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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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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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횃불 높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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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방송 횃불되어 : '92 MBC 노조파업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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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방송 횃불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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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교회 고난의 밤 칸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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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CT 콤팩트카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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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22
멸공의 횃불-국방부 제정 군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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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의 횃불-국방부 제정 군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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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영화 "횃불" 제작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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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횃불" 학생관람허가 재신청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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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영화 "횃불" 미성년자 관람인정 재고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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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1920년대 후반 일군의 조선인 영화인들이 상하이에서 그들의 영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영화사에서 상해파 영화인이라고 명명될 정기탁 , 김일송(상하이 활동 당시 이름은 정일송), 이경손 , 전창근 등이 그들인데, 특히 그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정기탁은 필모그래피만 보더라도 놀랍도록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28년 상하이의 주요 영화사 중 하나였던 대중화백합(大中華百合影片公司)에서 연출한 <애국혼 愛國魂>을 통해 성공적으로 상하이 영화계에 데뷔했으며(이 영화에는 김일송이 주요 배역 중 하나를 맡고 있으고 전창근 또한 출연 및 각본에 참여하고 있다), 같은 해에만 < 삼웅탈미 三雄奪美>, < 화굴강도 火窟鋼刀>까지 세 편의 영화에 감독이자 출연자로 이름을 올렸다. 1929년에는 대중화백합에서 만든 9편의 영화에 감독 겸 배우로 관여하였고, 대중화백합을 포함한 영화사들의 트러스트로 이루어진 연화영화사(聯華影業公司)가 제작한 영화 <출로 出路>(1933)를 감독했으며, 1934년에 마찬가지로 연화에서 완성한 완령옥 주연의 < 상해여 잘 있거라 ! 再會吧, 上海!>를 끝으로 상하이 영화계를 떠났다.(이 시기 만들어진 영화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상해여 잘 있거라!>는 영상자료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기탁은 1934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1937년에 죽었다.) 그런데 이 이름을 한국영화사 안에서 호명해오는 데에는 적잖은 난감함이 따라붙는 게 사실이다. 정기탁은 상하이 영화계의 주류에서 활동하였다. 1928년의 <애국혼>부터 1934년의 <상해여 잘 있거라!>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영화들은 이 영화들이 제작된 대중화백합이나 연화가 중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주류적 위치만큼이나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의 상해영화사의 전형적인 조류와 일치하고 있다. 즉, 1928-1929년의 그의 영화들은 1920년대 후반 상하이라는 도시에서 형성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르영화의 모색과 함께 하고 있으며, 이후 연화에서 완성한 두 편의 영화 <출로>와 <상해여 잘 있거라>는 1930년대 좌익 멜로드라마들을 통해 ‘중국영화의 첫 번째 황금기’를 이끌었던 이 영화사의 전형적인 영화 패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실천들은 중국영화사의 한 장 속에 자리매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내셔널 시네마적 귀속이란, 그 네이션의 성립의 전후까지를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얼마나 사후적인 것인가? 