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군 - 해방대서북
- 감독
- 위임옥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효화, 부영, 주결, 두우로, 염우생
윤대원 감독의 < 매미 >는 하나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이 껍질을 벗고 나오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어느 여름밤 서울 남산 소월길에서 성매매를 하는 트랜스젠더 창현의 이야기를 변신의 모티브와 SF 영화의 관습을 활용해서 그린다. 매미가 유충에서 성충으로 거듭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탈피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창현은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타고난 성을 완벽하게 바꿀 수 있기를 꿈꾼다. 또한, 외계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타자와의 만남을 다룬 SF 영화처럼 이 작품은 창현의 몸으로 타자가 침입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충격적인 변화에 대해 다룬다. 창현의 몸은 창현의 것이면서도 그의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창현과 어떤 남성을 주요 등장인물로 활용하는 가운데 둘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대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남성은 유사-탐정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흡사 범죄 현장에서 증발해버린 사건의 당사자를 쫓는 탐정처럼 서울 남산의 순환도로를 배회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남성의 시선에 동기화된 카메라는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가로수를 위장막 삼아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편, 창현은 도시적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모험과 위험을 맞닥뜨리는 여느 멜로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닮았다. 그는 자신처럼 거리에 나와 호객행위를 하는 트랜스젠더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거나 그들 중 누군가와 날이 선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창현은 남성을 만나 모종의 거래를 시도한다. 그들의 은밀한 거래는 대화, 언쟁, 성교, 몸싸움으로 이어진다. 남성은 창현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여기면서 그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고 한다. 창현은 남성을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그가 자신의 눈앞에 사라지기를 바란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적 담화를 구축하기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에 대한 해독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관습적으로 접근했을 때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이원적 세계의 견고함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젠더적 이분법이 하나의 규범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성적 정체성은 주체의 자율적인 선택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어떤 인칭, 어떤 주체, 어떤 기관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하나의 몸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변화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언뜻 보면, <매미> 또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명확한 이원적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갈등을 다룬 도식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영화 또한 기존의 여러 내러티브 중심적인 영화들이 주인공과 그것에 대립하는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서서히 봉합해나가는 그런 관습을 부분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작품에서 캐릭터는 특이하기보다는 전형적이고, 갈등은 복잡하기보다는 단순하고, 결말은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기존의 영화적 관습에 기대어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 작품은 그저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서 소외된 소수자의 정체성을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지를 의미화하거나 그것을 서사에 종속시키는 방식 대신 이미지를 하나의 식별 불가능한 형상으로 다룸으로써 기존의 의미 체계를 무너뜨린다. 이를 위해 이 작품은 여러 시각적 이미지가 한 화면 속에서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장면을 통해서 의미의 사슬에 포획되지 않는 형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적 묘사가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영화는 남산 순환도로와 그곳을 통과하고 있는 자동차, 그리고 자동차의 동선과 겹치는 남성의 시선을 수평축으로 설정한다. 이 가상의 수평선들은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수와 그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통해 형성된 수직축과 겹쳐서 가상의 격자를 만든다. 그것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려는 남성의 욕망, 젠더적 구분을 초월하려는 트랜스젠더의 욕망, 그리고 음성적인 거래를 통해 법의 경계를 가로지르려는 소수자의 욕망이 교차한 결과이다. 이 영화에서 트랜스젠더는 그 단어를 구성하는 접두사 ‘트랜스(trans)’가 의미하는 초월 내지는 횡단을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의미 체계에 포착되지 않는 모호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은 외형적으로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대상이다. 어두운 밤에 가로수 뒤편에 몸을 은폐하고 있기에 그 형태 자체가 흐릿하거나 어둡게 나타나는 비가시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외견상 여성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아직 신체적으로 여성의 생식 기관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남성도 그렇다고 여성도 아닌 중간자에 가까우며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사회적 체계 속에서 자리를 잃은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둠이라는 비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에 등장하는 하나의 몸으로 존재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하나의 몸체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지배적인 힘이 아니라 그 몸체가 어떤 관계 속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이다. 모든 대상의 몸은 어느 시각, 어느 계절, 어느 분위기, 어느 공기, 어느 삶과 분리되지 않는 어느 배치물 가운데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한다. 마치 <매미>의 창현이 어느 여름밤 남산 소월길에서 만난 한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몸과 그것에 깃든 정체성을 탈바꿈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창현의 몸은 저항의 장소, 파괴의 장소, 창조의 장소이다. 만약 창현을 신화적 영웅의 비범함을 가진 존재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인간 세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어떤 규범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이전에 그런 규범을 무효화시키고 더 나아가 스스로 새로운 질서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미>는 식별 불가능한 이미지와 그것의 변형 가능성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서 영화라는 매체가 이미지의 형상적 변화를 통해서 세속적인 대상들 가운데서 숭고한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작품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갑자기 왜 난데없이 그 자리에 < 우상의 눈물 >이 나타났는지는 알겠다. 단지 임권택 의 목록만을 따라온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그저 난처하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당신의 난처함을 알고 비통한 웃음을 짓게 된다. 성급하고 딱딱한 도식화. 직선적인 설명. 하지만 임권택의 영화들은 종종 우리들을 한국영화의 상황 앞에 데려다 놓은 다음 우울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시스템의 압력과 경제적인 결정과 검열을 경유한 배제와 제거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는 목록들의 위태로운 질서가 숨어있다. 임권택에게 상황은 (...)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금지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대신 (...)을 해야 한다, 라는 요구의 명령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화라는 시스템을 사이에 두고 다양한 관계들이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일한 시스템.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존재할 수 없는 시스템. 그래서 나는 그것을 임권택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국영화에는 그런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토대 위에서 각자의 작동방식을 발명한 사람들이 있다. 간명한 비교의 예. 김기영은 자기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유현목은 그것을 만들지 못했다. 지금, 적어도 지금 한국영화에서 홍상수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시스템을 만들었다. 내게 이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할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빨리 원래의 시작에로 되돌아가자. 만다라(1981) 임권택 은 그때 < 깃발 없는 기수 >와 < 짝코 >을 완성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 만다라 >의 촬영을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세상이 그의 영화를 아직 눈여겨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임권택의 영화는 충만하고 있었다. 그건 < 우상의 눈물 > ‘다음’을 보아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영화 다음은 일정에 쫓기면서 (심지어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와 ‘가께모찌’로) 찍은 < 안개마을 >이다. <우상의 눈물>은 임권택이 시나리오 송길한 , 촬영 정일성 과 하나의 팀을 이룬 두 번째 영화이다. 그들은 이미 손발을 맞춰 본 다음이다. 그리고 그의 조감독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곽지균이었다. 하지만 <우상의 눈물>에는 임권택과 송길한, 그리고 정일성이 함께 있을 때만 만들 수 있었던 어떤 마법도 없다. 나는 여기서 없는 것을 채우거나 혹은 그것이 왜 없는지를 찾는 대신 이의신청 방식을 취하려고 한다. 하나의 불가능. 그런데 왜 그것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일까. <우상의 눈물>은 임권택의 영화에서 어떤 불가능을 증언하는 영화이다. 물론 그것을 끌어내기 위하여 과도하게 전기적 사실에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문제에 다가가면 모든 담론을 망칠 것이다. 그 대신 여기서는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표현 불가능성의 어떤 영역이 때로 경험 불가능성과 연결 지어진 것은 아닐까, 라는 순간과 마주할 때의 당혹스러운 시간이 있다. 나는 그 시간과 마주하는 것을 오랫동안 미루어왔다. 일종의 블랙홀.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고유한 자리를 설정할 때가 왔다고 용기를 내보고 싶다. 왜냐하면 명백히 임권택은 그 불가능성에 대해서 자기 영화를 통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한국영화사는 1974년 ‘이후’를 영상시대 동인들의 시대라고 문서화한다. 물론 < 별들의 고향 >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 바보들의 행진 >과 < 영자의 전성시대 >가 그 뒤를 이었다. 그 영화들이 비평 담론을 만들어냈으며 이장호 , 하길종 , 김호선 , 홍파 가 충무로에 새로운 물결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에서 벌어진 일이 단지 그 하나뿐일 리가 없다. 나는 지금 그 하나 곁에 있었던 다른 하나,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다른 하나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긴급조치 9호 발령 당시 신문 잠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1974년 1월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이 통과되자마자 5월에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하였다. 그 이듬해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해체하고 공연윤리위원회를 설립하여 그 악명 높은 이중검열을 시작하였다. 단지 검열이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 제작사들이 통합되었고 운 나쁘게도 바로 그때 안방을 점령하기 시작한 텔레비전은 한국영화의 가장 힘겨운 시기와 맞물렸다. 텔레비전은 값싼 시청료로 매일 저녁 제공하는 올 스타 드라마와 막 시작한 프로 야구로 대중을 매혹시켰다. 여기에 시장의 반지성주의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서방세계에서 누벨바그가 시작되었을 때 사실상 한국 극장은 그 흐름의 외곽으로 이탈한 다음 완전히 두절되었다. < 네 멋대로 해라 >는 보았지만 < 히로시마 내 사랑 >은 볼 수 없었다. < 카비리아의 밤 >은 펠리니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 태양은 외로워 >는 안토니오니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 소매치기 >는 브레송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서울에서 베리만과 파졸리니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영화에 관한 담론들은 부정확한 정보에 의지하고 있었고 자신들이 개념의 대상에 관한 근거로 다루는 영화를 볼 수 없었으며 그러면서 점점 관념화되어갔다. 더듬거리는 개념의 손짓, 진부한 사유를 때려 부술 수 있는 기회의 상실. 무엇보다 영화는 사회적으로 게토가 되어갔다. 경찰국가와 다름없는 상황. 창백해진 대중, 문화는 검열관의 가위 아래 무자비하게 잘려나가고 있었다. 어른들은 극장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이때 극장을 메운 것은 경제활동으로부터 자유롭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거의 경제적인 자율적 결정에 사실상 여유가 없었던 도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들과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여기서 1970년대 후반의 영화 관객에 관한 해설로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논점이 아니다. 거의 교집합이 없는 두 개의 관객 집단 중에서 내가 지금 건드리려는 것은 교복이라는 기호를 입은 중고등학생들이다. 이들을 미성년자라는 말로 다시 번역하는 것은 1970년대 남한 자본주의를 잘못 설명하는 것이다. 그때의 서울, 구로공단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개미소굴과도 같은 거대한 노동현장은 값싼 노동인력을 미성년자들로 채워나갔다. 그리고 노동법이 거의 작동하지 않은 그 시간에 이 무자비한 착취는 근대라는 과정 속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미성년자는 1970년대 남한에서 노동인구와 학생으로 그들의 계급적 기반에 따라 분화되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교복은 그때 하나의 기호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감시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호받았다. 물론 감시와 보호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때 학교는 사회로부터 그들을 방어하는 동시에 관찰하는 하나의 칸막이가 되었다. 교복을 입은 그들은 그 안에서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지식의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여기서도 무자비한 서열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일정한 제도 기간이 끝나면 시험의 당락 여부와 관계없이 교복이라는 기호를 박탈당하고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핵심은 그때 학교 안과 바깥을 완전히 분리시킨 다음 ‘하이틴’ 혹은 ‘틴에이저’들의 독립된 세계인 것처럼 학교를 낭만적 유토피아로 각색해냈다. 물론 그것은 자기 최면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기제가 작동할 것이다. 