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궁전
- 감독
- 로예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레이 하오, 후 링, 장 시안민
처음으로 좋아한 격투기는 프로레슬링이었다.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를 보며 가슴 졸이고 환호했다. 홍수환, 유제두, 박종팔 등의 복싱도 열심히 봤다. 그리고 프라이드와 UFC 등을 접하며 종합격투기에 빠져들었다. 격투기는 원초적인 스포츠다. 프로레슬링은 번외로 하자. 프로레슬링은 육체의 기술을 갈고닦아 캐릭터와 스토리를 더해 만들어진 쇼다. 육체의 화려함과 열정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 엔터테인먼트. 프로레슬링은 쇼이지만, 복싱과 종합격투기는 일상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 후두부와 성기 등 급소를 때리지 않는 정도의 규칙만 있을 뿐이다. 맹수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물을 사냥하고, 인간끼리의 다툼에서 필요한 생존의 기술은 격투기로 발전했다. 내가 격투기에 빠진 이유는 단순했다. 싸우는 그들에게 끌렸다. 격투기의 결과는 승패로 갈린다. 하나는 이기고, 다른 하나는 진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상대를 때리고, 걷어차고, 꺾는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하지만 격투기를 보면서 승자에게만 열광하지는 않았다. ’졌잘싸‘라는 말이 있다. 졌지만 잘 싸웠다, 의 줄임말이다. 비록 승부에서는 패배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를 보면 가슴에 무엇인가 일렁인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서, 치사한 전략으로 일관하는 놈을 보면 짜증이 일어난다. 단지 지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녀석을 보면 그저 한심하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격투기의 감흥을 떠올리는 것은 어딘지 이상하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격투기, 복싱의 희열이 무엇인지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복싱을 택한 청각 장애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다. 복싱은 케이코에게 중요하지만, 생활을 압도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케이토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복싱을 택했을 뿐이다. 누군가가 아니라, 세상을 때리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싸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던져진 것이니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일본 최초의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2011)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미야케 쇼는 오가사와라의 모든 이야기를 영화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모든 시간과 사건을 그리지 않는다. 미야케 쇼는 말한다. ‘복싱을 다룬 것만이 아닌, 하루하루 링 위에서 그리고 링 밖에서 싸워나가는 한 여성을 그린 영화다.‘ 오가사와라 케이코가 소속된 체육관의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재능은 없어요. 키가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고요. 하지만 뭐랄까.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케이코는 반항적인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는 분을 못 이겨 선생을 때릴 정도였다. 보통 아이들과 다른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분이 많고, 쌓인 감정을 발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반항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케이코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 일을 하고, 복싱을 시작한다. 케이코는 말한다. ‘때리면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또 말한다. ‘맞을 때 아픈 것이 싫어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다. 치열하게 싸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케이코를 비롯한, 싸우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치고받으며 싸우는, 마지막까지 전장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면 어딘가 연대감이 느껴진다. 