월경자들의 실천이 ‘경계’의 이쪽과 저쪽에서 형성되는 사후적 담론 내로 수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후적 귀속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실천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시간대 안에서 사유해본다면 어떨까?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출연작까지 포함하여 무려 12편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1928-29년, 상하이라는 시공간은 특별히 흥미롭다. 1919년 9월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된 장소, 3.1운동과 5.4운동 이후 반제의 기치 아래 한중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미만했었던 시간. 나아가 열강들의 조계지이자 1차대전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활발한 산업과 무역의 거점지로서 1925년의 5.30 운동에서 시작된 반제 계급투쟁으로서의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장소, 1927년 국민당의 우경화와 장제스의 4.12 쿠데타로 이 ‘혁명’이 폭력적으로 좌절된 시간. 또한 1928년은 이후 이 지역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대중문화적 자원으로 기능할 어떤 장르영화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 <불타는 홍련사 火燒紅蓮寺>(명성영화사)의 성공으로 불붙은 무협영화 붐은 거의 이상 현상이라고 할만한 사태를 불러일으켰으며, 관객들은 홀린듯 이 새로운 장르영화가 보여주는 운동과 시각적 쾌감에 사로잡혔다. 붐이 피크에 달한 1929년 한해에만 85편이 제작된 무협영화는 1928년에서 1931년 사이 무려 250여 편이 만들어졌다. 이 조류의 한복판을 통과해갔던 동시대인의 증언처럼 말 그대로 ‘미친 물결(狂濤)’가 같았던 이 흐름에서 자유로운 곳은 거의 없었으나 정기탁이 몸담고 있던 대중화백합역시 여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호응하던 영화사였다. 1928년에서 29년까지 약 1년 반 동안 이 영화사에서 만들어진 30편의 영화 중 거의 절반이 무협영화였으며, 같은 기간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 감독 혹은 배우로서 관여했던 11편의 영화 중 다수가 이 장르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영화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해왔던 자들은 상하이와 남양 일대의 공장과 농장의 노동자들, ‘농공(農工) 군중’이라고 불려졌던 자들이었다. 말하자면 무협영화는 이제 막 형성된 대규모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지역 최초의 액션영화였다. 1920년대 후반의 상하이, ‘농공 군중’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끌어모은 최초의 액션영화 장르로서의 무협영화, 이 장르와 연계되어 있는 조선인 망명자의 영화적 실천. 다시 한번 언급컨대, 이 점들을 잇는 첫 장면에 들어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애국혼>이다. 상하이 영화계에서의 정기탁의 성공적인 안착을 가능하게 한 이 영화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거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협영화 장르가 이 지역 일대에서, 나아가 화교 문화권과 상관없는 장소(이를테면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과 같은 지역을 상기해보자)에 끼친 광범위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순간은 어떤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원형이 당도한 기원의 시간이라고 할만하다. 그 첫머리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행위에 집중한 안중근 서사가 동시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전통적인 문의 강조로부터 무로의 이동이 20세기 초 이 지역에서 사유되었던 근대적 국가 성립에의 열정과 이를 떠받치는 근대적 신체의 문제와 관련있다면(근대국가라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는 ‘상무(尙武)’) ‘법을 범하는 무’로서의 협은 반식민지 상태의 중국과 식민지 조선에서 상상되었던 아나키한 힘에의 열정과 관련있다. 동시에 수중의 폭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자, 협객은 <애국혼>에서 국가 간 교전이라는 주권적 행위를 수행하는 자와 겹쳐진다. 먼저 안중근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에서 안중근은 1909년의 그의 거사 직후부터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찍이 량치차오가 이 거사 직후 쓰여진 「추풍단등곡 秋風斷藤曲」(1909)에서 그를 형가와 예양에 비견한 이래, 그에 관한 시문과 평전이 꾸준히 등장했으며 1919년 5.4운동 시기에 안중근 의거를 소재로 다룬 극은 반제반봉건 투쟁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중국 각지의 학생연합회에서 빈번히 상연되었던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안중근의 서사는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항일 선전대에서도 중요한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 이 이름이 지닌 반제 항일의 아이콘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정기탁이 대중화백합에서의 그의 첫 번째 영화 프로젝트로 안중근 스토리를 선택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정기탁의 이 상하이에서의 첫 영화는 가히 성공적이라고 할만했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으며, 의기 충만한 격앙감”이 있는 “고상한 스토리”로 소개된 <애국혼>은 근래 ‘국산영화’ 중 사상적으로 가장 충만한 영화(《申报》 1928.11.11.)