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문평, 영화속에 펼쳐놓은 음악인생
- 감독
- 김영섭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김도현, 황문평, 장일호, 강범구
[사진] 김승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맥>의 한 장면 ● 연극으로 시작한 3대 독자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를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어려움을 모른 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승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양친께서 석왕사(釋王寺)에서 불교를 신봉하셨다” (『국제영화』 1959년 10월호) 고 말한 적이 있어 뜬소문만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릴 때 이 복덩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수(海壽)였다. 그가 네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종로 청진동에 정착한 뒤 복덕방과 전당포를 하며 사림을 꾸려 나갔으나 얼마 못가 숙박업으로 전환하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 맞은편 서울관광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대흥여관이 바로 그 출발이었다. 그가 입학한 수송국민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공휴일에도 조무래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명문인 보성(普成)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재들과의 경쟁이 벅차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우미관이나 낙원동의 조선극장, 수은동의 단성사 등 극장을 찾아다니며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 했다. 그때 이미 ‘분바른 무대 인생’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황금좌로 박진(朴珍)을 찾아갔다. 연출부장인 박진은 당돌하게 연극을 하게해 달라고 조르는 이 초면의 청년에게 대뜸 호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사실대로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같이 고생을 하자”며 입단을 허용했다 .(김승호, 「나의 청춘과 예술의 편력」, 『국제영화』 1956년 3월호) 연구생 신분이었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이 질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공연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정말 지겹도록 이 호떡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김승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연극에 빠졌다. 선배들의 시중은 물론 단체의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전원교향악>이란 연극을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님 역할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 떡을 사다가 권하며 아첨을 떨었다. 선배는 이런 호의가 기특했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을 앞두고 급히 먹은 떡이 체했는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에게 대역의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배의 연기를 보며 익힌 보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첫 작품이 홍해성 연출의 <임자 없는 자식들>이었다. 1938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 뒤 <백진주>, <아들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런 ‘광대 짓’을 못 마땅히 여겼다. 부모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극장주인 홍순언이 김승호를 주연인 황철의 친구 역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런데 현상 기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황문평,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1』 ‘서민의 우상 명배우 김승호’ 도서출판 선. 1998, 334쪽) 그는 해방 후 변기종이 주도한 자유극장으로 옮겨 연기부장을 맡아 박상익, 송재로,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2년 여 동안 활약했다. 그 뒤 서월영, 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기도 했다. 김영수의 <민중전(閔中殿)>(1945)과 <망향>(1946), <선구자>(1946) 등이 이때 공연한 레퍼토리였다. [사진 ] <박서방>의 한 장면, 황정순은 오랫동안 김승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 특유의 발성법으로 연기력 과시 김승호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한 시대를 누빈 대기만성형의 배우였다. 그가 활동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간은 한국영화 전성기와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명배우로서 부합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1967년 처음 만든 <돌무지>의 흥행 성공과 제6회 대종상 최우수반공영화상 작품상 수상으로 받은 외화수입쿼터 보상에 힘입어 제작한 <영원한 모정>(원명 ‘머슴 칠복이’ 조긍하)이 실패한 뒤에도 부채를 안고 강행한 <7인의 밀사>(원제 사화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68년 12월1일 아침 자택에서 세수를 하다가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에 얻은 외아들(김희라)이 1년 뒤 <독짓는 늙은이>(1969, 최하원)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룬 모습도 보지 못한 안타까운 51년의 짧은 생애였다. [사진 ] 영화 <돌무지>(1967)의 한 장면 [사진 ] 김승호의 장례식 장면 혀와 입술 사이에서 더듬듯이 굴려 내는 독특한 발성법과 안면을 수축시키며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는 김승호 연기의 특징이었다. <박서방>, <마부>, <혈맥> 등의 경우처럼 탁월한 연기력으로 어려운 현실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적절히 녹여내는가 하면,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로맨스그레이> 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능청스런 익살’ 연기로 관심을 끌었다. 반면에 한 가장이 화목한 가정을 깬 죄책감으로 고행의 길을 걸어간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는 오버액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단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서민 역할에서 빛났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기생 오은희 한성권번기생 최옥진 종로권번기생 박금도 빠-「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여우 오도실 동양극장여우 최선화 경무국장게 보내는 아등의 서 삼교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하략)” 1)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며 경무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물 중에는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卜惠淑(馬利),1904~1982)’도 있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연예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예의 복혜숙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 영화, 방송에서의 연기 생활은 물론 가수와 성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연예사의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 연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호정, 이월화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영화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점령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 복혜숙은 초창기 조선영화에서 담대하고 현대적인 역할을 맡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복혜숙은 한국 대중연예사에 살아있는 성좌로, 원로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해내며 60여년의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사진1) 왼쪽부터 배우 전계현, 배우 복혜숙, 홍은원 감독 (사진2) 배우 최은희(가운데)와 함께 한 노년의 복혜숙 (오른쪽)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서학을 공부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담대하고 영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한글은 물론 한학도 배워 당시 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학식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 연극, 가부키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을 받아, 그녀는 연기자가 될 생각에 수예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강원도 금화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1920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경한 그녀는 단성사의 인기 변사 김덕경의 소개로 김도산을 알게 되어 신극좌에 입단했다. 