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어려워
- 감독
- 황보민정
- 제작년도
- 2007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대개 기억들은 전체적인 상황보다는 순간의 감각들로 남겨진다. 가령 유년 시절의 계곡을 떠올릴 때면 언제, 누구와 왜 갔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상황은 떠올릴 수 없다. 다만 물에 빠졌던 순간 느꼈던 알싸한 코끝의 감각과 함께 어디선가 습한 풀냄새가 흘러오는 것이다. 혀에 닿았던 철봉의 비린 쇠 맛, 몸에 들러붙는 젖은 옷의 찜찜함, 불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소리, 아릿한 손끝... 그렇게 지나간 순간들은 몸 어딘가에 고이게 된다. 감각을 동반하지 않는 기억은 과연 남겨질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감각되지 않는 기억은 금방 휘발되어버리고 만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나에게 남겨진다. 결국 오래도록 나에게 맴도는 영화들은 기승전결에 따른 이야기의 전체 몸뚱이, 그로부터 얻은 교훈 같은 것이 아니다. 결국 남겨지는 건 인물의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들이다.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 < 로나의 침묵 >(장 피에르 다르덴, 뤼크 다르덴, 2008)을 본 날은 21살의 겨울이었다. 나는 지독한 시네필이었다거나 내 삶을 뒤흔든 영화를 만났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 없이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영화과 학부생이었다. 학기 중 내가 본 영화의 절대적인 수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방학을 맞이하여 전투적으로 매일 3편씩 영화를 보던 시기였다. 그저 방학 동안 최대한 영화를 많이 보는 것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마음 한켠에는 항상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곱씹을 틈도 없이 기계적으로 바로 다음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런데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을 본 후에는 쉽사리 다음 영화로 넘어갈 수 없었다.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다. 클로디의 죽음에 대해 침묵을 강요받던 로나는 파블로의 감시를 피해 숲으로 도망친다. 이윽고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안에 숨어 들어간다. 어둡고 싸늘한 오두막에 주워 온 나뭇가지로 불을 피운 로나는 자신의 빈 배를 부여잡고 존재하지 않는 클로디의 아기를 향해 말을 걸며 잠에 든다. 영화가 끝나고 나 또한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을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마지막 장면은 이상하게 허하고 서글픈 뱃속의 감각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클로디가 도와달라고 외치며 로나에게 매달리는 장면에서 클로디를 휘감았을 고독과 두려움의 통증, 자전거를 사고 힘차게 페달을 밟던 순간 마약으로 인해 마비되었거나 혹은 너무 날카로워졌던 클로디의 몸이 생의 활력으로 일깨워지는 감각. 이렇게 <로나의 침묵>의 장면들은 나에게 컷과 이미지가 아닌 몸 어딘가의 느낌으로 기억된다. 사진: " Lorna's Silence ", Rotten Tomatoes 이러한 내가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찬가지로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때 영화가 더 깊게 관객에게 남겨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때면 당연히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도 고심하지만 각 씬이 품고 있는 기운 혹은 인물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상상하는 데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된다. 늦은 밤 어린 소녀가 부모의 싸우는 통화 소리를 엿들을 때 그녀가 딛고 서 있던 타일의 싸늘함, 발바닥을 조용히 적시는 시리도록 차가운 물. 비밀을 품고 마주한 두 여고생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불의 열기. 영원히 진실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만 같던 모녀의 입을 열게 만드는 녹은 아이스크림의 단 맛.