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 감독
- 이만희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남정임, 문정숙, 박노식, 김석훈, 최남현, 천시자, 이향, 이용, 최봉, 이해룡, 김명자, 정애란, 김성희, 김왕국, 박기택, 최무웅
< 웨건 마스터 >는 여러 면에서 이색적인 서부극이다. 예산은 999,370달러로 포드 서부극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하며, 흥행성적도 당시 포드 서부극의 평균수입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 포드의 영화에 여러 번 등장했던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같은 당대의 스타 대신 무명에 가까웠던 벤 존슨과 해리 캐리 주니어(무성영화 시절 포드 영화의 스타였던 해리 캐리의 아들)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포드의 배우라고 해도 좋을 평생의 영화적 동지였지만 영원한 조연이었던 워드 본드가 여기선 그나마 가장 알려진 배우였다. 또한 이 영화의 스토리는 포드가 스스로 작성했는데, 이것은 1930년 이후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이런 외적인 요소들만으로도 우리는 이 영화가 포드의 가장 개인적인 서부극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웨건 마스터 >에는 서부극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카우보이(여기선 말 장사꾼), 무법자, 인디언, 정착민 마을, 황야의 횡단, 마차의 질주, 총격전과 같은 전형적 서부극의 관습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술 취한 광대(철학자), 도박과 춤과 노래와 같은 존 포드 서부극의 특징적 요소들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포함한 어떤 서부극과도 닮지 않았다. 극히 단순하고 느리고 천하태평이며 사소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이 기이한 서부극을 두고 포드는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에 가장 가까운 영화이며,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말했다. 앞서 포드의 다른 서부극을 다루면서 언급했듯이, 이 최고의 서부극 마스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고전적 서부극 혹은 관습적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 그의 비전형적 서부극 중에서도 가장 일탈적인 이 영화를 가장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부르는 포드의 편에 선다면(사견으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부극은 다시 정의되거나 정의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여기엔 문명과 황야, 동부와 서부, 질서와 무질서 같은 서부극의 기본적 대립항이 아예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착민 공동체도 인디언 마을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집단이며, 그저 마차의 경유지일 뿐이며, 악당들이 등장해 여정을 지체시키지만 짧은 액션만으로 퇴치되어 버린다. 말하자면 < 웨건 마스터 >는 가장 비서부극적인 서부극이다. 장르 연구가들이 포드의 서부극을 다루면서 <웨건 마스터>를 잘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곤경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곤경은 장르 연구가들의 것이지 포드 세계의 여행자인 우리의 것은 아니다. <웨건 마스터>는 우리의 여정에서 가장 멋진 도착지 가운데 하나이며, 또 다른 걸작이다. 스토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100여 명의 모르몬 교도의 마차 행렬과 그들을 이끄는 두 ‘웨건 마스터’(마차 행렬의 가이드이자 한시적 지도자)는 황야의 곤경과 무법자의 위협을 극복하고 모르몬의 정착지를 향해 순례를 계속한다.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극적 장치나 로맨틱한 연애담은 물론, 포드의 다른 걸작들에도 남아있는 감상적 정념조차 없다. 마차 행렬은 몇 차례의 고비를 겪지만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이것이 영화의 거의 전부다. < 웨건 마스터 >를 ‘사치스런 B급 서부극’이라고 표현한 하스미 시게히코는 여기엔 마차 행렬의 ‘완만한 운동’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풍경이 있고 인물이 있다면, 풍경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의 움직임을 찍는다는 카메라의 가장 단순한 행위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태그 갤러거는 비슷한 뉘앙스로 “이 영화의 미스터리는 인물이 다음에 무엇을 하는가의 미스터리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그의 생동의 미스터리”라고 말했다. 