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꽃잎이 질 때
- 감독
- 황혜미
- 제작년도
- 1971
- 출연
- 남궁원, 문희, 한은진, 배수일, 강호정
이미례 는 1957년 8월 20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연극영화학과에 재학하면서 스승 유현목 감독의 스크립터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한국영화사의 거장 유현목의 조감독으로 여성이 등장하자 여성 감독이 드문 영화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졸업 후 김호선의 조감독을 거치는 등, 현장경험을 더 쌓은 이미례는 1984년에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로 데뷔했다. 수령에서 건진 내딸 관련 인터뷰 중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은 비행청소년 문제를 다룬 가족영화이다. 모범생이었던 유리는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부모의 불화를 겪으면서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딸을 수렁에서 구해내려는 부모의 악전고투가 눈물겹다. 특히 심리치료와 상담 개념이 거의 없었던 시대에, 청소년 문제 담당자가 부모에게 딸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제시하는 방안들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개봉한 해에 한국영화 흥행 순위 5위를 기록했다. 이 영화에서 유리 역을 맡은 김진아 (한국영화사의 대 스타 김진규 와 배우 김보애 의 딸이다. 김보애는 유리의 엄마 역을 연기했다)는 스타로 자리매김 했다. 이미례는 성공적인 데뷔작을 통해 박남옥 , 홍은원 , 최은희 , 황혜미 이후, 한국 영화계가 처음으로 건져낸 여성 감독으로 주목을 받았다. 여성 감독 자체가 별종으로 취급 받기에 충분한 시대에 ‘파마머리’에 담배를 물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28살의 여성감독 이미례는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고추밭의 양배추 촬영 현장 이미례의 두 번째 영화는 1985년의 < 고추밭의 양배추 >. 에로티시즘 영화가 한국영화의 주류를 이루는 시절이었기에 이 영화 역시 제목만으로는 그런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7년 동안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수환이 오지랖이 넓어 사사건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수환은 학교 안에서 노숙하기 일쑤고, 재벌의 딸을 경호하는 보디가드들이 캠퍼스에 들어왔다고 결투를 벌이고, 소매치기를 쫓다 교통사고를 당해 만신창이가 되거나, 불쌍한 사람을 위해 등록금을 쓰고는 공사판에 가서 일을 하기도 한다. 수환 같은 늙은 괴짜 대학생은 1970-80년대의 대학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타입이다. 이미례의 세 번째 영화는 1987년의 < 물망초 >. 감독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손꼽는 이 멜로드라마는 그녀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부유하고 철없는 남학생 철수와 예쁘고 생활력 강한 여학생 영희가 오로지 사랑의 힘만을 믿고 대학생 부부가 되는 사건을 저지른다. 그들은 ‘철없는 애송이 부부’라는 사회의 편견을 깨고 꿋꿋하게 자립하려고 분투한다. 그들은 아이까지 낳아 키우며 악전고투 하지만, 철수가 불치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젊은이들의 발랄한 분투기가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리면서 짙은 여운을 남긴다. 영희는 한국영화의 여주인공 대부분이 매춘부와 호스티스였던 시기에 씩씩하고 활달한 캐릭터로서 주목할 만하다. 철수 역은 당시 스타로 발 돋음 하던 최재성 이 맡아 눈길을 끈다. 이 영화를 찍은 다음 해인 1988년, 이미례는 24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이후 이미례는 1987년에 < 학창보고서 >, 1990년에 < 영심이 >, 1991년에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를 연출했다. 모두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하이틴 영화이다. 이 시기 한국영화에서 하이틴 영화가 유행한 데다 여성감독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반영된 것 같다. 세 편 가운데 특히 배금택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심이>는 평범한 여고생 영심이가 가정과 학교에서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을 코믹하게 그려내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 가요계의 최고 스타였던 댄스가수 박남정 이 카메오로 출연하고, 이재은 , 김민종 , 이경영 , 노사연 등 화려한 출연진들도 화제를 모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박남정과 백댄서들이 출연, 박진감 넘치는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인다. 가수 노사연의 코믹한 연기도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1990년 ‘한국영화 베스트10’에 선정되었다. 이밖에 <학창보고서>는 열등학급으로 전학 온 주인공 창하가 스터디그룹을 결성하고 학우들을 다독여 학급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이야기이다. 이상아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무용수의 꿈이 좌절되자 방황하는 해리 역을 맡았다.