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남녀
- 감독
- 황진진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방조명, 설개기
지난해 12월 12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스크린 케미스트리: 스타로 보는 한국영화사”라는 제목으로 1950~1990년대 한국영화계 스타 커플의 관계성을 분석하는 시네포럼을 개최했다. 한국영화사 연구를 수행하는 아카이브로서, 영화연구자는 물론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가진 참여자들이 한국영화사와 관련해 새롭게 논의될 만한 지점을 발견하며 대화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영자원은 매년 이와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학술적인 분석 중심의 발제나 토론이 아니라 발표자들이 청중의 질문을 받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네포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내 주요 스타 커플이 등장한 시기를 네 구간으로 구분하고, 각 구간별로 등장한 스타 커플과 당시 한국영화나 대중문화의 특성 간의 상관관계를 조명했다. 시기별로 논의될 만한 스타들을 미리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이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발표자가 스스로 고민한 후 관객에게 제안하도록 열어뒀다. 1950~1990년대 급변한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영화산업의 지형을 참고하면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 대중에게 남긴 여운을 발표자와 참여자가 함께 추적할 수 있었던 포럼 현장을 요약한다. 1950~1960년대 스크린 속 스타 커플 영화평론가·영화사가 김종원 김종원 평론가는 1950~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커플로 등장한 스타들 간 케미스트리를 발견했다. 1950년대 스타 커플의 역사는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실제 부부가 되어 < 춘향전 >(이규환, 1955)에서 향단과 방자를 연기한 전택이 와 노경희 부터 시작한다. 배우 노경희는 < 내가 넘은 삼팔선 >(손전, 1951)을 비롯해 < 피아골 >(이강천, 1955) 등에서 해방 이후 스크린을 통해 강렬한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여성 배우로 거듭나고 있었으며, < 아리랑 3편 >(나운규, 1936)으로 데뷔한 전택이와 여러 작품에 동반 출연하며 20세기 중반 한국영화사에서 함께 활약했다. 이후 김승호 와 황정순 이 강대진 감독의 < 박서방 >(1960), < 마부 >(1961), 김수용 감독의 < 굴비 >(1963)에서 돋보이며 또 다른 스타 커플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 새로운 맹서 >(신경균, 1947)로 데뷔한 배우 최은희 는, 커플을 구성하는 인물들 간 관계가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당시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나, 케미스트리를 주도하는 여성 인물로 떠올랐다. 김진규 와 신영균 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신상옥 감독의 < 동심초 >(1959), < 상록수 >(1961), < 산 >(1967)과 같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한편, 스타 커플의 일원으로 거론된 적은 드물었지만 멜로드라마 위주의 문예영화 영역 밖의 상업영화 작품들에도 다수 출연하며 입지를 다진 김지미 배우의 행보도 독특했고, 그의 활약은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불나비 >(조해원, 1965)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60년대에 등장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 김종원 영화사가는 배우 엄앵란 , 윤정희 , 문희 를 꼽았고, 그들과 배우 신성일 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했다. 엄앵란은 < 청춘교실 >(김수용, 1963), < 맨발의 청춘 >(김기덕, 1964) 등에서 그와 함께 연기하며 ‘청춘영화’의 전성기를 불러왔으며, 두 배우의 호흡은 한국영화계에서 ‘스타’의 존재를 부각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외화에 치중됐던 국내 관객의 관심이 한국영화로 선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윤정희는 데뷔작 < 청춘극장 >(강대진, 1966)부터 < 안개 >(김수용, 1967), < 장군의 수염 >(이성구, 1968)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1960년대 한국 예술영화의 주축을 구성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문희 역시 이만희 감독의 < 흑맥 >(1965)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등에서 신성일의 상대역을 연기하면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서 영화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일 중심의 트로이카 구도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스타 커플 구조는, < 결혼교실 >(정인엽, 1970) 속 신성일과 윤정희, 문희, 남정임 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윤정희 X 신성일: 1960~19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밀고 당기기’ 영화평론가·영화연구자 금동현 금동현 평론가는 1960~1970년대 대표 배우이자 청춘스타였던 신성일과 윤정희가 동반 출연작에서 연기한 인물들의 관계를 ‘밀고 당기기’라는 용어로 재해석했다. 극중 그들의 배역이 점하는 위치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출연한 87편에 달하는 작품들에서 거듭 역전되고,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두드러진 <안개>와 < 야행 >(김수용, 1977)에서 이 점이 선명히 관찰된다. 