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티
- 감독
- 브루노 뒤몽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엠마뉴엘 쇼떼, 세브린 카닐, 필립 툴리에, 지네트 알레그르
“나는 영화를 보러 간다기보다는 전례 없는 시간성을 즐기기 위해 간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래서 영화관에 자주 간다고 말이야” - 장 루이 세페르,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중 1. 영화는 처음부터 시간의 마술이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열차의 도착>을 처음으로 상영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시간의 마술사들이었다. 잘 알려진 일화지만 뤼미에르는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완성한 뒤, 자신의 공장(뤼미에르 형제는 카메라 부품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들이기도 했다) 사람들과 일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이내 그것을 유료 공개하였다. 뭔가 흥미로운 볼거리를 보여주겠노라고 그들은 호객했고, 호기심에 휩싸인 사람들이 1프랑의 돈을 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카페에 인위적 어둠을 만든 뒤, 공간 정면에 시오따 기차역 사진을 크게 영사했다. 이 순간 사람들은 속으로 ’별거 아니군. 그저 커다란 사진일 뿐이야‘라며 실망했다. 그 시대, 확인되지 않은 볼거리를 위해 1프랑의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70여 년 전(1820년대 사진 발명)에 처음 등장한 ’사진 이미지‘에 낯설지 않은 중산 계급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정지된 사진 속 이미지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화적 매혹‘의 탄생이었다. 영화사 초창기를 기록하는 자료들에 의하면 이때 뤼미에르 형제는 의도적으로 ’정지된 순간‘을 연출하였다. 익숙하다고 간주되는 것에 ’시간‘의 마술을 부여함으로써 놀라움과 매혹을 연출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 눈 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가상의 세계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한 순간을 소환한 것이었다. 지나간 시간을 현재화하는 능력, 영화는 시간을 지배하는 예술이었다. 영화 편집에 관한 다큐멘터리 <컷팅 엣지>(2004)에 인터뷰어로 등장했던 영화 감독, 롭 코헨이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편집할 수 있기 때문 일거에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편집하고 싶어 합니다. 나쁜 일, 지루했던 일은 잘라버리고 좋았던 것만 더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요.”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의 삶에서 지루했던 일상과 나빴던 일들을 송두리째 들어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통해 불가역적인 시간을 통제하고픈 욕망을 발현한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물리적 시간에 감금된 ‘평범한 인간’에게 영화는 (적어도 창작자에게) 시간 지배자의 위상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이쯤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는 오늘날 할리우드 감독들 중 가장 소란스럽고, 거창하며,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영화적 시간’에 대해 유희하는 인물이다. 늘 언제나 기대를 자극하는 멋지고 웅장한 트레일러를 선보이지만, 정작 본편인 영화는 늘 실망에 마지않는 유아적 영웅주의에서 멈춰서는, 그런 진부한 대작을 만들어낸다. < 인터스텔라 >(2014)와 < 테넷 >(2020)을 통해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병렬적인 세계의 차원과 열역학 엔트로피까지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란한 언사와 스펙터클의 제스처 바로 뒤편에서 그의 영화들, 특히 이번 영화 <테넷>을 지탱하고 구성하는 본질적인 장치들은 팍스 아메리카를 설파했던 80년대식 하드바디 영웅주의 서사에 묶여있다. 