처참하게 패배할지라도, 함께 끝까지 싸워보고픈 마음이 든다. <내일의 죠>의 명대사처럼, 마지막까지 ‘하얗게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랄까. 실베스터 스탤론의 < 록키 >처럼, 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난 후 링 위에 꿋꿋하게 서 있고 싶어진다, 할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젊을 때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미야케 쇼는 인터뷰에서 ‘나는 솔직히 말해 10대부터 20대까지 꾸준히 성실하게 살자, 라고 하는 구호에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대에 접어드니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숏 한컷 한컷이 쌓여 완성되는 영화처럼 인생의 의미란 것이 결국 아주 조그마한 것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느리고 작은 움직임이 소중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영문 제목을 떠올려 보니 ‘Small, Slow But Steady’다. 작고, 느린 것이 소중함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케이코의 위대한 승리나 처절한 노력을 말하지 않는다. 케이코는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체육관에서 열심히 훈련한다. 그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합에서 지는 일은 벌어진다. 그렇다고 상대가 엄청난 것도 아니다. 그 역시 케이코와 마찬가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 복서다. 천재도, 셀럽도 아닌 그들의 성취는 작고 느리게 이루어진다. 미야케 쇼는 케이코의 일상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케이코는 들을 수 없지만, 세상에 가득 찬 소리들. 케이코가 다니는 체육관과 강변 그리고 골목길 등을 채우는 햇살과 공기 그리고 먼지들. 우리들의 일상은, 문득 멈추어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작고 느린 것들로 가득하다. 16밀리 필름으로 촬영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다정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사려깊다. 소리도, 공기도, 어느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고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한다. 작고 느린 것들은 꾸준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아니 존재한다. 케이코는 아픈 것이 싫다. 복싱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다. 세상도 그렇다. 때리고 싶고 싸우고 싶은 마음만큼 도망치고 싶고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넘친다. 그런 케이코를 붙들어주는 존재는 타인이다. 오랜 시간 권투를 했고, 지금은 후배를 키우는 체육관 관장. 나이가 들어 육체는 쇠하며 병이 들었고, 재개발로 인하여 체육관을 닫아야 한다. 세상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케이코를 가르친다. 청각 장애인인 케이코가 싸워나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은 일상의 싸움을 무수하게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공감했을 것이다. 관장만이 아니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인물들은 모두 예사롭지 않다. 음악을 하는 케이코의 남동생은 말한다. 누나는 강하다고. 자신은 누나처럼 강하지 않다고. 흑인 혼혈인 남동생의 애인 하나는 케이코에게 선뜻 다가가 인사를 하며 친해진다. 하나는 케이코에게 춤을 알려준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재능이 있고, 최고가 아닐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된다. 그들은 자신의 길에서 작고 느리게, 꾸준하게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윗세대인 케이코의 엄마와 체육관 관장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미리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파에 움추러든 아이들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준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따뜻한 영화다. 케이코는 결코 외롭지 않다. 언제나 그들이 있고, 풍경이 있다. 케이코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풍경 속에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소리와 공기가 가득 차 있다. 케이코도 우리도, 언제나 함께, 세상 안에 있는 것이다.