이듬해 복혜숙은 <오! 천명>으로 첫무대에 서게 되었다. 복혜숙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다닐 때면 악대를 앞세우고 공연 홍보를 위한 거리행진(街廻り)을 도맡았다. 또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를 기억하고 있던 <대위의 딸 大尉の娘>을 각색한 <누교 淚橋>를 직접 쓰고 주연까지 맡아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진3) 젊은 시절의 복혜숙 극단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1925년에 복혜숙은 연기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이 세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 극단 토월회에도 입단했다. 토월회의 인기 배우 이월화를 대체할 배우로 복혜숙이 등장했던 것이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카쥬-샤>의 ‘카쥬-샤’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2)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와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무대에서 인기를 얻은 그녀는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에서 시험용으로 내보낸 첫 방송극 <새벽종>(1926)에도 성우로 출연했다. 3) 또 복음성가를 잘 부르던 복혜숙이 음반도 냈다. 영화대본을 직접 연기하듯 읽어 녹음하는 영화극 음반인 <장한몽>(1929)이 그 시작이었다. 이어서 <쌍옥루>, <부활>, 그녀가 출연한 <낙화유수>에서 주인공의 비련의 운명을 담은 주제곡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강남달>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희> 등의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곧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4)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재다능한, 명실공이 그녀는 ‘만능 탤런트’였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많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한국 대중문화사 초창기의 한계적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문화에 투신했던 인원이 적기도 했거니와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나 가수 등의 역할 분할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복혜숙은 한국의 개척기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은 선구자이자 연예계의 지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요 활동 영역은 영화였다. (사진4) 영화 <농중조>(이규설, 1926)의 현장. 복혜숙은 아버지의 엄한 감시 때문에 새장 속의 새처럼 집안에 갇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학생 화숙을 연기했다. 연극계에서는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났던 복혜숙은 1923년 영화에도 출연을 시작한다. 첫 출연은 마호정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위생 영화 <방역 防疫>이었다. 5) 출연료 2원을 받은 영화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눕는 주인의 딸 역할을 했다. 곧 극영화에도 출연하는데, 첫 출연작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제국키네마의 <농중조 籠の鳥>(松本英一, 1924)를 번안한 이규설의 <농중조 籠中鳥, 새장 속의 새>(1926)였다. 유교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에서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사랑을 쫓는 신여성 화숙으로 분한 복혜숙은 다리를 노출하기도 하고 안식(이규설)과 손을 잡는 러브신이 있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통속 신파 번역극이라는 비판 속에도, 남녀 학생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6) (사진5) <낙화유수>(이구영, 1927)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복혜숙은 주인공 기생 역할을 맡았다. (사진6)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듬해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 선생님이던 이구영이 연출하는 〈낙화유수〉(1927)를 찍었다. 배우학교의 동기생 이원용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번에는 기생 역할이었다.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기구하게 기생이 된 여인과 젊은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이 신파극은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되었다. 7) 실연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장마철에 한강에 자살하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을 회고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오고가는 행인들이 여자가 자살한다고 구경이 났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여배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웠다. 서예를 배우는가 하면 창과 러시아 댄스, 유도는 물론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8) 그렇게 배운 솜씨들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사진7) 감독이자 배우 이규설. 복혜숙은 이규설의 작품 <농중조>(1926), <홍련비련>(1927), <순정은 신과 같다>(1928)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 뒤 ‘현대학생극’으로 불리던 〈홍련비련〉(이규설, 1927) 9) 에서 복혜숙은 지극히 우정이 깊은 두 대학생 김일과 현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 편실 역할을 했다. 이어 이규설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은 <순정은 신과 같다>(1928)였다. 둘은 지주의 아들 이규설과 소작인의 딸 복혜숙로 만나 부부로 연기했다. 같은 해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에서 복혜숙은 어부의 딸 역을 맡아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고, 만주 현지 촬영으로 이월화와 함께 출연했던 〈지나(支那)가의 비밀(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에서는 중국인 거리에 인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을 맡았다. 주연으로 활동하던 이 시절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쾌활하고 발랄한 왈가닥 ‘잇 걸(It girl)’로 불린 클라라 보(Clara Bow)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10) 해방 이전은 배우 복혜숙의 전성기였다. (사진8)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의 한 장면, 복혜숙은 사랑에 빠지는 어부의 딸 역을 맡았다. (사진9) <지나 가의 비밀>(유장안, 1928) 신문 광고. 만주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복혜숙은 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이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25일자 6면 하지만 배우 활동만으로 생활을 꾸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1928년부터 8년간 카페 비너스를 운영했고, 이때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두 젊은이들의 사랑의 도피를 다룬 영화 박기채의 <춘풍>(1935)에 출연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안종화의 <역습>(1936)에는 살인자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면서 카페 비너스를 제작 사무실로 제공하면서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했다.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정희와 함께 방을 쓰는 음반회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식민지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 感激の日記>(신경균, 1943),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4)를 비롯한 다수의 어용영화에도 출연했다. (사진10) <역습>(안종화, 1936)의 한 장면 (사진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 음반회사 직원 모경숙 역의 복혜숙 1920년대 말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아이콘이던 복혜숙이 연기를 전환하게 된 계기는 최인규의 <수업료>(1940)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동시녹음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30대 복혜숙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식 내외가 행상을 하러 도시로 나가자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달을 돌보기 위해 넝마를 주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당시 그녀 나이 37세였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노역을 주로 맡았다. 