배우 신성일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 아낌없이 주련다 >(유현목, 1962)로 데뷔한 이후 유수의 작품에서 줄곧 주연을 맡았고, 특유의 소년미로 ‘청춘의 영원한 아이콘’이자 현대사회에 완전히 정박하지 못한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도회적이고 지적인 여성 인물을 대표했던 배우 윤정희는 1972년 석사 논문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면서, 배우이자 여성인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는 면모를 보이며 ‘멜랑콜리’한 정서를 중심으로 스타 이미지를 갱신했다. <안개>와 <야행> 중 신성일, 윤정희 / © ㈜태흥영화 일례로, <안개>에서만 해도, 윤정희는 주변 소품이나 인물들 사이에 갇혀있고 신성일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야행>의 몇몇 장면에서 윤정희는 자신을 향한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기를 수행함으로써, 1970년대 한국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성취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신성일과의 케미스트리를 일으킴과 동시에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구축된 윤정희의 스타 이미지를 참고하면, 금동현 평론가는 그가 ‘보여지는(보이는) 여성’에서 ‘보여주고 보는’ 여성으로 변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60~1970년대 한국고전영화 중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두 작품의 영화사적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당대 형성된 두 배우의 스타 이미지를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는 관점도 공유했다. 더불어, 두 사람이 우울하지 않은 명랑한 얼굴로 콤비를 이룬 작품 < 아파트를 갖고 싶은 여자 >(정인엽, 1970), < 모범운전사 갑순이 >(이형표, 1972) 역시 언급하면서, 둘의 케미스트리를 다른 방식으로도 재조명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며 발표를 마쳤다. 장미희 X 안성기 198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 커플 영화연구자 이윤종 이윤종 영화연구자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 장미희 와 안성기 를 다루면서, 당대 한국영화 주요작에 출연하며 강력한 케미스트리를 발휘한 이들을 ‘황금 커플’로 지칭했다. 안성기는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 황혼열차 >에서 아역 배우로 데뷔해 연기 활동을 지속하다가 < 애수의 언덕 >(김대희, 1969) 이후 10여 년간 휴식기를 보내고 < 병사와 아가씨들 >(김기, 1977)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 바람불어 좋은날 >(이장호, 1980), < 적도의 꽃 >(배창호, 1983), < 고래사냥 >(배창호, 1984),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 등 1980년대 화제작의 주연으로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시기 장미희와의 동반 출연이 특히 빛났다. 장미희는 < 성춘향전 >(박태원, 1976)으로 데뷔하고 흥행작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에 출연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당대 여성 배우 트로이카에도 합류한다. 이후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등에서는 안성기와 상대역으로 만나 열연함과 동시에 흥행까지 거두면서 두 배우 모두 영화계 입지를 굳히게 된다. <적도의 꽃>와 <깊고 푸른 밤> 중 장미희, 안성기 / © ㈜동아수출공사 그런데 이들이 동반 출연한 1980년대 작품들에서 각자가 욕망의 주체(안성기)와 대상(장미희)으로 설정되면서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파국’의 결말을 통해 발휘된 점이 인상적이다. 안성기는 순수함부터 비열함에 이르기까지 중·하층민 남성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장미희는 세련된 외관을 지닌 채 심리적 결핍을 겪는 부유한 여성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적도의 꽃>에서는 중년 사업가에게 착취당하는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한 미스터 M(안성기)이 그를 구출하려 하지만 결국 화합에 실패한다. < 황진이 >(배창호, 1986)에서 황진이(장미희)에 대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갓바치(안성기)는 극단적 선택을 감행하고, <깊고 푸른 밤>에서는 미국 영주권과 돈벌이에 집착하는 백호빈(안성기)이 계약 결혼을 통해 제인(장미희)을 이용하며, 두 인물이 파멸로 치닫는 과정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 드러난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두 배우는 이렇게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한가운데 드리운 감정 소외나 우울감의 그림자를, 불행의 케미스트리로 스크린에 옮겨왔다. 김혜수 X 한석규: 1990년대 소비문화와 트렌드 신화, 도시의 얼굴 영화평론가·성결대학교 교수 정민아 이전까지 언급된 배우들의 활동이 과거 한국사회의 시대별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면, 정민아 평론가는 1990년대에 두각을 드러내 현재까지도 활발히 필모그래피를 갱신하고 있는 배우로서 배우 김혜수 와 한석규 를 조명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였지만 그들이 함께 출연한 작품은 사실 많지 않다.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 닥터봉 >(이광훈, 1995)에서 처음 협업한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 이층의 악당 >(손재곤, 2010)으로 다시 만났다. 그래서 그들이 한 작품에서 발생시킨 케미스트리보다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각자의 역량을 개발한 시간을 되돌아보며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감을 분석했다. (상) 영화 <쉬리>, 드라마 <신사장 프로젝트> 중 한석규 / (하) 영화 <첫사랑>, <내가 죽던 날> 중 김혜수 © ㈜필름쿡플러스, tvN 1990년대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민주화와 세계화가 본격화되며 대중문화 산업의 규모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에 부합하는 다양한 콘텐츠나 인물이 주목받았던 때로, 이때 등장한 스타들은 대체로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팬덤을 확보했다. 그중에서도 김혜수와 한석규는 외모와 목소리, 연기,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당시 대중이 선망한 ‘세련됨’을 구현했고, 데뷔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품 속에서 쉼 없이 대중과 호흡해왔다. 