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 야녀
- 감독
- 김인수
- 제작년도
- 1981
- 출연
- 최희정, 진봉진, 최봉, 박암, 황건, 한명환, 최무웅, 오영화, 정지희, 안세은, 유명순, 임해림, 윤일주, 김수경
사진: “ Sinners ”, IMDb 뱀파이어물과 좀비물을 좋아한다. 전염과 변형이라는 설정은 때로 경계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날카롭게 벼리는 은유가 된다. 그 속에서 공동체의 무의식이나 내가 지닌 두려움의 근원을 마주하는 일은 늘 일말의 고통을 동반한 쾌감을 준다. 2025년 봄 개봉한 라이언 쿠글러 연출의 < 씨너스: 죄인들 >은 이러한 장르적 가능성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갱신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 뱀파이어물이면서 동시에 음악영화이고, 인종차별을 다루는 정치적 블랙 호러이자 한편으로는 종교와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1932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델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흑인이 소작농으로 농장에 묶인 채 가난과 차별 속에 살아갔다. 일부는 사소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노역에 내몰렸다. 박해받는 삶 속에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길 위에 나선 흑인 음악가들이 델타 블루스를 탄생시킨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은 시카고에서 갱스터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델타로 돌아온다. 낡은 제재소를 개조해 클럽을 열고, 블루스 뮤지션을 꿈꾸는 사촌 새미와 함께 개업 첫날 밤을 준비하며 새 삶을 그린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흑인들만의 진정한 문화 공동체다. 그러나 새미의 블루스 선율이 울려 퍼지자 어둠의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클럽 문 앞에 선 세 명의 백인 뱀파이어는 입장을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자신들도 뮤지션이라며 “불쌍한 울새의 살을 깨끗이 발라먹었지(Pick Poor Robin Clean)”라는 가사의 다소 섬뜩한 노래를 아일랜드 포크 풍으로 연주한다. 능숙하고 경쾌한 연주는 순식간에 좌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본래 이 곡은 1927년 블루스 뮤지션 루크 조던이 발표한 노래다. 흑인 문화가 백인 사회에서 전유되고 소비되어 온 기나긴 역사가 압축적으로 포착되는 장면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세 백인은 뱀파이어가 되어 뭉쳤지만 다른 백인성의 층위를 드러낸다. 아일랜드인으로 설정된 레믹은 대기근과 식민 지배, 종교적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이다. 그는 수백 년 전 침략자에게 동화된 피해자이자 문화적 흡혈을 욕망하는 새로운 침탈자다. KKK단원 조안과 버트 부부는 도덕적 타락을 멸시하며 타자를 배제해 온 미국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금화를 탐내다 레믹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다. 흑백 대립 바깥에 위치한 인물들에게도 각자의 역사가 있다. 스택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메리는 백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흑인 가족 사이에서 자라 흑인처럼 말한다. 피부색과 문화적 정체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국계 미국인 부부 보와 그레이스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인과 흑인에게 따로 물건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머무는 아시아인의 위치를 드러낸다. 땅의 ‘원주민’으로서 침탈과 학살을 가장 오래 겪어온 촉토인들은 이 모든 갈등 이전에 이미 추방된 공동체가 있었음을 환기하는 존재다. <씨너스: 죄인들>이 그리는 인종 갈등에는 이렇듯 서로 다른 상처의 시간이 혼재돼 있다. 영화 바깥에도 이 구조를 암시하는 시각적 장치가 있다. 개봉과 함께 공개된 십여 종의 인물 포스터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의 얼굴을 개별 이미지로 제작한 방식은, 단 하나의 영웅 서사가 아니라 경계인들의 초상을 나란히 놓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진: “Sinners”, IMDb 선악의 구도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쌍둥이 형제는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와인과 아일랜드 갱단의 맥주를 훔쳐 왔다. 클럽을 여는 데 사용한 자본 또한 폭력과 약탈의 결과다. 