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들, 매일 밤 노무현 추모방송 상영과 토론회
- 제작년도
- 2009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2024년 하반기 대중 영상문화는 퀴어 가시화 측면에서 큰 성과를 낸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될 수 있을 것 같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2019)을 원작으로 장편영화 가 제작되어 10월 1일 극장개봉 됐으며 10월 21일에는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 티빙에 8부작 오리지널 드라마가 독점 공개되었다. 또한 웹툰 『정년이』(서이레, 나몬, 2019. 4.~2022. 5. 네이버웹툰 연재)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 정년이 >(정지인, 2024)가 tvN에서 12부작으로 제작되어 텔레비전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로 동시 제공되었다. 두 원작의 주인공 고영과 정년이 모두 동성애자로 설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주요 인물들도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에서 벗어난 퀴어적 존재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두 원작은 단순히 선정적 소재로 성적 정체성을 전유하는 방식을 넘어, 퀴어 인물들의 고유한 관점으로 시대성, 젊은 세대의 성장과 다양한 관계성, 젠더 및 섹슈얼리티의 수행성, 하위문화 혹은 특정 공동체의 민족지적 기술 등과 같은 주제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높은 비평적 평가를 받았다. 또한 둘 모두 베스트셀러로서 그 흥행성과 대중성을 입증한 바 있다. 흥미롭게도 두 사례 모두 원작이 발표된 이후 빠른 시일 내에 다른 매체와 장르로 파생·변환되었다. 물론 트랜스미디어 현상, 특히 이미 대중성을 증명한 원작이 다른 매체와 장르의 콘텐츠가 되는 것은 디지털 환경 속에 놓인 동시대 대중문화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 두 사례에서 보여준 트랜스미디어 과정은 그 자체로 한국의 퀴어적 정동을 드러내 줄뿐 아니라 각 매체 혹은 장르(의 제작자)들이 공개되는 플랫폼마다 현재 수용자를 어떻게 특징짓고 가정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하면, 이제 매체특정성이 아닌 플랫폼 특정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이 사례들이 보여준다. 우선 각 사례의 트랜스미디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례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장편영화와 8부작 드라마로 함께 공개되었다. 둘은 원작은 같지만 각색·연출 방식뿐 아니라 마케팅도 판이했다. 고래와유기농과 쇼박스가 제작하고 이언희 감독이 기획·연출·각색한 극장용 장편영화는 김나들 작가가 각본을 맡았다. 이 영화는 소설의 4개 에피소드 중 주로 ‘재희’를 가져오고 흥수의 어머니와의 에피소드는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 가져와 영화화 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위치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원작 소설에서 4개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화자이자 사연·사건에 연루되는 인물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기술하는 고영은 흔들림 없는 유일한 주인공이다. 반면 영화에서 고영은 흥수( 노상현 )로 이름이 바뀌면서 이름을 유지한 재희( 김고은 )와 주인공 자리를 동등하게 나눠 갖는다. 소설이 다분히 고영의 20대를 함께 하고 목격한 고영‘의’ 친구 재희에 대한 이야기라면, 영화는 소설가 흥수가 내레이션을 도맡고 있음에도 재희 ‘그리고’ 흥수의 20대와 그들의 나눈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즉 전자가 고영에 동일시된다면, 후자는 재희와 흥수 모두에 동일시된다. 극중 흥수와 재희 이언희 감독과 김나들 작가는 흥수의 주관적 시점을 벗어나 재희가 디지털 성폭력, 데이트 폭력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에 대응하는 당참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한편, 개성 강한 대학생에서 회사원이 되며 규격화된 자신의 변화에 대한 개인적 쓸쓸함을 묘사하며 그를 보다 복잡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든다. 재희는 이성애 여성 청년으로서 동성애자인 흥수보다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취직과 결혼)을 잘 받아들이고 주류에 진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차별을 겪는다.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힘들어하고 벽장 속에 숨는 흥수에게 재희가 던지는 대사 “니가 너인게 어떻게 니 약점이 될 수 있어?”