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cast]숙명가야금연주단 '달콤한 하품'(4) 부모은중경_회심곡
- 제작년도
- 2011
사진: 창비 박사학위논문 제출 기한이 약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점, 나는 여전히 명확한 주제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던 때였다. 남은 시간을 꾸준히 쓰기만 해도 눈사태처럼 쌓여 있는 백지를 채우기에는 준비해둔 것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마음속엔 무언가 가득했다. 그것은 대학원 시절 내내 또는 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누적되었던 불만과 환멸, 분노와 냉소 같은 것이었다. 십여 년 동안 대학원의 골방에 묵으며 쌓인 이런 정념이 내가 가진 유일한,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자원이라고 주문처럼 되뇌면서 대학에 들어온 이래로 보고 겪어온 장면들을 수없이 복기하곤 했다. 나의 대학 시절은 참여정부의 탈권위주의적인 기조와 더불어 월드컵 이후의 희망과 자신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 등 변화에 대한 기대와 전망 속에 펼쳐졌다. 사회 전반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 역시 아직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페미니즘, 장애인권, 신자유주의 비판 등 여러 진보적인 담론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유통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열린 사회’의 환상을 깨는 사건도 많았다. 이라크 파병과 노동자들의 죽음, 대학의 기업화, 한미 FTA 등. 주변에는 한나라당만큼이나 노무현을 싫어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당선되던 날의 그 우울함을 기억한다. 숭례문 화재와 명박산성, 용산참사와 쌍용차, 노무현의 죽음, 4대강 사업과 천안함 의혹 등으로 점철된 5년. 그리고 이어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는 이미 무너진 사회가 물에 잠기는 듯한 절망감이 들었다. 그런 이명박근혜 시대를 기어이 우리 손으로 끝내던 그때 그 광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오랜만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품었었는지.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 촛불이 물결처럼 넘실대던 그 ‘스펙터클’ 이후 한국사회는 과연 얼마나 더 좋은 사회가 되었는가? 민주주의를 지켜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어떤 사회를 만들어냈는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지켜낸 공(功, merit)을 가져간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들의 자녀는 어떻게 대학에 가고 어떻게 변호사나 의사가 되는가? 그들은 여성 비서에게 무슨 짓을 하는가? 이토록 ‘민주적인’ 사회에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매일 같이 죽어가는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구의역 김군과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은 왜 죽었는가? 왜 동성애는 (심지어 ‘민주’당 대선 후보에 의해서도) 반대되는가? 왜 장애인은 아직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싸워야 하는가?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는 누구의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민주주의의 ‘민’에 속하는 이들은 누구이고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한국 민주주의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가 이대로여서는 안 되지 않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을 학문의 언어로 던지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를 가능케 한 것은 하나의 은유였다. 역사는 극(劇, drama)이라는 것. 가깝게는 지난 2024년 12월 하룻밤 사이에 계엄 선포와 해제가 휩쓸고 지나갔을 때도 국내외 언론에서는 K-드라마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했지만, 그 이전부터도 한국 현대사에는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질 법한, 그리고 이미 만들어져 관객들로부터 감동을 자아내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영화 같은 역사, 드라마틱한 역사를 겪으며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전 세계에 대해 가지는 자부심 중 하나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가 한 편의 드라마라는 이 은유를 단순한 수사로서가 아니라 진지한 발판으로 삼았다. 