기 그 장면이 이야기 앞으로 나올 때가 있다. 그때 이 장면을 이야기에 놀랍도록 적절하게 조응한다거나 혹은 이야기를 압도하면서, 라고 설명하는 것은 사태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장면은 이야기에 대해 몹시 불길하고 축축한 외설성을 갑자기 드러내듯이 출현한다. 여기서 방점은 갑자기, 에 놓여있다. 그건 무언가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것만 같은 불만에 빠졌을 때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장면이 앞에서 상연되는 것이다. 나는 상연, 이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의도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 누구에게? 우리에게. 왜 그런 상연이 필요해진 것일까. 그건 이야기의 표면만으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박필과 향아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 이르자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제 자리를 맴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마침내 박필은 향아를 그녀의 원대로 한밤중에 비원으로 데려다준다. 비원에 깊은 밤이 오면 임금이 내시 한 명만을 대동하고 술을 마시며 이 시간을 홀로 즐기기 위해 나들이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향아는 그 밤이 만월의 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한밤중의 비원에 홀로 앉아 오지 않을 임금을 기다리며,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장소에서, 그 누구도 들을 리 없는 피리를 거기 없는 임금을 향해 불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이야기 안에서 오인의 청각 기호가 작동하는 중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밤은 깊어가고 아무리 기다려도 임금이 나타나지 않자 향아는 피리 불기를 중단한다. 이때 화면에서 향아가 중단을 했는데도 영화는 계속해서 피리를 분다. 그때 이 피리는 향아의 몸과 분리되어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그런 다음 마치 장면의 사운드 트랙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 홀로 남은 향아를 위해서 영화가 불어주는 풍경으로서의 청각 기호가 된다. 이 이행의 순간은 순식간에 벌어져서 단지 실수가 아니라 마치 이야기 전체가 어떤 오작동을 일으킨 것만 같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임권택은 텍스트라고 정의 내려진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거기에 마치 어떤 맹점(blind_spot)이 존재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의 가시성이 만들어내는 한계 가장 가까이에 다가간다. 우리는 이걸 단지 속임수라고 지나쳐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갑자기 이야기 바깥에서 운명이 찾아온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이야기 바깥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 이야기를 조정하는 끈. 이때 운명은 비극을 상연하기 시작한다. 왜 그런 장면이 필요해진 것일까. 임권택은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에서 역사를 삭제하는 대신 역사 안의 실재적인 질서가 작동시키는 운명이 비극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남겨놓는다. 여기서 조선 시대의 구체적인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아니 차라리 그런 임금의 존재를 역대 왕조에서 누구로부터도 유추할 수 없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 시대가 아니라면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대리된 가상의 임금. 그 안에서의 광동 멜로드라마의 보충. 이때 임권택은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에서 다시 이야기의 현실 안으로 되돌아올 때 소름 끼치게 무서운 장면을 준비해놓고 있다. 향아는 아무리 기다려도 비원에 임금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하여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 이때 향아가 방에 앉는 장면은 무언가 이상한 구도로 잡혀있다. 지나치게 멀리 물러난 카메라와 향아의 거리. 그녀를 둘러싼 어둠. 그런 다음 호롱불을 켜자 방 안이 밝아지면서 이제까지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화당 최씨와 그녀의 궁녀들, 그리고 야경을 돌며 궁궐 안을 순찰하던 포졸들이 마치 유령처럼, 그림자처럼, 병풍처럼 향아를 둘러싸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 우리를 경악(驚愕)이라는 공포의 상태로 몰아넣는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여기가 궁궐 안에서의 향아의 유일하게 사적인 공간이자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한 것처럼 여겨진 그녀의 방이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이 방을 마치 향아에게만 개인적으로 허락된 장소처럼 다루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여기를 향아의 안전한 피난처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화당 최씨가 여기에 나타났을 때는 습격을 당했다기보다 갑자기 피난처의 베일이 찢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이를 때까지 연화당 최씨는 향아의 행동반경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거나 마치 그 둘 사이에 교집합이 없는 것처럼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원. 각자의 운동. 그런데 가장 이상한 세 번째 이유가 남아있다. 여기까지 이야기의 진행이 향아와 연화당 최씨 두 인물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의 진지함을 상실한 채 지나치게 나태했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동선 안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거의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의도된 연출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은 이후의 진행을 생각하면 거의 희박한 가능성으로 남는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깜짝 놀란 우리들은 그만 이 순간에 불쑥 찾아온 예기치 않은 방문객을 맞이한 심정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임권택은 그 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여기가 이 시기의 임권택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영화는 다시 참혹한 기술적 수준의 장면들과 진부한 이야기에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두 개의 자살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 둘이 자살을 맞이할 때까지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 월하의 검 >에서 그 두 사람의 죽음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영화가 ‘끝난 다음’의 이야기 속의 요지부동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죽음 끝에 정의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사실상 이 영화의 무대가 된 존재한 적이 없는 조선 시대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임금은 새로운 여자를 찾을 것이며, 그는 정사에 관심이 없으며, 충신들의 무리는 자신들의 복권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어떤 변화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세월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임권택 은 그의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에서 (각색을 거치긴 했지만)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조선 시대를 무대로 하여 사극을 만들었다. 구체적인 왕조와 역사적인 실록은 이야기에 개입하였으며, 실존했던 인물들은 자기의 자리를 버티고 앉았으며, 외세는 이 시대를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임권택은 역사 안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발전시켜야만 했다. 그때 그는 우아한 화면과 그 안에서 살아가야 했던 그 자신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연출하였다. 우리는 임권택이 1934년에 전라남도 끝자락 아직 조선 시대의 향취가 남아있던 시대에 자라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마도 1965년에 만든 < 왕과 상노 > 혹은 그 무렵부터 실록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이 시기부터 임권택의 영화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남은 것은 시대의 조건과 역사라는 이름으로 부여한 최소의 이치였다. 제도와 계급. 의상과 호칭. 마치 게임의 규칙처럼 되어버린 역사의 매트릭스. 역사는 형식이 되었으며, 그 안에서 임권택이 누린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절망적으로 고립된 상황과 공허한 유교에 바탕을 둔 감상적인 남녀 사이의 희생과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전근대적 향수의 눈물이었다. “그때 그 영화들을 만들면서 내 영혼이 다 부서지고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살아본 시대는 아니지만 이게 무어가 진짜고 무어가 가짜인지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다 들어본 세상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어른들에게서 법도와 예절을 배웠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내가 내 손으로 좋았던 유산을 다 부수고 있으니 만들면서 내내 참 몹쓸 짓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 월하의 검 >은 정확하게 그 말에 대한 대답이다. 임권택은 먼 길을 돌아와야 했으며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자기에게 강요된 조건을 수락해야만 했다. 그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참으로 참혹하게도 임권택이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 증언 >을 경유하여 그해 여름 한국전쟁을 마주 보면서, 다 부서져 버린 고향을 바라보면서, 흩어진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서로 총을 쏘고, 고발하고 신고하고, 죽고 죽이는 세상을 보면서, 그렇게 돌아왔다. 하지만 잠시만, 아직은, 아직은 좀 더, 나는 임권택의 그 시간에 머무를 생각이다. 그러므로... (계속) 1970년 108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일영화주식회사 각본 임권택 촬영 최호진 조명 윤창화 편집 장현수 음악 황문평 김지미 윤양하 김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