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고 싶지 않아
- 감독
- 고동선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전승렬
신파는 한국 영화의 척추다. 아무리 성형수술을 가해도 척추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만큼 신파는 그가 출현한 시점부터 100년을 반복해왔다. 더 이상 신파는 싫고 좋고의 문제도 아니다. 마치 한국인의 밥상에서 된장찌개가 무한 반복되듯이, 신파는 한국영화판에서 무한 반복된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신파를 대하는 가장 모범적인(혹은 가장 ‘모던한’) 태도는 그러한 신파의 반복성을 비웃는 일이 되어버렸다. “또 신파야?”라고 비웃으면 그만이다. 그 모든 눈물과 운명의 신비에 나도 모르게 감응하는 본능적 반응에 대해서 여타의 지성적(다시 ‘모던적’) 해석과 변명을 꾸며댈 수고를 스스로 덜어내며, 그저 비웃으면 그만인 게다. 하지만 그처럼 잘도 반복되는데, 한낱 비웃고 말면 그만일 구닥다리 인습에 불과할까. 무한루핑되는 된장찌개가 한국 혼의 척추이듯, 신파는 또 그렇지 아니할까. 신파의 핵심은 모던인들이 비웃는 바로 그 반복에 있다.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확인되는, 신파의 짐짓 ‘모던한’ 정의는 ‘개연성 없는 감정의 과잉 반복’이다. 다시 말해보면, 신파는 ‘개연성의 공백을 채우는 감정의 반복’이다. 이 정의를 하사해주신 모던인들에게 감사드린다. 하지만 모던인들께서 하나 잊은 게 있다면, 바로 그 개연성의 출처다. 신파에서 개연성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 없어서가 아니라, 여기에 없고 딴 데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 없고 저기 저 하늘에 있어서다. 왜냐하면 신파에서 모든 사건을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운명, 즉 천명(天命)이기 때문이다. 신파의 진짜 주인공은 하늘이다. 신파극에서 망막에 진물이 날 때까지 반복되는 하늘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려보지 않더라도, 기실 신파를 볼 때 가장 신비로운 점은, 죄는 있는데 죄인은 없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바로 이 역설을 가장 첨예하게 밀고 나갈수록 좋은 신파극이 된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엇갈렸을 이수일과 심순애 때부터 그랬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죄인이 아닌 것처럼, 김중배와 심순애의 어머니도 악인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악역일 뿐이다(그들에겐 나름의 사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뉘우치기까지 한다). 실상 신파에서 진짜 죄를 짓는 것은 하늘이다. 하늘은 운명적 사랑을 개시한 진짜 범인이다. 신파의 인물들이 죄지은 적도 없이 고통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다시 한번- 이걸 잘해야 안타까움은 배가되고 좋은 신파극이 된다). 그들은 하늘의 잘못 때문에 상처받고, 하늘의 죄를 뒤집어쓰는 자들이다. 이 모든 것이 현대신파극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 미워도 다시 한번 >( 정소영 , 1968)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딱히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시작한 남녀가 있다. 그리고 그 나름 생의 무게 때문에 “나예요? 저 여자예요?”라고 운명의 선택을 강요하는 본부인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갈라놓고 또 각자 가둬놓는 침묵과 투명성, 공기의 벽들이 있다. 그들은 하늘에 감금되어 있다. 실상 두세 명의 인물들이 엇갈리게, 혹은 서로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정소영의 샷은 한국 신파(막장드라마 포함)가 앞으로도 부단히 참조하게 될 하늘감금샷의 원조다. 정소영은 하늘감금샷의 끝판왕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희망고문의 이미지다. 운명에 의해 시골어촌으로까지 유배당한 여인을 진정 가둔 것, 또한 그녀가 기다림과 노란 풍선으로 채워나가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이다. 한국신파는 하늘감옥으로 정의된다. 하늘이 잘못했네. 이것이 신파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반응이다. 그런데 분노를 거두기엔 아직 이르다. 더 얄미운 것은 잘못을 해놓고 또 그것을 애써 고쳐보려고 하는 놈도 하늘이란 사실이다. 신파의 하늘은 병 주고 약 주는, 우주의 에너지 자체다. 개연성 없는 사건의 해결과 진전? 개연성은 바로 그 하늘의 보이지 않는 약손에서 온다. 이 엄청난 약손을 거의 최초로 선보였던 장일호 감독의 < 사랑하는 사람아 >를 보라. 양색시였던 어머니의 혈통 때문에 연인이 파혼되자, 어머니가 돌연사하고 남자의 본처가 돌연사하고 아버지가 돌연사하고... 사건의 심화와 갈등의 해결을 위해 갑자기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이러한 인물들에게서, 저승사자가 되어버린 하늘이 아니라면 그 개연성은 당최 무엇일쏘냐. 