인자한 어머니,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상인, 유난스런 할머니 같은, 그녀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조역으로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 <아내의 얼굴>(KBS, 1962), <아씨>(TBC, 1970), <옛날 나 어릴 적에>(MBC 신년특집, 1981) 같은 작품에도 종종 출연하였다. (사진12) <수업료>(최인규, 1940)에서 복혜숙은 병상에 누워서도 어떻게든 손자 영달이의 수업료를 마련해보려는 애달픈 할머니를 연기했다. 해방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재와 필름이 부족해 영화제작이 열악했던 시기,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계에서 그녀 역시 주조연을 마다않고 성실히 한몫을 했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어머니를,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는 똘똘이의 어머니를 맡았다. 또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여명〉(안진상, 1948), 〈수우〉(안종화, 1948),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도 작은 역이나마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입대해 공연을 하며 전장을 누볐고, 잠시 머물렀던 마산에서 촬영한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에서는 전선에서 실명한 아들(최현)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3) <여명〉(안진상, 1948) 신문광고 (사진14)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신문광고 (사진15)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광고.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 주는 어머니 복혜숙이 보인다. 전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에서 복혜숙은 전성기를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는 거의 최초의 여성 배우였다. 더 이상 주연을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었지만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아리랑>(김소동, 1957), <조춘>(유두연, 1959), <삼등과장>(이봉래, 1961), <청춘교실>(김수용, 1963), <여판사>(홍은원, 1963), 그리고 미공보원(USIS-Korea)이 제작한 문화영화 <황토길 Litany of hope>(양승룡, 1962)에서 어머니와 할머니 역할을 전담하면서 꾸준히 식지 않은 연기력과 열정 보여주었다. (사진16)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에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의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7) <삼등과장>(이봉래, 1961) 구소장(구봉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사진18) <황토길>(양승룡, 1962)에서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시인 한하운(김웅)의 어머니로 출연한 복혜숙 (사진19)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서는 손녀 셋을 거느린 왈가닥 할머니로 등장했다. (사진20) <여판사>(홍은원, 1963)에서는 치매를 앓고 있어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는 시할머니 역할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배우 복혜숙이 자신의 영화에서 열연했던 강렬한 장면을 회고한 적이 있다. 해방촌 빈민들의 군상을 그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에서 김덕삼(김승호)은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중신을 선 대폿집 주인(복혜숙)에게 무작정 따지러 간다. 아내를 찾아내라는 어깃장을 놓는 덕삼과 이 어이없는 주장에 맞서는 꼿꼿이 맞서는 대폿집 주인 아낙의 대단한 육탄전이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복혜숙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김승호와 몸싸움을 하면서 거칠게 대거리를 하는데,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했던 강단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 김수용의 또 다른 영화 <사랑의 조건>(1979)에서 일흔이 넘은 복혜숙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필사의 힘으로 한 겨울 눈 내리는 대관령을 넘는 할머니로 특별출연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모진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없던, 여전히 두 눈에서는 광채를 내뿜으며 서슬 퍼런 연기를 해내던 노년의 복혜숙을 잊지 못한다. 12) (사진21) <혈맥>(김수용, 1963) 중 김덕삼(김승호)과 대폿집 주인(복혜숙)의 육탄전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 무대 위와 또 카메라 앞에 있었다. ‘남들이 안하던 때에 배우로 입문해 연예계의 여러 방면에서 초창기 증인으로 또 산 역사 노릇’을 했다.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복혜숙 여사의 연기생활 40주년 기념하는 스타의 밤’에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기꺼이 함께 해줄 만큼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를 받았다. 또 ‘뭐든 뒤로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또 연예계를 통찰하는 식견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로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13) 18세부터 연기해 온 그녀의 일대기가 특별드라마 <얼굴>(1981, KBS)로 만들어질 만큼 그녀의 생 그 자체가 한국 대중연예사이기도 했다. (사진22) <대한뉴스>(제 387호, 1962) 연예계 소식 중. 962년 10월 12일부터 2일간 시민회관에서 복혜숙의 연기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원우 공보부 장관이 복혜숙에게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영화계의 원로로서 업계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섰다. 1954년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봉에 섰고, 한국영화협회가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에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 1955년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10년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은막 인생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영화는 진용(박재호)의 할머니 역을 맡은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였다. 하지만 78세의 그녀는 아직도 ‘못 다한 일 많아 은퇴할 생각이 없’ 14) 었다. (사진23)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 포스터. ‘윤봉춘 복혜숙 지휘’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24)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에서의 복혜숙 1)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9권 1호, 162~166쪽. 2) “명우와 무대(7), 복혜숙 양의 『카쥬-샤』, 부활의 여주인공으로, 토월회 무대에”, 《삼천리》 제5권 4호, 1933년 4월, 11쪽. 4) 복혜숙의 생애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해 요약 기술하였다. 『여성실화: 빛나는 성좌 복혜숙』, 명서원, 1976: 이영일, 「스크린을 빛낸 예도 60년-복혜숙」,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황문평, 「여성 연예계의 선구자 복혜숙」, 『삶의 발자국』(1), 선, 1988; 조영만, 「여배우 복혜숙의 활약」, 『30년대 문화예술인들: 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복혜숙·이구영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복혜숙」, 이승희 외 지음,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한상언, “한상언의 <한국영화스타>3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오마이스타, 2004년 10월 1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214631 4) 이동순,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조선Pub, 2013년 10월 18일, 조선Pub 홈페이지 http://pub.chosun.com 5)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복혜숙 편」, 월간 《영화》 1974년 1월호, 53쪽;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3> 영화계 데뷔”, 《동아일보》 1981년 5월 6일 7면. 6)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5면. 7) 안종화, 앞의 책, 157쪽; 김남석, 「배우 복혜숙 연구」, 『인문과학연구』 1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123~125쪽. 8)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1>”, 《동아일보》 1981년 4월 29일 7면. 9) KMDb에는 이필우가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지상에는 이규설이 감독으로 명시되어 있다. “홍련비련”, 《동아일보》 1927년 2월 5일 5면. 10)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앞의 책, 144쪽. 11)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32세 때부터 노인역만”, 월간 《영화》 1974년 3월호, 68쪽. 12) 김수용,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2014년 2월 26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http://siwff.tistory.com/503 13)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7> 첫 TV드라마”, 《동아일보》 1981년 5월 26일 7면. 14)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100> 복혜숙 연예생활 60년”, 《동아일보》 1981년 5월 30일 12면.