팀 버튼의 분열적 반영웅 ‘배트맨’을 초국적 자본의 스펙터클 하드바디로 전락시킨 < 배트맨 비긴즈 >(2005)는 물론이고, 2차 대전의 애국적 영웅주의를 설파했던 <덩케르크> 그리고 이번 영화 <테넷> 역시, 미국의 CIA 요원이 탐욕스러운 구소련의 악당에 맞서 제3차 대전을 막아내는 새로운 위인 서사에 불과한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 터미네이터 >(1984)를 물리학 용어로 재각색한듯한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적 스펙터클로서 시간을 재구성한다. 미래의 침입과 인버전, 역행하는 시간의 언캐니한 속도감. 화려한 오페라극장에 대규모로 동원된 관객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떨구며 수면으로 빠져드는 초현실주의적 모멘트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적 물질성에 입각한 세트 촬영의 지표적 이미지라 할지라도 그의 영화는 결국,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시간의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감을 창출하는 시간적 연쇄의 합리성으로 구성된 허구, 근대적 자본주의 권력과 질서를 인과론과 합리성의 체제 내에서 지각하고 수용케 하는 시간의 허구 말이다. 미래의 침입이라는 SF적 상상력이라면 이미 1962년, 크리스 마르케가 완성한 <환송대>의 영화적 체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포토 로망으로 호명된 이 영화는 정지된 사진 이미지의 연쇄와 단 한 순간 제시되는 움직이는 이미지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3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세계, 미래의 과학자들은 한 남자를 대상으로 시간여행을 실험한다. 그는 이미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과거의 공간, 죽은 자들의 시간으로 침입해가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금지된 사랑은 그를 실험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결국 그는 미래의 사도들에 의해 쫓기다 살해된다. 1958년에 공개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 대한 오마쥬와 병렬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 이미지, 그리고 그 시간을 살아갔던 남자에 대한 기억과 흔적, 죽음과 소멸에 대한 놀라운 은유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이미 반세기 전 영화 역사에 등장해 시간에 관한 가장 매혹적인 사유와 이미지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이후 등장한 모든 영화는 <환송대>가 이미 성취한 예술적 경지 주변부를 배회할 수밖에 없다. 3.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늘 궁금하다. 예전 사사로운 리스트에 < 덩케르크 >(2017)를 언급하면서, 그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의 한 장면에 견주어 혹평을 했음에도 그 영화가 지닌 과감한 시간 배치의 모험은 흥미로웠다. <테넷>도 다르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서사와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진부하고 보수적이지만, 그는 어쨌든 할리우드의 막강한 자본력과 인력을 동원해 첨단의 영화를 물리적으로 직접 찍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첨예한 방식으로 그리고 동시대적 감각으로 영화를 통해 시간을 사유하고, 구축하고 그리고 압축할 수 있는 감독이기도 한 것이다. 맑스주의 학자인 데이빗 하비가 90년대 발표한 대표 저서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은 동시대 문화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시공간을 압축하고 사유할 수 있는지에 관한 흥미롭고 정치한 논리를 선보인다. 그중 그가 분석 사례로 제시하는 < 블레이드 러너 >(1982)에서 인조인간 ‘로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욕망하고 동기화하는 시공간 압축의 가장 첨예한 은유로서 분석된다. 로봇에게 부여된 4년의 작동 시간, 고도록 집약된 노동 능력,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축적된 인공지능 로봇의 기억과 감정, 추억과 연민, 공포와 분노 등은 우리가 무심하게 신격화하는 용어 ‘휴머니티’를 반성할 것을 촉구한다. 