하늘의 폭력적 개입, 자연(自然)의 돌연(突然)으로의 변신,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아> 연작으로 장일호 감독이 한국신파극에 남긴 엄청난 유산(막장 드라마로까지 이어지는)이다. 하늘은 제멋대로다. 제멋은 모든 운명의 조각을 맞추는 것 외에 다른 어떠한 맵시도 알지 못한다. 실상 한국 신파영화는 하늘의 위대한 변주들이다. < 엄마 없는 하늘 아래 >( 이원세 )에서 지평선을 대들보로 해서 만든 하늘감옥이 그렇고, < 만추 >( 김수용 )에서 연인마저 낙엽으로 만드는 가을바람이 그렇다. 병도 주고 약도 주는, 또 감옥도 되고 집도 되는 공기(空氣)는 신파극의 진정한 주연이다. 신파에서 진정 반복되는 것은 바로 그다. “개연성 없는 과잉감정”이 아니라. 신파는 하늘이 그 자신만의 법률을 제정하는 과정이다. 신파극 인물들은 수동적이지 않다. 바로 이 제헌과정에 참여하여 그를 몸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늘은 팔다리가 없다. 심순애와 이수일의 팔다리를 빌어야 한다. 신파극은 하늘의 자율성(말 그대로- 스스로 다스림)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신파극의 소중한(동시에 독특한) 계승은 이송희일 의 작품들일 게다. 이송희일 영화는 한국사회의 육체적이고 정신적 법규들을 가로지르는 가장 끈적이는 바람에 도전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아 > < 백야 > < 야간비행 >). 이송희일은 젠더의 자율성이다. 난 잘 모르겠다. 모던인들이 신파를 비웃는 이유를. 반대로 그들은 비웃는 통에 하늘과 땅을 혼동한다. 그들은 대지 위에서의 감정의 반복을 말하지만, 실상 신파에서 먼저 반복되는 것은 하늘이다. 한국신파에서 감정은 반복되기보다는 바로 그 반복을 “버티는 힘”이다. 하늘이 자율성의 원환을 완성할 때까지 병 줌과 약 줌을 버티고, 감옥과 집을 버티는 힘. 버팀도 밉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대 모던인의 밥상에도 된장찌개는 오늘도 버티고 있다.
퀴어영화를 들고, 10여 년 여러 나라를 찾았다. 퀴어영화를 보러 극장을 온 관객의 성정체성과 성비를 보면, 그 나라 LGBT 커뮤니티의 가시화 정도와 인권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일단 아시아 몇 개 국만 둘러보면, 홍콩은 극장 관객의 90%가 LGBT다. 게이 영화일 경우, 남성 관객이 단연 압도적으로 많다. 대만 역시 극장 관객의 90% 정도가 LGBT들. 내 첫 번째 장편영화 < 후회하지 않아 >가 대만에서 개봉해 당시 박스오피스 선두에 섰을 만큼 흥행했던 데에는 대만 LGBT가 극장으로 몰려온 힘이 컸다. 일본의 경우, 70%가 LGBT, 그리고 30% 정도가 이성애자 여성들이다. 흥미로운 건 이들의 나이가 대부분 중년 이상이라는 점. 마치 ‘이미지포럼’ 같은 독립영화 극장을 찾는 관객이 거의 대부분 흰머리 희끗한 노장년층인 것처럼, 전공투 세대의 쓸쓸한 궤적들이 퀴어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풍경에도 스며있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 7년 전만 해도 90%가 이성애자 여성 관객. 요즘은 70 ~ 60% 정도가 여성 관객이고, 나머지가 LGBT들이다. 7년 전, 극장에 오는 게 두려워 심지어는 선글라스를 쓰고 내 영화를 보러왔던 게이 관객들이 이제는 어느덧 극장 안에서 커밍아웃하는 어떤 시대적 변화를 연출하고 있다. 하지만 10여 년 동안 느낀 것은 한국의 퀴어영화 시장이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애자 여성 관객들이 점점 퀴어영화에서 떠나고 있는 반면, 그 빈 공백을 LGBT 관객층이 채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 공백은 점점 커질 가능성이 크다. 국내 퀴어영화뿐만 아니라, 두루 평단의 지지를 받은 해외 퀴어영화들도 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외면받아야 했다. 한국의 이성애자 관객들은 더 이상 퀴어영화를 보러 극장에 찾아오지 않는다. 대신 동성애 코드가 은밀히 차용된 상업영화들, 특히 브로맨스 영화들에 열광한다. 퀴어영화와 이 영화들의 차이는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나는 동성애자다’라고 발화하는 순간이 있냐, 없냐의 차이다. 이성애자 관객들은 하위주체의 목소리가 명확히 들리는 영화를 이제 불편해한다. 모에 요소와 덕질 재료가 가득한 동아시아 ‘형제애’의 전당 안에 게이 목소리가 들리는 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쩌면 80년대부터 본격화되어 30년 정도의 역사를 쌓아올렸던 장르로서의 ‘퀴어영화’가 한계에 봉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칸 영화제가 그랑프리를 퀴어영화에 안긴 순간은 영예의 정점이 아니라 그 마지막 여정의 기록인 것처럼 느껴진다. 흡사 동성결혼 열풍에 휩싸인 유럽 제국에 타전한 결혼식 화환인 것처럼. 세상과의 ‘긴장과 불화’ 속에서 태동했던 퀴어영화는 30년이 흐른 뒤, 이렇게 어떤 전환을 요청받고 있다. 