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는 새로 부임한 젊은 남자 교사가 주인공이다. 그는 학생들을 변호하다 교장과 마찰을 빚기 일쑤인데, 결국 문제 학생을 위기에서 구해주려다 희생하게 된다. 학생들은 비로소 스승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오열한다. 이미례의 하이틴 영화는 모범학생이 아니라 평범하거나 다소 불량한 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그들이 즐기는 하위문화를 다채롭고 코믹하게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이미례는 작품으로 인정받거나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고, 당시까지는 유일하게 6편의 영화를 찍은 여성감독이자 영화계의 홍일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계속 주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인터뷰에 따르면, ‘제작자들이 깊이도 없는 청소년 영화만 맡기는 바람에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계속 청소년 영화만 하라고 하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쿼터 맞추려고 아니면 장사하려고 한국영화 찍는 분위기도 싫고, 청소년 영화감독으로 꼬리표가 붙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이래저래 탈진해서 영화를 놓아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미례는 영화 대신 공중파의 방송 다큐멘터리, EBS의 <육아일기> 등을 연출했다. 유아프로그램은 미래의 결혼 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더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프로덕션 ‘미례비전’을 설립했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우석대학교 영상학부에서 겸임 교수로 재직했다. 여행을 다니고 벗들과 어울리며 한가하게 쉬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미례는 1996년, 독신생활의 노하우를 집약한 책 『모르면 큰 일 나는 혼자 살기 테크닉』을 출판했다. 이 책을 내면서 그녀는 ‘혼자 사는 게 꽤 재미있었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나를 위해 요리를 만들고 청소를 했다. 그런 노력이 독신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관건인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나날이 늘어가는 독신 여성을 위해 책을 썼다’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 편으로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1997년 5월, 그녀는 등산전문잡지 「사람과 산」의 편집부장이자 산악인인 박기성과 결혼하면서, 오랜 독신생활을 청산했다. 임순례 감독과 함께 이미례는 애초에 영화계를 완전히 떠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동안 쉬려고 했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이 10년이 훌쩍 흘러가고 말았다. 2001년, 그녀는 산악영화 <화이트 케어>를 들고 컴백하려고 했다. 백두대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두 여성이 산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여성 버디무비가 될 예정이었다. 시나리오 작업도 잘 끝냈고 제작자도 나선 상태였기에 바로 제작에 들어갈 듯 했지만, 이미례가 10년 만에 영화계로 돌아온다며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끝내 영화로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07년, 이미례가 쓴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안나푸르나>라는 연극이 개막을 했다. 1999년, 산악인 엄홍길과 함께 안나푸르나를 등반하고, 하산 길에 실종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다. 여기에 여성 산악인들의 치열한 삶과 그들의 견고하고 끈끈한 우정을 담아내려고 했다. 이미례는 <안나푸르나>가 반드시 만들고 싶은 꿈같은 영화이기에, 저예산 독립영화로 직접 제작하려고까지 했으나 결국 영화화하지는 못했다. 2008년, 이미례는 여성영화인모임이 주최하는 ‘2008 여성영화인축제’에서 ‘올해의 여성 영화인 공로상’을 받았다. 여성 영화인이 없는 환경에서 후배 여성들을 위해 길을 터 준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미례는 영화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다짐해왔지만, 현재는 2005년에 문을 연 음식점 ‘여자만’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남편의 고향이 전남 고흥인데다 시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좋아 비법을 전수받다보니 음식솜씨가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영화제작이 계속 무산되자 먹고 살기 위해 음식점을 차리게 되었는데, 인사동 맛 집으로 대박이 나면서 분점까지 여는 성공을 거두었다. 여전히 이미례는 한국영화사에서 여섯 편의 영화를 연출한 몇 안 되는 여성감독으로 기록되고 있다. “죽을 때까지 영화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 그게 가장 행복한 삶일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영화계로 돌아와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새로운 신화를 쓰게 될지 기대해본다.
