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
- 감독
- 장서윤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김서휘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잘 알려진 대로 음악 애호가였던 롤랑 바르트는 피아노를 웬만하면 느리게 치는 편이었다. 언젠가 바르트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흐르는, 하프시코디스트 블랑딘 베를레가 연주하는 바흐 파르티타 4번의 쿠랑트를 듣고는 너무 빠른 속주에 자신이 알던 그 곡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쿠랑트는 그 어원(courir, 달리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애당초 쾌활한 춤곡인 터, 실상 바르트의 기준점은 느린 자기 자신이었다. *주1 달리 말해 대개의 곡을 느긋하게 연주했던 바르트가 베를레를 특히 겨냥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것이 이미 표준이 된 현대적 기준 자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한편 나는 이 불만을 발화하는 그의 위치가 퍽 재밌다. 그가 요구한 기준이 여타 프로페셔널 연주자의 ‘정통적인’ 해석이나 정련한 이론에 근거한 게 아니라 오로지 자의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그는 음악비평을 위시하여 악기 연주와 작곡까지 꾸준히 실행했지만 끝내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자신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이 일화 속 바르트의 발언은 비평가의 무리한 지적과 외부인의 ‘미흡한’ 불만이 동시에 발휘된 경우처럼 느껴진다. 그는 괄호에 넣어 덧붙인다. “(이것은 음악 애호가의 자만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애호가의 욕망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쿠랑트는 그 자체로 (분명 역사적 진실에 따라) 연주되었지만,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2 말하자면 내게 비평 또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충실도를 떠나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을 찾는 과정인 듯하다. 나는 바르트의 이 마음가짐이 내가 영화에 느끼는 불손한 태도와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꼈다. 사실 이미 정해진 원고 분량을 훌쩍 넘겼음에도 송고 후 며칠이 지나서 나는 이 글의 서두를 다시 쓰고 있는데, 이 코너의 기획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비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 지면에, 비평에 대해서도 비평가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은 주제였을까? 솔직히 내게 영화평론가로서의 자의식은 별로 없고, 더 솔직히 그럼에도 영화평론가로서의 무게감은 너무 크다. 하나에서 기인한, 거의 없는 것과 너무 큰 것이 내 안에서 이상한 대결을 벌이는 탓에 이걸 직접적인 글감으로 삼는 글쓰기가 다소 곤란했다. 물론 비평을 글쓰기에만 국한할 수 없는 시대다. 어떤 추천의 목록과 그 방식, 기획과 운영, 수입과 수출, 또한 동료를 모으는 일까지도 모름지기 비평가의 ‘활동’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허덕이지만, 이러한 수행을 시기와 맥락에 맞게 이어나가는 동시대의 탁월한 비평가들은 분명 여럿 있다. 다만 나는 앞서 언급한 사례에 공감한 바, 보다 소박한 의미에서 태도로서의 비평을 돌아보고 싶다. 결국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당연히 할 말이 있기 때문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바르트의 불평처럼) 납득할 수 없는 표준을 의심하고, 대상과 거의 무관한 나를 데려와서라도 나에게 효과적인 것을 찾는 일이다. 내 사유를 보편과 일반에 등재시키고픈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면) 당연한 소리는 덜하고, 의외의 얘기를 더하고 싶다. 연장선상에서 (이제는 왠지 자주 오용되는 것 같은) 정확하게 쓰라는 주문에 오기가 생기곤 하는데, 나는 평문이 정교해지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정확해질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돌고 돌아 영화로 간다면, 오염 없는 적확성과 유의미의 강박을 동력 삼지 않는 영화들, 도리어 먼지나 얼룩을 묻히고도 별로 개의치 않는 이상한 욕구의 영화들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나는 대체로 이곳 저곳을 오가며 힐끗 엿보는 사람이다. 2. “우리가 어딘가 로부터 듣는 것이 듣기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앞 에 있는 것을 )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3 사진의 존재론적 모호성을 설명하기 위해 청각과 시각의 차이를 논하는 스탠리 카벨은 듣기와 보기 행위에 있어 위치/방향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리는 분명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본다. 