만일 역사가 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러하듯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민주주의라는 극은 좋은 극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이런 극을 보며 감동해도 좋은가? 계속해서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내며 자랑스러워해도 되는가? (상) <오! 꿈의 나라>, <명성, 그 6일의 기록> 중 / (하) <꽃잎> 중 / © 이은, 푸른영상, ㈜미라신엔터테인먼트 이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먼저 한국 민주주의라는 영화 혹은 드라마가 어떤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봤다. 역사라는 극을 구상하는 작가로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기대하는지, 그리고 극에 참여하여 연기하는 배우로서 우리가 어떤 장면을 상연해왔는지 살펴봤다. 1980년대를 한국 민주주의의 가까운 기원으로 설정하고, 이 시기에 생산되었거나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 사진, 소설, 시, 그림, 노래, 수기 등을 되는대로 수집하여 보고 읽고 들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와 5․18기념재단 사진아카이브 를 매일 들락거렸고, 대학 도서관과 국회도서관, 유튜브,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등을 뒤져서 < 오! 꿈의 나라 >(이은, 장동홍, 장윤현, 1989)나 < 꽃잎 >(장선우, 1996), < 명성, 그 6일의 기록 >(김동원, 1997) 등을 보았다. 임철우, 공선옥, 김영현, 공지영, 권여선 등의 소설을 읽었고, 각종 도록과 온라인 갤러리에서 오윤, 신학철, 홍성담, 강요배, 임옥상 등의 민중미술 작품을 찾아서 보았다. 1980년대의 여러 일간지를 교차하여 훑어보고 나무위키까지도 활용하면서 각종 사건을 연도별·월별로 숙지했고, 사건의 장소를 지도와 영상에서 찾아보거나 직접 가보기도 했다. 길을 오갈 때는 꽃다지부터 안치환, 윤선애, 이성지, 그리고 김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온갖 민중가요를 들었다. 인용을 위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2017)나 『소년이 온다』(2014)를 다시 들춰볼 때면 책을 덮지 못하고 계속해서 읽어나가기 일쑤였고 영락없이 눈물을 쏟곤 했다. 낮에는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아이를 돌보며 그 생명력에 감격하다가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에는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훼손된 주검 사진을 보며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들을 섭렵하는 일은 연구를 위해 각종 표와 숫자로 이루어진 자료(data) 속에 파묻히는 작업과는 달랐다. 그것은 연구이기 이전에 한국에서 사회학을 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역사적 교양을 뒤늦게 습득하는 과정이기도 했고, 나보다 앞서 세상을 겪으며 살아온 이들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나 역시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로부터 또다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간혹 주변에서 나의 근황을 물을 때면 나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본다면서 ‘문화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볍게 답하곤 했지만, 그것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망(webs of significance)”에 동참한다는, 진지한 의미에서의 문화생활이었다. [1]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 나아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신념처럼 간직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보았거나 기억하는 장면들, 그리고 내가 본 다양한 자료의 페이지마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마다 등장하는 것은 어떤 몸의 이미지였다. 그것은 때로는 곤봉과 개머리판에 맞아 터지고 덜렁거리는 몸, 벌벌 떨며 밀실의 욕조나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몸, 해체되고 허물어진 채 부패해가는 몸이었고, 때로는 뒷사람에 밀려 앞으로 앞으로 넘실대며 나아가는 몸, 주변의 건물을 울림통 삼아 웅장한 구호와 노래를 뿜어내는 인파의 거대한 몸집이었다. 그리고 이런 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이런 몸의 이미지를 보는 나의 몸 역시 차분할 수 없었다. 숨을 고르며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언가 벅차오르기도 했다. 한국 민주주의라는 영화는 온몸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영화를 계속 이어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너무나도 감동적인 드라마이지만, 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과연 살만한 것이었는가?