질베르토 페레스는 그냥 “소박하고도 위대한 영화”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 웨건 마스터 >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너무도 유연한 것이어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킨 다음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주제와 정조를 집약한 한 장면을 끄집어내 특별한 찬사를 바치고 싶어도, <웨건 마스터>는, 이상한 일이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멈추기가 어렵다. 아마도 ‘완만한 운동’의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면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부드럽고도 민첩한 이 영화의 생동감과 역동성이 교류하는 수려한 멜로디는 평자에게 달콤한 패배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그 아름다움을 직접 말할 수 없다면, 이 특별한 서부극의 뭔가 다른 점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으리라. #1 < 웨건 마스터 >의 이례적인 점 가운데 하나는 풍경의 위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들을 순례하면서 풍경의 초월성을 몇 차례 거론한 바 있다. 사건들이 닿을 수 없고, 물질적으로는 이야기 내부에 존재하지만 그것의 아우라가 이야기를 초월하는 풍경의 이중성은 포드 서부극의 발명이다. 하지만 <웨건 마스터>의 풍경은 인물과 친화한다. 풍경과 인물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매우 가깝거나 거의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달리 말해 인물과 풍경이 서로를 건드린다고, 혹은 인물과 풍경이 동행한다고 말해야 맞을지 모르겠다. 포드의 다른 서부극에서는 이런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인물들은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암석봉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으며, 주로 바위산 위에서 등장하는 인디언을 제외하고는 대개 멀리 암괴로부터 떨어져 평원을 걷거나 마차를 달린다. 하지만 < 웨건 마스터 >에서 인물은 풍경을 쳐다보고 그것과 접촉하며 때로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샌디는 날카롭게 치솟은 한 암석봉을 쳐다보며 “언젠가 저걸 보고 산타페의 성당을 닮았다고 얘기했잖아”라고 말한다.(#1) #2 #3 #4 그들은 풍경을 보고 그것을 기억하며, 때로 접촉하고 변형시키며 그들의 여정의 일부로 만든다. 움직임 혹은 완만한 운동이 사건의 일부로 재현되는 게 아니라 순수한 운동 자체로 제시되자 풍경이 움직임을 껴안은 형국, 달리 말해 운동의 초월성이 마침내 풍경의 초월성과 조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풍경과 인물을 함께 담는 쇼트들에서 인물들은 풍경과 가까이 있거나, 아니면 풍경이 보이지 않는 앙각 쇼트로 촬영된다. 마차 행렬을 바위산의 언덕에 길을 만들어서 오른 뒤 그들 스스로 풍경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2, 3, 4) 물론 이런 표현들은 모두 포드 서부극들에만 통용될 수 있다. 이야기를 지속시키려는 규범적 구심력과 이야기를 잊거나 폭파시키려는 탈규범적 원심력의 긴장이 포드 서부극의 특별한 활력을 빚어낸다. 모뉴먼트 밸리의 거대하고 황량하며 기괴한 형상은 후자의 원심력과 이야기를 넘어선 층위에서 내통한다. 포드의 인물들이 만취해 주정을 부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때로 이상심리의 광기를 보일 때, 혹은 이야기가 자신의 출발점을 잊은 듯 세부에 몰두할 때, 우리는 포드의 세계에 임한 취한 신의 손을 혹은 무심한 우주적 운명의 그림자를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에서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 웨건 마스터 >에서는 내통할 필요가 없다. 구심력의 규범이 사라지자 원심력은 기꺼이 풍경과 친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날뛰는 말(馬)들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말의 동작에 극의 많은 긴장이 걸려있는 포드의 다른 서부극은 없다. < 웨건 마스터 >는 날뛰는 말들의 서부극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말은 인간의 통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고 그것으로써 인간의 서사에 봉사하지만, 휘파람, 총소리, 뿔피리 소리와 같은 모종의 자극에 날뛸 수 있다. 