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공개 당시 쓰여진 동명의 영희(影戲)소설 碧梧, 《爱國魂》(《電影月報》1928年 第7期). 이 자료는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다. 을 통해 면모를 확인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위국(魏國)의 정치가 등박문(縢溥文)은 여국(黎國)의 간신 여용(黎庸)을 매수하여 이 나라를 침탈하고자 한다. 어느날 이들의 음모를 알게 된 샤딩춘(夏鼎醇)이 안영진(晏永鎭)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영진은 등박문을 암살하기 위해 그에게 폭탄을 던지나 실패하고 등박문의 수하에 의해 횃불로 불태워져 죽임을 당한다. 한편 영진의 아들 안중권(晏仲權)은 누이동생을 괴롭히는 위국 병사를 때려죽이고 도망치던 중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다. 몰래 상하이로 건너간 중권은 그곳에서 ‘중국인 혁명가’ 주한룽(朱漢龍)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한룽의 누이동생 아이란(愛蘭)과 사랑에 빠진다. 중권과 한룽은 서울로 잠입하여 거사를 치루려고 하나, 호텔에서 등박문을 향해 겨눈 중권의 총구는 빗나가고 만다. 중권과 한룽, 샤딩춘과 박재명은 다시 등박문의 암살계획을 세우지만, 여관 하인의 밀고로 들이닥친 위국 병사들에 의해 중권은 체포되고 샤딩춘은 죽음을 맞는다. 하인의 회개로 힘을 합쳐 중권을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한룽과 박재명. 그 와중에 하인은 죽지만 중권은 무사히 탈출한다. 중권, 한룽, 박재명은 두만강을 건너 장일성(張一成)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여기에 중권의 동생 옥실 또한 합류한다. 뒤따라온 위국 군대와의 전투에서 장일성이 죽고 자신의 어린 아들을 중권에게 부탁한다. 남은 자들은 홍콩으로 떠나 류동샤(劉冬夏)의 집에서 후일을 도모하고, 와중에 옥실과 한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한편 중권을 그리워하던 아이란은 그리움으로 병들어 죽는다. 두만강 근처의 의용군에 합류한 중권, 한룽, 재명, 옥실. 어느날 적의 상황을 정탐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한룽과 재명이 위군 병사에게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재명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으로 목숨을 잃고, 고문으로 양쪽 눈을 잃은 한룽은 중권에 의해 구출된다. 류동샤로부터 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중권은 한룽에게 옥실을 부탁하고, 홀몸으로 하얼빈으로 떠난다. 드디어 등박문의 저격은 성공하고, 체포된 중권은 늠름한 모습으로 사형당한다. 등박문(縢溥文), 여용(黎庸), 안중권(晏仲權) 등 한자음의 종족성을 통해 희자(戲字)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고유명사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이야기는 1920년대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가능했던, 피식민지인과 반(半)식민지인이 항일과 구국이라는 공통의 가치로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에 관한 가장 강렬한 상상태를 보여준다. 한국 혁명가와 중국 혁명가는 거듭되는 전투와 체포, 탈출, 다시 전투를 통해 피를 나누고, 급기야 한국 혁명가가 중국 혁명가에게 자신의 동생을 부탁할 때 실제로 ‘형제’가 된다. <애국혼>은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일단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와 그다지 상관없어 보인다. 정기탁은 안중근 스토리를 제재로 삼았지만 그의 전기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이야기를 오직 암살 시도, 실패, 탈출, 추적, 전투로 이루어진 활극영화로서 다루었다. 이 이야기가 지극히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시작되는 저 순간이 어떤 전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혼>은 명백히 한국영화의 기원적 장면이라고 할만한 것을 반복하고 있다. 이 순간 정기탁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분명 1927년 조선영화 최대의 히트작 < 아리랑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을 염두에 놓고 보자면, <애국혼>은 마치 <아리랑> 이후, 혹은 <아리랑>의 저 출구 없는 결말 너머를 상상하는 소망처럼 보인다. <아리랑>의 영진처럼 <애국혼>의 중권 역시 여동생을 폭행하려는 자를 때려죽인다. 그러나 영진이 일본 순사에게 묶여 고개를 넘어가며 그저 아리랑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면 일본 ‘군인’을 때려죽인 중권은 국경을 넘어 상하이로 건너간다. <애국혼>이 반복하고 있는 <아리랑>의 이 장면은 왜 그토록 강렬한 것인가? 이 장면이 보여주는 바는 세 가지이다. 먼저 ‘그’는 자신의 수중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만큼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낫을 들어 죽인다) 둘째, 그러나 그 폭력이 발현되는 순간 그는 법에 포박당한다.(순사에게 잡혀간다) 셋째, 이 법은 당연한 말이지만 식민지 권력이 이곳에 강제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내부가 아닌 상하이라는 외부의 장소로 탈주한 <애국혼>은 바로 이 장면을 반복하면서 사적 폭력을 공적 폭력으로 옮겨온다. 즉 결투는 이제 전투로 옮겨갈 것이다. 식민과 수난의 땅으로서의 조선과 주권과 주권의 교전이 일어나는 장소로의 중국 혹은 상하이. 동시에 <애국혼>의 시작 지점이 구축해놓은 등박문을 죽이려다가 죽임을 당한 아버지 안영진의 죽음이라는 사건(이것은 안중근의 전기적 사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은 등박문 암살이라는 중권의 행위를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인 원념과 나라를 구한다는 공적인 가치를 일체화시키는(게다가 이 아버지 스스로가 ‘구국’을 위해 일어섰다가 죽임을 당한 자임을 상기해보라) 한편 이 영화를 동시기의 유행장르, 무협영화의 장르적 특성으로 밀어넣는다. 