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김대중, 2009년 1월 7일 일기)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한다. 사진: 네이버 영화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네가 일기에 그렇게 썼대?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 < 박하사탕 >(이창동, 1999) 중 김영호( 설경구 ) 한국 민주주의가 성취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몸과 마음에 회복될 수 없는 흔적을 가진 이들이 부지기수이며,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도 허다하다.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찬란한 역사였지만, 그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 역시 축복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자랑스러워도 이런 민주주의를 계속할 순 없을 것이다. 마냥 자랑스러워하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물론 무대에서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객석을 박차고 나가 민주주의를 지켜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주역’들에게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대단한 감동을 주는 자랑스러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영화 < 1987 >(장준환, 2017)에서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져요?” 하고 냉소하던 연희( 김태리 )가 선배 이한열( 강동원 )의 죽음을 보고 회심하여 광장으로 달려나가면서 민주주의라는 극의 국면 역시 결정적으로 전환되었음을 현실에서 경험한 이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민주주의라는 극에 배우로서 참여하지도 않았고, 객석에서 이러한 극을 보며 감격하지도 않았던, 민주주의의 극장 밖에서 살아온 이들도 있다. 민주주의의 주역들이 민주화된 사회를 향유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고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낯선 것이었고 남의 것이었다. 이들의 동등한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거나 부정하기까지 했던 자들이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의 주인공 아니냐’며 함께 무대로 올라가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자고 호소한다면 극장 밖에선 아마 이런 목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1987>, <극장전> 중 / 사진: 네이버 영화 , ㈜영화제작전원사 “영화를 정말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자긴 이제 재미 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 - < 극장전 >(홍상수, 2005) 중 영실( 엄지원 ) 모두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그런 민주주의를 계속해나갈 수도,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라는 극의 작가이자 배우로서 우리는 죽음-결집의 레퍼토리와 함께 몸과 마음이 쪼개졌다가 커지기를 반복했다. 스펙터클로 점철된 이러한 영화가 주는 극적 쾌감이 대단하긴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우리 삶의 보금자리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덜 자랑스럽고 덜 극적이더라도 모두가 평등하고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희망하며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내란과 탄핵을 겪으며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수호의 이력을 다시 한 줄 추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이 최근의 역사를 완전무장 하고서 국회로 쳐들어온 계엄군이나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은 시민들이라는 스펙터클로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겨울 광장에서 시민들은 소수자와의 연대, 성평등, 노동 있는 민주주의, 평화와 안전, 기억과 애도 등을 외쳤다. [2] 이러한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거기에 힘이 보태진다면, 크고 대단한 장면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모두가 아끼는 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다른 민주주의를 향한 변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 [1] 막스 베버, 「사회과학적 및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 『문화과학 및 사회과학의 논리와 방법론』, 김덕영 옮김, 길, 2021, 293쪽; 클리퍼드 기어츠, 『문화의 해석』, 문옥표 옮김, 까치, 1998, 13쪽. [2] 유현미․김이선․김정환․박상은․장진범, 「광장에서 만난 세계: 윤석열 퇴진 집회 시민발언문 분석」, 『경제와 사회』 146.