말이 날뜀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말이 날뜀으로써 말의 순응 능력에 의존한 인간의 운동,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이 지속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말과 황야의 영화인 서부극의 이상일 것이다. <웨건 마스터>가 그런 영화이다. 말이 순응할 때가 아니라 날뛸 때의 아름다움에 관한 영화이다. #5 말들은 언제 날뛰는가. 말 장사꾼이자 능란한 조련사인 샌디의 휘파람에 날뛴다. 해리는 보안관이 헐값에 말을 산 뒤 올라타자, 동료인 트레비스(벤 존슨)과 눈빛을 교환하고 휘파람을 분다. 말은 날뛰고 보안관은 간신히 매달리다 땅바닥에 처박힌다.(#5) 보안관은 살인강도인 클레그 일당을 추적하는 질서의 수호자이지만, 동시에 모르몬교도를 추방하려는(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지만 떠돌이 약장사이자 광대패를 이미 추방한) 문명의 악덕의 집행자기이기도 하다. 포드는 여기서 굳이 이 보안관의 캐릭터를 탐구하지도, 혹은 그가 대변하는 문명과 질서의 본질을 사색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와 거래한 뒤 골려준다. 말이 날뛴다고 문명과 질서가 무너지진 않는다. 다만 동요할 뿐이다. 문명과 질서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동요로서의 유희, 유희로서의 동요일 뿐이다. 그 동요와 유희의 한가운데 날뛰는 말의 약동이 있다. 샌디는 극의 후반부에 다시 휘파람을 분다. 이때도 당하는 건 보안관 일행이다. 수배 중인 살인강도 클레그 일당은 마차 안에서 총을 겨눈 채 대기하고 있고, 보안관 일행은 마차를 수색하려던 중이다. 많은 인명이 희생될 지도 모를 위기의 순간에 해리는 휘파람을 불고 말은 다시 날뛴다. 또 한 번 혼쭐이 난 보안관은 다시 핏대를 내며 마차 행렬을 떠난다. 살육의 총격전은 저지되며 말의 날뜀으로 비로소 말과 인간의 운동은 지속된다. #6 날뛰지는 않지만 날뛰기 직전에 이르는 장면들도 있다. 워드 본드는 분노의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술을 마셔도 안 되는 모르몬교도 행렬의 대장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곧잘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다혈질의 사내다. 이 사내가 흥분할 때마다 말들은 콧김을 내뿜으며 동요한다.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한 이 장면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워드 본드의 흥분과 말들의 동요는 감탄스러울 만큼 너무나 적시에 이어져, 마치 계획된 동시화처럼 보인다. 이때 워드 본드와 말은 같은 기질 혹은 같은 운명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워드 본드도 말도 순응과 날뜀 사이를 오가며 황야를 가로지르는 긴 순례, 오랜 운동을 지속할 것이다. 서사 안에서 종료되지 않는 그 순례는 아마도 그들의 삶 내내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말의 거친 움직임을 오해해 욕을 쏟아낸 워드 본드가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말에게 사과하는 장면(#6)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7 #8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장면은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발견한 샌디의 외침과 총소리에 마차 행렬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장면(#7)이다. 지금 말들이 총소리에 놀라 날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목마른 동물이 물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탈진해 있던 말들이 모종의 자극으로 호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워드 본드는 우왕좌왕하며 “말을 세워!”라고 외치지만, 말도 사람도 듣지 않는다. 그 맹렬한 속도에 흙바람이 몰아치며 마차에 매달려 있던 가재도구들이 우수수 떨어진다.(#8)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데, 가재도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장면이 그토록 강렬한 감흥을 느끼게 할 줄은 < 웨건 마스터 >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말의 질주는 고결하고 무구한 천상의 운동이 아니다. 