1.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익숙한 문예 양식이자 사회적 제도이기도 한 로맨스는 그 어원에서부터 통속 혹은 진부함(banality)을 속성으로 갖고 있다. 영화 장르로서의 로맨틱 코미디는 바로 이 진부함의 요소들을 중심으로 재미를 만들어내며 그 핵심에는 로맨스를 로맨틱한 것으로 구성하는 통속적인 조건들의 질서가 있다. 그런 점에서 로맨틱 코미디는 여느 대중 장르보다 다채로운 색깔로 채색된 풍속화로서의 지위를 얻는다. 풍속화를 보는 첫 번째 재미는 젠더관계와 계급, 몸짓과 패션, 매너와 에로티시즘 등 다양한 토픽들을 재현하는 그 표면의 이미지들에 있다. 그러나 진짜 재미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배열하는 내부의 질서를 탐색할 때 등장한다. 당대의 삶을 포착하는 어느 한 순간은 무엇과 무엇이 연결되고, 그 연결에서 어떤 힘의 관계가 소묘되며, 이를 바라보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내적인 질서에 의해 그 역동적인 힘을 발휘한다. 풍속화로서의 신윤복의 그림에서 그 결정적인 동인이 늘 화폭 구석에 숨어있는 관음적 구경꾼이며 그를 통한 응시가 그 소우주를 통합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이용민 의 < 서울의 휴일 >은 1950년대 한국의 흥미로운 풍속화인데 특히 풍속의 이미지들과 이를 바라보고 통합하는 응시 사이의 메워지지 않는 간격들 그리고 그로 인한 불안이라는 맥락에서 그렇다. 영화는 산부인과 의사인 희원( 양미희 )과 신문기자 재관( 노능걸 ) 커플이 겪는 휴일 하루 동안의 모험과 그 주변 캐릭터들의 앙상블이 빚어내는 에피소드의 연쇄로 전개된다. 1950년대의 여느 한국영화와 마찬가지로, <서울의 휴일> 역시 당대 한국영화를 관통하는 운동, 즉 근대적 가치의 전지구화와 1950년대의 한국이라는 로컬의 특개성이 절합되는 폭풍 안에 놓여있다. ‘프랜(plan),’ ‘에고이스트’ 등 대화에서 넘쳐나는 영어, 디올(dior) 풍의 튤립 스커트, 맥주와 호텔 라운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산층 주부들의 요트 놀이 등 이른바 ‘서양 라이프스타일’의 품목들(commodities)을 당대 일상의 풍경 안에 빼곡히 채워 넣으면서, 영화는 3세계 포스트 식민경험에서 대중문화가 수행하는 전시(exhibition)의 전형적 양태를 보여준다. 서구화에 대한 판타지적 열망과 로컬 현실의 절합을 매개하는 이 품목들은 고전 할리우드 서사와 양식적 세련미에 대한 이용민 (그리고 1950년대 대부분의 한국 영화감독들)의 열정 안에서 그 매력을 발산한다. 후암동 살인사건의 단서를 쫓는 재관의 카 체이싱 장면이나 살인범과의 육탄 액션 장면은 (당시 열악한 제작조건을 감안했을 때) 제한적이나 다양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앵글, 장식적 미장센 등의 시각적 양식에 대한 이용민의 영화적 재량과 취향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프랭크 카프라와 프레스톤 스터지스를 오가는 걸작 스크루볼 코미디의 꼼꼼한 참조나 (종종 서사의 흐름을 훼손할 정도로 각각의 장르적 재미가 강조되는) 로맨틱 코미디와 가족 멜로드라마, 액션과 미스터리의 혼용 등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 서울의 휴일 >의 고전 할리우드 양식은 (미리엄 한센의 말을 빌자면) 20세기 초 전지구적 영향력을 갖게 된 미학적, 산업적 규준이자 (미국적) 근대 가치 체계의 운반체인 이른바 ‘통속적 모더니즘(vernacular modernism)’의 장치로 기능한다. 요컨대, <서울의 휴일>에서 형식적 매끈함과는 거리가 먼 채 강박적으로 모방되는 고전 할리우드 양식은 로맨스를 구성하는 판타지의 품목들이 배치되는 재현의 격자, 풍속화를 구성하고 통합하는 ‘응시’의 장소다. 2. 로맨스라는 서사의 우주 안에서 응시가 통합하려는 대상은 바로 성관계다. 대중서사로서 로맨틱 코미디는 성관계를 규정하는 남근적 질서에 대한 대항하는 운동과 이를 다시 그 질서 안에 재포획하여 안정시키는 힘이라는 모순적 관계 안에서 그 재미를 만들어간다. 이른바 ‘신세대’ 엘리트 커플인 희원-재관 부부는 이러한 모순적 힘 관계를 체현하는 주인공이며, 여기에 옆집 부부나 재관의 동료 기자들, 임신한 앞집 처녀와 재관이 우연하게 만나는 ‘살짝 정신 나간 그녀’ 등 그들 주변의 인물들 역시 1950년대 한국의 서구적 근대화를 대표하는 변화 중 하나인 성관계 질서의 변화와 대항을 체현한다. 대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 성차의 만화경은 (5,60년대 여타 한국영화에서처럼) 돈 버는 아내, 공부 많이 한 여자, 연애하다가 임신한 처녀, 남편 속이고 총각들과 ‘엔조이’하는 주부 등 ‘노는 언니들’에 노골적으로 집착한다. 요컨대, < 서울의 휴일 >의 로맨스 서사 역시 짐짓 20세기 중반 한국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관통하는 욕망인 ‘즐겨라!’ 