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범
- 감독
- 허정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염정아, 박혁권, 허진, 신린아, 방유설, 이준혁, 이주원, 길해연, 이율, 박수영, 노수산나, 정지훈, 이채은, 황재원, 장리우, 전현아, 이자령, 이달, 주지훈, 이상옥, 이성배, 임종윤, 이장원, 정준원, 김수안, 조현임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채플린은 언제 ‘위대한’ 채플린이 되었을까. 물론 채플린은 처음부터 훌륭했다. 심지어 맥 세네트가 연출하고 채플린이 주연을 연기한 초기 영화들부터 훌륭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위대하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 누군가는, 여기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채플린의 전문적인 연구자들인데, 1915년에 < 방랑자(The Tramp) >에서 채플린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인물을 이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세상 속의 버림받은 방랑자에서 그 관계를 반대로 뒤집어서 그 자신이 방랑자라는 선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만의 문제 설정을 발명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방랑자로부터 주인으로서의 방랑자로의 전도. 하지만 나는 좀 더 뒤로 더 물러나고 싶다. 어디까지? <방랑자>가 훌륭하긴 하지만 잠시만 그 주변을 돌아보자. 여전히 여기에는 채플린이 자신의 희극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고정하고 일정 거리만큼 물러난 다음 영화 프레임을 무대처럼 사용해서 곡예사의 재주를 한껏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남는다. 문장을 바꿔보겠다. 채플린의 영화를 모두 본 우리는 <방랑자>를 통해서 < 황금광 시대 >(1925)를 보지 않으며, ‘또 다른’ < 방랑자(The Vagabond) >(1916)를 통해서 < 시티 라이트 >(1931)를 보지 않는다. 반대로 < 서커스 >(1928)를 통해서 < 이민자 >(1917)를 볼 것이며, < 모던 타임즈 >(1936)를 통해서 < 개의 삶 >(1918)을 볼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어떤 도약이 놓여있는가. 장편 영화 < 키드 >(1921)가 놓여있다. 채플린이 카메라 앞에 선 1914년 첫해에 키스톤 영화사에서 35편의 단편 영화를 찍었다. 빠르게 영화를 배웠고, 그 해가 끝나기 전에 이미 채플린은 직접 연출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누구나 그랬다. 그리고 1919년 7월 20일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가제(working title)는 <방랑자(The Waif)>. 마치 단편 영화와 같은 간단한 줄거리. 미혼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간절한 편지와 함께 고급 자동차에 놓고 자리를 떠난다. 그 자동차를 악당 두 명이 훔쳐 가고 아이는 길거리에 버린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방랑자가 떠안게 된다. 여차저차해서 방랑자는 아이를 키우게 된다. 그리고 둘은 마치 파트너처럼 이런저런 사고도 치면서 서로 아끼는 부자지간이 된다. 그리고 다시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고 방랑자와 아이는 행복하게 재회한다. 시작하자마자 이 영화는 채플린 없이 5분 동안 진행된다. 연출자 채플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채플린이 빈민가 골목에서 등장한다. 게다가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채플린이 아니라 ‘영화사상 가장 귀여운’ 아역이라고 해야 할 네 살 소년 재키 쿠간이 자기보다 큰 소년을 상대로 빈민가 작은 광장에서 일대일 맨주먹 권투를 하면서 혼내주는 씬이다. 이 장면은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도 매번 웃게 된다. 그런 다음 채플린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키드> 중 (사진: “The Kid( 1 , 2 , 3 )”, IMDb / “ Charlie Chaplin – The Kid – Fight Scene ”, Youtube Charlie Chaplin) <키드>는 채플린의 68번째 영화이다. 필름 길이 5,250피트. 상영시간 1시간 8분. 이 상영시간에서 채플린은 1970년에 재개봉을 위해 15분을 단축했다. 새로운 관객들에게 일부 장면이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53분 판본은 1972년 4월 4일 뉴욕 링컨센터에서 프리미어 상영되었다. 이 자리에는 채플린이 참석했다. 이 상영본이 공식적인 <키드>의 판본이 되었다. 채플린의 나이 32살. 아마 이 영화에 담겨있는 모든 파토스와 유머,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에피소드들, 아니, 보는 쪽에서도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기쁨을 안겨주는 이 영화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재키 쿠간에게서 온 것이다. 그해 봄에 만든 < 양지바른 곳 >(1919)에서 오디션을 통해 재키 쿠간을 발견한 채플린은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재키와의 촬영이 끝나고 댄스홀에서 서로 마주 앉아 1시간 4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살 소년과 할리우드의 거물 사이의 다정한 대화. 재키를 돌려보낸 다음 채플린은 자신의 스탭들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만나 본 중에 가장 놀라운 사람을 지금 만났군.” <키드>의 촬영은 1919년 7월 21일에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채플린은 재키와 영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재키는 개미에 관심이 많았고, 채플린은 함께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자연의 신비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 촬영을 할 때 채플린은 재키가 해야 할 장면의 연기를 그 앞에서 실현해 보였으며, 재키는 그걸 그대로 흉내 내면 되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재키 쿠간은 천재적으로 채플린을 ‘카피’하였다. 재키 쿠간(좌)과 찰리 채플린(우) (사진: “ The Kid ”, IMDb) 여기까지 읽으면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키드>의 줄거리는 장편 영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좋은 질문이다. 채플린은 ‘가제’ <방랑자>를 처음부터 장편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채플린이 준비한 영화는 재키 쿠간과 함께 출연한 세 편의 단편 영화였다. 그때 채플린과 계약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도 그것을 원했다. 그래서 <키드>는 세 편의 영화를 하나로 이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채플린은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이 영화는 한 편이 되는 쪽이 훨씬 깊은 감정적인 호소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에 편집 일부를 먼저 시사하였다. 경영진은 채플린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때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 아내 밀드레드 해리스는 채플린의 재산을 가압류 신청하였다. 채플린은 자신의 첫 번째 장편 영화가 가압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여기에는 반대의 설명도 있다. 밀드레드 해리스가 가압류 대상으로 삼은 건 단편 영화들이었고, 채플린이 장편 영화를 제작할 것으로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채플린의 첫 번째 장편 영화 <키드>가 예술적 결단인지. 