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녀
- 감독
- 강대선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김인순, 강민철, 장혁, 윤양하, 박암, 이해룡, 이예민, 이인옥, 김은주, 남수정, 전숙, 이숙희, 김기범, 홍윤정, 김옥진, 김지영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유도 8단이 단단한 체격에 굵고 검은색이 짙은 눈썹, 정감이 넘치는 호남형 마스크의 윤양하 는 멜로물 데뷔로 영화배우를 출발했으나 곧 검객물의 히어로로 탈바꿈했다. 윤양하는 1967년 김수용 감독의 멜로물 < 빙점 (氷點)>에 데뷔했다. 일본 여류작가 三浦綾子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양녀로 입적시킨 소녀를 친딸을 죽인 살인범으로 오해한 양부모가 그녀를 구박해오다 20년이 지난 다음 사실이 밝혀져 양부모가 양녀에게 사죄한다는 내용이다. 부모 역으로 김진규 , 김지미 양녀 역에 당시의 톱스타 남정임 이 출연했고 윤양하는 남정임의 상대 역이었다. 이 영화는 야녀와 양부모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었음으로 젊은 남배우의 영화 속 배역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윤양하는 퍽 인상적인 데뷔를 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영화계 제작 상황이 윤양하 를 멜로물에 머물게 하지 않게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동남아 영화시장은 단연 일본과 홍콩의 검객물이 풍미했다. 일본은 가스 신따로를 내세운 <맹협 시리즈>를 , 홍콩은 왕우를 간판으로 한 <외팔이 시리즈>로 동남아 영화 흥행을 휩쓸었다. 이들 두 사람을 주연으로 한 검객물의 위세가 어떻게나 설쳤는디 마침내 가스 신따로와 왕우 두 검객 스타를 한 영화에 출연시킨 <맹협과 외팔이>란 영화를 만들어 동남아 극장가를 석권했고 한국에도 1969년 상영되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의 영화제작계도 검객물의 영향과 자극을 받아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검객물 붐이 일었다. 당시는 한국영화 전성기로 일년에 200편 이상의 영화를 쏟아냈다. 그래서 당시의 톱스타 남배우들은 멜로물의 겹치기 출연에도 숨이 벅차 검객물 출연은 외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체격이 단단하고 검객물 주연 마스크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은 윤양하 가 검객물의 히어로로 발탁된 것이다. 이런 영화계 사연으로 머리을 올려 상투로 묶고, 턱에 수염을 붙이고, 들짐승 가죽으로 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손에 든 한국의 검객 스타 윤양하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 월하의 검 >, < 필살의 검 >, < 내장성 대복수 > 등 20여 편의 검객물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검객물 붐이 쇠퇴하자 윤양하 는 중후한 조연 배우로 토속물과 역사물, 액션물에서 새로운 연기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검객물에서 주연배우로 활약했지만 윤양하는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조연배우로서 다시 신인이 된 자세로 연기에 임했다. 토속물로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물레방아 >, < 씨받이 > 역사물로 < 악인의 계곡 >, < 30인의 여도적 >, < 오사까의 대부 >, < 카페리호 불청객 > 멜로물로 < 속눈썹이 긴 여자 >, < 복부인 >, < 겨울부인 >, < 설마가 사람잡네 >, < 흑녀 > 문예물로 <갈매기떼>, < 아제아제 바로아제 >, 전쟁물로 <안케작전>, < 아벤고 공수군단 >, < 일송정 푸른 솔은 > 등을 들 수 있겠다. 1967년 데뷔 이래 2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지금도 현역 배우이다. 200여 편의 출연을 통한 연기 흐름을 볼 때 단연 토속물엣 윤양하 의 연기는 빛났다. 특히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의 산 사내 역과 < 씨받이 >에서의 문중 종손 대를 잇게 하려는 시골 양반 배역은 분명 윤양하 연기의 대전환기를 보여 주었으나 이를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는 작품을 이어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윤양하는 본명이 윤병규(尹炳奎)로 1940년 5월 1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로이 장대한 대장부였고 어머니는 둥근 얼굴에 하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대가집 마님 스타일이었다. 체격은 아버지를 얼굴은 어머니를 이어받은 윤양하는 소년 시절부터 같은 나이의 아이들보다 체격이 크고 힘이 셌다. 동네에선 대장이었다. 윤양하와 악수를 해본 사람은 느꼈겠지만 그의 손은 솥뚜껑처럼 두껍고 단단해 장력이 대단함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손이 컸다.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기차가 다니지 않은 전북 내륙지역 순창은 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집에서 순창읍 버스 정류장을 운영했으니 집안 형편은 여유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힘이 세며 특히 장력이 뛰어난 윤양하 는 그 당시 시골에서 가장 인기있는 운동이 씨름을 했다. 중학교 때는 학교 안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씨름꾼이 되었고 순창농고 재학시절에는 군 단위 씨름대회에 출전, 어른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순창에서는 고교시절부터 잘 생긴 씨름 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장래 희망도 대한민국 제일의 장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꿈이 바뀌고 인생행로를 영화배우로 세웠다. 