는 각기 다른 낙인과 차별을 겪는 이성애 여성과 동성애 남성의 우정을 사회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킨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이성애 여성과 게이 남성 간의 우정을 다루면서 게이 남성을 이성애 여성의 사랑을 상담하는 액세서리 혹은 드라마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코믹 릴리프 같은 클리셰로 만들지 않는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원작과 비교할 때 이러한 주인공의 위치 변화는 극장의 주요 타겟인 2030 젊은 여성들의 공감을 더 이끌어 내고 확장성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장편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포스터 2종 창작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마케팅은 단순 공감을 넘어서 그러한 전략을 더 공격적으로 밀어 붙인다. 홍보용 트레일러와 포스터는 침대 위에 함께 누워있는 재희와 흥수를 보여주고 흥수의 게이 정체성이나 퀴어 등의 단어는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원작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이들로 하여금 해당 영화를 재희와 흥수의 이성애 로맨틱 코미디로 착각하게 만든다. 포스터와 트레일러 카피에 “사랑은 노터치 우정은 포에버. 순도 100% 찐사친 리얼 라이프”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 둘의 로맨스를 가장하기에 이러한 착각은 상당히 고의적이다. 개봉 초반 관객몰이가 매우 중요한 극장 플랫폼이기에 퀴어 소재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이성애 로맨스에 관심이 있는 관객들까지도 모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케팅의 이러한 전략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 당시 군대 내에서 사용했던 성소수자 정책(1994-2011),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와 유사하다. 이 정책은 군대 내 성소수자가 혐오공격의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종의 타협책으로 성소수자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의 심기를 달래고 성소수자가 그 정체성을 드러낼 경우 복무에서 배제함으로써 되레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해당 마케팅은 어쩌면 극장용 상업영화의 개방성 정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퀴어는 극장 안까지는 허용되지만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정체성을 숨겨야 한다. 이것은 영화 본편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검열 중인 극장 플랫폼의 성격을 드러낸다. 여기서 상업영화 극장 플랫폼에 재희의 말을 되돌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보호 필름 떼고 하는 거야 사랑은, 이 겁쟁아” (좌) 장편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중 / (우)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 포스터 티빙의 8부작 드라마는 이 지점에서 다른 선택을 한다. 영화와 달리 박상영 작가가 직접 각본을 맡고 소설에 담긴 4편(‘재희’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모두를 만들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40주년 기념으로 기획해 동학교 출신인 허진호 (< 봄날은 간다 >), 홍지영 (<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 손태겸 (< 아기와 나 >), 김세인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 감독이 각각 2부씩 연출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 고영의 시점을 따라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기 때문에 서울에 사는 젊은 남성 동성애자의 하위문화나 섹스씬도 영화보다 디테일하게 그려지고 에이즈 문제도 다룬다. 드라마 시리즈가 온라인 스트리밍 독점으로 공개되어 티빙 구독자만을 타겟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할 전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의 폐쇄성이 동성애 정체성 그리고 그와 관련된 다양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삶을 그려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티빙은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소식에 동성애 혐오 세력의 민원성 공격을 받았다. 드라마 시리즈는 그러한 공격과 상관없이 성공적으로 방영되었지만 아무래도 홍보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텔레비전과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로 동시에 공개되었던 <정년이>는 1950년대 여성국극을 소재로 여성들의 경쟁과 성장, 우정과 사랑을 그려내고, 스펙터클한 무대를 뛰어난 영상미로 재연해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시청률 역시 약 15%를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웹툰 <정년이>의 중요한 인물이 드라마에서 삭제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특히 사라진 인물들이 퀴어성을 가장 명시적으로 보여준 이들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주인공 정년이( 김태리 )에게 남성성을 체화하는 방식을 가르쳐주고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 같아”라는 대사를 통해 퀴어한 젠더 수행성의 주제를 날카롭게 전달했던 남장여자 캐릭터 고사장, 그리고 주인공 정년이의 1호 팬이며 극작가이자 정년이와 동성애 관계에 있는 캐릭터 부용이가 사라진 것이다. 