박남옥 , 홍은원 , 최은희 의 뒤를 이어 네 번째로 한국 여자감독이 된 황혜미 는 1970년대 유일하게 활동했던 여성감독이었다. 홍일점 영화감독 자체로도 유명했지만, 더욱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소르본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는 거의 정설처럼 회자되었던 소문이었다. 간혹 남편과 함께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했다는 낭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 아름다운 생존 >에서 프랑스에 잠시 가있었을 뿐 소르본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활동 당시에 그녀는 내내 여류감독과 소르본느를 졸업한 재원이라는 수식어로 규정되었다. 황혜미는 1936년 만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63년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황종률이며, 아마도 부친이 일본 규슈제국대학 졸업 후 만주국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이화여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1961년 미국에서 김동수와 결혼했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바로 미국으로 가느라고 등록만 해놓고 수업을 거의 불참했고 대신 하루에 3편을 볼 정도로 열성적으로 영화관에 다녔다고 술회한다. 1) 인터뷰에서는 그 당시 <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 >(1959) 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본 추억을 생생히 기억해내고 있다. 황혜미는 어릴 때부터 이미 영화광이었는데 중학교 2-3학년이었던 부산 피난시절부터 미성년자 입장불가의 극장을 출입하는데 능숙했었다고 한다. 이 시기 기억나는 영화로 <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1937)이나 < 망향(Pepe Le Moko) (>(1937)을 몰래 보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때부터 유럽영화에 깊이 심취해있었으며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유럽 모더니즘 영화, 특히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혜미는 인터뷰에서 스스로 전후 세대로 규정하면서 성장과정에서 카뮈나 사르트르에 영향받았고 헤르만 헤세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언급하면서 특히 영화제작에 대해서는 푸도프킨의 서적을 중요하게 참조했음을 밝혔다. 2) 첫 경험 미국에서 돌아와 김승옥 의 소설을 읽고 매료되었던 황혜미는 남편 김동수 의 도움으로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화하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 안개 >(1967)의 감독을 맡기 위해서 소공동의 사무실에서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엘리트’였던 제작자 김동수와 황혜미 커플을 만났고 그 자리에는 당시 신문에 열정적으로 글을 쓰던 이어령도 참석하고 있었다. 3) 태창흥업의 대명제작을 하는 프로듀서로 황혜미는 <안개>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녀의 표현처럼 ‘처음이라서 재미있으니까 일일이’ ‘로케이션 헌팅까지 쫓아다니’면서 완성한 영화였다.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방가르드’한 기획을 밀어붙여 제작했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하였고 젊은 여성 기획자로서 황혜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문예영화 <안개>의 성공으로 획득한 2편의 외화수입권은 영화계의 초짜였던 황혜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4) 차기작으로 < 감자 >(1968)를 선택했고 김승옥에게 감독을 맡겼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검열에 시달렸던 <감자>는 원래 기획의도와 멀어지면서 흥행에도 실패하였다. 이러한 힘든 경험을 겪은 후 김동수와 황혜미 부부는 1970년 마벨코리아라는 영화사를 세우고 첫 작품으로 황혜미 각본, 감독의 < 첫경험 >(1970)을 제작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말 영화사는 보한산업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첫경험>은 1970년 11월 27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영화예술』에서 선정한 1970년 베스트 영화 4위에 올랐다.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황혜미는 신인상을 받았고 흥행 역시 무난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을 황혜미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영화가 개봉하기 전 “우리영화의 시장조사 및 수출-입 문제에 관한 현지답사”를 위해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황혜미에게 이러한 성공을 안겨준 영화 <첫경험>은 중년을 바라보는 부부인 기준( 남궁원 )과 지숙( 김지미 )은 권태로운 일상을 다룬다. 5) 부산으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에서 기준은 대학자퇴생 인애( 윤정희 )와 만나게 되고 밀회를 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를 눈치 챈 지숙은 방황하게 되고 탈선을 시도한다. 