아니면 산업적 판단인지, 혹은 재산 분쟁을 둘러싼 변호사의 조언에 따른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과 결정이 서로 실타래처럼 뒤엉킨 것일 수도 있다.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는 밀드레드 해리스 몰래 네거티브 필름을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유타 호텔로 가져가 편집실을 차려놓고 최종본을 완성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비밀리 진행되어야 했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솔트레이크시티에는 현상실을 비롯한 후반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스튜디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 7월 30일에 작업이 끝난 <키드>는 1921년 2월 6일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드>에 채플린은 만족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과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그리피스,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세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옮긴 채플린은 이제 단편 영화로 돌아오지 않았다. 후일담.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채플린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첫 번째 영화는 < 파리의 여인 >(1923)이었다. 이 영화는 채플린이 연출만 하고 출연하지 않은 두 편의 영화 중의 한편이다. 이 영화는 박스 오피스에서 재난을 맞이하였다.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가 길건 짧건 그건 상관없었다. 대중들은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라 ‘방랑자’의 영화를 원했다. 후일담의 첨언. 하지만 나는 박스 오피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리의 여인>은 걸작이다. <키드> 중 (사진: “ The Kid ”,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안진수 교수 는 영화이론 전공으로 학계에 입문한 후 한국학의 관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해왔다. 한국의 언어와 사회, 문화가 영화와 맺는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언어의 사용을 통해 발휘되는 표현력을 중심으로 한국영화를 분석하고 있다. 현재 UC 버클리 동아시아 언어와 문화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한국영화에서의 일제강점기 재현 방식을 분석한 Parameters of Disavowal: Colonial Representation in South Korean Cinema(2018)가 있다. 영화학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한국학자로 강연의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한, 한국영화를 연구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크게 세 가지 변곡점을 떠올렸는데, 첫 번째로는, <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 >(스티븐 스필버그, 1981)를 중앙극장에서 처음 관람했던 시점을 들 수 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액션영화였고, 극중 트럭 추격씬에서 8분간 이어지는 존 윌리엄스(John Towner Williams)의 장엄한 음악이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로 하여금 영화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후에 동일한 제작자 조지 루카스(George Walton Lucas, Jr.)의 <스타워즈> 시리즈에 매료되었다.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과 《로드쇼》를 책방에서 구입해, 조지 루카스에게 쓴 영문 편지를 루카스 필름의 주소로 발송해보기도 했다(지금의 K-POP 팬들처럼). 그때 형성된 영화적 취향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역동적인 액션영화들에 이끌리는 것 같다. <레이더스> 중 / < 스타워즈 >(조지 루카스, 1977) 중 사진: " Raiders of the Lost Ark ", " Star Wars ", IMDb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고, 그곳의 생활에 적응하면서 지역 내 도서관이나 예술영화 상영관에서 꾸준히 영화를 봤다. 같은 시기 영화문화가 융성했던 1990년대 한국을 살아간 시네필들과는 다른 경로로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간 것이다. 그리고 UC 버클리에 영화 전공으로 입학해, 잡지나 책으로만 접했던 영화이론을 공부하였다. 특히 영문학 또는 영화학과의 교수님들로부터 ‘장르영화’를 분석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배움의 범위를 대중적 영화의 영역으로 넓혔던 경험이 유익했다. 완성도는 떨어지는 작품이더라도 이를 문화 안에서 읽어내려는 시도를 이어간 ‘지성’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 시기였다. 학부를 마친 후, 영화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싶다는 생각에 UCLA 영화이론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때 서구의 영화이론과 한국영화 사이에 모종의 괴리가 존재함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UCLA에는 지금까지 왕성히 활동 중인 한국학 연구자들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들과 함께 민족주의에 관한 세미나에 참여하고 관련 강연을 들으며 동아시아학과 한국학 담론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박사논문의 주제로 ‘1950~60년대 한국 멜로드라마의 대중 논리’를 설정했다. 박사논문을 위한 자료 조사를 위해 1년 여간 한국에 머물렀는데, 이때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을 자주 방문하여 한국고전영화를 보았다. 당시에는 연구자들이 한국고전영화를 보려면 영자원이 개최하는 ‘좋은 영화 보기’ 행사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개인이 영화를 선택하여 볼 수 있는 영상도서관을 아직 영자원에서 개관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진 옛날 작품을 무작위로 보면서 오히려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일종의 ‘감각’을 얻게 되었다. 영화 역사가나 평론가에 의해 비중 있게 거론된 적이 없었던 좋은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상당했다(예를 들어, 인공적 세트를 너무나 아름답게 활용한 < 그 여자의 일생 >(김한일, 1957)을 꼽고 싶다). <그 여자의 일생> 중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뉴욕대학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고, 이후 한국어 강사로 1년간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한국영화와 관련하여 오늘 말씀드릴 주제(영화 속 일상언어와 언술행위)를 연구하게 된 데도 당시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듯 싶다. 2007년부터는 홍익대 조치원 캠퍼스에서 영상영화전공 교수로 영화이론과 영화사, 그리고 게임을 중심으로 한 뉴미디어에 대해 강의했고, 2012년부터는 UC 버클리 동아시아 언어와 문화학과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현재 미국 학계 안에서 한국영화는 한국학과 영화학, 미술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통해 연구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학 전반이 그렇듯이 한국학에서도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다 보니, 한국영화는 앞으로 영화학보다 한국학 의 범주 내에서 더욱 활발히 연구되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학에서는 언어, 즉 소통의 수단을 넘어 특정 지역민들의 삶의 형태 전체를 배운다. 