한석규는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도시 남성의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서처럼 냉정한 현대사회에서 불운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처연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기억된다. 이는 최근까지 그가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소시민적’ 영웅의 리얼리티와도 맞닿아있다. 또한 감독에 의해 ‘선택받는’ 배우를 넘어 자발적인 비전에 따라 작품과 장르를 선택하고 신인 감독의 성장까지 견인하는 흥행보증수표 영화인의 시초 격이기도 하다. 한편, 김혜수는 활동 초기에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나 영화 < 첫사랑 >(이명세, 1993)을 통해 젊고 발랄한 청춘스타의 면모와 특유의 건강미로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보다 다채로운 배역을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으며, 특히 2020년대 즈음에는 < 굿바이 싱글 >(김태곤, 2016)과 < 내가 죽던 날 >(박지완, 2019), < 밀수 >(류승완, 2023) 등을 통해 독립된 여성 자아가 돋보이는 씨네페미니즘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비디오 에세이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윤서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과 영자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은, ‘비디오 에세이’라는 작업의 의미를 소개하며 포럼 주제에 맞는 작업 결과물 한 편을 직접 제작해 선보였다. 이무언은 관객이나 연구자로 하여금, 각자가 작품에서 발견한 특별한 지점을 중심으로 연출과 편집을 주도하면서 영화와 한층 더 친밀해지는 기회로 비디오 에세이를 인식했다. 윤서연 연구원 역시 비디오 에세이가 주제가 되는 대상(물)과 이를 둘러싼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통찰”한 결과이자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한다는 논의 [1] 를 인용하며,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으로서 비디오 에세이의 영역이 지닌 비평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측면을 소개했다. 이날 소개한 작업은 영자원이 올해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 제작 및 배포 사업’을 수행하던 도중 두 사람이 기획하게 됐다.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는 영화사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한국영화 몇 편의 공통 소재를 제목으로 하여, 작품별 본편 영상과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막, 그리고 코멘터리 영상 등을 수록한다.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해외에 소개할 목적으로 매년 해외 공관이나 문화원 등에 비영리적으로 배포되고 있다. 작년에는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스타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DVD에, 한국사회의 일면과 시대의 감성을 머금고 있는 남성 인물들이 인상적인 한국영화 6편을 수록했다. 그리고 감상자들이 한국에 대해 간략히 소개받을 수 있는 짧은 콘텐츠를 기획해 부가 자료로 함께 수록하고자, DVD에서 다루고 있는 남성 배우 6인 중 한 명에 대한 비디오 에세이를 기획했다. 내부 논의 끝에 최종 선정하게 된 에세이의 주인공은, 순정과 헌신, 소시민의 나약함, 일그러진 욕망 등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한 국민 배우이자 고전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스타로 기억되는 한국영화의 얼굴, 안성기였다. 실제 연령대로 비춰볼 때, 안성기는 에세이를 제작한 이무언의 아버지 세대이면서 작품 촬영 당시에는 그(이무언)와 같은 또래였다. 또한 안성기가 극중 인물을 형상화하며 선보인 특유의 ‘얼굴’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각기 다른 국면을 관통함에 따라, 1980년대의 시절이 하나로 통합되는 듯한 느낌 역시 받았다고 이무언은 전했다. “이미지들의 느슨하고 싱거운 연결”을 통해 이러한 인상이 에세이를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반면 윤서연 연구원은 안성기가 각기 다른 영화에서 선보인 대사들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모아 1980년대 시대정신과 같은 특정 의미를 강조하여, 작품과 쇼트들의 의미를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2017년 시네마테크KOFA에서 그에 관한 특별전을 개최했을 때 제작된 영상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을 참고하고, 구술채록 사업 진행 중 그의 구술 내용이 녹음된 파일들을 다시 들어봤으며, 그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 중 10편을 골라 실제로 삽입할 쇼트를 신중히 선택했다. 쇼트마다 배어있는 정서를 자막과 음악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특히 서로 다른 작품에 속한 장면을 소품이나 장소 등을 매개로 연결하며 안성기가 작품과 작품 사이를 유기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출 중 하나는,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 중 덕수궁의 벤치에서 각각 아내( 황신혜 )와 딸에게 자상함을 베풀지만 냉대를 받고 마는 두 장면을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해 동시에 재생한 대목이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아내와 딸을 향한 그의 행동이 중첩되는 순간들이 보이는데, 이는 필름이 아닌 디지털 영상이 보편화된 시대에 두 개의 영상을 2채널로 나란히 배치하며 가능해진 실험이라고 윤서연 연구원은 덧붙였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이미지 클릭 후 재생) 관객과의 대화 (질문1)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스타’들에게는, 할리우드 스타들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국내 관객의 욕망이 투사되는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1990년대부터는 이들만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구축됐다는 느낌을 받는데, 한국영화의 각 시기가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에 대해 발표자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답변_이윤종 