젊은 시절 그들이 인종차별만큼이나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리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친부 살해 소문으로 형제는 이미 고향에서 악명을 얻은 인물들이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은 일차적으로 이들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라이언 쿠글러는 흑인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존재가 서로 얽힌 폭력의 계보 위에 서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영화는 묻는다. 죄인은 누구인가. 하지만 포스터에 찍힌 문구(We Are All Sinners)가 일러주듯, 죄를 귀속시킬 대상은 쉽게 단정되지 않는다. 이 질문을 가장 노골적으로 입에 올리는 인물이 뱀파이어의 수장인 레믹이다. 레믹은 평등과 하나 됨을 외치며 흡혈을 통한 영생의 길을 약속한다. 처음에는 “강요된 종교”였던 기독교를 향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입맛이 쓰다. 인간이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하며, 죽어서야 비로소 모두가 동등해질 수 있다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인간 무리와 뱀파이어 무리의 대결은 러닝타임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 격투는 분명 <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버트 로드리게즈, 1996)를 연상시키는 폭발적인 액션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덜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장르적 환상은 언제나 현실에 실재했던 고통을 조금 더 견딜 만한 이야기로 바꿔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튿날 아침 무장한 채 트럭을 몰고 클럽 앞에 나타난 KKK단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편의 극영화가 연출한 클라이맥스의 뒷면을 슬쩍 엿볼 수 있다. 뱀파이어와 치고받고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건을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무차별 총살을 당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모든 초현실적 서사가 그렇듯, 흡혈귀와 인간의 하룻밤 소동 역시 잔혹한 현실을 뒤집어 각색한 이야기일 따름인 것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이 영화에서 블루스는 소재나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의 시공간을 흔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뮤지션의 업보를 짊어진 사람은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과거와 미래의 영혼을 불러내는 중재자로 묘사된다. 그 정점은 개업 무대에서 새미의 블루스 선율에 맞춰 클럽 안의 모든 사람이 몸을 들썩이기 시작하는 롱테이크 시퀀스다. 블루스와 힙합, 중국 경극과 발레, 로큰롤과 디제잉이 하나의 공간에 포개지고, 서로 다른 시대의 몸들이 같은 박동 위에 놓인다. <씨너스: 죄인들>은 두 가지 화면비로 촬영되었다. 가로로 긴 2.76:1 비율로 상영되다가 특정 구간에서 1.43:1 아이맥스 GT 화면으로 확장된다. 클럽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이 전환은 특별히 압도적인 몰입감을 준다. 그것은 시각적 스펙터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앞의 스크린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구축해 온 문화와 역사의 총합처럼 느껴진다. 프레임은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포함하는 장소가 된다. 영화가 타인들과 함께 꾸는 집단적 꿈이며, 역사라는 무의식의 망막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극장에서의 공동체적 경험을 여전히 믿는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씨너스: 죄인들>은 나의 신체가 극장이라는 어둠 속에 타자들과 함께 놓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감각을 오랜만에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 짜릿한 영화적 경험이 소수의 극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이 이야기가 흑인의 삶에 대한 헌사로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피바람 부는 밤이 시작되기 전의 ‘좋았던 시간’에 타임라인을 할애하지 않는다. 개업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이 클럽 내부를 고치고 음식을 만들며 웃고 떠들던 낮의 시간은 의도적으로 생략된다. 결말에 이르러 스모크의 회상 속에서 몽타주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중요하게 남겨지는 것은 선택의 순간들이다. 기타를 내려놓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요구 앞에서 새미는 음악의 길을 택한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새미 앞에 뱀파이어가 나타나 영생을 제안할 때도 그는 거절한다. 