즉 ‘로이’는 당대의 자본주의 경제가 지향하는 시공간 압축과 기계화된 인간 노동에 대한 욕망의 상징이자, 탁월한 SF 영화의 기념비적 캐릭터이자, 인간 삶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중층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흥미롭다는 것은, 달리 말해 데이빗 하비의 방식처럼(혹은 랑시에르의 방식처럼), 그의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문화가 집결한 그곳에서 영화적 시간을 구축하고 욕망하고, 재현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지각하고 감각하도록 강요하는지 흥미로운 것이다. 즉, 영화 제작의 최첨단에 선 그가 반영하게 될 지금 세계의 모습, 첨예한 속도전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시간에 대한 감각, 일방향적 속도를 넘어 이제 모든 차원의 시간을 다 통제하고야 말겠다는 전체주의적이고 전능주의적인 신화, 그리고 그 시간을 서사화하고 스펙터클화하는 전시주의의 욕망.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그러한 흔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4. 다소 러프한 방식으로 ‘영화적 시간’을 정의하다 보면, 2019-20년에 선보인 영화들은 꽤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감각과 욕망을 드러낸다. 그중에서 가장 아쉽고 이상해 보이는 영화는 샘 멘데스의 영화 < 1917 >(2019)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경이해 마지않는 촬영 감독 로저 디킨스와 함께한 이 작품에서 그는 이냐리투 감독의 < 버드맨 >(2014)과 스탠리 큐브릭의 < 영광의 길 >(1957)에서 보여준 형식적 실험과 주제 의식을 매우 지루하고 나이브하게 모방하고 반복한다. 폭격을 막기 위한 지령을 들고 목적지까지 질주하는 병사의 시간을 추적하는 이 작품이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이미 이냐리투 감독이 2014년, 뛰어난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벳츠키와 함께 선보였던 <버드맨>의 아류처럼 보이며, 전쟁의 불모함과 광기, 병사들에 대한 연민과 공포는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영광의 길>에서 선보인 참호전의 잔혹함과 기만성을 통렬하게 성찰했던 것에 전혀 가닿지 못한다. 과거로 향하는 시간 여행에서 눈에 띈 또 다른 영화는 켈리 레이카트의 < 퍼스트 카우 >(2019)와 폴 그린그래스의 <뉴스 오브 어 월드>이다. 이 두 편은 모두 1870년대 서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서부 역사의 결을 거스른다. 그러나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는 자상한 백인 중년 아버지상을 대변하는 톰 행크스를 서부로 데려간 것 이외엔 아무 특이점이 없다. 반면 켈리 레이차트의 <퍼스트 카우>는 그녀의 전작 < 믹의 지름길 >(2010) 못지않게 완연히 새로운 서부의 시간과 사건을 기록한다. 서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가난하고 비루한 백인 남성과 중국계 남성. 이들이 살아가는 서부의 시간과 공간은 정복과 개척으로 포장된 승리의 서사도 아니고, 흑과 백, 문명과 야만이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선을 긋는 신화적 공간도 아니다. 빈곤과 공포 속에서 오직 생존하기 위해 서부를 배회해야 했던 가련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연민과 기억,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상기하고자 하는 영화이다. 그 외 2019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마티 디옵 감독의 < 애틀란틱스 >(2019)는 매우 심플하지만 시선의 지형과 주체를 바꾼다는 점 그리고 현실의 시간과 초현실적 시간(죽은자의 시간)을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강렬하다. 이주 노동, 난민 등의 문제는 언제나 유럽 1세계 백인의 관점에서 서술되곤 하였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난민 문제를 포용하거나, 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문제시하거나, 혹은 휴머니즘과 낭만적 서사를 결합하거나. 그러나 마티 디옵은 1세계의 시선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혹은 난민의 대지 바로 위에서, 그들 계급의 시선으로 ‘이주’와 ‘착취’를 묘사한다. 경제적으로 불모한 땅에 사는 젊은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젊은 여성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을 청년들이 자취를 감춰버린다. 영문 몰랐던 여인들에게 들려온 소식으로는 그들 모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바다를 건너던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들의 비통함과 부재의 흔적들. 