문제는 우리가 앞에 놓인 것, 의 앞면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 앞의 그(것)도 우리를 보고 있다면 눈을 마주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약간 초조한 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곤충처럼 겹눈을 지니지 않은 탓에 앞에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하고, 이에 더해 타자인 대상의 앞뒤 또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을 보고 있나? 먼저 나는 어떤 뒷모습을 떠올렸다.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인데, 첫째로는 어느 비장하고 숭고한 뒷모습이고, 둘째로는 그 뒷모습을 비장하고 숭고하게끔 보이도록 만드는, 그의 앞에 펼쳐진 풍경이다. 그 풍경은 인물에게는 전경이겠지만 원근법에 의해 우리에게는 원경이다. 우리는 인물의 뒷모습과 더불어 그가 보고 있는 것까지 볼 수 있다. 모든 레이어를 조감할 수 있는 감상자의 위치 덕에 주체적인 응시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못지않게 우리는 (카벨이 “회화는 세계이다”라고 딱 잘라 말하듯 그 본연의 완결성이라는 속성에 더해) 인간의 시점이 지니는 일방향성이라는 강력한 한계에 도착하게 된다. 시선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영원히 볼 수 없다(=모른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8) 옆모습(profile)에 관해 떠올릴 수도 있다. 내게 옆모습이라는 개념은 주로 피아니스트의 무대를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리사이틀에서 연주자는 관객에게 측면을 보인다. 이 측면의 무대화는 (프란츠 리스트가 기원이라는 통상의 오해와 달리) 얀 라디슬라브 두세크가 최초로 시도한 것이었는데,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시초 격인 그가 연주의 기본 위치로 옆모습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연주자의 입체적인 윤곽을 과시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연주자는 손뿐만 아니라 신체 전부를 적재적소에 써야 이상적인 연주에 도달할 수 있다. 다채롭게 변모하는 표정과 흔들리는 상체는, 그러나 청중에게 ‘완전히’는 노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절반의 획득/결핍이야말로 연주자를 향한 호기심을 배가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잡을 수도 없는 음악의 기이한 위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연주자는 입퇴장 시에만 청중에게 인사할 뿐 음악을 만들 때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정면의 욕구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화면 분할이나 오버랩의 기술을, 무엇보다 몽타주의 기법을 터득한 매체라서 우리에게 그(들)의 얼굴을 짜잔,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시야를 조각내는 기계인 카메라로 담은 세계이다(인간의 신체를 모방하며 발전해온 많은 기계장치가 그렇듯 그 기원적 조건을 인계받았을 뿐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말대로 ‘겨우 오려낼 줄 아는 사물’을 통해 우리는 애당초 분절과 절삭을 거친 모습을 간신히 제공받을 따름인지라,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무한한 역량으로 긍정하기에는 어쩐지 미진함이 남는다. (가령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2015)처럼 공간의 삼면을 스크린으로 이용해 동일한 인물과 그 주변을 다양한 각도에서 동시에 바라보는 시도의 경우도 영사 과정을 사후적으로 활용한 것이며 이는 물론, 영화관에서 진행될 수 없는 작업이다. 결과적으로도 우리는 다면을 일체에 조망하지 못하고 각각의 화면을 띄엄띄엄 관람할 수밖에 없다.) <열병의 방>(아핏차퐁 위라세타쿤, 2015) 3. 앞에 있는 것을 본다는 감각이 유효하더라도 정면을 보지 않으면 어딘가 부족한 느낌은 영화를 볼 때 역시 우리를 자극한다. 일단 정면 쇼트가 없는 영화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부족한 정면’, 그로 인한 ‘마주침의 결여’를 도리어 영화가 핵심적인 동력으로 삼을 때 우리는 그 여집합을 풍족하게 껴안게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엿보기의 영화들 .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할까? 가령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 자체를 엿보기와 동일시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관음적 요소를 서사의 국면마다 개입시키는 < 괴인 >(이정홍, 2022)은 어떨까. <괴인>의 도입부에는 어두운 밤 중 두 남자가 어느 문앞에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꾸 비밀번호를 틀리는 그들은 이 집의 주인이 아닌 것 같다. 추후에 밝혀지지만 그들이 머문 곳은 개업을 앞둔 피아노 학원이고 두 남자는 그곳의 공사를 맡은 목수들이다. 