영화연구자)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산업은 몇몇 주류 영화 스튜디오가 제작과 배급, 상영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배우들 역시 각 스튜디오에 소속된 채로 활동했다. (하지만 1948년 미국 대법원에서 이러한 영업 활동이 ‘독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여러 스튜디오가 해체됐고, 여기에 소속됐던 배우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불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이러한 스튜디오 중심의 스타 시스템 자체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고, 할리우드의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해방 이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당시 국내 영화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에 근접한 운영 양태를 보였는데, 1970년대부터는 이마저도 쇠퇴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감독과 배우, 영화 스태프들 모두가 독립된 개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는 1990년대 이후에 비해, 영화를 비롯해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 역시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얻지는 못했던 시점인데, 와중에 안성기와 같은 ‘국민 배우’가 탄생했다는 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질문2) 20대 관객의 입장에서는 < 라디오스타 >(이준익, 2006)나 < 실미도 >(강우석, 2003) 등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안성기 배우를 기억하게 되는데, 과거의 다양한 출연작들을 통해 그의 활동을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돌이켜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비디오 에세이를 제작하면서, 여러 출연작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장면들을 구분해내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고 예상된다. 작업 도중 겪게 되신 고충 이 있다면 듣고 싶다. (답변_이무언 비디오 에세이스트) 감상을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장면을 확인할 때마다 영상의 일부를 이미지로 캡처해두고, 작품 안에서의 타임코드와 함께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메모했다. 에세이에서 다룰 모든 작품에 대해 이 작업이 완료되면, 캡처된 이미지들을 훑어보며 관련 장면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각 이미지를 연결하는 과정에서는, 안성기의 연기를 통해 전달되는 여러 가지 인상들(‘아버지’, ‘남성’ 등)이 쇼트들의 유기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지각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안성기 개인의 삶이 연상되거나 관객 스스로가 처한 ‘현실’ [2] 과 작품 속의 ‘허구’가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흥미로웠던 장면들도, 어렵지만 제시하고 싶었다. 또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안성기의 ‘얼굴’ 외에 다른 요소들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는 이미지, 수면 위에 반사된 이미지, 극중 시계를 비춘 이미지 등이, 매 장면 돋보이는 그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연결해줬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중 시계와 잔이 등장하는 쇼트 (질문3) 1960년대 한국영화의 멜랑콜리적 지식인 주체성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는데, 금동현 평론가의 발표에서 <장군의 수염>과 <안개>가 다뤄져서 반가웠다.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배우들이 담지하고 있는 멜랑콜리적 주체성 이 무엇일지에 대해 여쭙고 싶다. (답변_금동현 영화평론가) 오늘 분석한 작품들에서는 멜랑콜리를 자아내지 않고 ‘체현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물론 1960년대에는 멜랑콜리를 재현하는 몇 가지 요소가 발견될 뿐 멜랑콜리라는 감수성 자체가 이 시기에만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멜랑콜리의 흔적이 관찰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한 대목을 꼽자면, ‘코미디’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한국 코미디영화에서 웃음은 모종의 이유로 ‘경직되어버린’ 무언가를 조롱할 때 자주 발생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웃어야 하는 데 웃지 못하는 순간( 이봉래 감독의 영화에서의 몇 가지 장면이 예가 될 수 있다)이 어떻게 보면 멜랑콜리한 상태에서 받는 느낌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질문4) 오늘 언급된 배우 중, 배우 김혜수가 유독 눈에 띈다. 1990년대 당시 그는 확고한 ‘무비스타’로 자리매김한 상태가 아니었고, 광고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아직 다른 스타들만큼의 파급효과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김혜수 가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것이 독특한 지점이다. 이 시기 스타로서 김혜수의 부상을 분석하실 때 다른 배우들과 비교하여 어떤 접근법을 적용하셨는지가 궁금하다. (질문5)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배우 김혜수와 한석규가 선보인 연기 스타일이, 그들이 1990년대에 수행하던 방식과는 달라졌다고 말씀해주셨다.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기의 방향성이 재정립되는 데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욕망이 변화하는 현상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시대별로 이념이나 정치성, 관객의 욕망 등의 변화가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 변모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지 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답변_정민아 영화평론가) 두 질문에 대해 한 번에 답변 드리고 싶다. 