타는 갈증의 표현이라는 동물적 본능의 운동이고, 소중한 가재도구를 찌꺼기로 남기는 불완전한 운동이며, 소란과 무질서의 운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통제되지 않고 통제될 수 없는 움직임이 어떤 악덕도 조성하지 않는 운동, 물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단순하고도 투명한 운동이다. <웨건 마스터>를 순수한 서부극이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말의 순응과 날뜀이 운동의 투명성에 이르기 때문이다. #9 < 웨건 마스터 >를 보고 난 뒤 우리는 서부극을 잠정적으로나마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서부극은 인간과 말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약속의 땅을 찾아 황야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의 영화다. 그 움직임은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과정으로서의 운동이다. 비록 그 인물과 장소가 과거에 속한 것이라 해도 과거에 닫혀있지 않으며, 질베르토 페레스의 표현을 빌리면 “미래에 열려있는 과거”이다. 황야의 순례자들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강을 건너고 있다.(계속)
오늘도 원고를 위해 영상자료원에서 받아온 시나리오를 읽으며 악전고투를 하는 중이다. 악전고투란 말은 많이 과장됐다. 하지만 첫 문단에서 같은 인물의 이름이 오일태, 오리태, 오열태로 변주되는 글을 읽고 있다면 그 정도의 표현은 써도 되지 않을까? 이 정도면 전산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라고 볼 수 있을 텐데, 6페이지에서 오일수라는 남자가 갑자기 등장해 딱 오일태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오일태와 오일수가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원래 각본에서는 오일수였는데 민수라는 이름의 의사가 뒤에 등장하기 때문이 보다 악당스러운 이름인 오일태로 바꾼 걸까? 그래도 이렇게 큰 덩어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포스터 이 시나리오의 제목은 < 외출 >이다. 영화는 영상자료원에 필름이 보관되어 있지 않은 이만희 의 68년 작 스릴러로, 최수원 원작, 백결 각본이다. 최수원은 ‘주간한국’의 추리소설 당선작가이고 백결은 이만희의 굵직한 대표작들에서 이만희와 함께했던 파트너다. 한동안 이만희의 67년 작으로 알려졌던 <흙바람>과 이 영화는 최근에야 동일작으로 확인되었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겨우 반세기도 안 되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고고학적인 탐정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뒤져도 <외출>에 대한 정보는 얻기 어려운데, 여러 모로 아쉽다. 굉장히 재미있는 60년대식 스릴러였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은 ‘치밀함’과 연결되는 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만희의 스릴러들을 언급할 때 ‘치밀한’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스릴러는 대부분 재미있고 인상적이지만 치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치밀한 스릴러가 되려면 치밀한 각본이 따라야 할 텐데, 그의 영화 스릴러 각본은 그냥 구멍이 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앞뒤가 안 맞고 오리무중이며 논리 따위는 가볍게 튕겨버린다. 옛날 영화라서 그렇다고 우기기도 뭣한 게, 겨우 반세기 전 영화들이라니까! 그러니 있지도 않은 ‘치밀함’을 붙잡는 대신 왜 반세기 전 한국 장르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이런 비정상성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고찰해보는 게 맞다.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내가 지금 디지털 본으로 읽고 있는 < 외출 >의 녹음 각본엔 커다랗게 ‘공갈’이라고 메모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누군지 몰라도 그 메모를 쓴 사람은 이 영화의 내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최수원 의 원작은 말이 되었을까? 모를 일이다. 내용은 무엇인가. 앞에 언급한 오일태는 거물 밀수꾼인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TNT를 품고 자폭했다. 그에겐 한 달 전에 결혼한 혜미(또는 해미?)란 아내가 있고 6개월 전에 정신병원을 나온 여자 친구 문옥이 있다. 문옥은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이 결혼을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두 여자는 경찰서에서 처음 만나고, 혜미는 문옥에게 말을 걸려 하지만 문옥은 정중하게 거절한다. 오일태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문옥은 몸이 아파 약국에 들르는데 주머니에서 정체불명의 메모를 발견한다. 문옥의 독백에 따르면 오일태는 10월 15일에 죽었는데 그 메모는 10월 22일 것이다. 