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김정환(사회학자) l 문화사회학, 사회이론을 전공 분야로 삼고 있다. 『연구자의 탄생』(2022, 공저),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2020, 공저) 등의 책을 썼으며, 『신자유주의적 상상』(2026, 공역), 『사회론』(2015) 등의 책을 옮겼다. 사회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양한 문화 현상의 해석을 통해 한국 모더니티의 전개와 변화를 탐구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 그때 그사람들 >(2004)은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밤을 소재로 한 이 가상 역사극은 절대권력을 구가하던 늙은 독재자와 그의 충직한 수족들, 저들의 카르텔에서 배제된 험악한 야수들의 쟁투를 블랙코미디의 작풍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남자들의 아귀다툼을 흥미로운 풍자극으로 전환하는 것은 저들의 틈새에 끼어있던 여성들의 몫이다. 이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VIP를 위해 일신(一身)을 단장하고 순번을 기다리는 비키니 걸들이거나 거간꾼 노릇을 하는 마담 뚜, 중앙정보부 비밀 연회의 악사로 흥을 돋우는 가수 등 주변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사소한 배역과는 별개로 그들의 진가는 텍스트를 운위하는 또 다른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때 그사람들>의 플롯은 10.26의 시작과 끝을 나레이터(화자)의 목소리에 실어 전달한다. 문학적인 개념으로 치자면 3인칭 화자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으로 볼 수 있는 간접 전술이 스토리를 주재한다고 볼 수 있다.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이 영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보이스오버의 통념적인 용례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담화에서 보이스오버는 일반적으로 친밀감을 주거나 대화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낼 수 없는 정보들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이스오버는 언어 코드와 시각적 코드의 결합을 통해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보이스오버는 언어적 의사소통 수준과 시각적 의사소통 수준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제공함으로써 시청각 기호들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그때 그사람들>에서 임상수는 스토리의 여러 측면들을 해설함으로써 그 흐름과 전개를 조력하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의 일반적인 함의에 도전한다. 이 도전의 토대는 내러티브 안에서 주변부에 머무는 여성들이 서사의 바깥에서 화자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한편으로 스토리로부터 여성의 관점을 분리(나레이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표현 전략을 통해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잠재해있는 이 정치적 사변의 직, 간접적 가담자들의 정체성을 투영(작중인물)하는 중첩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보이스오버의 활용은 내러티브의 주체와 내레이션의 주체를 이중화한다. 전자는 스토리 사건에 참여하여 그것을 조정하는 반면, 후자는 내러티브를 자율적으로 통제하고 주관하는 더 강력한 저자, 더 큰 주체를 표시한다. 비(非) 동기화된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화면 밖의 스토리텔러에게 내러티브 권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서 신뢰를 가진 의인화된 영화의 목소리가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이스오버는 <그때 그사람들>의 의미 맥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임상수가 설계한 내러티브에 프레임을 설정하고, 윤리적인 기준을 제공하며, 특유의 씁쓰레한 풍자를 담당하는 목소리는 전적으로 여성들의 것이다. 이렇게 계산된 플로팅 컨셉트에 따라 나레이터의 역할을 떠맡은 것은 김윤아와 윤여정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두 나레이터는 화자이자 작중 인물로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이중적으로 기능한다고 함은, 임상수의 서술 전략이 관객들로 하여금 캐릭터와 스토리텔러라는 양자의 기능을 견주어보도록 부추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밴드 자우림의 보컬이기도 한 김윤아는 프롤로그의 나레이터이자 궁정동 안가 만찬에 초청되어 엔카를 부르는 가수로 등장한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김윤아의 보이스오버를 들어보자. “박정희, 그가 군사 쿠데타 이후 18년째 정권을 유지해오던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의 뜻밖에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폭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이를 간단히 진압해 버렸습니다. 