그러자 인애가 기준과의 지난날을 소중한 첫경험으로 남겨두고 떠남으로써 그들의 가정은 파탄직전에서 구출된다. 당시 유행하던 불륜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이야기 자체만 본다면 평범할 수 있으나 권태로운 부부의 일상 그리고 탈선 및 좌절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다. 슬픈 꽃잎이 질 때 이후로 황혜미는 < 슬픈 꽃잎이 질 때 >(1971)와 < 관계 >(1972)를 연이어 제작, 각본, 감독한다. 황혜미가 사업차 3개월의 외유 끝에 돌아와서 집필한 작품인 <슬픈 꽃잎이 질 때>는 고아인 서은희( 문희 )가 수녀님의 소개로 부호인 엄상훈(남궁원)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상훈은 이름난 바람둥이 홀아비이고 방치 속에 자라는 두 자녀는 개구쟁이들이다. 은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결국 아이들과 친해진다. 이 과정에서 점차 상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시기한 전부인의 가족이 벌인 흉계에 휘말린다. 결국 상훈과 은희는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게 되지만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은희는 죽게 된다.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 및 등장인물들의 구도는 < 제인에어 (Jane Eyre)>(1944)와 <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1965)의 구조를 차용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영화는 혹평을 받았고 흥행도 크게 실패하였다.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한 기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다고 평가한다. 관계 세 번째 작품인 <관계>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 < 졸업(The Graduate) >(1967)을 패러디한 것인데 원래의 설정에서 남녀를 변경한 영화이다. 홀어머니( 김신재 )와 살고있는 인애( 박지영 )은 근무하는 회사의 전무 기택( 남궁원 )의 유혹에 몸을 버리게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이를 알게된 어머니는 충격으로 숨진다. 여행사에 취직한 인애는 손님인 준호( 신영일 )의 적극적 구애로 사귀게 되고 준호의 부모님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준호의 아버지가 기택임을 알게되고 결혼을 피하게 된다. 힘들어하는 준호에게 기택은 모든 것을 고백한다. 인애는 자살을 기도하나 준호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된다. 너무 힘들어하는 준호를 보던 준호의 어머니( 문정숙 )은 사실 준호가 기택의 자식이 아님을 밝힌다. 진실을 알게 된 기택은 깊은 참회에 괴로워하고 인애는 병실에서 나와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고속버스를 타고 떠나지만 준호는 차를 몰고 와서 버스를 막아서며 인애와 재회한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성역할을 변경시켰을 때 그 이야기는 당시 흔한 불륜의 소재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과 결국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준호와 인애가 맺어질 수 있다는 결론은 한 신문평의 언급처럼 “<졸업>의 경우 기존윤리를 정면에서 초극하려했던데 비하면 <관계>는 끝내 한국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6) 현재 황혜미가 감독한 이 세 영화 모두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작품은 감각적인 영상미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이 부재는 안타깝다. 이 한계는 황혜미의 문제의식과 그 영화들이 가지는 당대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인터뷰와 당대의 평가들 및 관련 자료를 통해 조망해볼 때 우리는 당시 남성감독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감성 혹은 윤리적 길항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황혜미가 감독으로 활발하게 작업했던 1970년대 초반을 다시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경험>이 상영된 해인 1970년을 평가하면서 이영일 은 해당년도 영화계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했다. 하나는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로 떠오른 < 미워도 다시한번 >류의 범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확연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7)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는 1,2,3편 모두 흥행에 성공하면서 1970년대 초반 멜로드라마의 주류서사가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항상 ‘한 남자의 비틀거리는 행위 때문에 그의 아내와 다른 하나의 동거여인 사이에 ...끝없는 자기희생’을 반복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8) 반면 이러한 보수적 이데올로기 반대편에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성을 그린 성 주제 영화들이 존재했다. 