그러던 어느 밤. 청년들이 돌아온다. 더 이상 산자가 아닌, 죽은 자의 영혼이 되어 그들은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의 육체에 강신된다. 그리고 강신된 육체가 향하는 곳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고향의 착취적 자본가들. 바다 저편에서 죽은 자가 귀환해 그들의 원통함을 해결하는 것은 흡사 존 카펜터의 호러 < 안개 >(1980)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마티 디옵의 <애틀란티스>는 오컬트 호러라는 장르적 포뮬라나 컨벤션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정학과 계급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다. 새로운 ‘제 3영화’적 포지션 속에서 포개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시간은 처연하면서도 인상 깊은 계급 정치학을 피력한다. 2020년, 압축된 시공간의 논리를 보다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냄으로써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은 샤디프 형제의 < 언컷 젬스 >(2019)일 것이다. 그들의 전작 < 굿타임 >(2017)에 이어 숨 가쁘게 이어지는 사건과 사운드, 대사, 움직임 등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모두의 찬사를 받았던 아담 샌들러의 연기는 곤혹과 절박, 신경증과 불안, 허세와 짜증에 관객까지 연루시키는데 여지없이 성공한다. 5. 그러나 2020년 영화 중 가장 정서적으로 공명할 수 있는 시간 이미지를 선보인 작품은 클로이 자오의 영화 < 노마드랜드 >(2020)이다. 사실, 사사로운 리스트를 제출한 이후에 접하게 된 이 영화는 매우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를 기억에 각인시킨다. 그것은 주인공 프랜시스 맥도맨드(극 중 캐릭터, 펀)가 텅 빈 사막지대를 배경으로 무심하게 서 있거나 걸어가는 옆모습을 클로즈업으로 팔로잉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유목적 삶을 선택한 노년의 여성을 따라간다. 60대 여성 ‘펀’은 낡은 자동차 한 대에 자신의 모든 짐을 싣고 1년 단위로 노동과 공동체를 찾아 이주하며 살아간다.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묘사하지 않는 이 영화는 다만 유목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 얼굴, 회한, 소망 등을 가끔씩 응시할 뿐이다. 만들어진 모든 쇼트들에 유기적인 사건과 시간의 의미를 채워놓고자 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과 이 영화가 대비되는 지점은 이 영화가 모든 쇼트들로부터 시간의 강박을 지워버리고, 특정 의미를 채우려 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며, 무한히 열어 놓는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난 직후, 우연히도 읽게 된 글이 있었다. 앙드레 바쟁이 자크 타티의 영화 < 윌로씨의 휴가 >(1953)를 분석하며 썼던 평론 “윌로씨와 시간”.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윌로씨가 1년 중 10개월은 사라졌다가 7월 1일, 임시적인 시간이 형성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나타남과 사라짐, 그러한 반복의 시간은 무용한 행위가 반복되는 시간이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리듬을 지닌 ‘의식의 시간’이라고 바쟁은 명명한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시간의 방향은 원인에서 결과로, 시작에서 끝으로 향해 간다. 하지만 <윌로씨의 휴가>는 이런 것들과는 반대로 나아간다. 아마도 시간은 그 점에서 이 영화의 소재가 아니라 이 영화의 목적 그 자체가 아닌가 한다.”(앙드레 바쟁, “윌로씨와 시간” 중) 바쟁은 따띠가 창출한 ‘윌로씨의 시간’에서 그가 영화 속 근대 사회 체제에 순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 감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영화는 윌로라는 캐릭터를 통해 근대적 시간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새로운 영화적 시간과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마드랜드>가 감히 자크 타티의 영화에 비견될 수 있겠느냐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반복 관람한 직후, 우연히 접한 이 영화의 리듬과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 이외에 다른 것을 갈구하지 않는 ‘펀’의 무심한 시간들과 표정은 <테넷>에서 묘사된 필사적인 그 모든 것들을 가볍게 눌러버리며, 놀라운 정서적 공명을 만들어낸다. 