무협 장르의 내러티브적 핵심은 젊은 남자(혹은 여자)가 행하는 복수에 있다. 그 혹은 그녀는 스승, 아버지,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복수는 행위의 근본적 추동 요인이다. 그런데 복수는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종종 이들은 충과 효라는 이 세계의 ‘보편적’ 윤리를 끌어들이지만) 개인의 개인에 대한 응징, 사적 폭력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애국혼>은 항일과 구국이라는 대의를 아버지의 복수라는 사적 원념과 일치시킴으로써 한편으로 흥행 장르의 규약을 공유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안중근의 실제 이야기로부터 영감 정도를 받아 자유로운 각색이 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중권이 의용군에 합류한 이후 등박문의 암살에 성공한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설정을 고수하고 있는 지점은 새삼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설정은 중권의 행위가 도당적 행위가 아닌 군사적 행위임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군사를 날줄로 삼고, 로맨스를 씨줄로 삼았”다는 이 영화의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이 순간 군사영화, 다시 말해 전쟁영화이다. <애국혼>은 아버지의 복수를 행하는 아들이라는 무협영화와 구국의 항전이라는 전쟁영화를 겹쳐놓음으로써 식민지/반식민지의 경험 위에서 형성된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하나의 원형적 틀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이제 막 시작된 무협영화의 컨벤션과 전쟁영화를 뒤섞고 있는 <애국혼>을 좀더 적극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애국혼>은 안중근이라는 실제 인물의 표상, 반제와 항일이라는 반(半)식민지 중국과 식민지 한국의 공통적 이념 하에 협과 의리에 기반한 복수 서사를 전개해나간다. 그럼으로 이 반제 ‘액션영화’에는 무림 혹은 강호라는 판타지 공간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근대 국제 정치의 교전/전쟁의 문제와 혁명 혹은 반란의 상상인 ‘협’의 문제가 교직된 <애국혼>은 소위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대표 장르로서의 ‘무협영화’를 통해 3.1운동과 5.4 운동 후의 한중연대의 정치적 움직임과 계급투쟁으로서의 5.30 운동과 동아시아적 액션이라는 문화적 과제가 어떻게 교직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투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국혼>이 절반쯤 기대고 있던 무협영화는 1931년 이후 적어도 상하이의 주류 영화 산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국민당 정부는 상하이를 비롯해 전국적 규모로 이 장르의 제작을 전면 금지하였다. 이후 중국 본토에서 거의 상영될 수 없었던 무협영화의 제2차 붐이라고 할만한 것은 1960년대 중반 홍콩에서, 정확히 첫번째의 붐을 이끌고 목격했던 자들에 의해 가능해졌다. 1920년대 말 무협영화붐의 중요 에이전시였던 천일(天一)영화사의 후신인 쇼브라더스는 1965년 <강호기협 江湖奇俠>(서증굉)을 시작으로 ‘무협신세기’를 선언하며 이 장르를 ‘모던’하게 환골탈태시키고자 하였다. 쇼브라더스의 기획은 호금전의 <대취협 大醉俠>(1966)과 홍콩 영화 최초의 백만달러(홍콩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인 장철의 <독비도 獨臂刀>(1967)로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영화들은 이제 남한으로 구획된 대한민국의 영화시장에 적극적으로 어필한 최초의 무협영화가 되었으며, 이후 이곳의 남성 하위문화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는 대중문화의 자원으로 기입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바로 이 기입의 순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협(俠)과 액션, 동아시아 액션영화의 역사적 기원 - 정기탁의 〈애국혼〉과 상하이 무협영화」(홍지영 공저)를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배우 김영인 1960~1970년대 액션영화를 말하다
구술사로 조명하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 연간 200여 편이 넘게 제작되며 대중문화의 유행을 선도하고 산업적인 전성기를 이끈 1960년대 한국영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와 깊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급속도로 확대‧성장한 매체의 특성으로 짧은 시간 동안 유입된 영화계의 많은 인력을 살펴보는 것은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영화산업 성장의 근간이 되는 제작규모와 그에 따른 인력 배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그나마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장르별, 제작사별, 시기별로 구분해 흐름을 살피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불안정한 제작 시스템과 상영관 규모 대비 과도한 제작 편수로 인해 분류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규모에 상응하는 방대한 영상사료와 문서사료를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수행되어야 할 방법론이 구술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구술사방법론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나 주변부의 인물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방면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 