기홍은 다음 날 공사를 마저 진행하기 위해, 고객인 원장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학원을 간밤의 잠자리로 이용한다. <괴인>(이정홍, 2022) 중 기홍은 눈을 감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날 그는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닥뜨린다(흥미롭게도 이 사실마저 얼마 지나서야 알게 된다). <괴인>은 주인과 침입자라는 대비된 설정을 반복해 제시하면서도 그 양분된 세계에 머무르기보다 인물들의 동선마다 회색지대를 깔아놓는데, 이 과정에서 엿보기의 충동을 여지없이 기입한다. 남의 집안을 훔쳐보기(그러다가 휴대폰을 떨어뜨려 한쪽이 까맣게 나간 액정 화면), 답사의 명목으로 공간을 힐끔거리며 관찰하기, 심지어 계절이 지난 어느 날 길을 걷다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어떤 얼굴을 알아보는 것까지. 자유로운 시선이 아니라 어떤 낌새와 기미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만 유유하게 바라보는 이 찰나의 행위는 인물들 사이에 완벽히 봉인되지 못하고 새어나가는(영화의 주요한 사태를 빌려 말하면 ‘누수되는’) 관계의 파열음을 누적시키며 끝까지 미스터리를 야기한다. 인물들은 편하게 대화하는 듯하지만 매번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 나누는 메시지에도 의중이 애매한 뉘앙스가 오가고, 오랜만에 식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조차 개인이 발휘해야 할 의무가 마치 감시하듯 맴돈다. 보기는 봤지만 정확히 본 것이 아니라 확정할 수 없는 사태가 연속된다. <괴인>은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모호한 확실함(혹은 그 역)’을 섣부르게 ‘묘사’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일별’하기 때문에 성공적이다(그 점에서 하나가 기홍에게 구태여 다시 돌아와 자신이 자동차 지붕을 망가뜨린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로 기능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한편 화면상에서 시각적으로 거의 와해된 조건을 설정함으로써 도리어 관객에게 엿보기의 감각을 완전히 이양해버리는 사례도 있다. < 물안에서 >(홍상수, 2023)의 개봉 당시, 언론시사회에서조차 이 영화의 화질을 영사 사고로 착각해 관객이 문제를 제기한 해프닝도 있었고, 시종 흐릿한 화면을 두고 제목 그대로 수중의 느낌을 표현하려 한 것이냐는 농담 섞인 평이 돌기도 했다. 말하자면 참을 수 없는 화면의 흐릿함. (초반부 약간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초점 없는 화면으로 일관하는 이 영화를 관습적인 언어로 규명하기에는 아직도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영화를 보고 말하는 작업에서 거의 불가피한, 장면 내부에 배치된 시각적 요소들의 기술(記述)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난감할 수밖에 없다. <물안에서>(홍상수, 2023) 중 그러나 <물안에서>가 형상을 분명히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영화를 지탱하는 모종의 조건들을 아예 유폐한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본 걸까. 그냥 단순히 흐린 것을 깨끗하게 보는 드문 경험에 참여한 것일까(아니면 그 반대인 걸까)? 특기할 만한 지점 중 하나는 영화의 서사다. 홍상수 영화의 이야기를 쉽사리 정돈하는 일은 몹시 어려운데, <물안에서>는 시공간을 불확실하게 맞물려놓거나 복수의 구조를 경합시키는 시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서사를 파악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한편 우리는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 자세와 제스처 등 비언어적 표현들을 소상하게 살필 수는 없는데, 대신에 우리는 이들의 (이마저도 종종 ‘불성실’하게 처리된) 목소리, 그리하여 서술되는 이야기를 건네받게 된다. 정면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와중에 이들의 말은 계속되고, 심지어 관객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시시콜콜 얘기하는 그들은 우리에게 시각적 경험의 불확실성을 절감하게 만든다. 관객은 이 갑갑한 화면을 정면으로 (못) 보면서 이미지의 제한된 용법이 단일한 서사 안에서 문법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에 함께 놓인다. <물안에서>는 극영화에서 서사를 전달하기 위한 형식으로써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명쾌한) ‘화면’이 역할을 거부할 때, 이 불가결하다고 간주되는 요소의 찌그러진 상태 와중에도 기묘하게 지속되는 영화의 방향을 새롭게 일깨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밝은가, 어두운가. 또렷한가, 흐릿한가. 움직이는가, 정지해 있는가. 짓물러진 화면은 이 판단을 진정 불가능하게 하는가? 그렇다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 걸까? 열화된 화면을 보는 내내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확히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엿보고 있다는 감각이 피어오르는 한편, (못) 보기의 문제가 역설적으로 정말 본다는 것의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물안에서>는 듣기의 작업과도 연동하여 주장한다. 