영원히 노래하는 저주 대신 삶이라는 박해를 끝낼 자유를 택한다. 영화는 다시 묻는다. 블루스는, 나아가 예술은, 죄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음악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평등도 해방도, 영원한 평화도. 다만 이 폭력적이고 상처투성이인 세계에서 잠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불온하고도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스크린이 이따금 그러는 것처럼.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아무튼, 야구』(2025), 『남의 노래』(2024),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죽은 지 3일이 지난 용돌이가 되살아났다.” 저작권 개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던 시절의 < 괴시 >( 강범구 , 1980)는 사실상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합작영화인 <Let Sleeping Corpses Lie>의 표절작이라고는 하나, 여러 한국적 상황과 변주가 더해진 명실상부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로 기록돼 있다. 주인공이 백담사로 향하는 강원도 계곡에서 마주친, 초점 없는 얼굴로 느릿느릿 다가온 정체불명의 괴한에 대해 얘기하자, 마을 사람 누군가는 며칠 전 술 마시고 물에 빠져 죽은 용돌이에 대해 얘기하며 “용돌이가 살아 돌아왔나?” 라고 얘기할 뿐이다. 용돌이가 죽은 것은 경찰과 동행한 마을 사진관 주인이 직접 찍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한국영화계에 처음으로 좀비가 등장했다. 어쩌면 지금 관객들은 물 맑고 공기 좋은 대자연에서 마주친 좀비라는 점에서 < 곡성 >( 나홍진 , 2016)에서 외지인(구니무라 준)의 등장과도 같은 충격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제작 당시로 보자면, 누군가는 홍콩영화의 좀비 ‘강시’도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이후 수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했던 홍콩 강시 영화의 원조 <귀타귀>와 <괴시>는 1981년 4월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함께 개봉했다. <괴시>의 가장 독특한 점은 도시가 아닌 강원도 산골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대만에서 온 강명은 강원도 백담사로 가던 길에 수지의 차를 얻어 타고 가게 된다. 미국에서 살던 수지는 5년 만에 한국을 찾아 언니를 만나기 위해 수리마을에 있는 별장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언니는 건강 문제로 요양차 남편과 함께 강원도에 머물던 중이었다. 그런데 차가 낯선 곳에 이르러, 강명이 길을 살펴보려고 떠난 사이 수지는 계곡에서 첫 번째 좀비와 마주친다. 이후 그의 정체가 마을 사람들의 얘기와 경찰의 수사를 통해 3일 전 죽은 용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수지의 얘기를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결국 강명과 수지는 공동묘지 안치실에 찾아갔다가 용돌의 시체가 없음은 물론, 그 안에서 부활한 시체들에게 공격당한다. 그런 사이 강명과 수지의 뒤를 쫓던 형사와 집을 나간 수지의 형부도 좀비로 변하고 만다. 그렇게 마을 전체가 ‘괴시’로 인해 공포에 떨게 된다. 영화는 무엇보다 좀비나 강시에 비해 괴시(怪屍)라는 제목 자체가 기괴하고도 독특한 아우라를 풍긴다. 거기에 더해 좀비물은 영화사적으로 완전한 영화적 피조물이라 할 수 있는 좀비라는 존재에 어떤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었느냐가 중요하다. 말하자면 좀비가 사람을 흡혈귀처럼 물어서 전염시킨다는 기본적인 상식(?)에 지속적인 변주가 더해지며 그 장르성이 확장되어왔다. 가령, 과거 좀비 영화의 좀비는 느리고 최근 좀비 영화의 좀비는 빠르다는 것이 가장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변화일 텐데, <웜바디스>(2012)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 뜬 좀비가 등장했고, < 부산행 >( 연상호 , 2016)에는 빛에 반응하는 좀비를 등장시켜서 터널에 머무는 시간을 긴장감의 요소로 훌륭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괴시>는 단순히 ‘느리게 걸어 다니는 옛날 좀비’라고 치부하기에는, 좀비 장르의 상업 블록버스터화를 이끌었던 <월드워Z>(2013),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의 존재를 알리며 무려 10시즌까지 이어지고 있는 AMC TV 시리즈 <워킹 데드>와 비교해도, 영화역사상 아마도 가장 내구성이 강한 괴력의 좀비를 등장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비 영화에서 ‘가장 확실한 제거 방법’으로서 좀비의 머리통을 권총으로 날려버리는 일이 <괴시>에는 불가능한 것은 물론, 좀비로 변한 수지의 형부 역시 차로 치어도 끄떡없이 일어나고 만다. 