1969년 1월 27일 한 남자가 어린 조카와 함께 여권을 위조해서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를 경유한 다음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서 미리 대기 중이었던 중앙정보국 직원들에게 체포되었고 서울로 송환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전쟁 중이었고 한국은 이 나라에 파병 중이었기 때문에 모든 절차는 양국 간의 협력하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 남자의 이름은 이수근.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그는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극적으로 남한으로 귀순하였고 이 사건은 냉전 관계였던 남북한의 긴장 속에서 남한 체제의 우위에 대한 전리품처럼 보도되었다. 이수근은 귀순한 다음 중앙정보국 판단관 대우를 받으면서 반공강연과 북한체제 비판을 위한 홍보대사로 활동하였다. 북한에 아내가 있었지만 새로 결혼을 했고 이 귀순은 대대적인 언론보도와 함께 거의 영웅적인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수근은 북한에 두고 온 아내의 조카 배경옥과 남한에서 탈출할 결심을 했고 하노이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중앙정보국은 이수근이 이중간첩이었으며 남한에 위장 귀순한 다음 고급정보를 북한에 전달하기 위해 출국 시도를 했다고 발표했다. 1969년 5월 10일 이수근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 과정에서 이수근의 출국을 돕거나 관련된 자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수근은 판결에 대해 항소했지만 형이 확정되었고 그로부터 2개월만인 1969년 7월 2일 사형을 집행했다. 또한 이수근과 동행한 조카 배경옥은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고 이에 항소하여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한국사회는 간첩이라는 단어 앞에서 창백해졌다. 간첩 이수근 약간 우회를 해보자. 장르는 약속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생성되고 재편된 다음 수많은 텍스트들의 시행착오들로 이루어진 이합집산의 과정 끝에 하나의 양식(mode)을 갖게 된다. 물론 처음 시작은 시장 안에서 박스 오피스 목록에 올라온 영화의 성공을 재생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시장 안의 비즈니스는 이 성공에 어떤 법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가정을 하였다. 반복 어구. 어떤 법칙.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이 있을까. 이때 이 과정에는 반복적으로 영화가 시장에 던져진 다음 대중들과의 (이윤을 사이에 둔) 협상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펼쳐나가는 자기 운동 과정이 포함된다. 여기서 핵심은 장르 안에서 그 스스로 발전하는 선형진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수없이 많음 모델들이 도전을 해오고 그 과정 안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영화에서 (특별하게 뮤지컬) 장르를 연구해 온 스티브 닐은 장르의 원형이란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뿐 모든 장르 영화들은 그 자체로 모두 예외적인 사례라고 푸념을 했다. 이때 장르 영화들은 약속 안에 영화 바깥으로부터 그 약속 자체를 기형적으로 비틀기 시작하거나 혹은 예상치 않은 블랙홀, 때로는 긴장할만한 새로운 코드들과 만나게 된다. 영화가 제작되고 있는 그 순간의 시끄러운 사회적인 사건이나 위협적인 혹은 흥분할만한 정치적인 분위기, 지적학적으로 가까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하여튼 역사의 계기와 토픽으로부터 장르는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러오는 대중 관객들은 극장에 들어설 때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잠시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잘 알려진 사례. 로빈 우드는 1970년대 공포영화들이 다루는 ‘타자’들이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흑인, 여성, (청바지를 입은)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1960년대 대항문화들, 그중에서도 인종 인권운동, 페미니즘, 좌파 정치운동에 대해 전통적인 WASP 보수적인 사회가 느끼는 두려움의 도상화(iconography)라고 설명했다. 김소영은 좀 더 흥미로운 제안을 하면서 한국 공포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결의 패턴으로 며느리 귀신과 시어머니의 대립을 한 쌍으로 제시했다. 이것은 장르가 지역 문화의 정치학에 따라 새로운 계열을 만들어내는 이접적 종합의 한 예가 될 것이다. 블리스 쿠아 림은 이 논쟁을 좀 더 멀리 밀고 나아가면서 판타스틱 영화들은 어떻게 장르 안에 서로 다른 시간을 공존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탈구시키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말하자면 장르 안에서 유령들은 언제 귀환하고 또한 어떻게 존재하며 그런 다음 결국 그들은 누구에게 추방되는가, 에 의해 멜랑콜리해진다. 나는 이 말을 전적으로 벤야민에 기대서 하는 중이다. 간첩 좀 이상한 말이지만 스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 말이 왠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간첩이라고 하면 무언가 오싹해진다. 간단한 실험. 존 르 카레의 고전적인 ‘스파이 스릴러’인 「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를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간첩」이라고 번역한다면 단지 그 차이를 뉘앙스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반공 국가 남한에서 북한으로부터의 현실적인 위협은 세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학습되었다. 한국전쟁 세대에게는 그 공포가 재침(再侵)이라면 다음 세대에게는 우리들 사이에 스며든 ‘그림자 같은’ 간첩과 거의 ‘슈퍼맨’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것으로 ‘코스프레’ 한 무장공비로 이원화되었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오랜 시간에 걸쳐 학습된 전형성은 여전히 ‘남한’ 영화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를테면 < 은밀하게 위대하게 >의 ‘북한에서 남파한’ 세 명의 ‘간첩’ 주인공들) 역사의 우여곡절. 1980년 5월 광주 ‘이후’ 남한에서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이 정치운동과 (현장 참여의 전술을 학습하기 위하여) 실천적 투쟁을 전개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자기학습을 통해 ‘주체사상’을 수용하는 세대가 나타나면서 간첩이라는 반공 ‘어젠다(agenda)’는 묻혀 버렸다. 그 유명한 학생운동권 내부의 NL과 PD의 사상노선투쟁.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후 세습한 김정일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긴장 관계 안에서 평화정책을 유지했고 그 기간 동안 남한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점점 북한은 ‘종이 늑대’로 그 이미지가 변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의 성장이라는 국제관계 안의 복잡한 정치 공학이 작동하고 있으며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으로 상징되는 교류도 큰 몫을 차지했다. < 쉬리 >와 < 간첩 리철진 >을 거쳐 이데올로기를 탈색시켜나간 21세기 간첩의 이미지는 그래서 < 의형제 >처럼 거의 위협적이지 않거나 (심지어 매력적이거나) 혹은 <은밀하게 위대하게>처럼 우스꽝스러워졌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겠다. 간첩은 더 이상 괴물이거나 추악하거나 교활하기는커녕 순정파 ‘꽃미남’(들)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에 만들어진 간첩영화 < 운명의 손 >을 보고 있으면 간첩은 ‘미스터리’ 하거나 ‘스릴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공포영화에 나타나는 존재처럼 유령이면서 동시에 멜로드라마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한들이다. 여기서 그들은 장르 안에서 활동하는 약속의 기호가 아니라 공기 속의 비-존재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생활의 일부이다. 간첩을 점점 이야기의 바깥으로 밀어낸 것은 그만큼 남한 사회에서 타자가 스며들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네트워크를 이루고 일상생활이 안정적인 구조로 들어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서 간첩 영화는 액션 ‘다찌마와리’ 영화와 공포영화 사이에서 교집합을 이루며 그 하위 장르(sub_genre)가 되어갔다. 