그게 왜 거기 있었는지, 왜 날짜가 22일인지, 내용이 무엇인지는 각본이 끝날 때까지 안 나온다. 하여간 문옥은 그 뭔지 알 수 없는 메모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 날 아침 6시 30분 김포가도 해태탑 앞으로 가는데, 거기서 오일수란 남자가 차를 옮겨 타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일수는 그냥 오일태다. 죽은 사람을 목격한 문옥은 친구인 윤 사장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만 메모는 사라지고 그만 중간에 정신을 잃는다. 처음부터 악당처럼 보였던 윤 사장은 문옥을 정신병원에 가둔다. 여기서 박민수란 의사가 등장하는데, 문옥이 정상임을 확신한 그는 문옥이 가진 정보를 이용하면 오일태/오일수가 숨겨놓은 거액의 현금을 찾아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그는 탐정질 끝에 메모의 내용을 확인하고 (문옥은 그 메모를 일기장에 끼워놓았는데 내용이 일기장 페이지에 묻어났던 모양이다. 물론 우린 여전히 그 내용이 뭔지 모른다) ‘연구실’로 들어가 오일태가 자신의 시체로 위장한 죽은 사람의 틀니 또는 ‘잇빨이’를 확보한다. 이걸 멋대로 들고 나가 어떻게 증거로 쓰고 협박을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냥 “감독이 공인한 맥거핀이니 의심하지 말고 그냥 따르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물관계도 이후로부터는 완전히 난장판이다. 민수와 그의 아내 진숙은 이 일로 협박당하고 문옥과 진숙은 납치된다. 납치당했던 문옥은 왜인지 몰라도 다시 풀려나고 민수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문옥을 죽여야 한다는데 이미 윤 사장은 정 여인이라는 킬러를 보냈고 그걸 알아차린 오일태는 분노하고, 그러는 동안 진숙과 민수는 물건 정리하는 것처럼 살해당한다. 물론 메모에 뭐라고 적혀있는지는 여전히 안 나온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오일태가 문옥을 구출하기 위해 소동을 벌이고 그와 대결하던 윤 사장은 체포되고 자잘한 악당들은 죽고 마지막에 오일태는 자살한다. 돈은 경찰에 압수당하고. 이 소란통에 혜미와 문옥은 다시 만나는데, 알고 봤더니 오일태를 밀고한 건 혜미였다. 각본을 보면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에 어떤 의미를 두려고 하는 모양인데, 솔직히 텍스트만으론 감이 잘 안 온다. 이만희 가 이 난장판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을까? 그의 다른 영화들을 보면 그랬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 외출 >이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환자의 악몽과도 같은 작품으로 나왔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그 결과물을 확인하고 싶어 죽겠는데, 아마 한동안은 어렵거나 불가능하겠지.
뜨거운 태양 아래 빨간 무스탕이 아리조나 사막을 가로질러 달린다. 흙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하는 차 안 라디오에서 흐르는 곡은 페기 리의 ‘It’s a Good Day’. 경쾌하고 발랄한 스윙곡의 희망찬 가사와 달리 운전자의 상황은 그리 좋아보이질 않는다. 초조하게 담배를 물어 피우는 왼손에는 피 묻은 붕대가 감겨있고, 며칠째 잠을 못 잔 듯 운전하며 꾸벅꾸벅 졸기까지 한다. 각성제를 쏟아 붇고, 연신 라디오 채널을 돌려 록과 재즈, 성악까지 다양한 곡들로 근심과 피로를 지우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설상가상 펑! 소리와 함께 본네트에서 흰 연기가 가득 피어오른다. 고무 밸브가 더위를 참지 못하고 그만 터져버린 것이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남자는 사막 한 가운데 갈래 길에서 잠시 멈춰 서는데 그제야 불길한 듯, 음산한 듯 스코어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더위를 상징하는 색소폰 연주에 짜증을 한 가득 품어 낸 하모니카 소리가 어우러진, 마치 어디선가 들어본 곡조 같다. 서부극의 한 자락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이 음악은, 맞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스타일이다. 올리버 스톤은 이런 기시감을 위해 이 거장을 불러왔다. 스파게티 웨스턴 사운드의 선각자. 정통 서부극의 정의와 용기, 사랑과 프론티어 정신 따윈 개나 줘버리고 암투와 음모, 배신과 폭력 그리고 조소가 판을 치는 조잡스런 세계관에 잔인하면서도 위트 있는 음악을 부여한 그는 그야말로 < 유턴 >의 음악에 최적화된 작곡가였다. 엔니오 모리꼬네 엔니오 모리꼬네. 더 이상의 어떠한 설명도, 찬사도 필요치 않은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영화음악가. 전설 중의 전설이자 아직도 현업에서 열심히 노익장을 과시하며 작업을 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마에스트로다. 