부용이와의 관계성 일부는 국극단원인 주란(우다비)과 영서( 신예은 )에게로 나눠진 것처럼 보인다. 즉 웹툰에서 드라마로 트랜스미디어되는 과정에서 가장 퀴어한 인물들은 삭제 또는 용해를 겪은 것이다. 그 과정에는 투자자나 회사 관계자들의 압력, 혹은 창작자들의 자기 검열 같은 각각의 사정들이 존재할 것이다. 드라마 <정년이> 중 위의 사례들에서 퀴어 캐릭터와 그들의 문화가 얼마나 가시화되는지에 따라 비교 평가할 수는 없다. 작품의 비평적 평가는 복합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퀴어는 분명 트랜스미디어 과정에서 광산의 카나리아 혹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숨을 쉴 수 있는 산소가 어디까지 있는지 실험적으로 날려 보내는 카나리아. 어느 장르와 플랫폼이 퀴어를 살려둘지 아니면 삭제할지 혹은 그 고유한 존재들을 축소하거나 용해시키는지. 소설, 웹툰, 극장, 텔레비전,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홍보물들 사이에서, 퀴어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중첩된 채로 존재한다.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사실은 우리는 서로가 필요 없어 알면서 서로가 이유 없이 그리울 뿐 - 크리스탈 티, 「낭만파A.I.」 나는 내가 어렵다. 어느덧 알람 없이 눈을 뜰 정도로 반복적인 주5일 출퇴근과 아침 공기가 몸에 익숙히 자리 잡았음에도, 그것만으로 나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령 근황을 묻는 이들에게 ‘직장인’이나 ‘회사원’이라는 말을 선뜻 건네는 대신, 이력서를 이곳저곳 찌르다 보니 기회가 닿아 어찌어찌 일을 하는 중이고 천만다행으로 장기 백수 타이틀은 면했으며 입에 풀칠은 하고 있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답을 하게 되는 식이다. 대답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사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결국 나의 태생적 기질에서 튀어나오고야 마는 저 대답의 자조적 뉘앙스가 듣는 이에게 작은 부담을 안겨 실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저 말이 치장된 겸손처럼 보여 이 사람은 모두에게 친절한 척하는 위선자라고 판단되는 것은 아닌가, 한편으로 간단한 질문에 간단히 답하지 않고 무언가 해명하는 사람 마냥 주절거리는 모양새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아가 나는 왜 이런 모습마저도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 대해 말하는 일은 내게 중대하게 다가오고 중대하게 여긴 바로 그 탓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고, 요즘 말로 하면 찐프피(INFP 100%)다. 갑자기 류현진 투수의 이야기를 다룬 책 제목이 떠오른다. 생각이 많으면 진다…… 졌다. 이런 기질은 ‘영화평론가’로서의 나에게도 예외 없이 들러붙어 있다. 공식 지면으로 불릴 만한 부산영화평론가협회를 통해 등단했음에도, 여전히 나는 나를 영화평론가로 소개하는 것이 어렵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청탁을 받은 뒤 오랜 시간 내적으로 씨름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해 그냥 곤란함을 드러내기로 했다. 다만 분명한 입장도 있는데, 먼저 직업으로서의 평론가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의 영화 평론계가 등단 이후 생계를 영위할 정도의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 길을 생계로 정했다면, 외부 강의든 메일링 서비스든 독자적인 지면 생성이든, 치열한 부가 활동으로 수익을 창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어떤 방식의 활동이든 기초가 되는 것은 ‘자기PR’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 시작도 못하고 멈춘다. 멋지게 자기 소개하는 능력이 내게는 부족하고, 부족한 능력은 부족한 욕구에서 온다. 커리어를 쌓는다거나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내게 뒷전이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겸손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를 소개해보라는 충고도 종종 들어왔지만, 그 사려 깊은 마음에 부응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고민은 언제쯤 확신이 될 수 있을까? 아직까지 분명한 것은, ‘1인분’의 문제가 내게 큰 동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고민이 ‘취미로서의 평론가’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이어진다. 세상에. 취미로서의 평론가라니.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나도 겁이 난다. 그런데‘-가’를 떼고 ‘취미로서의 평론’이라고 하면 조금 괜찮다고 느낀다. 내게는 행위 자체와 행위자라는 그 차이가 일단 중요한 것이다. 영화를 마주한 나의 그 비언어적 체험에 다가가고자 일단 적어내리고, 좀 더 가까워지고자 이 단어가 아닌 저 단어를 고르고, 때로는 영화를 보고 한 대 맞은듯한 저릿함을 표현하고자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대신 간명한 문장으로 아등바등 매듭지어보려는, 그 치열한 감탄과 반목의 과정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좀처럼 자신을 갖지 못하는 나에게는 항상 ‘1인칭’의 문제가 다른 무엇에 앞서는 것이며 그와 씨름하다 어떤 단계에 다다르고 나면 종종 뿌듯함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 더 분명해지고 싶다. 1인칭. 