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오리 바람
- 감독
- 장건재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서준영, 이민지, 권혁풍, 한나, 최효상, 최현숙, 박문아, 백성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007년 10월은 첫 장편영화 < 회오리바람 >을 준비하고 있었다. 운 좋게도 영화진흥위원회, 지역 영상위원회 등에서 제작지원을 받았고 그 돈을 밑천 삼아 항해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제작지원은 너무 많이 떨어져서, 항상 얼마라도 받을 수 있을까 포기하는 심정으로 준비를 했던 것 같다. (맞다. 그런 운은 자주 따라주지 않는다. <잠 못 드는 밤>은 어디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해 생활비를 털어 만든, 내 영화 중 가장 가난한 작업이었다) 돈 백이라도 절실히 필요할 땐 기회가 오지 않더니… 그땐 제법 운이 따라주었다. < 회오리바람 >은 지나온 나의 십 대를 반추하며 쓴 시나리오라 대중적인 가능성보다는 온전한 나만의 이야기로 완성하고 싶었다. 당시엔 장편영화로 데뷔한다는 거창함보다는 학교를 벗어나 작업하는 첫 영화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작업 과정은 학생으로서 영화를 만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패스트푸드 가게의 한가한 자리를 차지하고 하루 종일 스태프 회의를 하거나 배우들과 좁은 자취방에서 다리를 오므리고 리허설을 했다. 함께 한 동료들 누구도 주도적으로 장편영화를 이끈 경험이 없었다. 반백수 상태로 서른을 넘기고 있었지만 뭐라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순간순간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대학원 졸업영화를 만들면서 생긴 빚을 막 청산한 때였고 공부를 길게 하면서 생긴 학자금 대출도 아직 남아 있었다. < 회오리바람 >은 그로부터 3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 개봉했다. 개봉하던 날 밤 무대 인사를 위해 배우들과 대기실에 앉아 농담을 주고받으며 흥분된 감정을 추스르던 때가 떠오른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불이 켜지고, 배우들과 무대에 올랐을 때 객석엔 오직 한 명의 관객이 있었다. 두터운 목도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이제 막 극장을 나가려던 그를 붙잡고 한참을 신나게 떠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꽉 찬 객석을 상대하는 사람들처럼 충만한 마음으로 관객과의 대화에 임했다. 한 명의 관객을 위해 공연을 올렸다는 어느 연극배우의 쓸쓸한 일화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지난하게 작업했던 영화를 개봉관에 선보인다는 사실이 더 기뻤던 것 같다. (3년 뒤 여름, < 잠 못 드는 밤 > 개봉 무대인사 땐 아예 관객이 없어 행사 자체가 취소된 적도 있다. 주연배우 김수현 선배와 마케팅 팀장님과 그냥 돌아서기가 헛헛해 아리랑 고갯길을 걸어 내려와 돈암 시장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오이채 잔뜩 올린 시원섭섭했던 콩국수의 기억…) 그래서인지 영화를 만들 때마다 어떻게 시장에서 비용을 회수(해 다음 작업에 투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흘러왔다. 나는 그저 쉬지 않고 작업한다는 마음뿐이었고 그저 실낱같은 행운이 조금씩 따라주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3년에 한 편씩,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 한여름의 판타지아 >를 마치고 나서는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2년 정도 숨을 고르면서 지냈다. 다시 원점에 선 느낌이다. 스물두 살 때 뵌 적이 있는 한 중견 감독께서는, 오랜 시간 영화를 만들어 와서 이제 좀 수월해질 법도 한데 만들 때마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야, 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당시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거기에 내 고민을 조금 덧대어 보면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할 것 같은 것’ 사이에서 종종 길을 헤맨다. 그럴 때면 매번 영화 만들기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내게 ‘하고 싶은 것’은 작업자로서의 영화 만들기다. 단 한 점의 시나 그림 또는 음악으로 완성되는 예술가가 없듯이 작업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란 반복되는 일상처럼 매일 비슷한 노동을 이어가며 조금씩 완성에 다다르는 일이다. 거기에 낭만이 깃들 자리는 없다.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사람은 없지만 오로지 본인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 그건 엔터테인먼트 산업 종사자로서의 ‘영화감독’과는 조금 다르다. 직업인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는 ‘해야만 할 것 같은 것’이다. 거대 투자 자본의 욕망과 창작자의 열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대중을 상대하는 일로서의 영화 만들기. 