이영일은 <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 >(1960) 나 < 페드라(Phaedra) >(1962) 처럼 파격적인 윤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성을 타부시했던 한국의 상황에서 성을 주제로 한 이 영화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반체제적인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9) 황혜미의 <첫경험>은 위의 두 경향이 기묘하게 길항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는 불륜의 소재를 차용하지만, 불륜으로 인한 신파적 희생은 부재하다. 더구나 불륜 자체는 등장인물들에게 기성의 사회가 가지는 틀에 박힌 질서나 윤리의식을 벗어나는 상황으로 변주된다. 이처럼 불륜이 무겁지 않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성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은 별다른 윤리적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섹스를 하게된다. 그들이 느끼는 탈선의 근거는 징후적으로 소품이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거나 간결한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설명이 결여된 채 이미지의 단상들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권태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평론가들이 호평하였던 영화의 도입부인 기준과 지숙의 섹스 장면은 “차가운 금속성의 탁상시계 소리를 에펙트로 넣고 그 속에서 부부의 냉각된 섹스”를 보여줌으로써 “부부의 성 자체가 이미 단순한 생활 속의 반복으로 리듬같은 일상으로 변했음”을 드러낸다. 10) 인애 역시 대학이라는 제도 자체에서 막 벗어난 젊은 여성으로 둘은 부산이라는 비일상적 휴양지에서 해방 혹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에 쉽게 섹스를 할 수 있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영화들에서 섹스와 불륜은 엄중한 도덕적 문제였다. 성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결혼을 전제로 하는 약속된 행위여야만 했고, 남성의 기만에 속아서 순결을 지키지못한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첫경험>에서 섹스는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둘의 밀회는 계속되고 눈치를 챈 지숙은 배반감에 탈선을 시도한다. 기준은 아들과 아내가 있는 가정이 점차 무너지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인애 역시 유부남이라는 현실과 마주했을 때 그 무게감이 점점 힘들어진다. 지숙의 탈선시도는 아슬아슬하게 멈추게 되고 인애는 담담하게 기준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일상은 봉합된다. 게다가 ‘첫경험’을 한 인애가 파멸을 한다는 암시도 없다. 영화는 치정이나 불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감정적 격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일상성을 강조하며 영상언어를 통해 그 감성들을 유려하게 그려나간다. 공허함을 느낀 지숙이 아들이 동물원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거대한 코끼리와 대조되는 지숙의 왜소함을 이미지화함으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이 느끼는 위축감을 드러내거나 기준과 인애의 이별 장면에서 문을 사이에 두고 외부에 있는 남성과 내부의 젊은이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젊은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각각 속해있는 세대 차이를 강조하는 장면 등 11) 은 어떠한 발화적인 설명 없이 결국 각자의 벗어나려했던 기존의 틀로 돌아가는 행위의 당위성을 납득시켜준다. 12) <첫경험>의 불륜을 보는 여성적 시선이나 <관계>가 드러내는 한 여성을 둘러싼 부자관계의 비윤리성은 한국사회의 기본 윤리에 대한 저항적 도전이었다. 그러나 황혜미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안도할만한 결론을 내면서 그 저항의 칼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 무뎌지는 저항의 감각이 그녀 본래의 윤리의식의 한계인지 상업성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업적 압박이 아니었다면 황혜미는 더 강하게 도전적인 시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개>를 제작하는 도중이었던 1967년 9월, 그녀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실험적인 시도는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밑지는 일이 싫어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13) 아이러니 하게도 <안개>는 황혜미가 관여한 영화 중 가장 예술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을 했다. 그러나 <첫경험>과 이후 작품을 통해 작가적 의식과 상업성은 점차 균형을 잃었다.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상업영화들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그녀가 가진 성과 결혼에 대한 시대감각, 그리고 1970년대라는 현실상황은 매끄럽게 조화되지 못했다. 