나만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남과 다른 나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나를 소개하고 개성을 뽐내는 것. 자신을 어필하는 과정에서 1인칭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단초가 된다. 타인에게 '나'의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 콘텐츠의 지배적 양식이 1인칭 시점인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여주는’ 일이란 이 사동적 표현이 담지한 대로, 무엇보다 내가 남을 의식한다는 역설을 전제로 한다. 너를 보는 나의 눈은 항상 너의 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종종 ‘나의 시선’ 대신 ‘나만의 시선’이라는 표현을 선택하는 우리의 습관은 그 자명한 사실을 강조한다. 나만의 시선. 나는 이 앞에서 종종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적에, 듣고 싶지 않았지만 사려 깊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기어코 듣고 말았던 한 마디를 떠올린다. “그래 알았어. 내 취향이야. (꺼져)” 각자의 취향이 넘쳐흐르는 동시대의 풍경은 코로나를 기점으로 무한히 확장되었으며, 이는 곧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의 동반사멸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를 문제라고 느끼는 불편함은 그 자체로 ‘나’의 고된 일상을 짓누를 뿐이니, 이 자리를 채우는 건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유튜브 알고리즘 서비스일 것이다. 어쩌면 뜻이 맞는 쪽으로 향한다는 취향(趣向)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하고 내 몸에 배어있는 냄새와 다름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취향(趣香)으로 고쳐읽는 편이 쇼츠와 릴스로부터 도파민을 수혈받는 이 시대에 더 그럴듯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내게 평론은 감정과 욕망을 늘어놓는 취향의 잔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과 욕망에 흠뻑 취하면서도, 대체 그 만족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혹시 그곳에 정반대의 그림자가 도사리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그 어둠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원천은 아닌지…… 비유컨대 평론은 빛과 어둠을 오간다는 점에서 고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나를 간섭하는 외부가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 기쁨이다. 이것이 분명하다. 더 분명히 하면, 이것이 나의 취미다. 아, 들려온다. 그게 무슨 취미냐, 취미란 그보다 가벼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레와 같은 성원이. 이런 취미의 자리는 하루빨리 ‘연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듯, 몇몇 이들은 내게 “대학원 안 가세요?”라고 묻거나, 처음 듣는 각종 영화 이론서와 철학서를 줄줄이 열거하기도 했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그 자리를 어색하게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응답하며 읽은 척하기도 했다. 미안합니다.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반대편에 있는 ‘애정’과 마주하며 그 과도함에 질식할 뻔하기도 했다. “이 영화 봤어요? 저 영화 봤어요? 그 영화 봤어요?” 혹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어디 가서 봤다는 소리 하지 마라!” …… 다시 고백한다. 미안합니다. 저 그 영화 본 적 없고, 이 영화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봤어요. 하지만 당신의 즐거움을 뺏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종종 뇌가 멈추거나 숨이 막혀 거짓말을 하는 나약한 관객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사과합니다. 맨눈의 감상과 두뇌의 관찰, 사적 일기와 시네마의 역사, 시네필리아와 학자의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내 모습을 보며 한 편의 영화를, 아니 인물을, 아니 얼굴을 떠올린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박종원, 1992) 속 한병태. 일찍이 인터넷 서핑에 익숙했던 나는 초등학교 시절, 좌우가 잘려나간 화면비와 일본어 자막이 달린 버전으로 이 영화를 만났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화질. 다행히 한국영상자료원이 박종원 감독과 진행한 복원 작업을 통해 이제는 깨끗한 화질 로 만나볼 수 있고, 나 역시 오랜 매혹의 정체를 얼마간 더듬거릴 수 있었다. 일그러진 화질의 복원과 함께 일그러진 얼굴이 복원되었다. 나는 이 영화를 틈이 날 때마다 주변에 추천하고는 했는데, 그들의 첫 마디는 모두 동일했다. “어, 홍경인 이다!” 그렇다. 