말씀하신 대로 김혜수 배우가 영화계 스타로서 두각을 나타낸 시점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다소 늦다. 하지만 1990년대 화보와 예능, TV를 포함해 대중매체 전반에서 그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성장한 여정을 고려하면, 그리고 이 시기 관련 콘텐츠를 향유했던 경험을 되새겨보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김혜수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는 오늘날 스타가 탄생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영화’와 그밖의 영역(방송 등)이 명확히 구분됐던 과거와 다르게,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배우’의 활동 분야가 대폭 확장됐고 분야 간 경계도 거의 사라졌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분야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모두 ‘배우’로 호명되며, 그들이 연기를 선보이는 분야 역시 한 가지로 국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크린을 통해서만 스타로 거듭나기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파급된 각기 다른 매체에서 강렬한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만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한 김혜수가,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복합적 차원의 배우상을 1990년대부터 선구자적으로 확립한 이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현장 BEHIND CUT * *** [1] 박진희, “ 복혜숙과 석금성을 헷갈려하다 ”, KMDb 영화글, 2023. 7. 27. [2] < 개그맨 >(이명세, 1988) 중 이발사가 이종세(안성기)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 방면에 재능이 많으셨죠?”라고 물어 아역 배우 시절 안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거나, <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8) 중 “우리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라는 대사 이후 배우 박중훈과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 등이 있다.
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라고 이를 기리려는 사회 각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영화계에서도 식민지시기의 항일을 다룬 영화들이 여러 편 기획되었다. 1월에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 말모이 >가, 2월에는 유관순 열사에 관한 영화 < 항거: 유관순 이야기 >와 ‘자전차왕’으로 불렸던 엄복동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가 개봉하였고, 3월에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 1919 유관순 >가 개봉한다. 이 중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영화만 2편으로, 3.1운동의 상징으로서 유관순 열사가 지니는 위상을 새삼 말해준다. ‘3.1운동’이라는 키워드로 한국영상자료원의 KMDb 를 검색하면 십여 편의 영화가 뜨는데, 이 중 반절은 유관순 열사에 대한 전기물이다. 이와 같이 유관순 열사는 독립투사 중에서 독보적으로 여러 번 영화화되며 3.1운동 하면 떠오르는 표상을 형성했다. 3.1운동 백주년에 개봉하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두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극영화, <1919 유관순>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가 식민지시기부터 널리 알려졌던 것은 아니다. 그가 3.1운동을 대표하는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가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며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정과 맥을 함께 한다. 충남 천안의 양반가 출신이며, 1919년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부모는 돌아가시고 오빠와 숙부는 투옥되는 등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났음에도 일제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투쟁하다 열여덟의 나이에 옥중에서 죽어간 이화학당 학생이 기독교계와 국가 차원의 지원 속에 남한의 영웅으로 발굴된 것이다. 1) 북한에서는 유관순 열사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의 역사 서술에서조차 결락되어 있다는 사실 2) 은 분단 시대 남북한 영웅 발굴의 상이한 맥락을 방증한다. 이러한 유관순 열사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데에는 무엇보다 ‘국민학교’ 교과서의 영향이 컸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한국전쟁 이후 꾸준히 음악 교과서에 실렸던 동요 「유관순」이다. 이 동요는 「삼월의 하늘」이라는 제목의 동시로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으며, 박두진의 「3월 1일의 하늘」과 함께 유관순 열사를 ‘누나’로 호명하며 3.1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이 가사는 「스승의 은혜」, 「코끼리 아저씨」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수많은 동요를 작사했던 아동문학가 강소천이 지은 것이고, 곡을 붙인 이는 한국전쟁 직후 문교부 편수관이었던 나운영이었다. 이 노래는 1953년 휴전 직후 새로운 동요들이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실렸고, 3) 수십 년 뒤까지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서 불릴 정도로 애창되었다. 그 결과 남한 사회에서 형성되어 오랜 세월 지속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대중적 표상은 노래의 첫 문장이 말하고 있듯이 봄이 오면 환기되는 ‘국민 누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미지는 두 번째 문장이 말하고 있는 내용, 즉 감옥에서도 만세를 부르다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포하는 강직한 성격과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수난은 유관순에 대한 서사의 핵심이 되었고, 이는 영화로 재현되며 한층 선명한 이미지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 시작은 1948년 계몽문화협회에서 제작하고 윤봉춘 이 감독한 < 유관순 >이다. 