말하자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영화. 이야기를 찾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큰 자본이 필요한 지점과 만나게 되고 어느 경계를 넘어서면 어느새 영화는 자본의 편에 서 있다. 매번 그 언저리에서 돌아 나와 하던 대로 영화를 만들었던 것 같다. 대기업 회사원과 골목길 자영업자의 차이 같은 거라고 봐도 될까. 그래서 내 작업을 독립영화라 부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자본과 예술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는 감독들이 있다. 그리고 대개는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 요즘 준비하는 영화는 그래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아직 시나리오는 마무리되지 않았고 가능성은 여러 갈래로 열려 있다. 많은 사람들과 회의도 하고 공동작업도 한다. 명성 있는 배우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함께 작업하는 걸 상상해보기도 한다. 수십억 단위의 예산도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다 문득 어? 이게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걸까, 반문한다. 나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고 엄살을 부리는 건 아니다. 모든 영화감독들의 숙명이니까. 그저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라고 순진한 표정을 짓기엔 자본의 힘은 무지막지하고 극장 생태계는 거의 파괴 직전이다. 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위험한 길이라도 감수할 생각이다. 그리고 언제든 돌아 나와 내 방식대로 새길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완전히 새롭게 해보고 싶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
일본 나라현 고조시. 장건재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 한여름의 판타지아 >의 배경이 된 공간이다. 장건재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왔다. < 회오리바람 >은 자신의 10대 시절의 방황과 사랑을 담았고, < 잠 못 드는 밤 >은 아이를 낳기 직전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조곤조곤하게 자신의 지나간 삶을 반추하고, 미래를 근심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영화를 만들어왔다. < 한여름의 판타지아 >도 비슷하게 시작한다. 단 배경이 낯선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다르다. 흑백으로 진행되는 1부는 고조에서 영화를 찍기로 한 감독의 이야기이다. 감독 태훈( 임형국 )은 통역 미정( 김새벽 )과 함께 고조를 돌아보며 그곳의 사람들을 만난다. 카페와 거리 그리고 오래된 집에서 만난 사람들. 여기에는 두 명의 현지인 가이드도 포함된다. 젊은 공무원 유스케(이와세 료)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이든 어른들이다. 그들을 통해 고조의 풍경뿐만 아니라 고조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태훈은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치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1부의 말미. 학교에서 벽에 걸린 사진을 통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본다. 가이드는 사진 속의 어린아이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장면은 감독의 꿈으로 이어진다. 변화 없는 적막한 공간을 오랜 시간 지켜왔을 사람들의 과거 표정이 작은 사진을 통해 표현되는 장면은 2부에 펼쳐질 로맨스를 암시하는 듯하다. 칼라로 이어지는 2부는 여행지에서 있을 법한 로맨스이다. 한국에서 여행 온 혜정( 김새벽 )이 고조에서 감 농사를 짓는 청년 유스케(이와세 료)를 만난다. 둘은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미묘한 감정이 형성된다. 설레고 흥분되는 하룻밤의 꿈 같은 이야기. 2부의 로맨스는 현재의 이야기이지만, 1부에서 드러난 이야기들과 기묘하게 겹쳐지면서 마치 두 개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의도된 착시 효과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공존하게 만들고, 현실과 환상을 겹쳐지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는 장건재 감독의 장기이다. 이런 장치를 통해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냈다. 김새벽과 이와세 료가 1인 2역을 맡으면서 그런 효과는 더욱 증폭되고, 한여름 시골의 나른한 공기 속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유스케는 혜정에게 남자친구가 되어달라고 수작을 걸면서 불꽃 축제에 가자고 꼬드기지만 혜정의 정중한 거절로 함께하지 못한다.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불꽃 축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유스케가 본 불꽃을 혜정도 볼 수 있다. 