구술사 프로젝트에서 다양한 직능별로 이루어진 인력 구술은 이와 같은 여러 방면에 걸친 새로운 방식의 역사쓰기에 일조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배우 김영인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흐름과 변화이다. 2016년 한국영화 주제사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서 장르영화의 배우를 대표하여 이루어진 이 구술은 문서사료에는 기록될 수 없는 세밀한 현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구술은 특히 1960~1970년대 여러 장르가 번성하는 가운데 제작편수의 큰 부분을 차지한 액션영화를 다채롭게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시기별로 변화하는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에 대한 설명은 장르영화의 성장과 확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특정 사례가 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1대1 액션과 군중신의 촬영비화, 무술지도의 원칙 등을 큰 틀로 하여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특징을 구술한다. 그가 데뷔한 1961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우연히도 액션영화의 성장과 쇠퇴와 맞물려있는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1960년대 규모가 확대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의 성장 이면에서 인력의 유입과 이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그림1) 김영인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에서 특징적인 점 중 하나는 영화의 특성상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 구술이 상당수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특정 감독이나 배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뒷스태프’는 방대한 사료가 무색할 만큼 제대로 된 기본자료 하나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의 크레디트에 기록되지 않은 경우도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오롯이 구술자의 기억과 필름이 보존된 영화를 중심으로 구술을 완성해가야 한다. 때문에 영화의 기본 제작정보를 기반으로 구술자와 연구자가 내용을 쌓아 구술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네트워크를 그려내야 한다. 배우 김영인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활동 기간이 비교적 긴 반면에 조연으로 오랜 기간 활동한 탓에 매체 노출이 거의 없었고, 구술이나 회고록 등의 작업물도 없어 1차 자료를 수집하기가 어려우며 한국영상자료원의 데이터베이스 자료와 영상물 외에는 참고할 자료가 미비하다. 이럴 경우 최선의 방법은 예비접촉을 통해 질문지를 구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예비접촉을 바탕으로 구성한 김영인 구술의 큰 항목들은 첫째, 영화계 입문 배경, 둘째, 배우 데뷔 후의 연기활동, 셋째, 무술지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데뷔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력을 회고함으로써 액션배우 김영인의 활동이 완성되었다. (그림2) 액션영화 촬영현장에서 ‘날으는 배우’의 탄생과 액션영화의 생생한 현장이야기 1) ‘스턴트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도 않던 시절, 김영인은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 주인공들의 액션 장면을 대신하며 ‘날으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본인이 출연한 장면이 대역이란 것도 모를 정도로 영화제작 시스템에 어두웠던 그는 1966년 김기덕 감독의 조언으로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중 있는 배역이란 언급에 큰 맘 먹고 빚까지 내 신사복 세 벌을 맞췄다. 하지만 그가 맡은 역할이 ‘깡패’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맞춤옷들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결국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구제 점퍼가 ‘유니폼’이 되었다. (그림3)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신문광고 데뷔작 이후 김영인은 <어명>(강조원, 1967), <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등의 영화부터 2000년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다수의 액션영화에서 활약했다. (사진 4)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의 백골 역의 김영인과 불곰역의 백찬기 (사진 5)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 왽쪽부터 김영인, 김지영, 안성기, 윤주상, 백찬기 1940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한 그는 학창시절에는 권투를 비롯한 다양한 운동을 섭렵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특히 1960년대 유명한 권투선수들을 배출한 한국체육관에서는 꽤 높은 순번인 ‘27번’을 받아 아마추어 시합에도 출전할 정도였다. 이 때 익힌 권투와 유도, 가라테 등은 후일 본인의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액션 지도를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김영인의 구술은 본인이 출연하고 지도한 영화들의 액션 장면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을 세세하게 풀어놓는다. 