예컨대 남희가 새벽에 들었다던 “정신 차려!”라는 말은 어디서 들렸으며 누가 말했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 이 잠수된 것 같은 화면에서 그 존재가 해소되지 않은 청각적 정보가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 도망친 여자 >(홍상수, 2019)에서 대사로는 대두되지만 그 모습은 제시되지 않는 ‘3층’이나 ‘위층’, ‘지하실’의 존재(부재)가 떠오르기도 한다. 종장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서론에 언급했던 회화와는 전혀 다른 시대와 맥락에 놓여 있음에도 몹시 완결된 인상을 전달하는 뒷모습이다. 역시나 그를 돌려세우고픈 마음이 일지만, 흐르는 물소리가 화면을 메울 때 우리는 이곳이 영화의 종착지임을 직감하게 된다. 그가 점점 멀어지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엿보지 않으면 보는 것은 시작도 할 수 없다. *** 주1. 다음의 논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김주원, 「롤랑 바르트의 음악비평」, 『불어불문학연구』, 제136집, 2023, 144쪽. 주2. 롤랑 바르트, 변광배 옮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민음사, 2021), 전자책 377쪽. 주3. 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눈에 비치는 세계』(이모션북스, 2014), 53쪽 이보라(영화평론가) l “나를 위해 연주된 것”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일단은 쓴다. 씨네21 영화평론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
그래서 우리는 유튜브 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20년 5월에는 정지돈의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출간 기념 라이브 북토크를 했고(촬영하던 아이패드 배터리가 중간에 떨어지는 바람에 강제 종료됐다), 2021년 5월에는 오한기의 『인간만세』 출간 기념으로 셋이서 라이브 북토크를 했다(오한기가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줌을 통해 진행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라이브 경험은 더 많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니고 무슨 라이브냐고, 너무 민망하다고, 식은땀 흘리며 새하얘진 머리로 아무 말이나 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이제 멀쩡한 정신으로 차분하게 아무 말이나 한다). 그렇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정말로… (하나, 둘, 셋-) (심호흡) 1. 23 아이덴티티 -안녕하세요? 우리는 한영한사! 지금부터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신년 특집 유튜브 라이브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K정연이고요, 제 옆에는- -안녕하세요 JD입니다. -처음 연재 제안 받고 서교동 카페에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도대체 뭘 써야 하나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었어요. 신년인데 어떻게 지내시나요? 근황부터 좀. -네, 저는 요즘 누워 있는데요. 누워서 책도 보고 누워서 소설도 쓰고 밥도 누워서 먹고 지금도 사실 누워 있어요. -세상에, 지금 라이브 스트리밍 중이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독자들을 기만하시는 건가요? How dare? -어차피 안 보이잖아…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이게 뭐야 진짜. 그러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건 장난이 아니다. 오늘을 위해 나는 유튜브 채널까지 만들었다. 이름은 레코드 디스코드(검색해도 안 나옴), 오디오 비주얼 전문(일단은) 채널이다. 계획은 이랬다. 영자원에 미리 양해를 구해서 라이브 시작과 동시에 유튜브가 임베드 된 연재 페이지를 올린다, 스페셜 게스트들과 함께 2시간 남짓? 지난 10화 동안의 연재를 돌아보고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남은 11화 동안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라이브가 끝난 다음에는 AI 노트 어플을 통해 자동으로 푼 녹취를 연재 페이지에 추가한다, 클립 일부를 NFT로 판매해서 에세이 필름 제작비를 확보하고 남는 돈은 사회에 환원한다… 다시 봐도 완벽한 계획이다. 단 하나, 유튜브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려면 구독자가 1000명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지금 구독자가 몇 명이죠? -사실 좀 아까워요. 딱 23명이… -23명이 모자라다고요? -딱 23명이라고요. -그게 뭐가 아까워요? -그럼 안 아까워요? -?? 2. 그는 사막에 서서 인생의 순간들을 세고 있다 1954년 12월 10일 요나스 메카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는다. 동생 아돌파스 메카스와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다른 백수들과 함께 전설적인(그때는 아니었지만) 영화 잡지 [필름 컬쳐]를 창간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돈이라고는 고작 120달러가 전부라는 소식이었다. 