그때 홍성기 감독의 < 춘향전 >에 이도령 역으로 주연했던 고향 선배 신귀식 이 귀향했는데 순창읍이 떠들썩할 정도로 환영을 받았고 읍내는 신귀식을 보려는 사람들로 난리를 피웠다. 이 황홀난 광경을 목격한 윤양하 는 씨름장사보다 더 인기있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꼈다. 고향에서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선배 영화배우를 보고 윤양하는 자신도 배우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은 유도대학(현 용인대학교)으로 진학했다. 당시 유도대학은 서울 소공동에 있었는데 씨름선수였던 그였기에 유도 실력도 일취월장으로 늘었다. 스타에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유도에만 매달려 피나는 연습을 했다. 마침내 윤양하는 국가대표 선수로 뽑혔다. 중량급 선수로서 올림픽 출전 후보 선수로 선발되어 대망의 올림픽 출전을 눈앞에 두었으나 최종 선발에서 재일교포 선수 김의태에게 패배, 아깝게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 순간에 세계 제패의 꿈이 사라지자, 윤양하 는 깊은 허탈감에 빠져 좌절했다. 그러나 좌절의 기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두 번째로 희망했던 배우에의 길을 두드렸다. 실의를 딛고 당시 충무로에 있었던 한국배우 전문학원에 입학했다. 4년제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개설되기 전에는 국내 유일의 배우 양성기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던 학원으로 신성일 , 최지희 , 김창세 등도 이 학원에서 수학했다. 원장은 김인걸 (金仁杰)로 작고했지만 일본대학 연극과 출신이었다. 그 당시 이 학원에는 유현목 , 김수용 , 박상호 같은 당대의 유명감독들이 출강하고 있어서 윤양하는 이들 감독들의 이름을 보고 학원에 들어갔다. 이 배우학원에서 김수용 감독을 만났고,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김 감독이 연출한 < 빙점 >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예술적인 열정과 사회적인 야망을 품고 살아가는 윤양하 의 행동 반경은 배우라는 단순한 범주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더우기 술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고 사귀는 것을 천성적으로 즐긴 그는 사람 교제 범위가 다양하고 넓다. 영화계 뿐만 아니라 체육계, 기업, 법조계 등에 친교가 넓다. 그와 술을 한번이라도 마셔본 사람이라면 우선 그의 주량에 놀라고 압도당한다. 맥주, 소주, 양주 등 주종을 가리지 않고 대량으로 마시면서도 분위기는 언제나 화기애애하게 이끄나. 어쩔 땐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만큼 친화력이 화려하다. 윤양하 는 1986년부터 88년까지 3년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때 그는 16개 영화사에게만 영화 제작권을 독점케 하는 영화법을 개정해서 제작자유화로 이끄는 영화운동을 온 몸으로 펼쳤다. 1986년 영화법 개정의 숨은 일꾼은 영화배우협회 회장 윤양하였다. 그는 두더쥐작전으로 영화법 개정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신문광고를 전격적으로 게재했다. 이 광고문이 영화법 개정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지금도 윤양하는 영화인협회 총회에서 논리적인 어법과 달변으로 영화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서 많은 영화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의 열정과 야망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로 이어진다. 그는 1996년 고향인 전북 순창.임실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 첫 출마였다. 7명의 후보 중에서 2등했다. 그러나 한 명만 뽑는 선거에서 2등도 패배자였다. 차점으로 낙선했다. 지금은 정계 진출의 꿈을 접고 체육계 활동에 열성을 쏟고 있다. 대한체육회 산하 유도협회 수석 부회장으로 있다. 유도 8단으로 1월 25일 유도인의 날 기념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유도협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명사회자로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고향인 순창에 청소년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전주대 교수로 있는 이장호 감독과 손을 잡고 수련원 부지에 영화촬영 세트장 건립을 추진중에 있다. 전주영화제 집행위원회 위원장은 이장호이고 부회장은 윤양하 다. 가족으로는 이화여대 체육과 출신의 부인 서성미와 두 아들이 있다. 장남 윤세웅 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영화배우가 되어서 이혁수 감독의 < 클릭 >과 김영한 감독의 < 천사의 시 > 두 편에 출연했다. 차남 윤태웅은 동원증권 아이스하키 팀의 주전 선수이고 국가대표이기도 하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윤병규 출 생 : 1940. 5. 1 전북 순창 학 력 : 용인대 유도학과,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데 뷔 : 1968년 김수용 감독 < 빙 점 > 주요 경력 : 한국영화배우협회 23,24대 회장 역임/ 현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회장/ 바르셀로나, 아틀란타 올림픽 한국유도대표팀 단장/ 현 대한유도회 수석 부회장 수상경력 : 전남일보(1972) 신인상 / 호남일보(1973)남우조연상 등 다수 주요작품 : < 빙점 >, <시발점>, < 필살의 검 >, < 임진란과 계월향 >,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등 23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