그의 구술로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관습적인 장면이 어떤 배경으로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죽고 싶지 않은 배우와 필름을 아끼고 싶은 감독 사이의 신경전으로 “‘으아아악!’ 하구 그냥 멫 바꾸 돌아가서 그런 척을 했다가 쓰러져 가주구선 그냥 죽어야 될 텐데 안 죽구 풀 있는 거 풀 다 뽑구선 일어났다가 죽었다”는 에피소드나 한겨울 촬영한 사극에서 “말이 뛰구 돌아야 하는데 대개! 횃불 있는 데 가서 다 죽어” 있는 에피소드는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장의 열악함이 만들어낸 장르적 관습을 보여준다. (그림6) <어명>(강조원, 1967) 포스터 액션영화에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조직원들’의 반응 쇼트는 카메라를 한 번이라도 더 받기 위한 조·단역 배우들의 열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팔에 찬 단도를 보여주기 위해 괜스레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린다거나 일부러 눈에 띄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보이더라도 양 손목에 시계를 찬다거나 단추라도 하나 더 달았다거나 하는 에피소드들은 그만큼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소품 전쟁”에서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은 구술자가 액션 영화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데 자산이 되었다. 액션 연기와 지도에서 구술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장감과 타이밍 그리고 약속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무리 작은 장면일지라도 실제 ‘싸움’에서 볼 수 있는 ‘몸짓’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액션 영화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과장이 필요하더라도 실전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액션 지도를 할 때 가장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리허설을 통한 ‘약속’이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실록 김두한>의 박치기대장 성팔이의 액션과 <동백꽃 신사>의 클라이맥스 액션은 이러한 약속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실록 김두한>의 대미를 장식하는 종로 거리 액션은 안양촬영소에서 3일에 걸쳐 촬영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중요한 장면이었다. 성산일출봉에서 촬영한 <동백꽃 신사>의 마지막 장면은 “틀림없이 죽어야 되는 장소”인 벼랑 끝에서 한 촬영이라 감독은커녕 카메라조차 대동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악조건 때문에 이대근과의 생동감 넘치는 일대일 액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림7)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포스터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과 변화 1960년대 초중반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 정창화, 이만희 등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스릴러와 만주물 등이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형사극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사극영화의 군중신 등도 액션영화가 다양화되는 데 역할을 했다. 다양한 액션영화의 등장에 맞춰 액션연출도 시기별로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김영인의 출연작을 큰 줄기로 하여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구술자가 한국영화 역사상 ‘거의 최초’의 스턴트맨으로 활약한 <5인의 해병>에서 주인공 5인의 액션연기는 지금 보면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하지만 그 시기 전쟁 액션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본적인 액션의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다. 포탄 폭발, 전투 사격 등에 맞춰 몸을 좌우 혹은 상하로 움직여주는 연기들은 다양한 앵글로 표현되지 못한 탓에 액션의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군중 신의 경우도 롱 쇼트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기에 그 규모를 세밀하게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날으는 배우’의 진면목은 여간해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시기 전쟁액션의 제작스타일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불과 2년 후에 제작된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이만희 감독과 서정민 촬영감독의 스타일로 완성된 화려한 전쟁액션과 비교해본다면 1960년대 초기의 액션의 규모가 가늠될 것이다. (그림8)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군중 액션 <어명>을 통해서는 1960년대 중후반 수입되기 시작한 홍콩 무협영화와 한국에는 수입될 수 없었지만 흥행이나 스타일면에서 아시아 각 전역의 영화에 영향을 끼친 <자토이치> 시리즈를 필두로 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이 한국 액션영화에 미친 파급력을 추측해볼 수 있다. <어명>은 영화의 스타일 자체가 홍콩 무협영화와 일본 검객영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일본인 무술감독 나카하라 신(中原伸)의 영입은 이와 같은 스타일의 영향을 한국 액션영화에 녹여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영인은 