둘은 따로 있지만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한여름의 판타지는 완성된다. 결국 1부의 감독 태훈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작은 사진 속 아이의 표정을 통해 고조에서의 로맨스를 완성해 낸 것이다. < 한여름의 판타지아 >는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함께 그 결과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창작의 고단함과 함께 요구되는 열정을 보여주는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뭔지 모를 나른함 속에 찰나의 환희를 맛보는 기쁨을 전달해 준다. 감독은 그 찰나를 담아내기 위해 절치부심했을 것이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판타지이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의 판타지는 현실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시골 마을의 조용한 풍경과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표정.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기쁨과 아쉬움의 순간이 오래도록 남는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2002년 < 하드보일드 초콜릿스타일 >과 < 진혼곡 >을 보고 두 작품을 연출한 감독은 이후 장르영화를 하겠구나, 생각했다. 뒤늦게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에서 발견한 ‘창준’역의 장건재 감독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장건재 감독을 다시 만난 건 2008년. 안부가 궁금하던 사이 그가 작업한 단편 < 꿈속에서 > 프리뷰를 받았다. 영화를 보며 나의 기억 속에 막연한 선입견으로 배치되어있던 장건재 감독 작품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감독의 자전적 작품인 < 꿈속에서 >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그린 영화로 장건재 감독의 정서를 엿보게 한다. 영화는 떠난 친구를 서정적 흐름으로 기리며 애잔하게 애도한다. 그 후 연출한 장편 < 회오리바람 >은 <꿈속에서>에서 보여준 서정성과 섬세함을 영화적으로 숙고한 작품이다. 장고의 시간 동안 제작된 <회오리바람>은 이전 필모그래피가 충실히 쌓인 작품으로 장건재 감독의 영화적 언어가 관객들과 공감을 일으킨 영화였다. 그리고 < 잠 못 드는 밤 >. 일상을 포착해 내는 감독의 관찰력과 그것을 영화로 옮기기까지 동반되었을 진중한 고민을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주인공 주희와 현수는 결혼 2년을 맞은 30대 부부. 부유하진 않지만 둘만의 소소하고 소박한 일상을 행복으로 사는 이들이다. 늦은 밤 산책을 하고 둘만의 기념일도 챙기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다. 그러던 이들의 대화에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등장한다. 둘만으로 부족함 없던 이들의 온전한 세계는 ‘출산과 양육’이라는 현실적 고민으로 미세하게 흔들린다. 결코 가볍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이 문제는 둘만의 일상이 사라지게 할 것이며 이를 감당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하도록 할 것이다. 이로 인한 불안감은 영화에 묘한 긴장감을 일으키며 부부의 꿈으로, 상상으로 재현된다. 이 작품 또한 감독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영화이다. < 잠 못 드는 밤 >의 프로듀서와 감독은 실제 부부이며 이들의 협업은 이번 영화의 진정성을 높이고 있다. 더불어 섬세한 연기가 돋보이는 김수현, 김주령 배우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스탭이다. 감독은 배우들과의 오랜 대화를 통해 캐릭터를 발전시켰고 그 과정은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연기로 영화를 완성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진 절제된 구도와 정제된 사운드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향해 군더더기 없이 배치되어 집중하도록 한다. 65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이 흐르고 엔딩이 올라갈 때, 이후 ‘주희’와 ‘현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느리게 걷고 천천히 말하는 가운데서도 일련의 수순으로 찾아온 ‘양육과 출산’의 고민.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디딜 그들의 성장과 변화할 세계가 궁금해진다. 관객은 ‘보통의 일상’이 감독 안에서 치열하게 다듬어져 영화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통해 감독의 세계관과 만나게 된다. 장건재 감독의 초기작부터 봐온 관객으로서 이번 < 잠 못 드는 밤 >을 관람하고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한동안 감독 안에서 곱씹어질 수 많은 ‘보통의 일상’들이 진정성 있게 영화적으로 확대되길, 다음 작품에서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