우리는 영화 속 캐릭터 엄석대를 만나기 전에, 영화 바깥의 명배우 홍경인부터 만나는 것이다. 그는 무표정을 통해 엄석대가 된다. 방금 학교에 첫 발을 들인 한병태에게 급장 엄석대가 명령한다. “상고 머리, 이리 와 봐.” 하지만 서울 출신의 이 당돌한 녀석은 답한다. “할 말 있으면 쟤가 이리 와도 되잖아!” 처음 맞닥뜨렸을지 모를 저항 앞에서도, 엄석대는 상고머리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다. 엄석대의 침묵과 무표정은 고압적 언행 없이도 모두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그를 차별화하는 중심이 되고, 모르긴 몰라도 당시 엄석대를 연기한 홍경인은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홍경인은 메소드를 훌륭히 수행하며 엄석대가 된다. 이 세계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그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드라마적 주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 탓에 앞서 말한 것과 모순되지만, 나는 홍경인을 잘 모르는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거꾸로 홍경인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 엄석대다!” 다른 한편, 이름 모를 수많은 아역이 화면을 채운다. 얼마나 많냐고? 유튜브에 접속해 이 영화의 설명란에 ‘5학년 2반 아이들’이라는 역할로 얼마나 많은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시라. 여전히 나는 저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화면을 채운 그들의 뒤통수와 앳된 얼굴에서 발생하는 힘은 느낀다. 때때로 저 ‘5학년 2반 아이들’ 중 몇몇은 이야기의 감초가 되기도 하지만, (김영팔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이들에게는 서사의 국면을 뒤집을 만한 개별적 플롯이 없다. 더불어 이 아이들이 비전문 배우들이었을 것이라는 심증까지 더해지는데, 그러고 나면 이들에게 ‘연기를 잘한다’라는 관습적 평가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절정 부분, 새로 부임한 김 선생(“어, 최민식 이다!”)이 엄석대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그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대목이 다소 간지럽다고 느끼는데, 사이다 같은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의 노골성에 덧붙여, 아이들의 목소리가 소위 말하는 연극톤에 가깝기 때문인 것 같다. 진지한 대목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귀엽다고 느끼면서 흐뭇해지는데, 요컨대 드라마를 벗어난 리얼의 기습에 웃음이 툭툭 새어 나오고야 마는 것이다. 차라리 아이들의 말과 몸짓은 엄석대가 장악한 공기에 상쾌함을 불어넣는 매력적 실패에 가깝다. 서로 다른 얼굴을 마주한 한병태는 어쩔 줄 모른다. 그는 시종 고개를 떨구거나 주위를 둘러본다. 음악시간. 선생님이 풍금을 켠다. 다들 노래를 따라 부르지만, 한병태는 아이들을 둘러본다. 엄석대를 바라본다. 선생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갈 곳 잃은 눈길은 결국 음악 교과서에 머물 뿐이다. 그의 방황하는 시선은 말꼬리를 흐리는 목소리와 짝을 이루며 한병태의 얼굴을 완성한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청소 검사를 합격 받고자 엄석대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려는 그의 얼굴이 인상 깊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저 배우를 통해 원작의 인물들을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각기 다른 얼굴을 선연하게 포착하며 세계에 대한 직관을 심화한다. 불타버린 재와 같이, 어린 시절의 곤혹스러운 표정은 무기력과 공허로 변모해 어른 한병태의 얼굴을 뒤덮고 있다. 당시의 까까머리 아이들은 몰라볼 정도로 저마다의 직업과 풍채, 목소리를 가진 보통 어른이 되었지만, 김 선생의 매질로 추방되었던 엄석대는 단지 무성한 소문과 근조화환으로만 그 존재가 환기되며 진정한 신화가 되었다. 그 사이의 한병태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 뿐이다. ‘엄석대’ 이름 석 자가 적힌 화환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병태는 느지막이 자리를 뜬다. 힘없는 발걸음 위에 내레이션이 얹힌다. “… 내가 사는 오늘도 여전히 그때의 5학년 2반 같고, 그렇다면 그는 어디선가 또 다른 급장의 모습으로 5학년 2반을 주무르고 있을 게다.” 우수와 권태에 젖은 한국영화사의 남성이 (또) 완성되는 순간이다. 뚜렷한 자리 없이 곤혹스러움으로 세계를 지탱하고 다시 보게 하는 한병태가 주인공이라는 점은 퍽 인상적이다. 그의 곁에는 김영팔이 그때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함께하지만, 여전히 한병태는 방금 전학 온 학생처럼 쭈뼛거린다. 그는 김영팔과 5학년 2반 시절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대신, 입을 닫는 쪽을 선택한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김영팔은 과거에서 시간 여행을 한 듯 그때 그 얼굴로 이곳에 있는데, 용의주도한 캐스팅이 암시하듯 한병태는 30년 전 김영팔의 해맑은 얼굴을 보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동이 틀 때까지 침묵을 지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갖은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항상 곁을 함께했던 김영팔과의 재회도 그에게는 고민거리였던 것일까? 