특정한 방향으로 질주하길 재촉하는 시간 이미지들에 대비되어 <노마드랜드>에서 프랜시스 맥도맨드의 얼굴 이미지가 선택하고 열어놓은 시간은 그 모든 시간에 대한 강박을 털어버리게끔 하는 것이다. 장 루이 세페르의 말처럼, 영화는 전례 없는 여러 시간을 체험하는 여행이다. 그 시간은 때로는 영화 창작의 주체가 치밀하고 꼼꼼하게 채워 넣은 플롯들과 서사의 시간이기도 하고, 지금 내가 들어가 관람하는 극장이 존재하는 동시대적 시간이기도 하고, 또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억을 끄집어내어 영화라는 외부적 이미지와 접촉해 만들어내는 감각 경험적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테넷>부터 <퍼스트 카우> 그리고 <노마드랜드>까지, 영화는 그 모든 다양한 시간에 대한 체험과 기억, 욕망과 불안을 모두 열어놓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영화가 구성하는 시간의 매혹이다.
2011년 10월 중국의 TV 뉴스를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유괴 사건이 있었다. 중국 광둥성에 있는 신흥 공업 도시인 선전(우리가 흔히 심천이라고 부르는, 홍콩 바로 위에 있는 도시). 시골에서 그곳으로 온 어느 건축 노동자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간다. 그와 아내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데려간 남자아이는 길을 잃고 떠도는 듯 보였고, 두 번째 데려간 여자아이는 건축 현장에 누가 버린 듯했다. 그렇게 그 부부는 두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다. 반면 아이를 잃은 부모는 백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남자아이의 부모는 잃은 지 2년 만에 제보를 받고 찾아간 안후이성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아들을 되찾는다. 이 극적인 실화는 피터 챈(진가신) 감독에게 강렬하게 다가왔고, < 디어리스트 >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드물게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인 ‘고발’에 있지 않다. <디어리스트>에서 그는 유괴를 다루는 범죄 영화 장르의 관습을 따르는 듯하면서 위반하고, 두 개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 놓는다. 아이들의 실종이나 유괴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은 엔딩 부분에 가서야, 아이를 찾든 못 찾든 사건의 결말을 맞이한다. <디어리스트>는 다르다. 러닝타임의 중간쯤 왔을 때 우린 사라졌던 아이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걸 보게 된다. 조금은 황당하다. 진가신 감독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전반부의 뜨거웠던 드라마의 온도를 떨어트리지 않으면서, 나머지 절반을 채워나가려는 걸까? 놀라지 마시라. 이 영화는 아이를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전반부보다. 찾은 후의 이야기를 담은 후반부가 더 뜨겁고 흥미진진하다. 티안펭(주지오)이 사라진 날은 2009년 7월 18일이다. 아이의 아버지인 티안웬준(후앙보)과 어머니인 루시아오주안(하오레이)은 이혼한 사이다. 양육권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PC방 주인. 손님들 사이에 싸움이 붙자 티안웬준은 아들에게 다른 데 가서 놀라고 하고, 아이들과 놀던 티안펭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후 스토리는 예상대로다. 루시아오주안은 아들을 잃어버린 전남편을 탓하고, 두 사람은 아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나선다. 아버지의 삶은 피폐해지고, 어머니(재혼한 상태)는 매일 고통 속에서 지낸다. 같은 처지에 있는 부모들의 모임에 나가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슬픔은 잦아들지 않는다. 현상금을 노린 사기꾼들에게 속기도 하고, 아주 작은 단서만 있어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지만 번번이 허탕 친다. 멘탈은 점점 약해져 때론 포기하려고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순 없다. 이때 전화 한 통이 온다. 발신지는 선전에서 1,000Km 이상 떨어진 중국 중부의 안후이성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이다. 