질식할 것만 같은 거짓 평온이 흐르고, 시민들은 한껏 웅크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습니다.” 김윤아의 음성 해설은 스토리의 배경을 소개한다. 그는 이후 에피소드들에서 자신이 등장한 것을 예고하는 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나레이션 행위를 통해 스토리의 서막을 연다. 구연동화의 도입부를 암송하는 것 같은 어조는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지위, 박정희의 생애를 먼 옛날의 신화적 서사로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따라서 김윤아가 화자이자 등장인물로서 스토리의 안과 바깥의 경계에 있는 특권적인 나레이터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디제시스 안의 사건에 참여하기 때문에 다른 등장인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위에 있어서 제약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즉, 김윤아는 사태의 전말에 대해 초월적인 지위를 갖지 않는다. 김윤아보다 높은 자리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관통하면서 그 위상을 결정하는 인물은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김윤아와 마찬가지로 1인 2역을 맡았다. 그는 모든 사태를 관망하는 자이다. 프롤로그에서 윤여정은 여성 편력이 극심한 어르신(박정희)에게 자신의 딸을 맡겼으나 단물만 빨리고 용도폐기당한 상황에 항의하는 어느 연예인의 모친을 연기한다. 색정광 권력자의 방탕을 은근히 조롱하는 이 철없는 엄마는 중앙정보부의 채홍사 노릇을 하는 주 과장(한석규)에게 육두문자를 섞은 모욕을 당하고 12차선 도로 한복판에 나뒹군다. 뇌리에서 사라진 윤여정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은 영화가 끝나기 10여 분 전이다. 국가 원수 암살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우스꽝스러운 소동극으로 마무리된 뒤 이 계획에 가담한 사람들의 후일담을 소개하는 서술 화자로 윤여정의 목소리가 나온다. 절대권력의 서슬 앞에서 입을 놀리다 굴욕을 당한 프롤로그의 철없는 엄마와 다르게 에필로그의 나레이터에게서는 이 모든 사태를 관장하는 전지적 화자의 위엄이 있다. 서사와 주제, 태도, 세계관을 아우르는 그녀의 초월적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관객들은 비로소 심수봉의 노래에서 빌어 온 ‘그때 그사람들’이라는 표제의 뉘앙스를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일부를 옮겨보자. 검은색 가림 유리막이 처진 중앙정보부의 밀실 너머에서 김 부장(백윤식)이 치도곤을 당하는 꼴을 바라보면서 검은 선글라스의 국군 장교(전두환으로 추정된다)가 내뱉는 대사에 이어 윤여정의 나레이션이 갑자기 끼어든다. “어때요, 저 사람. 혁명적 민주투사로 보입니까? 아니면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 최후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서 읽어보시도록.” 이 나레이션에서 화자의 존재와 시각은 분명해진다. 어리석은 사내들의 난장극을 목격하고 종국적으로 살아남아 이를 증거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저개발 시대의 국가주의를 논평하는 화자로서 윤여정은 권력의 무망함과 덧없음을 조롱하는 자의 위치로 이동한다. <그때 그사람들>은 암살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드라마가 아니요, 독재자의 죽음을 묵상하는 성찰극은 더더욱 아니다. 1979년 10월 26일의 궁정동 스토리에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일갈한 용자(勇者)도 있었으나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상사의 지시에 따라 좌표를 잃고 우왕좌왕하였던 경호원들, 권력투쟁의 뒤안길에서 소모품처럼 쓰인 필부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뒤 기나긴 침묵에 빠진 커튼 뒤의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사정에 눈이 멀었던 다수의 대중도 있었다. 여성들의 보이스오버는 대사 외적 수준에 대한 그녀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쓰였다. 그들은 말하는 사람이며 하나의 사태 주변에 모인 여러 개의 역사적 관점들을 나레이션 아래로 통합하는 초월적 자아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말의 스타일이다. 저들은 경어체를 쓰고, 보이지 않는 청중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듯이 말한다. 여성의 목소리는 회심의 거사라는 계획이 무색하리만치 밤의 만찬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남자들의 딱한 처지를 조소하는 주체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다. 