물론 1970년대에 나타난 일련의 ‘여간첩’ 영화들, <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 > < 특별수사본부 배태옥사건 > <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은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나는 세 개의 서로 다른 층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을 제시하였다. < 그 여자를 쫓아라 >가 복잡한 이데올로기의 네트워크를 담은 영화는 아니지만 1970년은 이 영화를 그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이때 임권택 은 자신이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언제나, 언제나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지는데, 임권택은 자신의 영화가 북한과 어디선가 만나게 될 때 갑자기 움츠러든다. 나는 단지 그의 전기적 측면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임권택은 이따금 영화 안에서조차 자기가 어떤 상황에 반복적으로 다시 불려간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 어떻게 해서든 그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 보기를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임권택은 그 안에서 수동적 주체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필사적이 된다. 게다가 1970년은 모든 상황에서 불리했다. 베트남을 경유하여 새로운 냉전의 분위기가 사회를 덮쳤고 박정희는 제7차 대통령 선거를 그 이듬해 목전에 두고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자신의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영화산업은 그 안에서 정치 공학적으로 가냘픈 부문에 지나지 않았다. 임권택은 그럴 때마다 자신의 자리를 최대한 수축시켰다. 거기에는 어떤 은유나 상징의 자리도 없다. 그 안에서 상상력은 몸을 숨겨야만 했다. 현재라고 가정된 순간. 그 안에 멈춰서야 할 때 장르는 안전한 보호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임권택은 장르의 규칙에 따르는 것을 바깥의 법칙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종종 장르 안에 머물 때 사유가 불가능한 것처럼 말하곤 했다. 물론 그것은 오해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와 달리 충무로에서 장르란 대부분의 경우 대중적인 유행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법칙 없는’ 법칙이라는 것을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임권택은 수동적인 반복 안의 반복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반복이란 본질상 상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임권택이 반복이라고 생각한 것 안에는 이미 그 내부를 차지하고 있는 자극과 반응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장르 안에서 반복하는 것은 차이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재현 사이를 차지하는 불화의 활동이다. 리오타르라면 규칙이 명령대로 수행되지 않을 때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라고 물어볼 것이다. 나는 소박하게 질문하고 싶다. 무엇이 영화를 피곤하게 만드나요. < 그 여자를 쫓아라 >는 잘 설명되지 않는 침묵과 우울한 명랑함이 기묘하게 서로 얽혀 들어가는 영화이다. 침묵? 그렇다. 이상할 정도로 이 영화는 인물들이 대사를 자제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게 미학적인 의도라기보다 무언가 말실수를 두려워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좀 더 이 영화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의도적인 명랑함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우울함을 숨기기 위해서이기라도 하듯 명랑한 척한다. 아버지의 죽음이 감춰놓은 비밀을 찾기 위해 홍콩에서 귀국한 딸 아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랑함. 왜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애도를 표현하지 않는 것일까. 그녀를 뒤쫓으면서 비밀을 파헤치고 한편으로는 사랑에 빠지면서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타나는 남 형사의 과장된 명랑함. 나는 이 세계가 1970년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이미 결정된 상황. 이때 이 우울한 기분의 바탕에는 운명이 무겁게 드리워진다. 이미 되돌이킬 수 없는 운명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장르에서 조합은 운명을 결정한다. 이때 이 명랑함은 마치 그들의 운명에 대한 방어술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 영화가 시작했을 때 먼저 긴 침묵이 이어진다. 임권택 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1970년을 “거의 성의 없이 그저 주문이 들어오면 영화를 찍어내는 어떤 목표도 없던 시절이”라고 말했지만 이 시퀀스는 적어도 영화를 연출한다, 는 문제에서는 자신감을 과시하는 순간이다. 시작하자마자 우리들의 기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시골 초등학교에서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하굣길에 나서는 장면. 그런 다음 텅 빈 교정에 어둠이 내리자 이 학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내들이 한 명씩 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내들은 서로 잘 알고 있다는 듯 아무 대사가 없다. 그저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뿐이다. 그들은 각자의 임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건 그들뿐만 아니라 영화의 동선과 쇼트들의 방향도 망설임이 없다. 펼쳐지는 시퀀스. 그 안에서 이야기는 아직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그러므로 어디로 흘러갈지에 대해서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오직 동선의 탐색만이 있다. 임권택은 시작하자마자 13분 40초에 이르는 (구태여 부르자면) ‘금괴 프롤로그’를 최소의 대사로 진행시킨다. 이때 그 대사가 너무 적어서 이 시퀀스를 보고 나면 거의 대사가 없다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시작을 대사 없이 진행시키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아무 준비가 안 되었고 영화 안의 인물들은 이야기의 네트워크를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그들. 이 간극은 생각보다 커서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임권택은 분명히 그걸 즐기는 중이다. 그래서 그걸 더 벌려놓으려고 한다. 이 사내들은 조심성 없이 움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장실에 방문하여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 다음 밤늦게 교무실에 남은 교장과 (아마도) 수위를 망설임 없이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런 다음 장비를 꺼내 바닥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적을 숨길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미 옆방에는 두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그걸 어딘가에 숨길 생각도 없이 여기저기 뒤져나가던 그들은 무언가를 찾자마자 즉각 마룻바닥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금괴를 찾아낸다. 이때서야 비로소 이들은 이 금괴를 찾기 위해서 잠시 모인 것뿐이지 그들이 한 패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시선을 통해서이지 여전히 어떤 대사도 없다. 임권택은 주의 깊게 금괴를 발견하는 순간 우두머리의 처분을 바라보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그저 금괴만을 탐욕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그건 이들 사이에 우두머리가 없다는 뜻이다. 시선을 잡아당기는 힘.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들은 각자 모였지만 각자 헤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금괴를 각자의 몫에 따라 아직 분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섯 명이고 자동차는 다섯 명이 탈 수 있을 뿐이다. 그러자 한 사내( 장동휘 )가 제안한다. 자, 여기서 누구 한 명이 내려야 할지를 카드로 결정하지. 우리는 장르 영화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음을 잊으면 안 된다. (장르의 약속에 따라) 여기서 내리는 단 한 명이 금괴를 차지할 것이며, (스타의 법칙에 따라) 내리는 사람은 장동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 내기의 쇼트를 찍지 않았다. 빈 쇼트의 술래잡기. 할리우드가 발명한 천재적인 빈칸. 임권택의 고전적인 배움의 편집. 여기서 각자의 계열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오로지 동선만 활동하기 시작한다. 임권택은 이 대사의 쇼트에서 한밤중에 자동차가 달리는 장면을 바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 한 쇼트가 빠지면서 누가 이겼는지 혹은 졌는지, 누가 내렸는지 남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대신 금괴를 차지한 자동차는 황급하게 달려가다가 길목에서 기다리던 누군가에 의해서 폭발하고 만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이다. 그리고 거의 말이 없는 이 도입부는 (다소 놀랍게도) 영화 전체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 그 여자를 쫓아라 >는 이상할 정도로 균형 감각을 잃은 영화이다. 이 위태로운 균형이 미학적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결국은 그러해야 한다, 는 연출의 결론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작한 영화는 내내 이 간극을 줄일 생각이 없다. 