물론 한병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하나의 낯섦과 충돌을, 나아가 변화를 마주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는 대화를 통해 과거를 갱신하는 대신, 적당히 견딜 만한 자신의 정서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선택을 지지하기라도 하듯, 우연히 엄석대를 마주치는 원작의 결말 대신 그의 존재를 간접화하는 방식으로 중년 남성 한병태의 비극적 파토스를 한 층 강화한다. 그렇게 한병태의 세계는 굳세어진다. 자기만의 정서로 침잠하는 한병태를 보면서, 이상하지만 자주 영화를 보고 가끔 쓰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언제부턴가 “영화는 이제 재미없다”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꺼내고 다녔다. “나는 시네필이 아니야”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모종의 관객과 나를 구분하는 오만함을 부리기도 했다. 나아가 “영화 보다가 인생 망했다”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뒤 “영화를 진짜 좋아한다는 것은 뭘까?” 하는 관념에 빠지면서 진짜 망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몇 번 망한 적이 있다. 언젠가 어떤 영화글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이 쓴 것 같은” 글이 좋다고 답한 적이 있다. 요즘따라 떠오르는 말이다. 과잉정보의 시대에 사전지식 없는 관객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연구자와 평론가와 시네필과 직장인 모두 한 편의 영화 앞에서 벌거벗은 관객이 된다는 공상에 자주 빠진다. 이와중에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하나 둘 극장이 사라지면,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도 사라지겠지. 그렇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가 원칙 없이 상영관과 방구석, 스크린과 모니터, 소셜미디어와 극장 로비에서 환멸과 행복을 오고 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평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용을 쓰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내가 어렵다. 그래서 네가 궁금하다. 호기심과 질문을 던지는 일이 도박에 가까운 시대라고 느끼지만, 그럴수록 네가 궁금하다. 물음표를 껍질로 두른 확신의 언어가 난무하는 탓에, 네가 궁금하다. 영화 평론은 애정과 연구만을 결과로 남기는 양자택일의 바벨탑이 된 걸까? 모르겠다. 나는 이리저리 치이는 당구공이 되어 어디론가 오갈 뿐이다. 여전히 영화가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 홍상수 )이라면, 영화를 닮은 그 몸짓을 1인칭이라 부르고 싶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하게 된 일이지만, 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솔직히 내겐 사치스러운 일이다. 영화평론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건 내 돈과 시간, 자원을 써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영화를 감상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걸 멈추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개봉작을 부지런히 보러 다녀야 하고, 미처 보지 못한 고전 영화도 꾸준히 찾아봐야 하며 영화 관련 이론이나 최근 담론을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할 수 없다. 시간은 차치하고서라도 한 달에 청탁 받은 원고를 써서 받는 돈이 이 모든 활동을 하는데 드는 돈보다 더 많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본업이 있기 때문에 주로 평일 낮에 열리는 시사회에 가지 못해 일반 관객과 똑같이 직접 내 돈을 내고 영화를 보러 다녀야 하며 OTT 콘텐츠 구독료와 영화 관련 서적, 강의에도 돈을 쓴다. 나는 궁금했다. 다른 평론가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들은 대부분 영화와 관련한 학계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거나 영화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학생이었다. 나처럼 영화와 관련 없는 본업을 갖고서 퇴근 후나 주말에 짬을 내어 활동을 이어가는 평론가가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계속 영화를 보고 글을 쓰나? 비정규직 회사원과 프리랜서 생활을 번갈아 전전하며 혼자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30대 여자인 내게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존의 평론을 볼 때마다 나와 시선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높은 평가를 받은 영화 중 내게 불편하게 다가온 것들이 많고, 반면 주목받지 못한 영화 중에 어떻게 이런 영화가 저평가 받고 그대로 묻힌 건가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 주류 대중과도 기존의 평론가들과도 시선이 어긋나는 지점들을 하나씩 짚고, 내가 영화 안에서 다르게 포착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 영화의 뛰어남을 형식 중심으로만 얘기할 때의 거북함도 있다. 