마지막 남은 불모지인 중국과 아프리카, 그리고 이슬람 지역에서 만들어져 그만그만한 오리엔탈리즘으로 소비될 미래의 퀴어영화들을 제외한다면, 영화제들과 아트하우스 관객들 사이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거나, 유럽에서처럼 이성애자 관객들을 호객하기 위해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상업영화로 변신하거나, 미국에서처럼 극악한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게토화된 극장에서 LGBT 관객들의 팝콘을 견뎌내는 숙명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해외의 어느 퀴어영화 배급사가 나한테 했던 충고도 그랬다. ‘진지 빠는’ 퀴어영화들은 더 이상 팔리지 않으니, 키치한 해피엔딩의 달달한 로코물로 만들어 보라고. 아마도 이 고민 때문에 당분간, 오랫동안 퀴어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두고두고 고민을 발효시키기 위해서. 대신, 이따금 조우하는 게이 후배 감독들, 나보다 훨씬 더 건강한 눈빛과 미학적 투쟁심을 갖고 있는 그 감독들과 만날 때마다 연애편지처럼 그 고민들을 풀어놓는다. 게토화도 되지 못할 만큼의 그 적은 관객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물론 난 그들이 만들 미래의 영화들이 이 고민의 해답의 일부분을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쨌든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거니까.
이송희일 감독의 장편영화 < 야간비행 >은 간만에 접한 처절한 청춘멜로드라마이다. 영화는 어느 남자 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한다. 중학교 동창인 용주와 기웅 그리고 기택. 고등학교 진학 후 용주는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우등반 그리고 기웅이는 학교 일진, 기택은 왕따다. 이들에게는 말 못하는 사연이 하나씩 있다. 용주는 성소수자, 기웅이는 노동운동하는 아빠에 대한 원망, 그리고 기택이는 왕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결국 이들은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이라는 감정들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용주는 기웅이에게 기대고, 기택은 그런 용주를 저주하고, 기택이의 배신으로 촉발된 용주의 아우팅은 결국 기택의 폭력 사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 야간비행 >은 청춘들의 혼자라는 ‘외로움’이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이라는 감정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감정은 이어지지 않고 음악으로 단락 지어진다. 단락과 단락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의 빈공간(외로움)은 장면이 주는 ‘서정’으로 채워진다. 외로움과 서정이 합쳐져 주인공에게 복합적인 ‘통속의 연민’을 느낀다. 특히 <야간비행>이라는 이미 망한 게이바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풍경과 노을이 지는 서울 하늘은, 심지어는 그들의 아픔까지 다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한 개인들에게는 지독히 아픈 경험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어느 장면에 담길 때 우리는 복잡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이라는 ‘통속의 연민’ 프레임을 통해서 - 용주는 이성애자 친구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멈출 수 없고, 기웅이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부모세대)을 버리지 않고, 기택이는 왜 나만 왕따냐고 항변하는 세 친구를 -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세 친구는 서로가 서로를 비켜가면서 원망을 하고, 서로를 할퀴고 상처 주고 폭력적인 상황으로 닥치게 만들고, 피를 흘리고 나서야 ‘봉합’이 된다. 하지만, 온전히 봉합될 순 없다. 이런 경험은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을 옭아매는 것은 결국 다름이 아닌 바로 지금의 대한민국 자체 때문에 아픔은 다시 되풀이된다. 질주하는 오토바이(청춘의 상징!), 자전거, 지하철, 그리고 기차, 한강을 흘러가는 자동차 등이 장면 속에서 계속 등장하고 있다. 정해진 틀에서 탈주하려고 하는 청춘들의 욕망기계들이 망라되어 있다. 용주의 자전거와 기웅의 오토바이. 여수 가는 기차. 어쩌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에게 오토바이는 순간의 질주로 안식을 준다. 하지만 집이나, 학교 앞에서 멈춰야 하는 현실은 그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적 질감은 단편 < 굿 로맨스 >부터 눈길을 사로잡으며, 첫 번째 장편 < 후회하지 않아 >로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고 < 야간비행 >으로 완성되었다. 지나친 비약일 수 있으나, 이송희일만이 드러낼 수 있는 ‘복잡한 심리적 감성’과 무심한 듯 보이는 ‘단조로운 서정성’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영화적인 정서-비애감’을 조성하는 연출력은 단연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