명령을 수행하는 언니들이 - 돌아와 반성하거나, 너무 즐기다 쫓겨나면서 - 그 핵심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 기존의 질서 안에 통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행복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을 확인하는 희원과 재관 위로 서울의 야경과 보름달이 장관을 이루는 이중노출 쇼트는 응시의 시각화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뻔뻔한 종류의 이미지다. 그런데 < 서울의 휴일 >을 흥미로운 텍스트인 것은 고전 할리우드 양식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그 불완전한 구축, 그리고 서구 근대가치와 로컬의 경험 사이에서 메워지지 않는 구멍, 납득되지 않는 흔적으로 얼룩진 이 응시 때문이다. 영화의 플롯은 ? 이 영화가 재관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 로마의 휴일 >의 오드리 헵번-그레고리 펙 커플의 로맨틱한 휴일과는 정반대로 ? 휴일 하루조차도 함께 할 수 없는 부부의 상황에 기초한다. 특종에 눈이 멀어 아내와의 로맨틱한 휴일도 반납한 재관은 전형적인 목적지향의 히어로로, 문제의 ‘보름달 장면’에서 그가 행복할 수 있는 건 우여곡절 끝에 획득한 특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반면 ‘즐길 준비’가 다 된 희원에게 재관의 목적은 방해물일 뿐이다. 그녀의 로맨틱한 휴일은 오직 일벌레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펼쳐지는 공상 안에서만 가능하다. 공상하기를 그만둔 희원은 남편 없이 외출을 하지만. 친구들과 다과를 하고 우연히 마주친 남편 동료들과 미니 골프를 즐기고 맥주 한잔을 해도 남편이 없으니 로맨틱할 리가 없다. 영화는 ‘남편 없이 나간 아내’의 화려한 외출을 애써 지루한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한마디로, 희원은 놀아도 즐겁지가 않은 여자다. 그녀가 이 이상한 휴일을 행복하게 마감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우연히도 후암동 살인범 아내의 출산을 돕게 된 ‘일’이다. 결국 부부 모두 즐기라는 명령을 온몸으로 신경증적으로 거부하면서 질서정연한 남근적 일상 안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플롯 안에서 휴일 내내 어딘가 아리송해하는 희원의 묘한 표정이 자꾸 눈길을 끈다. 친구들과의 다과, 남편 친구들과의 음주라는 발랄한 장면 안에서 희원은 대사도 목적도 없는 묘한 클로즈업으로 종종 포착된다.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그녀의 휴일이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이다. 서사의 용도에 의한 정확한 그림값을 부여받는 재관과 기타 캐릭터들과는 달리, 희원을 둘러싼 이 이상한 장면구성은 고전 할리우드 양식의 불완전한 구현이라 치부하기에는 그녀의 묘한 얼굴을 지나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낳는데 이는 영화의 후반부 살인범 아내의 출산이 끝난 후 링거를 바라보는 희원의 클로즈업에서 가장 도드라진다. 웅장한 음색의 교향악 음색(그녀는 로맨틱한 휴일의 피날레를 이 연주회로 끝내고자 했다)이 깔리는 이 장편은 서사 기능으로는 턱없이 넘치고 성애적 이미지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 곤혹스러운 무의미의 얼굴은 불쾌의 흔적, 분노의 공격 마냥 그녀의 엔조이를 허락하고 방해하고 통제하는 서사와 응시에 대한 대항하는 것 같다. 이러한 희원의 존재는 무의미로서의 ‘정신 나간 여자,’ 그리고 ‘진격의 엔조이 걸’인 옆집 주부로 인해 더욱 부각된다. 무의미로서의 분열증은 차치하고서라도, 옆집 주부는 < 서울의 휴일 > 아니 당대 한국영화에서 아마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 중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영화의 초반 희원에게 임신 3개월임을 고백하면서 ‘애가 다 뭐람, 귀찮게...“라며 불평하던 그녀는 로맨틱한 휴일을 기대하며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을 저버린 채 미용실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남편 몰래 총각들과의 ‘썸씽’을 즐기다 저녁이 다 되어 귀가한다. 골난 남편을 달래 함께 외식을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은 금슬 좋은 부르주아 부부의 교과서적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정자에서 어깨춤을 추는 남편을 귀찮다는 듯 쳐다보며 무심하게 태평가를 부르는 그녀의 얼굴은 ‘유부녀가 엔조이하기엔 정말 피곤한 세상이야’라고 푸념하는 ‘자유부인’의 완전범죄를 대변하는 것 같다. 이렇게 질서의 바깥에 선 무의미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쾌락 (그리고 범죄자의 아내와 미혼모라는 주변성) 사이에서, 서구적 근대 여성 희원의 어리둥절한 얼굴은 <서울의 휴일>이라는 풍속도에 덧칠된 흔적, 통합하는 응시가 미처 통제하지 못하는 불안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