비발디와 로시니, 베르니와 푸치니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작곡가이자 히트상품으로 1961년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500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맡으며, 전 세계적으로 50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는 국경을 초월해 수많은 나라에서 작업했고(심지어 막부 시대를 다룬 일본 NHK 대하서사극 <무사시>의 음악도 담당했다), 열렬한 관객들의 찬사와 감동, 전율을 이끌어냈다. 아카데미 음악상에 5번 후보로 올랐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시며 수상하지 못했지만, 2007년 아카데미는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안겨주며 그 공적을 인정했다. 그의 음악은 천상의 하모니와 아름다움을 가진 동시에 실험적이고 키치적이며,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형식과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이념과 국가에 소속되지도 않는다. 드라마와 코미디, 시대극은 물론 갱스터와 SF, 공포, 웨스턴, 전쟁, 액션과 지알로나 성애영화에서도 그의 음악은 등장한다. 고전에 능숙하며 현대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창의적인 유머와 과감성, 천부적인 멜로디 감각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의 경이적인 작업 속도와 양이다. 53년간 530편에 육박하는 작품 수만 보더라도 산술적으로 한해 평균 10편씩 50년간 개근해왔다는 건데, 실력과 재능 못지않게 부단한 노력과 근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턴>은 그의 필모 중에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선율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준 그의 초기작과 유사한 비장의 OST다. < 닉슨 >의 실패 이후 올리버 스톤 감독은 가볍고 작은 소품으로 그 정치적인 무게감을 덜어내고자 했다. <유턴>은 그런 재기발랄함이 드러나는 영화로 숀 펜과 닉 놀테, 제니퍼 로페즈, 존 보이트, 빌리 밥 쏜튼, 파워스 부스, 클레어 데인즈, 조아퀸 피닉스 등 좋은 배우들의 앙상블과 존 리들리의 단단한 각본을 가지고 강렬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단 하루 동안에 작은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이 영화는 마치 2시간분의 머피의 법칙을 보는 듯한데, 어떻게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를 되네일 만큼 지독하게 꼬여가는 점입가경의 상황이 재미를 부추긴다. 자동차 고장으로 인해 사막 한가운데 외딴 마을로 들어선 남자는 마을의 아름다운 여인과 만나며 이에 얽힌 욕망과 질투, 과거의 복잡한 사연까지 안게 되고, 이 잠재적인 폭탄의 심지가 점점 타들어가며 서스펜스와 부조리한 블랙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거기에 사막이 주는 강렬한 더위까지 결합하며 불쾌지수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데, 그 파멸과 비극이 그리 고통스럽진 않다. 오히려 씁쓸하고 텁텁한 뒷맛에 헛웃음을 짓게 만든다. 사랑과 돈, 그 두 가지로 인해 발생하는 어리석은 인간사가 얼마나 많았던가. 로버트 리차드슨의 과도하지만 감각적인 촬영과 < 도어즈 >와 < 올리버 스톤의 킬러 >를 찍었던 감독답게 올리버 스톤의 센스 넘치는 음악 선곡이 빛을 발하며 이 지독한 악몽과도 같은 영화에 구원의 빛을 비추고 있다. 유턴 엔니오 모리꼬네의 선율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아리조나 사막의 숨 막힐 듯한 무더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스파게티 웨스턴과 지알로, 좌파 영화로 대표되던 그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초기 스타일이 정확히 한 세대를 거슬러 되풀이 되고 있다. < 미션 >이나 < 시네마 천국 >처럼 인상적인 테마라 할 주된 선율이 관객들에게 각인되지 않지만, 우수 어린 하모니카나 구슬픈 여성의 허밍, 나른하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일렉 기타, 지역색이 묻어나는 벤조와 뇌쇄적인 색소폰, 차갑기 그지없는 피아노와 팬파이프 등 그가 즐겨 쓰는 모든 악기들이 총동원돼 저마다 음색을 뽐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올리버 스톤은 특히나 사막이라는 공간의 작은 마을 ‘수피리어’를 세팅하며 마카로니 웨스턴 속 무법천지와 개성적인 캐릭터들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과감히 엔니오의 색채를 빌렸는데, 이렇게 짜증스런 음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편하고 불유쾌한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U-turn’과 ‘Hallucination Walk’, ‘End of Sheriff’, ‘Fall and Rse’ 등이 대표적인 트랙으로 전위적이고 입체적인 사운드의 진수를 선보인다. 