황혜미는 세 편을 끝으로 영화활동을 접었으며 몸담고 있던 보한산업주식회사 역시 1973년 이후에는 제작을 중단했다. 1)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8면. 2) 이 글에서 주가 없는 황혜미의 소회나 발언 및 인용문은 모두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2001)에서 채록한 것이다. 3) 김수용, 『나의 사랑 시네마』, 시네21, 2005. 105쪽. 여타 자료나 당시를 회고하는 글들을 참조하면 이어령은 시나리오의 감수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4) 황혜미, 「연패 끝에 <첫경험>의 메가폰」, 『여성동아』 1970년 12월호, 179쪽. 5) 기준이라는 이름은 <안개>의 남주인공 이름과 동일하다. 그 연결점을 의도적으로 설졍한 것으로 보인다. 6) 「타협으로 끝난 애정모럴의 갈등- <관계>」, 동아일보 1972.4.25.8면. 7) 이영일, 「마비와 혼미의 시대」, 『영화예술』 1970년 12월호, 32-36쪽. 8) 이영일, 위의 글, 34쪽. 9) 이영일, 위의 글, 35쪽. 10) 이서림, 「참신한 영화감각의 가작」, 『영화예술』. 1971년 1월호, 72쪽. 11) 「<첫경험>, 처녀의 불장난을 영상화」, 동아일보, 1970.11.28. 5면. 12) 이러한 서사구조와 영상미의 성취는 당시 프랑스 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 1966)와 <파리의 정사>(Vivre Pour Vivre, 1967)의 표절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13)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 8면. 황혜미 감독
지난 4월 8일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감독으로 불리는 박남옥 (朴南玉) 감독이, 향년 94세의 나이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별세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처음 열린 서울여성영화제를 통해서다. 그 때 한국영상자료원에 결말부 영상과 일부 사운드가 유실된 채로 네거티브 필름만 보관되어 있던 그의 연출작 < 미망인 >(1955)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간 한국영화사 기록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박남옥을 시작으로 한 역사 속 여성영화인들의 활동상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당시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여성영화인들은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을 결성하였고, 『여성영화인사전』(주진숙·장미희·변재란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2001)과 다큐멘터리영화 <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 임순례 , 2001) 등의 결실도 맺게 된다. 박남옥 감독이 그 출발점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학생 박남옥 열렬한 영화 팬에서 영화계로 1923년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박남옥은 어려서부터 영화를 무척 사랑했고, 문학, 미술, 체육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이던 만능 소녀였다. 특히 운동 실력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인데, 당시 신문기사를 검색해 보면 1938, 39년 전조선육상선수권대회에서 투포환 부문의 우승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타고난 체력은, 훗날 영화연출 현장에서 갓난아기를 둘러업은 채 레디 고를 부를 수 있는 원동력이었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다. 신문기사 속 그의 이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각 대학의 입시합격자를 게재한 1940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의 ‘입시합격발표’란을 살펴보면, 박남옥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합격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가 인터뷰를 통해 언급한 해방 이전의 이력들이 정확하게 확인되는 셈이다. 박남옥은 일제 시기 조선영화의 최고 스타였던 김신재 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영화잡지인 『신영화』(1942년 11월호)에 나온 최인규 영화에 대한 기사 중 부인 김신재에 대한 언급을 읽고 팬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 집없는 천사 >(1941)에서 꽃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의 모습에 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의 매일 김신재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기사와 사진들은 모두 스크랩했다는 그의 증언은, 식민지 조선의 한 소녀가 영화에 열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어 무척 인상적이다. 사실 필자는 대학원 석사과정 중 <아름다운 생존>의 촬영으로 참가했는데, 이 때 박남옥 감독을 실제로 뵙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소중한 기회가 있었다. 