영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려면 영자원과 같은 아카이브에서 1차 자료를 접해야 하고, 이외에도 그 지역의 언어로 작성된 수많은 연구 성과를 익혀야 하므로, ‘언어’를 다루는 한국학은 한국영화 연구를 위한 유용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또한 한국영화에 관한 학술 활동이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주체는 여전히 대부분 한국학 관련 기관이며,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국학과에서 ‘한국어’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한국영화’로 옮겨가는 현상도 자주 관찰된다. 다만 한국학과 같은 지역학의 관점에서 영화를 연구할 때 발생하는 한계도 있다. 한국영화를 한국사회와 역사의 단순한 반영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많은 지역학 전공 학생들은 영화 문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본격적인 강의 전에 이에 관한 개념을 먼저 교육할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에 관한 최근의 연구 주제 역시 다양한데, ‘감응’과 ‘정동,’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 집중한 (OTT와 같은) ‘플랫폼’의 문제, ‘재현의 정치,’ 요즘 들어 더욱 주목받고 있는 ‘포스트 휴머니즘’과 ‘신유물론’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또한 특정 지역의 영화를 보다 국제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 간(間)국가적 영화제작 및 문화 연구도 이뤄진다. 나의 한국영화 연구 이력을 소개하자면, 먼저 한국영화에서 일제강점기가 어떻게 재현되었는지를 분석한 적이 있다( Parameters of Disavowal ). 그리고 지금은 영원히 매료될 만한 소재인,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연구하고 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이상한 느낌의 문어체 대사는 무척 흥미롭고, 이 주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그 생각이 번져 다른 한국영화들의 언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Parameters of Disavowal: Colonial Representation in South Korean Cinema (2018) 말문이 트인 한국영화, 대중을 만나다 < 기생충 >(봉준호, 2019)이 보여줬듯이, 2000년대 이후 많은 한국영화들이 대중성과 예술성의 동시 달성이라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요즘 주목받는 감독들의 작품들에서도 꾸준히 확인되고 있는 이러한 한국영화의 특성은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지난 20~30년간 한국사회는 전면적이고도 급진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정권의 권위주의 체제를 탈피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시장 주도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개인의 다양한 욕망이 자유롭게 표현되거나 분출될 수 있게 되었다. 미디어 환경 역시 인터넷 기반의 플랫폼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했으며, 영화산업의 구조와 기술 또한 크게 바뀌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와 함께 한국영화를 주도하는 세대 또한 교체되었다. 그간 많은 영화학자들이 이와 같은 한국영화의 변화에 대해서 두터운 지식과 논의를 생산해왔다. 예컨대, 1970~80년대 청춘영화에서 체제에 대한 젊은이들의 저항 정신을 읽는다거나 1990년대 뉴 코리안 시네마를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리얼리즘과 연관지어 분석하는 경향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 변화의 주된 양상 2000년대 한국영화의 특징이 형성된 계기는 앞선 시대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당시 한국영화에게는 ‘ 대중성 ’ 확보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는데, 동시에 새로운 표현력까지 갖추고자 노력한 모습이 엿보인다. 나는 이 대중성과 표현력을 모두 아우르는 변화의 단초를 신체와 언어의 표현 방식 에서 찾는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시간적 흐름에 따라 한국영화에서 차츰 다르게 반영되어왔다. 가령 < 바보선언 >(이장호, 1983)과 같은 작품은 무성영화와 흡사할 정도로 대사가 적다. 대신 관객은 <바보선언>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 인물들의 억압된 몸짓에 응축되어 있는 상징적 의미를 두텁게 읽을 수 있다. 영화 속 언술을 감시하는 ‘검열’이 강력했던 시기인 만큼 영화에서 의미심장한 ‘말하기’가 진행되기 어려웠다는 점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 파업전야 >(이은기, 이재구, 장동홍, 장윤현, 1990), < 그들도 우리처럼 >(박광수, 1990), < 이재수의 난 >(박광수, 1998) 등 말수가 적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선을 보였다. 영화를 이미지의 매체로 보려는 경향, 즉, 말이 없더라도 심도 깊은 주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공유되었던 시대였다고 본다. 다만 200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가 이룬 성취를 보았을 때, 더 이상 이러한 믿음이 통용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수가 적은' 한국영화 <바보선언>, <파업전야>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1990년대에 들어서며 나타난 < 서편제 >(임권택, 1993)나 < 꽃잎 >(장선우, 1996)과 같은 진지한 예술영화들은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여성의 신체를 주변화하고 착취하며,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몇몇 작품들을 시작으로 한국영화에서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 개같은 날의 오후 >(이민용, 1995), < 처녀들의 저녁식사 >(임상수, 1998), < 주유소 습격사건 >(김상진, 1999) 등이 그것이다. 독특한 말과 함께 욕설도 등장하는 < 넘버 3 >(송능한, 1997/이상한 말투로 화제가 된 송강호가 이 작품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다양한 욕설을 십분 활용한 < 황산벌 >(이준익, 2003) 역시 인상적이었다. 극중 대사와 욕설의 비중을 늘린 대표적 한국영화 <넘버 3>와 <황산벌> 대사가 급증한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대중성을 ‘언어’의 사용에 초점을 맞춰, ‘ 말문이 트인 영화 ’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고 싶다. 먼저, 영화 속 언어와 관련된 몇 가지 전제를 언급하려고 한다. 영화는 문어가 아닌 구어, 즉 일상어 에 의해 진행된다. 언어의 의미는 실제로 ‘사용됨’으로써 습득된다는 일상언어철학의 관점을 따른다면, 언어의 특유한 의미는 인물들이 일상에서 대화를 나누는 맥락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발화자의 ‘신체’를 볼 수 있는 매체라는 점에서, 영화의 언어는 신체와 결합 된 채 지각된다. 