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면 때로는 정말 실제로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인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손끝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객들의 혀에, 피부에, 코끝에 남겨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 컨테이너 >(김세인, 2018), < 불놀이 >(김세인, 2018) 중 <로나의 침묵>이 오랫동안 나에게 남아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로나가 연속적인 변심과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마약을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클로디의 청을 외면하던 로나는 점차 클로디를 적극적으로 돕고 이내 몸으로 보듬어 주기까지 한다. 거래 현장에서 갑작스레 아기에 대한 질문을 꺼내놓고 심지어 아기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끝내 부정하며 끊임없이 아기에게 말을 건넨다. 이러한 변심과 충동에 따른 행동들로 인해 로나는 사랑하던 애인과 이별하고 가게도 돈도 모두 잃게 된다. 급기야 생명까지도 위태로워진다. 영화의 초반 계산적으로만 행동하던 로나는 실속 없이 모든 것을 잃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대답 없는 빈 배뿐이다.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그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 또한 줄곧 변심과 충동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냉철하고 실속 있게 살아가고 싶은데 나 같은 유형의 사람에겐 그건 영영 오지 않을 세계다. 나이가 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닥쳐오는 상황들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느 정도는 눈에 보일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도 모르겠는 건 모르겠고, 그중 제일 모르겠는 건 나 자신이다. 언제까지 나 자신에게 당황하며 살아가야 할까. 사랑하던 애인과 돈 계산을 한 뒤 이별하는 순간,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이외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로나의 답답한 눈물이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이었는데. 그저 빈 배를 움켜쥘 수밖에. 그리고 믿어볼 수밖에. 내 연민과 사랑이 불러온 결과가 결코 빈 배가 아니라고. 이 배는 비어있지 않다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나도 로나처럼 믿고 싶어서였다. 연민과 사랑으로 다소 유약하게 굴었던 나에게 남은 건 빈 배가 아니다. 여기 이 배 속에 무언가 남아 있다. 그 무언가가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2021) 중 김세인(영화감독) l 글을 쓰고 영화를 연출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1) 등 연출 .
돌파구는 그렇게 간단히 열리지 않았다. 극장 개봉 대신 OTT 서비스 넷플릭스를 돌파구로 선택한 < 사냥의 시간 >( 윤성현 , 2020)은 "넷플릭스를 통해 190여 개 국에 단독 공개한다"는 보도자료가 나온 지 꼬박 한달 간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4월 23일(목), 드디어 관객을 만났다. 지난 3월 23일(월)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를 통해 단독 공개된다는 보도자료가 도착한 날부터, 과정이 매끄럽지 않을 조짐은 있었다. 넷플릭스의 보도자료가 도착한 뒤, 여섯 시간 만에 콘텐츠판다가 ‘이중계약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고, 그날 저녁 8시 다시 리틀빅픽쳐스가 ‘이중계약 주장은 허위’라고 강한 반론을 제기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팽팽한 공방을 예고했다. 결국 콘텐츠판다는 이미 해외 판권이 팔린 국가에서는 넷플릭스로 영화를 상영할 수 없도록 하는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4월 8일(수) 법원은 콘텐츠판다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의 '코로나19' 상황이 리틀빅픽처스가 주장하는 '계약해지가 가능한 천재지변'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4월 10일(금) 오후 4시 공개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넷플릭스는 영화 공개를 보류했다. 