그곳에 사는 한 사람이 우연히 전단지를 보았고, 마을에 매우 흡사하게 생긴 꼬마 하나가 살고 있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그곳에 도착한 티안과 루는 2년 만에 아들을 되찾는다. 2년 동안 아들을 키워 온 사람은 리홍친(자오웨이). 남편 양밍푸는 1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찰서에서 털어놓는 그녀의 말은 기막히다. 부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였는데, 2년 전에 남편이 티안펭을 데려오면서 도시에서 만난 여자를 통해 낳은 아이라고 했다는 것. 여자아이 양지팡(리지칭)은 누군가 버린 아이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홍친은 남의 아이를 훔쳐 기른 악녀일까? 여기서 피터 챈 감독은 일종의 ‘이중성’을 통해 이야기를 뒤틀고 역설을 만들어낸다. 그는 티안과 루 부부의 아이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리홍친의 모성애가 위대함을 보여준다. 그녀는 범죄자가 아니다. 아이를 가지고 싶었지만 그럴 운명을 타고나지 못한 비련의 여인이며, 남편의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믿었던 순진한 여자이며, 아이들을 진정 사랑으로 돌보았던 좋은 엄마이다. 티안펭은 자신의 생부와 생모를 거부하고 “엄마가 보고 싶다”며 리홍친을 찾는다. 티안과 루가 리홍친의 집에서 아들을 데리고 가는 장면은, 그들이 진짜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괴를 하는 듯하다. 티안은 아들을 둘러메고 미친 듯이 달리고, 리홍친과 마을 사람들은 그를 추격한다. 경찰이라는 공권력의 보호가 없었다면, 그는 아이를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 디어리스트 >의 후반부는, 선전으로 온 리홍친의 이야기다. 어린 딸 양지팡은 복지 시설로 갔고, 리홍친은 되찾으려 한다. 시설에선 유괴범에게 다시 아이를 돌려주는 법은 없다고 일언지하로 거절하고, 리홍친은 남편이 버려진 아이를 데리고 오는 걸 본 증인이 있다고 한다. 죽은 남편의 동료인 탕칭샨(리우 디)이다. 아이를 되찾으려면 증인과 함께 변호사가 필요했고, 천신만고 끝에 가오시아(통다웨이)를 설득해 법정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흥미진진한 건, 주변 인물에 대한 피터 챈 감독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플롯 구조는 독특한데, 전반부와 후반부의 주인공이 다르기에 메인 플롯의 관점이 영화 중간에 한 번 바뀌게 되며, 조연들과 관련된 서브 플롯은 이야기 전개를 매끄럽게 만들기 위한 곁가지가 아니라,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와 테마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실종 부모 모임의 회장인 한더종(장이)는 6년째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포기하고 둘째를 낳으려 한다. 중국은 가구당 1명만 출산할 수 있기 때문에 당국의 출산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첫째 아이의 사망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가오시아는 전형적인 속물 변호사처럼 보이지만, 그에겐 아픈 가족사가 있다. 티안웬준이 아들을 찾는 과정에서 만난 한 남자는, 자기의 아들을 대신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가난해서 키우기 힘들다는 것이다. < 디어리스트 >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그 전후 맥락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겐 말 못 할 사연과 자신들만의 고통과 타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범죄의 난무, 도시와 시골의 격차, 빈부 문제 등 현대 중국 사회의 환부를 비판적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좀 더 큰 관점에서 삶이라는 드라마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 금지옥엽 >(1994)이나 < 첨밀밀 >(1996) 등 피터 챈 감독을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린 작품들이 지녔던 강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 디어리스트 >가 인상적인 건, 이 드라마엔 가해자는 없이 피해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리홍친의 남편은 언급만 될 뿐 등장하지 않고, 영화에서 실제적으로 벌어지는 건 예상치 못했던 비극적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애통함이다. 