한 영화가 영화사적으로 높게 평가받을 만한 훌륭한 형식을 갖추었다는 이유로 그 안에 드러나 있는 노골적인 혐오나 비윤리성을 아예 못 본척하고 언급하지 않는 비평들이 불편했다. 영화는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다.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비평을 한다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어쩔 때는 내용이 곧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볼 필요도 있다. 형식과 내용은 결코 분리될 수도 없고,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를 온전히 대변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한편으로는 타자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가 그 생경함으로 인해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였던 타자의 시선에서 구성된 형식과 내용은 기존 영화의 역사와 문법으로만은 파악될 수 없는 지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리턴 투 서울>(데이비 추, 2022) 중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캄보디아계 프랑스 이민 2세대인 데이비 추 감독의 < 리턴 투 서울 >(2022) 이었다. 한국의 해외입양 정책에 의해 갓난아기 때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 여성 ‘프레디’가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겪는 혼란들을 불균질적으로 담아냈다. 최근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는 아시안 디아스포라 영화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부모 세대나 자신의 의지로 인해 외국에 정착하게 된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게 아니라, 어렸을 때 입양되어 외국인 부모 밑에서 평생을 그 나라의 시민으로 자라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담았기 때문이다. 프레디의 감각은 그 어떤 한국인과도, 프랑스인과도, 또 프랑스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와도 다르고, 프레디의 부모 찾기 여정은 < 라이스보이 슬립스 >(앤소니 심, 2022)의 경우처럼 캐나다에 이주했다가 한국의 친가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한국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동현(이든 황)의 경우와도 매우 다르게 진행된다. 입양아, 한국계 프랑스인, 여성이라는 삼중의 소수자성이 교차되며 만들어지는 감각의 특수함이 긴 시간 안에서 파편적으로 묘사된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중요성과 작품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영화 중엔 여성 주체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선에서 만든 영화들이 많다. 작년에는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2023)이 그랬다.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 문제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보통 그런 영화는 두 가지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한다. ‘그래도 낳아야 한다’라는 당위성 안에서 아이 낳는 과정을 어떻게든 긍정적인 색채로 꾸미거나 또는 아이를 지울 수 없거나 결국 낳게 되어서 불행에 휩싸이는 여성의 삶을 고통스럽게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그런 이분법적 함정에 빠지지 않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서 어떤 선택에 직면하고 어떤 비난에 취약하게 노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에 무너지지 않고 그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킬 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냉정하게 담아낸 결말에 힘이 있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 절해고도 >(김미영, 2021)에서도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과 감각을 마주했다.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 간의 관계 묘사가 레퍼런스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신선했고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그에 영향받는 등장인물의 고통에서 한 발짝 물러나 시간과 여유를 갖고 지켜보는 거리감도 범상치 않았다. 계절감을 갖는 자연을 풍부하게 담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조각가인 윤철( 박종환 )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 자신에게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황한다. 그러던 중 미술에 재능을 보이던 딸인 지나( 이연 )가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출가를 하겠다고 한다. 