결국 4월 16일(목) 리틀빅픽쳐스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며, 콘텐츠판다에 사과를 구합니다"라는 입장문을 발표해 깊이 머리 숙였고, <사냥의 시간>은 전세계 넷플릭스 구독자와 만나게 됐다. 우여곡절을 차지하더라도 <사냥의 시간>이 극장 대신 넷플릭스를 선택한 건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극장 관객 수가 1/10 수준으로 급감하고, 극장도 1/3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차일피일 개봉일을 미루던 영화들이 <사냥의 시간>을 새로운 롤모델로 삼진 않을까. 극장에는 사람이 없지만, OTT 서비스에는 언제든 '새로운 콘텐츠'를 볼 준비가 되어 있는 시청자가 기다리고 있다. 기약 없는 기다림만큼 무서운 고문도 없지 않은가. 2020년 상반기 개봉 예정인 30여 편의 영화 중 <사냥의 시간>과 같은 돌파구를 택하는 영화가 등장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일부에선 (극장 대신 OTT 서비스 공개가) “충분히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목소리도 들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반기 개봉을 계획했던 영화들은 다시 극장 문이 열리고 관객들이 극장으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사냥의 시간>에 관한 법원 판결이 나기 전, <더 스크린>이 취재한 개봉 예정 영화 관계자들은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지금은 지켜볼 뿐이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사냥의 시간>처럼 OTT 서비스로 직행할 가능성은 적다는 입장을 전했다. “다들 모든 옵션을 고민하고 있겠지만, 현재 개봉이 밀린 영화들은 모두 극장 개봉을 전제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이 중요” “가능성이 큰 작품들을 극장에서 관객에게 제대로 선보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OTT 서비스 직행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실적인 상황도 걸림돌이 많다. 한국 영화 기대작은 개봉 전에 해외 마켓에 소개되어 선판매되는 경우도 많고, OTT 플랫폼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프로세스 역시 검증된 바 없기 때문이다. <사냥의 시간>의 경우 넷플릭스가 영화 제작비와 이미 소진한 마케팅 비용을 보전하는 방향으로 판권 계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즉, 흥행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적자를 막기 위한 선택이다. 한 제작사 대표는 “(이미 해외 다수 국가에 판권이 판매된) 대형 영화의 경우엔 OTT 서비스가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입장을 대신했다. 또한 영화 관객 수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는 극장 상영 방식과 OTT 서비스의 수익 정산 방식이 다른 것도 현실적 제약이다. 다행히 두 달 가량 강력하게 진행된 물리적 거리두기의 결과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가 확연히 줄어들고, 개인 방역이 일상화되면서 극장들도 조금씩 관객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극장 문을 닫았던 멀티플렉스 극장들도 4월 29일(수)부터 전체 상영관을 정상 운영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관객 호응이 좋았던 재개봉 영화 상영에 이어, ‘마블 히어로 영화 특별전’을 진행 중이다. 재개봉이 흔치 않은 디즈니의 이례적인 결정에는 5월 개봉작 해리슨 포드 주연의 <콜 오브 더 와일드>,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의 <언더 워터>를 극장 상영하기 위한 ‘관객 마중물’ 전략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 기생충 > 흑백 버전도 4월 29일(수) 극장 상영 일정을 확정했다. 상반기 개봉 예정이었던 한국 영화들도 조심스럽게 5월 이후 개봉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논의하고 있으나 개봉 일정을 공지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다. 