어쩌면 지금의 관객들, 혹은 좀비 영화의 팬들이 매력을 느낄만한 지점이 바로 거기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사진관에 걸려 있는 배우 율 브리너의 사진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이색지대>(1973)에서 율 브리너는 마치 좀비처럼 주인공을 끝까지 쫓아다니는 인조인간으로 등장했었고, 첨단과학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영화 속 휴양지 ‘웨스트월드’는 마치 사람들 모두 비밀을 쉬쉬하는 수리마을을 떠올리게도 한다. 억지 비유일 수도 있겠으나, <괴시>의 용돌이 역시 <이색지대>의 인조인간 율 브리너처럼 포기를 모르는 좀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시체를 다시 깨어나게 만든 것은 과학 실험 때문이다. 해충을 퇴치하는 초음파를 연구 중인 실험실에서 발생시킨 초음파가 시체의 신경을 건드려 부활시킨 것이다. 게다가 그 이전부터 수리마을에는 기형아가 발생한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과학자들은 이를 묵살해왔다. 좀비 창궐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된 주인공이 실험실을 찾아가 “사람 잡는 기계를 당장 꺼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를 그저 미친 사람취급하며 외치는 “우리는 과학자에요!”라는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보통 좀비 영화에는 그 발생 원인에 대해 탐색하는 경우는 드문데, 신종 바이러스 문제와 결합하여 백신까지 만들어낸 <월드워Z>처럼 <괴시> 역시 원작의 설정처럼 환경파괴 문제로 나아간다. <괴시>의 초음파 실험실에 미국인 과학자가 있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 괴물 >(2006) 도입부에서 유독성 화학물질을 아무런 죄책감없이 한강에 흘려보냈던 미국인 장교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괴시>의 초음파 실험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선의로 시작한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괴시>의 강범구 감독은 범죄 액션영화 < 북극성 >(1962)으로 데뷔한 뒤 황해, 김지미 , 박노식 주연 < 검은 꽃잎이 질 때 >(1963), 인기 가수 남진 주연 < 울려고 내가 왔나 >(1967), 남궁원 주연 < 국제 암살단 >(1971) 등 반공과 첩보 소재가 가미된 액션영화들을 주로 만들며 흥행 감독으로 인정받아왔다. 연출 경력의 후반기에는 < 일대영웅 >(1973), < 풍운의 권객 >(1974), < 사망탑 >(1980), < 몽녀한 >(1983) 등 대만이나 홍콩과의 합작영화들을 여러 편 만들며 실험성이 돋보이는 액션과 공포영화에 더욱 치중했다. <괴시>의 경우 원작이 된 해외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는 등 한국 장르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뚜렷한 자기만의 세계를 일군 감독은 아니지만, <괴시>를 비롯해 크리처 무비 <몽녀한> 등 그가 아니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들로 한국 장르영화의 외연을 의미있게 넓힌 감독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 괴시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그리피스가 도착하긴 했지만 영화는 아직 짧은 단편영화의 상영시간 길이로 만들어지고 있었고 그게 성공하면 그걸 마치 연속극처럼 이어가는 연쇄극(Serial films)의 형식을 산업은 선호하고 있었고 대중들도 사랑했다. 그건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보였다. 극장에는 세 가지 형식의 프로그램 모델이 공존하게 되었다. 여러 편의 서로 상관없는 단편영화들을 묶은 프로그램. 성공적인 연쇄극 영화를 중심으로 다른 단편영화들을 함께 상영하는 동시상영의 프로그램. 그리고 한 편의 장편영화. 상영시간이라는 문제는 영화사에서 생각보다 꽤 까다로운 주제이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며, 미학의 문제이며, 영화라는 제도에 관한 학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사법은 상영시간에 관여하지 않았다. 프랑스 고몽영화사는 이 형식이 시장에서의 좀 더 안정적인 성공을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루이 푀이야드는 이때 영화에 도착했다. 아마도 연쇄극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시네아스트는 루이 푀이야드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의 바람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결혼을 하면서 중단되었다. 여전히 글 쓰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루이 푀이야드는 저널리스트가 되려고 했다. 그때 신문은 세상의 소식을 한 지면에 모으는 장소였고, 사람들은 거기서 정보를 얻고 세상의 사건을 알게 되었다. 1902년 파리에 온 그는 아무 것도 잘 되지 않았고, 글재주가 있었던 그에게 1905년 시나리오 제안이 들어왔다. 그런 다음 고몽영화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 영화는 복잡한 테크닉과 영화문법을 요구하지 않았다. 