폭발로 인해 시체를 분간할 수 없는 그 여섯 명 속에 아버지 민충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홍콩에서 귀국한 딸 아미는 아버지의 생사를 놓고 그 행방을 찾아 나선다. 계속해서 아미를 위협하며 그녀를 암살하려는 악당들이 나타나고 그때마다 아미를 구하려는 남 형사가 개입한다. 한편으로는 아미와 남 형사의 (감정적인) 간격을 좁혀들어 오면서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 민충식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간다. 한쪽은 가까워지고 다른 한쪽은 점점 뒤로 물러난다. 아미는 두 번 아버지와 보낸 시간을 떠올린다. (flash_back) 한 번은 범죄자들을 불러들인 다음 금괴와 함께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를 들으면서 자신이 돈 가방을 들고 집을 떠나 홍콩으로 가던 날이다. 그때 아버지는 아미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현금으로 바꾼 가방을 건네면서 “아버지는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건넨다. 다른 한 번은 커튼 뒤에 숨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심장으로부터 10센티 빗나가게 총을 쏘아 그녀를 덮치려던 사내를 살해한 현장에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때 아버지는 그저 아무렇게나 허공에 던진 맥주 캔을 빠짐없이 명중시킨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사격술을 가르쳐준다. 이 두 개의 에피소드는 몹시 이상해서 아미의 아버지 민충식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심중조차 헤아릴 수 없게 만든다. 지금은 (다시 한 번 당신을 환기시키지만) 1970년이다. 국내에서 총기는 불법 소지이며 영국령이었던 홍콩에서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아미에게 사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한 가지 더. 그런데 왜 아미는 홍콩에 간 것일까.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한 것일까. 임권택 은 미스터리 장르를 불합리한 세계라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가 지나칠 정도로 역사의 무게와 자본의 운동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상식적이며 합리적인 세계 안에 사람들이 던져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무자비하게 어떤 합법칙성의 규칙에 따라 부서져 가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여기에는 슬픔도 동정도 없다.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의 잔인한 동어반복. 임권택은 영화와 현실 세계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 좋다고 믿는다. 그것은 단순하게 세계를 재현하려는 방식으로서의 리얼리즘에 대한 믿음이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그것만이 허구에 불과한 자기 영화의 이야기를 보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발적으로 거의 불투명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희미하게 보이는 관계 속으로 빠져든다. 마치 안개와도 같은 상황. 이 세계에는 어떤 비밀이 있으며 그건 끝내 밝혀져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키기라도 해야 하는 것만 같다. < 그 여자를 쫓아라 >를 둘러싼 것은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초점을 놓친 것만 같은 그 희미함이다. 어쩌면 이것은 임권택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응하는 한 방식일 지도 모른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잃어버린 관심. 아무것도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아닐 때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력을 잃어가는 자발적인 포기.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그저 영화를 만들고 있을 뿐이에요. 냉전 체제하에서 묵묵히 자기 임무를 수행하기라도 하듯이 어떤 불평도 없이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감독. 하지만 지금 그가 만들고 있는 이야기는 아무 것도 모르는 딸을 데리고 10억 원이나 하는 금괴를 들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수근이라는 그림자. 아주 희미한 그림자. 하지만 그때 <그 여자를 쫓아라>를 보면서 어떻게 일 년 전의 그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영화는 모른 척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마치 자기 자신이 (존 르 카레의 소설 속의) 앨릭 리머스같은 태도를 취한다고나 할까. 희미해지는 시야 < 그 여자를 쫓아라 >가 그렇게 괴상해지는 것은 이야기가 절반을 지날 때이다. 아버지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찾아가던 아미는 전문 내기 도박꾼들이 모이는 (이른바) ‘하우스’를 방문한다. 여기서 한눈에 사기도박을 알아채고 비밀을 밝힌 다음 아미는 마담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물론 마담은 그녀에게 알려줄 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마담은 아미가 아버지와 함께 공모하여 마치 그녀도 행방을 모르는 척하면서 진정한 행방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제 발로 ‘하우스’를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때 남 형사가 악당들로부터 아미를 구해내고 ‘하우스’로부터 탈출한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심야에 탈출한 남 형사와 아미의 차를 뒤쫓아 검은 세단이 황급히 따라붙는다. 고문에서 깨어난 아미는 쫓기는 차 안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그녀가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의 장면(point_of view_shot)들이 모두 초점이 안 맞는다.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앞이 보이질 않아요” 거의 결정적인 한 마디. 나는 이 시기의 임권택 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신체 훼손의 테마가 등장하고 있음을 눈여겨본다. 종종 임권택의 주인공들은 망설임 없이 상대방에게 신뢰의 표현으로 망설임 없이 팔을 잘라 내주거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 < 원한의 두 꼽추 >) 혹은 눈이 먼다. (< 돌아온 왼손잡이 > < 애꾸눈 박 >) 이것은 액션 장르 영화의 규칙이 아니다. 물론 이 시기의 충무로 액션 활극 영화들은 과도할 정도로 홍콩 쇼 브라더즈 무협영화인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에 영향을 받았고 신체적인 불구가 되는 것이 마치 활극을 위한 주인공의 영웅적 시련을 거치는 정화 과정처럼 다루어졌다. 몇 번이나 반복된 질문에서 임권택 감독님은 약간 거리를 유지하면서 “거, 하늘을 날고 하는 액션들은 전혀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 영화에 알 수 없는 힘이 넘쳐나고 있었던 건 사실이죠. 그땐 영화 하는 사람들이 다들 그 영화를 보고 왔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주인공을 따라가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눈이 멀면 단지 주인공의 일부 기능을 상실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기능 일부를 손상당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영화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활동하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역할은 수동적인 상태에 놓이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 나는 < 그 여자를 쫓아라 >가 < 서편제 >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좀 더 까다로운 조건. 아미가 눈이 머는 이 시퀀스는 거의 정확하게 영화 절반에 해당한다. 이미 절반을 넘긴 이 영화에서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멈출 방법은 없으며 아미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력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익힐 수 있는 시간도 마찬가지로 부족하다. 영화에서 절반이란 애매한 시간이다. 히치콕이 < 사이코 >에서 절단시킨 이 이상한 시간. 게다가 아미는 지금 당장 수술을 받으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데도 자신이 아버지를 찾는 일이 급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걸 거절한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일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만났을 때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대답은 정반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임권택 은 절반의 시간에 이르렀을 때 누구보다도 이제 아미가 아버지를 대면할 시간이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장르에서의 운명의 시간. 비밀은 밝혀질 것이고 조각난 정보들은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미는 그것을 미루려고 하는 중이다. 이때 이 대면에서 무언가 불균형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아미가 눈이 멀자 정작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진다. 그녀는 더 이상 이동이 자유롭지 않고 또한 작은 동선조차 위험해진다. 