마케팅 일정을 고려하면 시간이 많지 않은데, 자꾸 개봉이 밀리는 모양새라면 관객들도 김이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여름 이전 개봉을 준비하는 영화사 제작자의 고민이다. 본격적인 한국 극장 해빙기는 올여름, 7~8월이다. 한국 영화계 쇄빙선 역할은 천만 감독들의 신작 세 편이 맡았다. ‘좀비 천만 영화’ < 부산행 >의 스핀오프 속편 연상호 감독의 <반도>가 여름 개봉을 확정하고 예고편 공개 등 마케팅을 시작했다. <반도>의 제작사 레드피터 이동하 대표는 “물론 상황을 주시할 수밖에 없지만, 계획대로 진행 중이다”라고 여름 개봉을 확인했다. “해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름 시즌 개봉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국가별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다. 예고편도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인 국가도 있다.”라며 한국 상황보다 해외 개봉을 오히려 변수로 꼽았다. 한국 최초로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를 선보이는 윤제균 감독의 <영웅>도 올여름 개봉을 확정하고 예고편, 포스터 등을 공개했다. 뮤지컬 초연 공연부터 10여 년 간 안중근 역할을 연기해 온 배우 정성화가 영화에서도 안중근 역을 맡아 연기와 노래를 함께 소화한다. 작품의 메시지와 시기성을 고려해 7~8월 개봉이 유력하다. 현재 촬영을 종료하고 후반 작업 중인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도 여름 개봉이 목표다. 배급사 롯데컬처웍스 관계자는 “여름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시장 자체가 예년과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면 여름 방학도 짧아질 것이고. 그래서 개봉 배급 일정은 탄력적으로 전략을 짜고 있다”라며 올해 여름 시장이 예년과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전망했다. 조성희 감독이 연출하고 송중기, 김태리, 진선규, 유해진이 합류한 첫 SF 블록버스터 <승리호>도 여름 개봉을 놓치지 않을 계획이다. 시장의 보편적 회복 탄력성을 고려한다면 빠른 회복을 기대할 수도 있다. 매년 2억 장의 영화표가 판매되던 한국 극장 시장이 코로나19라는 강력한 외부적 요소로 위축된 만큼, 코로나19 종식에 이어 여름 대형 신작들이 공개된다면 한껏 눌러 두었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관객 수가 폭증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어제와 완전히 다른 오늘이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수많은 ‘플랜 A’는 ‘플랜 B,C,D’로 변경되었다. 코로나19가 ‘극장이냐, OTT 서비스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위협하며 극장을 말살시키는 원흉처럼 느껴졌겠지만, 실은 위협보다는 백신으로 여기는 편이 적절하다. 전 세계 극장이 문을 닫고, 오프라인 활동이 일시 정지된 ‘미증유’의 현재는 냉정하게 짚어보면 새로울 게 전혀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변화 속도가 현기증날 만큼 빨라졌을 뿐, 재택근무, 원격 수업, 배달 산업, OTT 서비스는 이미 대세였다.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확산되고 삶의 모습이 혁신적으로 바뀐다는 ‘4차 산업 혁명’이 우리의 준비 상태와 무관하게 코로나19라는 광범위한 테스트베드를 통해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직접 몸을 이동해 오프라인 공간에 모이지 않고도 일을 하고,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경험하기 전엔 몰랐던 이점도 있다는 걸 체험해버렸다. 한편으론 ‘온라인 연결’이 절대 채우지 못할 오프라인 경험이 얼마나 귀중한 지도 뼈저리게 확인했다. 극장에서 볼 이유가 분명한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그럴 필요를 찾지 못한다면 경험한 바대로 극장이 아닌 플랫폼에서 보는, 관객의 선택은 단호하고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원망도 들고, 안타깝긴 하지만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이라는 가정은 쓸모없다. 동시에 온라인인가 오프라인인가, ‘모 아니면 도’ 식의 양자택일 예측도 쓸모 없다. 지금 더 중요한 질문은 영화와 극장 모두가 ‘최신 영화를 가장 빨리 보여주는 플랫폼 경쟁력’, ‘극장 홀드백’같은 독점적 안전망이 약해진 상황에서 ‘각자의 생존 무기는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여유가 길지 않다. 코로나19보다 더 두려운 건, 이미 각성해 버린 관객이다.