다음 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돈은 700달러. 메카스는 심플한 해결책을 떠올린다. 편집위원들에게 100달러씩 갹출하는 방법이었다. 참고로 초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전국민에게 100원씩 받아서 놀고먹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지는 남미 여행을 준비하느라 빈털터리 신세였다. 루이스는 잡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줄 수 있다고 했다(“돈만 빼고”). 메카스 형제는 원래 돈이 없었다. 고든은 돈이 있다, 하지만 돈을 낼 수는 없다, 그건 신념의 문제다, 라고 말했다. 왜?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 가수와 동명이인이자 훗날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토마스 에이킨스, 미국 영화의 기원에 대한 책을 출간하게 될 고든 헨드릭스가 메카스를 쏘아붙였다. 왜 돈도 없으면서 잡지를 시작한 거야? 최소한 3호나 4호 정도는 낼 돈은 쥐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냐? 만약 우리들이 전부 그렇게 생각했다면 [필름 컬쳐]를 시작하기 위해 22세기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메카스는 말했다. 세상에는 돈도 있고 사업 수완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돈도 없고 사업 수완도 없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신은 잔인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메카스는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법원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는 얘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함. 인쇄비를 주지 않았다며 인쇄소에서 우리를 고소했다. 783달러 91센트를 갚아야 한다, 일주일 안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예요. -돈도 없고 구독자도 없지만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요? -신은 잔인하다고요. 3. 볼륨을 높여라! 최근 나는 오디오와 엘피에 빠져 8개월 할부(그 이상은 무이자가 안 됨)로 너무 많은 것을 샀다. 최소한 3/4분기까지는 뭘 사기는커녕 마리모처럼 꼼짝없이(움직이면 돈이니까) 누워 지내야 할 판이다. 마감은 늘 밀려 있고 시간은 부족하고 의욕적으로 시작한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는 23명이다(아마 다 아는 사람이지 싶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중에 가장 의욕이 넘치고 동시에 홀가분한 마음이기도 하다.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답인 42(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참고)살이 되어서 그런가? 마치 [기나긴 이별]이라고 이름 붙인 장편소설의 초고를 끝낸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기분이다. 1952년 5월 14일 담당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챈들러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것을 내가 원하던 대로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럴 수 있게 됐으니까요.” 물론 나는 챈들러가 아니다. 일기나 트윗, 심지어 메모조차 내가 원하는 대로 쓰지는 못한다. 영상이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영상을 다룰 줄도 모르고 다루는 법을 배울 여유도 없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이중의 우회로가 마련되어 있다. 1)이건 글이 아니라 유튜브 라이브임 2)유튜브 라이브지만 글을 통해서 송출되는 라이브임 말하자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일종의 회색지대가 있고, 그곳에서 나는 중력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굴 준비가 되어 있다. 개연성과 물리법칙을 가볍게 무시한 채 라이브 스트리밍 도중에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하기도 하고(이렇게), 중간중간 의미없고 지루한 부분을 빠르게 건너뛰며 플래시 포워드를 하기도 할 것이다(저렇게). 서두르자. 어쨌거나 밤은 짧을 것이고 우리에겐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4. 비카인드 리와인드 -21세기 한국 영화가 < 박하사탕 >과 함께 시작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아니요? -2000년 1월 1일이 딱 되자마자 개봉했대요. 자정에, 특별 이벤트로.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나 다시 돌아갈래! 하는 절규와 함께 시작한 셈이죠. How ironic? -2000년 1월이면 20세기잖아요. 