신체유물론을 주장한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에는 외부와 관계를 맺고 역동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가 집합되어 있다. *주1 삶을 통해, 혹은 노동 및 관계의 형성과 마찰을 통해 얻은 감각은 이 복합적인 물질 덩어리인 신체에 매번 아로새겨진다. 영화는 인물의 신체와 결부된 언술 행위의 직접적인 의미작용을 통해 그와 같은 중층적인 신체의 의미를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신체의 의미를 알레고리와 같은 좁은 경로로 한정하여 표현했던 것과 달리, 2000년대 이후에 나온 한국영화는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 언어와 신체라는 두 가지 표현의 축을 비비고 충돌시키며 고유한 사실감각과 공감, 정서 를 일구어냈다. 또 다른 전제는 언어와 세상이 접착 되어있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철학에서 언어와 세상이 ‘직조’되어있다고 표현했지만, 나는 둘의 긴밀한 관계를 더 강조하고자 ‘접착’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 더불어, 역시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했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어의 의미는 문자화된 실험실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사용’을 통해서만 파악 될 수 있는 것이다. 2000년대 한국영화와 대사: 보고 듣는 재미의 본격화 나는 지금까지 나열한 이 전제들이 영화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에서는, 명민한 작가들에 의해 다채로운 방식으로 언어가 사용되며 표현력이 극대화되었고, 그로 인해 한국영화 고유의 현실감각과 주제적 심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언어의 기발한 사용 방법이 한국영화에서 빛을 발한 몇 가지 순간을 소개하려고 한다. 각 작품 속 개별 장면들에 나타난 개성 가득한 언술이 얼마나 재치 있게 또는 날카롭게 현실감각을 끌어내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당거래> 중 먼저 < 부당거래 >(류승완, 2010)의 그 유명한 명대사,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를 보자. 극중 주양( 류승범 )은 타인에게 그리 호의적인 인물이 아님에도 이 대사 한 줄만은 유독 큰 관심을 받아왔다. 해당 언술이 사회 현실의 어떠한 측면을 덩어리째 노출했기에 관객이 그 사실성에 깊이 공감했다고 본다.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내재된 근본적인 문제, 즉 예의와 선의를 다하면서도 타인에게 착취당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이 대사에서 생생한 현실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영화의 대사에 당대 한국의 체험적 현실이 접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베테랑> 중 류승완 감독은 액션들 사이에 묻어나오는 간결한 대사로 타자와의 관계 맺기에 관한 문제를 손쉽고도 재치 있게 해석한다. < 베테랑 >(2014)에서 범죄 현장에 나타난 서도철( 황정민 )을 본 중고차 매장 업주( 배성우 )가 “아까 낮에, 저기... 사장님?” 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아주 유쾌하다. ‘사장님’을 명칭이 아닌 호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전 소장( 정만식 )은 경찰의 눈을 피해 도피하라고 권하는 최 상무( 유해진 )에게 “나도 듣는 귀가 있어요, 상무님아. 여기 배고프고 성실한데 겁 없는 애들 많아” 라고 받아친다. 상무님이라는 호칭에는 ‘님’이 붙어 존대의 의미가 있지만, 그 뒤에 손아랫사람이나 짐승 따위를 낮춰 부를 때 쓰는 ‘아’라는 호격조사가 붙어서 묘한 느낌을 준다. 사회적 관습으로서의 호칭과 개인의 폄하 감정이 섞여 있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이처럼 위계상 낮은 위치에 있는 인물의 말문이 트이도록 설정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살인의 추억> 중 인물의 특성이 명확히 나타나는 대사와 행동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에서 박두만( 송강호 )의 공중 발차기와 함께 들리는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 도 인상적이다. 극중 박두만이라는 인물의 특성을 대사와 행동으로 간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으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물음’만을 던지는 폭력적인 공권력의 현실을 한꺼번에 품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포착해 낸 1980년대 삶의 형태는 이 짧은 언술로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영화 속 언어의 사용 방식을 관찰하면서 참고할 만한 개념으로 ‘ 교감적 소통 (Phatic communication)’도 소개하고자 한다. 교감적 소통은 자신의 물음에 대해 상대가 실질적인 답을 전해주기를 요구하지 않고, 서로가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을 확인할 목적으로 진행하는 소통을 가리킨다. 상대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자신 역시 동일하게 대답하는 상황, 사실 그가 정말 안녕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서로가 소통하고 있음을 인지하고자 행하는 언술이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소통은 사회에 깊이 스며든 관습이기도 한데, 이를 영화에서 평상시와는 다른 맥락으로 사용하여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 <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2005)에서 출소한 금자( 이영애 )에게 전도사( 김병옥 )는 두부를 건넨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금자 씨는 자신을 맞아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금자 씨는 “너나 잘 하세요” 라는 도발적 언술로 교감적 소통의 암묵적 규칙을 위반한다. 두부가 떨어지자마자 이어지는 심벌즈 소리와 전도사의 리액션 숏, 그리고 금자의 대사 직전에 트래킹되어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는 “너나 잘 하세요”의 위반적 함의를 충격적인 반응으로 담아내었다. 금자의 언술 앞에서 전도사는 어떻게 반응할지를 모른다. 비틀어진 언어가 인물 간의 관계에 얼마나 깊은 자장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친절한 금자씨> 중 2003년 개봉작인 < 올드보이 >와 < 살인의 추억 >에 나타난 언어에 대한 사유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자. 일단 두 작품 모두 ‘ 소문 ’을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언어가 사회적 산물이듯, 소문은 제한된 정보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구획 짓는다. <올드보이>에서의 소문은 수아( 윤진서 )의 상상 임신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복수로 우진( 유지태 )은 언어를 사용한 ‘최면’을 택한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소문은 수사 진행의 직접적인 단서로 작용하며, 의문이 들더라도 믿지 않을 수 없는 모종의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두 편 모두에서 ‘ 매체 ’를 경유한 언술이 등장한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 최민식 )는 오랜 기간 투옥되었다보니 신조어를 잘 모른다며 텔레비전은 이를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오대수에 대한 최면술이 끝날 때는 오디오 매체가 작동하는데, 이는 최면술사 형자( 이승신 )의 태도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형자는 우진과 오대수의 감금을 모의한 자임에도 그의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솔직히 내가 선생을 도울 이유는 없죠” 라며 자신은 이 사건과 무관한 독립적 주체임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오대수를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그녀의 최면술이 그런 인간적인 배려 이면의 ‘기계적’인 과정이라는 감독의 인식이, 음성 기록 매체가 작동하는 모습과 연결되어 제시되고 있다. 