이 영화는 1947년에 본격화된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고, 당시 기념사업에는 기념비와 동상, 기념관 설립, 도서 출간 및 보급, 국민 교육, 매봉 녹화(綠化)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4) 그 성과로 1948년에 최초의 평전인 『순국처녀 유관순전』(전영택 저, 승문사 간)이 출간되고 5) 영화 <유관순>이 개봉하였다. 1948년 3월부터 이 전기와 영화는 정치적 이벤트와 더불어 묶여 홍보되기도 했는데, 6) 내러티브 면에서도 이후 유관순 이야기에서 널리 회자되는 화소를 공유한다. 그것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유관순은 기독교 정신에 충실했던 구국 소녀로 대한민국의 잔다르크다. ② 유관순의 집안은 충효 사상을 지키는 유서 깊은 선비 가문이다. ③ 유관순의 가족은 3.1운동에 참여하여 부모는 죽고 오빠는 체포되었으며 어린 두 동생은 고아가 되었다. ④ 유관순은 체포되어서도 항거를 계속하다 모진 고문 끝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 중에서 영화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던 것은 ③과 ④이다. ③에서 부모가 일본 헌병에게 학살당하고 관순이 어린 동생만 남겨둔 채 체포되는 형국은 ‘누나’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이 부분에서는 일본 헌병이 동생들이 있는 집에 기름을 붓고 불까지 지르는 것으로 설정하여 일제에 대한 분노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담한 상황임에도 ④에서 유관순이 항거를 멈추지 않고 고문에도 굴하지 않음으로써 ‘민족의 누나’가 된다. 무엇보다 유관순이 받은 고문에 대한 묘사는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이었다. 이영일 또한 작품해설에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격렬한 충격과 통분(痛憤)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일헌(日憲)에 잡힌 관순이 재판정에서도 항일절규(抗日絶叫)하는 열화(烈火)와 같은 모습과 옥중투쟁(獄中鬪爭), 그리고 끝내 간독(奸毒)한 일제(日帝)에 의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蛮行)으로 고문치사(拷問致死) 당하는 부분이다.” 7) 영화가 현전하지 않으므로 시나리오로 보자면, 유관순은 체포되어 주모자와 배후를 심문받는 과정에서 “열 손가락을 못으로 찌르고 어린 젖가슴을 불로 지지는” 8) 고문을 당했으며, 수감된 이후에도 밤 9시만 되면 만세를 불러 간수들에 의해 온갖 폭행을 당했다. 그 잔혹함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은 간수들이 유관순을 지하실로 끌어가 하복부에 호수를 대어 자궁을 파열시키고 칼로 내려쳐 일곱 토막을 내는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가 옥중에서 구타를 당하여 방광 파열상을 입었고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며 더운 날씨에 방치되어 시신이 부패하기는 했어도 절단된 바는 없다고 한다. 9) 유관순 열사가 일제에 굽히지 않고 항거하다 옥사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유난히 잔혹하게 묘사한 것은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러한 잔혹함이 십대 소녀의 여성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된 것은 히스테릭하다. 유관순 열사를 잔다르크와 같이 신의 말씀에 따라 민족을 섬기는 순결한 처녀로 주조해 놓고 그 신체를 무참하게 유린함으로써 극적 대비를 통한 일종의 국민 선동 효과를 노리고 있는 점은 현재의 시각으로는 도착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당시 이 영화는 “서울 총인구의 1할 이상 동원”하는 흥행 10) 을 했고, 이후 유관순 열사에 대한 영화들에 기본 틀을 제공했다. 윤봉춘은 <유관순>을 1959년과 1966년에 두 번 더 제작한다. 2019년에 <항거: 유관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유관순 열사에 대한 극영화는 4편 제작되었는데 그중 3편을 윤봉춘이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1970년에 또 하나의 유관순 전기인 『타오르는 별: 유관순의 일생』(박화성 저, 문림사 간)이 출간되면서, 이를 저본을 한 영화 < 유관순 >( 김기덕 , 1974)이 제작된다. 필름이 현전하는 것은 1959년, 1974년 영화뿐이고 1966년 영화는 1948년 버전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만 남아있다. 11) < 유관순 >(윤봉춘, 1959)의 포스터. < 폭군 연산 >(신상옥, 1962)에서 장녹수를 연기하면서 요부(妖婦)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지기 전의 도금봉이 유관순 역할을 맡았다. 1959년 영화에서는 도금봉 이 타이틀 롤을 맡아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 유관순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유관순의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과 주인공 내면의 거리를 좁히려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개봉 당시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1958년을 기점으로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비약하는 분위기 속에서 윤봉춘의 ‘안이한 연출’이 비판을 받았다. 또한 < 황진이 >( 조긍하 , 1957)로 데뷔하여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있는 데다 주로 발랄한 도회 여성을 연기했던 도금봉의 페르소나는 대중이 기대하는 유관순의 표상과는 어긋남이 있었던 듯하다. 재기 넘치는 유관순의 캐릭터는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신선한 면이 있으나 당시에는 “내면적 공감을 못 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2) < 유관순 >(윤봉춘, 1966)과 <유관순>(김기덕, 1974)의 포스터. 1966년 영화에서는 엄앵란 이, 1974년 영화에서는 문지현 이 유관순 역할을 맡았다. 1966년 영화는 시나리오로 볼 때 민족 단결이 전반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1959년 영화에서는 일본 앞잡이로 끝났던 ‘임’이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유관순의 활동을 눈감아 주고 마지막에는 만세 시위에 동참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1959년 영화에서 관순의 오빠 관옥은 친구의 자백으로 체포되는데,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친구가 관옥을 도망시키고 희생된다. 