21세기는 2001년부터고요. -…넷플릭스에 있길래 다시 봤는데 저희가 그동안 연재를 통해 이야기했던 한국 영화의 특질들, 그러니까 목욕탕이니 노래방이니 화면을 가득 채운 K-얼굴의 스펙터클 같은 것들이 전부 나오더라고요. 종합선물세트처럼요. 정말이지 깜짝 놀랐지 뭐예요. 우리가 더듬더듬 어떻게든 길을 찾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버렸고요, 하핫. -저기요? -그럼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창동 감독은, 그 전직 문화부장관은, 아니 미래의 문화부장관은 과연 <박하사탕>을 통해 어디로 돌아가고자 했던 걸까요? -K정연? 제 말 안 들려요? - 설경구 가 기차 선로에 서서 문제의 대사를 외쳤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설경구와 충돌한 기차는 뒤로 가기 시작하고요. 1994년 여름으로, 1987년 봄으로, 1984년 가을로, 1980년 5월로, 1979년 가을로, 그리고… -야. 물론 <박하사탕>은 회귀물이다. 그리고 이창동은 21세기 한국 대중서사의 우세종이 된 웹툰과 웹소설의 트렌드를 선취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박하사탕>은 한국 현대사의 외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재구성한 ‘60년생 김영호’(아마도 그의 생일은 4월 19일일 것이다)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창동이 [82년생 김지영]의 성취를 선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창동의 영화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떠밀리다가 흐름 그 자체가 되는 문제적-남성-개인의 픽션을 보여준다면, 조남주의 소설은 거대서사 속에서 매번 남자주인공의 아내(김여진)로, 정부(서정)로, 작부(고서희)로, 첫사랑(문소리)으로 주변화되고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삶-이야기들을 통계와 기사를 재료로 픽션의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주 가까스로(소설이 지영을 진료한 남의사의 진술을 통해 성립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그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근대적 양식의 본질이다). 둘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하다. 20년의 시간을 회귀해 스무살의 천변으로 돌아간 김영호는 첫사랑 순임을 다시-처음 만난다. 손으로 뷰파인더를 만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나중에 사진을 찍고 싶다고, 사진기를 메고서 이런 이름 없는 꽃들을 찍고 다니고 싶다던 영호는 순임에게 말한다. -이상해요. 여기 내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옛날에 한 번 와본 데 같아요. 저 철교랑 강이랑 다 낯익어요. 여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데거든요?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건요, 꿈에서 본 거래요. -정말 꿈이었을까요? -영호 씨, 그 꿈이요.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그 꿈은 좋은 꿈이 아니고 악몽이고 그 속에서 영호는 스스로 다른 이들이 꾸는 악몽의 주재자가 된다. 그렇기에 그는 손뼉을 치며 ‘나 어떡해’ 노래를 부르다가도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돌바닥에 누워 철교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눈물 흘리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혹은,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지만 그 꿈에서 깰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역사의 열차를 뒤로 가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궤도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따라서 이건 회귀물이라기보다는 루프물이다(“나 ‘다시’ 돌아갈래!”). 정해진 루트를 반복해서 달리는 열차의 운동이 그런 것처럼. 그런데 만약 충분히 많이 되돌린다면 어떨까? 20년이 아니라 아예 100년 쯤을 되돌린다면? 처음으로,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가 도착하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 규모의 전쟁이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크툴루의 부름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으며 원한다면 누구나 아무 거리낌 없이 이름 없는 꽃을 찍고 서정시를 쓸 수 있었던 시대로. 그땐 어쩌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더 길고 다채로운 꿈이라도. 그리하여 영호(와)의 악몽이 조금이나마 희석될 수 있도록. 물론 이것은 비약이다. 