오디오 기록 매체는 <살인의 추억>에서도 중요한 소재이다. 범행 목격 사실을 진술하는 백광호( 박노식 )의 녹음된 육성은 그대로이지만, 추후에 이를 다시금 들어본 형사들의 해석은 변화했다. 이들은 트라우마를 겪은 목격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자백을 강요했지만, 결국 다시 ‘듣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그 언술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영화는 타자의 언술을 듣는 행위가 지닌 두터운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살인의 추억> 중 오디오로 녹음되는 백광호의 음성, 이를 다시 듣는 박두만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술 장면을 보여드리며 발표를 마치고 싶다. < 우리들 >(윤가은, 2016)에서 친구와 다투다가 상처를 입은 동생 윤( 강민준 )에게 누나 선( 최수인 )은 맞은 만큼 다시 때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서 말한다. 하지만 윤은 “또 때렸어야지”라고 나무라는 누이 선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그럼 언제 놀아?” 그에게는 보복보다 ‘놀기’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 간명한 언술은 그 화자가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에서 놀이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는 별다른 해석이 요구되지 않는데,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즉 그의 삶의 형태가 그대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청자인 선의 당황스런 그러나 진지한 반응을 통해, 영화는 노는 것이 실존적인 행위임을 강조한다. 영화 속 언술이 지닌 위력을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이다. <우리들> 중 영자원의 기관지 《아카이브 프리즘》의 2023년 12호 의 주제는 ‘대사’였다. 현재(2024년 7월 당시) 한국영화박물관의 기획 전시 역시 “대사극장: 한국영화를 만든 위대한 대사들”이라는 주제로 진행되고 있다. 오늘 말씀드린 내용과도 맞닿는, 한국영화를 수식하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강연을 들어주셔서 감사드린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살인의 추억> 속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 를, 개인적으로는 “그런 짓을 하고도 감히 밥이 넘어가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해석을 듣고 나니 교감적 소통의 일부로서 인물의 특성과 한국사회의 관습성을 암시하는 매개체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 아가씨 >(박찬욱, 2016)나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과 같은 최신 한국영화의 대사에 외국어가 사용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 중 한 장면을 예로 들자면, 송서래( 탕웨이 )의 중국어 대사가 통역기에 의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 로 변모한다. 그가 사용한 중국어 단어는 ‘마음’을 의미하는데도 통역기에 의해 ‘심장’으로 오역되었는데,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이라면 이러한 언어의 미끄러짐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한국영화이므로,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한국영화들 속 외국어 대사의 함의 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워싱턴대학교 아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 김응산) <살인의 추억> 중 / <헤어질 결심> 중 (답변) 10여 년 전부터, 관객들은 한국영화의 ‘명대사’를 열렬히 기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이 적극적으로 뒤따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밥은 먹고 다니냐?”에 대해서 역시 마찬가지인데, 나는 그러한 노력이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흥미로운 해석을 덧붙여 주셔서 감사드린다. 두 번째 질문의 경우,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번역 작업 을 진행하시는 분들의 각별한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오늘 강연의 내용과 연관 지어서는 섣불리 답을 드리기 어려울 듯하며, 관련 주제로 지속적으로 고민해보야아 할 것 같다. (질문2) 언어가 내러티브 진행 이상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다만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라는 대사가 한국사회의 현실을 드러낸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렇게 되면 특정 대사가 한국사회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납작한 논의가 발생할 우려도 있어 보인다. (답변) <부당거래> 속 대사는 한 가지 공통의 삶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기보다, 관객 각자가 개별적으로 현실을 경험하며 느낀 무언가 를 포착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사회, 경제와 같은 거시적인 틀로 논의될 수 있는 한국사회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관객 각자의 경험적인 요소들이 위 대사를 통해 건드려진 것 아닐까 싶다. 아마 인류학 연구가 이러한 요소를 조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코멘트1) 선생님께서 분석해주신 2000년대 초반의 한국영화 속 대사는, 매체가 폭발적으로 확장되며 대사가 영화에서 분리되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변화 할 수 있게 된 시대적 배경과도 연관 지어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의 대사가 영화 바깥에서 활발히 유통되는 양상에서 어떠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지, 이렇게 재생산되는 언술들은 ‘영화’의 대사라고만 인식할 수 있을지 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 (코멘트2) 2000년대 초반, 장르적 특색을 띤 채 대중성을 얻은 한국영화에서 언어적 사실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알려주셨다. 이때 한국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언어적 표현 중 하나가 ‘욕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욕설은 말씀해주신 것처럼 경험적 현실을 포착하는 대사로 기능하다가도, 어떤 장르(조폭 코미디 등)에서는 단순히 장르적 클리셰의 일환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욕설이 아닌 다른 종류의 언어적 표현도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특정한 언술이 장르적 관습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현상 도 눈여겨 볼만 하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좋은 지적 감사드린다. 조폭 영화에서는 특히 언어적 코미디가 부각되는 것 같다. 