그의 아름다운 선율만 기억하고 있는 팬들에겐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그의 초기 음악 스타일을 알고 있는 팬들에겐 이런 전복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면모가 반가울 수도 있을 것이다. 웨스턴과 스릴러, 멜로와 블랙 코미디를 아슬아슬하게 경유하는 <유턴>의 퓨전적인 미학은 또 다른 환희와 감동을 던져준다. 삽입곡에 있어서도 대단한 사치를 부렸다. 사운드트랙엔 그 중 10곡이 엄선돼 실려 있는데 모두 깨알같이 빛나는 명곡들이다. 그리고 그 곡들은 대체적으로 반어적으로 사용되었다. 앞서 잠깐 언급한 페기 리의 ‘It’s a Good Day’가 영화의 앞과 뒤를 멋지게 장식하며 아이러니한 즐거움을 주었다면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컨트리송이나 감미로운 블루스, 발라드와 흥겨운 홍키통크는 주인공의 재수 없는 일진을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낸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도시 속에 숨겨진 욕망과 잔악한 배반의 드라마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는 셈이다. 새미 스미스와 패치 클라인이라는 걸출한 국보급 두 여성 컨트리 싱어를 비롯해 자니 캐쉬와 웹 피어스라는 쟁쟁한 남성 컨트리 스타까지 배치해 남서부의 정서를 기가 막히게 담아낸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Your Cheatin’ Heart’, ‘Honky-Tonk Girl’, ‘Ring of Fire’, ‘More and More’ 등은 기이하게 비틀린 마을 분위기와 달리 달콤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영화 <돈 주앙>에 쓰였던 브라이언 아담스의 주제곡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en’을 라틴 버전으로 부른 ‘La Mujer Que Amas’를 비롯해 글로리아 린의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I wish you love’와 ‘Speaking of Happiness’ 등 감미로운 곡들이 삽입돼 영화를 중화시키거나 아이러니한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이를 모두 마무리 짓는 건 엔니오 모리꼬네의 처연한 ‘Grace’다. 흐느낌에 가까운 구음과 팬파이프, 신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듯 부유하는 일렉 기타의 선율이 모든 고통과 사건을 치유한다. 요즘 올리버 스톤이 다소 주춤한 길을 걷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나이로 구순이 거의 다 되어가는 엔니오 모리꼬네는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의 영화적 동지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신작 <커러스폰던스 The Correspondence>의 음악작업에 들어갔고, 자국의 TV시리즈나 TV영화음악도 꾸준히 담당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달(6월) 중순에는 미국에서 콘서트가 예정돼 있고, 내년에는 프랑스에 투어가 잡혀있는 등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실천 중에 있다. 부디 그가 오래 오래 몸 건강히 활동해서 공로상 받고도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으면 좋겠다. Track List 1. It's a Good Day - Peggy Lee 2.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 Sammi Smith 3. More and More - Webb Pierce 4. La Mujer Que Amas - Pedro Fernandez 5. I Wish You Love - Gloria Lynne 6. Honky-Tonk Girl - Johnny Cash 7. Your Cheatin' Heart - Patsy Cline 8. Ring of Fire - Johnny Cash 9. Lonesome Town - Ricky Nelson 10. Speaking of Happiness - Gloria Lynne 11. Grace 12. U-Turn 13. Bobby 14. Hallucination Walk 15. Go On... Kill Grace 16. A Banjo in the Desert 17. Against 18. A Careless Sheriff 19. Dialogue with the Indian 20. Old Family Souvenirs 21. End of Sheriff 22. Fall And Rise 23. Grace (Repr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