왜 아니겠는가? -차라리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박하사탕>의 회귀(루프)는 가리봉 봉우회에서 야유회를 갔던 천변에서 시작하고 또 끝나지만, 21세기 한국 영화는 설경구의 외침과 함께 과거(트라우마적)-현재(망가진)의 무한 루프를 벗어나 대과거(기원)로의 동반 회귀를 감행했다고요. -요즘 웹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에요? -그곳에서 한국 영화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현실이 아직-도래하지-않은-척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 영화는 ‘정치적인 것’을 생산해내기를 멈추고, ‘정치’를 서사 내부에 가둔 채 극의 논리에 따라 자체적으로 소멸되고 해소될 수 있는 스펙터클을 더 잘 만드는well-made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지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마크 피셔를 따라 말하자면 21세기 첫 20년 동안 한국 영화의 장르는 단 하나,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입니다! -그만! 저는 여기서 나가야겠어요. -한국 최초의 천만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강우석의 < 실미도 >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물론 그 영화는 웰메이드가 아니지만요. 거기서 설경구는 1971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비겁한 변명입니다… 5. 노 홈 무비 2001년 1월 1일 <박하사탕>과 함께 시작한 21세기 한국 영화의 첫 20년은 2019년 12월 26일 지각 개봉한 허진호 의 < 천문: 하늘에 묻는다 >와 함께 끝난다.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7월 24일에 개봉한 송강호 박해일 주연의 < 나랏말싸미 >와 함께 끝났다고 해도 좋다. 둘 다 세종대왕을 내세우고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무척 묘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진정한 끝은 2019년 12월 31일 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문 기사와 함께 왔다(뉴시스, “中 우한서 원인불명 폐렴 환자 집단 발병...당국 긴장”). 돌아보면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는 대규모 물량 공세와 와이드릴리즈를 통해 누가 천만이라는 깃발을 가져갈 것인가를 두고 다투는 ‘극장전(劇場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충무로의 토착자본이 CJ나 롯데 같은 대기업의 자본으로 재편된 21세기 한국 영화가 돌아가고자 했던 곳은 어쩌면 스튜디오 제작 체계가 확립되던 무렵의 헐리우드,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절의 헐리우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더는 불가능해진 지금 한국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덩달아 내 인생도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들 그렇듯 나 역시 종종 새로운 인생을 꿈꾸긴 했다. 회귀나 빙의나 이세계 같은 황당무계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삶은 아니었다. 한동안 내가 그렸던 미래는… 우리 가족이 살 수도 있었을 그것은… 솔직히 나는 <나랏말싸미>가 천만 영화가 될 줄 알았다… 6. 내 차 봤냐? -요즘에도 극장 자주 가세요? -요즘에도 극장 안 가세요? -작년에는 한 번 갔던 것 같아요. 같이 갔잖아요, < 라스트 듀얼 > GV하러. 아 GV 전에 미리 보느라 시사회도 갔었으니까 두 번이죠. 아내가 시간 나면 지돈씨랑 같이 영화나 보라고 유효기간이 12월 31일까지인 라이카 시네마 초대권 두 장 줬는데 결국 그건 못 갔네요. 아쉬워라. -정말…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 같네요… 그래도 올해는 벌써 한 번 다녀왔다. 3시간짜리 영화였으니 1.5번이라고 해야 하나? 맞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 드라이브 마이 카 > 이야기다. 타임라인에 쏟아지는 트네필들의 기립박수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영화는 재밌었다. 중간중간 지루할 법도 한데 3시간짜리 영화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 2시간 26분 정도로 느껴졌달까? 물론 엉덩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욱신욱신 쑤시는 꼬리뼈와 함께 도서관에 갔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어정쩡한 자세로 의자에 걸터 앉아 일기장을 열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새삼 느낀 하루키의 인기 비결: 그건 그가 통속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는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은 일종의 제로 콜라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기보다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결정적인 ‘X’를 제거한 채 그것에 조금 미달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다르다. 