티안과 루는 그렇게 갑자기 아들을 잃을지 몰랐고, 리홍친은 두 아이를 하루 아침에 빼앗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실종 부모 모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고, 정신적 문제로 투병 중인 어머니를 둔 가오시아도 마찬가지다. 유괴 사건에서 시작한 영화는 자칫 범죄 영화의 관습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피터 챈 감독의 관심사는 사건보다는 사람이었던 셈. 여기서 감독은 삶의 여러 아이러니를 만들어나간다. 되찾은 아이는 오히려 리홍친을 그리워하고, 이혼한 부부는 사건을 통해 가까워지며, 루는 재혼한 남편과 이혼하려 한다. 가오시아는 맡지 않으려 했던 리홍친의 사건을 통해 휴머니티를 되찾고, 새 아이를 가지려는 한더종은 또 다른 죄책감에 빠져야 한다. 마지막 신은,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리는 아이러니다. 너무 강력한 스포일러이기에 차마 밝힐 수 없지만, 리홍친은 엄청난 진실 앞에서 주저 앉게 된다. 어쩌면 이 모든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으며, 그랬다면 그 모든 고통과 혼란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피터 챈 감독의 드라마틱한 세계관이며, 이 영화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기도 하다.
댄 애크로이드는 SNL을 떠나는 존 벨루시와 자신을 위해 독특한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현재의 소방서나 긴급의료원처럼 미래에서 유령을 전담해 싸우는 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고스트스매셔’라는 작품이었다(후에 소방서는 영화상 그들의 본부로, 긴급의료원 앰뷸런스는 그들의 출동차량으로 재활용되긴 했다). 당시 친분이 있던 제작자이자 감독 아이반 라이트먼에게 재정적인 자문을 구한 결과 ‘적어도 3억 불!’이란 비현실적인 예산 들 것 같다는 진단에 따라 각본가이자 감독이고, 배우이기도 한 해롤드 래미스의 도움을 얻어 각본은 현대로 대폭 수정되었다. 아이반 라이트먼은 그 아이디어를 맘에 들어 했고, 준비 중이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떠나 이 영화에 합류했다. 그러나 애초 주연으로 고려됐던 배우 3명은 모두 불가피하게 하차하고 말았다. 존 벨루시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났고, 에디 머피는 같은 해 개봉할 < 베버리 힐즈 캅 > 출연으로 고사했으며, 존 캔디는 배역 문제로 거절했다. 결국 해롤드 래미스는 자신과 친한 빌 머레이를 끌어들였고, 자신도 직접 출연을 결심해 댄 애크로이드와 함께 멤버가 꾸려졌다. 이것이 1984년 큰 흥행을 이뤄낸 < 고스트버스터즈 >의 출발이었다. 해롤드 래미스, 빌 머레이, 댄 애크로이드 내쇼널 램푼과 SNL 멤버 출신이 뭉친 제작진답게 음악에서도 그들과 함께해온 엘머 번스타인이 참여했다. 그는 아카데미 역사상 유일하게 50년대, 60년대, 70년대와 80년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까지 60년에 걸쳐 모두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진기록을 가진 전설적인 작곡가였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을 선보여 왔는지 단적으로 증명한 예이기도 했다. 엘머 번스타인은 처음 영화음악에 모던 재즈를 도입했고, 5-70년대 서부극의 군주로 무시무시한 맹위를 떨쳤다면(물론 드라마 장르에 있어서도 유어출청(遊魚出聽)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코미디의 제왕으로 새롭게 왕좌를 옮겨 흥행을 보장했다. 따스하면서도 유쾌한 활력을 선사하는 그의 아름답고 신나는 테마들은 얼빠지고 황당하며 동시에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을 감싸주며 편안하게 해학과 풍자를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동시에 어떤 장르와 섞여도 커버할 수 있는 넓은 범주와 탄탄한 기본기는 음악적인 기교와 반짝이는 효과에 기대지 않는 진정한 재미와 감동을 전달했다. < 애니멀 하우스 >를 시작으로 <미트볼>과 <괴짜들의 병영 일지>, < 에어플레인 >, < 대역전 >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고스트버스터즈>에 이르며 그 정점에 올라섰다. 엘머 번스타인 가장 잊을 수 없는 건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고스트버스터즈 테마’다. 