현장을 지켜보던 루이 푀이야드는 그 이듬해부터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루이 푀이야드 루이 푀이야드는 자신의 연출방법의 경제학을 발명했다. 소설을 쓰려고 했던 그는 시나리오에서 전체 씬을 쓴 다음 구체적인 디테일은 배우에게 맡겼다. 아마도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의 대사는 나중에 편집하면서 자막으로 작업해도 시간적으로 충분했다. 루이 푀이야드는 무성영화 초기의 연극적 거리와 깊이를 유지하는 고정된 화면의 롱 테이크를 받아들이면서 그 앞에서 배우들의 동선을 씬의 변화와 연결시켜 나갔다. 이 방법론으로 <판토마>를 성공시킨 루이 푀이야드는 <흡혈귀 강도단(Les Vampires)>를 만들었다. 제목으로 오해하지 마실 것, 이 영화는 당신이 떠올릴지 모르는 ‘뱀파이어’와 아무 상관이 없다. 파리에서 신출귀몰하면서 공포로 몰아넣은 강도단 ‘흡혈귀’와 그들의 정체불명의 지도자인 이르마 벱(Iema Vep)의 이야기. 영화에서 현상범으로 이르마 벱을 보여주면서 이 이름이 강도단 ‘흡혈귀들(Vampires)’의 철자를 멋대로 뒤섞은 애너그램 임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루이 푀이야드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단순하게 시작한다. 저널리스트인 필립은 취재를 하다가 그만 ‘흡혈귀 강도단’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 이야기에 파리의 대중들은 이상할 정도로 매혹되었다. 고몽영화사는 연달아 후속편을 원했고 루이 푀이야드는 연재소설을 쓰듯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아마도 그때 루이 푀이야드는 마치 마감에 쫓기듯이 개봉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거의 초인적인 노력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능이 발휘되었음에 틀림없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풀려나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흡혈귀 강도단’은 파리 건물들의 미로와도 같은 건축구조 속에서 종종 동선은 미로처럼 이어지고 그 속에서 경찰들과 신비로운 추적을 벌인다. 게다가 수많은 장면들을 파리의 길거리에서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찍어나가면서 일차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의 음울하고 불안한 공기가 그대로 담겨졌다. <흡혈귀 강도단>은 모두 열 개의 연쇄극(Episodes)으로 이루어졌다. 제 1화 <잘려진 머리>(1915년 11월 13일 개봉, 상영시간 33분), 제 2화, <살해하는 반지>(1915년 11월 13일 같은 날, 15분), 제 3화 <붉은 암호>(1915년 12월 4일, 39분), 제 4화, <유령>(1916년 1월 7일, 30분), 제 5화 <죽은 자의 탈옥>(1916년 1월 28일, 35분), 제 6화 <최면을 거는 눈>(1916년 3월 24일, 54분), 제 7화 <사타나스>(1916년 4월 16일, 46분). 제 8화 <천둥의 주인>(1916년 5월 12일, 52분), 제 9화 <독살범>(1916년 6월 2일, 48분), 제 10화 <피로 물든 결혼식>(1916년 6월 30일, 60분) 뮈지도라와 장만옥 여기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는 ‘흡혈귀 강도단’을 이끄는 지도자 이르마 벱을 연기하는 뮈지도라이다, ‘뮤즈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뮈지도라(Musidora)라는 예명을 지은 잔느 로끄는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와 페미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19세기에 태어나서(!) 연극배우가 되었다. 뮈지도라는 연극 무대에 섰고, 신비로운 눈 화장을 하고 부모에게 배운 대로 망설임 없는 발언을 하면서 순식간에 파리 문화에서 노동계급 운동의 아이콘이자 부르주아 문화의 팜므 파탈이 되었다. 그래서 <흡혈귀 강도단>에서 뮈지도라가 연기하는 이르바 벱과 그녀의 일당들이 부자들의 집을 털고, 종종 과격한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은 테러로 보였고, 경찰들을 골탕 먹이는 장면들은 사법과 싸우는 모습으로 읽히기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흡혈귀 강도단>이 담고 있는 신비로움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은 비평이 아니라 한 편의 영화일 것이다. 비평가로 시작해서 감독이 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1996년 <흡혈귀 강도단>에 오마주를 바치는 영화 <이르마 벱>을 찍었다. 놀랍게도 뮈지도라가 한 역할을 여기서 홍콩배우 장만옥이 한다. 그때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장만옥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의 신비로운 감정으로 검은 라텍스 복장을 하고 파리의 옥상에 올라가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장만옥을 찍었다. 몇몇 장면에서 맛보는 설명하기 힘든 황홀감. 그렇게 영화사의 순간들은 섬광처럼 오가고 또 오간다.