게다가 그녀는 갑작스레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조그만 활동도 할 수 없다. <그녀를 쫓아라>는 액션 활극 영화이고 ‘그녀’ 아미는 시력을 잃고 거동조차 불편해진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 아미의 시력을 놓고 벌이는 게임의 시퀀스는 거의 없다. 이를테면 1968년 6월 28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 어두워질 때까지 >에서 장님 오드리 헵번은 해가 진 다음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모든 방의 불을 끄고 방의 배치를 알고 있는 자신의 지각을 이용하여 힘겹게 싸운다.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 기나긴 마지막 시퀀스. 하지만 임권택 은 그런 시퀀스를 제시할 생각이 전혀 없다. 혹은 불가능하다. 아미는 갑자기 눈이 멀었고 홍콩에서 돌아온 그녀가 머무는 곳은 거의 숨을 데가 없는 호텔 방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 하나이다. 그저 호텔에 머물면서 사건이 올바르게 돌아가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인질이 되어 이야기의 미끼가 되는 것이다. 미끼? 그렇다. 스스로 해결의 일부가 되어 이야기를 다른 차원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구조의 일부가 된 희생. 차라리 음모의 잉여와도 같았던 그녀가 (끊임없이 아미의 주변 인물들은 그녀에게 홍콩에게 돌아가기를 권한다) 비로소 빈자리를 채우는 순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구조 안에서 오작동하고 있던 자기의 올바른 역할. 이때 이야기는 갑자기 추락하듯이 마지막 시퀀스를 향해서 곤두박질친다. 물론 아미의 아버지는 죽지 않았으며 그녀가 끌려온 곳은 아버지 민충식의 지하실이다. 더없이 적절한 장소. 이제 비밀이 밝혀질 시간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왜 아미가 앞을 보지 못하는 수난을 선택했는지 알게 된다. 물론 아미는 이 결정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가 미처 알지 못하면서 내린 이 결정은 마치 이미 운명이 알고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히스테리로 반응하는 선택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미 알고 있는 운명. 나는 지금 장르 안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환기시키고 싶다. 아미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주어진 자기 자신의 자리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중이다. 이때 아미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 자기의 주체를 포기한 채 오로지 수동적인 자리에서 어쩔 줄을 모른다. 거기서부터 약간 줄거리를 더듬어보자. 아버지 민충식은 금괴를 들고 서해안을 거쳐 북한으로 갈 계획이다. 그는 자신이 모은 범죄자들을 모두 죽였을 뿐만 아니라 아미를 데려온 수행자들도 죽인다. 이때 민충식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그는 금괴를 찾는 임무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가까스로 찾은 금괴를 들고 북한으로 올라갈 생각인 것이다. 여기서 미처 생각지 않았던 장면이 아미와 민충식 사이를 새롭게 매개한다. 사건이 시작되기 훨씬 전의 이야기.(flash_back) 일제 식민지 강점하에서 민충식은 독립운동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다음 동지 박만수를 밀고하고 살아남는다. 이때 박만수의 갓난아기인 딸이 그의 시신 곁에서 울고 있고 민충식은 “속죄의 뜻으로 길러”야 한다고 결심한다. 물론 갓난아기인 그 딸이 아미이다. 민충식과 함께 살아남아 회사를 경영하는 김 사장은 함께 북으로 올라가자는 요구에 거절하지 못하면서 계속 “이 돈이면 외국에 가서도 살 수 있는데”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민충식은 단호하게 대답한다. “자네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나?” 민충식은 영웅이 되고 싶어서 북한에 가고 싶어 한다. ‘인민영웅’이 된다는 것. 우리는 한국 근대사 안에서 이루어진 충무로 장르영화의 규칙에 따라 민충식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 민충식은 좌익계 독립운동의 노선을 따랐을 것이며 한국전쟁 중에 휴전이 되면서 북한에 올라가지 못하고 남한에 남아 머물면서 언제든지 ‘귀환’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남한에서의 민충식은 (그의 직업이 무언지는 설명이 없지만)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어 큰 부를 축적했으며 (그는 별장에 가까운 집에 살고 있다) 남한에서 오로지 아미만을 키우면서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 (그는 어떤 가족도 없다) 민충식은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단지 “영웅이 되기” 위해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에 가고 싶어 한다. 민충식은 완전히 모순된 목표를 향해 접근하는 중이다. 우리가 민충식을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이수근을 1969년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 사이의 우울한 공명현상. 이때 임권택 이 여기서 수행하는 연출의 목표는 민충식과 아미의 대면을 최대한 미루는 것이다. 아미는 이미 민충식의 수중에 들어왔고 민충식은 김 사장과 함께 금괴를 영구차에 실은 다음 서해로 향할 때까지도 눈앞에 있는 아미에게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반대로 실려 가는 아미는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 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아미가 자기를 영구차에 실어 데려가는 사람이 아버지 민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 차를 가로막고 나선 남 형사와 그의 동료의 차와 카 체이스를 벌이는 순간 내뱉는 욕설의 음성 때문이다. 아버지의 욕설. 그건 이제까지 아미의 기억 속에서 항상 다정하고 온화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다. 보지 못하는 아미가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때 아버지는 같은 목소리로 두 인물이 된다. 여기에는 찢어진 아버지, 서로 다른 아버지, 두 명의 아버지가 분간할 수 없게 희미한 모습으로 아미의 눈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민충식을 보지만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 아마 이보다 더 장르 안에서 이중간첩에 대한 창백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1970년 그해 영화의 순간은 달리 없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조준하기 임권택 은 이 순간을 좀 더 거북하게 만든다. 거북하게? 그렇게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남 형사가 몰고 온 자동차를 피해 달아나던 영구차는 탈선해서 시냇가에 빠진다. 그런 다음 민충식과 남 형사가 그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총격전을 벌이다가 한 자루를 시냇가에 떨어트리고 난 다음 남은 한 자루를 놓고 ‘주거니 받거니’ 대결을 벌인다. 주인을 옮겨가는 총의 운동. 전형적인 서부극의 컨벤션.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임권택은 안소니 만의 영화를 품고 있다는 감상이 떠오른다. 나는 좀 더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아미는 차가 시냇가에 처박힐 때까지 정확하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때 민충식과 함께 북한으로 가려던 김 사장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아미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미안하다, 아미야. 저놈은 네 아비가 아니다. 민가 놈은 네 아버지를 죽인 원수다” 총을 놓고 싸우느라 잠시 잊어버린 아미는 차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민충식과 남 형사를 향해 걸어가다가 시냇가에 던져져 우연히 발에 밟힌 총을 들어서 그들을 향해 겨눈다. 그때 그녀가 겨누는 사람은 (당연히!) 남 형사가 아니라 아버지 민충식이다. 이제까지 떠돌던 임권택 의 의도는 비로소 도착한다. 민충식은 아미를 버리지 않고 기른 유일한 사람이다. 그가 아미의 아버지를 배신했지만 자신의 배신에 대해서 민충식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겠다는 말에 깜짝 놀란 김 사장의 반문에 “속죄라도 해야지”라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여기에 어떤 다른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아미는 아버지에게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있고 민충식은 아버지로서의 의무 이외의 어떤 것도 아미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마지막 순간 아미에게 두 가지 요구의 명령이 내려진다. 하나는 어떤 조건 없이 매번 아미를 위기에서 구해주면서 그녀가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남 형사가 지금 민충식의 총구 아래 있다는 것이다. 앞선 한 발은 빗나갔지만 이번에는 명중할 것이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남 형사는 그 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 사장이 좀 전에 알려준 대로 민충식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민충식이 이제까지 아미를 키워준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아미는 지금 당장,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미처 망설일 틈도 없이,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아미의 곤궁과 임권택 의 그것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아미는 두 개의 층위에서 결정을 망설이고 있다.