또한 앞서 보여드린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유쾌한 언술들 역시 ‘대중성’ 확보의 수단 으로 작용하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질문3) 2000년대 한국영화의 중요한 특성으로서 언어와 신체의 표현성을 강조해주셨고, 저 역시 말씀해주신 관점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성이 본격화된 시점 이 언제인지, 어떠한 작품들을 보면서 이를 실감하셨는지를 여쭈어보고 싶다. 더불어, 한국영화가 그렇게 ‘말문이 트이게 된’ 원인 으로 파악하신 바가 있으신지 역시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조준형) (질문4) 앞의 질문과 겹치는 내용이 있어 함께 문의드리고 싶다. 말씀해주신 대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의 한국영화가, 시나리오 작성 단계에서부터 창작자들이 여러 방면으로 공을 들여 ‘말문이 트이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다만 이 변화에 기여한 요소로 사회문화적 영향, 영화를 제작하는 기술적 조건의 변화 등도 고려하실 예정이실지를 여쭈어보고자 한다. 당시 한국영화계에서는 동시녹음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감독들이 대사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창작에 관한 아이디어 역시 다방면으로 발생했는데, 듣기로는 <살인의 추억>의 “밥은 먹고 다니냐?” 라는 대사가 봉준호 감독이 설계한 대사들 사이의 빈 공간을 송강호 배우가 애드리브로 채운 결과라고 한다. 이렇게 배우를 포함한 여러 창작자의 공동의 노력이 가능해진 환경 으로의 변화가 한국영화의 말문이 트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실 계획이 있으실지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아직 구체적으로 고려하지는 못했지만, 논의의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말씀해주신 대로 이 시기에는 동시녹음과 더불어 < 타이타닉 >(제임스 카메론, 1997)의 국내 개봉과 함께 돌비 시스템이 갖춰지는 등 소리의 청량함을 더하는 기술적 변화 가 나타났다. 그보다 이전에 또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연구해보고 싶다. 언어적 실험으로 한국영화의 표현력을 확장하는 최근의 감독들 ,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기생충>에서 인물들이 갑작스럽게 북한 아나운서의 흉내를 내는 언술), 나홍진 감독(< 곡성 >에서 ‘대화’가 지닌 중요성) 등의 작품으로, 영화가 지닌 가치를 ‘ 한국어 매체 ’의 측면에서 더욱 드높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 주1. 테리 이글턴, 『유물론』, 전대호 역, 갈마바람, 2018, pp. 27~28.
배우 이월화(1904~1933,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배우의 표현수단인 몸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인 동시에 작품과 관객을 잇는 최초의 통로가 된다. 텍스트가 추상적인 문자로 쌓아올린 성채라면, 관객은 배우의 육체를 안내자 삼아 비로소 비밀스러운 문을 발견한다. 객석에 불이 꺼지면 관객들은 광막한 어둠을 불안스레 응시하지만 무대 위나 스크린 속에서 익숙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안도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텍스트의 내적 질서는 배우의 몸을 통해 구체적 형상을 얻고, 눈앞에 놓인 허구의 세계는 비로소 인간 사회를 들여다보기 위한 창문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배우는 몸을 통해서만 관객에게 현시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배우는 필연적으로 공공의 시선 앞에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출이란 배우라면 응당 짊어져야 할 숙명이겠지만 문제는 그 시선이 배우의 몸을 대상화하여 눈요깃거리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더군다나 전근대적 도덕관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여배우는 훨씬 더 가혹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시각적 쾌락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여배우들은 종종 화류계 여성들과 동일시되곤 했으니 이런 환경에서 여배우가 쉽게 출현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배우는 끝내 근대극장의 당당한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여배우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설움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을테니 각도를 조금 달리해서 질문해보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배우의 역할은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일까? 또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여배우는 어떻게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었을까? 역사의 지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사실 여성 연행자들의 존재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예기(藝妓)들을 양성하기 위한 전통적 교육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들 중 몇몇은 협률사, 장안사, 연흥사 등의 초창기 극장들이나 ‘구극’을 주로 제공하던 광무대에서 전문 소리꾼으로 활약한 바 있었다. 그러나 여배우는 기술을 통해 여성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존재감 그 자체 를 전시하던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별화되었다. 즉, 여배우는 생물학적 성의 동일성에 힘입어 기술로 모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단번에 뛰어넘는 것이 가능했다. 여배우의 등장을 필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재현의 사실성을 둘러싼 당대의 인식체계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 것이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일이라는 생각은 특정한 시기를 거쳐 비로소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1910년대까지 배우와 배역의 성적 불일치는 그리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유래하여 1910년대 극장가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한 신파극은 남성 배우의 여장 연기를 일반적인 관습으로 채택했다. 이른바 ‘여형배우(おんながた)’는 여성의 무대 출연이 불허되었던 에도 막부시대 이래 가부키의 관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여형배우’는 형식미학을 중시하는 가부키의 특징과 맞물려 미학적 경지로서 숭앙되기도 했다. 남성 배우가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보이는 재현의 기술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예의 궁극적 도달점이라 여겨졌다. 한국의 신파극단들도 이러한 관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신파극단들은 여성 역할을 맡아 일세를 풍미했던 여형배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수철은 <장한몽>의 여주인공 심순애 역할을 통해 당대의 대표적 여형배우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사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수철의 사진을 보면 그의 외형은 여성스럽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비록 가발과 분장으로 가려놓긴 했지만 겉보기에도 그의 체격은 굉장히 건장해 보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는 여성을 흉내낸 그의 연기가 당대의 관객들에게 충분히 그럴싸한 것으로 보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고수철 (사진: 《조광》, 1935. 