그 깊은 밑바닥에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 중심 산업에로의 진입을 장기적으로 준비시키면서 제도의 학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자발적 복종의 규율이 반복적으로 요구되었다. 여고졸업반 (김응천, 1975) 열거한 항목들을 정식화시킬 차례이다. 어른이 철수한 극장은 새로운 관객을 찾고 있었다. 1975년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가던 8월 23일 토요일 종로 낙원상가에 자리한 허리우드극장에서 < 여고졸업반 >이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뜻밖의 세 가지 효과를 거두었다. 첫 번째 효과. 중고등학생들은 경제적인 결정 외부에 놓여있지만 그들의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은 영화를 선택하기에 충분한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여고졸업반>은 이 세대가 한국영화 수입구조에 진입하기 시작한 첫 번째 영화로 기록해야 한다. 나는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반대로 이 세대가 21세기 한국영화에서 완전히 빠져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상상해보라. 그때는 어떤 배급업자도 웃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효과, 교복을 입은 관객을 목표로 한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제작 단계에서부터 제작자들과 감독을 예민하게 만든 검열로부터 마치 안전지대에 들어섰다는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중고등학생 관객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목표로 만든 영화에서 폭력과 섹스, 혹은 사회에 대한 문제를 확인시켜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단지 그들은 모르는 척할 뿐이다. 좀 기괴한 표현이지만 그들은 착한 관객의 역할을 했다. 이 영화들은 단체관람이 아니라 자발적인 관람을 통해서 흥행에 성공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중고등학생 관객들이 1970년대 후반에 일시적으로 왜 이런 집단 심리적 동의를 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사후적으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들은 근본적으로 낭만적 유토피아의 꿈을 꾸는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장르이다. <여고졸업반>의 성공 이후 < 진짜 진짜 미안해 > < 진짜 진짜 좋아해 > < 진짜 진짜 잊지마 > 삼부작, ‘얄개’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세 번째 효과가 가장 이상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하이틴’ 영화들은 1979년 10월 26일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 둘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박정희가 사라지면서 이 장르의 효용성이 다하기라도 한 듯 사라졌다.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이 장르의 대표적인 세 감독 김응천 , 문여송 , 석래명 은 거의 동시에 여기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그들의 흥행의 마술도 사라졌다) 그래서 마치 여기에 전도된 사회의 낭만적 우울이 잘못된 충만함으로 가득한 채 투사되었다가 그 매듭이 풀린 순간 일시적으로 와해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일시적인 마법의 매듭. 그런 다음 풀려나기의 반복. 과도할 정도로 낭만적인 이 세계는 단지 사회로부터 격리된 것일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들의 생활세계와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영화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동요의 호소는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물론 그것은 그들도 가져본 적이 없(을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토피아적인 세계이다. 「우상의 눈물」 그런 의미에서 < 우상의 눈물 >은 약간 시대착오라고 여겨질 것처럼 뒤늦게 만들어졌다. 물론 그때에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원작소설인 전상국 작가의 <우상의 눈물>은 계간 세계의 문학 1980년 봄 호에 게재되었고 영화가 이듬해에 만들어졌으니 단지 원작 소설과 영화의 관계로만 보면 발표하자마자 만들어진 셈이지만 이미 주변에서는 아무도 ‘하이틴’ 장르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 <우상의 눈물>이 문단의 주목을 모으긴 했지만 영화사가 관심을 가질만한 베스트셀러는 아니었고 (게다가 단편소설이다) 임권택 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상국 작가는 그 전해에 발표한 「아베의 가족」이 훨씬 흥미롭게 여겨졌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아베의 가족」은 한국전쟁 중에 낳은 벙어리인 아베를 버리고 이민을 떠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결국 <우상의 눈물>을 만들었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하이틴’ 영화는 이 영화 한 편뿐이다. 만일 주인공의 나이로만 셈을 하면 < 낙동강은 흐르는가 > 한 편이 더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두 영화의 주연은 모두 진유영 이다) 하지만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학도 의용군에 관한 전쟁영화이다. “원작이 좋았지요. 한 학급에 이야기를 몰아넣고 어떤 사회에서나 벌어질 법한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게다가 원작자가 고등학교 선생이었기 때문에 믿고 갈 수 있었던 것도 큰 몫을 차지했지요” 시나리오 작가인 송길한 도 다른 자리에서 거의 입을 맞춘 것처럼 같은 대답을 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촬영을 한 정일성 도 거의 이견이 없었다. “이건 권력에 관한 이야기이지 고등학생들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한번 해볼 만 하다는 생각을 한 거지” 임권택, 정일성, 송길한 우선 이 세 사람의 한계를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누구도 1970년대 고등학교를 알 수가 없었다. 이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정일성 은 192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다음 거기서 자랐다. 그는 해방 전후에도 거기 남아있었다. 거기서 도쿄 제2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1951년에 서울에 와서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정일성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임권택 은 해방 직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부모님의 빨치산 입산으로 고통받는 나날이 되었다. 그가 알고 있는 고등학교는 어른들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통제 불가능 상태가 되어버린 집단이었다. 그들은 빨갱이 부모를 둔 임권택을 불러내 뒷산에 데려가 린치를 가했고 지금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백색테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어른들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무덤 속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삶. 임권택은 어느 날 밤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고등학교에 관한 경험은 그날 밤 거기서 끝났다. 가장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송길한 은 1940년생이다. 그의 고등학교 경험은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직후였다. 게다가 그가 다닌 학교는 전라북도에서 우등생들만이 입학한 전주고등학교였다. “그저 공부만 한 거예요. 그래서 얼른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가는 것만이 효도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지요. 집안 어른들이 모두 그렇게 말씀하셨고, 게다가 고향에서만 자랐으니 세상을 모르잖아요. 전쟁이 끝나고 거기 뭐가 남은 게 있었겠어요” 그런 다음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서 1960년 4월의 봄을 맞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고등학교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는 단지 학교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시대의 차이만큼 벌어져 있다. “사실 < 우상의 눈물 >을 찍을 때 고등학교 입학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으니까요. 왜냐하면 내가 관심이 없으니까, 그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니까, 그냥 신문에 입학시험을 본다,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는 거죠. 그때는 내가 결혼을 하기 전이니 더 모르는 거죠. 그래서 전상국 작가의 경험만 믿고 간 거죠” 전상국 작가가 교사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며 물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변수가 있다. 춘천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라고 내게 반문할 것이다. 그때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행정적으로 매우 괴상하게도 전국에서 동시에 적용된 것이 아니라 서울과 일부 도시에서만 먼저 적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전학을 둘러싼 매우 복잡한 조건이 따라붙었다.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단지 지역의 차이가 아니라 제도의 행정적 차이 때문에 서울과 춘천의 고등학교는 완전히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는 학교가 되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려도 할 수 없다. 소설 <우상의 눈물>을 읽고 있으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야기의 일부를 (서울에서 같은 시기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임권택 혹은 송길한이 믿을만하다고 말한 전상국 작가의 경험은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본의 아니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 우상의 눈물 >은 괴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되었다. 그들이 < 여고졸업반 > 혹은 < 진짜 진짜 미안해 >로 설명되는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유토피아적 낭만주의의 허구를 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고등학교라고 부르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임권택 , 송길한 , 정일성 은 처음부터 그 세계로 들어설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들 방식의 또 다른 완전히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우상의 눈물>이 사실주의 미학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고등학생들의 일상생활 속에 들어가 그 안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목표를 세운 영화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약간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왜 교복의 기호가 필요해졌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어른의 세계에서 훨씬 설득력 있게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와야만 이 이야기가 성립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야기의 다른 차원에로의 이동이나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교정 불가능성이 버티고 있다. 먼저 일차적인 대답이 있다. (피할 수 없는) 좀 더 현실적인 근거. 세경흥업 영화사가 이미 성공을 거둔 ‘하이틴’ 장르 영화를 여기서 복습하고 싶었다면 임권택에게 이 영화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임권택의 쓸모를 잘 알고 있었다. 충무로는 감독들을 분류하였고 그런 다음 그들을 관리하면서 올바르게 배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임권택은 로맨스, 혹은 코미디에서 성공한 적이 없는 연출자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세경흥업은 여기서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했다. 다른 무언가? 영화사는 <우상의 눈물>이 ‘하이틴’ 영화가 아니라 ‘문예’ 영화라고 (아마도) 생각했다. 그들은 원작(의 흔적)을 남겨놓아야만 했다. 흔적으로서의 기호. 하지만 여기서 임권택과 송길한 자신이 이 이야기에 매혹되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들은 < 만다라 >를 만들고 나서도 이 영화를 찍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다라>는 임권택이 평생에 단 한 번 영화사에 “이 소설은 내가 꼭 좀 만들어야겠다”고 말한 유일한 영화이다. 그들은 <만다라>를 찍은 다음 함께 <우상의 눈물>을 찍겠다고 결정했다. 거기서 무엇을 찍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므로 두 번째 대답이 중요해진다. 이야기의 개요. 먼저 소설의 판본을 따르겠다. 나는 차이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세부까지 건드릴 것이다. 이야기의 화자(話者)인 학생 유대는 같은 반의 재수파라고 불리는 패들에게 끌려가 담뱃불로 지지는 린치를 당한다. 단지 “메시껍게 군다”는 게 이유의 전부이다. 몇 차례 유급을 한 최기표가 이끄는 이 무리들은 반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새로 학년이 바뀌고 담임인 김 선생은 유대를 불러 최기표와 재수파 아이들의 정보를 얻으려 반장을 제안하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친구인 형우에게 떠넘긴다. 형우는 반장을 맡은 다음 “학급의 학내 등수를 올리기 위해 친구들을 도외주자”면서 우등생들을 불러 모아 최기표를 비롯한 열등생들에게 커닝 페이퍼를 건네주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시험 도중에 커닝 페이퍼를 감독으로 들어온 선생에게 고자질한 것은 최기표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어떤 개새끼야?”라고 소리마저 지른다. 그때 형우가 일어나 “제가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우등생들이 차례로 일어나 서로 자기가 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감독 선생은 “여러분의 우정에 감동을 받았다”면서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말한다. 세 개의 같지만 서로 다른 말. 순식간에 이 말의 네트워크를 따라 예상치 않게 작동하는 힘의 이동. 유대의 예상대로 형우는 최기표와 재수파 일당에게 불려가 린치를 당한다. 몹시 심하게 당해서 전치 2주의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다. 하지만 유대의 예상과 다른 것은 형우가 자신이 시비를 걸어 싸움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누가 린치를 가했는지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병문안을 간 유대에게 형우는 의미심장하게 이제 재수파는 끝났다고 알려준다. 학교로 돌아온 형우는 아이들 사이에서 영웅이 된다. 하지만 형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이들에게 최기표의 가난한 집안 사정을 낱낱이 말하면서도 이야기를 미화시켜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게 학교를 다니는지 몰랐고 그러니 우리가 반성의 의미로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고 웅변 한다. 최기표는 매일 초라해져갔고 형우의 말 대로 더 이상 그의 주변에서 부하 노릇을 하는 재수파는 남아있지 않았다. 담임선생은 이걸 방송국에 알리고 세간에는 유명한 인정 미담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최기표는 그 언젠가부터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그가 여동생에게 남기고 간 편지 맨 앞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첫 장면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이야기의 중심을 약간 애매하게 만들었다. 유대를 그냥 남겨놓긴 했지만 영화에는 화자가 없다. 이야기의 소개에는 그게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은 사악한 인물들의 관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최기표는 단지 폭력을 휘두르는 불량배일 뿐이다. 형우는 똑똑하지만 교활하고 집단의 심리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그는 자기를 희생양으로 삼아 어떻게 최기표와 재수파 아이들을 무너트려야 할 줄 잘 알고 있다. 그는 병상에 누워 지나치듯이 말하지만 최기표에게 일말의 연민도 없다. 유대는 비겁하게 자기에게 온 짐을 슬그머니 라이벌인 형우에게 떠넘긴 다음 야비한 자신의 태도를 숨기면서 그가 겪을 곤경을 구경할 참이었다. 유대가 화자로 설정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담임선생은 이들 사이의 힘의 관계를 잘 알고 있으며 그 둘을 이용하여 학급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력을 쌓을 궁리만 한다. 