2002년 | 좋은영화, 영화사 시선 감독: 장규성 | 각본: 손재곤 | 각색: 이원재 이원형 | 제작: 김미희 한지승 안영준 | 기획: 강우석 | 촬영: 김윤수 | 미술: 오상만 강승용 | 음악: 손무현 CAST 무라카미: 김수로 | 황보: 임원희 | 하나코/상미: 김정은 | 갑두: 서태화 2002년은 한국영화가 아마 가장 폭주했던 시기였습니다. 과감하고 극단적인 시도들이 이어졌죠. 흥행 재난을 맞이하긴 하지만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 장선우 )이 파격적인 기획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 복수는 나의 것 >이 나왔던 것도 2002년이었죠. < 죽어도 좋아! >( 박진표 )나 <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 이무영 ) 같은 영화도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장규성 감독의 < 재밌는 영화 >도 ‘2002년스러운’ 영화였습니다. 할리우드에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패러디 영화였는데요, 무려 33편의 한국영화가 코믹하게 인용됩니다.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반대하는 일본 천군파는 기념 공연이 이뤄지는 곳에 폭탄을 설치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중심엔 한국은 무조건 싫어하는 무라카미가 있죠. 김수로가 역할을 맡았는데요, 단정한 양복에 뿔테안경을 쓴 지적인 모습이었지만… 곧 부채춤을 추는 족두리 한복 차림으로 바뀝니다. <재밌는 영화>는 전주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 날 촬영도 전주에 있는 소리문화의 전당에서 이뤄졌죠. 관객으로 무려 2,000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어야 하는 신이었는데요, 대규모 군중 역시 전주시의 도움으로 쉽게 모을 수 있었습니다. 부채춤을 추는 공연자들은 전주예고 무용과 학생들이었습니다. 한편 붉은 악마들 옆엔 이 날 사건을 막기 위해 남한의 KP 요원 황보(임원희)가 있습니다. 황보는 일본에서 온 저격수 하나코/상미(김정은)와 러브라인을 형성합니다. <쉬리>(강제규. 1999)의 한석규-김윤진 커플에 대한 패러디죠. 천군파가 무대에 설치한 폭탄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상미는 직접 무대 위로 올라가 폭탄을 손에 들고 소리칩니다. “모두 꼼짝 마!” 이 시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빴던 배우였던 김정은은 촬영 기간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현장에서 집중력 만큼은 최고였습니다. 남한의 대통령(김인문), 북한의 국방위원장(정진각) 그리고 일본 천황(정재진)이 한 자리에 모여서 공연을 관람하고 있습니다. 2,000명의 엑스트라와 세 대의 카메라가 동원된 대규모 현장이었습니다. 이 영화로 데뷔하는 장규성 감독에겐 다소 버거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확성기를 들고 현장을 지휘하는 모습은 베테랑 감독을 연상시켰습니다. 10년 동안 연출부 생활을 했고, 특히 김상진 감독과 세 작품을 함께 하면서 쌓은 내공 덕분 아닐까 싶습니다. 장규성 감독이 김정은에게 장면 컨셉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김정은은 밝고 코믹한 이미지로 사랑 받는 스타였죠. 첫 영화도 역시 코미디 장르로 선택했는데요, “고정된 이미지란 대중이 그 배우에게 가장 보고 싶어하는 이미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공개된 또 하나의 신은 도심 총격 액션 장면이었습니다. <쉬리>에서 가져온 신이죠. 촬영 장소는 역시 전주시의 전격적인 협조로 전주시의회 앞 도로에서 대대적인 교통 통제와 함께 이뤄졌습니다. 버스를 장악한 무라카미가 기관총을 난사합니다. 건너편에선 남한의 KP 요원인 황보와 갑두(서태화)가 대응합니다. 긴장감 넘치는 장면인데… 뭔가 지나치게 진지한 모습이 오히려 웃음을 자아냅니다. 천군파 요원인데요, 앞에 있는 김학규는 199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그룹 ‘노이즈’의 멤버였습니다. 뒤에 있는 사람은… 낯이 익으실 텐데요 배우 임형준입니다. <쉬리>에선 OP 특공대원 역할이었는데요 이번엔 천군파 요원입니다. 총격 신을 위해 특수효과 스태프들이 자동차에 장치를 하고 있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현장이었지만, 인근 주민들에겐 좋은 구경거리였습니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우산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현장 견학(?)을 했습니다. 이 날 장면의 하이라이트는 버스 폭파 신이었습니다. 컷 사인이 나자마자 소방대원들이 달려와 소화 작업을 했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큰 규모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고 특수효과가 동원되는 장면이었음에도 장규성 감독의 현장 장악력은 돋보였습니다. 임원희와 서태화와 김수로. 그들은 <재밌는 영화>를 더욱 ‘재밌게’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경쟁적으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