구술에서 나카하라 신이 연출한 액션 신을 언급하며 홍콩영화와 일본영화에서 활용하는 ‘검술액션 연기’를 “세밀한 동선을 기본으로 지도하는 무용과도 같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구술을 통해 일본인 무술감독의 영입이 한국의 검객영화에서 액션을 좀 더 유려하게 연출하는 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9) <방랑의 결투>(호금전, 1966) 신문광고 (그림 10) <자토이치> 포스터 (그림11, 12, 13) <어명>(강조원, 1967)에서 나카하라 신이 지도한 액션 장면 1960년대 후반 영화 <샹하이부르스>와 <사나이 삼대>를 통해서는 한국 현대물 액션영화에서 액션연출이 좀 더 세밀해지고 화려해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1960년대 <007> 시리즈와 마카로니 웨스턴 시리즈로 대표되는 서양 액션영화의 폭발적인 인기가 한국의 영화 관객과 한국 액션영화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 영화계에 새롭게 유입된 젊은 남성 배우들은 대규모 군중 신을 필수로 하는 현대물 액션과 무협 액션이 다수 제작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인력의 확대는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봤을 때 규모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었으며, 액션 연출의 측면에서도 규모의 성장뿐만 아니라 좀 더 깊이 있고 화려한 액션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14, 15, 16, 17) <샹하이부르스>(김기덕, 1969) 액션 장면 (세번째 사진에서 왼쪽이 김영인) <김두한> 시리즈(김효천)는 이러한 액션연출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TV 연기자까지 인력의 풀을 확대한 이 영화는 제작 규모도 컸지만 다양한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대규모 액션 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군중 액션 신의 조연 연기자들이 단체로 명시되거나 인식될 뿐 각각의 캐릭터 액션은 힘들었던 것에 비해 이 영화는 급격하게 커진 액션 규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군상들의 캐릭터들을 창조해 액션의 특기를 하나씩 부여함으로써 ‘캐릭터 액션’을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인 <실록 김두한>의 엄청난 흥행은 이러한 캐릭터 액션의 성공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었으며, 캐릭터의 성공적인 안착은 시리즈물이 연달아 성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김두한> 시리즈의 성공은 1970년대 합작액션영화들과 함께 캐릭터를 기반으로 하는 시리즈 액션물이 유행하는 데 도화선이 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액션영화들이 이야기 중심보다는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시리즈 액션물 중심으로 번성한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실록 김두한>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진 18, 19, 20, 21, 22)<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종로거리 액션. 마지막 사진의 가운데가 김영인 김영인 구술의 의미와 평가 상기한 것처럼 김영인의 구술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액션영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와 더불어 그의 구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학창시절 외국영화 관람의 경험이다. 1회라는 한정된 시간 때문에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짧은 시간 구술자가 예로 든 관람 환경과 예시로 든 영화는 흥미롭다. 학생 입장에서 개봉관은커녕 2번관도 가기 힘들어 3번관 이하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는데, 이 영화들은 주로 서부영화였으며, 데뷔 후 이 영화들의 액션을 많이 참조했다는 내용이 그것인데, 이러한 구술은 외국영화가 배우의 디테일한 연기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군중 신의 촬영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액션영화 촬영현장의 풍경이다. 액션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조직 대 조직의 대결을 들 수 있겠는데, 구술자는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동시에 카메라에 띄기 위해 노력하는 조·단역 배우들의 모습들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재현한다. 소품과 미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조·단역들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극 중 인물을 표현했는지가 구술을 통해 자세하게 드러난다. 1960~1970년대 한국영화 환경의 특성상 한정된 배우 풀로 여러 장르를 생산해야하는 현실 안에서 동일한 배우들이 장르영화에 어떻게 적응하고, 표현해내는가를 지엽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1970년대 액션지도 방식이다. 구술자는 학창시절 권투와 가라테를 수련했고 영화계 입문 전 자칭 주먹 좀 쓰는 ‘개구쟁이’ 시절을 거쳤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의 싸움과 액션 연기의 차이를 구별하되, 연기에서 ‘리얼함’을 살리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액션 연기를 구성하고 지도했는지를 설명한다. 1대1 액션 장면, 현장에서의 소도구 이용 등의 구체적 예에서 구술자의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었는지 자세하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실전의 경험을 열악한 영화제작 환경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액션지도는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과의 사전 협의 하에 액션 콘티를 작성할 만큼 면밀히 이루어졌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1)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55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액션영화의 뒤편에서 뛰다」를 수정·보완했다.