말하자면 마지막 순간에 가까워지면 우리는 최기표가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내 이름은 권달호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이야기의 외곽에 위치하다시피 한 담임선생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그를 주인공으로 삼을 생각은 없다. 반대로 유대는 성격을 잃은 다음 거의 이야기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담임선생인 김 선생에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권달호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름이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연상시키거나 아니면 이야기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권달호는 이 학교에 새로 부임했으며 전국에서 그가 담임을 한 반이 여러 차례 우수학급으로 선정되어 우수교사로 표창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3학년 8반을 우수학급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래서 학습 진도가 부진한 반 학생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숙식을 제공하면서 시험 준비를 시킨다. 권달호는 시간을 내서 가정방문을 하고 그들의 방과 후의 사연을 알고자 노력한다. 여기에는 어떤 나쁜 의도도 없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부당한 요구나 불미스러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권달호가 권위주의적이긴 하지만 그에겐 선한 의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 우상의 눈물 >이 계몽적이거나 따분한 유토피아 버전의 동화에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은 제도에 복종하는 권력의 위선적인 각색이 아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소설에서 다룬 교육 현장의 교사의 태도를 견디지 못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그들은 소설에 비친 거울을 마주 보지 못한다. 무언가 유보시켜야 할 현실.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완곡한 저항. 전상국 작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려낸 담임의 학급관리 기법. 더 엄밀하게 기법의 태도. 그들은 여기서 후퇴를 해야만 했다. 학급 안에서의 권력의 오작동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김 선생을 권달호의 자리까지 끌어올려야만 가까스로 이야기를 마주 볼 용기가 생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들도 이 이야기가 일종의 모델에 가까운 상징적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3학년 8반은 사실상 사회를 예습하는 일종의 통과제의에 가까운 수업 시간의 공간화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이때 권달호는 담임선생이라기보다는 스승의 모습에 더 가까워진다. 그건 무슨 차이가 있나요? 3학년 8반은 근대적인 교육 제도의 기구(의 일부)라기보다는 학급을 관리하는 주인의 권위와 의무에 의해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교실은 규율 공간의 규칙에 따라 표준화되고 평균화 되는 대신 권달호의 이름으로 새로운 규율이 정해지고 요구된다. 근대 제도로부터 유교적인 가치가 담임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장소로서의 교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교실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형식으로 권달호와 학생 사이의 거리를 다시 조정한다. 권달호는 자신의 역할을 교실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설에서 김 선생은 최기표의 집을 방문할 생각이 없다. 권달호는 힘겹게 달동네를 찾아간다. 김 선생은 자기 반 학생들의 성적에 별 관심이 없다. 권달호는 아무런 조건 없이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자기 집에서 합숙을 시켜가며 가르친다. 권달호는 종종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학생들을 관리한다. 이때 권달호의 말은 3학년 8반 교실에서 법이며 명령이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여기서 권력이 오작동을 일으킨다고 가정한다. 최기표 이 차이의 간극은 두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소설에서는 미숙하지만 이미 어른들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3학년 8반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여기서 담임선생은 이 규율 제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제도의 수행자들은 최기표를 교정하는 대신 최기표라는 폭력의 기호를 무효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끌고 나간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면서 은밀하게 공모하고 있는 김 선생이나 형우는 최기표가 교정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믿음도 없다. 그래서 최기표(와 그의 재수파)가 반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내는 두려움을 경유한 힘을 무효화시키는 전술을 사용한다. 유대는 형우에게 물어본다, “넌 지금 네가 기표를 구원했다고 보니? 기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네가 구원하고 있다고 말야” 그러자 형우가 대답한다. “그건 기표가 생각할 일이 아니다” 같은 말의 다른 말. 그건 대상이 생각할 일이 아니야. 소설에서 최기표의 대사는 커닝 페이퍼를 감독관 선생에게 이르는 말 이외에는 전혀 없다. 그는 시종일관 대상으로 머문다. 최기표를 목표로 하여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는 한 번도 주인의 자리에 오지 못한다. 힘의 네트워크 안에서 대상의 추락. 그것을 목표로 한 전술의 수행. 그래서 최기표가 반에서 빈칸이 되었을 때 누구도 일말의 연민도 느끼지 않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향한다. 이야기의 표면만을 보면 영화와 소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영화가 최기표를 교정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때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서 대상의 자리에 놓여있던 최기표에 대한 탐구로 옮겨간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준비가 되어있다. 소설에는 단지 없다기보다는 최기표의 일상생활 자체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래서 최기표가 방과 후에 무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종종 이야기의 진행과 별 상관이 없는데도 최기표를 따라 이야기 바깥으로 나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순수한 악마라고나 할까요” 주목할 만한 첫 번째 차이. 소설에서 최기표는, 그 주변의 재수파 아이들의 증언을 빌려 형우가 유대에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걔들이 모두 나한테 말했다. 기표는 악마라고, 자기들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영화에서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은 기표의 2학년 담임이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올해 담임이 된 권달호 선생이다. 그때 전하는 말은 조금 다르다. “놈은 순수한 악마라고나 할까요” 그 말은 선술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앞에 놓인 생선 아구의 커다란 입을 보여주는 장면과 연결된다. 이때 나를 멈추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그 앞에 놓인 순수한, 이다. 악마가 순수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학년 담임선생은 최기표에게 선한 가능성 자체를 배제한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해결될 수 없으며 교정될 수도 없는 무한정한 거리의 간극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이쪽은 대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만이 남는다. 그때 권달호 선생이 흥미를 느끼는 것은 순수한 악마의 순수성에 흠집을 어떻게 낼 수 있을 것인가, 에로 이끌린다. 한 가지 더, 그 말에 붙여놓은 아구의 벌어진 아가리가 두려운 모습이기만 하지만 그것이 음식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악마를 요리하기.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라는 전미래적 이미지. 두 번째 차이. 이 말을 하는 인물의 자리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 말을 최기표와 같은 반 학생인 형우와 유대가 나눌 때 그 둘에게 이 말은 그들의 전술의 대상에 대한 정보이자 평가이다. 그런데 형우와 유대도 최기표와 같은 반 학생이다. 그들은 한 학급 안에서 최기표를 경험하고 있고 이미 그와 재수파의 린치를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각자 경험했다. 그런데도 형우와 유대는 경험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재수파 아이들의 고백을 빌려 최기표를 설명한다. 그때 최기표는 알 수 없는 대상이자 동시에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사악한 대상의 자리에 던져진다. 우리는 그를 알지 못했어요, 게다가 알고 보니 그는 더 나쁜 인간이었어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를 벌할 의무가 있어요. 나는 이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했다. 형우와 유대는 자신들의 전술에 대한 실행을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말을 담임선생의 자리에 놓게 되면 단지 자리를 바꾼 것만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위쪽으로 옮겨진 다음 내려다보게 된다. 내려다보는 말. 그들은 “순수한 악마”를 내려다보는 중이다. 이 자리는 학교라는 제도에서 학생과 선생이 지니는 관계의 위계질서 안에서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악마를 내려다보는 자리는 신의 자리가 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저 멀리서 근대적 제도교육을 외피로 두른 유교 교육의 절대적 권위와 폭력적인 강제성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세 번째 차이. 이제 맥락을 살펴볼 차례이다. 소설에서 형우와 유대의 대화는 거의 모든 사건이 모두 벌어진 다음 형우가 최기표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직전에 나온다. 이 말은 형우가 자신의 전술이 흡혈귀를 상대로 거둔 승리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거만하게 대상을 축소하는 수사적 포획에 다름 아니다. 상대방을 흡혈귀의 자리에 보낼 때 자신의 승리는 이미 예정된 것이다. 약점으로서의 흡혈귀. 자신은 이 흡혈귀를 물리칠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걸 알고 있는 한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 이것은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라 경멸의 수사이며 이제 마지막으로 가하게 될 일격에 부여하는 정의로운 정당성의 부여에 다름 아니다. 이때 형우는 자신의 잔인함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도 떨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2학년 담임 선생님과 권달호 선생의 대화는 영화 거의 앞부분에 나온다. 우리는 아직 최기표가 어떤 학생인지 알지 못한다. 이때 2학년 담임 선생님의 말은 소개에 가깝다. 이 소개는 우리들을 권달호의 자리로 데려간 다음 최기표를 관찰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미 같은 학급의 학생들은 최기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의 누군가는 이미 불려가서 린치를 당했고 그걸 오랫동안 지켜본 모두들 두려움에 떤다. 그런데 “순수한 악마” 최기표에 대해서 임권택 (과 송길한 )은 부정적 이미지를 기대한 우리들을 배신하고 갑자기 그를 의협심 있고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친구들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인물로 보여준다. 최기표는 자기 학교 학생이 이웃 학교 학생에게 매를 맞자 그에게 요구한 것도 아닌데 구태여 그 학교에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복수를 한다. 이 에피소드는 (아마도) 임권택에게 인상 깊은 경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24년 뒤에 만든 < 하류인생 >의 앞부분에서 태웅은 자기 학교 학생이 맞고 왔다고 이웃 학교에 찾아가 상대방을 불러내 응징을 한다. “순수한 악마”라고 소개된 최기표가 그런 희생적인 수행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에 대해서 순수한, 이라는 수식어와 악마, 라는 정의가 서로 만나서 만들어내는 어떤 감흥에 매료되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최기표와 김두한(< 장군의 아들 >)과 태웅(<하류인생>)을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태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 동일한 인물처럼 다루고 싶다. 좀 더 이상한 것은 소설에서 최기표의 주변 인물은 맨 마지막 대목에 담임을 찾아오는 병든 어머니가 전부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최기표 곁에 대학생 애인 혜원이 등장한다. 대학생 혜원이 왜 유급을 거듭하고 학교에서는 학업을 사실상 포기했으며 폭력배 무리들인 재수파를 끌고 다니는 고등학생 최기표에게 이끌려 애인의 역할을 하는지는 영화 안에서 잘 설명되지 않는다. 혜원은 재수파의 아이들과 달리 자발적으로 그의 곁에 애인으로 머무는 중이다. 그런데 <하류인생>에서도 거의 동일한 상황에 놓인 고등학생 태웅에게 대학생인 혜옥이 이끌리고 그 둘은 결혼을 한다. 아마 혜원과 혜옥은 상대방에게 거의 동일한 감흥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이야기에서 혜원이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아니면 비밀을 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기를 기대한 우리에게 아무런 사연도 없다는 것을 알려줄 때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대학생 애인 혜원은 오로지 최기표를 수사하는 인물에 머물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겼을까. 임권택(과 송길한)은 전상국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남겨놓은 상태에서 최기표를 형우와 유대, 그리고 담임의 포획 가능한 대상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인물에로 점핑 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이야기는 동일한 결말을 맞지만 그 둘은 완전히 반대가 된다. 소설에서 최기표가 무단결석이라는 방법으로 학교에서 사라질 때 그것은 도피로 읽힌다. “(...)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기표의 자리가 빈 것을 알았다. 다음 날도 그는 결석을 했다. 무단결석이었다. 담임선생이 한 아이를 기표네 집에 보냈다. “집에도 없어. 이틀 전에 집을 나갔데” (중략) 기표가 내리 사흘이나 결석을 한 아침나절이었다” 최기표의 “병색이 완연해 뵈는” 어머니가 담임을 찾아온다. 그 어머니를 “내쫓듯 교무실에서 밀어”낸 다음 담임선생은 형우와 유대에게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던져준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전문이 길기 때문에 발췌하듯이 원작에서 빌려왔다)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S#_11 S#_12 S#_13 S#_14 S#_15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아마도 그는 더 나쁜 상황에로 추락할 것이다. 반대로 영화에서 최기표는 형우와 담임이 쳐 놓은 계략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탈출한다. 그래서 임권택 은 최기표가 학교를 뛰쳐나가는 장면을 찍었다. 그 날 방송국에서 최기표와 그를 돕는 반 아이들을 찍기 위해서 방문할 예정이었고 아이들은 모두 들떠서 기표에게 한마디씩 던진다. 그들은 무례하게 말하면서 기쁜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때 최기표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집어 던지고 공책을 찢어서 아이들에게 뿌린 다음 교실을 뛰쳐나간다. 정일성 은 뛰쳐나가는 최기표를 용의주도하게 따라가는 척하다가 교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창문 앞에 카메라를 세운다. 그때 창문에는 쇠창살이 걸려 있어서 교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미 여러 차례 교실을 외부에서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들여다보면서 감옥처럼 찍었다. 그 창문 안쪽에 앉아서 그걸 지켜보다가 고개를 떨구는 유대의 얼굴을 다가가서(zoom_in) 바라본다. (S#_1) 최기표는 학교를 벗어나서 있는 힘을 다해 길거리를 뛰어간다. 그때 그가 막 지나치는 길거리에는 ‘보호구역’이라는 공사 현장의 표시판이 보인다. 학교라는 ‘보호 구역’. 여기는 정말 ‘보호구역’이었을까. 그런데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는 ‘구역’이었을까. 최기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이 표시판을 지나쳐 간다. 