내 생각에, 그건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이 통속성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혹은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인생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인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생이 통속성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략…) (…중략…) 다시 말해보자. 가후쿠에게는 맹점이 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발견된 맹점은 아내가 죽은 후 더 커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채 그 상태 그대로 거기에 있다. 그것이 커지지 않은 이유는 가후쿠가 때마다 안약을 넣기 때문이다. 즉, 가후쿠가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보려하지 않는가? 그건 바로 통속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통속성 자체가 바로 맹점이다. 통속성이란 어떤 것들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방식인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주인공의 녹내장은 나은 건가요? -의사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되면 완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저도 재밌고 잘 찍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몇몇 장면은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특히 마지막 눈밭에서 연설하는 부분. 보면서 진짜 와 저래도 돼? Really? -엄청 뻔뻔하죠. 저도 그 부분 보면서 좀 그랬는데, 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도 아마 그 부분까지 좋아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다만 뭐랄까, 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더 좋아할 수는 있겠죠. 어떤 결정적인 작은 흠이 전체를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고, 나아가 옹호해주고 싶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러니 우리도 좋은 이야기만 하죠. -저는 운전하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담배 피우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어요. 원래 이렇게 잘생겼나? 얼굴을 좀 고쳤나? -잠깐, 왜 우리가 <드라이브 마이 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거죠? 지금? 한국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에도 모자랄 판에. 7.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런데 한국 영화가 도대체 뭘까요? 이제 와서 새삼 묻는 것도 우습지만, 연재가 지속될수록 한국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언젠가 이승훈 시인(하늘에서 평안하시기를)은 시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시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한국 영화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 필요도 없겠죠.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이유도요. -한국 영화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내 인생을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 -?? 왜 갑자기 반말…? -정신 차리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격식이나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틱톡 틱톡!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한국 배우들이 셋이나 출연하고 한국말도 자주 나오죠. 한국인 스텝들도 여럿 참여했고요. 에필로그 같은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부산이기도 한데요, 그럼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한국 영화일까요 아닐까요? A)한국 영화라면 그 이유는? B)한국 영화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갑자기 그런… -그만! 대답하지 마세요. 어차피 시간도 없으니까!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한국 영화냐 한국 영화가 아니냐가 아니에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가 문제인 거죠. -받아들인다고요? -아카데미 위원회가 21세기의 새로운 20년을 맞아 < 기생충 >을 미국 영화로 받아들인 것처럼요. -도대체 누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인다는 건데요? 무슨 자격으로요? -그건… 그때 갑자기 화면 멈추고, 멈춘 화면 위에 빨간 자막이 뜬다. (자막) “K-씨네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K-inephile)” (To be continued…)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