12.)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당대의 관객들은 극의 등장인물을 통해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을 발견하기보다 그 인물이 표상하는 인간 유형이나 그들의 갈등을 통해 제의적으로 모방된 도덕체계를 떠올릴 때가 많았다. 한국의 전통연희인 탈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탈 속에 숨겨진 배우의 진짜 얼굴보다는 부네나 각시탈로 표상된 캐릭터의 고유한 성격에 관심을 기울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극은 사유하는 존재 로서 내면을 가진 인간의 형상을 그려내고자 했고, 이때 표정이나 동작은 이를 외화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새롭게 규정되었다. 이제 배우는 표현하기에 앞서 존재해야 하는 이 로 지목된 것이다. 이른바 이성장(異性裝) 연기란, 남성들의 여장 연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반대로 여성들이 남성성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 시작된 소녀가극은 오늘날까지도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도 ‘배구자악극단’을 비롯한 소녀가극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또한 해방 후에는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창극의 형태가 유행하여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는데, 얼마 전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 정년이 >(정지인, 2024)가 소재로 삼았던 ‘여성국극’이 그것이다. 다만 이러한 사례들이 특수한 흥행가치를 만들어내며 인기를 끌었던 것과 달리 신극운동이 본격화된 1920년대에 들어서며 ‘여형배우’는 아마추어의 영역에서만 통용될 법한 결여태라 인식되기 시작했다. 1921년에 전 조선을 순회하며 공연활동을 펼쳤던 ‘극예술협회’는 식민지 조선 신극운동의 효시를 쏘아올린 집단이었다. 재래의 신파극단과 차별화되기 원했던 그들은 무대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여형배우’라는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는데,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인 <최후의 악수>의 여주인공 ‘화봉’ 역할은 마해송의 몫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것은 공연 준비가 촉박한 상황에서 여배우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반면, 2년 뒤인 1923년에 창립공연을 가진 토월회 는 여배우의 출연이 곧 공연의 성패와 직결된 요소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배면에는 토월회가 여타 학생 소인극단들과 쉽게 동일시되기 어려웠던 사정이 개입되어 있다. 토월회 역시 극예술협회와 마찬가지로 동경 유학생들의 모임이었지만, 극예술협회가 재일본 노동자와 고학생 단체인 ‘동우회’ 후원을 목표로 순회극단을 조직했던 것과 달리, 토월회는 공연 그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자신들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토월회 공연 당시 촬영 추정 사진 일본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 중에서 예술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있는 사람들이 조직한 토월회에서는 이번 여름 휴식을 이용하여 경성에 돌아와 임시 사무소를 낙원동 149번지에 두고 연극회와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겠다는데, 연극은 금 6월 하순에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유-젠․피롯트의 『기갈』과 안톤 체호프의 『곰』과 사람의 영혼까지 웃기게 하고야 만족하는 희극작가 버나드 쇼 씨의 희극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엇이라고 거짓말을 하엿나』와 박승희 씨의 『길식』 등을 올릴 터인데 전부 한 막거리로 의복과 배경은 다 동경에서 마치어 가지고 나왔다 하며...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3 』, 202쪽. “토월회 제일회의 연극공연회-동경 류학생 속의 유지자로 조직된”, 《동아일보》, 1923. 6. 13. 기존의 학생극단들은 연극을 매개로 삼아 사회사업에 소요되는 기금을 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토월회의 경우, 별도의 공연 취지 대신 조선의 문화 향상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목표를 내세웠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토월회의 공연에서는 으레 학생 순회연극단의 공연에 수반되었던 사회자의 행사 취지 소개나 개막 선언과 같은 순서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동우회순회연극단이 《동아일보》의 공식적 후원을 얻어 전 조선을 대상으로 한 순회연극을 기획할 수 있었던 반면, 토월회는 자발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토월회는 그들의 활동에 호의를 보이던 일본인에게 600원의 자금을 얻어 공연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일개 학생단체에 불과했던 토월회가 거금을 융자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심인물인 박승희의 아버지가 최초의 주미공사 박정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토월회의 동인들 중에는 박승희와 같은 유력가의 자제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의 존재는 언론이 기존의 학생극단에 부여했던 표상, 즉 ‘고학생 단체’로서의 성격을 희석시킨 요인이었다. *주1 그렇기에 토월회는 동경 유학생 중 예술에 뜻을 둔 ‘유지자’들의 단체로 소개되었을 따름이었다. 즉, 토월회에게 있어 ‘예술’이라는 레토릭은 그들의 공연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했던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었다. 예술이라는 막연한 지향점은 ‘ 무대 사실주의의 확립 ’이라는 목표로 구체화되었으며, 토월회가 무대장치에 역점을 두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다행히 토월회는 동경미술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어선 무대장치를 갖출 수 있었다. 1923년 8월에는 부속기관인 ‘토월미술연구회’가 결성되어 무대장치를 전담했는데, 안석주, 윤상열, 이승만 등 다수 화가들의 열성적인 참여는 토월회가 보다 정교한 무대장치를 구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 결과 토월회의 무대장치는 일본 신극운동의 본산이었던 ‘축지소극장’의 수준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라 평가되기도 했다. 토월회가 여배우를 섭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도 ‘무대 사실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촉박한 연습 기간을 고려할 때, 토월회가 선정한 네 편의 작품에서 여성 등장인물을 모두 여배우로 채우기 위해서는 복수의 여배우가 필요했다. 이서구와 박승희는 교대로 귀국하여 여배우를 찾아 헤맸는데, 우여곡절 끝에 진명여고 학생이었던 이정수와 이혼 후 가정에 머물던 이혜경을 섭외할 수 있었다. 다만, 배우 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들만으로 공연을 진행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기에, 신극좌와 민중극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던 이월화 가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다. 