아마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S#_2) 권달호 선생은 교무실에서 3학년 8반 교실로 들어왔을 때 상황을 알게 되고 아이들에게 최기표를 찾아오라고 소리친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면서 나갈 때 반장 이유대는 권달호 선생에게 “최기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면서 최기표가 남기고 간 공책을 건네준다. (S#_14) 거기에는 “혜원아 무섭다, 혜원아 무섭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라고 쓰여 있다. (S#_15) 유대는 꾸짖듯이 권달호 선생에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고발한다. 나는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선택인지에 대해서 단순하게 대답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서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개의 차이는 단지 최기표를 중심으로 옮겨 놓았다거나 아니면 최기표를 주인의 자리에로 옮겨놓았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최기표는 중심으로 이동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최기표가 이야기의 주인의 자리에로 재구성되지도 않는다.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최기표를 끝내 굴복당하지 않는 대상으로 다시 만들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전상국이 만들어놓은 네트워크의 작동방식을 완전히 인정하면서도 최기표를 전리품으로 삼는 승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의 제도. 전체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장치. 그걸 완전히 와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그럴 생각이 없다. 권달호는 조금도 나쁜 의도를 지닌 적이 없다. 그는 충실하게 이 장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형우와 유대는 숨겨놓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나 그들만의 악의적인 기쁨을 위해서 권달호를 돕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이 정의라고 믿으며 그걸 행하는 것이 자신들이 배운 것을 실행하는 의무라고 한 치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를 굴복시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이 원작소설을 선택한 이유가 이 이야기로부터 최기표를 구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마저 갖게 만들 지경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황당무계한 상상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필요해진 것일까. 여기서 반복의 학습과 대면해야 한다. 학습이라고 했나요? 그렇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학습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임권택은 학습하고 다시 학습한다. 물론 배움은 끊임없는 자기 자신의 확장의 과정이지만 동시에 나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네트워크의 공동체 안으로 (약간 위험한 말이긴 하지만) 주체를 밀어 넣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젝이라면 (라캉을 경유하여) 훨씬 근사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나는 재빨리 결론만 빌려온 다음 좀 더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다. 말하자면 동일성의 거대한 그림자. 이 그림자는 너무 무겁고 두터워서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반복의 재종합화라는 까다로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텍스트로부터 빠져나와 다소 기이하게 위장된 네트워크 사이에서 마주치는 불가능성이라는 자리에로 옮겨가야 한다. 나는 이미 시작하자마자 임권택의 영화에서 표현불가능성이라는 영역이 경험불가능성이라는 시간의 말소 안으로 들어선다는 말을 했다.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을 말하면서 잘 설명되지 않은 이 개념은 이따금 임권택의 영화 전체를 위기에 빠트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어떤 위기? 임권택은 자기 앞에 놓인 기호가 공동체 안에서 자의적인 가능성의 세계를 열려고 하는 순간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그의 세계는 수축되고 종종 그만큼 앞으로 나아간 것을 포기하기조차 한다. 계산 바깥에 있는 그 무엇. 그런데 예술에서 성질의 공동체란 가능한 표현일까. 이때 임권택은 이따금 실패를 계산에 넣고 불가능성의 셈을 치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임권택은 공동체를 벗어난 질서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표현불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어떤 결정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할 때가 있다. 그때 너와 나, 라는 차이의 구별 대신 우리라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해결되는 공동의 시간성이라는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임권택 (과 송길한 , 그리고 정일성 )은 < 만다라 >를 막 찍고 난 다음이었다. 그들은 그때 여러 가지로 한국영화가 가지 않은 길을 밀고 나아갔다. 무엇보다 임권택은 그 이전에 그렇게 관념적인 영화를 찍어본 적이 없었다. <만다라>를 미학적인 방법으로만 접근했을 때 임권택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마주쳤던 정신적인 이미지들의 기호, 그 기호들이 불러일으키는 한순간의 새로운 사유가 무언가 재현의 위기를 끌어들인다는 의심이 거기에 있다. 임권택은 경험불가능성이 가져오는 것은 결국 이미지의 위기라는 사실을 잘 아는 연출자이다. 여기서 연출자라는 말을 구태여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들여다본 영화들의 실패가 모두 거기서 출발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이다. 나는 약간 과감하게 말해보고 싶다. 영화에 대한 태도로만 접근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적어도 어느 순간부터 임권택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로셀리니의 전통에 합류하였다. 내가 지금 떠올리는 것은 로셀리니가 잉그리드 버그만과 찍은 네 편의 영화를 말하는 것이다. 재현은 언제나 세계에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아니, 거기 머물러야만 한다. 재현이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때 그건 덫에 걸리는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는다. 임권택에게 재현은 삶의 한 방식, 생명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만다라>는 세계로부터 연을 끊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경험의 고독함. 소승불교의 길. 하지만 세계 안으로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야만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무의미하다면 어떻게 거기서 영화를 더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영화는 공(空)의 이치를 따져 묻는 예술이 아니다. 임권택은 재빨리 가장 진부한 질서 안으로 되돌아와 안심하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어떤 회귀, 거의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공동체 안으로의 복귀. < 우상의 눈물 >은 임권택(과 송길한, 정일성)에게 실패의 상처가 아니라 안심의 표지이다. 우리들은 너무 멀리 간 것일지도 몰라요, 그러면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들은 이 영화가 실패할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로 되돌아옵시다. 세상의 속된 관심. 한국영화가 겪는 어떤 수난. 그 안. 임권택은 종종 남들이 모두 하는 세계 안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가 만행 길을 마치고 온 동료들과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세계는 전상국의 소설이 아니라 충무로의 동료들이 만들고 있는 하이틴 로맨스의 장르 안이었다, 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기표 옆에 머물고 있는 여대생 혜원의 존재를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우상의 눈물>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 클리셰를 끌어들인 다음 할 수 있는 진부한 방식으로 그것이 작동하도록 내버려 둔다. 이때 혜원이라는 장치가 만들어내고 있는 도식의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혜원을 여고생으로부터 여대생으로 층위를 옮겨놓은 순간 그녀를 최기표가 착취할 수 있거나(이미 지적한 것이지만 환기하자면 소설에서 최기표는 자신의 주변 패거리들을 착취하고 있다) 반대로 구원할 수 있는(영화에서 최기표는 자신의 학교 학생이 다른 학교 학생에게 구타당하자 마치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듯이 그걸 복수하러 간다) 구도로부터 완전히 빼낸 다음 일정한 거리만큼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다. 좀 더 간단하게 최기표와 혜원은 서로 다른 생활의 시간, 서로 다른 환경, 서로 다른 영역에 머물고 있다. 여기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들) 사이의 차이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차이라는 것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와 혜원을 수평으로 놓는 대신 비스듬하게 엇갈려 배치한다. 이때 혜원은 다른 어떤 인물과도 교제가 불가능해진다. 오직 최기표의 애인으로서의 자리만이 주어진 혜원은 <우상의 눈물>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모든 가능성의 배제. 형우와 유대가 최기표를 공격 목표로 삼고 있지만 여기서 혜원은 모든 계산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녀는 형우나 유대에게 어떤 관심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형우나 유대도 혜원과 어떤 접촉의 가능성도 열어놓지 않는다. 만일 혜원이 여고생이었다면 송길한은 왜 그녀가 모범생인 형우나 반장인 유대에게 이끌리지 않는지를 설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혜원이 그들에게 이끌리지 않을 수도 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 영화에 로맨스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반대로 그렇다면 형우와 유대가 최기표에게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왜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지를 설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만일 형우와 유대의 최종목표가 혜원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견디기 힘들만큼 음란하거나 사악해졌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임권택(과 송길한)은 그 이야기를 참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들은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유급을 한 최기표에게 혜원은 애인이지만 형우와 유대에게 혜원은 누나의 자리라는 넘기 힘든 선을 이미 설정하고 시작한다. 이상한 셈법. 되풀이되는 불가능성. 혜원 이번에는 재빨리 돌아와 끝내 완결될 수 없는 셈을 할 차례이다. 그러므로 이건 이상한 셈법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 우상의 눈물 >은 < 여고졸업반 >이나 < 진짜 진짜 미안해 >와 같은 구도 위에 있으면서 다르다. 가장 상투적인 설명. 하이틴 로맨스 장르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과정은 그들의 로맨스가 일시적인 시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들은 성공적으로 그들의 시련을 이겨내고 성인들의 사회로 진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때 그들에게 시련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로지 단 하나 미루는 것뿐이다. “우리 대학 갈 때까지만 참자”라는 마법적인 문장. 그런데 그들이 미루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마음껏 연애할 수 있는 사회, 좀 더 외설적인 판본은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껏 섹스할 수 있는 사회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토피아 안에 있으면서도 그걸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척)한다. 물론 그들은 학교를 벗어나자마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금방 배울 것이다. 리비도는 계급적 분화 과정 앞에서 훨씬 제도적인 통치를 받기 시작할 것이다. 좀 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이틴 로맨스가 끝나고 나면 학교 바깥에서 성인들의 눈물과 비탄으로 가득 찬 저 가혹한 멜로드라마와 전쟁터의 알레고리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홈드라마의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김응천 과 문여송 , 석래명 도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다만 그들은 애써 그걸 외면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졸업한 이후를 찍을 생각이 없다. 여기까지는 잘 알겠다. 그때 이 장르 안으로 들어오면서 임권택 (과 송길한 )은 하이틴 로맨스라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그걸 보여주면서 이 장르의 결함을 드러내 보여주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음에 틀림없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전상국의 소설을 경유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교사라는 체험 안에 담겨있는 경험주의. 경험 안에서의 형상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진부한 이야기의 앙상한 무대를 마주 보게 만들어서 그 안에 담겨있는 낯선 현실을 마주 보게 만들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전술을 < 길소뜸 >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거의 아무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거의 아무 것도 구성되지 않는다. 다시 첫 장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교복이라는 기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을 할 차례이다. 나는 이 논의를 위해서 다소 긴 우회를 하였다. < 우상의 눈물 >이 < 여고졸업반 >이나 < 진짜 진짜 잊지마 >와 완전히 공유하는 것은 교복이라는 기호이다. 이 영화에는 사복의 세계가 없다.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을 교실에서 진행하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이따금 학교 바깥에 나갈 때조차 모든 등장인물들은 마치 다른 옷이 없다는 듯이, 이것이 하나의 규율을 지키는 것이라도 하듯이, 차라리 교복을 벗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 기호 안에서만 활동한다. 흥미롭게도 <우상의 눈물>의 첫 장면에서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아침 조회를 위해 학생들이 운동장에 누가 누군지 전혀 구별할 수 없는 검은 교복을 입고 수없이 많은 검은 점처럼 서 있는 모습이다. 우글거리는 교복의 기호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교복의 기호들로 이 영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루어지는 기호들은 단지 외양에 멈춘 것이 아니다. 교복은 상징이 아니라 표시이며 제도의 기입이다. 이 기호들을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문제. 말하자면 교육. 권달호 선생은 3학년 8반이라는 기호의 구역을 책임지고 교실에서 그들에게 자신의 교육은 “자율이며” 이 교실을 배에 비유한다. 얼핏 보면 여기까지 소설과 영화는 동일한 진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에서도 김 선생은 “나는 자율이라는 낱말을 좋아한다”라고 말한다. 이때 임권택(과 송길한)이 간과한 것은 교복의 기호들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상국이 이야기의 시작을 교복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현장에서 시작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담임 김 선생을 외곽에 배치하고 이야기를 형우와 유대 사이의 심리적인 대결로 진행시키면서 교복들의 기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관찰한다. 담임선생과 반 아이들의 만남의 장면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그걸 바라보는 자리이다. 전상국은 담임선생과의 첫 만남을 유대의 자리에서 지켜본다. 유대는 담임선생의 첫인사를 “완숙한 연출가는 배우 스스로가 연출하도록 유도하는 비결”을 가진 것처럼 “단 며칠이면 허물어질 아이들을” 상대로 “가슴 부풀리며 앉아있게” 만드는 “대단한 담임선생”을 만나게 되었다고 “우습게” 생각한다. (전상국의 소설에서 순서를 다소 바꾸었다) 교복의 기호들은 그 안에서 재빨리 분화하기 시작한다. 기호로부터 기호를 바라보기. 기호들과 기호의 외곽. 기호의 경계선. 담임선생은 대상에 머물면서 그의 모든 행동은 유대에게 관찰의 자리에 머문다. 기호의 고정점. 그것이 세상에 대한 상징적인 매트릭스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서는 그다음 문제이다. 