동시에 나레이션의 요구에 따라 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상상적 관객으로서 우리들이 있어야 할 자리도 바로 그곳이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장르와 메시지 사이, 장재현 감독의 깊은 고민 옛날 어떤 마을에 대궐 같이 큰 집에 살던 어르신이 있었다. 딸린 식솔만 몇 백 명인데 집에 불이 났다. 어르신은 집을 빠져 나왔지만, 어린 아들들은 장난만 치고 놀고 있었다. 그냥 나오라 하면 귓등으로 들을 게 빤해, “대문 바깥에 특이하고 귀한 장난감 수레를 가져다 놓았으니 가져가라”고 말했다. 여러 아들이 그 말에 집 밖으로 나와 불을 피했다. 이 이야기는 법화경에 나온 ‘화택삼거유’ 설화다. 불타는 집은 번뇌로 가득한 사바세계를 뜻하고, 어르신의 말은 부처의 가르침, 장난치며 노는 아들은 중생을 의미한다. 부처는 중생을 구하려는 뜻을 품고, 장난감 수레라는 인기 요소로 중생의 변화를 끌어낸다는 이야기다. 엉뚱하게 < 사바하 >( 장재현 , 2018)를 보며 이 설화가 생각났다. <사바하>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는데 이걸 관객이 끝까지 듣게 하려 ‘관객이 좋아할’ 장르, 즉 미스터리 스릴러를 경유한 듯해서다. 다만 화택 설화의 ‘장난감 수레 지침’은 간단하고 명료한데 <사바하>의 장르 관습은 복잡하게 엉켜 있다. 영화 초반부, 세 토막의 이야기가 나온다. 1) 1999년 한 시골 마을에 쌍둥이 자매가 태어난다. 이 자매는 평범한 금화( 이재인 )와 사람의 형상을 갖추지 못해 짐승처럼 마구간에서 자라게 된 ‘그것’이다. 2) 그로부터 16년 뒤 박웅재( 이정재 ) 목사는 신흥 종교집단 사슴동산을 조사한다. 3) 같은 시간 강원도 영월에선 여중생 살인 사건이 나고, 정비공 정나한( 박정민 )은 이 사건의 용의자를 찾아가 자살을 종용한다. 박 목사는 관객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박목사의 집요한 추적으로 1번과 3번의 이야기는 연결된다. 그 가운데 “진짜 미륵”이라 불리는 김제석이 등장한다. 이제 핵심은 김제석과 정나한, 그리고 ‘그것’의 관계다. 세 인물에 관한 비밀은 차근차근 밝혀진다. 1899년에 태어나 불사의 몸이 된 김제석이 자신을 없앨 존재가 1999년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겁이 난 그는 자신을 수호할 사천왕을 만들고 그들에게 1999년에 태어날 여아(女兒)들을 죽여 그 예언을 막으려 한다. 마치 헤롯왕이 예수 탄생을 막으려 당시 태어난 수많은 아이를 죽인 것처럼. 사건의 원형은 고전을 빼닮았다. 이 과정에서 <사바하>는 스릴러를 경유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반전. 김제석은 인자하게 나이든 남성이 아니라, 젊고 단단한 육체를 지닌 채 늙지 않는 존재(배우 유지태가 연기했다)라는 사실이다. 회심의 일격을 가하는 듯한 반전이 나올 때, 놀라움 보다는 아쉬움이 앞섰다. 이 시대에 귀한 고전적 서사를, 흔해 빠진 유행 장르로 포장한 것 같아서다. 이게 장르적 반전이라면, 서사적 반전은 김제석의 흉포함과 ‘그것’의 선함이다. 이 영화는 중반부까지 의도적으로 ‘그것’은 불길하게, 김제석은 “진짜 미륵”으로 그린다. ‘그것’이 갇혀 사는 곳엔 뱀이 도사리고, 김제석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것 같은 문어스님 조차 “그는 진짜”라고 말한다. 하지만 곧 선악은 뒤바뀐다. 김제석은 사실 자기가 죽고 싶지 않아 소년들에게 대신 어린 소녀를 죽이게 시킨 자였음이 밝혀지면서다. 정나한은 ‘그것’을 죽이러 갔다가 “너희가 아비라 부르는 그 자가 뱀”이라는 ‘그것’의 말에 김제석을 의심하게 되고, 이를 눈치 챈 김제석이 나한에게 엽총을 쏜다. 순간 자신이 죽인 소녀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잠 못들던 나한을 위로해준 자장가가 떠오른다. 그것은 모성의 원초적 형상이다. <사바하>는 거짓되고 비열한 아버지와 그로인해 고통 받는 아들을 지키는 어머니의 이야기로 보이는 까닭이다. 이런 맥락에서 류진희 문화연구자는 <사바하>를 “식민지 남성성과 여아 살해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한다. 1899년 태어난 김제석을 식민지 남성성의 상징으로, 또 ‘그것’은 “군사주의적 유신(維新)과 개발주의에 근간을 둔 근대성의 유산으로 없어져야 했던 존재”로 읽는다. <사바하>는 결국 부친 살해의 서사로 나아간다. 사실을 깨달은 정나한은 자신의 온 인생을 갉아먹던 김제석을 제 손으로 죽인다. “넌 그냥 살고 싶은 포식자야. (중략) 네 목이 백 개라도 부족하다.” 이렇게 울부짖으며. 정나한에게 “내가 너희의 등불”이라고 했던 김제석은 이제 아들에게 “포식자”로 불린다. 이렇듯 <사바하>의 무늬는 미스터리 스릴러고, 그 내부는 불교적 묘사와 기독교적 은유를 채워 넣었지만 이야기엔 잔혹한 아비의 민낯이 담겨 있다. 그로 인해 희생된 젊은 세대, 특히 여성 아동들에 대한 애도도 잊지 않는다. 다시 장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사바하>는 왜 영화적 반전이 필요했을까. 이미 이렇게나 서사적 반전이 이미 충분한데 말이다. ‘알고 보니 포식자’인 김제석이 젊은 남성이든 나이든 남성이든 달라지는 건 없다. 결국 반전 요소는 사족이 된 채 영화는 그릇된 집착과 욕심으로 가득 찬 남성-아버지를 향한 견제의 메시지를 단호하게 던진다. 돌아보면 장재현 감독은 구마 의식 과정의 탁월한 묘사만으로 장편으로 완성시킨 < 검은 사제들 >(2015)에서도 여고생 영신의 희생을 잊지 않고 담아낸 이다. 작고 어린 자들을 품고 기억하려는 따뜻한 주제 의식과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미스터리 스릴러의 재미. 장 감독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잘 하려 할까, 혹은 하나만 잘하는 길을 갈까. 선택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