예술가가 되지 못하면 스님이나 수도사가 되고 싶었던 윤철은 그가 갖지 못했던 재능을 갖고 그가 가지 못했던 길을 가는 딸을 지켜보며 변화한다. 속세에 있을 때 서로 가시 돋친 날카로운 반말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던 부녀는 딸이 행자가 되고 난 후 예우를 하고 존대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며 딸의 삶에 간섭하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 걸어가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지하면서 윤철 자신도 변화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대부분 핸드헬드에 롱테이크로 찍혀 불안감을 자아내지만 지나가 도맹 행자가 되고 난 뒤의 후반부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고정샷으로 차분히 지켜본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한때 관계가 틀어졌던 애인과의 관계 또한 변한다. 윤철은 암이 재발해 죽어가는 전 연인을 바라는 바 없이 옆에서 지켜봐 주고 또 그녀가 자신의 존엄을 위해 호스피스로 가는 선택 또한 존중해 준다. <절해고도>를 만든 김미영 감독은 임권택 감독 밑에서 십여 년 동안 연출부로 활동했다. 이번 작품은 마찬가지로 임권택 감독과 일했던 강창호 미술감독과 함께 만든 영화이다. < 안개마을 >(임권택, 1982)을 레퍼런스로 해서 자연 안에서 인물이 하나의 요소로 공존하고 어우러지는 모습을 표현했다.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1981), <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 같은 불교영화에서 다뤘던 주제의식을 이어가면서도 여성을 타자화했던 시선에서 벗어나 모든 인물을 주체로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주체와 그를 현혹하는 타자의 이분법을 벗어나면 영화의 정서와 스토리의 방향성, 미학 등도 다 함께 바뀌게 된다. 한국 영화의 거장 아래에서 받은 영향을 짙게 드러내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시선에서 이뤄진 이 전환에 대해 좀 더 주목하고 의미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절해고도>(김미영, 2021) 중 한 편의 영화엔 세상과 인생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담겨있다. 무엇을 담을 것이고 어떤 거리에서 어떤 시간과 빛으로 그 장면을 구성할 것인가? 이건 영화에 대한 지식과 경험에 더해 살아온 삶과 사유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거기엔 단순히 영화의 역사나 형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초과하는 삶이 있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영화사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감각도 필요하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비슷한 삶을 삶고 있는 사람들은 한 영화를 비슷하게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배경에서 다른 삶을 산 사람이 그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영화에 대한 비슷한 평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떤 감상들은 그것이 전문적인 영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무시당하고 간과된다. 하지만 다른 위치에서 오는 삶의 감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의 의견은 한 영화를 둘러싼 담론의 장을 넓히고,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다른 방향성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등단한 후에도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쓰는 내 삶과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블로그에 취미로 영화 비평을 쓰던 아마추어 정신으로 평론을 쓰고 있다. 주류에서 비켜난 자리에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영화의 흥행이나 홍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청탁이 들어와도 본업에 치여 마감을 어기기 일쑤이고, 별로라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서는 에둘러서라도 칭찬을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나는 영화평론가라는 명칭에 걸맞은 자격을 여러모로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우연히 등단한 후 뻔뻔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있고, 이런 자리에서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오늘도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박예지(영화평론가) l 소수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쓴다. 2022 영화의 전당 영화평론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 영화비평 구독 메일링 서비스 <씨네픽션>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