전상국은 끝까지 담임선생이 기호들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임권택(과 송길한)도 담임선생 권달호가 기호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실패했음을 (심지어 전상국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실패의 광경은 완전히 다르다. 소설에서 (반복하자면) 담임선생은 “편지 하나를 꺼내 우리에게 내던졌다. 기표가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 맨 앞줄에 이렇게 씌어있었다. -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소설에서 담임선생은 최기표의 편지를 먼저 읽었고 그걸 “우리들 앞에” (여기에는 ‘우리들’이라고만 되어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유대는 포함되어 있지만 형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던져줄 때 우리는 그 편지의 문장이 무얼 의미하는지 담임선생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최기표의 편지는 담임선생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 편지는 담임선생을 우회하여 유대(와 우리들)에게 배송된 편지이다. 아마 담임선생은 최기표의 편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임권택(과 송길한)은 완전히 반대의 배송 경로를 따라 전달한다. 최기표는 자기의 노트에 “무섭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는 문장을 여동생이 아니라 혜원에게 쓴다. 이 수신자는 가족으로부터 애인에게로 옮겨가면서 갑자기 이 편지의 네트워크를 하이틴 로맨스의 장치 안으로 옮겨놓는다. 하지만 이 문장이 담겨있는 노트의 오작동이 기다리고 있다. 최기표는 그 노트를 반 아이들에게 집어 던진 다음 뛰쳐나간다. 그들 중에서 그 노트를 혜원에게 전달할 준비가 된 친구는 아무도 없다. 말하자면 기호 안에 던져진 메시지. 그때 노트를 집어 든 사람은 유대이다. 그런 다음 그 메시지의 올바른 수신자가 담임선생 권달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자신의 의견을 더해서 최기표의 노트를 전달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지는 기호들 사이를 빠져나오는 것처럼 보이면서 기호들 전체를 대표하는 대문자 메시지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 이야기를 기호들 사이의 차이의 세계로부터 교복이라는 단일기호로 환원시켜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과정으로 바꿔 쳤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하게 이야기의 일반경제학에 따라 교환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기호들 사이의 차이의 정치경제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이 결론은 예정된 수순을 따라간 것이다. 유대를 외곽으로 보내고 담임선생 권달호를 따라갈 때 이 결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런 다음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야기의 축을 담임선생 권달호와 기호들 사이의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최기표 사이의 대립의 구도로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이야기가 규율권력에 관한 도식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것을 지나치게 빨리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대치시켜 버렸다는 의심이 든다.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순간은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 나타난다. 최기표의 노트를 읽은 담임선생 권달호는 정확하게는 칠판을 향해 기대어 서서, 하지만 프레임의 구도상으로는 우리를 바라보고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라고 중얼거린다. 그게 우리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구도상의 이유로 그렇게 찍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영화는 여기까지 그런 구도로 찍은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갑자기 시간을 건너뛴다. 권달호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그의 동료는 커피숍에서 만나 다시 복직하기를 권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권달호가 최기표를 통해서 어떤 배움을 얻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만일 최기표의 메시지의 최종 목적지가 담임선생 권달호가 된다면 이 배송의 네트워크는 완전히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최기표의 메시지가 담임선생 권달호를 목표로 작성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기표는 반복해서 형우와 유대에게 자신의 노이즈를 전달했고 그것을 다시 메시지로 반송하려든 과정에서의 전술과 권력의 관계가 이 기호들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기표가 자기의 메시지를 여동생에게 전달한 다음 담임선생을 경유하여 유대(와 우리들) 앞에 도착한 것은 정확하게 난 너희들의 전술을 잘 알고 있어, 라는 응답의 암호이다. 그것이 담임선생에게 읽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기호들 사이의 권력의 문제이다. 그런데 유대가 그걸 수신하는 대신 다시 담임선생인 권달호에게 떠넘길 때 그 메시지는 기호들의 네트워크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이때 이 영화는 거의 아무것도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최기표의 메시지의 수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권달호는 동료와 헤어진 다음 두 번째 약속 상대를 만난다. 그 상대는 혜원이다. 나는 그 둘이 왜 만났는지 설명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그녀는 최기표를 만나러 갈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준다. 그러자 권달호는 혜원에게 자신이 최기표를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최기표가 혜원을 향해서 쓴 노트가 전달되었는지는 여기서 (그리고 끝내) 알 수 없다. 다음 장면은 부산 영도다리 앞 공장에서 일하는 최기표를 보여준다. 그 둘은 데이트를 하면서 최기표가 내년에는 검정고시를 볼 결심이라는 말을 한 다음 끝난다. 하지만 혜원은 권달호가 그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지는 않는다. 최기표도 권달호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혜원이 권달호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권달호는 마치 괄호처럼 사라진다. 그렇게 해서 최기표가 노트에 쓴 메시지가 한 바퀴 돌아서 마치 최기표 자신에게 반송된 것처럼 마주 보는 장면을 마지막 장면으로 끝난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표정이다. 아니, 그 말은 옳지 않다. 우리는 그 표정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는 최기표와 혜원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유히 최기표는 영화에서 빠져나간다. 아무것도 구성되지 않는 네트워크 속에서 메시지의 배달이 결국 실패해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한참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최기표는 자기 앞으로 쓴 메시지를 재귀 대명사처럼 수신한다. 물론 두 명의 최기표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학교 안에서 교복을 입었을 때의 최기표와 공장에서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은 최기표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다른 행동을 한다. 어쩌면 비로소 최기표는 혜원과 수평적인 자리에 간 것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처음부터 혜원을 수직 상승시킨 자리에 배치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지도 모른다. 이걸 성립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최기표는 복잡한 셈을 요구하지만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이미 할 이야기는 다 했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그저 에필로그처럼 슬그머니 다룰 뿐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교복이라는 기호의 네트워크로부터 이탈한 이 메시지는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메시지는 기호들의 네트워크 안에서만 활동하는 암호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하나의 불가능성이라는 상황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임권택이 마주해야 할 위험천만한 세계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가능세계는 현실로부터의 역산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나는 < 만다라 >를 다루면서 다시 이 문제와 만나게 될 것이다. 임권택이 난국을 해결하는 방식. 이 언저리에 놓인 심연. 나는 지금 그 어두운 심연 주변을 얼씬거리고 있는 중이다. (계속) 1981년 10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한국영화사 각본 송길한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김희수 음악 정민섭 진유영 박근형 김범기 이구순
나의 애도의 방식. 먼저 작별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여기 없는 이름. 서정민 촬영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빛나는 이름 중의 한 분이다. 그건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촬영이라는 자리. 연출의 곁. 임권택 에게 정일성 이 따라오는 것처럼 서정민을 이야기할 때는 이만희가 따라왔다. 하지만 종종 현장에서 그보다 더 중심에 있는 자리. 일화에서 시작하겠다. 나는 고인을 현장에서 단 한 번 뵈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 여고괴담 > 현장을 견학하게 되었다.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998년은 어떤 단절이 이어지던 시간이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았지만 갑자기 새로운 영화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미학적 연대도 하지 않았으며(이를테면 네오 리얼리즘), 그렇다고 같은 영화사에서 자본의 일시적인 변덕의 힘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며(이를테면 쇼오치쿠 누벨바그), 어떤 정치적 입장도 공유하지 않았으며(이를테면 체코 누벨바그), 같은 시대의 공기를 공감하고 있지도 않았다. (이를테면 파리의 누벨바그) 그냥 난데없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오던 충무로에 갑자기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전통을 따랐고, 누군가는 희미하게 연결 지었고, 누군가는 완전히 외면했다. 1996년 5월에 홍상수 의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 개봉하여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그해 11월에 김기덕 의 < 악어 >가 소리소문 없이 개봉한 다음 사라졌다. 1997년 이창동 이 < 초록물고기 >를 찍었다. 그리고 송능한 이 < 넘버 3 >를 찍었다. 정반대의 두 영화. 그 이듬 해 1998년, 허진호 의 < 8월의 크리스마스 >와 이광모 의 < 아름다운 시절 >이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같은 해 봄에 김지운 이 < 조용한 가족 >을, 가을에는 임상수 가 < 처녀들의 저녁식사 >를 찍었다. 이 시기를 소개하면서 서방세계에서는 포스트 뉴 ‘코리언’ 웨이브라고 부른다. (첫 번째 물결은 1989년 장선우 , 이명세 , 박광수 가 나타났을 때이다. 그런 다음 이 영화들을 앞선 영화들에서 분리해냈다) 박기형 은 충무로 도제제도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서울단편영화제에서 (거의 중편에 가까운) < 과대망상 >으로 주목을 모은 다음 곧장 첫 번째 장편영화 <여고괴담>을 만들었다. 지금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그때는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다른 ‘신인’ 감독들과 달리 장르영화로 곧장 달려갔다. 나는 새로운 작가는 새로운 영화를 발명하면서 발견되지만 영화산업 전체가 새로워질 때는 새로운 장르영화가 나타날 때라는 로빈 우드의 문장에 밑줄을 그은 세대이다. <여고괴담>은 박기형의 야심과 상관없이 앞으로 십 년의 한국영화 산업을 결판 지을 거라는 생각을 그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박기형은 이 새로운 물결에 합류하였다. 현장을 보러 간 날은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을 위해 밤샘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 영화의 촬영이 서정민이었다. 그때 서정민은 이미 148편의 영화를 찍었고 현장에서 모두가 어려워하는 ‘촬영감독님’이었다. 149번째 영화라는 표현을 한번 상상해주기 바란다. 1961년에 첫 영화를 찍은 촬영감독과 어떤 도제제도의 수업 없이 1998년에 첫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배우들은 이미연을 제외하고 그때 모두 신인이었고 박기형은 첫 번째 장편영화를 찍는 상황에서 곤혹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현장에 스태프들이 너무 많았고 콘티는 정확하지 않았고 (아마도 중간에 무언가 문제가 생겨서 변화가 생겼음이 틀림없고) 게다가 영화촬영을 하면 아침이 일찍 찾아오는 법이다. 온 사방이 교실 창문이었고 필름으로 촬영하던 그때는 지금처럼 색 보정 작업이 많은 부분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박기형은 완전히 지친 상태였고 새벽까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조감독을 불러 몇 장면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그때 카메라 옆에 조용히 있던 서정민 촬영감독이 다가와서 화가 난 목소리로 박기형을 꾸짖었다. “박기형, 당신 으악새 감독이야? 이거 데뷔작이잖아. 첫 번째 영화 찍는 감독이 이러면 안 돼. 이 바닥에서 한번 호구 잡히면 그냥 끌려다니다가 인생 종 치는 거야. 창문에 암바(暗部處理) 쳐 줄 테니까 당신이 원래 하고 싶었던 거 그냥 해. 그래도 돼, 데뷔감독은 그래도 돼” 시간이 오래되어서 기억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나는 이 사람이 멋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서정민 촬영감독 물론 서정민 의 대표작들은 1960년대에 이만희 와의 작업이다. 그 중에는 < 만추 >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다음 1980년대에는 ‘돌아온’ 이장호 와 < 바람 불어 좋은 날 >을 시작으로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영화들을 찍었다. 서정민의 마지막 파트너는 김기덕 이었다. < 야생동물보호구역 > < 파란 대문 >과 < 수취인불명 >을 작업했고, 김기덕은 가끔 내게 서정민 ‘촬영감독님’과의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석임에도 최대한의 존경을 표하는 태도를 취한 다음 기꺼이 그와 함께 작업한 현장에서 “영화를 배웠다”는 표현을 썼다. 임권택 과는 많은 작업을 하지는 않았지만 50편의 습작을 찍고 난 다음 그 자신의 ‘첫 번째’ 연출이라고 부른 < 잡초 >를 서정민 이 찍었다. 아마도 임권택을 임권택답게 만든 그 순간. 거의 필사적인 도약의 결정. 차라리 절망으로 인한 결심이라고 불러야 그 자리. 그때 임권택은 이름을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촬영감독들과 영화를 찍었다. 그 많은 이름 중에서 임권택은 <잡초>를 위해서 서정민을 선택했다. 이 영화는 임권택이 제작한 처음이자 유일한 영화이다. 임권택과 서정민이 함께 작업한 영화는 모두 14편이다. 그러므로 160편에 달하는 촬영목록을 생각하면 아마도 그저 잠시 머문 것 같다. 처음 작업한 영화는 1970년 < 애꾸눈 박 >이었고, 순서대로 이야기하면 1971년에는 <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 < 둘째 어머니 > < 명동 삼국지 >, 그리고 1972년에는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 < 명동잔혹사 >, 1973년에는 <잡초> < 대추격 > < 증언 >을 찍었다. 그런 다음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1975) < 맨발의 눈길 > < 낙동강은 흐르는가 >(1976)를 찍었다. 그 사이에 < 왕십리 >와 < 상록수 > < 족보 >를 이석기 와 찍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만희 는 서정민과 헤어진 다음 이석기와 작업을 했다. 연출과 촬영 사이의 각자의 모색. 끊임없는 실현. 이미지 사이에서의 미세한 차이들. 이 시기에 임권택은 정일성 을 만나 < 신궁 >(1979)을 찍었고, 1980년에 < 복부인 >을 서정민과 찍었다. 그런 다음 1984년에 <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를 찍은 게 마지막이다. 서정민은 다른 감독들과 그 이후에도 계속 작업했고 그 명단에는 김기영도 포함되어 있다. 임권택도 물론 이석기, 구중모 , 그리고 정일성과 다음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거기서 끝났다. 영화가 무언가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그것이 안타깝다. 왜냐하면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는 임권택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의 한 편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의 새로운 예술적인 우정이 막 시작하려는 순간 멈춘 것만 같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우정을 나누려는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다. <맨발의 눈길>의 혜선(左), <잡초>의 분례(右) 두 사람의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 맨발의 눈길 >을 선택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임권택 감독께서 단 한 번도 긍정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 잡초 >를 한 번 더 찍은 것이라고 거의 단정 내리고 싶어진다. 