또 하나 1966년 시나리오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만세 시위를 밀고하겠다고 애덕(관순의 사촌이자 동지)을 협박하여 혼인 약속을 받아내는 칠성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아우내 장터에서 애덕과 함께 죽음으로써 파렴치한 거래는 무화되고 그의 죄 또한 무마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만세운동은 유관순이라는 영웅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먹구 살기 위해” 숨죽이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양심, 눈물, 조국과 겨레를 향한 사랑”이 터져 나온 것으로 의미화된다. 이와 같은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는 지점은 매봉에서의 기도 장면이다. 이전 영화에서는 관순 홀로 매봉에 올라 기도했던 것과 달리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애덕과 을순이 관순을 따라가 셋이 함께 기도한다. 또한 1948년 시나리오와 1959년 영화에서는 형량을 낮추려는 변호사의 노력에 아랑곳없이 유관순이 끝까지 항거하며 일제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비판했는데,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유관순의 대사가 변호사의 몫이 되고 청중이 이에 호응하는 것으로 변개된다. 요컨대 1966년 시나리오에서는 당시 모든 조선인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의 의지를 지니고 있었음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1974년 영화에 가면 전체적인 서사구조 면에서는 앞의 영화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도 가부장적인 위계와 남녀유별(男女有別)이 강조된다. 이는 유신체제하의 위계적인 분위기와 함께 원작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박화성의 『타오르는 별』은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2장이 ‘효도의 길’이다. 이 부분에서 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기집애”가 아비 말을 거역하고 말대꾸를 한다는 이유로 관순의 뺨을 때리고는, 여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가문의 위대함과 충효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13) 1974년 영화에는 이 부분이 그대로 삽입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유교적인 도덕관념이 강조된다. 그러면서 이전 영화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유와 평등이 있음을 세계만방에 고”하기 위해 “대한의 잔다르크”가 되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봉화를 올렸던 관순이 1974년 영화에서는 거사를 다 조직해 놓고도 “여자의 신분으로 너무 앞에 나선다는 인상을 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니 어르신들께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달라” 하는 이중적인 성격이 된다. 이에 1948년 윤봉춘의 시나리오에서부터 강조되었던 기독교 이념은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결속하며 협소해지고 단선화된다. 그럼에도 관순이 아버지의 비합리적인 행동에 대해 따지는 부분에서는 1970년대 젊은 세대의 변화와 함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그 다음에 이어지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더욱 시대착오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다가오며,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분열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제작된 영화들은 역사에 묻힐 뻔했던 유관순이라는 무명 여성투사를 세상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이 영화들에서 유관순이라는 인물은 놀라운 신념과 결기의 소유자로서 경이롭고 거리감을 주는 ‘민족의 영웅’이었지 그녀의 고뇌와 아픔에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적 개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에게 내적 갈등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성찰은 이 영화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유관순은 본래 기개 있는 양반가에서 태어난 데다 근대 교육을 받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용감하고 헌신적으로 일제와 싸울 수 있었고 장렬하게 죽어갈 수 있었던 ‘본투비 열사’일 뿐이다. 이와 같이 인물을 화석화시키는 편의적이면서도 경직된 이야기 틀은 입이 찢어지면서도 공산당이 싫다고 외치다 죽어갔다는 소년의 전설을 방불케 하는 면이 있다. 게다가 계몽과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반복된 영웅화의 관습 속에서 유관순 열사가 나이 어린 여성으로서 겪은 형극이 전시되며 대중의 흥미를 끄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유관순이라는 이름에 따라다니는 수많은 괴담들이 주로 화장실이나 목욕탕과 같은 음습한 공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가장 성스러운 존재로 추앙하면서 결과적으로 한 인간을 ‘처녀와 형극’의 틀에 가둔 영웅 도식의 그늘을 드러낸다. 관객들에게 유관순 열사는 그만큼 우리와는 다른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을 수 있다. 또한 애국애족에 가려진 한 여성의 고통과 원한을 대중이 감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유관순 열사는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한 인간의 이야기로, 젊은이, 학생, 여성, 시민의 관점에서 다시 접근되고 서술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40여 년간 유관순 열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여러 매체로 다루어졌음에도 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더구나 국책영화 시대가 끝나면서 극영화로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단일한 역사에 대한 반성과 해체가 시도되며 역사 주체의 다원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기존의 영웅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탐구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극영화 < 항거: 유관순 이야기 >( 조민호 , 2019)가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그 동안 축적되어 온 유관순 열사에 대한 사료와 고증을 바탕으로, 비로소 인간 유관순을 조명한다. 