동경에서 연극을 연구하던 어린이들의 모임이 곧 토월회이올시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모국 한 끝에 극에 대한 새 빛을 찾으라고 그 첫소리를 금 29일부터 조선극장에서 외치려 한 것이올시다. 각본은 구미의 문호의 작품을 중심으로 차림은 전부 동경에서 가져다가 오직 열성 하나로만 모든 것과 싸워 앞길을 개척하려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과 같지 못한 우리의 일이오라, 뜻밖에 여배우에 대한 문제가 돌발하여 저희는 도저희 저희의 양심을 거스르지 못하겠으므로 다시 7월 4일로 공연날을 두 번 연기하였사오니 깊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3 』, 223쪽. “토월회 공연 연기”, 《동아일보》, 1923. 6. 29. 위의 인용문은 예정된 창립 공연을 앞두고 토월회가 신문에 게재했던 광고문이다. 토월회는 구미 문호의 작품을 각본으로 선정했음은 물론, 무대 배경을 전부 동경에서 가져다 만들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변별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광고문의 실제 목적은 공연 일정을 미루게 된 사정을 밝히면서 관객들의 양해를 구하는 데 있었다. “여배우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서 부득불 공연일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박승희의 회고에 따르면 문제를 일으킨 여배우는 이월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2 여배우 중 가장 뒤늦게 합류했던 이월화는 공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때에 어머니가 연극 출연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출연을 고사한 바 있다. 이월화의 출연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토월회는 공연일정을 연기하기로 하는데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토월회는 이미 창립 공연 일정과 장소를 한 차례 변경한 전력도 있었다. *주3 그렇지만 토월회는 “도저히 저희의 양심을 거사리지 못하겟슴으로” 연기를 결정했다고 밝히면서 양해를 구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그만큼 토월회가 여배우의 존재를 중시했다는 점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김기진을 비롯한 동인들은 직접 이월화의 집에 찾아가 그의 어머니를 설득한 끝에 겨우 출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으며, 다행히 창립공연은 애초의 캐스팅대로 진행되었다. 안타깝게도 토월회의 창립공연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큰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박승희가 회고했듯, 토월회 공연은 “은그릇에 담아 놓은 설렁탕”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 데 그쳤다. 훌륭한 무대장치와는 대조적으로 아마추어의 티를 벗지 못한 연기가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토월회 동인들의 애초 계획은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한차례 공연만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명예회복을 위해 곧바로 2회 공연 준비에 돌입한다. 동경대진재 이후 급격히 흉흉해진 분위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일본에 돌아갈 수 없었던 상황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토월회가 절치부심하여 준비한 2회 공연은 연일 만원관객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둔다. 창립공연의 레퍼토리가 네 편의 단막극으로만 구성되어 단조로웠고, 대중들에게 난해한 내용일 수 있음을 파악한 그들은 보다 대중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자 했으며, <알트 하이델베르히>와 <부활>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선정했다. 그리고 두 작품의 주연을 맡았던 이월화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사실 이월화를 캐스팅하는 과정에는 약간의 마찰도 있었다. 이미 기존의 신파극단들도 제한적이나마 여배우를 기용하기 시작했으니 여배우를 섭외하기 위해서는 기성극단에 문의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토월회 동인들은 “신파에 물들지 않은 무경험자”를 찾고자 했기에, 신파극단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던 배우들을 선호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월화의 영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월화는 토월회에 합류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판단의 배후에는 다름 아닌 영화의 영향력이 가로놓여 있다. 이화진이 지적한 것처럼 당대의 관객들은 같은 시기, 심지어 같은 극장에서 서양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 *주4 카메라의 기계적 재현성에 기반한 영화가 이미지의 리얼리즘을 태생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여형배우는 영화에서 쉽게 용인될 수 없는 관습이었다. 흥미롭게도 이월화는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였던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의 주연배우이기도 했다. 토월회 공연이 있기 불과 몇 달 전에 공개된 이 영화를 통해 이월화는 실제 여성에 의해 재현된 여성성의 표본을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던 바 있다. 어쩌면 토월회가 이월화를 통해 획득하고 싶었던 것은 여전히 신파극의 태를 벗지 못한 그의 무대 경험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보증된 이미지의 사실성 그 자체 였다고 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분명 토월회의 공연은 여배우의 기용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보편적 상식으로 격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점차 영화 관람에 친숙해진 당대의 관객에게 배역과 배우 성별의 불일치가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토월회가 그러한 흐름을 민감하게 읽어내고자 했다는 점이다. 식민지기 극장은 연극과 영화가 공존했던 공간이었고, 이곳에서 형성된 관객들의 취향은 생산자들의 기획과 긴밀한 피드백 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극장 속에서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을 마련해 나간다. < 지나가의 비밀, 일명 흑진주 >(유장안, 1928) 중 이월화(우)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 주1. 김기진, 김복진 형제의 아버지는 충북 영동의 군수였으며, 이서구는 안양 부호의 자제였다고 알려져 있다. (박승희, 「토월회 이야기」, 『사상계』, 1963. 5.) 주2. 박승희, 「토월회 이야기」, 『사상계』, 1963. 5. 주3. 토월회의 당초 계획은 “륙월 하순에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공연하려는 것이었으나, 공연 직전에 “예뎡을 번경하야 오는 이십구일부터 시내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닷세 동안을 흥행”하는 것으로 변경을 고지한 바 있다. (“토월회 공연 연기-이십구일부터 개시”, 《동아일보》, 1923. 6. 28.) 주4. 이화진, 「여배우의 등장 - 근대 극장의 신체와 섹슈얼리티」, 『여성문학연구』 28, 한국여성문학학회, 2012.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