다만 이렇게는 약간 망설인 끝에 덧붙였다. “그 영화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잡초>를 쓴 나한봉 씨 밑에서 오랫동안 수업을 쌓은 박찬성 씨에요, 아마 그런 영향이 있겠지요” 그런데 그 원작을 찍은 사람이 그걸 몰라볼 수가 있을까. 예술에서 한 번 더 한다는 것. 임권택의 다시 한 번. <잡초>는 분례가 차례로 네 명의 남자를 만나면서 그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맨발의 눈길>은 고아원에서 나온 혜선이 세 명의 남자를 만나면서 그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두 영화의 이야기는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이미 어디선가 두 점의 <양산을 든 여인>을 예로 들면서 임권택이 모네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임권택은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실패를 응시하는 것. 하지만 그 실패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이때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임권택이 반복할 때 그 과정에서 무엇을 훔쳐내고 싶어 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잡초>를 볼 수 없다. 사라진 자리. 그리고 임권택은 그 자리에 다시 왔다. 도대체 다시 온 것은 무엇일까. 임권택은 거기서 무엇을 다시 한 번 ‘재연’하고 싶었던 것일까. 거기에 어떤 보물이 있었던 것일까. 이때 임권택은 <맨발의 눈길>을 찍으면서 <잡초>를 찍은 서정민 을 다시 불렀다. 그 해에 임권택은 서정민과 이석기 두 촬영감독과 번갈아 작업했다. 그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서로의 일정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서정민의 쪽에서 바라보면 좀 더 기괴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서정민은 이 해에 6편의 영화를 찍었고 두 편을 임권택과 작업했다. 이때 두 편은 <맨발의 눈길>과 < 낙동강은 흐르는가 >이다. 다시 설명하겠지만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마치 < 증언 >에 흩어져있는 수많은 단편 중의 하나를 다시 한 번 확장시켜놓은 것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증언>은 (특수촬영을 장석준이 하고) 서정민이 찍었다. 1976년에 임권택은 이미 해본 것을 다시 한 번 해보는 것만 같은 반복 안에서 그 무언가를 확장시켜놓은 다음 마치 이미 해본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서정민과 다시 한 번 그걸 해보고 있다. 그 안에서 무엇이 활동하는 것일까. 거기서 무엇을 수정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 차라리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껴보려는 것일까. 이 우연의 일치는 무언가 자꾸만 이 과정을 능동적인 선택이라고 해석하고 싶게 유혹한다. 두 번째 이유는 다소 내속적인 성질에 관한 설명이다. 반복은 여기서 기이하게도 재귀의 순환운동 안으로 들어서자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 맨발의 눈길 >을 처음 보면 무언가 영화의 기호들이 대부분 부서졌다는 인상을 준다. 단지 실패했다고 설명하면 쉽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어떤 순간들이 이 영화에 있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것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어떤 자리에서 영화가 멈춰 서 있다. 그냥 단순하게 말하면 기괴하리만큼 불만족스러운 히스테리에 가득 차 보인다. 임권택 은 단 한 번도 단편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 그건 그의 세대들이 모두 그러하다. 다만 옴니버스의 형태로 다른 감독들과 함께 만들기는 했다. 그래서 이미 <맨발의 눈길> 이전에 < 명동잔혹사 >를 변장호 , 최인현 과 함께 찍었다. 하지만 홍상수 의 < 첩첩산중 >(< 디지털 삼인삼색 >의 한 편), 박찬욱 의 < 심판 > <찬드라의 경우>(< 여섯 개의 시선 > 중의 한편), <컷 Cut!>(< 쓰리 몬스터 >의 한 편) < 파란만장 > < 청출어람 >, 봉준호 의 < 인플루엔자 >(< 디지털 삼인삼색 >의 한 편)처럼 적극적으로 작업하지 않았다. 하지만 <맨발의 눈길>은 혜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세 명의 남자와의 우여곡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 개의 이야기, 세 편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임권택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렇게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그는 한 편의 영화 안의 고유한 리듬, 그 안의 균형감각, 그 세계의 일관성,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감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적어도 그런 의미에서) 고전적인 연출자이다. 심지어 실패할 때조차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거기서 무너지면 그건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예외의 기준을 세워둔 것처럼 그냥 밀고 나아간다. 심지어 어떤 곤궁처럼 여겨지는 데도 상관없다는 것만 같은 어떤 태도가 있다. 틀림없이 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는 재앙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차라리 어떤 균형을 갖추고 그 위험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참을 수 없다는 최악의 방식에 이끌리고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매번의 영화가 하나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임권택의 불평을 쫓아내는 임권택이 있는 것만 같다. 세 조각이 나버린 영화,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만 같은 이야기. 서로 완전히 다른 리듬. 혜선을 연기하는 주연 이인옥 만이 가까스로 하나로 연결되는 세 개의 단편. 여기서는 마치 이 영화를 자신의 영화 목록 안에서 예외의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는 대립 같은 것이 있다. 임권택의 영화를 부주의하게 다루는 대부분의 비평의 공통점은 이 대립을 간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투적인 공식. 임권택은 상투적인 상업영화에서 시작했으며, 새마을 영화와 반공영화를 만든 어두운 시기를 거친 다음 < 만다라 >를 전환점으로 하여 자기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운운, 이라는 식의 전형적인 도식화. 물론 이 설명이 거짓은 아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과정을 간과하고 있다. 나는 반대로 임권택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대립의 과정을 발견한다. 무언가 가까이 다가간 다음 혹시 그것이 오류가 아니었을까, 라는 질문만큼 뒤로 물러난다. 여기에는 예술에서 오래된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유로운 선택 안에는 이미 강제된 선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 이때 서정민 은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다시 그 자리에 왔는데 이미 한 것을 스스로 부수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초대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임권택은 이 사이에 < 왕십리 >와 < 족보 >를 만들었다. 두 영화의 조건이 특별하게 좋은 것도 아니었으며, 임권택이 하려고만 했다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었다. <맨발의 눈길>은 그것을 하지 않은 영화이다. 나는 임권택을 위하여 일부러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맨발의 눈길>이 걸작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실패작이다. 하지만 이 실패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완전히 내부적인 폭발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맨발의 눈길>은 새마을영화도 아니고 반공영화도 아니다. 그렇다고 문예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는 우수영화의 요건과 아무 상관 없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해 우수영화에 선정되었다) ‘고무신 부대를 불러오는’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와도 거리가 멀고, ‘노골적인 노출’을 염두에 둔 장면도 없다. (< 별들의 고향 >에서 시작해서 < 바보들의 행진 >에서 정점에 오른) 대학생 관객들을 향한 ‘영상시대’ 영화들과 합류할 생각도 없다. 말하자면 임권택에게 <맨발의 눈길>은 무언가 필사적인 이행의 과정이라는 자리에 있는 매개자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어쩌면 불가피한 교차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궁극적으로 실패를 목표로 한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기획. 다소 위험을 무릎 쓰고 말하고 싶다. 세 번의 가정. 어쩌면 임권택은 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 잡초 >를 부숴버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미 부숴버릴 수 없는 <잡초>를 부정하기 위하여 <맨발의 눈길>이 필요해진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 출현의 재귀성이 가리키는 것은 임권택 자신이 스스로 그때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켜 보인 다음 그걸 실패로 간주하는 방법을 채택한 것은 아닐까. 고아원을 나서는 혜선 나는 이 괴이한 영화를 한 번 본 다음 망설이지 않고 즉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임권택 은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찍었고 나는 같은 영화를 (그 자리에서) 두 번 보았다. 첫 쇼트는 ‘日新院’이라는 팻말을 보여준다. 한 소녀가 고아원을 나서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그녀와 함께 여기서 자란 것 같은 아이들과 원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배웅을 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너무나 기쁜 듯, 마치 이곳을 탈출하기라도 하듯, 어쩌면 감옥을 떠나는 사람처럼, 그렇게 밝은 미소로 가방 하나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선다. 아마도 내내 거기서 자랐을 텐데 그렇게 한 치의 미련도 없을 수 있을까. 마치 뒤를 돌아보기라도 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오직 앞만 보고 간다. 영화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알기라도 하듯 뒤에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과 원장에서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녀는 마침 기다렸다는 듯 도착한 버스를 타고 떠난다. 그런 다음에야 안심을 하듯이 맨 뒷자리에 잠시 뒤를 돌아보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다. 그렇게 떠나가는 그녀는 아마도 어제, 혹은 며칠 전, 아니면 방금 전 들었을 원장님의 목소리를(voice_over_narration) 듣는다. 이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슬그머니 지나가고 있지만 수상쩍은 것은 명백히 원장님의 목소리이며, 그 목소리는 떠나가는 혜선의 마음속에서 다시 불러낸 것인데, 그녀를 떠나보내는 사람들 틈에 서 있는 원장님에게 혜선도, 영화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이한 효과가 일어나는데 마치 원장님의 목소리는 고아원 그 자체의 목소리가 되어 그녀의 운명을 예언하는 신탁의 소리처럼 들린다. 좀 더 간단한 설명.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 .... “너의 실제 나이는 스물도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마는 그야 어쨌든 우리 고아원에서 올린 호적상의 나이로는 만 십 팔세가 되었다. 규정에 따라 우리 고아원에서 제적되었고 혜선이 너는 이제 사회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란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하지가 않아요.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낸 너희들은 막연히 정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매사에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아요. 그건 항상 실수의 원인이 되기도 하거니와 매우 위험한 일이야. 그 점 명심하고 열심히 살아라. 너의 앞길에 행운이 있길 빌겠다” 우리는 이 조언이 사실은 예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동시에 이 말은 반어적인 방식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혜선은 앞으로 ‘정 때문에’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쳐 대부분의 일을 그르칠 것이며, 그 실수로 점점 위험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정에 충실해지면 질수록 점점 더 행운은 그녀 곁을 떠나가고 불행해질 것이다. < 맨발의 눈길 >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대사는 없다. 혜선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으며 다시 한 번을 반복할 때마다 원래의 자리보다 더 나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때 점점 더 사태를 나쁘게 만드는 정(情)을 준다, 는 행위에 대해서 임권택 은 마치 악을 대하는 것처럼 약간 몸서리치면서 바라본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녀 앞에 누군가 나타나고 그러면 그녀는 그에게 반응한다. 이때 이 반응의 동사(動詞)를 정을 준다, 라고 정의내릴 때, 그렇게 나쁜 사태를 일원화시킬 때, 매번 다른 장면들을 그렇게 나쁜 하나로 해석할 때, 사회가 자신과 처음 접촉하는 텅 빈 형식의 출현을 파괴하는 하나의 원리로 귀납 시킬 때, 거기에는 임권택이 세상과 맺는 계약으로서의 정(情)에 대한 실망이 담겨있다. 나는 지금 이 사태를 단순하게 통속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구, 이별 이때 우리가 놓쳐서 안 되는 것은 혜선이 그 남자들을 만났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남자들이 혜선을 기다렸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혜선에게는 정(情)의 순환 속에서 단지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순환에서 과잉하는 순간 발생하는 그 잉여의 처리에서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나는 약간 반어적으로 사태를 뒤집어보고 싶다. 혜선은 왜 이 세 명의 남자를 반대의 순서로 만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안타깝지만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추락의 과정은 혜선이 고아원 원장님의 마지막 한 마디인 행운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수를 해야만 마지막에 행운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고아원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만나는 남자들의 요구를 잘 알고 자신이 그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한 능동적인 전술을 전개했다면 혜선은 그저 첫 번째 남자에 머물게 되었을 것이다. 임권택 의 두 번 만들기에 호응하듯이 반복해서 두 번 보기. 맨 마지막 장면을 본 다음 다시 앞으로 돌아오면 첫 번째 남자인 명구와 행복(하지만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자리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화 ‘이후’를 물어보고 싶다. ‘아직 끝나지 않은’ 영화 안에서 명구는 자기 앞에 나타난 돈 많은 집의 딸이 청혼을 하자 (그 과정을 영화는 설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그는 혜선을 만나지 못한 한 달 사이에 마음을 바꾼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가능성을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면, 그러니까 혜선의 뜻대로 명구와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 할지라도, 그 결혼은 명구 앞에 다른 기회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매우 연약하게 맺어진 일시적인 정지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 첫 번째 실패가 단지 서둘러 온 것이라고 설명해볼 수는 없을까. 그런 다음 (약간의 시간을 건너뛰어) 혜선은 길거리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자리로 간다.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고아원에서 처음 나왔을 때 그녀는 양장점에 의탁해서 살면서 그녀를 맡겨야 했다. 