엘머 번스타인은 여기서 ‘옹드 마르트노’라는 테레민 개량형에 해당하는 음색을 지닌 프랑스산 초기 키보드를 사용해 몽환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독특한 비브라토(진동음)와 포르타멘토(음에서 음으로 옮길 때 극히 미끄럽게 이어지는 음) 효과를 들려주는 이 악기는 마치 부유하는 영혼을 생생히 담아낸 것 같은 기분을 안겨주는데, 이에 경쾌한 피아노와 뒤뚱거리는 튜바의 스윙감을 덧입혀 영화의 귀엽고도 유머러스한 면을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러브 테마처럼 활용되는 ‘다나의 테마’도 빼놓을 수 없는데 설레고 두근거리는 감정을 옹드 마르트노와 첼로(극중 시고니 위버가 맡은 다나의 직업이 첼리스트였다)로 따사롭게 그려내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는 의도적으로 웃긴 음악을 만들기보다 영화의 스토리나 감성, 배우들의 연기를 받쳐주는 데 집중했고, 이는 과장되지 않은 진솔함과 휴머니티를 부과했다. 다만 살아생전 거의 하지 않았던 호러적인 요소들(220편이 넘어가는 필모 중 공포영화는 다섯 작품이 채 되지 않는다!)과 영웅담 스코어로서 그가 오독한 부분들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메인 테마를 변주한 로큰롤 스타일의 큐들은 영웅찬가로 보기에 지나치게 경박했고, 후반부 장중하게 가라앉는 심포닉 스코어는 전체적인 톤과 어긋나며 이질감을 안겨주었다. 그런 이유로 오프닝 타이틀을 비롯해 여러 곡이 삽입되지 못하며 다른 곡으로 대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Who you gonna call? Ghostbusters! 졸지에 바뀌어버린 오프닝 타이틀을 차지한 건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레이 파커 주니어가 담당한 동명의 주제가 ‘고스트버스터즈’였다. Who you gonna call? Ghostbusters!의 후렴구가 인상적인 이 노래는 타이틀 외 중간의 몽타주와 엔드 크레딧에 걸쳐 총 세 번 영화에 등장하며 말 그대로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3주간 빌보드 차트 1위에, 아카데미 주제가상 부문에도 노미네이트되며, 전 세계적으로 300만 장이 넘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다고 안타깝게도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의 ‘I Want a New Drug’과 표절 시비에 휘말리며 11년에 이르는 긴 송사도 치러야 했다. 엘머 번스타인의 로큰롤 스코어 대신 자리를 차지한 건 The Bus Boys가 부른 진짜 로큰롤 ‘Cleanin’ up the town’이었다. 주제가와 마찬가지로 초반 도서관에서 도망쳐 나올 때와 호텔로 처음 유령을 잡으러 출동할 때, 그리고 긴 엔드 크레딧 사이에 삽입되며 인기를 누렸다. 그 외 고스트버스터즈 본거지의 전원을 끄며 유령들이 쏟아져 나올 때도 오리지널 스코어 대신 Mick Smiley의 ‘Magic’이 쓰였고, 최후의 격전을 벌이러 출발할 때 비장하게 흘러나오던 곡 역시 앨머의 곡이 아닌 Alessi의 ‘Savin’ the day’가 흘러나왔다. 번스타인의 반려된 곡들은 2006년 Varese Sarabande에서 발매된 3,000장 한정의 완전판 스코어 앨범에서 70여 분에 이르는 온전한 분량으로 접할 수 있다. 지난 2월 24일 고스트버스터즈의 멤버(이곤 스펭글러役)이자 핵심 브레인이었던 해롤드 래미스가 희귀성 혈관 질환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타계했다. 3편 제작에 대한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빌 머레이의 불참 의사에 이어 유령 잡던 유령사냥꾼이 유령이 된 상황. 이제 더 이상 오리지널 멤버의 전원 합류는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과연 고스트버스터즈는 30년 만에 재결성을 할 수 있을까? 제작진은 해롤드 래미스의 죽음까지도 영화에 반영하겠다며 각본 수정에 들어간 상태다. 부디 무사히 볼 수 있게 되기를. 엘머 번스타인의 스코어를 해롤드 래미스의 추모곡으로 띄워본다. 해롤드 래미스 아 그리고 궁금한 점 하나, 대체 영화상에서 에어 서플라이의 노래(I Can Wait Forever)는 어디서 흘러나온 건지. Dana’s Theme Track List 1. Ghostbusters Theme 2. Library/Title 3. Venkman 4. Walk 5. Hello 6. Get Her! 7. Plan 8. Taken 9. Fridge 10. Sign 11. Client 12. The Apartment 13. Dana's Theme 14. We Got One! 15. Halls 16. Trap 17. Meeting 18. I Respect You 19. Cross Rip 20. Attack 21. Dogs 22. Date 23. Zool 24. Dana's Room 25. Judgment Day 26. The Protection Grid 27. Ghosts! 28. The Gatekeeper 29. Earthquake 30. Ghostbusters! 31. Stairwell 32. Gozer 33. Marshmallow Terror 34. Final Battle 35. Finish 36. End Credits 37. Magic 38. Zool (album version) 39. We Got One! (alter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