일제 말기 노골적인 국책영화들 사이에서 조선의 농촌 풍경을 담은 < 풍년가 >(1942, 방한준 )가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고, 최인규 의 < 수업료 >(1940) <집없는 천사>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영화였는지 증언하시던 대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기 전에 식민지 영화문화를 향유하던 영화 팬이었고, 초창기 한국영화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박남옥이 본격적으로 영화 작업에 참여할 기회는 해방과 함께 찾아왔다. 친구의 남편인 윤용규 감독(그는 해방기의 대표작 < 마음의 고향 >(1949)을 감독하고 월북했다)의 소개로 조선영화건설본부 산하의 광희동 촬영소에 스태프로 입사한 것이다. 그 곳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김신재를 만날 수 있었고 이후 말년까지 인생의 친구로 지내는 출발점이 된다. 이 시기 박남옥은 돈암동의 예술인촌이라 불린 마을에 살았는데, 바로 이웃이 유명한 영화인들 즉 김신재와 최인규 부부, 김소영 과 무용가 조택원 커플, 문예봉 , 전창근 , 독은기 , 윤용규, 한형모 등이었다. ‘여성영화’ <미망인>의 완성과 의미 해방 직후 영화인들이 집결했던 광희동 촬영소에서 편집조수로 일하던 박남옥은 드디어 현장으로 나가게 된다. 바로 배우 최은희 의 데뷔작이기도 한 < 새로운 맹서 >(1947, 신경균 )에서 스크립터를 맡은 것이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당시 영화 현장에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딴따라 판’을 벗어나 정상적인 결혼을 바라는 부모의 강요로 귀향을 선택하게 된다. 영화에 대한 그의 열망이 너무나도 강했던 것일까.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박남옥은 다시 영화계로 돌아갈 기회를 잡는다. 1953년 국방부 촬영대에 입대해 기록영화 작업에 참여했고, 극작가 이보라를 만나 결혼까지 이른다. 전쟁이 끝났고, 드디어 그는 자신의 영화에 착수한다. 박남옥의 데뷔작이자 유일한 작품인 <미망인>(1955)은 이보라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일단 언니에게 돈을 빌려 영화에 착수했다. 영화사 이름이 ‘자매영화사’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개인적으로 친했던 이민자 를 주연으로 내세웠고, 스태프 역시 지인들로 꾸렸다. 촬영도 아예 저예산 제작의 기본이라 할 16미리 필름으로 시작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데뷔작에 착수하기까지도 힘들었지만, 영화 현장을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 촬영하는 날보다 제작비를 빌리러 다니는 날이 더 많았고,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맡길 곳이 없어 포대기에 둘러업고 촬영 현장을 누볐다. 직접 편집을 하고 전창근 감독 등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실을 구해 후반 작업을 마치는 등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영화를 개봉시켰다. “여성감독이 아니면 착안하기 어려운 ‘앵글’의 각도와 사건의 ‘템포’ ‘리듬’의 명쾌, 화면과 동작(연기) 등에 생활감정을 예리하게 융화”(『동아일보』 1955.2.27)했다는 개봉 직전 영화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영화는 평단의 인정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전후 여성들의 욕망을 과감하게 묘사한 그의 영화가 너무 앞서갔던 탓이었을까. 변재란 등의 영화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미망인>은 단지 최초의 여성감독의 영화로 수식되기보다 여성영화로서의 의미가 더 클 것이다. 박남옥감독 촬영 현장 박남옥 감독이 남긴 것 안타깝게도 박남옥은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고, 1960년 창간된 『씨네마 팬』의 편집장으로(그는 해방 전 대구의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영화평을 쓰기도 했다) 영화 일을 이어나가다,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영화판에서 기회를 잡은 것이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시기 그리고 전후, 즉 한국 사회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박남옥 이후 < 여판사 >(1962)의 홍은원 , < 민며느리 >(1965)로 연출에 데뷔한 배우 최은희, < 첫경험 >(1970)의 황혜미 , < 수렁에서 건진 내딸 >(1984)의 이미례 등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여성감독이 이어졌다. 이후 임순례 감독을 필두로 굳이 여성감독으로 부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성영화인들은 각 분야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이 박남옥에서 출발한 계보를 이룬다고 또 박남옥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기 위한 고군분투의 역사가 박남옥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그의 영화 인생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김영희 편집기사와 박남옥 감독 본 글은 2017년 4월 『씨네21』호에 실린 '[추모] 김신재를 동경하던 '영화소녀' 영면에 들다'를 재수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