이제 그녀는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의 운명에 대한 스스로의 일보전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운명이 집행되는 과정에서의 방점의 이동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운명의 신비주의를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집행되는 방식은 운명의 유물론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운명은 반복되지만 그 주인이 발 딛고 서 있는 토대에 의해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이다. 거기서 혜선은 운명에 맞선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하게 그 과정이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임권택 이 그 어느 한 편을 중심으로 영화 전체가 바뀌는 대신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 전체의 사이를 통해서 무언가 그의 세상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읽어내고 싶다. 물론 임권택은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운명의 인과율에 대해서 항상 체념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운명은 동시에 혜선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는 과정이라는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 운명에게 아니요, 하고 말할 때 욕망에게는 좋아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물론 그 둘은 화해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둘 다에게 동시에 충실해지는 방법을 택하는 기술을 익혀나가고 있는 중이다. 운명 안에서 자유롭게 살기. 그때 임권택은 그 자유가 대가를 치르는 대신 반대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 내주어야 할 대가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는 단지 주체의 전복만이 아니라 좀 더 까다로운 변화가 담겨있다. 그때 표정을 찡그리게 되는 쪽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명이 자신을 수행하기 위해서 세상을 작동시키고 있는 자신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임권택은 그것이 주체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의 실수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논점이 남았다. 나는 잘못과 실수를 바꿔 쓴 것이 아니다. 그 둘은 서로 자리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임권택이 여전히 자유 앞에서 망설이는 순간이다. 희석, 첫만남 약간 장황하게 설명하겠다. 혜선은 거기서 “하던 사업을 말아먹고 그냥 마음 편하게 트럭운전이나 하면서 살겠다”는 희석을 손님으로 만난다. 그는 어느 모질게 비바람 치는 날 자신이 머무는 여인숙 앞에서 창문 바깥으로 비바람에 날아갈세라 한밤중에 포장마차의 포장과 혼자서 씨름하는 혜선을 보고 달려나가 도움을 주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정을 맺는다’ 혜선은 자신이 모은 돈을 털어 희석을 위해 트럭을 사고, 두 사람은 행복해진다. 만일 여기서 멈추었다면 이 이야기는 한 번의 비극과 다른 한 번의 행복을 통해서 실패와 보상이라는 방식으로 짝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다시 한 번 운명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희석은 예정보다 집에 늦게 돌아오는 날 혜선으로부터 왜 늦었는지를 추궁당한다. 그는 부끄럽긴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는 길에 한 여자를 태워줬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혜선은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잠든 희석을 깨우고 또 깨워가면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그쳐 묻는다. 여기서 이 시퀀스는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웠지만 어느 쇼트를 지나가면서부터 점점 기괴해지기 시작한다. 핵심은 혜선이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만한 진실을 얻는 것이다. 물론 그 지식은 희석이 길에서 태워준 여자와 섹스를 했다는 고백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 지식을 고백받기 전까지 혜선의 추궁은 끝나지 않는다. 혹은 만족하지 않는다. 물론 그 고백을 알게 되는 순간 동시에 얻게 되는 것은 더 큰 의심이다. 어떤 의심? 이제 미래에도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의심. 선수 친 의심. 그 고백의 지식은 즉각적으로 미래 시제가 된다. 희석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반복된 재촉에 지쳐 남은 진실을 모두 말한 다음 잠을 청한다. 하지만 지식의 활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트럭으로 화물을 운송하는 희석 옆자리에 (마치 감시라도 하듯) 혜선이 사이좋게 앉아있다. 금실 좋은 부부처럼 사이좋은 대화를 나누던 혜선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길거리에 태운 그 여자 이야기를 다시 들려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희석은 그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 드느냐고 하지만 그녀는 심심하니까 그런다고 대수롭지 않게 덧붙이면서 다시 한 번을 재촉한다. 희석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마치 그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것이 용서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 되기라도 하듯이 한 번 더 한다. 즉각적으로 이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명구로부터의 배신을 본 다음 두 번째 이야기를 보는 중이다. 혜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희석이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때 혜선의 행위는 사실상 희석에게 첫 번째 상황의 반복을 제발 한 번 더 해달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희석은 자신이 해 보지 않은 행위를 반복해야 하는 자리에 불려가는 중이다. 여기서 혜선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운명이 그녀를 이용하고 약탈하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해 (있지도 않은 환상에) 속는 중이다. 혜선이 희석의 이야기(의 지식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의 서사)를 견디지 못하자 마치 그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듯이 한겨울 산속에서 트럭이 고장 난다. 두 사람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희석은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부속품을 사러 읍내로 사고 혜선은 여기에 남겨진다. 희석, 트럭의 고장, 혼자 남겨진 혜선 우선 이 결정이 바보 같다는 지적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한겨울 산속에서 히터도 틀 수 없는 고장 난 트럭과 함께 이미 저녁이 시작되고 있을 때 (영화에서처럼) 아내 혼자 여기에 남겨두고 부속품을 사러 가는 쪽과 차라리 (영화에서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트럭을 여기에 남겨두고 두 사람이 함께 읍내에 간 다음 혜선이 읍내에서 기다리며 희석이 트럭을 고쳐 읍내로 돌아오는 편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누구라도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트럭은 고장이 났고 부속품은 산속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트럭을 여기에 놓아둔들 어둠이 다가오는 밤에 누가 가져갈 수 있겠는가. 혹은 트럭을 훔쳐갈 생각이라면 혜선 혼자서 그걸 무슨 힘으로 막을 수 있을까. 하지만 희석은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다음 혜선을 남겨놓고 혼자 부속품을 구하러 간다. 마치 거기서 보이지 않는 방해의 손길이 나타나기라도 한 듯 부속품 가게의 주인은 어디론가 가게를 비웠고 점점 어둠이 다가온다. 완전히 어둠이 내린 다음에야 비로소 부속품을 구한 희석은 택시를 부를 도리가 없자 그 먼 길을 뛰어서 가야 한다. 이때 임권택 은 희석과 혜선을 번갈아 보여준다. (cross_cutting) 혜선은 어둠 속에서 무서워하기보다는 지금 이 시간에 희석이 자기를 버려두고 읍내에서 술집 여자와 벌거벗고 따뜻한 이불에서 뒹구는 환상에 사로 잡혀 괴로워한다. 세상은 짓궂게도 혜선이 좀 더 그녀 자신의 환상을 발전시킬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하여 어두운 산길을 달려가는 희석 앞에 자전거를 탄 경찰을 등장시킨 다음 그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로 끌고 간다. 그때는 종종 산을 타고 간첩들이 남파된다는 이야기가 떠돌던 시절이라는 사실을 계산에 포함시켜 주기 바란다. 나는 세상의 실수와 주체의 잘못을 대립시켰다. 당신은 내게 간단하게 반문을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은 채 지금 부속품을 구하기 위하여 추운 겨울날 온 동네를 돌아다닌 다음 어두운 산길을 달려오고 있는 희석을 의심하는 건 혜선의 잘못이 아닌가요? 물론이다. 하지만 당신은 요점을 놓쳤다. 핵심은 세상의 실수가 주체의 잘못에 항상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잘못은 여기서 세상의 실수에 대한 효과처럼 나타난다. 자신의 환상에 완전히 사로잡힌 혜선은 먼동이 틀 무렵인 새벽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트럭에 도착한 희석에게 더럽다, 고 몇 번이고 외치면서 개, 돼지, 늑대, 짐승이라고 부른다. 희석은 혜선의 비난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길거리에 희선을 버려두고 트럭을 끌고 혼자 떠난다. 이 행동은 정확하게 희석이 길거리에서 세워달라는 낯선 여자를 태워준 친절에 대한 정반대의 선택이다. 그는 이전에 길거리에서 낯선 여자를 태워주었고 이번에는 자신이 함께 살고 있는 여자를 길거리에 버리고 떠난다. 혜선의 불길한 예감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세상의 실수와 주체의 잘못은 자신의 효과를 타자가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혹은 주체는 서사에서 자기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혜선은 희석이 떠나간 다음 약간의 시간을 길에서 보낸다. 그런 다음 임권택 은 다시 한 번 혜선과 희석을 번갈아 보여준다. (cross_cutting) 이때 이 둘 사이를 오가는 환상의 침입은 정반대로 진행된다. 이번에 환상에 시달리는 것은 희석이다. 혜선은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여보, 를 외치며 눈길을 달려오지만 트럭은 떠난 다음이다. 그런데 희석은 바로 그 시간에 운전을 하면서 그런 혜선을 떠올리며 산골 비탈 눈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오던 길로 되돌아 가기 위해 운전대를 반대로 돌린다. 사태는 당신의 예감을 벗어나지 않는다. 뒤늦게 출발한 혜선은 마침 도착한 버스를 타고 간다. 사실 그녀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자꾸만 창문 바깥을 두리번거린다. 그리피스 이후 오래된 관습. 서로 다른 두개웰염獒옐瑛黔옘哉엔엽냈颱玖庸?오가기 시작할 때 그 둘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고 또한 점점 빨라질 것이다. 하나의 목표. 하지만 이 방법에는 단지 둘 사이의 교차가 아니라 반드시 그사이를 연결하는 상상적 제3항이 끼어든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만일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그 무언가의 작용이 없다면 이 둘 사이의 연결은 사실상 무효화 되거나 혹은 (종종 코미디에서 허무하게 종결지어지는) 조롱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 제3항을 운명이라든가 혹은 영화 바깥의 관객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영화이론은 이 3항을 정의내리기 위해 긴 시간 논쟁을 했고 그 결과 어떤 식으로건 그 항을 개념화하는 순간 이데올로기적 시선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부르주아의 시선이고, 그건 가부장적 시선이고, 그건 서방세계의 시선이고, 그건 백인의 시선이고, 그건 등등... 으로 정의내리는 순간 즉각적으로 거기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놓여있음을 깨닫(고 그런 다음 무언가를 놓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물론 이 과정을 가장 세련된 방법으로 정식화시킨 것은 히치콕의 영화이다. 임권택이 따르는 것은 히치콕에서 에릭 로메르로 이어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다르다. 여기서는 이 빠른 속도의 결합이 상징적인 의미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 둘 사이의 결합 사이에는 오직 불가사의한 인과관계의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혜선이 산골길 굽은 도로 사이로 접어들었을 때 저 멀리서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저 아래 비탈에는 굴러떨어진 트럭이 불타고 있다. 버스에서 달려간 혜선 앞에 이미 죽은 희석이 차가운 땅바닥 위에 누워있다. 경찰이 목격자를 찾자 누군가 대답한다. “이 미끄러운 길을 좀 과하다 싶은 속도로 달려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꺾데요” “아니, 이 좁은 길목에서요?” “네, 다시 돌아갈 일이 생겼던 모양이에요. 아무튼 신통하게도 잘 돌아섰는가 싶었는데 뒷바퀴가 빙판에 쭈욱 밀리는 거예요, 그리고 처박혔죠. 아마도 다섯 번은 더 굴렀을 겁니다. 아무리 돌아갈 길이 급하기로 이렇게 성질 급한 운전수는 처음 보았습니다” 이때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한편으로 혜선을 꾸짖는 것만 같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끝내 알 수가 없다. (voice_off_frame) 왜냐하면 내내 화면은 희석의 시체 앞에서 무릎 꿇고 울고 있는 혜선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장면이 고아원에서 혜선이 떠날 때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원장님의 말씀의 연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매번 나타나는 목소리. 잘 알고 있는 목소리.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목소리. 이때 혜선의 운명에 대한 지식은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돌아갈 일. 다시 돌아갈 일. 우리는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찡그림에 의해 희석은 혜선에게 도착하지 못한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가 도착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 메시지를 도착 시킨다. 맞아요, 당신의 뜻은 이제 실현되었어요. 혜선은 실패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녀의 정을 돌려받는다. 두 번째 남자 희석이 혜선에게 알려준 것은 실수의 원인이 정을 받은 타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을 주는 그 과정의 과잉에 있다는 것이다. 마치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말.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낸 너희들은 막연히 정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매사에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아요. 그건 항상 실수의 원인이 되기도 하거니와 매우 위험한 일이야” 세 번째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와의 사이에 놓인 간주곡을 먼저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죽은 희석이 묘 앞에 한복을 차려입은 혜선이 찾아와 임신한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자신은 이 아이를 잘 키우겠다고 거듭 다짐을 한다. 그런 다음 갑자기 마치 다른 분위기, 다른 리듬. 다른 톤, 다른 영화처럼 장면이 옮겨간다. 좁은 골목에 차들이 줄을 이어 들어서고 다시 장면을 옮기면 혜선은 근수와 결혼식을 올리는 중이다. 근수는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인 데다가, 신부의 복장을 한 혜선을 보는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좀 전에 그 임신한 아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좀 더 정확하게 두 이야기 사이에 끼어든 아이는 이제부터 어떻게 작동할까. 세 번째 이야기는 앞선 두 이야기와 달리 단 하루 동안 일어난다. 그 사이에 세월이 흘렀고 혜선은 아이를 낳은 다음 술집에 나간다. 아이는 자라 소년이 되었다. 하지만 불치의 병에 걸렸고 혜선에게는 수술비용이 없다. 그녀의 계획은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위장결혼을 해서 남자와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돈을 훔친 다음 도망쳐서 그 돈을 들고 아들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선 그녀의 계획이 지닌 세 가지 불합리한 점. 첫째, 신혼여행을 떠난 다음 남자에게서 돈을 훔쳐 돌아온다고 하지만 그 남자가 큰돈을 갖고 신혼여행을 떠날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을까. 물론 그때는 카드가 없었고 사람들은 현금을 가지고 다녔지만 근수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지나치게 큰돈을 가방에 넣어 들고 신혼여행을 떠난다. 둘째, 결혼식을 올리는데 고아인 혜선은 어떻게 상대방의 가족 전체를 속일 수 있었을까. 잘 알다시피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긴 과정이 필요하다. 양가의 부모가 인사를 해야 하고 서로의 혼수를 주고받아야 한다. 