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냐, 사랑했던 사람이냐, 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 사장의 말을 믿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아미는 장르 안에서만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임권택으로 옮겨가면 질문은 까다로워진다. 그때 이 곤궁은 정확하게 아미와 반대의 차원에서 오작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임권택이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민충식이 또 다른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미가 민충식을 쏘는 것은 이제까지 자기를 길러준 아버지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이때 그런 행위를 해도 괜찮은가, 라는 질문은 도덕적이지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려버리면 윤리적인 결정이 되는 곤궁에 떨어진다. 도덕과 윤리 사이의 간극. 이때 임권택의 입장에서 아미가 민충식을 총으로 쏘아서 아버지의 죽음을 선택했을 때 얻는 이득에서 남 형사를 구하는 것은 철저하게 부차적인 자리로 물러난다.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방아쇠를 당겨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기른 아버지를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인가. 이때 아버지란 무엇인가. 두 명의 아버지. 아버지는 딸의 첫 번째 사랑의 (불가능한) 대상이자 욕망의 전술을 기입하는 (주인으로서의) 타자이다. 약간 따분하지만 비유를 가져와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미 아버지에 대한 아미의 두 개의 회상 속에서(flash_back) 하나가 그녀에게 사격을 가르쳐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정작 이 순간이 올 때까지 아미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총을 쏜 적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총을 쏘아야 할 순간 아미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 아이러니한 설정. 장르 영화 안에서 총을 남근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클리셰에 가까운 해석이다. 하지만 이 상투적인 비유가 여기서 이상하게 뒤틀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민충식은 아미를 아들로 키우고 싶어 한다. 혹은 아들의 기표를 부여한다. 그 비유를 고스란히 이어받으면서 약간 반격하듯이 반문을 하고 싶다. 만일 아미가 여기서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가장 바보 같은 대답은 남 형사가 아미를 도와줄리 없다는 것이다. 그 대답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그래도 남 형사는 아미를 도와줄 것이다. 정말? 물론이다. 왜냐하면 남 형사는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으로 월북하려는 민충식을 추적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의 오해가 핵심이다. 아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체 이야기를 덮어씌우면서 이야기의 논점을 흐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총은 아미가 끝내 아들이 되지 못하는 것을 증명하는 기표이다. 그녀는 남근을 부여받았지만 그걸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사용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야기의 논점을 흐릿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임권택은 어떻게 해서든 이 영화가 북한으로 월북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 그 여자를 쫓아라 > 를 보았을 때 첫 인상은 마치 아미와 남 형사의 로맨스 활극처럼 보일 정도이다. 위장하는 주인 기표. 하지만 우리는 경우의 수를 모두 셈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가장 이상한 계산이 하나 더 남아있다. 쏘는 대신 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 달리 처음부터 쏠 생각이 없는 결정이 하나 더 있다. 이 순간 아미가 가진 곤궁과 달리 임권택을 갑자기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데려간다. 그것은 북한에 아미를 데려가려는 민충식을 긍정하는 정치적 제스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갑자기 음산한 그림자가 떠돌기 시작한다. 민충식의 죽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보자. 그런 다음 이 모든 기괴한 수익과 손실의 계산 안에서 벌어진 활동을 한 자리에 모아보자. 임권택 은 이 짧은 순간의 셈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지를 알아챈 다음 그 결정적인 순간을 비껴간다. 어떻게?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 셈을 치를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린다. 그저 아미는 남근의 기표를 손에 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이 영화에서 한 역할의 사실상의 전부이다. 마치 자기 차례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뒤이어 한발 늦게 도착한 남 형사의 동료는 자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민충식을 총으로 쏘아 쓰러트린다. 임권택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 다음 다시 장르의 마무리 안으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딸 아미의 품에 안긴 아버지 민충식은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아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른 아버지도 아버지라는 말로 안심을 시키며 그가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 그 여자를 쫓아라 >는 분명히 1970년이라는 상황의 영화이지만 임권택 은 자기와의 사이에 놓인 긴장을 피해가기 위하여 장르의 장치 안으로 들어간 다음 영화를 결정 불가능한 지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회색의 안갯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임권택이 원하는 것이다. 그는 이수근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지는 못할망정 (그때 누가 그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 수 있었겠는가) 무엇이 다가오는지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수근은 남한에서 모든 걸 얻었다. 새로운 아내. 새로운 가정. 새로운 집. 새로운 삶. 새로운 일. 하지만 그는 여기를 다시 떠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 곁에 민충식을 가져다 놓고 싶다. 민충식은 남한에서 모든 걸 얻었다. 새로운 좋은 집을 가졌고 자본주의 남한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끝내 어떤 새로운 가족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으며 그저 (남의) 딸 아미와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북한에 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실패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임권택의 어떤 계략을 읽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여기서 한 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소설이 시작된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임권택은 연출의 계략을 동원해서 성공적으로 곤궁을 빠져나왔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 1970년은 끝나지 않았다. 혹은 막 박정희의 70년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시작. (계속) 아직 남은 이야기. 이수근 사건에 대한 후일담. 1980년대 말부터 지속적인 의문 제기 과정 속에서 일부 중앙정보국 관리들의 증언을 통하여 이수근은 위장 귀순한 것이 아니며 지나친 중앙정보국의 감시와 북한에 두고 안 가족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제3국으로 다시 망명할 계획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만일 그가 다시 북한에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홍콩에서 캄보디아로 경유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증언에 따르면 이수근은 제3국에 가서 남북한 체제 모두를 비판하는 증언 활동을 할 계획이었으며 이에 당황한 중앙정보국이 그를 이중간첩 사건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관련자 증언 및 관련 자료 재검토를 통해 2006년 12월 “중앙정보부가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조작 처형한 것으로 판단하며 이에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과 법원에서의 재심 심판을 요청”한다고 권고하였다. 이에 2008년 12월 19일 서울고등법원은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고 21년간 감옥 구금을 한 조카 배경옥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우리의 근대사이다.(계속) 1970년 86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한국영화사 각본 나한봉 촬영 이문백 조명 정경희 편집 장현수 음악 황문평 김희라 윤정희 장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