이전 영화들이 민족 영웅으로서의 형상화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근대 기독교 교육을 받아 이상주의적 신념을 지녔지만 나이가 어려 경험이 없었던 학생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이 영화 또한 유관순의 형상화에서 빠지지 않았던 순결한 처녀의 형극이라는 요소를 취하고 있으나 그 배치를 달리한다. 여기에서 시공간을 유관순이 죽어갔던 서대문형무소의 1년으로 한정하고 여감방 8호실에 집중한 것, 그리고 흑백을 사용한 것은 주효했다. 우선 여성성은 8호실에 함께 수감되었던 동료들과의 연대를 통해 포착되고, 그녀가 겪은 수난은 내면의 재현으로 이어지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유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한 첫날 낯선 감방에서 이화학당 선배를 만났을 때 흘리는 눈물, 간수가 관순을 끌고 나갈 때 그 앞을 막아서는 동료들, 고문 받고 돌아온 관순을 보살피는 손길들, 그리고 자신을 고변한 여인의 아기를 위해 젖은 기저귀를 체온으로 말리는 관순의 배려는 남성 옥사의 상황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연대를 보여준다. 그래서 유관순의 내면이 가장 사무치게 다가오는 부분은 특별 감형으로 모두 석방된 8호실 감방에 고문 받고 돌아온 관순이 홀로 누웠을 때다. 모두가 앉을 자리조차 없이 좁아 터졌던 감방이 훌쩍 넓어져 있는데, 만신창이가 된 몸에 표정 없는 얼굴로 누운 관순을 둘러싸고 있는 사면의 벽은 그녀의 내면을 통절하게 대변한다. 이는 지금까지의 유관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간 유관순의 외로움이다. 유관순을 고문한 정춘영의 표현대로라면 “조금만 비겁했으면 될 것을”, ‘바보 같이’ 그러지 못했던 한 십대 소녀가 대면한 엄혹한 고독, 그것에 굴하지 않은 것이 결국 ‘항거’였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이로써 이전 영화들이 노정해온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전시성 대신 배운 대로 실천하며 밝고 굳세게 살고자 했던 한 학생, 부모를 한날한시에 잃고 절망과 원한에 사무쳤던 한 소녀, 대단한 대의를 위해서라기보다 차마 비겁할 수 없었던 인간 유관순이 살아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개정된 현행 헌법의 ‘전문’은 긴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서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정통성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3.1운동을 비롯한 이 역사적 사건들을 한국영화가 어떻게 재현해 왔는지 살펴보면 그 앙상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정부는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여 최고등급으로 격상시켰다고 한다. 이는 물론 합당한 일이지만 더불어 실천되어야 할 것은 유관순 열사처럼 역사에 묻혀있던 무명의 독립투사들을 역사화하는 일일 것이다. 이와 함께 이제 ‘민족 영웅’에도 '민주주의적'으로 접근하는 다양한 영화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1) 유관순 열사가 3.1운동의 상징적 표상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논문이 제출된 바 있다. 정상우, 「3.1운동 표상 ‘유관순의 발굴」, 『역사와 현실』 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12, 235~263면; 임종명, 「탈식민시기(1945.8~1948.7) 남한에서의 3.1의 소환과 표상」, 『대동문화연구』 제66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9.6, 297~333면; 정종현, 「3.1운동 표상의 문화정치학: 해방기~대한민국 건국기 3.1운동 표상을 중심으로」, 『한민족문화연구』 제23집, 한민족문화학회, 2007.11, 239~276면; 「유관순 표상의 창출과 전승: 해방 이후 제작된 유관순 영화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제36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9.6, 155~209면 참조. 2) 허동찬, 「3.1운동을 보는 북한의 시각」, 『북한』, 1989.3; 정종현, 위의 글(2009.6), 157면에서 재인용. 임경석, 「3.1운동을 보는 남과 북의 시각」, 『통일시론』 2, 1999; 정상우, 「3.1운동 표상 ‘유관순의 발굴」, 『역사와 현실』 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12, 236면에서 재인용. 3) 최은경, 「한국 동요·동시 정전화 연구」, 박사학위논문, 인하대학교 한국학과, 2015.2, 62면. 4) 정상우, 앞의 글, 250면. 5)「유관순」 노래를 작곡한 나운영이 문교부 편수관이었듯이, 유관순에 대한 최초의 평전 『순국처녀 유관순전』(1948)을 쓴 전영택도 문교부 편수관이었다. 이 책은 2015년에 새로 출간되었다.-늘봄 전영택, 『순국처녀 유관순전』, 늘봄, 2015. 6) 「새로 나온 책」, 《경향신문》, 1938.3.27.,2면;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3.27.,2면; 「조선영화사상의 금자탑/ 누구나 한 번은 보셔야 할 영화 순국의 처녀」, 《동아일보》, 1948.4.7.,2면. 7) 이영일, 「<유관순> 작품해설」, 『한국 시나리오 선집 제1권(초창기~1955)』, 영화진흥공사, 1982, 312면. 8) 윤봉춘, 「유관순」, 『한국 시나리오 선집 제1권(초창기~1955)』, 영화진흥공사, 1982, 337면. 9) 이정은, 『유관순: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 2004, 416~430면. 10)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윤봉춘 편』, 도서출판 소도, 2004, 184면. 11 <유관순>의 역대 시나리오에 나타난 서사의 변이에 대해서는 정종현, 앞의 글(2009.6) 참조. 12) 「내면적 공감 못 주어 <유관순>」, 《동아일보》, 1959.5.31.,4면. 13) 박화성, 『타오르는 별』, 문림사, 1970, 33-61면. <유관순>(윤봉춘, 1959) VOD 바로 보기 KMDb VOD 기획전 < 1919: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보러 가기 시네마테크KOFA < 평화와 화합을 노래하다: 3.1 운동 100주년 기념전>(2019.3.1~13) 보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