신랑은 단 한 번도 신부의 집에 인사를 드리지 않고 부모를 만나지도 않은 채 결혼식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까. 그보다 먼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과정에서 아픈 소년은 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병실에서 내내 기다려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모두 해결한 것처럼 이 세 번째 이야기는 결혼식 하는 날에서 시작한다. 세 번째 이상한 점은 이야기 안에 내재되어 있다. 병원에서는 이제 더 이상 수술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아들을 퇴원시키라고 종용한다. 이미 실패한 수술. 사실상 혜선의 노력은 무의미한 시도이다. 근수, 결혼식 여기서 세 번째 이야기가 이제까지 이야기와 다른 것은 결혼하는 근수에게 혜선은 어떤 정도 줄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녀의 목표는 근수를 속여 돈을 훔친 다음 재빨리 현장에서 떠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앞의 두 이야기가 혜선에게 준 교훈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이미 두 개의 서로 다른 교훈에 대해서 셈을 했다. 하지만 여기서 혜선이 정을 주는 행위가 중단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병석에 누운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혜선이 정을 주는 대상이 이야기의 외곽으로 옮겨졌으며 그 중심은 그녀에게 정을 주는 대상을 속이려는 행위에로 변주된다. 이때 혜선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은 그녀 자신이라기보다는 그녀가 만나는 상대방이 점점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신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요점은 좀 더 분명해진다. 첫 번째 이야기는 (다소 논쟁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처녀로서 정을 주는 행위에 대한 실패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아내로서 정을 주는 행위의 실패라면, 세 번째 이야기는 어머니로서 정을 주는 행위의 실패에 대한 내기이다. 이때 (세상 안에서의) 반복적인 실패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은 혜선이 (주체의 자발적인 선택인 것처럼) 반복적으로 정을 주는 행위이다. 마치 그녀는 이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행위인 것처럼 지치지 않고 되풀이한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그 행위를 반복하는 데서 오는 바보 같은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조금도 협조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다. 임권택 은 여기서 기묘한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한다. 어떤 장면에서도 혜선의 심리적 상태를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대신 오로지 그녀의 동선만을 따라가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실상 여기서는 혜선의 심리적인 동요를 제외하면 고요한 표면만을 가진 상황이다. 그런데 임권택은 혜선을 통해서 그 표면을 휘저어 놓는다. 혜선의 동선은 이 세 번째 이야기 안에서 다른 인물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 동선의 디테일은 다음과 같다. 혜선은 이날 하루 분주하게 두 세계 사이를 오가야 한다. 하나는 물론 근수와 올리는 결혼식과 이어지는 신혼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수시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죽어가는 아들의 병세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때마다 병원에서 아들을 돌보면서 전화를 받는 (혜선을 언니라 부르는) 여자는 자기가 내내 여기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면서 지금이라도 병실을 떠나야 한다고 통보한다. 혜선은 한편으로 그녀를 설득해야 하고 또 한 편으로 이제는 아들을 데리고 퇴원하라는 의사에게 다시 한 번만 더 수술을 해달라고 간청한다. 더 힘겨운 것은 자신의 그런 처지를 숨겨야하는 상황에서 기회가 올 때마다 막 결혼한 근수 몰래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신혼여행 온 근수는 당연히도 혜선 곁에서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며, 혜선은 언제라도 돈이 든 그 가방을 들고 여기를 빨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 눈길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이때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은 지금 자신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단 하나, 그녀가 돈이 든 가방을 훔쳐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그녀는 이미 결혼했고, 게다가 결혼한 상대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혜선이 그렇게 원하는 삶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한 빨리 도망쳐야만 한다. 임권택 이 하려는 고통스러운 게임은 무엇인가. 그건 혜선을 끝까지 몰고 가 보는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은 때로 던져진 상황에서 포기하는 법 없이 끝까지 가면 어떤 상황을 만나게 되는지를 보려고 할 때가 있다. 대부분 다른 영화에서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며 결국 거기서 어떤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다음 마치 그것이 해결인 것처럼 물러난다. 임권택도 피하지 않고 물론 그 지점까지 간다. 이상해지는 것은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 지점까지 온 다음 멈추지 않고 거기를 지나쳐서 더 밀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임권택이 문득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가기 시작할 때 눈물을 흘리다 말고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고통스럽게 바라보거나 기괴하게 쳐다보게 된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혜선이 두 번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운명에 굴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그 상황을 밀고 나아가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녀를 움켜쥐고 있는 (원장님의 예언에 가까운) 말씀의 네트워크를 찢고 스스로 능동적인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의 선택은 바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행위 안에서 단지 한계를 보는 대신 그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혜선의 능동적인 자율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혜선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멈춘 다음 죽은 희석의 묘지 앞에서 다짐을 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단지 그녀를 덮어씌운 말씀의 실현만을 우리는 보았을 것이다. 물론 거기서 끝나면 말씀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갑자기 영화의 톤과 리듬이 변했다는 것을 함께 주목해주기 바란다. 임권택은 여기서 앞선 두 개의 이야기에 마치 영화 자체가 저항하기라도 하듯이 진행하기 시작한다. 아들의 죽음 물론 이번에도 혜선의 노력은 좌절로 끝난다. 그녀는 근수의 돈 가방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그 돈을 들고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용서해준다면) 마침 때맞춰 죽은 아들의 시신이 실려 있는 바퀴 달린 침대의 이동이다. 사라져 가는 아들. 그녀의 하루는 실패로 끝난다. 이제 그 돈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 혜선은 그걸 돌려주기 위해 근수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자백하듯이 고백한다. 당신은 이번에도 결국 희석과 같은 결론을 맺은 것이 아니냐고 내게 반문할지 모른다. 얼핏 보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임권택 은 몹시 잔인한 방법으로 혜선에게 그녀가 진정 도착해야 할 욕망의 대상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있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혜선은 그녀의 아들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게 박탈하면서 그녀에게 안겨주는 선물이 있다. 그것은 물론 근수이다. 이 이야기의 가느다란 끈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혜선이 고아원에서 나왔을 때 그녀가 정을 주고 빠져드는 사람은 세상에 나와 우연히 만난 남자가 아니라 고아원에서 함께 큰 명구이다. 명구의 무언가가 혜선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같은 고아원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정을 끌어낸다. 그러므로 혜선이 한 행동은 고아원에서 이미 한 행동이 왜 사회에서는 반복할 수 없느냐는 반문과 마주친 것이다. 혜선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두 번째 이야기의 시작. 공사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면서 인부들이 와서 점심을 먹을 때 그 많은 사내들의 입맛을 잘 알고 척척 알아서 주문을 해준다. 한 사내가 “마누라 행세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라고 농을 걸자 서슴없이 “하루에 두 끼씩 걷어 먹이면 그게 첫째 마누라지”라고 받아친다. 하지만 이때 희석은 그 자리에 없다. 그는 여기 공사장까지 흘러들어온 다음 혼자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신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석은 혜선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바라보다가 별안간 손을 잡아보고는 “얼핏 보면 아줌마 같기도 하고 처녀 같기도 하고” 가 전부이다. 그 말이 별말이 아닌 것이 그날 밤 술집에 가서 작부를 옆에 앉혀놓고 오늘 밤을 같이 보내자고 한 다음 초면에 이러면 안 되시죠, 라는 대꾸에 “자네하고 나하고는 전생에 인연이 있는 것 같아”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날 밤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소리에 깬 희석은 포장마차가 바람에 날아갈세라 달려 나온 혜선을 본다. 그런 다음 그 둘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희석이 혜선과 ‘정을 통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대사는 “내가 좋아하면 여자가 도망가고 내가 좋다고 안 도망가면 여자가 도망가고” 라고 한 다음 잠시 그녀를 바라본 다음 “당신과 같은 여자를 만났으면 좋은 가정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소”라는 제안이었다. 이때 포장마차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고 고작해야 성냥으로 켠 촛불 하나가 전부이다. 혜선은 희석에게 끌렸다기보다 차라리 그 한 마디에 이끌린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은 혜선이 명구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목소리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여기에는 같은 내용의 대안적 대상이라는 미끼가 있다. 그렇게 해서 혜선은 다시 원래 자리에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치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혜선이 희석과 ‘정을 통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비바람 치는 밤 포장마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나는 일렉트릭 기타 연주가 반주처럼 흘러나온다. 아마도 예민한 관객들은 알아차릴 것이다. 이 음악은 혜선이 명구와 데이트를 할 때 흘러나오던 선율이었다. 이제 세 번째 이야기가 되었을 때 두 번째 이야기에서 넘어온 것은 물론 희석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이다. 그녀는 아들을 구하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임무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반대로 지금 그녀에게는 남겨진 아들만이 그녀의 삶의 장애물처럼 작동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몹시 잔인한 표현이라는 것을 이미 사과했다. 게다가 임권택은 그 아들을 더 이상 살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혜선의 현재의 삶에서 그녀에게 남겨진 아들의 존재만이 마치 잉여처럼 그렇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이야기는 이미 시작할 때마다 결론이 나 있다. 아들은 죽을 것이고 그녀의 노력은 실패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세 번째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단순하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목소리의 교환 이때 오직 이 세 번째 이야기에서만 혜선과 그 상대방은 서로의 목소리를 교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외부의 목소리에서 벗어나서 혜선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다. 혜선은 아들의 죽음을 본 다음 돌아와 근수에게 이 모든 과정에 대해서 자백을 하듯이 이야기한다. 이때 처음으로 혜선은 상대방으로부터 구체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물론 근수의 목소리이다. 그는 혜선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마치 대칭을 이루기라도 하듯이 참회에 가까운 고백을 한다. 먼저 자신이 혜선의 이제까지의 위장된 행동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근수는 자신을 고아라고 속이고 부잣집 양아들로 입양되었지만 사실은 시골에 자신의 어머니가 살고 있으며 그분의 유일한 소망은 며느리를 데려오는 것인데 당신이 괜찮다면 거기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혜선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제안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청혼인지는 분명치 않다. 눈이 덮인 시골 길이 보이고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라기보다는 중단된다. 만일 여기서 해피엔딩을 보면 당신은 < 맨발의 눈길 >을 처음부터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임권택 이 하려는 노력은 초자아의 명령으로부터 자신의 윤리적 선택에로 혜선을 되돌려 놓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 영화는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때로 그 선택은 위태롭게 보이고 가냘파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 내려진 가장 중요한 명령을 거절하지 않으면 자신의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자유로운 행위란 결국 무엇인가. 아마 임권택이 서정민 과 함께 만든 < 잡초 >에서 했었던 질문은 결국 이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다시 만들었을 때 그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이라는 도약을 시도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될 임권택의 영화는 이 자유의 밤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창씨개명에 반대하고 오로지 자신의 이름을 지키고자 자살을 선택하는 수원 설 씨 노인의 이야기(< 족보 >),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평생에 걸쳐 산에서 자신이 놓친 공비를 찾아 허송세월하는 한 사내의 이야기(< 짝코 >), 오로지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 용맹전진하는 승려의 만행 길(< 만다라 >). 임권택은 자기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세상이 자신에게 내린 명령을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 길을 임권택은 서정민과 함께 시작했지만 그와 함께 밀고 나아가지 않았다. 물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 현장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단지 그것을 예술적인 이유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부질없는 잣이다. 하지만 <맨발의 눈길>에서 보여준 몇몇 순간들, 특히 그중에서도 희석이 굴러떨어진 낭떠러지 가까이 다가가는 버스 안에서 그 절벽을 바라보는 혜선의 시선 앞에 놓인 그 짧지만 신비로울 정도로 정교한 리듬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임권택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스산한 이미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예술에서 가지 않은 길을 탄식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나는 지금 바보 같은 일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서정민 촬영감독님을 생각하면 그건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가정이다. 부디 편히 잠드시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