[시나리오상상극장]횃불
< 횃불 >은 1963년에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사극이다. 여자주인공은 당연히 최은희 이고 남자주인공은 신영균 . 악역인 청나라 칙사로는 이예춘 이 나오며 그밖에 김승호 , 김희갑 이 조연으로 나온다. 이 정도면 화려한 캐스팅이지만 정작 이 영화를 관심을 갖고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필름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새 기준으로 보면 그리 정이 가는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반세기 전엔 당연했던 이야기가 지금은 아닌가? 내용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서유대라는 한량처럼 보인다. 도입부 캐릭터 소개 장면을 보면 그는 다섯 개 화살을 모두 과녁에 명중시키는 명사수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새로 사귄 사또 친구와 함께 정치 이야기를 하며 한탄하는 것밖엔 없다. 왜 조정에서는 당파 싸움만 하고 선비만 위하며 나 같이 잘난 인재는 쓰지를 않는가. 시대배경은 영조 때이니 18세기다. 내가 읽고 있는 녹음대본엔 중간에 인현왕후의 죽음에 대한 내레이션이 나오는데, 왜 나오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여간 정확한 시대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병자호란 이후가 배경이고 청나라에서 칙사라 내려오는 때란 것만 알면 충분하다. 오랑캐 역의 이예춘 필름은 사라졌지만, 이예춘 이 연기하는 청나라 칙사와 양석천 이 연기한 청나라 부사의 사진이 아직 남아있는데, 보면 좀 오싹하다. 한마디로 20세기 한국 사람들이 ‘오랑캐’라고 생각하는 이미지를 최악의 스테레오타이프로 뭉쳐놓았다. 같은 동양인이 만든 영화라고 해서 이것을 인종차별적이 아닌 어떤 것으로 해석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이예춘 이 이를 어떻게 연기했는지 몰라도 영화 속 칙사는 최악의 악당이다. 사악하기보다는 불쾌한 인물이다. 그가 이 영화에 등장하자마자 한 일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에게 데려온 수청기생들의 외모를 면박 주며 더 예쁜 여자를 데려오라고 생떼를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조 앞에서 침을 뱉고 향로를 집어던진 것이다. 두 번째 행동은 이 영화 스토리 전체의 엔진이 된다. 아까 소개한 서유대가 이걸 보고 분노해서 그에게 돌을 집어던지기 때문이다. 여러분 같으면 여기서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도입부의 소개에 따르면 서유대는 명예를 아는 사나이 대장부처럼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다. 칙사가 돌을 맞는 즉시 당장 앞에 나타나 호령을 하거나 자수를 하거나. 그렇게 되면 당연히 체포가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죽을 뻔 하다가 의적이 되거나 하지 않을까? 이상하게도 이들 중 어느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서유대는 조선이 다시 전쟁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는 엄청난 외교 문제를 일으켜놓고도 자기가 뭘 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칙사는 자기를 모욕한 범인을 찾겠다고 혈안이 되어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서유대는 러닝타임 절반을 훌쩍 넘길 때까지 등장하지 않으며 간신히 등장한 뒤에도 사또 친구와 정치 이야기나 하고 있다. 유체이탈화법은 영조 때부터 있었던 우리 고유의 전통이었던 걸까. 그 동안 분주하게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산홍이라는 기생이다. 서유대가 돌을 집어던졌을 때 옆에 있었던 사람이다. 이 영화에서는 아직 처녀인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관객들이 그 말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때 산홍을 연기한 최은희 는 30대 중반이었을 텐데?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가 61년에 나왔다는 걸 생각해보시길) 하여간 산홍은 어떻게든 척사의 수청기생이 되지 않으려고 간질병에 걸린 척 꾀병을 부리느라 바빴는데, 갑자기 자기가 사모하는 서유대를 살리겠다며 사또에게 몸을 바치겠다고 찾아온다. 사또는 갑자기 서유대를 불러오더니 “그대들은 처녀총각이렸다. 내 작수성례를 해주마!”라며 둘은 같은 방에 집어넣는다. 관객들이 최은희가 처녀란 걸 믿었으니 신영균 이 총각이란 것도 믿으란 말이었을까? 횃불 시위 하여간 산홍은 서유대와 섹스 한 번 한 것으로 평생의 소원을 푼 것처럼 행동한다. 당장 나가 자기가 돌을 던졌다고 자수한 것이다. 그러자 이 영화의 제목인 횃불이 등장한다. 산홍의 동료인 기생들이 횃불을 들고 데모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데모는 정말 효과가 있어서 칙사는 눈치를 보면서 산홍을 용서한다. 그러는 동안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며 자칭 남자주인공인 서유대는 뭐하고 있었냐고? 뒤늦게 산홍이 자기 대신 자수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사또 친구에게 왜 그랬냐고 징징거리다가 몽둥이를 얻어맞고 나가 떨어진다. 산홍이 사면되자 간신히 깨어나 산홍이 이름을 부르는 게 이 인간 이야기의 끝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어이없는 인간을 만들어놓고 감독, 작가, 배우 중 어느 누구도 그 문제점을 보지 못했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